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
#12. 취미예요(4)
“응?”
뜻밖의 얘기였나 보다. 어머닌 잘못 들은 게 아닌가 하는 눈빛이 되어 날 바라보시고 계셨다.
살짝 불안했지만, 말한 김에 밀어붙여야 한다고 느꼈다.
“그냥 학원만 다녀도 될 거 같아서 그래요.”
“학원은 싫다며 과외 붙여달라고 한 건 아들이었잖아.”
“그게······. 막상 해보니까, 너무 효율이 떨어진다 싶어요.”
“그래?”
“예. 실은 제가 고3 과정까지 전부 끝냈거든요.”
“······무슨 말인지, 엄만 잘 못 알아듣겠네? 지금 네 얘긴, 그러니까 고3 때까지 해야 할 공부를 이미 다 해놨다는 말이니?”
“국·영·수는요.”
어머니께선 멍한 표정으로 한참이나 날 바라만 보셨다.
그러더니 활짝 웃으며 날 꼭 끌어안으신다.
으으, 살짝 오그라들긴 하는데, 어쩔 수 없지.
나 역시도 어머닐 가볍게 안아 드렸다.
“장하네, 우리 아들. 진짜 장해.”
“뭘요. 어차피 해야 할 공부 미리 좀 한 걸 가지고요.”
“호호호. 겸손하기도 하지, 내 새끼.”
공부하기 싫어서 꼼수 쓰는 게 아닌가 한 번쯤은 의심할 만도 한데, 어머닌 전혀 그런 기색이 없으셨다.
그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만족한 얼굴로 웃기만 하신다.
“그래서 학원만 다녀도 충분하다는 얘기인 거니?”
“예. 괜스레 큰돈 들여가며 과외까지 할 필요는 없을 거 같아서요.”
“혹시 돈 때문에 그러는 건 아니고?”
“아니요. 사실 학원도 다닐 필요가 있나 싶긴 한데, 수능 보려면 국·영·수 말고도 사탐이라든가 과탐 같은······. 해야 할 공부가 꽤 되잖아요. 그런 건 아무래도 혼자 하는 것보단 학원 다니는 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지 싶어서요.”
“그럼, 차라리 과목 바꿔서 과외 선생님 붙여줄까?”
“아뇨. 굳이 그럴 필요는 없을 거 같아요. 한국사나 제2외국어도 거의 끝내놓은 상태라서, 탐구 쪽 영역만 좀 보강하면 되는데 과외까지는 좀······. 그냥 학원만으로도 충분해요.”
“어머나, 우리 아들 진짜 대단하다. 언제 그렇게 공부했대? 하여간 내가 아들 하나는 잘 키웠다니까.”
흠, 한국사랑 제2외국어를 거의 다 끝낸 게 아니라 완전히 마스터했다는 것까지 알면 기절초풍하시겠네.
뭐, 노래방에 있을 때 탐구 쪽 과목의 교재들이 1학년 거밖에 없어서 다 못 끝낸 게 아쉽긴 하지만.
그래도 과외는커녕 학원조차 다닐 필요가 없다.
앞으로 남은 시간을 생각하면 혼자 해도 충분히 할 수 있으니까.
솔직히 수능에 대한 부담은 거의 없는 거나 마찬가지인 상태. 지금 당장 자퇴를 하고 검정고시를 볼까도 생각해봤을 정도다.
당연히 지금 어머니께 드리는 얘기는 사실이 아니다.
학원이란 건 맞지만, 어머니께서 생각하시는 그런 학원이 아니란 걸 아시면 어떤 반응을 보이실지······.
하아, 난생처음 부모님을 속이고 있는지라 마음이 걸쩍지근하지만, 뭐 어쩌겠는가?
악기는 익히고 싶고, 말해봐야 허락은 안 해주실 테니 이렇게라도 하는 수밖에.
“꼭 S대 갈 테니까, 혹여라도 걱정 마시고요.”
결과적으론 원하시는 대학에 들어갈 생각이니 그나마 죄책감은 덜한 편이지만 말이다.
“그럼 내일 엄마랑 학원 알아보러 다닐까?”
어?
이거 뜻밖의 타이밍에서 어그로가 튀는 거 같은데?
잘 나가다가 웬 봉변인가 싶어서 얼른 손사래를 쳤다.
“아뇨! 제가 알아놓은 데가 있어요. 치, 친구 삼촌이 하시는 학원인데, 거기 강사진이 끝내준다고 하더라고요. 게다가 그리 비싸지도 않고······.”
“어머 그러니? 거기 어딘데?”
“며, 명진 학원이라고. 학교에서 가까운 곳에 있어요.”
미리 생각해둔 대로 얘기하자, 어머닌 조금도 의심하지 않으신다.
“그럼 내일 엄마가 과외 선생님께 전화할게. 아, 참! 학원비는 얼마니?”
“사, 삼십만 원이요.”
아, 진짜 찔린다.
연습실 빌리는 비용을 이런 식으로 해결하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뭐,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나쁘게만 생각지 말자.
공부야 어차피 하는 거고, S대에 입학하겠다는 목표도 여전하니까. 그래, 달라진 건 없다. 그저 스트레스 푸는 데 필요한 비용을 타 쓴다고 생각하면 되는······. 하, 전혀 도움이 안 되네.
여전히 죄책감이 가시질 않는다.
차라리 솔직히 말씀드릴까 하다가 이내 속으로 고개를 내젓고 말았다.
***
종례까지 모두 마치고 나서 학원으로 가기 위해 자리에서 막 일어섰을 때였다.
교실이 좀 소란스러워서 둘러보곤 인상을 찌푸리고 말았다.
아, 진짜. 쟨 또 왜 온 거냐.
남학생들이고 여학생들이고 간에 다들 눈을 빛내고 있다.
남자애들은 흑심이 가득한 눈빛이고, 여자애들은 선망 어린 눈빛이다.
하긴 그럴 만도 하지.
“김도준!”
희주가 좀 예쁘게 생기긴 했지.
집안도 빵빵···. 아니, 대한민국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고.
S그룹 회장님 손녀니 말 다 했지. 그것도 하나밖에 없는.
집안 대대로 여아가 귀하다나?
믿기 어려운 일이지만, 실제로도 S그룹 직계 중에 손녀는 그녀 하나다.
그러니 온 집안의 사랑을 몽땅 독차지한 거겠지만.
“할 말 있으면 전화로 하면 되지. 뭐하러 오냐?”
그것도 하필이면 끝나는 시간에 딱 맞춰서.
“내 발 가지고 내가 오겠다는 데 무슨 상관?”
상관있지.
그 오겠다는 곳이 내 앞이니 문제지.
목구멍까지 넘어오는 말을 도로 삼키며 가방을 둘러멨다.
“그래서, 오늘은 무슨 일인데?”
희주는 대답 대신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금박이 박혀 있는 봉투. 예사롭지 않아 보이는 봉투를 받지는 않고 이게 뭔데? 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니 그녀가 억지로 내 손에 쥐여준다.
“뭐, 꼭 오라는 건 아니고.”
“대체 뭔데······.”
봉투를 열어보니, 초대장이다.
아, 깜빡했다.
젠장. 또 올 한해 달달 들볶이게 생겼다.
잠시 초대장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안다.
희주가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 쯤은.
유치원 때부터 이어져 온 인연.
초등학교도, 중학교도 함께 다녔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런가 보다 했는데.
집도 더럽게 멀면서 하필 내가 진학한 고등학교로 온 그녀다.
이 정도면 아무리 둔탱이라도 알아채지 못할 리가 없다.
게다가 사흘이 멀다 하고 전화에 문자. 툭하면 까똑을 날려대는데 모르면 그게 사람이냐? 무늬만 사람인 유인원이지.
후우! 어지간하면 그냥 모르는 척하면서 대충 3년을 때우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안 되겠다. 이쯤에서 선을 그을 필요가 있겠다.
“나 좀 잠시 보자.”
애들이 노골적으로 보고 있는 중이라 최대한 자연스럽게 돌아섰다.
그러곤 쫄래쫄래 따라오는 그녀를 꼬리처럼 매달곤 교실을 나섰다.
***
교사 뒤편. 이제 막 꽃이 피기 직전인 개나리 숲. 아직은 앙상한 가지만 늘어져 있는 넝쿨로 뒤덮인 그늘막 아래, 벤치에 서로 마주 앉았다.
그리고 대뜸 물었다.
“왜 하필 나냐?”
“그, 그게 무슨 말이야?”
못 알아듣는 척하는 거야? 아니면 진짜 모르는 거야?
느낌으론 전자 같지만. 일단은 넘어가 준다.
대신 좀 더 노골적으로 물었다.
“그러니까, 왜 날 좋아하냐고.”
“누, 누, 누가 널 좋아한다는 거야! 흥! 차, 착각도 유분수지!”
미치겠다.
입술이 새파래져선 덜덜 떨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약해진다.
안 그래도 갸름하고 작은 얼굴인데 눈이 저렇게 크고 속눈썹까지 길게 뻗어 있으니 꼭 겁먹은 초식동물처럼 가련하게 느껴진다.
저런 얼굴에다 대고 모진 말을 해야 하는 상황이 영 마뜩잖다.
하지만, 어쩌겠냐.
쟤한텐 어떤지 모르겠지만, 나한텐 인생을 걸 만큼 중요한 문제인데.
“생일 까먹은 건 사과할게.”
“······.”
뭔가 직감한 걸까.
희주는 말없이 고개를 숙이곤 입술을 깨물고 있다.
이쯤에서 너랑 나랑은 안 된다고 말해야 하는데······.
젠장! 농담이 아니라 다른 사람은 다 돼도 쟨 안된다고.
우리 아버지 봐라.
사랑에 목매고 결혼해봐야 신분차이는 전혀 극복되지 않는다.
절대, 절대, 절대 누군가의 따까리가 되는 건 사양이다.
그러려면 사랑을 해도 내 분수에 맞는 여자랑 해야 한다.
그럼 둘 중 하나지.
희주네 집안을 우습게 여길 만큼 내가 성공을 하던가, 아니면 희주랑은 애당초 엮이면 안 되는 거다.
그럼 현실은?
무려 S그룹이다.
그냥 재벌이 아니고, 초초초 재벌인 것이다.
우리 외할아버지 그룹 정도는 계열사 몇 개 모아놓은 정도 수준밖에 안 되는 그런 집안. 그나마라도 식품회사를 빼고 나면 쭉정이나 다름없는데, 더욱이 난 직계는커녕 방계도 아니다. 외할아버지한테 있어서 어머닌 출가외인. 그냥 외갓집인 거다. 그런 외갓집조차 우리 아버진 감당이 안 돼서 쩔쩔매시는데, S그룹이야 말할 필요도 없겠지.
당연한 얘기지만, 내가 아무리 날고 기어봐야 절대로 그 이상 성공할 수 없다.
정말 마음 같아선 여기서 확실히 말하고 싶은데, 그랬다간 당장에 저 커다란 눈에서 눈물을 뚝뚝 흘릴 것 같아서······.
“8시라고?”
한숨이 나올 것 같은 걸 참으며 물으니, 희주가 슬며시 고개를 들며 대답한다.
“······응.”
실룩거리는 입.
금방이라도 헤에 하고 웃을 것 같다.
억지로 참는지 살짝 비틀어진 입가엔 엷은 미소가 머금어져 있었다.
“안가면······.”
눈에 띄게 어두워지는 그녀의 얼굴.
“뭐, 할 일도 없는데 잠깐 들리는 건 괜찮겠지.”
다시 환해지는 희주의 얼굴을 보니 나도 모르게 그만 실소가 나온다.
“헤헤. 그럼 오는 걸로 알고 있을게.”
뭐가 그렇게 좋다고 실실 웃는 건지.
희주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며 손까지 흔들고 사라졌다.
그 뒷모습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첫날부터 빠질 줄은 또 몰랐네.
그래도 다행인가?
전화번호를 입력해둬서.
“여보세요? HS 실용음악학원이죠? 아, 예. 저 어제 찾아갔던······. 맞아요. 근데 죄송해서 어쩌죠? 오늘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서요. 예. 내일부터 가려고요. 아, 그럼요. 가긴 갈 거에요. 예, 예.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
이래서 안 된다는 거다.
겨우 17살짜리 여학생이 생일파티를 하는 곳이 무려 호텔이다. 것도 하룻밤 묵는 데만 몇백만 원씩 하는 스위트룸. 거길 빌려서 밤새워 논다. 이게 고등학생이 누릴 수 있는 수준이냐? 대학생은 말할 것도 없고 웬만큼 번다는 사람들도 어지간해선 시도해볼 생각조차 못 할 일이다.
방값에만 이 정도 쓰는 데, 나머진 어떻겠냐?
봐라.
방 안쪽엔 밴드까지 불러놨다.
음식은 출장 뷔페론 성에 안 찼는지 제법 그럴싸한 복장을 갖춰 입은 요리사 세 명이 국자와 뒤집개를 능숙하게 휘두르며 한창 요리 중이다.
한데, 초대된 사람들이라고 해봐야 내 또래의 애들뿐. 숫자도 많지도 않다. 스무 명이나 되려나?
정말 한숨이 나오려 한다.
대한민국이 이런 나라다.
조선이 망하면서 신분제는 사라졌지만, 실제로는 그때보다 더 엄격한 신분제가 존재하는 나라.
내가 이런 나라에 살고 있다는 게 확 피부로 느껴진다.
쟤들 다 재벌집 자식들이지 아마?
그나마 절반쯤은 우리 학교에 다니는지라 다행히 꿔다놓은 보릿자루 신세는 면했다만.
“받아.”
문을 열고 날 발견하자마자 환하게 미소 짓는 희주에게 책 한 권을 내밀었다.
“서, 선물이야?”
“뭐 별건 아니고 시집.”
어차피 내 수준에선 뭘 줘도 다 똑같을 걸 알기에 준비한 거였다.
벤츠를 사다 줘봐라 그녀가 감동이나 할 거 같냐?
솔직히 시간이 없기도 했고.
오는 길에 들려서 그냥 적당한 걸로 한 권 사왔을 뿐 특별한 의미는 없었다.
희주는 마음에 드는지 가슴에 꼭 끌어안고 있었지만.
“여어, 김도준! 왔냐!”
“너도 있었냐?”
날 아는척해 오는 이놈은 중학교 때까지 곧잘 어울리던 녀석으로 이름은 구석준. 지금도 같은 고등학교이긴 한데, 내가 공부에 몰두하면서 거리가 벌어진 상태다. 지난번 시험이 끝나고 클럽에 가자고 꼬시던 놈도 이놈이다. 듣기론 곧 유학을 간다는 얘기도 들리던데. 아무튼, L그룹 회장님 손자 되시겠다.
“어머, 도준아! 너무 반갑다! 나 기억하지?”
얜 이름이······. 기억나진 않지만, K그룹인지 J그룹인지 정확하진 않아도 재벌 3세인 건 분명하고.
“진짜 너무했다. 어떻게 그동안 연락 한번 안 할 수가 있니?”
“와아! 이 자식! 더 잘생겨졌는데?”
“이번 시험 네가 1등 먹었다면서? 얀마, 너 때문에 우리 엄마가 얼마나 날 들볶았는지 아냐?”
“크크크. 요즘도 노래방 다니냐? 다들 알지? 얘가 이래 보여도 노래 하난 끝내주게 한다는 거 아니냐?”
“희주 저 기집애가 아까부터 자꾸 문쪽만 바라본다 싶더라니······. 아무튼 반갑다, 얘!”
흠, 어째 보릿자루가 아니라 쌀가마니 정도 취급은 받는 거 같은데?
다들 친근하게 구는 바람에 얼떨떨할 정도다.
살짝 의아해진 난 그들을 살펴보다가 어이가 없어져 혀를 차고 말았다.
쯧, 그럼 그렇지.
말은 내게 하면서 희주 눈치를 보고 있다?
실소가 나오려 한다.
대충 그림이 그려지네.
어떤 상황인지.
내색하지 않은 채 안쪽으로 들어와 보곤 그나마 그건 약과였다는 걸 깨달았다.
친분이 없는 이들 중 몇 명이 눈동자에 적개심까지 담고서 날 노려보고 있었던 것이다.
몇몇은 깔보는 듯한 눈빛이었고.
하아, 진짜 이런 분위기 익숙지 않은데.
“밥 안 먹었지?”
희주 역시 오늘따라 날 대하는 태도가 좀 다르다.
조금 들뜬 느낌이랄까.
얘가 원래 이런 애였나?
살갑게 구는 정도가 아니라 옆에 딱 달라붙어서 이것저것 챙겨주는 게 영 부담스럽다.
“이제 먹어야지.”
슬쩍 떨어져 걸으며 거리를 벌렸다.
재잘거리는 희주의 목소리가 점차 멀어질 때, 얼른 움직였다.
내가 들고 온 시집 한 권 가격은 너끈히 나갈 게 분명한 초밥 몇 개를 접시에 담아 아무 자리에나 앉아버렸다.
그리고 밴드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20대로 보이는 남자들로만 구성된 밴드인데, 아까부터 계속 신경 쓰였기 때문이다.
지금도 모 드라마에 삽입되었던 OST를 연주 중인데, 키보디스트는 평범한 수준. 보컬은 그나마 좀 나아 보이지만, 기타리스트는 영 별로다. 대신 드러머 실력이 상당하다.
그래서 그런지 자꾸만 그쪽으로 시선이 간다.
“왜? 노래 한 곡 하려고?”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시선을 돌려보니 구석준이 바로 앞자리에 앉아 있다.
“그거 웃으라고 한 얘긴 아니지?”
“흐흐흐. 새끼, 까칠하긴. 인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생일파티에 오면서 그게 뭐냐?”
“뭐가?”
“내가 널 모르냐? 너 인마, 저 시집. 오는 길에 대충 아무거나 하나 사가지고 온 거 아냐? 하여간 무심한 새끼라니까. 누군 쟤 못 꼬셔서 난리더만.”
그 누구가 누군지는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아까부터 희주 옆에서 알짱거리는 남자는 나도 보았으니까.
“H해운 사장 아들내미. 우리보다 두 살 많은데, 나랑은 별로 안 친해. 성격이 나쁜 건 아닌데, 그냥 좀 안 맞는달까.”
뭐가 그렇게 구석준의 심기를 건드렸나 보니, 대충 알겠다.
제 딴엔 센스있게 차려입었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날티가 풀풀 난다. 그러면서 기회가 날 때마다 은근슬쩍 여자들을 훑어보고 있다. 저런 애들이 나중에 꼭 도박하고 계집질하다가 신문 가십난에 오르내리더란 말이지.
“그러게. 좀 그렇긴 하네.”
“그래. 살짝 밥맛······. 야! 말 돌릴래?”
픽 하고 웃고 말았다.
안 통하네.
“그래서 뭘 어쩌라고?”
“어쩌긴 뭘 어째? 지금 네가 입에 쑤셔 넣고 있는 밥값은 해야 할 거 아냐?”
“그냥 안 먹으면 안 될까?”
“하이 나, 이 새낀 낭만을 몰라요, 낭만을.”
고개까지 내저으며 오바질을 하더니 급기야 녀석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밴드 쪽으로 다가간다.
어? 저 새끼 뭐야?
불안하게 뭐하는 짓이지?
삐이이이이이익.
구석준이 마이크에 스위치를 넣는 순간, 앰프가 비명을 내질렀다.
동시에 나 역시 속으로 비명을 내질렀고.
아이씨! 저 오지라퍼 새끼!
결국, 사고를 치고 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