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1. 문이 없다(1)
어쩌다가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다.
아, 물론 후회가 된다는 건 아니다.
그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뿐.
그래도 이거 하나만은 분명하다.
그날 하루가 내게는 천 년 같았다는 사실.
1. 문이 없다(1)
함께 클럽이나 가자는 제안을 뿌리치고 학교를 빠져나온 길이었다.
미친놈들.
시험 끝났으니까, 전부 끝이다?
오늘 본 시험만 앞으로 십수 번은 더 쳐야 한다는 걸 모르나?
아니지. 저놈들이 그걸 모를까?
그저 걱정이 안 되는 거겠지.
하긴, 저 새끼들이야 그럴 만도 하지.
고등학교 입학과 동시에 시작된 이 지랄 맞은 입시 지옥을 저놈들이 신경이나 쓰겠어?
대부분이 금수저인데.
금도금도 아닌, 순금 99.9%짜리 금수저.
개중에는 재벌 집 손자도 있고, 대법원장 손녀도 있으니 말 다했지.
막말로 공부 못해서 대학 못 갈 거 같으면, 외국으로 유학이라도 떠나면 그만이다.
아, 속된 말로 잔디 좀 깔아주고 대학 간다는 건 이제 안 통한다.
예전이라면 몰라도 요즘엔 사람들 눈이 무서워서 그렇겐 못한다. 혹, 지방대라면 또 어떨지 모르지만, 그건 그것대로 집안 망신이라며 안된다 할 테지.
하지만, 외국이라면 다르지. 잔디는 좀 그렇고, 기부금 적당히 내면 얼씨구나 하고 받아줄 대학들이 즐비하니까.
그에 비해 난······.
하아! 저놈들 놀 때 생각 없이 따라다니다 보면 결국 저놈들 따까리밖에 안 된다는 걸 너무나 잘 안다.
왜?
항상 곁에서 보아왔으니까.
됐다.
도움 안 되는 잡생각은 이쯤에서 접자.
대신, 가는 길에 노래방이라도 들리지 뭐.
아무리 나라도 스트레스는 풀어야 하니까.
그래, 김도준. 넌 할 수 있다.
더도 덜도 말고, 딱 10년만 고생하자.
고등학교 3년. 대학교 4년. 로스쿨 3년.
거기서부터 승부다.
시작은 변호사지만, 경력을 쌓아 반드시 되고 만다.
무조건 판사다.
지금의 나로선 남들 눈치 안 보고, 내 꼴리는 대로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나는 주먹을 한차례 움켜쥐곤 발걸음을 내디뎠다.
***
언제나 가던 노래방 앞에 이르자 S대에 대한 압박이 사라지는 듯하다.
거울을 보진 않았지만, 지금 내 입가에 미소가 지어져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뭐야?”
폐업?
미치겠네.
노래방이라곤 집으로 가는 길엔 여기밖엔 없는데.
제길! 어쩌지?
그냥 집으로 가야 하나?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과외 선생님께서 오실 때까지 2시간 남았는데, 이대로 가긴 너무 아쉽다.
만날 가는 노래방도 아니고, 오늘처럼 특별한 날. 그러니까, 시험을 봤다든가 한 그런 날, 그동안 고생한 나에게 내가 주는 선물. 시험 본 날은 조금 일찍 끝나기 때문에 모처럼 간만에 여유가 생긴 건데 이대로 물러나긴 아깝지.
생각 끝에 일단 건물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 핸드폰을 켜서 검색해본다.
“다들 머네.”
이래선 답이 안 나온다.
검색결과 나온 곳들은 전부 여기서 30분 정도 떨어진 곳들뿐이다. 아무리 서두른다고 해도 오가는 시간을 생각하면 과외 시간에 맞출 자신은 없다.
하는 수 없나?
뒤틀리는 입매를 한 채 돌아섰을 때였다.
응?
저기에 노래방이 있었나?
대로에서 쑥 들어간 골목길. 상가도 아니고, 골목길 한복판에 눈길을 잡아끄는 간판이 보인다.
천 년 노래방.
이름도 참······.
이건 뭐 세련된 건지 촌스러운 건지 구분이 안 된다.
낡은 3층 건물 측면에 매달려 있는 간판 꼬락서니를 보니 어지간히도 오래된 거 같은데.
근데 왜 여태껏 한 번도 못 봤지?
게다가 어째서 검색에도 안 나오는 걸까?
에이씨, 아무렴 어때?
어쨌든 노래방 기기는 있겠지.
설마 마이크가 없거나 하진 않을 거 아냐?
혹시 10년 전 노래만 잔뜩 있는 거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이끌리듯 노래방이 있는 건물로 향했다.
***
건물하곤······.
낡아도 너무 낡았다.
건물 외관에 붙어 있는 타일이 때가 타서 누렇다 못해 회색이다. 이빨 빠진 것처럼 타일들이 군데군데 떨어져 있는 건 말할 것도 없었고.
거기다 위치가 주택들만 있는 골목 한가운데라니.
이런 곳에 있으니 그동안 한 번도 못 봤지.
이래서야 밥은 먹고 사나 모르겠다.
아직 어린 내가 봐도 한심하다 싶었다.
한데, 지하로 내려가자 상황이 달라졌다.
지이이잉.
뜻밖의 자동문이다.
계단을 내려가 유리로 된 문 앞에 서자, 자동으로 열린다.
그래도 아주 오래되진 않았나 본데······.
“오!”
안으로 들어가 보니 생각보다 괜찮다.
삐까뻔쩍까진 아니지만, 꽤 깔끔하다.
돈 처바른 느낌은 들지 않아도 바깥에서 느꼈던 허름함은 느끼지 못했다.
카운터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는 할아버지 한 분이 보였다.
한쪽 선반 위에 놓인 작은 TV에선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사드 배치를 둘러싸고 중국과의 마찰로 급속히 얼어붙고 있는 한중관계에 대한 얘기였다.
일반적으론 고등학생이 관심을 가질만한 이슈는 아니었지만, 내 경우엔 나중에 판사가 된 이후를 생각해 정치나 국제정세에 일부러라도 관심을 두려 노력하다 보니 어느 정도는 어떻게 흘러가는지 알고 있는 사안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마냥 TV만 보고 있을 순 없지.
노래방에 왔으면 노래를 불러야 하는 거다.
“저기, 할아버지.”
“으, 응. 아이고, 이런. 내가 깜박 졸았구먼.”
눈을 비비며 일어나시는 할아버지께 한 시간에 얼만지 물었다.
“한 시간?”
“예.”
할아버지께 만 원짜리를 내밀었다.
6,000원쯤 하지 않을까 싶었다.
당연히 잔돈을 거슬러줄 거라 생각했고.
한데, 할아버진 은행에서 쓰는 것과 같은 작은 플라스틱 쟁반을 카운터 위에 올려놓더니 그 위에 동전을 쏟아내신다.
촤르르르르륵.
응?
하프 그림이 새겨진 처음 보는 모양이었다.
즉, 은행권이 아니란 얘기다.
살짝 어이가 없어서 시선을 들어 할아버질 바라보자, 말씀하신다.
“여긴 코인 노래방이여.”
“그럼 이게 다 코인이란 말인가요?”
이상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코인 노래방에선 그냥 100원짜리 주화나 500원짜리 주화를 사용하지 않나? 이렇게 전용 코인을 사용하는 곳은 처음 본 것 같다.
뭐, 그건 그렇다 치고.
“저, 이거 만 원어치인 건 아니겠죠?”
“맞는디?”
황당한 기분에 할아버질 멍하니 바라봤다.
이쯤 되면 조금 민망해서라도 변명 정도는 할 텐데, 할아버진 그럴 기미도 보이질 않는다.
외려 뻔뻔한 얘기를 한다.
“만원 더 있는 거까진 싹 다 바꾸라고 말하고 싶은디, 별로 그럴 거 같진 않구먼. 쯧, 좀 적긴 혀도 어떻게 이걸로 버텨 보그래.”
뭔 소린지.
이해하기 어려운 얘기들을 듣고 있자니 절로 눈살이 찌푸려 지려 한다.
아니, 그전에······. 내 지갑에 만 원짜리 한 장이 더 있는 건 또 어떻게 알았대? 아까 돈 꺼낼 때 봤나?
“나중에 남으면 환불은 되는 거죠?”
“하모. 그건 걱정 말그래.”
그렇다면야.
괜히 노래 부르기 전부터 기분 잡치기 싫어 일단 물러났다.
돈이야 나중에 되돌려받으면 되니까.
그래서 코인이 담긴 플라스틱 쟁반을 들고 룸 쪽으로 몸을 돌리며 물었다.
“몇 번 방이에요?”
“3번 방으로 가그래.”
한걸음 내딛다가 문뜩 떠올라서 되물었다.
“한 곡에 얼만데요?”
“아이고마. 내 정신 좀 보그래. 손님한테 그걸 설명 안 했구먼. 코인 당 500원. 그 돈이면 20곡은 땡길 거구먼.”
“아, 예······.”
비싼 건 아닌듯하다.
음료수 하나 살까 싶었지만, 더는 여기서 시간 뺏기고 싶지 않아 그대로 통로 쪽으로 몸을 돌렸다.
***
방으로 들어가니 생각보다 방이 깔끔하다.
소파도 널찍하고, 벽지도 오래되지 않아 냄새가 나지도 않는다.
이만하면 합격이다.
기계는 이제까지 다니던 노래방과 같은 회사 걸로 보인다.
한데, 자세히 살펴보니 그건 또 아닌 듯하다.
화면에 떠올라 있는 것도 그렇고, 코인 투입구를 비롯해 곡 번호가 적혀 있는 책자 표지에도 처음 보는 로고가 박혀 있다.
하나같이 천사가 하프를 들고 미소 짓고 있는 모습이었다.
일단 코인 10개만 투입했다.
그러곤 리모컨을 찾았다.
리모컨에도 예의 그 하프 천사 로고가 새겨져 있다.
그래도 혹시 모른다는 생각에 번호를 입력하니, 내가 원하는 곡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기존의 기계에 로고만 새로 박은 건가?’
고개를 한차례 갸웃거리며 마이크를 잡았다.
그 사이 전주가 끝나고 자막이 떴지만, 굳이 볼 필요는 없었다.
이미 수십 번도 더 불렀고, 듣기는 그보다 수십 배 더 들었으니까.
딱히 최신곡만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목을 풀기엔 이만한 것도 없지.
연주에 맞춰, 마탄소년단의 ‘피땀콧물’을 불렀다.
- 니가 너무 새콤해 너무 새콤해
너무 새콤해서!
간만에 불렀는데, 깔끔하게 터졌다.
만족스럽게 마이크를 내렸을 때였다.
빰빠라밤-
화면에 팡파레가 터지더니, 점수가 나왔다.
26점.
동시에 쾌활 발랄한 음성도 흘러나왔다.
- 오우! 음정, 박자! 다 개판이군요! 좀 더 노력해주세요!
헐! 뭐, 이런!
내 생전 노래방 와서 30점 이하로 받은 건 처음인 거 같다.
아무리 점수 때문에 부른 건 아니라지만, 이 정도쯤 되면 열 받을 수밖에 없다.
그래도 다행인 건 나 혼자라는 점.
“쯧. 목이 다 안 풀렸나 보지.”
민망함을 감추려 한마디 내뱉고는 다시 리모컨을 찾았다.
이번엔 빅밴의 ‘눈코귀’.
이 곡만큼은 자신 있었다.
점수와는 상관없이 목도 풀린 느낌이라 눈을 감고서 감성 충만하게 불러제꼈다.
그리고······.
빰빠라밤-
24점.
- 어머! 민망해라! 노래에 소질이 진짜 없으시군요! 좀 더 노력해주세요!
멍하니 화면만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울컥해져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뭐야! 지금! 장난······.”
고함을 치다가 이내 숨을 몰아쉬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미래의 대법원장이 겨우 이런 일로 흥분해선 안 되지.
음주가무는 그저 인생을 즐기는 데 필요한 양념일 뿐이다.
메인 요리는 따로 있는데, 이 정도에 자기감정도 다스리지 못한다면 애당초 꿈을 꾸지도 말아야지.
아니, 오히려 불끈 달아오른다.
그래, 해보자 이거지!
주먹을 움켜쥐며 리모컨을 찾았다.
그때부터 몇 곡이나 불렀을까.
“헉헉헉!”
열 곡은 다 채운 거 같다.
그리고 그때마다 떠오른 점수들은 한결같았다.
젠장! 첫 곡이 가장 잘 부른 거라니.
하나같이 30점은커녕 간신히 20점만 넘겼던 것이다.
“으아아아아악!”
스트레스 풀려다가 스트레스만 잔뜩 쌓인 꼴이 되었다.
마지막 곡을 부르는 동안 이미 시간은 흐를 만큼 흘러 한 시간이 지나 있었다.
다시 말해 더 이상의 기회조차 없다는 거다.
짜증이 나서 마이크를 냅다 집어던지고 일어났다.
“다시는 오나 봐라!”
그렇게 가방을 집어 들고 돌아설 때였다.
빰빠라밤-
- 하아! 진짜 못 들어주겠네요. 좋아요. 이제부터 맹연습입니다! 화이팅!
“어?”
추가 시간이 주어졌다.
60분.
서비스인가?
코인제라며?
그렇다는 건, 시간제도 있는 모양인데······.
아니면 카운터에서 원격으로 조작이 되는 건가?
아무튼, 눈앞에 뜬 시간을 보자니, 나도 모르게 망설여졌다.
지금까지 받은 점수들이 만족스럽지 못해서 그런가, 이대로 나가기가 주저되었던 것이다.
과외 시간이 6시니까, 몇 곡 더 부르고 가도 되지 않을까?
정 안되면 뛰어가면······.
“미친! 나 지금 뭐하는 거냐?”
실소를 흘리며 머리를 쓸어올렸다.
이딴 것도 유혹이라고······.
고개를 내젓곤 서슴없이 돌아섰다.
그러곤 방을 빠져나왔다.
복도를 울리는 발소리만 남겨놓고 카운터 앞으로 오니, 할아버지가 보이지 않는다.
어디 가셨나?
뭐, 상관없잖아. 그냥 가도 되겠지.
이렇게 생각하곤 그대로 카운터를 지나쳐 입구 쪽으로······.
“······!”
나는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무, 문이 없······어?”
들어올 때 문이 나 있던 자리엔 아무것도 없었다.
내 앞엔 그저 벽만 가로막혀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