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
#7. 꿈은 아니다(2)
집에 들어가니 형이 한 손에 핸드폰을 쥐고 낄낄거리며 소파 위에 뒹굴 거리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평소와는 달리 츄리닝 바람이 아닌 깔끔한 수트 차림으로.
쯧. 저렇게 뒹굴면 애써 차려입은 옷이 구겨질 거란 것도 모르나?
틀림없이 만화를 보고 있을 게 분명한 형을 한심스럽게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어? 왔냐?”
“근데, 웬일로 그러고 있어?”
“응? 뭐가?”
“그 옷.”
“너 설마 까먹은 거냐?”
“뭘?”
방으로 들어가 가방을 내려놓고, 교복을 벗고 있는 동안 형의 목소리가 방 문턱을 넘어 들려왔다.
“뭐긴 인마! 오늘 할아버지 생신이시잖아!”
멈칫.
단추를 풀다가 움직임을 멈췄다.
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오늘이 그날이구나.
젠장. 하도 정신이 없다 보니······.
뒤늦게 떠올린 나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대꾸했다.
“내가 형이야? 그걸 까먹게?”
“흐흐흐. 까먹은 거 같은데?”
형의 능글능글한 음성 따윈 무시하고 옷장을 뒤졌다.
날이 날인만큼 아무 옷이나 입을 순 없지.
적당한 옷을 골라 입고 있을 때,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도준이 왔니?”
“지금 방에서 옷 갈아입어요.”
“그럼 어서 나오너라. 밑에서 아버지 기다리고 계신다.”
어머니의 목소리에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
내게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안 계신다.
아버지께서 열 살이 채 되기 전에 조실부모하시고 친척집을 전전하며 성장하셨기 때문이다.
그렇게 친척들 사이에서 눈칫밥 먹어가며 악착같이 공부한 결과 명문대에 입학하신 아버지는 그때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고 하셨다.
조부모께서 남기신 유산이란 게 있다는 걸.
그래 봐야 건네받은 돈이라곤 딱 대학 등록금 수준밖에는 안됐다고도 하셨다.
내가 보기엔 친척들이 중간에 가로챈 것 같지만, 인제 와서 확인할 방도는 없다.
설사 있다고 해도 아버지께선 반대하실 거고.
아무튼, 대학에 들어가시면서 아버진 비로소 홀로 설 수 있게 되셨다.
그런 아버지께 어머니가 한눈에 반해 쫓아다니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라고 했다.
다시 생각해도 희한한 일이다.
고아에, 배경은커녕 돈조차 몇 푼 쥐지 않고 있는 철학과 학생에게 부잣집 막내딸로 공주 대접받으며 부족한 것 없이 살아온 음대생이 가당키나 하나?
흠, 아버지께서 한 얼굴 하시긴 하지.
젊었을 적엔 영화배우 한번 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의도 받으셨다고 하니.
어머니께서 그런 아버지를 보고 한눈에 반하신 게 이해는 간다.
반면 아버지께선 어머니가 자신과는 다른 세상 사람이라고 판단하곤 한동안 피해 다니셨단다. 하지만, 겨우 그 정도로는 어머니의 의지를 꺾지 못하셨다.
오랜 실랑이 끝에 어머닌 아버지의 마음을 차지하는 데 성공하셨다.
문제는 그다음부터였다.
조실부모한 천애 고아. 그렇다고 해서 장래가 보장된 학과를 다니고 있던 것도 아니다.
고심 끝에 어머닌 아버지께 은근슬쩍 권했다고 했다.
사법고시를 보라고.
사랑의 힘이 크긴 큰가 보다.
우유부단한 성격의 아버지께서 무려 5년 동안이나 고시원에 들어앉아 법전만 파고든 걸 보면.
아무튼, 몇 번의 낙방 끝에 사법고시에 패스한 아버지. 물론 그 이면에는 어머니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었다. 희생까진 아니지만, 어머니 덕분에 적어도 돈에서만큼은 자유로울 수 있었을 거다.
당시 어머니께서 받던 용돈이 어지간한 셀러리맨들의 월급보다 몇 배는 많았으니까.
그걸 한 3년 가까이 모아놓았으니, 두 사람이 살기엔 충분했을 테다. 다시 말해 어머니께선 이렇게 될 줄 알고 이미 3년 전부터 계획을 세우고 계셨다는 얘기다.
처음 아버질 만나셨을 때부터 나름 빅픽처를 그리셨던 거지.
몇 년 뒤, 두 사람은 할아버지를 찾았다.
그날은 아버지께서 검사로 임용된 날이었다.
그리고 두 사람 사이엔 이제 갓 태어나 꼬물거리는 형이 안겨 있었다.
짐작하건대 이건 어머니의 꼼수라고밖에 볼 수 없다.
외할아버지께서 반대하실 건 뻔한 일이고, 기껏해야 혼인신고 정도로는 어떻게 판을 뒤집을 수는 없다는 판단이셨겠지.
손자까지 봐버린 상황에서 설마 내치실까 싶었을 거다.
당연히 외할아버진 불같이 화를 내셨다고 한다.
하긴, 금이야 옥이야 애지중지 키우던 막내딸이 대판 싸우고 집을 뛰쳐나간 후 아무리 사람을 풀어 찾아도 찾을 수 없더니만, 어느 날 갑자기 근본도 모르는 놈팡이 하나를 떡하니 남편이라고 데려왔으니 기가 막힐 수밖에.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미 혼인신고도 끝내버린 뒤였고, 두 사람 사이엔 아이까지 있었다.
게다가 사윗감으론 한참 부족했지만, 그래도 나름 검사란 감투까지 쓰고 있었다.
그럼에도, 외할아버지는 절대로 두 사람을 집안에 들이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리셨다고 한다.
어머니께도 이혼하지 않는 한, 평생 자신의 얼굴을 볼 생각도 하지 말라고 엄포를 놓으셨고.
아마 몇 년 전 본의 아니게 딸을 내쳐버린 꼴이 되어 미안하셔서 그랬는지도 모르고, 그것도 아니면 등 떠밀리듯 두 사람의 관계를 인정하는 게 자존심 상해서 그러셨는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여기서 대박인 게, 그 오글거리고 흔하디흔한 클리셰대로 아버지께서 행동하셨다는 거다.
그해 가장 눈이 많이 왔다고 기록된 그 날, 아버진 대문 밖에 무릎을 꿇고······.
으으, 상상만 해도 손발이 오그라든다.
근데, 그게 또 먹혔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이틀째 되던 날 결국 정신을 잃고 쓰러지실 때까지 대문 앞을 떠나지 않으셨던 아버지도 아버지지만, 끝내 용서하지 않으실 것 같던 외할아버지께서 어머닐 집안으로 불러들이신 건 아마도······.
이미 마음속으론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받아들이고 계셨던 거겠지.
그 뒤로 아버진 외할아버지의 전폭적인 지원에 힘입어 출세가도를 달리셨지만, 애당초 야망이란 놈과는 몇만 광년쯤 떨어져 계셨던 아버지께서 외할아버지의 기대를 충족시키셨을 리 만무하다.
서울 남부지방검찰청 부장 검사. 거기까지셨다.
줄타기를 잘못하신 건지, 몇 해 전 검사복을 벗은 아버지께선 지금 외할아버지께서 운영하시는 그룹의 법무팀에서 일하고 계신다.
“자, 다들 먹자.”
외할아버지의 나직한 목소리에 식탁을 둘러싸고 있던 식구들이 일제히 숟가락을 들어 올렸다.
나 역시 한쪽 구석에 끼어서 모래알 같은 쌀밥을 씹으며 외가 식구들의 면면을 살폈다.
두 분의 큰외삼촌 내외. 그리고 유학 간 미국에서 졸업을 앞둔 사촌 형. 지난해 대학 입시에 실패하고 곧바로 영국으로 유학을 떠났던 사촌 누나. 마지막으로 나와 같은 나이의 동년배 사촌 최석진. 녀석은 커오면서 공부 잘하는 나와 줄곧 비교당해서 그런지 일찌감치 공부하곤 담을 쌓아버린 놈이었다.
뭐, 그러거나 말거나다.
저들이 뭘 하든 말든 난 관심 없으니까.
어차피 외갓집과 우리 집은 솥단지가 다른 거다.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절대로 저 집안의 진정한 식구가 될 수 없다는 걸 잘 안다.
외할아버지께서 날 어여쁘게 봐주시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 봐야 피가 다른 이상 내게 돌아올 몫 따윈 없을 테지.
그러니 무조건 내 힘으로 길을 뚫어내야 한다.
그것도 그나마 외할아버지께서 살아계실 때 연수원에 들어가야 최씨 집안의 전폭적인 지원을 등에 업을 수 있을 것이다.
상념에 잠겨 뜨는 둥 마는 둥 식사를 마친 뒤, 식구들을 따라 거실로 움직였다.
그곳에서 삼단 케이크를 놓고 촛불을 붙인 뒤, 다들 할아버지의 건강을 염원하며 축가를 불렀다.
햐아! 케이크 참······. 크기는 오지게 크네.
재벌이라고 말하기엔 조금 어폐가 있지만, 나름 대한민국에서 알아주는 그룹. 인스턴트 커피 하나로 어지간한 그룹의 매출은 씹어먹는 식품회사를 가진 집안은 역시 다르다는 건가?
아니, 진짜 제대로 된 재벌들은 이런 거 안 하려나?
차라리 어디 호텔을 빌려서······.
한참 망상에 가까운 상념에 빠진 채 노래를 부르고 있을 때,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어 눈을 들었다.
“생신 축하 합······?”
하나같이 날 바라보고 있는 모두의 눈빛이 예사롭지가 않았다.
다들 눈이 휘둥그레져서 벌리고 있는 입도 다물지 못한 채 내 얼굴만 보고 있다.
뭐지? 싶었지만, 일단 부르던 건 마저 끝냈다.
그러자 뒤늦게 갈채가 터져 나왔다.
그리고 이어진 한마디.
“어머, 도준이가 아가씨를 닮아서 음악적으로 재능이 대단하네요.”
둘째 외숙모는 미소를 아끼지 않으며 날 칭찬하고 있었다.
“아유, 뭘요. 어차피 가수 할 것도 아닌데.”
“왜요? 가수가 어때서? 요즘 그쪽도 장난 아니던데? 뜨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성공하기만 하면 어지간한 기업보다 낫다고 하던데요?”
“맞아요. 오죽하면 걸어 다니는 기업이라고 하겠어요? 그러지 말고, 도준이 가수 한번 시켜보는 게······.”
자식 칭찬에 어느 부모가 인상을 찡그리겠느냐마는, 것도 사람 나름이란 거지.
탕!
뭐, 이 경우엔 부모가 아니라 조부라고 해야 하나?
탁자를 내려치신 외할아버지께서 불편하신 얼굴이 되어 있었다.
“어디서 딴따라 운운하는 거냐! 난 우리 집안에서 그런 광대 따위가 나오는 거 절대 용납 못 한다! 도준이, 너 이번에 본 시험은 어떻게 됐느냐?”
가끔 한 번씩 저렇게 가족들을 흔드신다.
우리 집안.
꼭 거기에 내가 들어 있는 것처럼 말씀하시는 거다.
봐라.
우리 가족을 제외한 모두의 눈빛이 미묘하게 가라앉는걸.
아이고, 됐거든요.
김칫국 마실 생각 없으니까, 다들 눈에 힘들 좀 빼세요.
속으로 쓰게 웃으며 최대한 공손하게, 그러면서도 기죽지 않았다는 걸 내보일 정도만큼만 딱 부러지게 대답했다.
더도 덜도 말고 할아버지께서 좋아할 만한 태도로 말이다.
“몇 문제는 놓친 거 같아요.”
저 노인네한테는 절대로 길게 얘기하면 안 된다.
사족이 달렸다고 느끼는 순간, 변명으로밖에 치부하지 않으시니까.
궁금한 얼굴이 되셨을 때, 그때 자세히 설명해 드려도 늦지 않다.
“그래서야 1등 할 수 있겠느냐?”
지금처럼.
“문제가 좀 어려웠다고 하더라고요. 덕분에 가능하지 싶은데요.”
“그래? 허허허. 역시 내 손자다!”
만족스럽다는 듯 웃고 계시는 할아버지. 그에 반해 외갓집 식구들은 애나 어른이나 할 것 없이 얼굴이 팍 썩었다.
그럴 수밖에.
사촌들이라곤 한결같이 바닥을 기고 있었으니까.
공부하곤 담쌓은 족속들인 거다.
덕분에 이런 호사를 누리는 거지만.
“쯧, 없는 살림에 애 가르치느라 수고 많았다.”
할아버지의 살가운 음성에 어머니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나는 게 보인다.
하지만, 웃을 수 있었던 것도 거기까지였다.
이어지는 얘기에 어머니의 눈빛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서연이, 너! 혹시라도 시답지 않은 생각 하면 안 된다! 넌 여자라서 피아노를 가르쳤던 거지만, 도준인 안돼. 사내자식으로 태어났으면 큰일을 할 생각을 해야지, 딴따라가 웬 말이냐! 혹여라도 그런 일이 벌어지면, 그날로 당장 인연을 끊을 테니 그런 줄 알아!”
컥! 안될 말이다.
인연을 끊는다는 건 이제껏 이어져 오던 지원이 뚝 끊긴다는 말이나 다름없다.
솔직히 아버지 능력으론 집안 건사하기도 어렵다.
어머니께서 사랑을 택하셨다고 해서 태어나서부터 이제껏 살아오던 방식이 달라지신 게 아니듯, 날 때부터 풍족함 속에 허우적거렸던 형 역시 마찬가지. 내년이면 유학을 떠날 예정인 우리 형님 또한 씀씀이가 보통이 아니다.
거기에 내 공부 뒷바라지를 생각하면 한 달에 들어가는 돈만 기천이 훌쩍 넘는다.
근데 그걸 아버지께서 혼자 힘으로 온전히 감당하신다?
턱도 없는 얘기다.
끈 떨어진 검사 출신 변호사. 고향으로 내려가 유지들 뒤나 봐주는 변호사로 전전하는 것 말고는 갈 길이 없다.
그런 마당에 외할아버지의 지원 없이 내가 대법원장까지 올라간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연수원까지야 나 혼자서 어떻게든 할 수 있겠지만, 진짜 문제는 그다음부터다.
위로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돈이 얼마나 드는데······.
설사 판사로 임용이 되더라도 몇 년 안 지나 법복을 벗어야 할 게 뻔하다.
한마디로 꽃으로 뒤덮여 있던 내 앞길이 진흙탕으로 변하는 건 한순간이란 얘기다.
“할아버지, 걱정 마세요. 저 그런 거 안 해요. 이미 수험 준비도 다 끝냈는걸요. 지금 당장 수능을 봐도 S대 들어갈 자신 있어요.”
쐐기, 아니 말뚝을 박는다는 심정으로 다급히 말하자, 할아버지께서 껄껄 웃으며 만족해하신다.
“그렇지! 그래야, 내 손자지! 도준아, 앞으로 그렇게만 하거라. 그럼 집안 기둥을 뽑아서라도 네 앞길은 열어주마. 알겠지?”
엉겁결에 진심으로 토해내 버린 내 얘길 전혀 믿지 않으시는 눈치시지만, 오히려 허풍에 가까운 호언장담까지 하며 당당히 말하는 내가 또 기꺼우신 모양이다.
실력이라면 이미 S대생이 아니라 S대 교수 쌈 싸먹을 정도라는 걸 아시면 기절초풍하시겠군.
그러니까, 이 정도만 해야지.
“예. 절대로 할아버지 실망시켜 드리지 않을게요.”
농담으로라도 할아버지께서 쓰러지시면 안 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