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갓싱어-14화 (14/260)

# 14

#14. 취미예요(6)

***

현란한 사운드의 향연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누가 들어도 신바람이 날 수밖에 없는 멜로디. 마치 청량음료를 통째로 들이붓는 듯한 키보드 연주가 호쾌하게 곡을 리드하는 동안 드럼, 기타, 베이스가 동시에 들어와 간헐적으로 치고 빠지며 적절히 녹아들고 있다.

아직 전주가 끝난 건 아니지만, 규철 역시 마이크를 가볍게 그러쥐었다.

수없이 연습하고 또 공연했던 곡.

퍼포먼스가 필요한 시점이다.

간단하면서도 다소 과장된 면이 없잖아 있는, 그럼에도 일순간 팬들을 열광케 하는 마법.

이제 자신이 나설 차례였다.

가볍게 발을 구르며 한걸음 나선 그가 소리를 내질렀다.

“Come ooooooon!”

그 순간, 키보드 혼자 날뛰던 전장 속으로, 깔짝깔짝 끼어들며 흥분을 애써 누르고 있던 전사들이 본격적으로 뛰어들어온다.

두그두그두그두그두그두그두그두그······.

드럼이 폭발하며 공기를 뜨겁게 달구고, 베이스가 묵직하게 땅을 울린다.

그 와중에 뿌연 먼지를 일으키며 평야를 내달리는 야생마처럼 기타가 불을 뿜기 시작했다.

‘뭐야? 생각보다 잘하잖아?’

물론 베이스도, 드럼도 잘 따라와 주고 있다.

키보드야 말할 것도 없었고.

그거야 당연하다면 당연한 얘기다.

그동안 해온 공연만 얼만데.

연습까지 따지면 합을 맞춘 것만 수백 번이다.

하지만, 기타가 이처럼 잘 따라올 거라곤 예상치 못했다.

규철은 본격적으로 노래를 부르기 전, 전주라는 짧기만 한 틈을 이용해 기타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리고 놀라고 말았다.

‘······!’

손가락이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엄청난 스피드다.

저 정도로 움직이려면 연습도 연습이지만, 무엇보다도 곡 자체가 머릿속에 완전히 틀어박혀 있지 않고선 불가능하다.

물론 테크닉이 부족한 건지, 조금은 서툴고 거칠다.

그걸 감안해도 저 나이대에선 볼 수 없는 솜씨임에는 틀림없다.

더구나 갈수록 빨라지고 있다.

‘말도 안 돼!’

원래대로라면 저렇게 기타 혼자 치달리면 곡에서 이탈할 수밖에 없다. 당연히 공연은 엉망이 될 테고.

한데, 실제론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고 있다는 게 의아할 따름이다.

단지 기타만 빠를 뿐이다.

그게 규철이 경악하는 이유였다.

금방이라도 비명을 내지를 것 같은 표정이 되었던 그는 이내 알 수 없는 위화감에 휩싸였다.

긴장한 채 주위를 살피며 귀를 기울이던 그는······.

‘뭐, 뭐야?’

흐름이 달라졌다.

분위기라고 할까, 공기 자체가 아까랑 완전히 달라진 것이다.

그 이유가 뭔지를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기타 때문이다.

정확히는 기타의 기세가 압도적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도 그렇지.

‘죽어가고 있다고?’

어느새 베이스 소리는 묻힌 지 오래고, 연주를 리드해야 할 키보드마저 서서히 말라 죽어간다.

그나마 드럼만이 간간이 탐을 때려대며 간신히 버티고 있을 뿐. 모든 섹션이 먹혀버렸다.

오직 기타만 살아서 날뛰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합주 자체가 붕괴되고 만다.

단 하나의 악기가 모든 걸 집어삼켜 버린 상황.

원래대로라면 밴드의 멤버로선 실격이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은 어디까지나 다른 섹션들의 역량이 따라오지 못해서 생기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누구의 잘못인가는 명백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겨우 전주다.

길어봐야 몇 분.

한데, 그 짧은 시간 만에 이런 일이 벌어졌다?

다른 사람이 얘기했으면 코웃음을 쳤을 거다.

“큭!”

하지만, 눈으로 직접 보고 있으니 웃음 따위가 나올 리가 없었다.

이래선 그야말로······.

사신!

규철은 자신도 모르게 머릿속으로 낫을 들고 있는 검은 실루엣을 떠올리곤 마른 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아, 아차!’

간신히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전주가 끝나버렸다.

들어갈 타이밍을 놓쳐버린 것이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뛰어들기엔 너무 늦은 상황.

그가 낭패감에 물들어 입술을 깨물고 있을 때였다.

드러머인 형수가 스틱을 번쩍 치켜들더니 허공에서 능수능란하게 놀리곤 다시 한 번 전주를 돌리기 시작했다.

다행히 눈치를 챘는지 키보드를 비롯한 다른 악기들도 잘 따라붙었다.

어찌나 자연스러운지, 원곡을 모르는 이들이라면 원래 이런 곡인지 알 정도다.

꾹.

마이크를 꽉 쥐며 그는 전의를 다졌다.

이번엔 놓치지 않는다.

그러기 위해선 우선은 다른 건 신경 쓰지 말고 오로지 타이밍에만 신경 써야 한다. 두 번의 실수는 없어야 하니까.

두그두그두그두그두그두그두그두그두그······.

그러는 동안에도 지금 이 공간 안에 존재하는 모든 소리를 압살하는 기타 속주는 계속되고 있었다.

‘왔다!’

이번에는 규철도 때를 놓치지 않고 적시에 끼어들었다.

그가 피를 토하듯 노래하기 시작했다.

“Removed the rocks which hide the cave.”

- Removed the rocks which hide the cave.

동굴에 숨겨진 바위를 치우고 나자.

Unseeing and dark along my way.

지독한 어둠이 길을 뒤덮었고.

I must go on clever and bold before a last hail.

나는 현명하고 용감하게, 마지막 부름 이전에 나아가야만 했다.

“와아아아아아아아아!”

함성이 들려오며, 파티장이 일제히 끓어오르고 있다.

그 모습을 보면서 규철은 그제야 안정을 되찾았다.

그리고 곧바로 불타올랐다.

한편으론 다시는 이런 실수 따윈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래서인지 그는 평소와 달리 적극적으로 덤벼들었다.

정말이지 목이 터져라 노래했다.

- Ride brave the blue skies and spell my eyes.

용감하게 푸른 하늘을 타고 내 눈에 주문을 걸며.

Fly beyond these cliffs ride on the wind.

바람을 타고 이 절벽 너머를 활강하는.

The wisdom of the kings.

왕의 지혜여.

하지만, 결연한 의지와는 달리 그 다짐은 오래지 않아 무너졌다.

간주가 들어가는 타이밍.

역시나 이번에도 현란하고 화려한 키보드의 연주가 공간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이때만 해도 괜찮았다.

그 잠깐의 텀을 이용해 나머지 악기들이 잠시 숨을 고르고 난 후, 다시금 일제히 터져 나온 시점까지만 해도 규철은 전혀 예상치 못했다.

설마하니 객원 멤버라고 부르기도 어려운, 아직 십대에 불과한 고등학생의 연주가 그런 식으로 변이를 일으키리라곤 상상조차 못했으니까.

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

미친 듯이 내달리기 시작하는 기타 속주.

그럼에도, 리듬은 살아 있었다.

무엇보다도 원곡과 미묘하게 다르다.

그러면서도 모든 음을 서서히 잠식하는가 싶더니 어느새 왕처럼 군림하며, 아니 사신처럼 모든 음들을 압도하기 시작했다.

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

그리고 마침내 사신이 낫을 치켜들었다.

지이이잉!

원곡에도 없는 비브라토 소리가 여섯 줄의 현을 긁으며 포효하는 순간, 사신의 낫이 목 위로 떨어지는 착각이 들었다.

그 찰나의 순간, 규철은 깨달았다.

전주 때부터 느껴지던 위화감의 진정한 정체를.

빠르다!

빠른데, 빠르지 않다!

이 기묘한 연주에 그는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그렇게 느낀 것은 규철만은 아니었나 보다.

이미 모든 악기는 멈추어 있었고 다들 멍하니 기타만 바라보고 있다.

이제 연주를 이어가고 있는 것은 오로지 기타뿐.

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

엄청난 속도로 질주하고 있었다.

꿀꺽!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키고만 규철. 그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저, 저게 가능해?’

프렛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코드를 짚어나가는 손가락.

그와는 전혀 다른 생물이라도 되는 듯 거침없이, 그러면서도 오른손에 쥔 피크는 미친 듯이 현 위에서 날뛰고 있다.

이것만 해도 놀라운 일인데.

규철은 알아차렸다.

‘쪼갰다?’

단순히 빠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미묘하게 다르면서도 오히려 원곡을 능가하는 연주. 그 마법의 비밀을 엿본 것이다.

아니, 엿보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지금 눈앞에서 직접 보여주고 있었으니까.

원곡을 쪼개고 쪼개, 다시 재구성하고 그걸 능란하게 연주해내는······. 그것도 공연 도중 즉석에서.

이러니 저렇게 엄청난 속주에도 불구하고 곡 자체가 무너지지 않는 거겠지.

이런 건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다.

이래선 커버나 리메이크란 표현만으론 부족하다.

진화라는 말이 아니고선 뭐라 표현할 수 있을까.

그야말로 신들린 연주.

이제 더 이상 그는 아무런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머릿속은 이미 새하얗게 물들어 있었고, 홀린 듯 기타연주에 빠져 넋을 잃고 바라만 볼 뿐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어떻게 지났는지도 모른 채 망연자실 서 있을 때였다.

탕!

둔탁하면서도 강렬한 소리 한방에 그는 꿈에서 깨어났다.

다른 멤버들도 마찬가지인 듯, 정신을 차린 베이스와 키보드가 이끌리듯 드럼 소리에 맞춰 연주를 재개한 것이다.

“L, Lost······.”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벌려 간신히 음을 끌어올렸다.

“Lost in a dream I'm under the spell Of······.”

뭐든 시작이 어려운 법이다.

탄성이 붙은 덕분인지, 규철 또한 음을 놓치지 않고 순탄하게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곡은 이미 후반부를 넘어 종반으로 치달았다.

이제 마지막만을 남겨놓고 있었다.

“······The wisdom of the ki----------ngs”

기타 음에 휘둘려 정신없이 끌려다니는 동안 순식간에 연주가 끝나버린 것이다.

그리고 남겨진 것은 납덩이처럼 무거운 침묵뿐이었다.

“헉! 헉! 헉!”

정적에 휩싸여 있는 파티장 안에 한 사람의 거친 숨소리만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기타를 쥐고 있는 손은 덜덜 떨리고 있었고, 숙인 고개는 언제까지고 들리지 않는다. 대신 그리 길지 않은 머리칼에선 쉴 새 없이 땀방울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그처럼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힘겨운 모습으로 거칠게 숨을 몰아쉬던 그는 어느 순간 멈칫하더니 서서히 고개를 쳐들었다.

그 눈동자가 파티장을 훑어나가다가 어느 한 지점에 이르러 멈추더니 그대로 그 자리에 둥지를 틀 듯 머물렀다.

마침내 그의 입술이 열렸다.

“생······.”

모든 걸 태워버린 탓인 걸까? 메마르고 갈라진 목소리가 흘러나오다 뭔가에 막힌 듯 멈추었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다시 흘러나왔다.

“생···일.”

그제야 규철은 목소리가 향하는 곳이 어디인지 눈치챘다.

파티장 한가운데 서 있는 소녀. 그녀의 눈동자 역시 끊임없이 흔들리며 무대 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기타리스트의 음성이 다시금 들려온 것도 그때였다.

“······축하해.”

순간 거짓말처럼 정적이 깨지며, 함성이 터져 나왔다.

***

얼떨떨한 기분으로 손을 내려다보았다.

지금 내가 뭘 한 거지?

분명 처음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을 때만 해도 지극히 평범한 연주였는데······.

따라가곤 있었지만, 벅찬 것도 사실이었다.

솔직히 말해, 몇 번이나 틀렸는지 모른다.

다른 이들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지만, 나만은 확실히 알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노래방에서 악보만 해도 수도 없이 보았고 또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이 부른 노래였으니까.

역시 실전은 다르구나 하고 실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전주가 끝났을 때 싱어가 음을 놓쳤다.

무슨 일인가 싶어 주위를 살폈지만, 원인을 파악할 순 없었다. 서툴기만 한 나로서는 연주를 따라가기에도 벅찼으니까.

하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역시나 드러머의 역량은 내 예상대로였다.

그는 이런 상황조차 별거 아니라는 듯 능숙하게 처리해 냈던 것이다.

누구도 알아채지 못할 만큼 자연스럽게 전주를 한 번 더 반복하고, 싱어가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들어올 수 있도록 유도하기까지 했다.

이윽고 보컬이 앰프를 통해 울려 퍼지고, 기분 좋은 합주가 이어졌다.

난생처음 밴드와 함께 하는 연주.

나로서는 신이 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적어도 나보단 경력이 오래된 베테랑들과 함께다.

게다가 처음 이곳에 들어섰을 때 이들을 평가절하했던 걸 정정해야 할 정도로 이들의 연주실력은 탁월했다.

그렇다.

누구나 옷에 맞지 않는 옷을 입으면 어색할 수밖에 없듯, 파티장에 불려 와 평소엔 연주는커녕 잘 듣지도 않던 OST 같은 곡들만 연주하고 있었으니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할 수밖에.

속으로 웃음이 났다.

왜?

너무 좋아서.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내가 무슨 짓을 해도 저들이 다 커버해줄 거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 순간이었을 거다.

갑자기 몸이 뜨거워지고, 눈앞에 악보가 어른거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든 것은.

아니, 진짜로 그렇다는 건 아니고. 굳이 표현하자면 느낌이 그렇다는 얘기다. 실제론 머릿속에 The wisdom of the kings라는 곡을 이루는 음표 하나하나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거렸다는 표현이······.

하아, 역시 이것도 제대로 된 표현이라고 보긴 어렵겠다.

실제로 보인다는 것도 아니고 머릿속에 그려진다는 것도 아닌, 그저 느낌일 뿐이니까.

뭔가 간질간질한, 그러면서도 실재하는 듯 실재하지 않는······.

아, 모르겠다.

아무튼,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 그 음표들이 마치 날 유혹하는 듯 느껴졌다는 거다.

너무 오래 갇혀 있었나?

혹시 내가 미친 건 아닐까, 겁이 덜컥 났다.

그럼에도, 손은 그 음표들이 이끄는 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왼손은 내가 느끼지도 못할 만큼 빠른 속도로 코드를 잡아가고 있었고, 오른손에 쥔 피크는 부러지기 직전까지 현을 뜯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느꼈다.

음이 달라지고 있었던 것이다.

어느 시점에선가 내가 치고 있는 기타 음들이 이전부터 알고 있던 원래의 곡에서 이탈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크게 벗어난 건 아니었고, 달라진 게 이거라고 콕 집어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만 달라진 음들.

뿐만 아니라 조금 더 시간이 지나자, 이젠 그 음들이 분열까지 하기 시작했다.

머릿속에선 무수히 많은 음들이 쪼개지고 또 쪼개졌다가 다시 합쳐지길 반복했고, 그 결과는 초 단위로 신경을 타고 이어져 손을 움직이게 했다.

그때부턴 정신없이 내달렸다.

그저 머릿속에서 지시를 내리는 대로, 멋대로 움직이고 있는 손이 이끄는 대로.

그럼에도, 기뻤다.

조종당한다는 느낌?

그런 위화감 따윈 없었다.

오히려 희열에 가득 차서 머리가 하얗게 타오르는 기분이었다.

가슴속에선 끓어 넘치다 못해 넘실거리는 열기로 가득해 금방이라도 심장이 터질듯했다.

그렇게 얼마나 연주를 이어간 걸까.

어느 순간, 곡이 끝났다.

“후욱! 훅!”

당장에라도 목구멍을 통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거칠게 날뛰는 심장.

그 두근거림은 잔향처럼 남아 여전히 내 머릿속을 쾌락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그래서였을 거다.

고개를 숙인 채 여운을 즐겼다.

하지만, 곧 알게 되었다.

여운 따위가 아니다.

갈증이다.

몸이 덜덜 떨리고 있었고, 다리엔 힘이 풀려 금방이라도 주저앉아버릴 것 같았지만 계속해서 나 스스로가 요구하고 있었다.

이대로 멈추고 싶지 않아.

좀 더.

좀 더.

좀 더 즐기고 싶어!

강렬한 욕구가 온몸을 잠식하고, 아직도 벌벌 떨리고 있는 손이 다시금 기타를 잡아갈 때였다.

단지 시간이 흐른 덕분일까.

그것도 아니면 몸이 식은 탓인지는 몰라도 흐릿하던 눈앞이 서서히 맑아지는 듯하더니 이내 의구심이 치솟았다.

아! 나 지금 어디에 있는 거였더라?

그 순간, 머리에 찬물이라도 끼얹은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붕 떠있던 느낌이 사라지고, 이내 현실감이 돌아오는 감각. 그제야 나는 알아차렸다.

이곳이 어디인지.

그리고 내가 왜 여기 서 있는지를.

무겁게 느껴지는 고개를 억지로 쳐들었고, 멍하니 나만 바라보며 아무런 말도 없이 서 있는 모두를 볼 수 있었다.

그 속에서 희주를 발견한 것도 그때였다.

아, 그랬지.

오늘은 그녀의······.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생···일 축하해.”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쥐어짜서, 축하 인사를 건네고 난 뒤 비척거리며 무대에서 벗어나려 했다.

“자, 잠깐만!”

누군가 날 불러세우기에 돌아보니 보컬리스트였다.

“아!”

뒤늦게 나는 아직도 내가 기타를 메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몇 번인가의 헛손질 끝에 벗어서 내어주곤 고개를 숙여 보였다.

사과 한마디쯤은 하고 싶었는데, 좀처럼 나오질 않았다.

말할 기운조차 남아 있지 않아서.

그런 내게 그가 물어왔다.

“고등학생이지?”

그는 자신이 반말을 하고 있다는 것도 느끼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나이가 많고 적고를 떠나 초면에 내가 그에게서 반말을 들을 까닭은 없었지만······.

뭐, 지금의 나도 힘들긴 마찬가지니까.

이해된다.

아, 합주라는 게 이렇게나 힘든 거구나.

아무튼, 서로 비슷한 상황이니 그걸로 퉁치기로 했다.

천천히 입을 벌려 다소 힘겹게 대답했다.

“······예.”

그가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하더니 불쑥 물었다.

“너, 우리 밴드에 들어올 생각 없냐?”

느닷없는 일격이었다.

잠시 멍해져서 그를 바라보다가 미소를 베어 물었다.

그리고 천천히 숨을 마시고, 도로 내뱉었다.

적어도 제대로 말할 정도의 힘만큼은 되찾고 싶어서.

그렇게 몇 차롄가 숨을 고르는 동안, 그는 기다려주었다.

한참 만에 조금이나마 기운을 회복한 뒤에야 대답할 수 있었다.

“그건 좀 힘들겠네요.”

아쉬운 건지, 받아들이지 못하는 건지. 여전히 물러나지 않는 그에게 다시 한 번 얘기했다.

“음악······.”

“······?”

“취미로 하는 거라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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