# 20
#20. 17살입니다(6)
가족들이 모두 모인 거실엔 한동안 침묵만이 감돌았다.
하지만, 무겁진 않았다.
어머닌 한결 개운하다는 얼굴이셨고, 아버진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셨다.
형이야 시종일관 눈알을 굴리며 상황 파악하느라 분주했고.
나는······.
할 말이 없어 가만히 있었다.
결국, 침묵을 깬 건 아버지셨다.
“지금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네. 도준이가 뭐가 어쨌다고?”
아버지는 눈을 가늘게 한 채 도통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물으셨다.
대답은 어머니께서 하셨다.
아니, 그러려는 순간 전화가 울렸다.
뭔가 중요한 얘기를 하시려던 참이었는지, 눈살을 살짝 찌푸리셨다.
만일 다른 사람 거였으면 눈총이라도 주실 기세셨지만, 우습게도 지금 울리고 있는 건 어머니 핸드폰이었다.
한숨을 내쉬며 백에서 핸드폰을 꺼내신 어머니. 그리고 액정화면을 확인하신 순간 눈이 커지셨다.
“아, 아빠?”
외할아버지께 온 전화인 모양이다.
흠, 전화하시기엔 좀 늦은 시간인데······.
거실 한쪽 벽면에 걸려 있는 시계를 힐끗 바라보니, 벌써 밤 11시다.
일찍 주무시고 일찍 일어나시는 외할아버지께서 전화하실만한 시간은 절대 아니다.
이상하단 생각에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이내 눈을 부릅떴다.
설마?
서둘러 시선을 어머니께로 돌렸을 때였다.
“주무시지 않고 왜······. 윽!”
얼마나 크게 고함치시는지, 수화기 너머에서 외할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올 정도였다.
- 시끄럽고! 당장 와!
“아이참. 아빠, 지금 이 시간에 어딜 가요? 아빠···아버지도 얼른 주무셔야 하고 저도······.”
- 이년이! 지금 반항하는 거야? 김 서방 잘리는 꼴 보고 싶어?
“하아. 진짜 너무하네. 아빠, 지금 하나밖에 없는 딸한테 협박하시는 거에요?”
어머닌 일어나시며 나와 형의 눈치를 보며 돌아서셨다.
그러곤 안방으로 들어가셨다.
그 뒤를 아버지가 주춤주춤 일어나 따르셨고.
탁.
안방 문이 닫히자, 형이 소파에 퍼져버렸다.
“와아! 이게 뭔 일이다냐! 난 숨 막혀 죽는 줄 알았다.”
동감이다.
하지만, 일부러 맞장구를 치진 않았다.
그랬다간 우리 형님께서 분위기 파악 못 하고 입을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
“야! 김도준!”
그것도 아닌가?
아, 우리 형님한텐 굳이 맞장구 따윈 필요없는 거구나.
“왜?”
“너 무슨 정신으로 그런 짓을 한 거냐!”
“뭐를?”
“몰라서 물어? 너 인마! 기타······.”
“아하! 누군가 했더니, 우리 자상하신 형님이었구나.”
“자, 잠깐만!”
소파에서 주춤주춤 물러나며 손을 내젓고 있는 형을 향해 눈을 부라리다가 이내 한숨을 폭 내쉬었다.
형한테 무슨 잘못이 있겠어?
형도 형 나름대로 내 걱정을 해서······.
“아이씨! 그럼 어떡해! 자칫하면 유학길 막히게 생겼는데!”
······그럴 리가 없지.
후우. 그래, 저래야 우리 형답지.
맞다. 사람이 변하면 죽을 때가 된 거라지, 아마.
난 되도록 우리 형이 오래오래 살았으면 좋겠다. 벽에 똥칠만 하지 않는다면.
“그 점은 나도 미안하게 됐네요.”
픽 하고 웃으며 대꾸하자, 형이 눈을 껌뻑거린다.
그러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얘기한다.
“그, 그 말 뭐야? 나, 나······. 유학 못 가게 된 거야?”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야 나도 모르지. 외할아버지께서 어떻게 나오시느냐에 달린 거 아니겠어?”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 말이 없던 우리 형님. 그분께서 물으셨다.
평소 때와 달리 진지한 음성으로.
“넌, 어쩔 생각인데?”
의외네.
언제나 마이페이스이신 우리 형님께서 내 생각을 다 묻고.
“나?”
“그래. 네 인생이잖아.”
씁쓸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솔직히 잘 모르겠어. 딱히 뭐가 바뀐 건 없는데······.”
“없는데?”
“공부에 전념하는 건 좀 어렵겠다······정도?”
정말 많이 놀랐나 보다.
눈알이 튀어나올 정도로 눈이 커지더니 형이 내게로 바짝 다가와 앉았다.
그러곤 내 손을 꼭 잡고 간절함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하고 있다.
“도, 도준아. 나처럼 한심한 형이 말하긴 좀 뭐하지만, 그래도 그건 아닌 거 같다. 얀마! 생각해봐. 너 여태껏 얼마나 노력했어? 응? 그런데 그깟 기타가 대수냐? 그런 건 나중에 얼마든지 취미로 할 수 있는 거라니까?”
나야말로 놀랐다.
큿······. 형은 형이구나.
솔직히 감동했다.
그래서 그랬는지 모른다.
“혀, 형이 뭐 어때서?”
“어떻긴 뭐가 어때 인마. 너도 알 거 아냐? 한국에선 안 되겠으니까 유학이란 명목으로 도망가는 거. 근데, 넌 아니잖아? 얀마. 나도 좀 네 덕분에 어깨에 힘 좀 줘 보자. 대법관 동생. 좋잖아? 응? 그러니까, 딴 생각하지 말고······.”
그때 안방 문이 열렸다.
그리고 어머니의 음성이 들려왔다.
“어머. 우리 큰아들. 언제 이렇게 듬직해졌을까?”
천천히 거실로 걸어들어오신 어머니께선 형의 머리를 쓰다듬으셨다.
“그래도 너무 그렇게 걱정하진 말려무나.”
빙그레 웃으시며 말씀하셨다.
“이 엄마가 알아서 할 테니까.”
그때 어머닐 뒤따라 나오신 아버지께서 내게 물으셨다.
“도준아, 넌 어떻게 하고 싶니?”
뭐라 대답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한참이나 생각하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잘 모르겠어요. 아, 그렇다고 공부가 하기 싫다는 건 아니에요. 그렇긴 한데······.”
말을 차마 잇지 못하자, 아버지께서 담담한 어조로 얘기하셨다.
“김도준. 아빠 말 잘 들어.”
“예.”
“인생은 짧아. 그리고 만만치 않지. 한 가지만 파고들기에도 시간은 모자라고, 미친 듯이 아니 죽을 것처럼 매달려도 원하는 걸 이루기 힘든 게 인생이야. 자, 어쩔래?”
“······.”
“엄마한텐 얘기 들었다.”
아버지의 얘기에 절로 시선이 돌아갔다.
어머니께선 그저 말없이 미소만 짓고 계셨다.
“네 엄마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무조건 네 편이다. 무슨 말인지 알지?”
갑자기 뭉클해졌다.
그때 어머니께서 끼어드셨다.
“방금 외할아버지랑 통화했는데, 네가 당장 음악 그만두게 하지 않으면 연을 끊을 생각을 하라고 하시더구나.”
“아, 어머니 그······.”
“아직 엄마 말 안 끝났다.”
여전히 미소를 지우진 않으셨지만, 목소리엔 평소와 달리 단호함이 담겨 있었다.
“그래서 네 아빠랑 상의 결과. 결론을 내렸어. 네가 어떤 선택을 하든 우린 널 밀어주기로.”
“아······!”
한동안 거실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절대 가볍지만은 않은 침묵 속에서 나는 고심했다.
공부를 하면서 음악을 하라고 하면 못할 것도 없다.
그럼 분명 내가 생각해온 대로 법관이 되는 건 문제가 없을 거다.
노래방에서 쌓은 실력은 어디 가는 게 아니니까.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그땐 진짜로 음악은 취미로밖에 못하게 될 테다.
그래도 돼?
나 스스로 묻고 또 물었다.
희주의 생일날 밴드들과 합주했을 때 느꼈던 그 감각들.
HS 실용음악 학원을 처음 찾았을 때 탐을 두드리던 스틱의 느낌.
노래방에 갇힌 채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시간을 보내며 노래를 부르던 시간들은?
분명 처음엔 힘들었었다.
괴로웠다.
외로웠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꾹.
애초에 난 왜 거길 갔었지?
왜 평소에 스트레스가 쌓이면 노래방으로 달려가곤 했던 걸까?
그렇구나.
답은 이미 나와 있었다.
나는······.
“······실망시켜 드려 죄송합니다.”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차마 들지 못했다.
부모님께서 그동안 내게 얼마나 큰 기대를 해오셨는지 잘 아니까.
그래서 얼굴을 들지도 못하고 있을 때였다.
툭.
큼직한 손 하나가 머리 위에 떨어졌다.
스윽스윽.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에 고개를 쳐드니, 아버지께서 웃고 계셨다.
“널 잘못 키우진 않은 거 같구나.”
“아, 아버지······.”
말을 채 잇지 못하고 있을 때, 어머니께서 갑자기 분주하게 움직이시기 시작했다.
뭔가 싶어서 바라보니, 어느새 옷을 챙겨입으시곤 아버질 재촉하신다.
“뭐해요? 얼른 준비하지 않고.”
그제야 아버지께선 나갈 준비를 서두르셨다.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어딜···. 설마?”
어머니께서 활짝 웃으셨다.
하지만,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말투는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기다리고 있으렴. 엄마 아빠가 다 알아서 할 테니.”
그렇게 현관문을 나가시는 부모님이셨다.
***
그로부터 세 시간이 지난 후였다.
현관문이 다시 열리고······.
어머니께선 나갈 때보다 한층 더 환하게 웃으시며 들어오셨다.
아, 외할아버지랑 얘기가 잘 풀리셨나 보다 하고 생각한 나는 밝은 표정으로 다가갔다.
“외할아버지 화 많이 나셨죠.”
“그야 그렇지.”
외투를 벗으시며 어머니께선 소파에 몸을 던지시고, 피곤한 듯한 손으로 어깨를 주무르신다.
잽싸게 달려가 안마를 해 드리자, 한결 풀어진 얼굴로 손을 뻗어 내 손을 잡아오셨다.
“왜 걱정돼?”
“······아뇨.”
“넌 아무 걱정 마. 엄마만 믿으라고 했잖아.”
혹시나 싶어서 차마 묻지 못하고 있었는데, 저렇게 밝은 모습을 보여주시니 안심하고 물어도 되겠다.
“가셨던 일은 잘되셨어요?”
“응. 인연 끊고 왔어.”
아무렇지도 않게 하시는 얘기를 듣고 그런가 보다 하다가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미, 믿으라고 하셨잖아요!
목구멍까지 넘어오는 말을 애써 삼키고 있을 때, 어머니께서 고개를 돌리신다.
방에서 옷을 훌훌 벗어 던지고 팬티 바람으로 나오시는 아버지. 콧노래까지 부르며 화장실로 향하시는 모습에 기가 막혔지만······.
어머닌 그 모습이 여간 좋으신가 보다.
눈에서 하트가 나올 정도로 반짝이시며 말씀하신다.
“저이도 참. 그렇게나 좋을까?”
“예?”
“아, 네 아버지 오늘부로 잘렸거든.”
뭐지?
이 위화감은?
어머닌 외할아버지와 연을 끊으시고, 아버진 잘 다니시던 회사 그러니까 외할아버지의 회사에서 잘리셨단다.
그런데 왜 두 분 표정이 이렇게나 밝으신 거지?
그때였다.
털썩.
뭔가가 무너지는 소리에 돌아보니, 형이 바닥에 주저앉아 망연자실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휴우. 저럴 만도 하지.
그동안 세워두었던 원대한 계획. 유학 가서 누구의 참견도 받지 않고 띵까띵까 놀고먹겠다는 계획이 와장창 무너졌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어머닌 신경도 쓰지 않으시는 눈치셨지만.
“처음부터 이랬어야 했는데······.”
오히려 개운하다는 표정을 감추지 않으시는 어머니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