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
#18. 17살입니다(4)
최석진은 어지간한 실내 체육관만큼이나 넓은 거실을 서성이며 온갖 상상을 하는 중이었다.
‘흐흐흐. 새끼, 그렇게 잘난척하더니······!’
도준의 동갑내기 사촌으로, 어릴 때부터 사사건건 비교를 당하며 살아온 그는 김도준이란 이름 석 자만 들어도 속이 배배 꼬일 정도로 심사가 뒤틀려 있었다.
그럴 만도 한 게 이제껏 살면서 도준과 관련되어선 단 한 번도 좋은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으니까.
넌 왜 그러니? 도준이 하는 것 좀 봐라.
싸움을 했으면 도준이처럼 때려주기라도 할 것이지, 어딜 처맞고 들어와!
제발, 도준이 반만큼만 해라!
성적이 그게 뭐냐? 도준이 S대 갈 때, 창피하게 지방대 갈래?
하아, 도준이 보고 느끼는 거 없니? 내가 널 낳고 먹은 미역국이 아깝다. 너 때문에 아버님 뵙기가 죄송할 정도라니까.
도준이······도준이······도준이······.
그 망할 김도준!
제깟 놈이 잘나면 얼마나 잘났다고, 감히 자길 제치고 할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한단 말인가.
까득!
이가 갈린다.
원래대로라면 자신이 차지했어야 할 자리다.
할아버지의 무릎 위에서 재롱을 부려도 자신이 부렸어야 하고, 만 명이 넘어가는 그룹 임직원들을 손가락 하나로 부릴 수 있는 그 무소불위의 손바닥이 쓰다듬어야 할 머리도 자신의 머리였어야 한다.
그런데 그걸 놈이 모조리 차지했다.
그것도 무려 17년 동안이나.
겉으론 내색하지 않았지만, 아니 내색했다간 혼만 날 것 같아서 참고 또 참았지만, 언제고 한 번쯤은 갚아줄 생각이었다.
이제까지 당했던 것들을. 이자까지 듬뿍 얹어서.
하지만, 좀처럼 기회는 오지 않았다.
제기랄! 사람이 살다 보면 실수도 한두 번씩 하게 마련이건만.
늘 할아버지가 원하는 게 뭔지 알고 있다는 듯, 눈곱만치의 실수는커녕 단 한 번도 할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지 않은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건 고등학교에 올라와서도 마찬가지였다.
입학하고 이제 겨우 두 달이 지났을 뿐인데, 그동안 놈은 두 번이나 전교 1등을 차지해버렸다.
게다가 밝고 명랑한 얼굴로 항상 할아버지의 질문에 당당하게 대답하는 그 배포가 부럽기까지 하다.
자신은 언제나 할아버지 앞에만 서면 괜스레 주눅이 들고 어쩌다 한소리 들을 때면 오금이 다 저리는 판인데.
이게 다 도준이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는 자신이 들고 있는 핸드폰을 내려다보며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운이 좋았다.
학교에서 친구들이 한데 모여, 혀를 내두르며 탄성을 내뱉는 걸 그냥 지나치지 않은 덕분이었다.
설마하니 그 공부밖에 모르는 김도준이 기타를 치고 있을 줄이야. 그것도 수준급으로.
기타는커녕 음악이라곤 쥐뿔도 모르는 그가 봐도 하루 이틀 연습한 실력이 아니었다.
그래, 할아버지도 이걸 보시게 되면······.
‘틀림없이 화를 내시겠지.’
절대로 집안에서 딴따라 따위가 나오는 건 용납하지 않겠다며, 지난번 생신 때 단단히 이르시던 말씀을 다시 한 번 떠올리며 최석진은 초조한 심정을 달래었다.
‘그나저나 늦으시네.’
그때였다.
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할아버지께서 문을 열고 들어오셨다.
“아······!”
정확히는 항상 할아버지 옆에 붙어 다니는 남자, 이 실장이 문을 열고 있었다.
그리고 이 실장의 어깨를 빌린 채 축 늘어져 집안으로 들어서고 계신 할아버진 이미 만취 상태다. 얼마나 술을 드신 건지 얼굴이 불콰하다 못해 아예 눈을 감고 계셨다.
‘어, 어쩌지?’
자신의 계획과는 다르게 흘러가는 상황에 그는 안절부절못했다.
그러는 사이에 할아버지를 부축한 채 이 실장이 그의 앞을 지나쳐가고 있었다.
그러면서 한마디 하는 것도 빼놓지 않았다.
“어른을 봤으면 인사를 해야지. 쯧, 이러니 회장님께서 도준이만 찾으시지.”
고개를 내젓곤 위층으로 올라가 버리는 이 실장. 그의 한쪽 팔이 할아버지를 혹여 놓칠세라 꽉 붙들고 있었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최석진은 핸드폰을 부서져라 움켜쥐었다.
“큭!”
그래, 오늘만 날은 아니니까.
최석진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비틀거리며 이 실장에 기대어 방으로 들어가는 할아버지를 눈으로 뒤쫓으며 다시 한 번 이를 갈았다.
***
딸랑.
문을 열고 들어간 뒤, 그녀는 가만히 선 채 학원 내부를 한차례 둘러보았다.
이렇다 할 특징이 없는 대신 깔끔해 보이는 실내였다.
다만······.
공기 중에 섞여 콧속으로 스며드는 냄새.
어릴 때부터 숱하게 맡아온, 악기들에서만 맡을 수 있는 그 특유의 냄새에 그녀는 일순 학창 시절이 그리워졌다.
그래서인지, 방금까지만 해도 차가움만 가득했던 그녀의 눈동자에 아련함이 깃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그녀는 이내 옛 생각을 떨쳐버리곤 냉정한 얼굴을 되찾았다.
그때쯤 통로 양측으로 나 있던 문 중 하나가 열리며 남자 한 명이 걸어 나왔다.
일단 인상은 선하다.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짓고서 여유롭게 다가오는 남자의 모습에 그녀는 당장에라도 터져 나오려는 화를 애써 삭여야 했다.
‘저 얼굴로 우리 도준일······!’
한층 더 차가운 눈빛이 되었을 때, 남자가 다가오더니 물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그녀는 핸드백을 가슴에 껴안으며 바짝 고개를 쳐들었다.
“원장님 좀 만날 수 있을까요?”
어딘지 모르게 도도하게 느껴지는 말투에 남자는 가만히 그녀를 쳐다보다가 대답했다.
“접니다만.”
그런 그를 그녀가 똑바로 응시한다.
그러더니 불쑥 물었다.
“당신이군요?”
“예?”
남자가 그게 무슨 말인지 몰라 고개를 갸웃거릴 때, 그녀가 다시 말했다.
“우리 아들을 꼬드긴 사람이.”
의구심은 한층 더 깊어졌지만, 이번엔 불쾌함이 함께했다.
꼬드겨?
남자, 이학원의 원장이며 그동안 수많은 이들을 손수 지도하고 가르쳐 한 명의 제대로 된 뮤지션으로 만들어내온 강혁수로선 이보다 더 심한 욕은 없을 터였다.
왜냐면 그동안 단 한 번도 누군가를 꾄 적도 없었고, 이 바닥에서라면 심심치 않게 일어나는 크고 작은 사기사건에도 연루된 적이 없는 그였으니까.
언제나 정직하게, 오로지 음악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사람을 만나고 열정을 공유해온 그로서는 지금 들은 말은 도저히 그냥 지나치기 어려울 정도로 치욕적일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그는 얼굴에서 미소를 지우곤 굳어진 표정으로 입술을 달싹였다.
하지만, 그보다 앞에 있는 여자가 한발 빨랐다.
“저 도준이 엄마예요.”
순간, 강혁수는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정말 생각지도 못했으니까.
그저 멍해진 눈으로 여자, 도준의 어머닐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어딘지 모르게 도준을 닮았다.
아니, 도준이가 어머닐 닮은 거겠지만······.
아무튼, 그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곤 얘기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이 학원의 원장인 강혁수라고 합니다.”
자신의 이름을 밝혔음에도 도준의 어머닌 그저 고개만 끄덕거리는 걸로 인사를 대신하고 있었다.
그러곤 되물었다.
“우리 도준이한테 무슨 짓을 한 거죠?”
갈수록 첩첩산중이다.
도준이 학원을 나오기 시작한 지 며칠 되지도 않았다.
그런데 이런 반응이라니······.
이해가 가질 않으니 물어볼 수밖에.
“무슨 말씀이신 모르겠습니다. 도준이가 어떻다는 거죠?”
“제가 모를 줄 아나요? 당신······. 후우. 당신이 도준일 꼬셔서 기타를 가르친 거 다 알고 왔어요.”
강혁수가 대답 없이 가만히 듣고만 있자, 그게 할 말이 없어서라고 판단한 도준의 어머닌 계속해서 얘기하고 있었다.
밀어붙여야 한다고 느낄 땐 조금도 주저하지 않는 도준의 성격이 어디서 왔는지 알 것 같았다.
“저, 무슨 오해가 있으신 거 같은데······. 제가 도준일 만난 건 한 달도 안 됐습니다만.”
“······?”
의외였던지. 도준의 어머니가 눈이 커졌다가 이내 원상태로 돌아오더니 곧이어 믿기 어렵다는 눈빛을 해 보였다.
“지금 그 말을 저더러 믿으라는 얘긴가요?”
“믿지 못하신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사실입니다.”
“······.”
“뭐, 도준이가 집에 얘기를 하지 않은 이유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아시지 않습니까? 그 애가 남을 함부로 속일만한 아이가 아닌걸. 그러니, 나중에라도 물어보시면 다 드러날 일입니다. 그런데 제가 뭐하러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대꾸하지 않은 건, 강혁수의 말이 논리 정연해서는 아니다. 누가 뭐래도 자기가 배 아파서 낳은 자식이었다. 그런 자식을 모를 어미가 아니다. 도준이 말을 안 했다면 이유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던 탓이었다.
“후우. 그야 그렇죠.”
표정이 좀 전에 비해 한결 누그러진 걸 확인한 강혁수가 얘기했다.
“마침 잘 됐습니다. 안 그래도 언제 한번 뵙고 상의를 드릴까 하던 참이었으니까요.”
“예? 그게 무슨······.”
뜻밖의 상황전개에 살짝 당황해 하는 그녀를 강혁수가 5번 방으로 이끈 것은 잠시 후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강혁수는 소파에 다소곳이 앉아 있는 그녀에게 한 장의 종이를 내밀었다.
“이게 뭐죠?”
꾸깃꾸깃 구겨진 걸 정성껏 편 흔적이 보이는 종이가 오선지라는 걸 몰라서 물은 게 아니었다.
어째서 이걸 자신에게 보여주는지 의아해져서 물었을 뿐.
대답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도준이가 작곡한 겁니다.”
“그, 그런······.”
그녀는 그제야 관심을 가지고 오선지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충격은 배가 되어 돌아왔다.
“이걸······. 도, 도준이가 작곡했다고요?”
음악이라면 뼈에 새길 정도로 해왔던 그녀다.
그런 그녀가 아무리 대중음악이라지만, 한눈에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었다.
하루 이틀 공부해서 만들어낼 곡이 아니었다.
아니, 공부 따위로 작곡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이건 타고난 감각이 아니고선······.
여길 왜 찾아왔는지도 잊은 채 오선지에서 눈을 떼지도 못하고서 망연자실하고 있는 그녀의 귓가로 다시금 혁수의 음성이 날아든 것도 그때였다.
“그건 도준이가 작곡을 공부하기 시작한 지 보름 만에 만든 곡입니다. 그리고 이건 그 뒤에······.”
그가 내미는 또 한 장의 오선지를 낚아채듯 받아쥔 그녀는 정말이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이 입을 벌리고 있다는 걸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그만큼 작곡 스타일이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아니, 그 정도로는 설명하기 어렵다.
뭐랄까······. 그렇다. 이건 도마뱀에서 용으로 진화한 거나 마찬가지인 수준이었다.
“마, 말도 안 돼! 이걸 정말 도준이가 만들었단 말이에요?”
도저히 믿기 어렵다는 듯 물어오는 그녀에게 혁수가 씁쓸한 미소를 지우지 못한 채 얘기했다.
“천재죠. 저같이 평범한 사람은 아무리 발버둥 쳐도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그, 그런······. 우리 도준이가······. 천재? 아, 그···그야 당연히 내 아들이니까 그렇긴 할 테지만, 그래도 그렇지. 이런 곡을······. 하아, 정말 이젠 저도 모르겠군요. 대체 그 아인······.”
그때 혁수가 쐐기를 박듯 말했다.
“믿기 어려우시겠지만, 그거 다 버린 곡들입니다. 도준이가 쓰레기통에 던져둔 것들을 제가 다시 꺼낸 겁니다.”
“······!”
숨이 막혔다.
이런 곡들을 버렸다고?
경악한 그녀의 두 눈은 이제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만큼 커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