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멸의 그림자1 >
11
블랙 오크는 정말로 강력한 몬스터다. 그들 한 마리는 일반 오크 대여섯 마리는 우습게 상대할 수 있을 정도로 완력이 대단하였고, 그들의 가죽은 강철과도 같다. 오러를 두르지 않은 검은 우습게 튕겨낼 정도였다.
라시드 백작령의 병사들이 제아무리 강군이라고 해도 그들 모두가 오러를 다루는 것은 아니었다. 그 말인즉슨 그들 한사람 한 사람이 블랙 오크를 상대하는 건 어림도 없는 일이라는 얘기였다.
실제로 블랙 오크의 녹슨 망치가 크게 휘둘러질 때면 제대로 반응하지도 못하고 나가떨어지는 병사들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놀라운 건 그 이후였다.
단숨에 전투불능에 빠져도 이상하지 않을 병사들이 일어나서 다시금 맞서 싸우는 것이다. 그것도 쓰러질 때마다 점점 더 강해지면서 말이다. 그것은 단순히 정신력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었다.
제라드의 표정은 서서히 굳어가고 있었다.
‘변화.’
제라드가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쓰러진 병사들이 이내 다시 일어나서 싸우는 광경. 그 현상의 중심에는 바로 변화가 있었다. 투구와 갑주로 감춰지기는 하였으나, 제라드의 눈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블랙 오크의 맹공에 쓰러졌다가 다시 일어나는 병사들의 몸은 그전보다 부풀었고, 그들의 눈빛에서 흘러나오는 광기는 전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제라드는 기시감을 느꼈다.
베너하임 공국의 동부 시가지.
그곳에서 드래곤 하트의 생체조직을 받아들여 그 거대한 생명력에 서서히 삼켜지던 어리석은 존재들이 지금 이 순간 떠올랐다.
‘설마, 그들이······.’
메시우스의 그 감각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 감각은 저들이 지키고 있는 그 무엇이 내뿜는 힘이 만들어내는 특별한 현상 그 자체라고 해도 좋을 터였다.
“크워어어!”
가만히 병사들을 지켜보던 제라드에게 고함을 내지르며 달려오는 한 마리의 오크. 기세가 여간 사나운 게 아니었다.
그러나 녀석의 공격이 닿기 직전의 순간, 보이지 않는 바람의 칼이 블랙 오크의 몸을 난자해버렸다. 팔 다리가 썽둥 잘려나간 블랙 오크가 허무하게 바닥에 나뒹굴었다.
“직접 확인해보는 수밖에.”
제라드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콰아앙!
별안간 블랙 오크의 무리 중심에서 화염이 폭발하였다.
그 폭발이 심상치 않았다.
블랙 오크 여러 마리가 시꺼멓게 타서 허공에 날아올랐다가 바닥에 처참하게 떨어졌다.
“뭐지? 마법이 실패한 건가?”
대열 전체를 통제하던 기사들이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럴 수밖에.
라시드 백작령에는 마법사가 둘 밖에 없었고, 그 두 사람은 지금 이곳이 아니라, 성문쪽에 있었다. 그러니 블랙 오크들 사이에 껴 있는 오크 샤먼이 마법을 잘못 사용했다고 생각할 수밖에.
그러나 그 생각은 곧 바뀌었다.
콰앙! 콰콰쾅!
연이어 무시무시한 폭발이 블랙 오크들의 무리 중심에서 이어졌다. 검은 화염이 하늘 높이 솟구칠 때면 블랙 오크 수십여 마리가 한꺼번에 나자빠지기 바쁘다.
바로 그때, 그들 중 몇몇이 폭연 속을 누비는 한 사람을 발견하였다. 누더기와 같은 망토를 걸친 한 사람이 손을 휘저을 때마다 블랙 오크의 군세가 여지없이 나가떨어지기 바빴다.
“저, 저자는 대체······.”
“은사자다! 틀림없어.”
기사 중 누군가가 그렇게 소리쳤다.
이름 모를 마법사의 별명.
그 존재의 별명은 지금도 전설처럼 남아 있었다. 혹 그 이름을 알지 못해도 상관없었다.
지금 블랙 오크의 진형 중심에서 한 사람의 마법사가 이 전장을 압도하고 있었으니까.
12
제라드가 나선 순간부터 상황은 급변하였다.
제라드는 각종 마법을 난사하면서 블랙 오크를 압도하였고, 이런 상황 속에 용기백배한 병사들과 기사들은 기세 좋게 덤벼들어 블랙 오크를 서서히 밀어내기 시작했다.
이제 태세는 바뀌었다.
양동작전을 펼치며 성문을 부수고 무서운 기세로 밀어닥쳤던 블랙 오크들은 예상치 못한 상황 속에서 주춤주춤 물러나기 바빴다.
모든 게 순조로웠다.
그때까지는 말이다.
“크헝!”
제라드는 한창 마법을 펼치며 블랙 오크를 요격하다가 별안간 바로 뒤쪽에서 다가오는 오싹한 살기에 고개를 돌렸다.
촤아악!
“헉!”
병사들이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제라드의 망토 끄트머리가 살짝 찢겼다. 만약 피하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몸이 그대로 찢겼어도 이상하지 않았을 정도로 날카로운 공격이었다.
제라드는 이 뜻밖의 공격을 해온 존재를 눈에 담았다.
“크르르르.”
완전히 이성을 잃은 눈동자. 짐승의 그것처럼 튀어나온 주둥이와 날카로운 이빨. 건장한 사내의 1.5배는 족히 될 법한 수준의 덩치까지.
제라드의 눈이 차갑게 변했다.
그것은 어딜 어떻게 보더라도 더는 인간이 아니었다.
제라드가 막 손을 쓸 찰나였다. 병사들의 틈 사이사이에 있는 기사들이 빠른 속도로 쇄도하여 그 존재를 공격하였다.
푸확!
“크허어어엉!”
사방에서 포위하여 단숨에 압박해오는 기사들의 공격에 베여 피를 흘리며 날뛰는 존재.
한때 사람이었을 그 존재의 눈동자나 행동에는 이지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는 자신을 공격한 존재들을 향해 커다란 손톱을 휘둘러댔다.
그러나 기사들은 이런 상황이 익숙한 것처럼 강약을 조절하며 압박하였다. 그리고.
써걱!
“크헝!
한 번에 몸이 양단된 그 존재는 이내 피를 쏟아내며 바닥에 쓰러졌다. 피범벅이 된 기사들은 제라드에게 시선을 돌리며 살짝 고개를 숙였고, 제라드 역시 블랙 오크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지금은 블랙 오크를 쫓아내는 게 선결이다.
전투는 꼬박 하루가 넘게 계속되었다.
좀처럼 끝날 것 같지 않았던 싸움도 블랙 오크들이 물러가면서 일단 끝났다.
그제야 주변의 참상이 눈에 들어왔다.
죽은 사람들의 수가 적지 않았다.
병사들이 가장 많이 죽었고, 곳곳에 미처 도망가지 못하고 싸움에 휘말려 쓰러진 민간인들의 수도 적지 않았다.
특히 남부 성문에서 벌어진 교전은 가장 치열하였다.
저지선을 지키기 위해 가장 많은 병사들이 죽었고, 이후에는 블랙 오크들의 후속 부대를 끊기 위해서 계속 교전이 치러졌기 때문이다.
“잘 싸우더군요.”
제라드는 어두운 얼굴을 한 아나리엘에게 그렇게 칭찬했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어두운 얼굴이었다. 그럴 수밖에 길게 이어진 싸움 속에서 죽은 이들의 수가 대체 얼마나 많단 말인가······.
또 언제 쳐들어올지 모르는 공세에 대비하는 움직임이 곳곳에서 벌어지는 와중에 제라드는 신전이 있었던 광장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광장 사방에 제라드가 터뜨린 폭발 마법의 흔적이 가득하였다.
그때, 사람들 사이에서 이런저런 지시를 내리던 중년의 기사 한 명이 제라드를 발견하더니, 다급히 달려왔다.
“다시 만나 뵈었군요.”
“예, 그렇군요.”
그 기사는 제라드도 기억에 있는 얼굴이었다.
“혹 저를 기억하십니까?”
“예, 기억하고 있습니다.”
“하하. 그렇군요. 마지막으로 뵈었던 게 5년 전인 것 같은데······, 그때도 영지에 큰 도움을 주셨었지요.”
“조금 힘을 보탰을 뿐입니다.”
“허허! 정말로 겸손하시군요. 헌데, 그때는 그렇게 바로 떠나셔서 제대로 된 대접도 못하였지요. 그러니 이번엔 꼭 대접해드리고 싶은데, 부디 기회를 주시겠습니까?”
“대접을 받기 위해서 한 일은 아니지만, 거절하지 않겠습니다. 듣고 싶은 이야기도 있으니까요.”
13
제라드와 아나리엘은 성 안으로 초대되었다.
중년의 기사는 자신의 이름을 알레스터 예거라고 밝혔다.
척 보기에도 그의 지위가 낮지 않음은 알 수 있었다. 성내에 들어와서 마주치는 모든 기사와 병사들이 그를 보고 고개를 조아렸으니까.
그러는 가운데, 성 안쪽의 식당에 들어서자, 한 명의 젊은 귀족이 둘을 맞이하였다.
“아, 반갑습니다. 이야기는 적지 않게 들었습니다. 제가 바로 로아힘 라시드 백작입니다.”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백작 각하.”
“아니요. 아니지요. 제가 영광이지요.”
백작은 그렇게 말하며 다가와서 손을 뻗어왔다.
백작위가 절대로 낮지 않은 신분임에도 그는 그렇게 행동하는 것에 조금도 스스럼이 없는 듯하였다.
제라드는 그와 손을 마주잡았다.
“자, 그럼 앉으시지요. 은사자께서 오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바쁘게 준비하였는데, 부디 입에 맞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백작은 손뼉을 한 번 쳤다.
그러자 저편에서 준비된 음식이 나오기 시작하였다. 확실히 다급히 준비한 티는 좀 났지만 성심껏 준비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드시지요.”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이어지는 가운데, 달그락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제라드는 그저 가만히 있을 따름이었다.
백작과 알레스터도 그제야 포크와 칼을 손에서 놓았다.
“입에 맞지 않으시는지요?”
“아니요. 식사 전에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그렇군요. 이야기는 식사 후에 천천히 나누고 싶었는데······ 하긴 저도 궁금한 게 많아서 마음이 급하던 참입니다.”
백작은 부드럽게 웃었다.
그러나 제라드는 웃지 않았다. 그 대신에.
“백작 각하, 제가 광장에서 이상한 광경을 보았습니다.”
바로 본론을 꺼냈다.
꿈틀.
젊은 백작은 여전히 웃는 낯이었지만, 눈썹이 요동치는 걸 보지 못한 이는 없었다. 알레스터의 얼굴도 딱딱하게 굳어 있었으니, 좌중의 분위기는 단숨에 싸늘하게 변하였다.
잠깐의 적막이 흐르는 가운데.
“음, 본래는 함부로 꺼내는 이야기가 아닙니다만, 영지를 두 번이나 구해주신 마법사님께서 물음을 무시하는 것도 도리가 아니겠지요. 대답하겠습니다.”
백작은 거기서 말을 잠깐 끊었다가 다시 이어나갔다.
“혹 수인족에 관해 알고 계십니까?”
“예, 알고 있습니다.”
“음, 그럼 이야기가 빠르겠군요. 제국 서부의 땅 중에서도 이곳은 아주 먼 옛날에는 수인족의 영역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땅의 사람들 태반의 몸에는 수인족의 피가 흐르고 있지요.”
수인족.
아주 먼 과거에는 몬스터로 불렸던 존재들로, 평상시에는 인간과 차별점을 찾아보기 힘들지만, 흥분하거나 위험한 상처를 입게 되면 그들은 광폭화라는 종족 특유의 기질을 드러낸다.
짐승의 형태로 변하게 되는 대신에 엄청난 완력과 회복력을 손에 넣게 되는 존재들. 수인족의 후예.
백작은 치열한 전투 속에서 희석된 피가 깨어난 것뿐이라고 하였다. 얼핏 들으면 정말로 그 말대로인 것 같다. 하지만 제라드는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지 않았다.
‘나는 5년 전에도 이곳에서 전투를 치렀다. 그때도 많은 병사들이 죽어나갔어. 하지만 그때는 단 한 명도 광폭화에 빠지는 일이 없었다.’
그러나 이번엔 달랐다. 현장에서 광폭화한 병사는 제라드가 본 것만 해도 10명이 넘었다. 그들은 피아를 가리지 않았다. 그렇게 아군의 손에 죽은 병사들의 수가 적지 않았다.
‘황족들의 몸속에 깃든 드래곤의 피가 강해지고 있는 것처럼 그들의 몸에 깃든 수인족의 피가 강해지고 있다는 얘기다.’
하늘의 문 때문이라고 하기엔 이 영지에 들어온 직후부터 느껴지는 강렬한 감각이 신경 쓰였다.
“직접 확인해보는 수밖에.”
제라드는 창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마침 하늘은 어두웠다.
곧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그 바람은 제라드를 휘감았고, 조금 전까지 그곳에 있었던 제라드의 모습은 사라졌다. 닫히지 않은 창문만 삐걱대는 소리를 내고 있을 따름이었다.
< 파멸의 그림자1 > 끝
ⓒ 양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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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멸의 그림자2 >
3
쿠르릉.
줄곧 어두웠던 하늘이 슬슬 심상찮은 소리를 내기 시작하였다. 머잖아 비라도 한창 쏟아질 모양이었다.
밤이 늦었다. 하지만 라시드 백작령은 이 늦은 시간에도 몹시 소란스러웠다. 블랙 오크의 대규모 침공 이후의 사후 정리가 아직 안 되기도 하였고, 다음 침공이 언제 시작될지 알 수 없었기에 만반의 준비를 해두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부산하게 움직이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하늘 높은 곳에서 지켜보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바로 제라드였다.
귀빈실에서 나온 그는 신전으로 향하였고, 지금은 목적지를 바로 코앞에 두고 있었다.
라시드 백작은 제라드와 아나리엘에게 많은 것을 묻지 않았다. 묻고 싶은 게 많을 텐데도 말이다. 백작에게도 미심쩍은 게 많았기에 그쪽에 신경을 안 쓸 수도 없었다.
‘백작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알기 어려운 상황. 백작의 동태에 관해선 아나리엘이 성내의 상황을 전달해주겠지.’
제라드는 그녀에게 검독수리를 붙여 두었다. 성내의 상황을 바로바로 듣기 위함이기도 했고, 이번 일에 좀 더 홀가분하게 움직이기 위함이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 신전은 이제 바로 불과 코앞에 있었다. 이제 신경을 긁는 듯한 느낌은 아주 선명해져 있었다.
‘경계가 굉장히 삼엄하군. 이 정도면 라시드 백작가 사람들이 있는 본성보다 더 철저하게 지키고 있다고 보는 게 타당할 지경이야.’
신전과 그 일대가 한눈에 들어왔다.
별로 크지 않은 신전의 모습이었지만, 광장부터 그 일대 주변에 이르기까지의 경계는 보통이 아니었다. 신전 입구와 주변에 포진한 기사들의 수준조차도 말이다.
하늘에 떠있던 제라드의 몸 구석구석에 어둠이 스며들기 시작하였다. 황궁에 숨어들던 때와 똑같은 수법이었다. 존재감을 지우고, 자신의 몸을 어둠 속에 파묻는 마법.
사람들의 시야에 한눈에 들어올 정도로 하강한 제라드는 신전 외곽에 착지했다. 제라드가 땅에 내려왔을 때에는 가벼운 바람만 그 주변을 스쳤을 따름이었다.
‘멀리서 볼 때와는 또 다르군. 정면의 입구 외에는 다른 모든 출구가 폐쇄되어 있어.’
창문부터가 그렇다.
즉, 허가된 존재 외에는 그 어떤 존재의 출입도 용납하지 않는다는 얘기였다.
‘억지로 열고 들어가야만 한다면 그럴 수밖에.’
제라드는 그렇게 생각하며, 패밀리어 마법으로 이어져 있는 검독수리에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였다.
아나리엘이 자신의 상황을 알고 있어야 대처도 할 수 있는 법이었다. 제라드가 이곳을 억지로 열게 되었을 때, 라시드 백작이 어떻게 반응할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아나리엘의 걱정은 할 필요없었다. 그녀의 능력은 마법이나 검술 같은 1차원적인 부분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것이었으므로, 그녀 자신이 마음만 먹으면 성에서 손쉽게 빠져나올 수 있을 터였다.
그러는 사이, 어둠을 걷는 제라드는 신전의 입구에 섰다.
수문장처럼 신전의 문 앞에 서 있는 기사들은 그 어떤 존재도 이곳을 넘어가게 두지 않겠다는 것처럼 주변을 맹렬히 훑고 있었지만, 마법적 조화에 가려진 제라드는 좀처럼 포착하지 못하였다. 그렇게 막 신전의 계단을 올랐을 때였다. 굳게 닫힌 문 저 너머에서 형용하기 어려운 힘이 느껴졌다.
그리고.
지이이잉.
‘또 그 감각이야.’
머리에서 울려 퍼지는 이명. 그 이명이 서서히 그치기 시작하였을 때, 제라드의 시계가 반전하였다. 흑백으로 이루어진 세상. 지금 이 순간, 눈앞에 보이는 것 너머로 전혀 다른 영역이 모습을 드러냈다.
블랙 오크와의 싸움이 한창 이어질 때 보았던 그 세계였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바로 코앞에서 빛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빛의 기둥은 하늘 저 너머로 향하고 있었고, 하늘의 문까지 닿아 있었다. 그리고 그 문에 닿아 있는 것은 비단 그 하늘의 기둥 하나만이 아니었다.
이곳만이 아닌 다른 곳에서 치솟은 빛의 기둥 여러 개가 동시에 하늘의 문에 다다라 있는 게 들어왔다.
‘여덟 개의 빛의 탑들이 하늘의 문을 열고 있는 것인가?’
그 속도가 몹시 완만하고 느리게 진행되고 있었지만, 작은 구멍에 갈고리를 끼워서 억지로 넓히는 듯한 모습이 연상되었다.
‘그래, 맞아. 비문을 통해 봤던 광경. 그곳의 하늘의 문은 지금의 세상보다 훨씬 더 크게 열려 있었다. 문은 점점 더 크게 열리는 거야.’
그렇다면 지금 이렇게 머뭇거릴 때가 아니었다. 한시라도 더 빨리 문을 닫아야만 했다.
제라드가 고개를 내렸다. 지금 이 순간, 눈앞에 그 빛의 탑이 있었다. 열쇠가 어떤 것인지도,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몰랐지만, 그는 직감했다. 접촉하는 순간, 곧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알게 되리라고 말이다.
제라드는 두 명의 기사들을 지나서 문 앞에 다다라 손을 뻗었다. 그의 손이 신전의 문에 닿는 그 순간, 신전의 문에 알 수 없는 문자들이 빛을 뿜었다.
‘세계어다.’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이지?”
기사 두 사람이 당황한 얼굴로 어쩔 줄 모르는 소리가 들릴 때였다.
화르륵!
별안간 눈앞의 허공에서 검은 불꽃이 치솟았고, 그 안에서 붉은색 눈동자가 나타났다.
제라드가 뒤로 한 걸음 물러난 순간, 그 불꽃에서 일그러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종말의 때가 왔다. 이제 그 종말의 의지에 따르는 존재가 나타나 여덟 가지의 계시를 모조리 손에 넣은 후에 필멸의 계시에 따라 만물이 저물게 되리라.]
음울하게 울려 퍼지는 목소리.
그 안에 깃든 증오의 사념이 어찌나 강렬하였는지, 그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오염될 지경이었다. 이 정도라면 가히 악마적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제라드는 이 목소리를 알고 있다.
들었던 적이 있는 목소리였다.
그러는 사이에도 목소리는 이어지고 있엇다.
[그 흐름에 대항하는 것은 지극히 무의미하리라. 증오와 탐욕, 그리고 기만으로 세계의 잔이 가득 찰 것이고, 종말의 기수가 온갖 곳에서 모습을 드러내리라.]
그 말을 끝으로 불꽃은 이글거리며 사라졌다. 검은 불꽃으로 타오르던 세계어는 사라졌고, 조금 전까지 굳게 닫혀있던 신전의 문은 별안간 벌컥 열렸다.
“헉!”
반전되었던 시계가 다시 원래대로 되돌아왔을 때, 그 앞을 지키던 기사들이 다급히 그 문을 닫으려고 하였다. 하지만 한 번 열린 문은 좀처럼 닫힐 생각을 하지 않았다. 막대한 힘이 작용하는 것처럼 말이다.
“성물이 노출되었다! 문을 닫아라!”
기사들이 큰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러자 외곽에 있던 병사들과 기사들이 다급하게 달려와서 문을 닫기 위해서 애를 쓰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좀처럼 닫히지 않는 문.
위이이잉.
그 안에서 흘러나오는 거대한 기운의 파도는 저들의 힘으로 어찌할 게 아니었다.
바로 그때였다.
크워어어어어어어!
저 멀리서 또다시 오크의 함성이 들려왔다.
신전의 내부에 머물러있던 힘이 퍼져 나가서 저들을 흥분하게 만든 모양이었다.
‘시간이 없다. 저 안에서 흘러나오는 힘은 이 주변의 모든 것을 엉망으로 만들고 있어.’
제라드는 내부에서 흘러나오는 강렬한 기운과 마주한 상태에서 앞으로 나아갔다.
“이 땅에 선택받은 자들이여! 성물은 우리의 보물! 오로지 이 땅에서 태어나고 자란 자들만이 누릴 수 있는 권능의 증거! 누구에게도 줄 수 없다. 우리는 위대한 종족의 후예다!”
“와아아아아!”
기사의 외침에 화답하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목소리들은 광기에 가득 차 있었다. 제라드가 무거운 얼굴을 하고 있을 때였다. 바로 조금 전까지 닫히지 않았던 문이 쾅 닫혔다.
소용돌이치던 기운은 사라졌고, 신전 내부는 언제 그랬었느냐는 듯이 조용하였다.
흡사, 이 안에 존재하는 성물이 신전 내부로 제라드가 들어왔음을 알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제라드의 시선은 신전의 중심에 꽂혔다. 그곳엔 커다란 함이 있었고, 그 함은 쇠사슬로 칭칭 감겨 있었다. 그것은 아주 오래된 것처럼 보였다.
제라드가 다가가자, 그것은 곧 웅웅 대며 울었고 쇠사슬이 절그럭대기 시작하였다.
‘나를 부르고 있는 것인가?’
제라드는 조심스럽게 봉인함에 손을 뻗었다.
바로 그 순간, 봉인함의 떨림은 멎었다. 그리고 그 안에 소용돌이치던 기운은 막혀 있던 둑이 무너지는 것처럼 단숨에 제라드를 덮쳐왔다.
-안 돼. 절대로 그렇게 놔둘 수는 없다!
-우리 종족의 운명은 절대로 무너질 수 없어!
-죽여버릴 것이야. 반드시!
-열등한 종족 따위가!
제라드의 눈동자가 붉은빛으로 물들었다가 이내 탁하게 흐려지기 시작하였다. 정신오염이었다. 이대로라면 제라드는 봉인함에서 흘러들어오는 사념파에 잠식될 터였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이었다.
촤라라락.
베리타스가 펼쳐졌다.
그리고 그 안에 비어있는 페이지에 엄청난 속도로 세계어가 새겨지기 시작하였다.
4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제라드는 체감하지 못했다.
그저 영원과도 같은 시간이 흘렀다고만 생각했다.
“크으윽!”
이내 신음을 흘리는 제라드. 지금 그의 모습은 흡사 검은 오물로 뒤집어쓴 듯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머리부터 사라져가고 있었다.
제라드를 집어삼키려고 하였던 그 감정의 소용돌이는 모두 베리타스의 내부로 스며들고 있었다. 이윽고 그 모든 것들을 다 흡수한 베리타스는 탁 소리를 내며 닫혔다.
우우웅.
작은 공명음을 내는 베리타스.
제라드는 식은땀을 흘리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헉헉.”
이마에서 연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조금 전에는 정말로 위험했다. 만약 조금만 손을 쓰는 게 늦었더라면 그대로 정신오염에 휘말려 자신을 잃어버렸을지도 몰랐다.
‘베리타스와의 연결이 없었더라면······ 꼼짝없이 그 증오의 소용돌이에 먹혀버렸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오싹 소름이 돋았다.
‘증오와 탐욕, 그리고 기만으로 세계의 잔이 가득 찰 것이고, 종말의 기수가 온갖 곳에서 모습을 드러내리라······. 그 목소리가 말했던 게 바로 이거였나.’
제라드는 조금 전에 자신을 가득 메우고 있던 감정들을 곱씹었다. 세계와의 소통을 이룩한 뒤로 어떤 정신 오염에도 버틸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정신무장을 갖춘 제라드였다.
그런데 조금 전에는 도저히 버티는 게 불가능했다.
아니, 애초에 버틸 수 있는 게 아니다.
‘조금 전의 증오는 한 사람이나 개인이 감당할 수 있는 그런 게 아니었어.’
온몸의 떨림이 서서히 그쳤다. 완전하지는 않았지만, 몸 상태가 서서히 돌아오고 있다는 얘기였다.
제라드는 잠잠해진 봉인함을 무겁게 바라보았다.
신전에 접촉한 순간 들렸던 목소리가 아직도 머릿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틀림없어. 그건 녹스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 안에서 느껴지는 의지는 그 마도서의 그것도 있었다. 어째서지? 왜 세계의 문을 여닫는 열쇠에 이런 무시무시한 증오의 소용돌이가······.’
제라드가 그런 의문을 지우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콰앙!
어둠에 휘장에 가려져 있던 저편의 뒤쪽에서 폭발이 일어났고, 그곳에서 누군가가 들어왔다.
제라드의 눈이 가늘게 변했다.
“라시드 백작.”
“이 늦은 밤, 참 엉뚱한 곳에서 재회하게 되는군요. 안 그렇습니까, 은사자. 아니지, 대마법사님이라고 제대로 불러야 하나요?”
백작이 씩 웃었다. 그 미소는 싸늘했다.
그의 뒤편에서 검은 갑주를 입은 기사들이 차례로 걸어 들어왔다. 그들의 눈동자에서 흘러나오는 붉은빛은 적의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귀하의 역할은 끝났으니, 물러가줬으면 좋겠는데.”
라시드 백작의 눈동자. 그 안에서 탐욕이 소용돌이쳤다. 검은 기사단이 그 순간, 제라드를 향해 쇄도해왔고, 백작은 봉인함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그 순간, 제라드는 알았다.
백작이 그에게 원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말이다.
< 파멸의 그림자2 > 끝
ⓒ 양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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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멸의 그림자3 >
5
빛의 탑이라는 형상으로 나타나는 열쇠에는 이 세계의 모든 악 혹은 증오 따위로 비견될 만한 무엇인가로 가득하였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그것은 보통의 존재들이 감히 씻어낼 수 있을 게 아니었다. 그저 그 근처에 다다르기만 해도 오염을 피할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제라드조차도 베리타스가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절대로 견뎌낼 수 없었을 터였다. 그리고 이 강력한 저주의 존재를, 라시드 백작은 알고 있었다.
“나를 이용했군, 백작.”
“그게 잘못됐나? 우린 서로 속인 것뿐이지.”
백작은 그렇게 말하며, 품에서 작은 단검을 꺼내 들었다. 그러더니 손끝을 베었다. 붉은 피가 손가락을 타고 흐르기 시작하였다.
“역시 대마법사야. 봉인함에 들러붙어 있던 저주는 이제 없다. 아주 훌륭하게 해주었어.”
“당장 물러나라. 그 힘은 당신과 같은 존재가 감당할 게 아니야.”
제라드가 경고했다. 하지만 백작은 코웃음 치며 그 경고를 무시하였고, 피가 흐르는 손을 뻗어서 봉인함에 뻗어 갔다.
그 순간.
퍼엉!
제라드가 백작에게 바람의 충격파를 일으켰다. 응축한 바람을 끌어모아서 한 번에 휘두르는 그 충격파는 무시할 수 없을 정도의 위력이었다.
그러나.
“수인족은 마법의 종족이라고 하기는 어려워도 마법에 대한 내성은 아주 높은 편이지. 그 정도의 마법으로는 나를 막을 수 없다.”
뒤로 두어 걸음 물러났을 뿐인 백작이 입꼬리에서 흐르는 피를 슥 닦으며 눈을 번쩍 떴다. 그러자 그의 몸이 떨리기 시작하더니, 단숨에 부풀어 올랐다. 털이 자라났고 주둥이가 튀어나왔다.
몸이 부풀면서 옷은 다 찢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그 광폭화가 다 끝났을 때, 그곳에는 조금 전의 왜소한 체구의 라시드 백작은 온데간데없이 3미터에 육박하는 늑대형태의 인간만이 존재할 따름이었다.
크르르.
목울대에서 흘러나오는 낮은 그르렁거림.
“대마법사여, 그대는 나의 적이 아니야. 오히려 고마운 존재다. 그러니 나는 기꺼이 손을 내밀겠다. 나를 따라라. 나는 기꺼이 제국 황실로부터 그대를 보호할 것이요, 걸맞은 지위를 손에 넣을 것이다.”
듣기 어려운 목소리였지만, 그 의미는 분명하게 전달되었다. 라시드 백작은 이지를 상실하지 않았을뿐더러 완벽하게 광폭화를 다루고 있었다. 아마도 저런 특유의 기질을 갖춘 존재들이 이 땅의 지주가 되었고, 귀족으로 성장하게 된 것이리라.
“거절하겠다.”
“어리석구나. 거스를 수 없는 일이거늘!”
크르륵.
낮게 우는 목소리와 함께 그의 곁에 서 있는 칠흑의 기사들이 좌우로 서서히 거리를 벌리며 칼을 뽑아들었다.
채채챙!
전투 직전의 서늘한 적막이 흐르는 가운데, 제라드는 이 침묵을 깼다. 한 걸음 그가 앞으로 크게 나아간 순간, 거의 동시에 여러 개의 오러가 허공을 수놓으며 제라드에게 쏟아졌다. 피할 곳이 없는 완벽한 합공이었다.
그러나.
콰아앙!
신전 전체가 뒤흔들릴 정도로 강력한 충격파가 발생하면서 덤벼들었던 기사들이 정반대 방향으로 튕겨 나갔다. 큰 충격은 없었던 모양인지, 이내 자세를 다잡고 매섭게 쇄도해온다.
그러나 제라드는 그들에게 기회를 주지 않았다.
파지직.
제라드가 개방한 마나에 뇌전의 기운이 맺히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이 일대에 만들어진 거미줄과 같은 마나의 실타래가 그들의 몸을 휘감았다.
그리고.
파지지지직!
칠흑색 기사들의 몸에 푸른 불꽃이 튀었다.
“흐으으.”
연기를 내뿜으며 바닥에 주저앉는 기사들. 하지만 이내 그들의 몸에서도 이변이 일어났다. 백작이나 병사들에게서 나타난 것과 똑같은 이변이 말이다.
뚜두둑.
“크르르륵.”
몸을 이리저리 비틀며 일어나는 기사들의 눈에서 살기와 광기가 번들거렸다. 그들의 모습 역시 짐승의 그것처럼 변해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이지가 없다.’
제라드는 단번에 알았다.
저들의 눈에 가득한 것은 오로지 광기뿐이었다. 제아무리 오래 단련한 기사라고 해도 광폭화를 감당해낼 수 있는 건 아니란 얘기였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오싹.
별안간 등줄기를 스치는 느낌과 함께 광폭화 이후에 어쩔 줄 모르던 칠흑의 기사들이 우뚝 멈췄다.
제라드의 시선이 돌아갔다.
어느새 봉인함의 앞에 서 있는 라시드 백작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여전히 늑대의 모습을 하고 있었고, 조금 전의 등줄기를 스쳤던 그 오싹한 감각은 바로 그가 발산한 피어였다.
“꼼짝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정도면 모든 짐승의 왕이라고 불리기엔 모자람이 없는 법.”
백작은 그렇게 말하더니, 자신의 이빨로 다 나아버린 자신의 손가락을 깨물었다. 피가 흥건하게 흘러나오는 가운데, 백작은 머뭇거리지 않고 바로 봉인함에 손을 뻗었다.
백작이 무엇 때문에 열쇠에 집착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그의 탐욕과 저 열쇠의 의미를 생각해보자면 그가 저 물건에 접촉했을 때에 일어나게 될 일은 결코 좋은 일일 수가 없었다.
“날 얕보았구나.”
콰드드득!
제라드가 일으킨 왜곡장이 백작의 몸 중심에서 일어났다.
“크허헝!”
백작이 고통에 비명을 질러댔다. 갈비가 다 부러지고, 뼈가 우그러지는 고통. 그는 피를 토하면서 불신 가득한 얼굴로 제라드를 보았다. 피어가 통하지 않았다. 더욱이 이 마법의 위력은 무엇이란 말인가. 하지만 그 고통을 넘어서 그는 손을 뻗었다.
바로 그 순간, 제라드의 눈매가 변했다.
콰앙!
그가 땅을 내려찍는 순간, 라시드 백작의 발아래에서 돌의 창이 튀어나와서 뻗은 손바닥을 꿰뚫었고, 거기서 그치지 않고 사방에서 튀어나온 돌의 창은 백작의 몸 중심을 찢어발기며 관통해버렸다.
크아아앙!
그 순간, 사방에서 쇄도하는 칠흑의 기사들. 그들의 육체 능력과 전투력은 이미 블랙 오크를 가볍게 웃돌고 있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제라드를 상대하기엔 역부족이었다.
바람의 칼날이 쏟아지고 벼락이 뿜어져 나왔으며 땅에선 대지의 창이 수십 갈래로 쪼개져 그들의 몸을 찢어발겼다. 무시무시한 회복력 때문에 나가떨어지는 순간, 바로 회복이 시작되었지만, 발목을 묶기엔 부족함이 없었다.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가운데, 신전 밖에서 들리는 교전 소리도 점점 더 커지기 시작했다.
‘밖의 싸움이 심화해가고 있어. 서둘러야 한다.’
제라드는 봉인함으로 발걸음을 옮길 때였다. 그는 별안간 숨이 턱 막히는 듯한 느낌을 받으며 몸을 벌벌 떨기 시작하였다.
‘베, 베리타스!’
제라드는 낮게 신음하며 털썩 주저앉으며, 베리타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별안간 몸 전체를 휘감는 이 감각이 베리타스와의 연결을 통해서 흘러들어오고 있음을 느낀 까닭이다.
이상한 건 베리타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베리타스도 지금 이 순간, 요동치면서 떨리고 있었다. 닫힌 서적의 안쪽에서부터 스멀스멀 새어나오는 것이 눈에 보였다. 그것은 몹시 사악하고 폭력적인 악의를 그대로 머금고 있었다.
‘열쇠를 휘감고 있던 증오의 소용돌이가 베리타스의 내부에서 새어나왔다는 건가!’
지금 제라드를 옭아매고 있는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증오의 역류.
그 저주에 대항하기 위해서 제라드는 이를 악물었다. 정신오염과 더불어 마나를 물들이는 힘은 이를테면 맑은 물에 떨어지는 썩은 물과도 같았다. 썩은 물을 중화하기 위해서는 수 배의 맑은 물이 필요한 것이다.
-곧 만물이 저물게 되리라.
찢어지는 듯한 목소리마저 들리기 시작했을 때, 제라드는 이제 이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에 개입할 여지를 상실했다. 그리고 이것은 숨통이 끊기기 직전에 다다라 있던 라시드 백작에겐 절호의 기회가 되었다.
“크르륵······.”
살점이 다 으깨진 라시드 백작은 수인족 특유의 무시무시한 회복력을 바탕으로 가까스로 손을 봉인함에 얹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봉인함 안쪽에서 새하얀 빛이 요동쳤고, 이내 사방으로 쏟아지듯이 뿜어져 나왔다.
콰아아아앙!
6
지이이잉.
“으으읏.”
아나리엘은 머리가 징징 울리는 감각에 신음하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두근두근.
그녀의 심장이 무섭게 뛰었다. 곧 터질 것처럼 말이다.
‘무슨,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그녀가 몸을 떨면서 힘겹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러자 그녀의 눈동자는 전혀 다른 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빛을 내뿜는 황금색 눈동자와 검게 변해버린 흰자. 그녀의 시야는 지금 이 순간, 눈앞의 풍경이 아닌 전혀 다른 것을 목도하고 있었다.
소용돌이치는 빛의 탑 속에 존재하는 짐승의 왕.
그것은 일찍이 보았던 꿈의 광경과 완벽하게 똑같았다. 짐승의 왕이 뿌리는 강력한 힘이 긴 시간 속에 잠들었던 이들의 피를 깨우고 그들의 이성을 마비시켜 모든 것을 원초로 회귀시키고 있다. 조용했던 시대 속에 벼려진 인간의 이성은 온데간데없이 그 자리를 메우는 것은 생물로서의 본능에 입각한 격한 감정의 파도뿐이었다.
들끓는 감정의 편린의 파도 속에서 그 중심에 서 있는 검은 존재는 오직 한 명뿐. 고독한 싸움을 치르는 제라드였다.
‘제라드······.’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고 가까스로 일어서려고 할 때였다.
별안간 이곳이 아니라, 더 먼 곳. 그곳에서부터 밀려오는 것이 보였다. 그것은 흡사 안개 따위처럼 보였다. 이 일대를 가득 메운 백색과는 대비되는 검은색.
그러나 그것은 빛의 중심에서 홀로 싸우는 순수한 검은색과는 달랐다. 그것은 몹시 탁하였고, 진득거렸으며 온갖 악의로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아나리엘의 황금색 눈동자가 공포에 젖어들었다.
그 탁한 어둠 속에서 치솟은 이지러진 빛의 기둥이 하늘 너머까지 닿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게 한둘이 아니었다.
‘비, 빛의 기둥이 이곳에 모여들고 있다.’
눈을 가득 메웠던 검은 기운이 모두 사라졌을 때, 아나리엘은 온몸을 짓누르던 감각도 사라졌음을 느꼈다.
아니, 오히려 이전보다 더 강력한 힘이 몸 안에서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몸 안에 깃든 드래곤의 피가 들끓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를 구해야 해.”
콰르르.
무너진 신전의 잔해가 흩날리며 온 세상이 흙먼지로 자욱하였다. 그 안에서 신음하며 일어나는 제라드는 이내 몸의 떨림이 가시는 것을 느꼈다.
봉인함에서 흘러나온 저주의 여파가 하필이면 그 순간에 제라드의 발목을 붙잡을 줄이야.
‘위험했어.’
제라드는 폭발이 일어나기 직전, 거의 완전히 무력화된 상태였다. 마법은커녕 몸을 제대로 가누기도 어려웠던 것이다.
제라드는 베리타스를 보았다. 제법 안정된 상태다.
‘그릇이 넘친 건가?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제라드가 그렇게 생각하며 몸을 일으켰을 때였다.
오싹.
등줄기에 오싹 소름이 스쳤다.
저편에 무엇인가가 오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6개의 성물이 빠르게 접근 중. 최종 프로세스로 돌입. 정화의식이 준비됨.]
베리타스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최종 프로세스라니.
제라드는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제라드의 시계가 뒤집어졌다. 또다시 흑과 백으로 가득한 세상의 모습이 나타난 것이다. 고개를 돌린 곳.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빛의 기둥이 보였다. 그리고 그 빛의 기둥을 머금은 존재도.
“라시드 백작, 기어이 그 힘을······.”
제라드가 이를 갈았을 때였다. 그의 시선이 그들의 너머로 향했다. 지금껏 보지도 느끼지 못했던 시꺼먼 어둠이 이곳 전체를 휘감는 게 보였다. 그리고 그 너머에서 하늘 높이 치솟은 빛의 기둥조차도 말이다.
그 수는······ 자그마치 넷이었다.
‘이럴 수가. 누군가가 열쇠를 모으고 있단 말인가?’
제라드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조금 전 베리타스가 했던 정화의식이 준비되었다는 말이 별안간 머릿속에 스쳤다. 이제야 기억이 났다. 그것은 2종 비문의 마지막. 세계수가 파괴될 때 들었던 말이었다. 바로 그때처럼 정화의식은 바로 코앞까지 다다른 것이다.
검은 안개 안에서 지금 이 순간, 의식을 거행하는 자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 순간, 제라드의 시야는 원래대로 돌아왔다.
무너진 신전과 광장의 모습이 들어왔다.
저 멀리 열쇠를 손에 넣고 은색의 털로 변하게 된 라시드 백작의 모습도 말이다. 싸움은 멈춰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시간이 멈춰 있는 것 같았다.
온몸을 칠흑색으로 물들인 듯한 갑주를 걸친 존재. 거대한 흑색의 군마.
그 존재는 블랙 오크의 너머에서 라시드 백작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제라드는 알 수 있었다.
저자다.
저자에게 지금 네 개의 열쇠가 모여 있었다.
< 파멸의 그림자3 > 끝
ⓒ 양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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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멸의 그림자4 >
7
네 개의 열쇠를 보유한 존재가 이곳에 모습을 드러낸 직후로 이 일대의 공기가 바뀌었다.
제라드조차 숨이 턱 막히는 듯하였다.
그뿐만이 아니다. 두려움을 모르는 블랙 오크의 무리조차 겁을 집어먹고 고개를 조아리며 감히 그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있었다. 바로 조금 전까지 그와 싸우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생명체라면······ 아니, 이 세계의 모든 존재라면 응당 그럴 것이다. 그의 갑주와 군마 그리고 그의 내부에서 흘러나오는 힘 때문이다.
저주.
제라드의 몸을 침식하였던 그 강렬한 증오의 소용돌이가 지금 저 검은 기사의 몸 안에 가득 차 있었다.
‘저자는 열쇠를······ 열쇠를 회수하기 위해 온 것이다. 라시드 백작에게 존재하는 열쇠를 말이야.’
제라드는 그 순간,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았다.
라시드 백작이 열쇠를 손에 넣은 것은 지금 당장 문제가 아니었다. 어떻게든 저 검은 기사의 손에 더 이상의 열쇠가 모이는 걸 막아야만 했다.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라시드 백작은 다시 태어난 듯한 느낌이었다.
그는 제라드와의 대치에서 그야말로 죽음의 직전에 다다랐다. 대마법사라고 불릴 정도의 존재를 너무 얕보았다. 고대 수인족의 힘이 서서히 깨어나는 지금이라면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줄 알았건만······.
제라드는 압도적인 강함이 무엇인지 보여주었다. 온몸이 찢겼고, 죽음은 시시각각 다가왔다.
그러나 그의 가슴 깊은 곳에서 자라난 탐욕은 죽음의 두려움을 꺾었으니, 마침내 그 필사적인 노력은 보상을 받게 되었다.
성물을 손에 넣은 순간, 몸 안에 힘이 가득 찼고, 고통은 다 사라졌다. 찢겨나간 근육은 서로 엉겨 붙었고, 새살이 돋았다.
온전한 감각.
라시드 백작은 그 기분에 취해 있었다.
이제는 그 어떤 것도 그 자신을 막을 없다고 자신하였다.
‘먼저 대마법사, 그자에게 보여줄 것이다. 진정한 왕이 누구인지 말이야.’
라시드 백작은 크게 울었다.
우우우우우!
짐승의 울음이 울려 퍼졌다.
승리를 자축하는 울부짖음이었고, 동시에 수인족의 피를 깨우는 소리였다.
“컥······.”
“크억!”
무너진 신전 때문에 어쩔 줄 모르던 기사들과 병사들은 별안간 그 폐허 속에서 들리는 소리에 움찔 몸을 떨었다.
그게 시작이었다.
사방에서 광폭화 현상이 일어났다.
뚜두두둑!
뼈가 뒤틀리고 근육이 부풀어 오르는 소리가 이곳저곳에서 들려왔다. 변화가 시작되고 있었다.
“크르르륵······.”
이곳저곳에서 짐승의 소리가 울려 퍼졌다.
라시드 백작의 몸에 깃든 수인족의 힘이 완전히 발현되면서 그 힘을 일깨우는 기운이 이 주변에 퍼져 나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 중에서도 변하지 않는 이는 존재하였다. 그들은 시대가 많이 흐르면서 외부에서 흘러들어온 이들로 수인족의 피가 조금도 섞이지 않은 자들이었다.
“히이익!”
병사들은 겁에 질린 얼굴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그들이 어찌 두려워하지 않으랴. 모두가 짐승으로 변한 지금 그들처럼 변하지 않은 이들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였다.
바로 그때, 지척에서 짐승으로 변화한 동료들의 광기에 깃든 시선이 그들에게로 향하였다.
“크르륵.”
“사, 살려······.”
그들은 끝까지 말을 잇지 못하였다.
촤아악!
무지막지한 힘으로 쏟아지는 손톱에 고깃덩어리가 되어 찢겨나가는 병사들. 곳곳에서 그런 처참한 광경이 벌어졌다.
“흐하하하. 좋다, 아주 좋아. 오직 선택받은 존재만이 나의 신하가 될 것이다.”
이미 라시드 백작은 정상이 아니었다.
그렇게 한참 웃다가 고개를 힐끗 돌렸다. 광장의 저 너머, 불타오르는 도심 저편에 블랙 오크의 무리가 눈에 들어왔다. 그들은 일정 거리를 벌리고 다가오지 않고 있었다.
“그렇지, 네놈들이 있었구나. 주제도 모르고 나의 것을 탐하는 족속들이 말이야.”
라시드 백작은 서늘하게 중얼거리며 천천히 그곳으로 나아갔다. 그 잠깐 사이에 제라드에 관한 생각은 이제 머리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이지는 남아 있었지만, 즉흥적이고 순간순간의 감정에 충실한 짐승의 본능이 그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광폭화 형태에 들어간 라시드 백작의 등줄기를 오싹하게 하는 존재감이 느껴졌다. 바로 이 앞이었다. 블랙 오크 따위에게 두려움을 느꼈을 리가 없었다. 그가 두려움을 느낀 것은 그 뒤에 있는 무엇이었다.
‘무엇인가가 온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블랙 오크의 머리 위를 뒤덮는 검은 안개가 일렁이며 일대를 가득 메웠다.
“크우우.”
“크워.”
이렇다 할 대열 없이 엉망진창으로 서 있던 블랙 오크들이 좌우로 갈라지기 시작하더니, 그 가운데에서 오크들과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검은 군마의 기사가 절그럭 소리를 내며 걸어왔다.
그 검은 군마는 척 보기에도 일반적인 말이 아니었다. 눈에서는 붉은 흉광을 줄기줄기 내뿜고 있었고, 숨에서는 뜨거운 화염이 일렁였다.
그러나 그 군마만큼이나 그 위에 올라탄 기수는 더 특별하였다. 온몸을 검게 물들인 검은 기사. 그가 걸친 검은 갑주는 단순히 검은색으로 칠한 게 아니다. 맥동하는 검은색의 표면은 꿈틀거리고 있었다.
스아아아.
서늘한 냉기가 라시드 백작에게 밀려왔다.
거리는 50미터 이상은 족히 되었지만, 라시드 백작은 알았다. 이 정도의 거리는 안전권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바로 그때, 백작의 흉흉한 눈동자의 흰자가 검은색으로 물들면서 보이지 않던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반전된 세계 속에 서 있는 검은 기사. 그 기사의 머리 위로 뻗은 혼탁한 빛의 기둥. 그것이 보였다. 곧 눈가에 어둠이 사라졌고, 백작의 눈매가 무섭게 변하였다.
“네놈······ 성물을 찾기 위해 나타난 존재로구나. 이것은 나의 것이다. 누구도 가져갈 수 없다!”
라시드 백작은 무섭게 고함을 내질렀다.
바로 그 순간, 검은 기사는 허리춤에서 칼을 뽑아들었다.
스르릉.
나직한 소리였으나, 그 소리는 마치 천둥처럼 이 일대에 울려 퍼졌다.
뽑혀나온 칼은 그의 갑주처럼 손잡이에서부터 날붙이까지 완벽히 시꺼먼 색이었다.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도 알 수 없는 검. 그의 검이 이내 서서히 붉게 물들기 시작한 순간, 파괴적인 기운이 이 일대에 휘몰아쳤다.
라시드 백작이 눈을 부릅떴다.
짐승의 본능이 경고하고 있었다.
앞으로 수초 후에 벌어질 광경을 말이다. 그 광경 속에서 그는 저 칼에 갈기갈기 찢겨 고깃덩어리가 되어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팟.
뒤로 물러난 라시드 백작.
크르륵.
낮게 우는 그의 털은 모두 꼿꼿이 일어난 상태였다. 그렇지 않아도 3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육신이 그렇게 하자 훨씬 더 커진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 순간, 군마는 불꽃을 내뿜으며 움직이기 시작하였고, 거리는 순식간에 좁혀졌다.
콰아아앙!
8
지옥불을 머금은 칼이 바닥을 갈랐다.
콰르르르!
쩌억 갈라진 땅은 그 깊이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였고, 그 힘의 여파는 무너진 신전을 넘어서 저 뒤편에 있는 저택을 통째로 무너뜨릴 정도였다.
검은 군마가 투레질하자, 불꽃이 솟구쳤다. 목표를 놓쳤다는 것이 여간 못마땅한 듯했다.
검은 기사는 고개를 돌렸다.
저편에 짐승의 형상을 한 라시드 백작과 그 앞에 서 있는 한 인간이 보였다. 비루한 망토에 후드를 걸친 은발의 마법사. 그는 바로 제라드였다.
“여기서 물러나라, 백작. 저자는 당신이 상대할 수 없는 존재야.”
그 말대로다. 실제로 조금 전의 그 공격은 백작도 어찌하지 못할 만큼 빨랐다.
그러나.
“나는 수인족의 왕이다. 왕이 모든 것을 버리고 도망간다면 어떻게 왕일 수가 있겠느냐!”
크르륵.
낮게 우는 백작.
그의 눈동자가 무섭게 빛난 순간, 그의 신형은 은색의 잔영을 남기며 엄청난 속도로 검은 기사를 향해 쇄도했다.
“머저리 같은!”
제라드 역시 이를 갈며 아바타 마법을 전개하였다. 그가 전개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마법이었다.
벼락의 화신이 그의 등 뒤로 모습을 드러냈고, 개방한 마력에 따라서 하늘에 드리운 먹구름이 제라드의 머리 위로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꾸르릉!
벼락이 울부짖기 시작하는 가운데, 광폭화 상태에 빠진 짐승의 군대들이 왕을 따라 함께 검은 기사를 향해 달려들었다.
“크허허헝!”
짐승들이 일제히 울부짖는 소리가 뒤따랐다. 그들이 움직였으니, 곧 블랙 오크들이 그들의 왕을 위하여 움직이지 않을까 하였으나, 그런 일은 없었다.
놈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빛살과 같은 속도로 달려드는 짐승의 왕과 그의 부름에 따라 짐승으로 회귀한 그의 군대.
그러나 강철조차 종잇장처럼 찢어발기는 그들의 손톱과 이빨은 검은 기사의 갑주에 다다르지 못하였다.
콰아아아!
지옥불이 휘몰아쳤고, 붉은 선혈이 흩날리는 가운데, 그의 칼끝은 수인족 왕을 자처하는 라시드 백작의 심장을 꿰뚫었다.
찰나. 그야말로 찰나만에 싸움은 끝났다.
지옥불은 순식간에 은색의 갈기를 불태우며 집어삼켰다.
“크아아악!”
라시드 백작은 비명을 질렀다. 수인족의 강력한 마법내성도 무의미했다. 고작 그 정도 차원에서 감당할 힘이 아니다.
마침내 그 검은 불꽃이 비명조차 집어삼켰을 때, 왕을 따르던 군대는 힘을 잃기 시작하였다.
광폭화하였던 그들의 육신은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갔고, 이제 지옥불의 칼끝에는 관통된 빛만이 존재할 따름이었다.
그리고 그 빛은 서서히 검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저 검은 기사의 몸을 휘감고 있는 증오의 빛으로 말이다.
오싹.
제라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내가 열쇠에 처음 손을 댔을 때 느껴지던 그 저주. 그 저주가 지금 열쇠를 다시 휘감고 있다.’
마침내 열쇠가 내뿜던 빛이 검은 기사가 내뿜는 기운에 전부 다 가려졌을 때, 검은 기사의 갑주에서 가닥가닥 흘러나온 어둠의 손아귀는 열쇠를 단숨에 집어삼켰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어둠만이 가득하였던 검은 기사의 투구 안쪽에서 붉은색의 빛이 들어왔다. 조금 전까지 존재하지 않는 듯하였던 눈이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그 붉은 눈동자가 제라드에게 향했을 때였다.
치지지직.
제라드의 머릿속에 노이즈가 들끓기 시작하였고, 이내 시계가 반전하면서 스쳐 지나가는 것처럼 잠깐 기사의 머리 위로 또 하나의 빛의 기둥이 나타난 것이 보였다.
“큭.”
지끈거리는 두통.
제라는 짧은 신음을 토하며 눈앞의 존재를 노려보았다.
비로소 알 것 같았다.
“열쇠로 자신을 두르고 있는 거였군······.”
제라드는 코앞에 있는 검은 기사의 힘과 저 기괴한 외형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열쇠에는 각각 어떤 특별한 힘, 혹은 의지 따위가 상징처럼 존재한다.
예를 들어 조금 전 검은 기사가 흡수한 열쇠 같은 경우는 만물을 꿰뚫는 눈 따위이리라.
검은 기사가 그 힘을 흡수하자마자 눈이 생겨난 것도 그렇고, 제라드가 전에 보지 못하였던 반전세계를 목도한 것도 그렇다.
‘그 에너지의 여파에 잠깐이나마 나에게도 새로운 시야를 제공했던 거야.’
다만······ 그렇다고 한다면 자그마치 다섯 개나 되는 열쇠의 의지를 한몸에 두른 저 존재는 얼마나 대단한 존재란 말인가. 가늠할 수조차도 없다.
< 파멸의 그림자4 > 끝
ⓒ 양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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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멸의 그림자5 >
9
압도적인 존재감.
저 검은 기사가 내뿜는 존재감으로 숨이 턱턱 막혔다.
열쇠를 흡수한 라시드 백작.
그는 긴 시간 잠들어있던 수인족의 피를 완전히 각성하였다. 그 말인즉, 그가 고대인에 상당하는 힘을 손에 넣었다는 것과 같다는 얘기다.
그런데 검은 기사는 그런 백작을 한 번에 해치웠다.
강함을 가늠할 수 없다.
푸르륵.
별안간 검은 군마가 무거운 적막을 깼다.
코에서 흘러나오는 시뻘건 불꽃과 함께 검은색 투구 속에서 흉흉하게 빛나는 붉은색 눈동자가 제라드에게 향했다.
제라드의 영혼을 꿰뚫어보는 듯한 시선.
그 시선과 마주한 것만으로도 온몸이 얼어붙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 순간, 제라드는 바로 마나를 개방했다.
쿠웅.
마나 코어에서 흘러나오는 강력한 마나가 일대를 단번에 짓눌렀다. 이 일대를 짓누르는 모든 마나가 제라드와 동조하였다. 싸움의 준비가 끝났다.
제라드의 눈동자가 푸른 빛으로 빛날 때였다.
“이미 늦었다. 너는 아무것도 막을 수 없다. 다가올 종말을 맞이하라.”
음산하게 울려 퍼지는 목소리가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저 멀리에 있던 검은 기사의 지옥불을 머금은 칼이 바로 코앞까지 밀려 들어왔다.
쩌어어엉!
공간이 일그러지는 충격과 함께 뒤로 날아올랐다가 바닥을 주르륵 미끄러지며 착지하는 제라드. 충격을 제대로 다 와해하지 못하였다.
‘엄청난 파괴력이다.’
간담이 다 서늘하였다. 아바타와 마나를 모두 전개한 상황이 아니었더라면 미처 대응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물론, 그마저도 온전한 방어는 아니었다.
파스스.
제라드가 구현한 아바타가 들고 있던 거대한 방패가 흩어지면서 먼지처럼 사라졌다. 단 일격을 막아내는 것으로 한계였다는 얘기다.
‘같은 방패를 구현하는 걸로 어림도 없다. 2격째에는 반드시 베인다. 저 존재를 상대하려면 엘사리우스를 구현해야 해.’
바로 그 순간, 군마가 땅을 구르는 듯한 흉내를 냈다. 말발굽에서 불꽃이 일렁이며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콰앙!
검은 군마가 땅을 박찼다. 제라드의 반응속도를 아득하게 웃도는 움직임이었다. 대응은 불가능했다. 엘사리우스의 완전방어로 대응하는 것 외에는 말이다.
쑤우욱!
공간을 가르고 쏟아지는 지옥불의 검! 라시드 백작을 단 일격에 보냈던 그 무시무시한 공격이었다. 하지만 제라드는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꽈아앙!
검과 방패가 부딪친 순간, 충격파가 발생하였다.
그러나 이번에 제라드는 밀려나지 않았다.
고오오.
제라드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이 바뀌었다.
푸른빛으로 일렁이던 눈동자는 어느새 새하얀 빛을 머금고 있었고, 그의 은발은 빛을 내뿜는 것처럼 반짝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등 뒤로 치솟은 빛의 거신은 찬란한 빛을 토하는 방패로 검은 기사의 검을 막고 있었다.
엘사리우스였다.
검은 기사의 검이 더욱 매서운 기운을 내뿜었지만, 엘사리우스는 흔들림 없이 버텼다.
그러는 사이 빛의 거신은 하늘을 향해 벼락의 검을 높이 쳐들었으니, 하늘에서 떨어지는 벼락이 칼에 내리 떨어져 요동쳤다.
이 세계에 존재하는 뇌전계 마법의 극한까지 벼려진 마법. 라이트닝 볼텍스가 다시금 이 지상에 강림하는 것이다.
꽈르르르르릉!
천지가 요동치는 무시무시한 굉음과 함께 소리가 짓이겨졌고, 빛이 눈앞을 가득 메웠다. 세상이 새하얗게 물들었고, 폐허 일대가 벼락 줄기에 파괴되어갔다.
벼락이 사방에서 터지고, 불꽃이 번쩍거렸다.
그러나 그 모든 빛이 사라졌을 때, 출렁이는 벼락의 검에 휩쓸려 사라졌어야 할 존재는 여전히 그곳에 멀쩡히 서 있는 모습이었다.
제라드의 공격이 막힌 것이다.
고오오오.
타오르는 지옥불의 검은 이윽고 진동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더니.
끼아아아아아악!
고막을 찢어발기는 듯한 소리를 냈다.
그 순간.
쩌엉!
벼락의 검이 허무하게 흩어지며 찢겨나갔다.
‘이럴 수가?’
제라드가 깜짝 놀라며 주춤하는 그 순간이었다. 벼락의 검을 튕겨낸 지옥불의 검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공간을 가르며 쏟아졌다.
터어엉!
요란한 굉음과 함께 불똥이 튀었다.
지옥불의 검과 엘사리우스는 거의 평수.
그러나 그래서는 제라드가 손해였다.
“합!”
제라드의 기합과 함께 아바타의 오른쪽 손에 다시금 벼락이 쥐어졌다.
부우웅!
날아드는 거대한 벼락의 검에 다시금 하늘에서 떨어진 뇌전이 맺히더니, 검은 기사를 향해 쏟아졌다.
꽈르르릉!
요란한 굉음과 함께 이 일대를 휩쓸어버리는 벼락줄기 다발. 하지만 상황은 달라진 게 없었다. 공격은 이번에도 막혔고, 검은 기사의 검은 이번에도 여지없이 벼락의 검을 부쉈다.
그렇게 계속 같은 상황이 이어지는 몇 번의 공방이 이어졌다. 재앙과도 같은 지옥불의 검은 붉은빛을 요사스럽게 토하였고, 그럴 때면 제라드의 아바타가 든 벼락의 검은 여지없이 찢기며 흩어졌다. 그러면 바로 그다음 공격이 날아들었다.
꽝!
“큭.”
제라드가 낮은 신음을 토하며 뒤로 주륵 밀려났다.
거의 동수를 이루는 것처럼 보였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조금 전의 일격으로 어느 쪽이 이 싸움을 잡고 있는가는 명확하게 드러났다.
‘이대로는 안 돼.’
제라드는 그렇게 판단했다.
그의 입가에서 붉은 선혈 한 줄기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번번이 마법이 강제로 깨지는 것 때문에 마법의 리바운드가 일어나고 있었다. 거기다가 엘사리우스를 계속 사용하는 것. 그것도 제라드의 몸에는 엄청난 부담이었다.
문제는 최소한 엘사리우스를 유지하지 못한다면 이런 싸움조차도 불가능했다.
‘검이 필요해. 놈의 검과 대적해도 깨지지 않을 정도의 검이······.’
10
쑤우욱!
또다시 거리의 제약도 없이 불쑥 날아드는 칼.
검은 기사의 검격은 조금씩이었지만, 점점 더 빨라지고 있었다. 제라드와의 교전이 점차 익숙해지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그렇게 느껴지는 까닭으로는 제라드가 교전이 계속될수록 약해져 가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헉헉.”
밀려난 제라드가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땀을 닦았다. 이젠 코에서도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제라드는 이미 한계였다.
“파멸을 받아들여라. 흐름은 막을 수 없다.”
“개소리······.”
제라드가 반사적으로 그렇게 대답했다.
어찌 알았으랴.
그것이 최후의 선고였음을 말이다.
하늘 높이 들어 올린 지옥불의 검에서 흘러나오는 힘이 더욱 강해졌고, 마침내 하늘까지 치솟으며 점차 커졌다. 그리고 그것은 공간을 일그러뜨리며 단숨에 제라드를 향해 내리 떨어졌다.
라시드 백작에게 처음에 쏟아냈던 그 일격이었다.
아바타의 방패, 엘사리우스가 즉각 반응하는 가운데, 지옥불이 제라드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콰아아앙!
이 일대의 대지가 푹 주저앉았다. 엘사리우스 방패는 깨지지 않았지만, 재앙과도 같은 그 힘의 충격은 고스란히 제라드의 몸에 전달되었다. 뼈가 부서질 것처럼 시큰거렸다.
“쿨럭!”
이내 피를 왈칵 토하는 제라드.
무릎 한쪽을 굽히며 연신 각혈을 해대는 모습이었다. 대지를 베어 가르는 공격을 그 정도의 수준에서 막았으면 잘 막은 것일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문제는 제라드가 더는 싸움을 이어나갈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이렇게 힘의 격차가 크다니······.’
일어서려고 했지만, 그마저도 쉽지가 않았다. 온몸이 삐걱댔고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불타오르는 이곳의 대지로 서서히 다가오는 검은 기사의 존재감이 느껴졌다. 걸음걸음마다 불꽃을 새기는 검은 군마의 말발굽.
검은 군마가 푹 꺼진 땅으로 서서히 움직였다. 걸음걸음마다 불꽃이 새겨졌다.
‘이것이······ 세계의 문을 여닫는 열쇠의 힘이구나.’
제라드는 그렇게 실감했다. 그러자 어쩐 일인지 웃음이 흘러나왔다.
“종말이 이 세계의 흐름이라는 건가.”
“악의의 결말은 파멸이다.”
“헛소리. 누구의 악의란 말이냐. 이 세상 사람 중 누구도 파멸을 원하진 않는다. 결과가 파멸로 이어지고 있을 뿐이야.”
“무지한 소리.”
검은 기사는 그렇게 일축했다.
그 순간, 투구 속에서 붉은 흉광이 무섭게 쏟아져나왔다.
제라드는 그 빛을 마주한 순간,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꼈다. 검은 기사가 제라드의 정신에 침투해오기 시작한 것이다.
“정신오염 따위에 굴복할 것 같으냐!”
제라드가 천둥 같은 고함을 내지른 순간, 검은 기사가 내뿜던 붉은 흉광이 약해졌다. 하지만 검은 기사도 물러나지 않았으니, 검은 기사의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미증유의 힘은 점점 더 커졌다.
“크으으윽!”
제라드는 악착같이 버텼다.
그러나 한계는 명확했다.
내부로 스며드는 검은 기사의 힘은 곧 제라드의 눈앞에 어떤 광경을 보여주었고, 이내 수백 수천 명의 목소리를 한 번에 들려주었다.
-내가 왜 죽어! 난 못 죽어. 그럴 수 없다. 다른 놈들을 죽여! 나는 아직 죽을 수 없어!
-우리에게서 빛을 빼앗아 갈 참이냐! 저주한다. 네놈을 저주한다. 너희 종족 전체를 저주한다!
-우리는 함께 하늘에 다다를 수 있었다. 우리는 모두 하늘에 다다를 수 있었어. 그런데 어째서냐. 왜 모든 것을 되돌리려고 하는 거야?
-너를 저주한다! 저주하고 또 저주한다!
-진정 사라져야 하는 건 네놈이야!
“크아아아악!”
제라드가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범람하던 목소리와 광경이 모두 사라졌을 때, 그는 토악질을 시작했다.
“우욱!”
얼마나 속을 게워냈을까. 바닥에 주저앉은 제라드는 무방비한 모습으로 조금 전의 광경을 유추하였다.
“2, 2시대의 마지막 기록······?”
“그렇다. 정화의식은 불완전했다. 시행자의 목숨이 다하였고, 온 세상에는 탐욕과 증오, 분노, 악의가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만연한 에너지가 세계수로 모여들었다.”
검은 기사의 말을 듣는 순간, 제라드는 그동안 미처 보지 못했던 것들을 떠올렸다.
검은 기사의 말은 진실이었다.
세계수에 모여든 에너지. 그것은 세계에 가득했던 온갖 악의 사념이었다. 그것이 문을 닫는 가장 마지막 스위치가 되었고, 그것은······.
“이 세계의 기저에 깔려 씨앗이 되었다. 범람한 악의를 악의로 씻어낸 셈이다. 그렇기에 이 세계는 불안정한 것이다. 문제가 끊이질 않고, 분쟁이 사라지지 않는다. 탐욕은 탐욕을 키우고 증오는 증오를 낳는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의 중심에는 마법이 존재한다. 이 땅의 모든 생명체는 마법과 연결되어 있고, 그것을 바로잡으려면 모든 것은 반드시 종말을 맞이해야만 한다. 그 끝은 이제 바로 앞까지 와 있다.”
검은 기사는 그 말을 끝으로 전할 말은 모두 전했다는 듯, 지옥불의 검을 하늘 위로 들어 올렸다.
제라드는 혼란스러운 얼굴이었다.
2시대의 끝과 3시대의 시작······ 그리고 다시 2시대와 똑같은 지금의 상황. 그렇다면 이 모든 것은 어떤 식으로 해도 피할 수 없는 결말이라는 얘기가 되기 때문이다.
지옥불은 바로 코앞이었다. 그리고 제라드의 아바타는 서서히 형태를 잃고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아바타는 심상을 구현한 제라드의 내면세계를 대변하는 마법. 그 힘은 제라드의 의지가 꺾이는 순간 무너지게 된다.
바로 그때였다.
하늘 위에서 새하얀 빛에 휘감긴 파도 따위가 검은 기사와 제라드 사이에 떨어져 내렸다. 검은 기사는 뒤로 물러났고, 제라드는 빛에 휘감긴 그 존재를 눈에 담았다.
“포기하는 건가요?”
“아나리엘······.”
빛에 휘감긴 존재. 그것은 아나리엘이었다. 놀랍게도 그녀는 아스트랄 라인의 힘과 완전히 접촉한 상태였다.
“다시 물어볼게요. 이 세계의 운명이 애초에 그랬으니까, 그냥 그렇게 놔두는 게 맞나요? 그럼 당신은 어째서 자신의 운명에 순응하지 않았나요? 왜 마법사가 되었죠?”
그 말을 듣는 순간, 제라드는 눈을 크게 떴다.
제라드의 운명. 그라우드 공작가의 저택. 바보를 가장했던 아이. 그 아이는······ 이윽고 자신의 운명을 택하였다. 운명을 바꾸기 위해서 마법사가 되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도 마찬가지였다.
제라드는 이 세계에 닥친 비극적인 운명을 막기 위하여······ 그리고 자신의 힘의 책임을 다하기 위하여 이곳에 서 있었다.
제라드의 눈이 변했다. 조금 전과 같은 눈동자가 아니었다.
아나리엘은 힐긋 고개를 돌려 제라드를 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고마워요, 아나리엘.”
제라드는 그렇게 말하며, 입과 코에서 흐르는 핏물을 닦아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싸울 생각이군요.”
“예, 그럴 생각입니다.”
“그럼 끝까지 포기하지 마세요. 제가 틀리지 않았다는 걸, 증명해주세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더니, 갑자기 제라드를 껴안았다.
이 갑작스러운 행동에 제라드가 깜짝 놀란 얼굴을 하고 있을 때였다.
“싸움은 끝나지 않았어요. 이제부터예요.”
그녀가 귓가에 그렇게 속삭였고, 몸에 서서히 미증유의 기운이 스며들기 시작하였다. 제라드가 막 눈살을 찌푸렸을 때였다. 아나리엘이 제라드를 밀쳤다. 바로 그 순간, 아나리엘의 전신에 충만하였던 그 새하얀 빛은 제라드에게 옮겨와 있었고, 그녀는 웃었다.
“안 돼!”
제라드는 눈앞의 공간이 일그러지는 것을 느꼈다. 아나리엘의 의도가 무엇인지는 명백했다.
제라드가 모든 현상을 제어하려고 안간힘을 쓸 때였다.
푸확!
아나리엘의 몸을 꿰뚫고 핏물이 튀었고, 그 너머로 붉은 흉광을 내뿜는 검은 기사의 모습이 보였다.
“네노오오옴!”
제라드가 분노에 가득 찬 음성을 토했을 때, 검은 기사가 찔러온 지옥불의 검은 일그러지는 공간의 틈을 비집고 들어와 제라드의 몸을 꿰뚫었다.
영혼 전체가 짓이겨지는 감각 속에서 제라드는 통성조차 내뱉지 못하였고.
“이걸로 열쇠는 모두 모였다.”
검은 기사의 나직한 목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제라드는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베리타스가 저 지옥불의 칼에 꿰인 채로 제라드와의 연결이 끊어지는 것을 말이다.
< 파멸의 그림자5 > 끝
ⓒ 양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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