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베리타스1 >
1
서부, 파멸이 처음으로 그 모습을 드러낸 곳.
네 개의 열쇠와 함께 세계의 기저에 놓인 악의의 이빨이 드러난 땅.
이제는 폐허가 되어버린 그 땅 중심엔 어둠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어둠에 모여든 것처럼 무수한 몬스터들이 지금 이곳에 가득하였다.
오크, 블랙팽, 오우거, 고블린 등등.
그러나 그 무수한 개성도 지금 이 일대를 가득 메운 어둠 앞에서는 한없이 공평하고 균등하였다. 개성도 특징도 이 앞에 다가올 순간에는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은 것들이다.
하나같이 혼이 없는 눈동자로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는 족속들. 그리고 지금 그 어둠 속에서 한 존재가 깨어났다.
그는 파멸을 가져오는 자이며, 세계의 의지를 대행하는 존재였으며, 세계가 끝마치지 못한 의식을 수행하는 존재였다.
푸르륵.
검은 군마가 불꽃을 토하였다.
그 위에 올라탄 파멸의 기수는 눈앞으로 펼쳐지는 길을 따라서 나아가기 시작하였고, 그의 뜻을 따라 움직이는 수족들은 그 뒤를 따랐다.
“모든 것이 끝날 때가 도래했다.”
꽈르릉!
하늘이 무섭게 울부짖었다.
붉은 벼락이 지상에 떨어지는 광경은 이제 별로 놀라울 것도 없는 광경이었다.
아리만의 서부 관문.
지금 이곳에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병사들의 모습이 보였다. 무색 마탑의 마법사들 역시 이곳에 전부 다 포진한 상황.
불과 하루 전에 황제가 서거하였다는 소식이 들려왔지만, 지금은 그 일에 도심이 슬픔에 잠겨 있기에는 상황이 너무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으음, 무엇인가가 오고 있는 건 분명한 것 같군.”
무색 마탑의 마스터 엘란은 서부의 땅 저편을 바라보면서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의 곁에 있는 다른 마법사들 역시 그의 말에 동감하였다.
누구라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누가 보더라도 서부의 땅에서 밀려드는 어둠은 심상치 않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휘이이잉.
칼바람이 불어왔다.
제라드 역시 뺨을 스치는 바람에 살기가 깃들어 있음을 느꼈다. 바로 그때, 옆에서 누군가가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고개를 힐끗 돌리자, 그곳에 익숙한 사내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한때, 제라드를 사칭했던 마법사였다.
“카일, 오랜만이군.”
“큭. 정말로 죄송합니다!”
“해후의 인사치고는 적합하지 않은 것 같은데.”
“저는, 저는 메리를 지키지 못했습니다. 제가 그 아이를 계속 신경 쓰고 돌보기로 했는데······.”
“이미 지나간 일이다. 지금은 그 일이 아니라, 머잖아 닥칠 일을 신경 쓰도록 해. 과거가 아니라, 지금을. 그리고 미래를 말이야.”
“죄송합니다. 제가 저 혼자 편하자고 상황 판단을 못했습니다.”
카일이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그렇게 말하며 황급히 물러났다. 그리고 멀리서 제라드를 가만히 보았다. 처음 보았을 때부터 신비로운 분위기의 사람이었지만, 지금은 그때와는 또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스승님께 한 소리 들으셨군요.”
별안간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 한 마법사가 있었다.
그는 필립이었다.
무색 마탑에서도 유일하게 제라드의 제자인 마법사.
“무슨 말을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의 스승님에겐 여유가 없어요. 그만큼 이 앞에 다가올 재앙은 당신께서도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라는 것이겠지요. 그러니 스승님을 오해하지 않길 바랍니다.”
“그럴 리가요. 저는 그분의 앞에 설 때면 그저 늘 초라해지는 기분만 느낄 따름입니다. 지난 과거의 일이지만, 감히 저분을 사칭했다는 게 얼마나 큰 오만이었는지······.”
“누구나 어떤 식으로든 그럴 겁니다. 스승님의 옆에 선다면 말입니다.”
필립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누가 감히 제라드의 고뇌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누구도 그와 같은 자리에 서지 못하였고, 그가 보는 경치를 알지 못한다. 오직 유일한 정점의 위치에 선 마법사. 그 위대한 존재를 위로할 정도로 다가설 수 있는 존재는 지금 이 세상엔 존재하지 않았다.
2
나흘이 지나면서 각지에서 군대가 조금씩 모였다. 아직 수는 적었다. 하지만 앞으로 일주일 이내에는 큰 영지의 부대가 당도해올 터였다. 제라드는 줄곧 그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시간을 맞추기 어렵겠어.”
제라드는 검은 기사가 끌고 오는 군대의 진군 속도가 조금씩 빨라지고 있음을 알았다.
몬스터들의 체력은 인간과 비교하기 어렵다.
그뿐이랴. 그들은 지금 달리다가 심장이 터진다고 해도 움직인다. 그들은 하나하나 유기체가 아니라, 파멸의 의지 아래 하나의 군체로 모여 있기 때문이다.
삐이익!
하늘을 빙글빙글 돌던 검독수리가 별안간 크게 울었다.
그 순간, 제라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조금 전 서부의 하늘을 날던 검독수리 하나가 당했다. 그게 시작이었다. 연이어 여러 번의 충격이 제라드를 덮쳐왔다.
주륵.
제라드의 입가에 붉은 선혈이 흘러내렸다.
패밀리어 마법은 동물과 자신의 정신을 잇는 마법. 패밀리어가 적의 손에 당했을 때의 충격은 고스란히 사용자의 몸에 전해진다. 지금의 제라드가 아무리 고등한 영역에 다다랐다고 해도 충격이 없어지는 건 아니었다.
제라드는 자신들의 패밀리어가 죽은 곳과 이곳의 거리를 계산하였다. 그러다가 이내 그런 계산이 필요 없음을 알았다. 등줄기를 오싹 스치는 존재감과 저 멀리 보이는 어둠이 모든 것을 설명하고 있었다.
두두두두.
땅이 뒤흔들렸다.
흡사 지진이라도 난 것 같았다.
일제히 밀려오는 검은 군대의 수는 그만큼 많았다. 제국의 심장부 아리만이 언제 이런 적들을 마주한 적이 있었을까.
서부의 성벽과 지상에 대기한 병사들은 사색이 된 얼굴로 저마다의 무기를 꽉 쥐었다.
“겁먹지 마라! 우리는 이길 것이다. 과거에 우리의 선조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곳곳에서 그런 고함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가장 앞에서 달려오는 적들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일반 늑대보다 두 배는 더 크고 시꺼먼 갈기와 같은 털을 가진 블랙팽이었다. 기껏해야 한두 마리씩 다니는 녀석들은 지금 이 순간, 수십 수백······ 아니 수천 마리는 되는 것 같았다.
“쏴라!”
마침내 사정거리에 다다른 적들의 존재에 좌우의 성벽에서 궁수 조장들이 목청껏 소리쳤다. 그러자 그들의 옆에 있는 마법사들 역시 저마다 마법을 영창하기 시작하였다. 무색 마탑의 마법사들은 저마다 다른 속성 마법을 사용하면서 시너지를 만들어냈다.
콰콰쾅!
불꽃이 터지고 얼음이 솟구쳤다. 땅이 뒤흔들리고 바람이 요란하게 불었다. 물이 폭포처럼 쏟아졌고 뇌전이 그 뒤를 따르며 모든 것을 짓이겼다.
달려오던 블랙팽의 숫자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직도 숫자는 많았고, 화망을 뚫고 성벽에 가ᄁᆞ이 다다른 블랙팽들은 이내 뚫린 성벽의 틈으로 그 거대한 육신을 들이밀기 시작했다.
“막앗!”
자기 키보다 훨씬 더 큰 창을 든 병사들이 눈앞에 창을 겨누고 찔러댔다. 눈앞에 날카로운 창촉을 보자면 그 어떤 생물체든 겁을 집어먹고 도망가기 바쁘건만, 블랙팽은 그런 게 없었다. 몸이 찔리고 얼굴의 살점이 파여도 달려 들어왔다.
“이, 이런 미친!”
푸확!
진형 한가운데로 파고드는 블랙팽은 이내 머리가 꿰뚫리며 죽었다. 하지만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그 일말의 틈을 허용한 순간부터 블랙 팽들은 성벽의 틈으로 마구 밀려왔다. 하나로 뚫지 못하면 둘로, 둘로 뚫지 못하면 셋으로. 두려움이 없는 물량 공격.
압도적인 수적 열세에 있는 제국군은 금세 위기에 봉착했다. 아직 적의 진정한 주력이라고 할 수 있는 오크나 오우거가 성벽에 당도하기도 전에 말이다. 이전의 싸움이라면 이대로 진형 자체를 뒤로 뺐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만약 그러면 전멸이다.
“크허엉!”
밀고 들어온 블랙팽 한 마리가 무섭게 고함을 지르며, 달려들 때였다.
푸확!
별안간 녀석의 목이 썽둥 잘리며 바닥을 나뒹굴었다.
그런 광경이 연이어 펼쳐졌다.
당황하였던 병사들의 시선이 한쪽으로 향했다.
그곳에 잿빛 망토를 걸친 한 명의 마법사가 있었다.
“여러분은 대열을 지켜주십시오. 안으로 파고드는 것들은 제가 정리하겠습니다.”
그의 이름을 엘란.
무색 마탑의 탑주이자, 마스터 중 한 사람으로 불리는 마법사였다.
“키리, 대열이 무너지지 않도록 각 대열을 담당하는 마법사들에게 주의하라고 일러라.”
“알겠습니다!”
엘란은 동요하지 않는 냉철한 모습으로 어린 마법사에게 그렇게 지시를 내리며, 연이어 바람 마법을 펼쳐나갔다.
‘흐음, 대마법사님께서는 아직 움직일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적의 수장을 기다리는 것인가.’
엘란은 힐끗 성벽 위의 제라드를 눈에 담았다. 교전 상황에 들어갔음에도 제라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저 먼 곳에 다다라 있었다.
3
밀려드는 몬스터의 군세.
피비린내와 역한 악취의 향연. 고함과 비명. 생과 사. 모든 것이 이 안에 있었다.
파멸과 혼돈, 그 자체를 상징하는 모든 것들이 말이다.
그리고 이 싸움의 중심에 한 존재가 있었다.
말이 아니라, 괴물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거대한 군마에 올라탄 파멸의 기수.
제라드는 이 무수한 군세 속에서도 그가 어디에 있는지 한 번에 잡아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검은 기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서로가 가진 열쇠가 지금 이 순간, 공명하며 끌어당기고 있었다. 때가 되었노라고, 세계가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아직 직접 나설 때가 아니다, 이건가.”
제라드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하늘 높이 손을 뻗었다.
그 순간, 그의 머리 위에서 요동치는 구름의 형상이 바뀌었다. 줄곧 붉은 벼락을 머금고 있었던 구름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부터는 달랐다.
꽈르릉!
구름 속에서 푸른빛의 뇌전이 세차게 일렁였고, 제라드는 몬스터의 무리를 향해 손을 겨누었다. 그러자 제라드가 겨눈 땅을 향해 구름 속에서 뇌전이 벼락줄기가 되어 맹렬히 내리꽂혔다.
꽈아아앙!
빛이 번쩍였고, 대지가 무섭게 요동쳤다.
조금 전까지 우글대던 몬스터의 중심부가 휑하게 바뀌었다.
즐비한 육편들 너머로 폭연이 일렁이는 가운데, 이 무시무시한 마법을 목도한 마법사들과 병사들이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제라드의 마법은 아직 제대로 시작도 하지 않았다.
휘오오오.
바람이 제라드의 몸을 휘감았고, 그의 몸이 허공에 둥실 떠올랐다. 성벽에서 10미터 정도 떨어진 공간까지 올랐을 때, 제라드는 허공에 손을 슥 휘저었다.
지지지징!
제라드의 뒤쪽 허공에 황금색의 마법술식이 나타났다.
무수한 마법사들이 그 광경을 목도하였지만, 그것은 두 눈으로 보고도 이해할 수가 없는 마법술식이었다.
왜냐하면, 기존 마법의 틀을 아득하게 넘어선 마법이기 때문이다.
지금 그 마법진의 중심부에 빛이 모여들었다.
“이것들로는 나를 막을 순 없어. 어쩔 테냐.”
제라드가 그렇게 중얼거린 순간.
지지지지징!
수십 개의 마법술식에 맺힌 빛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포격이 되어 몬스터들의 머리 위로 무차별적으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콰콰콰콰콰!
드드드드.
땅이 요란하게 뒤흔들렸다.
아리만 전역이 지금 굉음과 지진에 흔들리고 있었다.
“벌써 싸움이 벌어진 모양이군.”
“설마, 우리가 너무 늦은 건 아니겠죠?”
“늦었다면 이렇게 싸우는 소리가 들려올 리가 없겠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저게 아직 우리의 위를 배회하고 있어.”
청색 로브의 마법사가 하늘을 가리켰다. 그곳에 검독수리가 고고한 자태를 내뿜으며 빙빙 돌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저 검독수리야말로 제라드의 상징이었다.
마법사들을 뒤따르는 이들이 다행이라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가운데.
“좋아, 그럼 조금 더 서두르지.”
청색 마탑의 탑주, 케이틀란은 그렇게 말하며 내달리기 시작하였다. 아리만은 이제 바로 코앞이었다.
언덕을 지나서 광활하게 펼쳐진 평야가 나타났다.
저 멀리 하늘 높이 뻗은 성벽과 동부 관문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 앞에 모여 있는 붉은색 로브의 마법사들도 말이다.
지금 이 땅에 적색과 청색 마탑의 마법사들이 모였다. 그리고 그들의 뒤로 수천의 군세가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뒤따르고 있었다.
동부 관문만 상황이 그런 게 아니다.
북쪽도 남쪽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시간을 맞추지 못한다고 내다보았던 제라드의 예상은 이번만큼은 좋은 방향으로 빗나갔다. 세계 각지의 군대는 그가 생각하던 것보다 더 빨리 움직였고, 시간을 맞출 수 있었다.
“서둘러라! 몬스터 따위에게 이 땅을 허락지 마라!”
우렁찬 외침과 북소리, 뿔나팔 소리가 웅장하게 울려 퍼졌다. 이 세계의 흐름에 항거하는 의지와 힘이 세계의 중심에 집결하고 있었다.
< 베리타스1 > 끝
ⓒ 양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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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리타스2 >
4
예로부터 전쟁에서 마법사는 늘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그들의 힘은 하늘을 떨게 하였고, 대지를 뒤흔들었으니.
한 사람 한 사람이 수백 명을 이룬 군대와 같았고, 그들의 수가 얼마나 많은가에 따라 싸움의 판도가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 그러한 일반적인 상식을 아득하게 초월한 풍경이 이곳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한 명의 마법사가 전장을 굽어보는 허공에 떠 있었고, 그가 펼친 마법 술식은 적들에게 재앙이 되어 지상을 모조리 집어삼켰다.
콰콰콰!
연이어 터지는 굉음 속에서 성벽 위에서 모든 광경을 본 병사들은 그저 입을 쩍 벌린 채, 모든 광경을 숨죽이고 바라볼 따름이었다.
제라드가 나선 순간부터 저런 상황이 연출되었다.
성벽 밖의 지상은 불타고 있었다. 계속 이런 식의 싸움이 이어진다면 싸움 그 자체가 끝난다고 해도 좋을 터였다.
그러나 계속될 것 같았던 제라드의 마법술식은 어느 순간, 사라지기 시작하였고, 허공에 있던 그의 신형은 성벽의 위에 내려앉았다.
그때부터 멈췄던 시간이 다시 흐르는 것 같았다.
고오오오.
온통 자욱한 폭연 속에서 몬스터들이 다시 튀어나왔다. 많은 수의 몬스터가 죽었지만, 아직도 수많은 몬스터가 존재하였다.
병사들은 제라드가 지쳤다고 생각했다.
그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는지도 몰랐다.
저토록 무시무시한 힘을 계속 사용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이제 우리가 나설 차례다! 대마법사님이 쉬시는 동안, 아리만은 우리의 힘으로 지켜내는 거다!”
와아아아!
병사들이 용기백배하여 크게 소리를 질러댔다. 제라드가 보여준 신위가 그들에게 승리의 길을 비춰주었다.
한편, 성벽 위의 제라드는 그 모든 상황과 무관한 사람처럼 폭연의 너머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마법을 난사한 까닭에 지쳐서 물러난 게 아니었다.
‘움직이지 않는다. 어째서지.’
처음에는 상황을 지켜보려는 것인 줄로만 알았다. 그래서 제라드가 먼저 나섰다. 하지만 검은 기사는 끝까지 나서지 않았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어째서지? 시간은 이쪽의 편이다. 그걸 모르지 않기에 이곳에 다다른 것이 아니었던가. 몬스터들을 부리는 건 고작 시간을 조금 더 버는 것 말고는······.’
제라드가 그렇게 생각하다가 이내 눈살을 찌푸렸다.
‘설마, 상태가 완전하지 않은 건가?’
그런 생각이 든 순간, 그것은 이내 확신으로 바뀌었다.
그랬다. 제라드는 지금 이 순간에도 베리타스의 존재감을 확실히 느끼고 있었다. 그 베리타스가 검은 기사의 뜻대로 통제되지 않고 있는 게 틀림없으리라.
그렇다면 시간을 더 끌 이유가 없었다. 이 싸움의 핵심은 어차피 검은 기사였기 때문이다.
‘확인해보자.’
그 순간, 제라드는 다시금 허공 위로 떠올랐다.
“대마법사님이 다시 하늘에 오르셨다!”
“놈들을 한꺼번에 해치워주십시오!”
병사들이 크게 소리를 질러대는 가운데, 허공 높은 곳까지 다다른 제라드는 이내 오른손을 허공에 펼쳤다.
지지지징!
파괴광선이 허공에 만들어진 마법술식에 차례로 맺히더니, 이내 바닥에 내리꽂혔다.
콰콰쾅!
폭연과 흙먼지가 자욱하게 치솟는 가운데, 그곳으로 맹렬한 광풍이 휘몰아치며 단숨에 그 모든 것들을 지워버렸다.
압도적인 전투력 앞에 몬스터들은 튕겨 나가기 바빴다. 그렇게 길이 완전히 열린 후에야 제라드는 서서히 적진의 한복판으로 향하였다.
바로 그때였다.
좌우로 떠밀린 폭연을 불쑥 뚫고서 광분한 오우거 한 마리가 거대한 몽둥이를 크게 휘둘러왔다.
“크워어어엉!”
나무 하나를 통째로 뽑아서 휘둘러오는 듯한 매서운 공격이었다. 하지만 그 공격에 제라드가 맞는 일은 없었으니.
화아악!
제라드가 오른손을 휘저어 화염을 일으켰고, 그것은 오우거의 얼굴 앞에서 갑자기 나타나더니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투콰앙!
“크워어어!”
폭연이 치솟는 가운데, 오우거의 몸이 흔들거리다가 이내 바닥에 고꾸라지며 쿵 하고 쓰러졌다. 몬스터 최강의 포식자라는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압도적인 전투력 차이였다.
제라드의 시선은 오직 한 곳에 꽂혀 있었다.
몬스터가 싹 쓸려나간 파괴된 대지 위에는 검은 기사만이 그 자리에 그대로 멀쩡히 존재하고 있었다.
검은 기사와 제라드의 거리는 약 20미터 안팎.
그러나 그 정도의 거리는 둘에겐 아무런 제약이 되지 않는다.
지지지징!
제라드의 주변에 황금빛 마법술식이 모습을 드러냈고, 그 중심에 빛이 모여들었다. 그리고 허공을 가로지르더니 단숨에 날아들었다.
꽈아아앙!
불꽃이 치솟고, 빛이 소용돌이치다가 충격파가 발생했다.
흙먼지가 매섭게 치솟는 가운데, 그 안에서 검은 기사가 멀쩡한 모습으로 군마를 이끌고 걸어나왔다.
제라드도 표정 하나 바뀌지 않았다. 마법 한두 방으로 싸움이 끝나리라곤 애초에 생각지 않았다.
싸움은 지금부터였다.
5
콰콰쾅!
투쾅!
대지가 진동하고 공기가 요동쳤다.
아리만 서부 일대 지역은 전장이 되었다. 그리고 지금 전장에는 각기 다른 종류의 전투가 동시에 벌어지고 있었다.
하나는 쇄도하는 몬스터와 싸우는 제국군의 전투였고, 다른 하나는 적의 진형 중심에서 일어나는 제라드와 검은 기사의 싸움이었다.
어느 쪽이든 패배해서는 안 되는 싸움.
“버텨라!”
“들여보내지 마! 어서 밀어내!”
제국군은 압도적인 수적 열세 속에서도 치열하게 적에 맞서 싸웠다. 겨우 보수하였던 무너진 성벽 부분에서는 꾸역꾸역 적들이 밀려왔고, 그때마다 아슬아슬한 광경이 계속 연출되었다.
“후우.”
최전방에서 한 부분을 홀로 막으며 분전하던 드라이곤이 호흡을 가다듬었다.
‘힘을 너무 낭비해서는 안 돼. 내가 한순간이라도 빠지면 전세가 확 기울어지게 된다. 아군의 수는 고작해야 2천 명 남짓. 그 와중에 기사단은 불과 50명 안팎······. 마법사들의 수 역시 그와 비슷하다.
그에 반해 적들의 수는 너무 많아.’
짐작하기도 어려운 숫자. 대충 봐도 수만은 족히 되는 것 같았다. 제국군은 당장 적들이 밀려오는 곳만 막아도 거의 총력을 기울여야 했다.
드라이곤은 철저히 주변 상황을 파악하면서 싸움을 이끌어나갔다. 쉴틈 없이 싸우는 일반 병사들이 무너지면 싸움에 승산은 없을 터였다.
“제라드 녀석이 적의 우두머리를 먼저 깨부수길 바라거나 그게 아니면······ 우리가 무너지기 전에 아군이 나타나길 바라는 수밖에.”
써걱!
드라이곤이 그렇게 중얼거리며 벼락같이 눈앞의 오크를 베었다. 머리가 날아간 오크가 피를 분수처럼 내뿜으며 바닥에 무너졌다.
꽈아앙!
또다시 대지가 뒤흔들리는 폭발이 일어났다.
제라드는 여러 마법을 동시에 전개하였다. 그것들은 하나같이 다 각 마법의 정점에 존재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들뿐이었다.
불꽃이 날아들었고, 폭발이 일어났으며 하늘에선 벼락이 떨어졌고, 거대한 물의 소용돌이가 일어났고 칼날 바람이 휘몰아치기도 했다.
마법의 정점.
그 위치에 존재하는 마법사다운 마법의 향연.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제라드의 얼굴은 점점 굳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가 일으킨 모든 마법들이 무(無)로 돌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펠 브레이커.’
틀림없었다.
저 마법은 그것이다. 그 원리만큼은 말이다. 하지만 그 방법의 기저에 깃든 방식은 그런 것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이건 예전에 내가 상대해왔던 그런 미완성형 스펠 브레이커가 아니야. 완성형. 틀림없는 완성형이다. 놈은 완성형 스펠 브레이커를 사용하고 있어.’
제라드가 그렇게 확신하는 이유는 다른 게 아니다.
지금 그가 사용하는 마법은 최초의 마법사라고 불렸던 엘레멘탈 마스터의 틀을 아득하게 벗어난 제2시대의 마법 혹은 제1시대의 마법이었기 때문이다.
지금 그러한 마법이 덧없이 파괴되고 있었다.
마나의 흐름을 타고 제라드에게 달려드는 마법파괴의 여파까지 완벽히 똑같다. 하지만 제라드는 그런 여파에 휩쓸릴 정도로 어수룩하지 않았다.
‘스펠 브레이커라면 반드시 리스크가 있을 터. 하지만 주문을 외거나 어떤 마법을 사용하는 것 같지는 않다. 대체 어떻게 스펠 브레이커를 사용하는 거지?’
원리를 알아내지 못하면 해법도 없는 법이다.
제라드는 마법을 전개하면서 냉정하게 상황을 파악해나가기로 했다.
휘오오오오!
이중 삼중으로 공간 자체를 옭아매는 무시무시한 뇌전의 회오리 앞에서 검은 기사는 무기력하게 보였다.
그러나.
파지직!
붉은 벼락이 번쩍대더니 뇌전을 머금은 회오리가 사라지고, 그 여파는 붉은 뇌전이 되어 제라드를 향해 덮쳐왔다.
그러나.
쩌엉!
제라드에게 닿기 직전, 공간 자체를 단절하는 마법의 왜곡이 일어났고, 그 모든 힘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알겠다.’
제라드의 눈이 번뜩였다.
처음엔 검은 기사가 스펠 브레이커를 사용한 줄 알았다. 그 다음엔 갑주나 검은 군마.
그러나 어느 것도 아니었다.
저것은 오로지 검에 의해서 일어나는 현상이었다.
제라드의 시선이 검은 기사가 든 지옥불의 칼에 꽂혔다.
공간을 찢고 만물을 베어 넘기는 부정의 검. 검붉은 불꽃에 타오르는 칼 중심에는 복잡한 세계어가 새겨져 있다. 저 검이 마법이 닿기 직전의 순간에 스펠 브레이커를 발동한다.
‘스펠 브레이커가 어디에서 발동하는지는 알았는데, 대체 어떤 원리로 저 검에 깃든 세계어가 완성형 스펠 브레이커를 일으키는 거지.’
스펠 브레이커에 관한 것은 세계의 근간에도 존재하지 않는 정보였다. 애초에 세계 내부에 존재하는 정보가 아닌 것처럼 말이다.
바로 그때였다.
검은 기사가 검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이 칼에 깃든 힘은 태초에 존재하였던 단 하나의 의지에서 파생된 힘이다. 전혀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지만, 너 역시 이것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다.”
그 말에 제라드가 눈살을 찌푸렸다.
‘내가 저게 무엇인지는 알고 있다고.’
괴이한 소리였다. 제라드는 저게 무엇인지 모른다.
저 칼을 뒤덮고 있는 부정의 소용돌이. 그것은 검신에 새겨진 세계어조차 파악할 수 없게 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일진대 저 검이 무엇인지 어떻게 안단 말인가.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지옥불의 검신에 새겨진 세계어가 번쩍이더니, 별안간 그 정중앙에 눈동자 하나가 나타났다.
그것은 붉은빛을 머금은 기괴한 눈동자였다.
제라드의 눈이 크게 뜨였다.
저 눈.
저 눈을 제라드가 어찌 모르랴!
“설마, 베리타스······?”
“이제야 알아보는구나. 맞추었다. 태초에는 단 하나였고, 제1시대가 끝나는 날, 두 개로 나뉘었고, 제2시대가 끝나는 날, 여덟 개로 나뉘어버린 힘. 그중에서 오직 단 두 가지만이 진정한 열쇠다. 그리고 베리타스라는 이름이야말로 진정한 열쇠.”
검은 기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지옥불을 머금은 칼이 요동치며 거대한 힘을 뿜어내기 시작하였다.
고오오오오.
저 검의 내부에 깃든 무시무시한 증오와 분노. 그리고 욕망에 제라드는 아연실색하였다. 라시드 백작령에서 발견했던 열쇠. 그걸 가득 뒤덮고 있던 증오의 기운. 그것과는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강맹한 증오의 소용돌이가 저 안에 존재하고 있었다. 그리고 제라드는 비로소 저것이 무엇인지 알았다.
제라드가 알고 있는 이유는 다른 게 아니다. 수도 없이 비문을 통해 보았기 때문이다.
증오와 분노. 배신감에 치를 떨며 겨우 다다랐던 곳. 새까만 어둠 속에서 가까스로 다다른 유일한 진리.
제라드의 눈이 불신으로 일렁였다.
“당신이 누구인지 알겠어······.”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검은 기사의 투구가 서서히 열리면서 그 안에서 일그러진 얼굴이 나타났다.
그는 일찍이 죽었어야 할 존재. 죽음을 거스른 그의 얼굴에는 시꺼먼 부정의 어둠이 뿌리내려있었다. 인간의 형상이 아님에도 제라드가 그 얼굴을 못 알아볼 리가 없었다.
“녹스······.”
그러자 얼굴을 드러낸 검은 기사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드리웠다.
녹스.
엘레멘탈 마스터의 여덟 제자 중 한 명이자, 모두가 잊어버린 마법사. 그가 지금 길고 긴 세월을 넘어 이 땅에 파멸의 대행자가 되어 제라드의 눈앞에 있었다.
“역시 너만큼은 나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제라드 란스터.”
< 베리타스2 > 끝
ⓒ 양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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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리타스3 >
6
“녹스······.”
제라드는 그의 이름을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 이름을 제라드가 어찌 잊었을까!
엘레멘탈 마스터의 여덟 제자 중 한 명이었던 그는 질투와 시기로 눈이 멀어 버린 동료들의 배신에 이를 갈며 이 세상에 분란의 씨앗을 남기고 사라졌다.
그리고 긴 시간이 흘렀다.
그 일은 과거가 되었고, 세상은 이제 그들을 역사의 한 줄기로서만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제라드의 눈앞에 있는 저 존재는 틀림없이 녹스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당신이 어떻게······.”
“그게 그렇게 신기한 일인가? 네가 도달하게 된 놀라운 마법의 영역에 비하면 삶과 죽음이라는 것은 너무나도 단순한 법칙일 뿐이다.”
“······.”
경악과 놀라움으로 뒤섞여 일그러졌던 제라드의 얼굴에 다시 냉정함이 돌아왔다.
“모든 게 설명이 되는군.”
“내가 누구인지 아는 것만으로도 모든 걸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인가. 놀랍군. 너는 정말로 놀라운 존재다.”
검은 기사······ 녹스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래, 역시 너와는 한 번쯤은 이야기를 꼭 나눠보고 싶었다. 이 거짓된 세계에 존재하는 수많은 것 중에서 오직 너만큼은 나에게 있어서도 좀 특별한 존재니까.”
······그것은 머나먼 과거의 이야기다.
녹스는 동문의 제자들에게 쫓겨 세상의 끝에 다다랐다. 그곳은 가장 낮고 깊은 곳이며,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어둠이 만연한 곳이었다.
그곳에서 녹스는 서서히 죽어갔다.
세상을 저주하고 또 저주하면서.
그러나 그 세상의 끝. 그곳에서 그는 이 세계에서 한 가지 진리에 도달하였으니. 그것은 성유물 혹은 열쇠라고 불렸다.
절망과 분노 등 부정의 끝에서 녹스는 마침내 단 한 가지의 진리에 다다랐다. 그 진리는 그에게 이 세계가 끝마치지 못한 일을 알려주었고, 그를 대행자로 삼았다.
길고 긴 시간.
그 속에서 녹스는 때를 기다렸다.
모든 것은 준비였다. 다가올 그때를 위한 준비. 그릇에 물이 가득 차면 흘러내리는 것처럼 그때는 서서히 다가왔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났다.
거짓된 세계 위에 세워진 세계에서 한 명의 마법사가 어둠 속에 파묻힌 녹스의 이름을 세상에 밝혔다. 파멸의 대행자가 되어서 오직 그 순간만을 위한 꼭두각시에 불과하였을 녹스의 존재를 깨운 것이다.
“나는 이름을 되찾았다. 나의 존재를 되찾았다. 나조차도 잊고 있었던 나의 이름을 긴 시간, 너무나도 긴 시간이 지난 지금에 다다라서 말이야.”
녹스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 순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감정을 주체하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그래서 꼭 감사의 인사를 하고 싶었다. 오직 너만이 이 세상에서 나를 찾은 존재였고, 이해해준 존재이기에.”
“마법사는 진리를 추구하는 존재. 나는 내 입맛에 맞는 진리만 탐구하는 마법사가 아니다. 그러니 당신에게 인사를 받을 이유는 없다.”
“옳다. 그대는 진정한 마법사다. 나 역시 그대가 나의 감정을 이해하리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저 내가 나로서 이 세상에 할 수 있는 유일한 작별인사를 고한 셈이지.”
촤르륵.
녹스의 투구가 다시 그의 얼굴을 덮었다. 투구 안에서 보이는 것은 붉은색으로 빛나는 흉광뿐이다.
“이제 모든 것을 끝낼 시간이다. 그대는 막을 수 없다. 나뉘었던 모든 것은 다시 하나가 될 것이고, 이 세계의 죄악과 문제들은 새로운 세상에서 완전히 해결될 것이다.”
고오오오.
그 말을 끝으로 지옥불이 무시무시한 기세로 타올랐다.
오싹.
제라드는 등줄기에 소름이 스치는 것을 느꼈다. 처음 나타났을 때부터 네 개의 열쇠를 가지고 있던 존재.
왜 몰랐을까.
누구보다도 긴 시간, 이 세상에 존재해왔던 녹스라면 이 세계 곳곳에서 잠들어 있었을 열쇠를 모두 손아귀에 넣는 것쯤은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쩌억.
칼이 허공을 갈랐는데 그런 소리가 났다.
입을 쩍 벌리는 것 같은 소리였다.
그 순간, 공간이 뒤틀리면서 벌어졌다. 그 내부에 존재하는 것은 오로지 공허였다.
공간을 베는 그런 수준의 공격이 아니었다.
세계를 베는 검.
공간이 갈리면서 벌어진다. 그 안에는 오로지 공허만이 존재할 따름이다. 공간을 벤 수준이 아니다. 세계를 벤 것이다.
제라드는 거의 즉각 마법을 전개하며 대응했다. 수십 개의 마법 술식이 황금빛을 내뿜으며 허공을 수놓았다.
7
“끄르륵······.”
가래가 들끓는 소리를 내뱉는 병사의 초점이 점점 희미해지기 시작하였다.
뚜두둑.
목을 콱 물어뜯은 날카로운 이빨에 핏물을 쏟아내다가 이내 목뼈가 부러져 죽음을 맞이하는 병사.
“이놈!”
벼락같이 그 병사를 죽인 블랙 팽의 몸을 썽둥 베어버리는 드라이곤. 어느새 그도 피범벅에 호흡이 거칠어진 상황이다. 온몸의 피는 그 자신의 것이 아니라, 적들의 것이었지만, 아군의 피 역시도 적지 않게 묻어 있었다.
“제길. 여기까지인가.”
그의 얼굴에 절망이 드리웠다.
성벽을 등 뒤로 하고서 어떻게든 지켰어야 하는 저지선이 너무나도 허무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그 순간부터 팽팽했던 싸움은 어느 한 방향을 향해 거침없이 나아가기 시작하였다. 파멸이라는 방향을 향해서 말이다.
그럼에도 이렇게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타하앗!”
드라이곤은 고함을 지르며 적들을 향해 몸을 날렸다.
전황은 그가 있는 곳만 그런 게 아니었다.
엘란이 지키는 중앙 관문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탑주님, 22조가 탈진 상태입니다. 마나 고갈입니다······.”
“일일이 보고 하지 마라! 교대해줄 조를 바로 붙여. 어떻게든 저지선을 지켜야 한다.”
“교, 교대할 조가 더는 없습니다.”
“뭐라······.”
엘란은 그 말에 아연실색하였다.
벌써 이 싸움이 이어진지도 수 시간이었다. 오랜 시간 마나를 쌓으며 정진해온 마법사라면 아직 버티며 싸울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10년 안팎으로 마탑에 들어온 이후로 별 어려움 없이 높은 수준의 마법을 익혀온 젊은 마법사들은 마나의 깊이가 좀 얕은 편이었다.
‘교대할 예비조가 없다는 것은 싸움이 더는 성립이 안 된다는 얘기다.’
엘란은 이를 악물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저지선 자체가 무너지기 직전에 다다랐음이 보였다.
‘어쩔 도리가 없군. 이젠 물러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렇게 생각했을 때였다.
“오, 오우거가 온다!”
성벽에서 누군가가 그렇게 소리쳤다.
마침내 적들의 후방에 있던 오우거가 성벽의 앞까지 당도했다는 얘기다. 그리고 그 얘기는 이제부터 그들이 맞닥뜨려야 상황은 더더욱 최악이 되었다는 말이었다.
이미 결단은 내렸다.
물러나는 일만이 남았다.
엘란이 막 손을 번쩍 들어 올렸을 때였다.
별안간 그의 뒤편, 그리고 옆으로 광풍이 불었다.
그 바람의 궤적 끝. 그곳에 황금빛을 내뿜는 기사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외팔이였고, 기묘한 문자가 각인된 검을 들고서 허공을 단숨에 베었다.
그 순간, 푸른빛의 오러가 초승달의 형상으로 뿜어져 나오더니, 허공에 녹아들 듯이 사라졌다.
“아서 경!”
엘란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는 드래곤 기사단의 단장인 아서였다. 그가 지금 이 전장에 끼어든 것이다.
엘란이 땅을 박차고 날아오르듯이 성벽 위에 올랐다.
그러자 지척까지 당도한 오우거 한 기가 두 동강이 나면서 바닥에 널브러지는 모습이 들어왔다.
“제국을 지키는 검들이여, 황제 폐하의 가호가 우리와 함께한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마라. 그대들의 목숨은 이 땅에서 스러질지언정, 그대들의 이름은 영원히 이 땅에 울려 퍼지리라!”
아서는 용맹한 목소리로 소리치며 적진 한복판을 향해 내달렸다. 팔 하나를 잃긴 하였지만, 그의 실력과 힘이 어디로 사라지느 것은 아니었다. 마스터에 다다른 실력자. 그의 검이 매서운 춤을 추었고, 그때마다 몬스터들의 피가 허공을 수놓았다.
엘란이 그의 모습을 보며 주먹을 불끈 쥐었을 때였다.
부우우!
뒤쪽에서 별안간 뿔나팔 소리가 들려왔다. 모두의 시선이 뒤로 향했을 때, 머잖아 폐허를 헤치고 달려오는 말 한 기가 보였다. 전령이었다. 그 전령은 등 뒤에 커다란 깃발을 꽂은 채였다. 그것은 남부의 타일라드 공국의 문장이었다.
“왔구나. 그들이 왔어!”
엘란이 반색하며 그렇게 소리친 순간, 저편에서도 뿔나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전령이 바쁘게 달려오는 모습들이 곳곳에서 보이기 시작했다. 그들의 등에는 각기 다른 문장이 거침없이 펄럭이고 있었다.
“지원군이 왔다!”
엘란이 마나를 가득 담아 큰 목소리로 소리쳤다.
죽여도 죽여도 끝이 나지 않는 적들과 죽어나가는 아군의 모습에 사기가 떨어지던 병사들은 그 순간, 한목소리로 환호성을 터뜨렸다.
두두두두.
바로 그때, 전령의 뒤를 이어서 수십에서 수백 명에 이르는 사람이 말을 타고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하나같이 로브를 걸치고 있었는데, 그 색이 저마다 달랐다.
전 세계 각지의 마탑의 마법사들이 지금 이곳 한 자리에 집결한 순간이었다.
“오래 기다렸다! 지금부터 참전하겠다!”
적색 로브 마법사들의 선두에 있던 마법사가 그렇게 소리쳤다. 그의 이름은 블레이즈 델파인. 홍염의 마법사였다. 그리고 그의 제자 세 명이 바로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8
파지지직!
붉은 벼락이 다시 매섭게 솟구쳤다.
그리고.
쉬악!
또다시 세계 그 자체를 베어오는 검. 아슬아슬하게 제라드에게 미치지 못하였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 공격은 몹시 치명적이다. 쩍 벌어진 세계의 틈. 공허가 제라드를 집어삼키려 들었다.
“큭.”
제라드가 신음하며, 왜곡장을 펼쳤다. 공허의 틈을 없애고 싶었지만, 저것은 마법도 아니고, 어떤 현상을 만들어낸 것도 아니었다. 그저 이 세계를 부정하는 검격이었다.
스스스.
왜곡장이 불안정하게 뒤흔들리다가 찢겼다.
그러나 무의미한 저항은 아니었다. 왜곡장이 발생하면서 일어난 반발력으로 제라드는 거리를 벌렸다.
문제는 제라드가 그 일격을 피하려고 몇 가지의 수를 동시에 쓰는 동안, 녹스는 이미 다음 공격을 해오고 있었다는 것이다.
부우욱!
피할 수 없는 일격이 덮쳐왔다.
섀도우 마법을 펼친다 한들 공허의 틈에 마법 자체가 삼켜지게 될 것이다. 제라드마저 말이다.
‘별수 없어. 막을 수밖에!’
제라드의 눈동자가 찬란한 황금빛을 머금으며 빛났고, 그 순간 그의 등 뒤로 황금빛이 터져 나왔다. 아바타 마법이 발현된 것이다.
꽈앙!
위력적인 충격파가 일대를 휩쓸었다.
사방으로 뿜어져 나오는 충격파에 오크들이 나자빠지며 나뒹굴었다.
드드드드.
공기가 진동하며 떨리는 가운데, 흉광을 내뿜는 투구 안쪽에서 경이를 머금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엘사리우스로군. 이 세상이 아직 뒤틀리기 전에 존재했던 가장 아름다운 창조물이지. 하지만 알고 있을 터. 그걸로는 나를 막을 수 없다. 드래곤의 의지가 너의 세계에 깃들어 있다고 해도.”
도르륵.
붉게 타오르는 검. 그 안쪽에서 붉은 눈동자가 또다시 희번덕였다.
그 순간, 팽팽하였던 대치가 무너지고 제라드가 뒤로 주르르륵 밀려나기 시작했다. 힘의 차이는 역력하다. 드래곤의 의지를 한몸에 받아들였다고 해도 그 절대적인 차이는 아직 다 줄어든 게 아니었다. 무엇보다 ‘베리타스’는 마법, 그 자체를 소멸시키는 힘을 갖고 있었다.
제라드의 힘은 근본적으로 마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으니, 절대적인 근본개념에서 놈을 압도할 수가 없다는 얘기였다.
‘베리타스. 너는, 너는 그 안에 있는 거냐. 내가 느끼는, 나와 연결된 너는······ 이미 놈과 함께 세계의 의지와 함께하기로 한 거냐?’
드드드드득!
바로 그 순간, 엘사리우스 방패에 금이 가기 시작하였다. 제아무리 강력한 방패라고 해도 세계를 벤다는 그 절대적인 개념 앞에서는 그 방패조차도 오래 버티진 못한다.
“나의 유일한 이해자여, 하나가 된 세상 속에서 우리는 다시 만날 것이다. 질서로 가득한 세상에서.”
드드드득!
녹스의 작별인사와 함께 엘사리우스의 방패에 생긴 균열은 더욱 커졌다. 하지만 제라드는 이 순간까지도 포기하지 않았다. 그럴 수는 없었다. 무수한 사람들이 제라드를 믿고서 이곳에 왔다. 그들과 제라드, 모두가 이겨야만 이 싸움은 진정으로 승리할 수가 있었다.
‘······포기할 수 없어. 생각해라. 생각해, 제라드. 살아있는 한, 생각할 수 있는 한······ 그리고 싸울 수 있을 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생각하는 거야.’
제라드의 머리가 핑핑 돌아갔다.
세계와 접촉. 그 안에 무수한 해답과 진리를 지금 이 순간에 접목해 답을 찾기 시작하였다.
그 순간부터 시간이 아주 느리게 흐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세계가 알려주는 그 어떤 해답조차도 지금 이 순간을 타개할 답은 되지 못하였다.
‘정말로 방법이 없다는 건가.’
제라드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구체적인 질문 혹은 요구에만 대답할 수 있음. 명확하지 않은 말은 지나치게 많고 의미없는 결론을 도출함.]
높낮이가 없는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별안간 제라드의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제라드의 눈이 더 커질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이 목소리! 이 익숙한 목소리가 누구의 것인지 그는 알고 있었다.
‘베리타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조금 전에 들렸던 목소리를 이정표로 삼고 연결된 감각을 따라가자, 희미하지만 분명한 연결이 느껴지기 시작하였다.
‘검이 아니다. 저 검의 내부에는 베리타스가 없다!’
그곳이 아니었다.
그보다 훨씬 더 깊숙한 곳.
“베리타스, 줄곧 거기에 있었구나. 너는 저 안에 삼켜지지 않았어. 줄곧 나를 기다리고 있던 거야.”
제라드가 떨리는 목소리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의 시선은 녹스의 흉갑에 꽂혀 있었다.
“무슨 소리를······.”
녹스의 목소리가 무섭게 변했다.
그러나 그런 상황과는 아랑곳없이 제라드는 녹스의 갑옷 중심에서 은은한 녹색광이 흘러나오는 것을 보았다. 그곳엔 눈동자가 있었다. 몹시 익숙한 시선이 제라드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끝까지 추하게 저항하겠다는 것인가!”
녹스가 위험을 느끼고 다급히 모든 힘을 전개하려고 할 때였다.
“베리타스, 내 곁으로 이제 돌아와!”
제라드는 오랜 연인, 혹은 친구를 그리워하듯이 그렇게 소리쳤다.
그 순간.
콰드드드득!
녹스의 몸 가운데에서 균열이 피어났다.
< 베리타스3 > 끝
ⓒ 양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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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리타스4 >
9
콰드드드득!
갑주에 균열이 일어났다.
움찔.
무섭게 제라드를 짓눌러오던 녹스의 몸이 바르르 떨렸다.
쉬이이익.
균열이 일어난 부위에서 연기처럼 검은색 기운이 흘러나오기 시작하였다. 녹스의 투구 안에서 붉은 흉광이 요란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베리타스는 하나다. 이제 하나가 되었다. 나의 의지와 함께하고 있다.”
녹스는 그렇게 외치며 지옥불에 맺힌 기운을 강렬하게 쏟아냈다.
콰콰콰콰!
대지가 함께 깎여나가면서 제라드의 몸이 지상을 긁으면서 저편으로 밀려났다.
드드득!
엘사리우스가 깨지면서 흩어졌다.
조금 전의 일격은 제라드가 타격을 크게 입은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가 않았다.
‘나를 밀쳐냈다. 거리를 벌린 거야.’
확실했다. 녹스의 기동성은 상상을 초월했다. 검은 군마는 그림자처럼 허공에 녹아들기도 했고, 다시 불쑥 치솟기도 했다. 지금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것은 그의 의지와 함께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도 녹스는 일부러 제라드와의 거리를 벌렸다. 쫓아내듯이 말이다.
‘균열을 일으키는 건가?’
제라드는 조금 전 이상했던 녹스의 반응을 보았다.
갑주에 생겨난 균열과 그 안에서 힘이 흘러나오는 광경.
‘그래, 틀림없다. 실험해보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목숨을 걸어야만 해. 엘사리우스는 깨졌다.’
엘사리우스는 실체가 아니다. 하지만 세계의 기록에 근거하는 개념 그 자체다. 그것이 깨져버렸다는 것은 다시는 부를 수 없다는 말과도 같았다.
“날 도와다오, 베리타스.”
제라드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하늘 위로 둥실 떠올랐다.
지지지징.
예의 마법술식이 빛을 내뿜고 하늘에서는 푸른 벼락을 머금은 구름이 엄청난 속도로 모여들었다. 제라드는 지금 자신이 전개할 수 있는 모든 마법술식을 한 번에 개방할 셈이었다.
녹스의 검이 있는 한 그 마법은 모두 파괴되어버리겠지만, 중요한 건 마법으로 그를 어찌한다는 게 아니다.
제라드가 손을 휘저었다.
그 순간, 수십 개의 황금빛 마법술식이 빛을 뿜으며 빛을 쏟아냈다.
쿠콰콰쾅!
땅을 요란하게 박살 내는 세찬 불꽃이 치솟는 가운데, 직격타는 단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다. 모두 간발의 차이로 검에서 뿜어져나온 붉은 빛과 함께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라드는 바로 땅을 뒤흔들었고, 동시에 왜곡장을 일으켰다.
“몇 번을 해도 통하지 않는다.”
녹스는 단언하며 검을 휘둘렀다. 게걸스러운 이빨처럼 쩍 벌어지는 검에서 번쩍 튀는 붉은빛이 모조리 마법을 짓이기는 가운데, 제라드는 어느새 그곳에 없었다.
녹스가 바로 제라드의 감각을 따라 검을 부웅 휘둘러 갔다. 엘사리우스를 잃은 지금의 제라드는 이 일격을 받아낼 수 없었다.
“이걸로 끝이다.”
그러나 그런 녹스의 계산은 어긋났다.
콰드드드득!
몸 중심부에서 시작된 균열이 엄청난 기세로 몸에 가득 퍼졌다. 모든 움직임이 거기서 그쳤고, 몸이 더는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우뚝 멈춰선 녹스의 몸 전신에 생겨난 균열. 그곳에서 검은 연기가 엄청난 기세로 흘러나왔다.
“크으으. 기어이······.”
두두두둑.
녹스가 고개를 내렸다. 그의 가슴팍 언저리. 그 균열의 저편에 녹색 눈동자가 그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얌전히 이 세계의 의지에 동화되어라!”
녹스가 명령하였다.
그 순간.
[사용자가 아닌 자의 명령을 따를 이유 없음.]
그 목소리와 함께 두두두둑! 갑주가 완전히 부서졌고, 그 안에서 빛 덩어리가 튀어나왔다.
“크헉!”
녹스는 몸 전체가 뒤틀리는 감각에 낮게 신음을 토했다. 그의 몸에서 뽑혀나간 하나의 열쇠는 제라드의 가슴에 스며들었다. 그러더니, 이내 검은색의 마도서의 형태로 변했다.
“녹스, 내 친구가 그동안 거기서 신세를 많이 지고 있던 것 같군. 이제는 내가 데리고 가겠어.”
으드득.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모든 것이 끝나기까지는 고작 한 걸음이 남았을 뿐이야.”
녹스는 그렇게 말하며 가슴팍의 공허를 닫았다. 몸에 생겨났던 균열이 모두 사라지고, 녹스는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제라드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이제 어쩐다. 스펠 브레이커가 있는 한 마법으로 타격을 입힐 방법이 없다. 먼저 스펠 브레이커를 걷어내지 않는다면······.’
제라드가 그렇게 생각을 정리할 때였다.
별안간 그의 머릿속에 어떤 방법들이 나열되었다.
‘베리타스.’
제라드는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는 검은색 마도서의 모습이 보였다. 잠깐 잊고 있었다. 지금 제라드는 혼자 싸우는 게 아니었다.
“좋아, 무슨 말인지 알겠어. 한 번 해보자.”
제라드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또다시 마법술식을 전개했다.
“분명히 통하지 않는다고 했을 텐데.”
녹스가 지옥불의 칼을 들어 올렸다. 어떤 마법이든 부숴주겠노라고 말하는 듯한 모습. 하지만 지금 제라드가 사용하고자 하는 것은 단순한 마법이 아니다.
“열려라, 문이여.”
제라드의 뒤쪽으로 황금빛 고리가 나타났다. 그 안은 신비로운 빛으로 소용돌이쳤다. 아스트랄 라인의 빛처럼 말이다.
그랬다. 그것은 세계의 문.
지식의 보고이자, 세계의 기록이다.
쓰스스스.
제라드의 아바타가 그 안에 손을 넣어 어떤 무구를 뽑아들었다.
“광휘의 검, 알렌드로······.”
녹스가 그 검의 정체를 알아보았다.
제1시대 전설의 대장장이 드워프 세 명이 모든 힘을 합쳐 만든 검. 그것은 드래곤조차도 썽둥 베어버릴 수 있다고 하는 검이었다.
“알렌드로로 나를 벨 수 있다고 여겼나.”
녹스가 그렇게 말하는 사이, 제라드의 신형은 바람을 타고 미끄러지며 단숨에 쇄도하였다.
그렇게 두 사람의 거리가 엄청난 속도로 가까워졌을 때, 제라드의 아바타가 든 거대한 빛의 검이 무서운 기세로 쏟아졌다.
콰아앙!
또다시 발생한 강력한 충격파.
어느 쪽도 밀려나는 일이 없이 팽팽한 상태가 한동안 계속 되었으나, 이내 광휘의 검 알렌드로에 균열이 생겨났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귀결이다. 엘사리우스조차도 부순 검이 아니던가.
“끝내자.”
녹스는 이번에야말로 끝을 낼 각오로 빛이 되어 흩날리는 검 사이로 지옥불의 칼을 들이밀어왔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빛이 번쩍 터지더니, 새로운 무구가 그 칼을 막았다.
콰가가각!
이슬로 벼린 천년의 창.
쇠퇴하기 이전 엘프 종족의 모든 정수를 담아서 만들었다고 하는 세계수의 가시였다.
드드드드.
공기가 요동치고 땅이 진동하는 가운데, 녹스의 붉은 흉광이 흔들렸다.
“어째서냐.”
알렌드로는 한 번에 부쉈는데, 세계수의 가시는 부러지는 일도 없이 튼튼하였다. 그러기는 오히려.
콰드득.
녹스의 몸에서 다시금 균열이 일어났다. 그리고 그 균열에서 검은 연기가 밖으로 흘러나왔다.
쉬이이이익.
꽈앙!
녹스가 제라드의 아바타가 휘두르는 창을 튕겨내고 거리를 벌리려고 하였다. 하지만 제라드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집요하게 따라붙었다.
꽝! 콰콰쾅!
한 번의 검격이 오갈 때마다 녹스의 몸에 생긴 균열은 더욱 커졌다. 그리고 그 안에서 흘러나오는 검은 연기는 더욱 짙어졌으니.
녹스는 더는 안 된다고 판단한 듯, 검은 군마를 일으키며 물러나려고 하였다. 하지만 세계수의 가시는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푸확!
히히히힝!
군마의 몸통이 찢기며 왈칵 검은 피가 하늘로 치솟았다.
자세가 흐트러진 녹스가 다급히 검을 휘둘러왔다.
꽈앙!
가까스로 막은 공격. 하지만 녹스의 모습은 불안정했다. 전신의 갑주가 이미 한계에 다다른 것처럼 균열이 가득하였던 것이다.
“뭘 한 것이냐!”
녹스가 고함을 지르며 칼에 깃든 부정의 힘을 더욱 폭발시켰다.
콰콰콰콰!
쏟아져나오는 붉은색 기류가 넘실넘실 터져나오면서 세계수의 가시도 균열이 만들어지더니 이내 깨지고 말았다.
제라드는 마법의 장벽 수십 개를 만들어 그 힘을 상쇄하며 뒤로 물러났다. 다시 둘의 거리가 벌어졌고, 그곳에 녹스가 처음과는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초라한 모습을 하는 모습이 보였다.
스스스.
어깨의 갑주가 무너지며 그 안쪽에서 희미한 어둠이 흘러나오다가 형태를 잃고 사라졌다.
“이놈, 이제 알겠다······. 네놈, 내 안에 존재하는 열쇠를 파괴하고 있구나!”
10
‘녹스가 드디어 알았구나.’
생각했던 것보다 더 늦게 알아챘다.
운이 좋았다.
상황은 이제 제라드에게 아주 유리해져 있었다.
‘베리타스, 모두 네 덕분이다.’
제라드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뒤쪽에 있는 아바타에 정신을 기울였다.
지금 베리타스는 아바타와 완전히 동기화한 상태였다.
즉, 아바타는 제라드의 의지와 베리타스의 의지가 맞물려있는 상태였다.
격돌 내내 베리타스는 녹스의 몸 내부에 녹아서 꽉 차 있는 열쇠의 힘을 없애는 데 주력하였고, 그 결과는 지금 여실히 드러나고 있었다.
후두둑.
녹스의 전신 갑주는 이제 너덜거리고 있었고, 몸 전체의 균열은 더는 어떻게 해도 감출 수가 없었다.
“어째서 저항하지. 이 세계는 그릇되었다. 잘못되었어. 올바른 순환의 의지는 바로 나에게 있다. 내가 곧 순환의 의지다. 그런데 어째서 나의 뜻에 반발하는가, 성유물이여. 모든 것이 하나가 되어야 할 시간이 되었건만, 어째서!”
녹스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양손으로 칼을 쥐었다. 검에서 이글이글 피어오르던 파멸의 빛도 이제는 약해져 있었다.
그러나 제라드도 상황이 좋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세계의 문을 연 상태에서 아바타 마법을 사용하였고, 그 안에서 계속 무구를 뽑아내고 있었다. 방대한 마나가 소모되었고, 남은 마나는 바닥을 치고 있었다.
터벅터벅.
녹스가 다가왔다.
그 걸음은 무거웠다.
“잘못되었다. 잘못된 것을 바로잡으려는 것이다. 그게 질서다. 나는 질서의 화신이야. 그런데 어째서 날 막느냐······.”
“내가 마법사이기 때문이다.”
“뭐······ 라고?”
“마법사는 진리를 추구하는 자. 질서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파괴 속에서 찾을 진리는 하나뿐이다. 그러는 당신은 도대체 누구지? 지금 내 앞에 서 있는 당신은 ‘누구로서’ 이곳에 있는 것인가.”
제라드는 엄격한 목소리로 그렇게 물었다.
그러자.
촤르륵.
그의 투구가 벗겨졌다. 그 안에서 피폐한 얼굴을 한 녹스가 나타났다. 그의 얼굴은 두려움으로 질려 있었다.
“나를 똑똑히 보라! 나의 이름은 녹스다. 어째서 나를 부정하는가!”
유일한 이해자.
이 세계에 유일하게 녹스를 아는 자.
제라드는 녹스에게 그런 존재였다.
그런데 지금 그가 그의 정체를 묻고 있었다.
그러나 마법사의 목소리는 차갑다.
“껍데기가 무엇인지 묻는 게 아니다. 나는 그대가 누구의 의지를 따라 이곳에 있는 것인지,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자행하는지를 묻는 것이다.”
“껍데기! 껍데기라고. 나를, 나를 부정하는가!”
녹스는 검은 군마를 일으켰다. 그림자 속에서 뿜어져 나오듯이 나타나는 검은 군마조차도 이젠 후두둑 흩어지고 있었다. 제라드는 피하지 않았다. 가엾은 자. 이전 세계에서 다 끝내지 못한 기저의 의지가 그의 운명을 이곳까지 이끌었다.
녹스는 너무 긴 시간 동안 고통을 받았다.
“끝내자.”
제라드는 베리타스에게 말했고, 황금빛의 거신은 세계의 문 저편에서 또 다른 무구를 꺼내 들었다.
그것은 칼이었다.
연약하게 태어난 인류의 첫걸음을 기념하고 그들의 안녕과 번영을 염원하며 주조된 무구. 그것은 인간에 의해 쓰인 찬란한 제2시대를 상징하는 것이었고, 시대의 끝자락에 다다라 미치광이 황제에 의해 용암에 내던져 사라져버린 축복의 검, 맨카인드였다.
칼과 칼이 부딪쳤다.
녹스의 영혼을 집어삼킨 파멸적인 진리가 게걸스럽게 이빨을 들이밀며, 연약한 검에 깃든 힘을 집어삼키려고 들었다.
그러나 그 칼은 끝끝내 부러지는 일이 없었다.
맨카인드는 찬란하게 빛나진 않았지만, 굳건하였고 강력하지는 않았지만, 부러지는 일이 없었다.
그러는 사이에도 녹스의 몸에서는 검은 연기가 계속 흘러나왔다. 그의 몸 깊숙한 곳에서 균형을 잃은 힘이 폭주했고, 열쇠라는 형태로 존재했던 힘들이 흔적을 잃고 있었다.
그리하여, 여덟 조각으로 나뉘었던 열쇠는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듯 단 두 개가 되었다.
아주 먼 옛날, 구원의 서와 파멸의 서로 나뉘게 되었던 그때처럼 말이다.
이곳엔 오직 두 개의 베리타스만이 서로 적대상황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 베리타스4 > 끝
ⓒ 양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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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리타스5 >
11
쉬이이익.
녹스의 몸에서 검은 연기가 쉴 새 없이 피어올랐다.
처음만 해도 녹스가 압도적으로 유리하였던 이 싸움은 이제 전혀 다른 방향을 향해서 나아가고 있었다.
투두둑.
검은색 갑주가 바스러지며 조각조각 흩어졌다. 이제 몸을 가리고 있던 어둠의 갑주는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수백 년······ 수천 년······. 나는 긴 시간을 기다려왔다. 이 세계가 때를 맞이하는 그 순간을 말이다. 그리고 지금이 바로 그때다. 고작 한 발자국을 앞에 두고 있단 말이다.”
녹스가 비틀거리며 제라드를 노려보았다.
일렁이는 투구의 어둠에서 붉은 흉광이 줄기줄기 뿜어져 나왔다. 그 눈빛에 깃든 살기가 무섭게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너는 그저 이 세계의 방어기제일 뿐이야······. 나는 지금껏 수도 없이 그것들을 해치워왔다. 그러니 너도 결국엔 사라져야 할 존재다, 제라드 란스터!”
쑤악!
공간을 접고 날아드는 녹스. 하지만 그 공격은 더는 전처럼 날카롭지도 무겁지도 않았다.
지옥불을 머금은 칼은 그저 무디게 허공을 갈랐고.
꽈앙!
맨카인드의 앞에 가로막혔을 따름이다.
드드드드.
검과 검이 부딪치며 힘겨루기가 이어졌다.
그러나 그 힘도 파괴력도 전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베리타스는 녹스의 내부에서 그의 본질을 꿰뚫고 말았다. 그 약점과 구조적 결손, 모든 것을 말이다.
콰드드득.
녹스의 바로 뒤쪽에서 공간이 뒤틀리기 시작하였다.
갑주가 부서지는 속도가 더욱 빨라지는 와중에 녹스의 몸에서 검은색 어둠이 일렁이며 피어올랐다. 그것은 열쇠에 깃들었던 힘이 아니었다. 녹스 개인의 본질. 어둠의 마법이다.
‘끝났구나.’
제라드는 그렇게 생각했다.
녹스에게 어둠의 마법은 밑천이다. 그것을 보여준 그에게는 더는 힘이 남아 있지 않다는 말과 같았다.
즉, 눈앞의 존재가 파멸의 대행자에서 녹스라는 한 사람으로 격하되었다는 얘기다. 그리고 그가 마법으로 제라드를 능가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우드드득!
어둠은 왜곡에 짓이겨졌고, 녹스의 몸이 뒤틀리며 튕겨 나갔다.
“커헉!”
바닥을 나뒹구는 녹스. 아마 조금 전의 마법으로 이미 온몸의 뼈가 으스러졌을 터였다.
“나는 이, 이대로······.”
갈라지는 신음에 제라드는 측은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이미 충분히 고통받았다. 이제 그를 편하게 해주자.’
바로 그 순간, 하늘에 마법술식이 만들어졌다.
지지징.
빛이 눈 깜짝할 사이에 모여들었고, 그것은 이내 허공을 가르고 무서운 기세로 쏟아졌다. 지상에 불꽃이 터졌고, 땅이 무너지는 듯한 진동이 울렸다.
드드드드.
서 있기 어려울 정도의 진동 속에서도 교전의 굉음은 여전히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꽈르릉!
붉은 벼락이 떨어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우렁찬 굉음이 세상을 가득 메웠고, 비명과 마법의 충격파가 대지를 가득 메웠다.
“방패로 밀어!”
“창병!”
“뭘 하고 있어. 뒤로 물러나란 말이다!”
피범벅이 되어버린 성벽 안팎에서 여러 고함이 한데로 뒤섞였다. 제라드와 녹스의 싸움이 곧 끝을 맞이하는 지금, 이곳의 싸움은 한창 무르익었다고 해도 좋았다.
“오, 오우거가 무너진다! 피햇!”
콰아아앙!
성벽 한쪽이 무너져내렸다.
실력이 빼어난 기사단이 파상 공격을 펼치며 오우거의 하반신을 집중적으로 공격한 결과가 나타난 것이다.
다만, 하필이면 그 오우거가 쓰러진 방향이 이곳이라는 점이 문제였다.
그나마 한 가지 다행인 점은 이 와중에 제국군의 사기가 하늘을 찌를 듯이 높았다는 것이다.
“무너진 성벽을 에워싼다! 그리고 부상자들을 최대한 뒤로 빼는 거다!”
고함이 쩌렁쩌렁 울리는 와중에 무너진 성벽으로 한 사람이 달려나갔다. 가벼운 갑주차림에 무기도 없이 말이다.
그의 이름은 엑셀란.
마스터라고 불리는 인물 중 한 명이었다.
이곳 성벽이 무너졌음을 알고 바로 이곳에 합류한 것이다.
퍼엉!
흩날리는 먼지 속으로 기어들어오는 오크 한 마리 얼굴에 주먹을 꽂아 터뜨리며, 거침없이 달려나간 그는 밖에 떡 하니 자리를 잡았다.
“퉷! 도무지 끝이 안 보이는군. 망할 것들. 이곳에 들어오고 싶으면 나부터 넘어야 할 것이다!”
엑셀란은 그렇게 큰소리를 쳤다.
지원군이 온 뒤로 상황은 훨씬 좋아졌지만, 여전히 상황은 팽팽하게 돌아가는 듯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말이다.
“음? 뭔가가 이상하군······.”
성벽 위에서 손가락을 튕기며 뇌전구를 쏟아내던 케이틀란이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하였다.
“왜 그러십니까, 탑주님. 혹시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적들의 후위를 보게.”
청색 마탑주 케이틀란의 곁을 지키던 마법사가 그 말에 시선을 저 먼 곳까지 옮겨갔다. 끝이 없는 것처럼 보였던 적 몬스터들의 무리 저편. 그곳에서 괴상한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어?”
지금 그 광경은 그만 본 게 아니었다.
성벽 위에 있는 다른 마탑의 마법사들 역시도 그 광경을 목격했다.
“몬스터들이 쓰러지고 있다.”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지?”
몬스터들이 갑자기 실이 끊긴 것처럼 툭툭 쓰러지더니 다시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이상한 것은 그뿐만이 아니다.
“엇! 노, 놈들이 물러간다.”
갑자기 몬스터들이 성벽이 아니라, 저 뒤쪽으로 방향을 돌려서 달려가기 시작했다.
“이, 이겼다! 우리가 승리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병사들이 그렇게 소리쳤다.
그러나 그건 정확한 말이 아니었다. 적어도 이 자리에 있는 고위 마법사들은 지금 이 상황이 승리와는 거리가 먼 상황임을 바로 알았다. 그들에게는 훤히 보였던 것이다.
“저곳에 있는 무엇인가가 영혼을 거두고 있다.”
12
고오오오.
제라드의 얼굴이 굳었다.
열쇠의 힘으로 삶을 연명해왔던 녹스. 그 녹스의 내부에 깃든 열쇠의 힘은 베리타스의 개입으로 형태와 힘을 잃었다.
이젠 죽음을 막는 것만으로도 벅찬 녹스는 스펠 브레이커를 제대로 사용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마법포격을 막을 방법도 없다는 얘기였다.
‘분명히 그랬을 텐데.’
제라드는 연기 너머에서 녹스의 기척을 여전히 느끼고 있었다.
우드드득!
별안간 뼈가 이리저리 갈리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제라드가 바람을 일으켰다.
폭연과 흙먼지가 한 번에 사라지고, 그 안에 있는 녹스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그것은 더는 녹스가 아니었다.
“저게······ 도대체 뭐지?”
제라드가 그렇게 중얼거린 순간, 베리타스가 그에게 대신 대답해주었다.
[‘열쇠’가 사용자를 지배하에 둔 상태.]
그 순간, 제라드의 눈동자가 혐오로 가득 일그러졌다.
“지배하에 두었다고? 지금 저걸 그렇게 순화해서 표현할 수 있는 건가?”
두두두둑!
그 순간, 녹스의 몸이 뒤틀렸다.
팔이 있어야 할 위치가 바뀌고 뼈가 꺾인다. 살이 부풀어 오른다. 쩍쩍 갈라지고 근육이 부풀어 오른다. 몸 전신에서 핏물이 흘러내리는 가운데, 제라드는 보았다. 이 일대 가득한 죽음이 녹스에게 쏟아지듯이 흘러들어오는 것을 말이다.
우지직!
녹스는 죽었다. 그의 영혼은 지금 저 안에 가득한 영혼의 파도 안에 하나일 뿐이었다.
제라드는 저것의 정체를 꿰뚫었다.
“영혼석. 스스로 영혼석의 함이 되려고 하는구나. 영혼의 힘을 이용해 문을 열려고 하는 거야!”
그 순간, 제라드는 있는 힘껏 마나를 개방했다. 다시금 아바타 마법이 빛을 발하고, 세계의 문 저편에서 맨카인드가 뽑혀 나왔다.
마법의 빛이 깃든 칼이 무섭게 영혼함을 향해 쏟아질 찰나.
뚜두두두둑!
살덩어리들이 엉겨서 부풀어 오르더니 촉수 다발 따위가 되어서 검을 받아냈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맨카인드가 고작 살점 덩어리에 막히다니.
그러나 그 의문은 바로 풀렸다.
비대해진 살덩어리. 그 표면에 핏물을 흘리는 사람의 얼굴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셀 수도 없이 많은 얼굴이 말이다. 그것들은 영혼의 상징이었다. 사람들과 기타 수많은 영혼들로 거대해진 저것의 의지는 인류 그 자체라고 해도 좋다. 맨카인드로는 어찌할 도리가 없다.
그러는 사이, 영혼함의 덩치는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대체 어디에서 이 많은 영혼을······ 설마?”
제라드가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 아리만을 공격하던 몬스터들이 이곳으로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가장 선두부터 이내 픽픽 고꾸라지며 땅에 쓰러지는 모습들이 보였다. 영혼함이 그들의 몸에서 영혼을 강제로 빨아들이는 것이다. 이 일련의 현상은 시간이 지날수록 빨라졌고, 점차 범위를 넓혀가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제라드는 고개를 돌렸다.
지금은 몬스터였지만, 조금만 더 지체하면 아리만을 지키는 병사들과 마법사. 그 후에는 사람들이 휘말리게 될 것이다.
그 순간, 제라드의 몸이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맨카인드로 안 된다면 벼락의 검으로 막을 뿐이다.
세계의 문 안쪽으로 맨카인드가 사라지고, 하늘에 모인 구름에서 푸른 벼락이 떨어졌다.
꽈르르릉!
아바타는 낙뢰를 붙잡고 단숨에 파멸의 베리타스를 향해 공격해나갔다. 하지만 그 뇌전의 검은 비대해진 영혼석의 함에 다다르기 전에 붉은 스파크를 일으키며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스펠 브레이커까지 사용한다는 거냐······.”
제라드가 낮게 신음했다.
파멸의 베리타스의 내부에는 모든 마법을 파괴하는 힘이 존재했다. 그리고 그것을 사용할 수 있는 영혼이라는 에너지원도 가득했다.
“베리타스, 무슨 수로 저걸 막아야 하는 거야. 이대로 의식이 완료되어 모든 것이 사라지는 걸 가만히 두고 볼 수는 없어!”
제라드가 그렇게 다급하게 소리친 순간이었다. 그의 머릿속으로 한 인간의 뇌로는 절대로 담아낼 수 없는 방대한 양의 마법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러자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제라드가 몸을 바르르 떨었다.
제라드의 눈동자 깊숙한 곳에서 파충류의 그것과 같은 빛을 머금은 동공이 확장했다가 수축하기를 반복하였다. 베리타스가 제라드에게 알려준 것은 지금 눈앞에서 치러지는 의식이 어떤 것인지에 관한 것뿐이었다.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은 아니다.
그러나 그거면 충분했다. 마법에는 선도 악도 없다. 그저 단순한 사실만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진리를 찾는 것은 마법사의 몫이었다.
휘오오.
제라드의 몸이 허공에 떠올랐다.
황금빛 찬란한 그가 어둠을 지우며 하늘에 떠올랐을 때, 저 멀리 성벽에 있던 이들이 모두 그의 모습을 보았다.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지?”
누군가가 그렇게 중얼거렸을 때, 제라드의 머리 위로 거대한 마법술식이 나타났다. 하늘만이 아니다. 바닥에도 그 마법술식이 새겨지듯이 나타났다.
그 일대가 외부와 격리되는 듯한 모습이었다.
“제라드가 뭔가를 하고 있다.”
케이틀란이 그렇게 중얼거리더니, 다급히 아래로 달려갔다.
히히힝!
말 위에 오른 그는 몬스터들이 달려가는 방향을 향해 나아갔다. 그게 시작이었다. 다른 마법사들도 케이틀란의 뒤를 따랐다.
“우리도 마법사들을 따른다!”
기사들도 뒤늦게 그렇게 소리치며 그 뒤로 따라붙었다.
13
‘되었다.’
제라드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드리웠다.
가장 먼저 저 영혼함이 더 많은 영혼을 끌어오지 못하도록 주변과 격리하는 데 성공했다.
이제 남은 것은 문을 닫는 의식을 지금의 의식 위에 덧씌우는 일뿐이다. 본래라면 모든 열쇠를 하나로 만들어 의식을 진행해야 했지만, 지금은 어쩔 도리가 없는 상황이다.
‘하지만 조건은 갖추어졌다. 3시대가 되어서 여덟 개로 나뉘게 된 파멸의 서와 구원의 서는 모두 이곳에 있고, 완벽하게 활성화되어 있다. 마법은 존재할 뿐.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는가는 마법사의 몫이다.’
제라드는 자신의 베리타스와 저 아래 영혼함의 주축인 베리타스의 힘을 모두 끌어올려 이대로 문을 닫아버릴 참이었다. 그 자신이 촉매가 되어서 말이다.
그러나 파멸의 의지는 그 상황을 가만히 지켜보지 않았다. 곧 영혼함 내부의 비대한 살덩어리들이 뚜두둑 찢어지고 엉겨붙더니, 수십 개의 촉수다발이 되어 제라드를 향해 날아들었다.
“방해인가.”
제라드가 혀를 차며 허공에 폭발을 일으켰다.
콰앙!
불꽃이 터지며 촉수 다발이 터졌다. 하지만 이내 마법의 불꽃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영혼함이 스펠 브레이커를 발동한 것이다.
‘좋지 않다. 놈이 방해하기 시작하면 의식을 끝까지 진행할 수 없어. 이건 아바타 마법으로 전투를 진행하면서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손쉬운 마법이 아니야.’
대마법(大魔法).
제라드의 모든 역량을 다 사용해도 아슬아슬한데, 싸움까지 하면서 상황을 진행한다는 것은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제라드의 마나는 이미 바닥을 치고 있다. 세계의 마나를 끌어와야 하는 지금, 싸움까지 해나간다는 것은 몸에 막대한 무리를 주는 일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할 수밖에.’
제라드가 이를 악문 순간이었다.
쑤아아악!
공간을 짓이기고 날아드는 초승달의 오러가 제라드를 향해 날아들던 촉수 수십 개를 한 번에 찢어발겼다.
제라드가 깜짝 놀란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그제야 저편의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저 아래, 몬스터들을 해치우며, 무서운 기세로 이곳을 향해 달려오는 이들의 모습이 보였다.
아서, 엑셀란, 드라이곤, 케이시, 필립, 카일 등. 그 외에도 무수한 마법사들과 기사들의 모습이 보였다.
“제라드!”
“대마법사님!”
그들이 제라드를 불렀다.
푸확!
자신들을 막아서는 몬스터를 물리치고, 어느새 10미터에 육박하는 거대한 크기 되어 꿈틀대는 영혼함에서 날아드는 촉수 다발을 찢으면서 이곳에 다가오고 있었다.
‘그렇구나.’
제라드의 입가에 미소가 드리웠다.
그는 지금 이곳에 혼자 있는 게 아니었다.
온통 어둠이 가득한 하늘은 어쩐지 가까웠고, 아스트랄 라인은 이 순간에도 아름답게 빛을 내뿜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근원과 이어지는 문이 존재했다. 빛이 새어나온 구멍.
제라드는 고개를 들어 그 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푸확!
제라드가 신경 쓰지 못하는 사이, 또 촉수가 찢기며 바닥을 나뒹굴었다.
‘익숙한 기운. 섬전. 스승님의 마법이구나.’
화르륵!
‘뜨거운 열기. 이건 블레이즈 스승님인가.’
보지 않아도 느껴진다. 마법사에게 자신의 마법이란 생애의 증명이기 때문이다.
마법사뿐만이 아니다. 검술로 이뤄내는 오러의 칼날조차도 마법이나 다름없다. 하나하나가 저마다 다른 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이곳에 있는 것은 제라드의 의지만이 아니었다.
이 세계가 맞이할 운명에 저항하는 자들의 의지가 이곳에서 선명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그것들이 한둘식 모여서 우리가 되었을 때, 그것은 곧 세계를 향한 의지 표명이며 이 모든 흐름에 대한 반역이 된다.
시대는 바야흐로 내일을 바라고 있다.
“진리는 저 안에만 있는 게 아니야.”
그 순간, 제라드의 온몸이 드래고닉 패턴으로 가득해졌고 전신에서 빛이 뿜어져나오듯이 흘러나왔다. 그 빛은 점점 더 강해졌고, 이내 제라드의 전신만이 아니라, 혐오스럽게 꿈틀대는 영혼함까지 그 빛에 삼켜졌다.
빛은 하늘 높이, 세계의 구멍 중심에 다다랐다.
언젠가 하늘의 문이 열렸던 그때처럼.
이번에는 문을 닫는다.
< 베리타스5 > 끝
ⓒ 양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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