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1화 (31/38)

< 마스터의 귀환1 >

2시대를 끝낸 존재. 

그는 지금 이 순간, 제라드와 완벽히 똑같은 얼굴을 하고서 눈앞에 있었다. 제라드는 놀라지 않았다. 그저 찬찬히 자신과 닮은 듯, 다른 사람인 그 사람의 얼굴을 눈에 담았다. 

그 사내의 나이는 삼십 대 후반쯤으로 보였다. 

힘겨운 삶과 궤적을 그려왔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세월의 주름과 연륜이 깃든 외눈의 눈동자. 계속되는 치열한 교전 속에서 하나의 눈을 잃은 듯, 한쪽 눈두덩에선 피가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눈만이 아니다. 한쪽 팔은 존재하지 않았고, 복부에서는 피가 뚝뚝 흘러내리고 있다. 한 개씩 열거하자면 끝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담담한 얼굴이었다. 죽음 따위는 기꺼이 받아들이겠노라고 말하듯이 말이다. 

살기가 번들대는 눈동자. 그 시선과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제라드는 등줄기가 오싹 대는 것을 느꼈다. 

“똑같은 얼굴이군. 내가 죽기 전에 보는 환각 같은 건 아닌 것 같은데······.” 

하나밖에 남지 않은 그의 눈동자가 새하얀 빛을 머금었다. 그것은 아스트랄 라인의 그 빛이었다. 

사내는 자신의 옆으로 시선을 던졌다. 바로 그 순간, 그의 옆에 시꺼먼 마도서가 모습을 드러냈다. 지금 이 순간, 이곳엔 두 개의 마도서가 존재했다. 

그 두 개의 마도서는 완벽히 같은 이름을 하고 있다. 

베리타스. 

잠깐의 적막이 흐르는 가운데. 

“그렇군. 여기는 기록 속에 구현된 세상인가? 그렇다면 내가 해야 할 일은 다 잘 끝낸 모양이군. 헛고생을 한 건 아닌 것 같아서 다행이야.” 

그가 순식간에 상황 파악을 끝냈다. 

제라드는 놀란 얼굴을 했다. 

“놀랍군요. 당신이 어떻게 그걸 알지요?” 

제라드는 지금껏 무수한 기록을 보았고, 그 순간순간에 서 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그 기록에 존재하는 사람과 대화를 나눈 적은 없었다. 무엇보다 그 존재가 지금 이 순간을 꿰뚫어 본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토록 놀라운 일이던가? 세계의 기록, 아스트랄 라인의 흐름에 접촉한 그대라면 마법이란 것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힘이라는 걸 알 텐데. 찰나의 순간조차도 세계의 기록에는 아주 완벽하게 남는 법이지. 더욱이 그 순간이 세계 전체에 영향을 미칠 아주 중요한 순간이라면 더더욱 말이야.”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힘······.” 

제라드가 놀랍다는 얼굴로 그렇게 중얼거리자, 사내는 이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군. 아직 그 경지에는 다다르지 못한 모양이군. 서두를 필요는 없지. 그 정도라면 머잖아 알게 될 테니까. 헌데, 이곳에는 어째서 왔는가? 단순히 내 이름 같은 게 궁금한 건 아닐 텐데.” 

“우리는 너무나도 많은 점들이 닮아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그건 단순한 우연은 아닌 것 같군요.” 

“흐음, 그럴지도 모르겠군. 세상의 모든 일에는 인과의 끈으로 묶여 있는 법. 지금 그대와 나의 얼굴이 똑 닮은 데에는 어떤 이유가 있겠지······.” 

그는 그렇게 말하며 말끝을 흐렸고, 제라드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빛을 머금은 눈동자와 마주하자, 제라드는 꿰뚫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흐음, 그렇군. 생애의 방식······ 혹은 목적 그 자체까지 닮아있다는 얘기였나. 이제야 이해했다. 확실히 그대는 나와 닮았다. 놀라울 정도로 말이야.” 

“놀랍군요. 그것도 읽어냈단 말입니까? 모든 걸 간파하시는군요.” 

“아니, 모든 것이라고 하기엔 편린에 불과하지. 그건 너무 무한한 표현이야. 뭐, 그 얘기는 그쯤 해두고······ 다시 이야기를 원점으로 돌리지. 그대의 생애, 목적이 나와 닮았다는 것은 이 시대의 이후에 또다시 문이 열린다는 얘기겠지. 유감스럽게도 말이야.” 

“······.” 

사내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제라드도 사내의 시선이 향하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의 시선은 하늘의 문에 닿아 있었다. 그 문은 제라드가 있던 세상에 존재하던 것보다 훨씬 더 큰 빛을 내뿜고 있었다. 

“뭘 알고 싶어하는지는 알겠는데······. 그것에 관해서는 내가 알려줄 게 별로 없을 것 같군. 어쩌면 그대가 의심하는 것처럼 나의 환생이 그대일지도 모른다. 혹은 이 세상이 물레방아처럼 돌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고.” 

“······우리의 운명이 이어져있을 가능성은 충분하군요.” 

“그게 중요한가?” 

“제게는 중요합니다. 제가 해온 모든 것들이 결국 당신이라는 존재의 환생이기 때문에 혹은 당신의 운명을 이어받았기 때문이라면······.” 

“그렇다고 한다면 무엇이 바뀌지?” 

“······.” 

사내의 눈동자는 투명했다. 

“바뀌는 건 없어. 그대와 나의 운명이 무관하지 않다고 해도, 혹 그대가 생각하는 것처럼 설사 그렇다고 할지라도 달라지는 건 없어. 나는 나고, 그대는 그대다.” 

제라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말문이 턱 막혔다. 

똑같은 상황. 

똑같은 운명. 

자신이 그동안 해왔던 모든 것들이 운명이라는 단 한 마디로 정리된다면 그보다 더 허무한 일은 없을 터였다. 

그런데 지금 눈앞의 존재는 말하고 있었다. 

그게 무슨 상관이느냐고 말이다. 

“혼란스러울 거 없어. 우리는 그저 닮았을 뿐이야. 한없이 비슷하고,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다고 해도, 그저 그뿐이다. 그것이 그대를 강제하였던 적이 있던가?” 

“그런 적은······ 없습니다.” 

“그래, 바로 그거야.” 

사내는 피식 웃으며, 별안간 멈추었던 발걸음을 재촉했다. 지금 이 순간은 과거의 기록일 뿐이었다. 과거를 변경하는 일 따위가 아니었으므로, 그 안에 있었던 사실 그 자체를 바꿀 수는 없다. 그는 자신이 할 일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제라드는 그를 뒤따랐다. 

“그럼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묻겠습니다. 당신은 모든 열쇠를 모았고, 이게 마지막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열쇠라는 건 하늘의 문을 닫는 데 필요한 겁니까?” 

“정확히는 문을 닫고 잠그는 데 필요한 것들이지. 하지만 세계의 의지는 몹시 변덕스럽고 또 그리 우호적이지 않을 거야. 열쇠는 저마다 다른 모양으로 존재하고 또는 숨겨져 있지. 찾는 게 아주 고역이 될 거야.” 

그 말을 끝으로 사내는 세계수에 손을 얹었다. 

그 후에 벌어진 일들은 기록 속에서 몇 번이고 봐왔던 그대로였다. 하늘의 문을 닫는 의식이 집행되었고, 생명력이 충만했던 세계수에는 죽음이 깃들었다. 

“마지막 인사로군. 그대의 여정이 부디 순탄하기를 바라네. 우리의 운명이 별개라고 해도, 그대가 지키고자 하는 것을 지켰으면 좋겠군.” 

그 목소리는 서서히 흩어져 갔고, 마침내 문이 닫혔다. 

제라드는 눈을 천천히 떴다. 

익숙한 현실감이 느껴졌다. 

그 현실적인 기록에서 돌아온 것이다. 

제라드는 자신과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던 사내의 마지막 인사를 떠올렸다. 

분명히 야음이 깊게 드리운 시각에 세계수에 접촉했었는데, 하늘은 벌써 붉게 물들어 있었다. 

꼬박 한나절이 흐른 모양이었다. 

“아나트리에, 계속 그곳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까?” 

“찾으시던 답은 얻으셨는지요.” 

“예, 당장 알고 싶었던 것보다 더 큰 중요한 이야기를 듣고 오는 참입니다.” 

“다행이군요. 그럼······.” 

아타트리에가 말끝을 흐렸다. 

제라드가 그녀의 눈을 보았다. 

두려움과 불안에 잠긴 눈이 보였다. 

‘내가 세계수를 파괴할 것을 염려하고 있구나.’ 

제라드는 세계수의 맥동을 느꼈다. 

강렬한 생명력이 지금 이 순간에도 느껴졌다. 아주 조금씩이지만, 그 맥동이 점차 커지고 있었다. 세계수는 점차 살아나고 있었다. 

하지만. 

‘세계수는 열쇠가 아니다.’ 

만약 세계수가 열쇠였더라면 베리타스가 먼저 반응했을 것이다. 어떤 식으로든 말이다. 그리고 베리타스가 아니었다고 해도 이젠 제라드가 어떤 식으로든 느꼈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의 세계수는 그저 일방적으로 세계수에 영향을 받고 있을 따름이었다. 

“세계수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겁니다.” 

“그걸로 괜찮으신 건가요?” 

“네, 충분합니다.” 

제라드는 그 말을 끝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는 문을 닫을 겁니다. 문이 닫히게 되면 세계수가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아마도 지금처럼 당신들의 머릿속에 울려 퍼지는 목소리는 없어지겠지요.” 

성역 밖으로 향하는 제라드. 

아나트리에는 그를 붙잡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숙이며 예를 다했다. 

제라드가 성역을 지나서 하늘길로 향하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 때였을까. 

사아아아아. 

별안간 성역 밖의 숲이 요란하게 울기 시작했다. 

제라드가 발걸음을 멈춰세웠다. 어둠에 휩싸인 숲이 술렁이는 게 보였고, 그 안에서 소용돌이치는 적의가 느껴졌다. 제라드가 성역에 다다르는 것을 방해했던 엘프들이 이 일대를 물샐틈없이 포위한 것이다. 

“모두 물러나라. 나는 그대들과 싸울 생각이 없다. 세계수는 멀쩡해. 그건 그대들이 더 잘 알고 있을 텐데.” 

제라드의 목소리는 나직하였지만, 온 숲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그러나 그 목소리를 듣고도 엘프들의 적의는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제라드가 성역의 수호자를 해치웠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들의 지도자가 죽었으니, 제라드에게 복수심을 품는 건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결국, 끝까지 싸울 수밖에 없나.” 

제라드의 눈동자에도 점차 살기가 드리우기 시작하였다. 이전 시대에 잠들어 지금 깨어난 엘프들. 그들의 존재는 너무나도 위협적이었다. 

‘그들은 인간을 증오할 테지. 앞으로도 계속. 그렇다면 언제든 적이 되어도 이상하지 않다. 싸움을 피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야.’ 

제라드의 마음속에 척결의 의지가 떠올랐을 때였다. 

아아아. 

저 멀리 세계수가 있는 성역의 저편에서 구슬픈 휘파람 소리와 같은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인간의 목소리로는 절대로 낼 수 없는 음색. 그 안에 깃든 부드럽고 상냥한 목소리는 이 일대의 사나운 적의를 모두 씻어내고 있었다. 

‘아, 그녀가 노래를 부르고 있구나.’ 

제라드는 거의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아나트리에의 노래다. 

제라드는 노랫소리에 깃든 말을 알지는 못했다. 그 언어는 인간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만, 그 말이 무슨 말인지는 알 수 없다고 해도, 그 안에 깃든 의미는 명확히 전달되었다. 

노래는 계속 이어졌고, 머잖아 숲속에서 울려 퍼지던 사나운 울음이 이에 동조하여 울려 퍼졌다. 그것은 조금은 슬픈 장송곡처럼 들렸다. 

아마도 그 성역의 수호자를 자연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그녀가 보내주고 있는 것이리라. 

‘어쩌면 이런 게 진정한 엘프의 마법일지도 모른다.’ 

사나운 마음을 진정시켜 부드럽게 위로하고 감싸 안는 힘. 

제라드는 언제 저들을 척결할 생각을 했었느냐는 듯, 담담한 얼굴로 걸음을 서둘렀다. 

그때, 저편의 숲에서 엘프들이 한둘씩 나타났다. 

경계심이 가득한 그들은 눈은 슬픔에 젖어 있었다. 

이제는 머나먼 과거가 되어버린 시대. 모든 것을 잃어버린 종족. 그들의 슬픔과 허망함은 제라드가 감히 짐작할 게 아니리라. 하지만 그럼에도······. 

‘모든 것이 다 망가지는 결말은 피해야만 한다.’ 

휘오오오. 

산봉우리 높은 곳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제라드의 등을 떠밀었고 머잖아 발아래로 알타자르 산맥의 험준한 산세가 한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수백 명의 엘프들이 부르는 노랫소리는 한동안 계속 이어졌다. 그리고 그들의 목소리가 더는 들리지 않게 되었을 무렵, 제라드는 산 끝자락에 다다랐다. 

‘그러고 보면 엘프들이 사람들이 광산을 캐고 들어가는 것에 분노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알타자르 산맥의 깊숙한 곳에는 이전 시대에 깨어나지 못한 엘프들의 유해가 존재할 터. 그들의 유해는 그대로 고농도의 마정석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즉, 단순히 영역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어서 필립에게 철수 준비를 끝마치라고 전해져야 할 것 같았다. 

바로 그때였다. 

콰앙! 

광산 쪽에서 별안간 엄청난 굉음이 울려 퍼졌고, 땅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요동쳤다. 제라드가 눈살을 찌푸리며 그곳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콰르르르! 

요란하게 무너지는 광산의 입구. 

흙먼지와 굉음의 어둠 속에서 7미터에 육박하는 거대한 돌덩어리 따위가 서로 얽히더니, 불쑥 흙먼지를 꿰뚫고 치솟는 모습이 보였다. 

[인간, 인간! 증오스러운 인간!] 

이지러지는 목소리와 함께 푸르스름한 불꽃에 휩싸인 돌의 거인이 울부짖었다. 

“골렘!” 

제라드가 눈살을 찌푸렸다. 

모습은 많이 달랐지만, 지금 저 거인은 10년 전, 풀고르의 던전에서 보았던 것과 같은 골렘이 틀림없었다. 그것도 엘프의 영혼이 깃든 골렘 말이다. 

제라드의 눈이 무섭게 변했다. 

“그렇게 말했는데, 광산에 또 내려갔단 말이냐!”

< 마스터의 귀환1 > 끝

ⓒ 양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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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스터의 귀환2 >

사람들이 우왕좌왕 도망치기 바빴다. 

콰아앙! 

또다시 지축이 뒤흔들리는 충격이 일대에 쏟아졌다. 

푸른 불꽃에 휘감긴 돌의 거인이 휘두르는 주먹은 무기력하게 도망 다니는 사람들을 거침없이 휩쓸었다. 

“저, 저게 무슨 괴물이란 말인가······.” 

감시자의 요새에서 지원을 나온 기사들은 난색을 금치 못했다. 세상에 저런 몬스터가 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죽어라, 인간!] 

비명처럼 울려 퍼지는 목소리에 기사들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조금 전부터 들리는 이 목소리가 사람들의 정신을 오염시키고 있었다. 도망치다 말고 이내 주저앉는 이들이 곳곳에서 보였다. 

기사들도 골렘의 위압감에 아무것도 하지 못할 때였다. 골렘이 팔을 하늘로 번쩍 들어 올렸다. 내려치는 일만 남았을 그 순간, 별안간 골렘의 몸 균형이 무너지더니 바닥에 쿵 쓰러지고 말았다. 

“렉터 경, 인부들을 피신시키십시오!” 

자욱한 흙먼지 속에서 천둥 같은 고함이 울려 퍼졌다. 

“피, 필립 공이오?” 

“머뭇거릴 시간이 없습니다!” 

필립이 다시금 소리쳤다. 그러자 렉터가 번뜩 정신을 차리고 달리기 시작했다. 

“알겠습니다. 뒤는 맡기겠습니다.” 

“······.” 

필립은 다시금 몸을 일으키는 골렘을 눈에 담았다. 

뒤는 맡기겠다, 렉터는 그렇게 말했다. 정말로 이런 상황만 아니었더라면 그의 얼굴을 주먹으로 날려버렸을지도 몰랐다. 

“빌어먹을. 누구 때문에 이런 상황이 벌어졌는데······.” 

전날 새벽에 갑자기 도착한 감시자의 요새 지원군. 그들은 현장의 모든 통제권을 그대로 가져갔고, 다시 아침부터 광산 채굴 작업을 정상화하였고, 산맥의 주인들은 자신들이 상대하겠노라고 떵떵거렸다. 필립은 안 된다고 거듭 못을 박으며 설득했지만, 도무지 통하질 않았다. 그리고 일은 결국 이 지경이 된 것이다. 

[너희는 해악의 존재들이다!] 

이 와중에도 골렘이 뿜는 증오의 감정은 소름이 끼칠 수준이었다. 

“골렘을 실제로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모두 조심하세요. 천천히 상대해봅시다.” 

필립은 그렇게 지시를 내리며, 바람을 일으켰다. 그가 가장 잘 사용하는 마법은 바람 계통의 마법이었다. 바람을 쏟아내며, 골렘의 공격을 저지하고 그 틈에 바로 좌우로 산개하며 퍼지는 다른 동료 마법사들이 마법을 사용하여 골렘을 요격한다. 

꽈앙! 

골렘의 몸에서 피어오르는 폭연과 마나의 소용돌이. 

몹시 이상적인 대응이었다. 

다만, 그들은 골렘의 특성이라는 걸 잘 몰랐다. 

골렘은 태생적으로 마법에 대한 내성이 엄청나게 높았다. 그런 까닭에 어지간한 마법으로는 이렇다 할 타격을 주긴 어려웠다. 

“헉!” 

폭연을 뚫고 불쑥 튀어나오는 커다란 주먹을 피해 섀도우를 펼치는 마법사들. 이내 그 자리에 주먹이 찍히며 땅이 푹 꺼졌다. 

“흠집도 나지 않다니······ 무슨 공격력이······.” 

필립이 신음을 흘릴 때였다. 

별안간 골렘의 얼굴에 떠오른 마법의 눈동자가 홱 옆으로 돌아갔다. 그 시선은 지금 눈앞에 있는 마법사가 아니라, 도망치는 인부들과 기사단에 꽂혀 있었다. 

[너희는 우리의 것을 빼앗아 가기만 하는 존재다!] 

골렘의 소름 끼치는 외침이 머릿속을 가득 메우는 가운데, 쿵쿵 울려 퍼지는 소리와 골렘이 인부들을 쫓기 시작했다. 

“큭! 마정석에 반응하는 건가!” 

필립과 무색의 마법사들이 바쁘게 골렘의 뒤를 쫓으며 마법을 전개했다. 

콰콰쾅! 

골렘의 등과 다리, 관절 부위로 쏟아지는 마법. 처음엔 골렘은 그냥 몸을 움츠려서 견뎠다. 하지만 이내 날아드는 마법이 관절 부위 같은 곳을 노려서 이동 속도를 늦추고 있음을 알았는지, 오금과 발목 등을 보호하기 시작했다. 

“말도 안 돼. 전투 경험을 쌓는 건가?” 

필립이 아주 질렸다는 얼굴로 중얼거릴 때였다. 

“그들을 상대론 그런 식의 방법은 통하지 않아. 강력한 물리력을 이용해서 연결 부위를 통째로 날려야 한다.” 

머리 위쪽에서 별안간 바람을 타고 전해지는 것처럼 목소리가 들려왔다. 필립은 그 목소리를 알고 있었다. 

막 고개를 들었을 때, 그는 어둠을 꿰뚫고 달려가는 한 줄기의 빛을 보았다. 

그것은 벼락의 빛이었다. 

콰르르릉! 

그 빛이 다다르는 지점. 그곳에서 번쩍 벼락이 터졌다. 

콰르르르! 

거침없이 달려나가던 골렘의 몸이 무너지면서 바닥에 주저앉았다. 날아드는 어떤 마법에도 흔들림이 없었던 다리 하나가 무너져 있었다. 

도망치는 인간들에게 향해 있던 골렘의 적의가 바로 지척에서 느껴지는 엄청난 존재감을 향해 쏟아졌다. 그 존재감의 주인은 흙먼지 속에 있었다. 

골렘이 주먹을 번쩍 들었을 때였다. 흙먼지 안에서 빛이 번쩍거렸다. 그 순간, 솟구치는 빛은 단숨에 골렘의 몸 중심에 다다랐다. 

콰아앙! 

요란한 굉음과 함께 골렘의 팔다리가 바닥에 쿠쿠쿵 떨어졌다. 바로 조금 전에 골렘의 몸을 구성하던 핵을 공격받았기 때문이었다. 한계를 넘어선 물리력을 감당할 방법이 없어진 골렘은 이내 맥없이 무너졌다. 

콰르르르. 

후두둑, 흙먼지가 이 일대를 가득 메웠다. 

끼아아아. 

비명을 내지르는 듯한 소리. 돌 안쪽에서 푸른색의 영혼이 흩어지며 사라졌다. 어둠 속에서 수백 년이 넘도록 증오로 벼려진 영혼이 마침내 돌아가야 할 곳으로 돌아간 것이다. 

먼지가 가라앉기 시작했을 때, 그 거대한 돌덩어리 안쪽에서 한 명의 마법사가 나타났다. 

그는 제라드였다. 

“스승님.” 

“내 말을 듣지 않았구나, 필립.” 

제라드가 엄한 눈으로 필립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흠!” 

렉터가 헛기침을 하였다. 

“흠흠. 필립 공, 그게 나의 잘못도 아닌데, 왜 그런 식으로 바라보는 것이오? 황명을 수행하고자 하는 것이 신하된 도리일진대.” 

“이곳을 엘프의 영역이라고 말씀드렸을 겁니다. 채굴 작업이 얼마나 위험한지도 말입니다. 그런데 렉터 경이 이 모든 일을 추진하였고, 결국 이번 일이 벌어지지 않았습니까! 사람이 몇 명이나 죽었는지 헤아려보십시오!” 

고함을 지르는 필립. 그가 분노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한창 철수 작업이 치러지는 와중이었는데, 그가 현장 지휘권을 가져간 뒤로는 모든 게 원래대로 돌아가지 않았던가! 

처음에는 할 말이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짓던 렉터도 필립이 고함을 지르자, 눈썹이 휘었다. 

눈앞의 마법사가 무색의 마법사이며, 상당한 지위의 존재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기사단의 단장이었고, 감시자 요새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갈 정도의 인물이었다. 그의 의견을 듣고 참고할 수는 있어도, 그 말을 들어야 하는 건 아니다. 

“필립 공, 일이 이렇게 된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오. 하지만 내 결정은 타당했소. 나는 귀공의 제안을 무조건 따르지 않아도 될 권한이 있단 말이오.” 

“경의 경솔한 선택으로 죽은 인부들에게도 그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쯧! 그쯤 하시오! 내가 그들을 죽이려고 한 것도 아닌데, 왜 나를 죄인 취급하는 것이오!” 

렉터도 이제 벌게진 얼굴로 성질을 냈다. 자칫하다가 칼을 꺼내 들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분위기가 험악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필립은 좀처럼 물러나지 않았다. 

‘이, 이 자가 진정 미치기라도 했단 말인가.’ 

렉터가 참기 어렵다는 듯 그렇게 생각했을 때였다. 

별안간 막사 안쪽으로 누군가 한 사람이 걸어들어왔다. 처음에는 인부인 줄 알았다. 들어온 이가 웬 누더기 망토 따위를 걸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무래도 인부가 아닌 듯했다. 무색 마법사들 사이로 불쑥 걸어나온 그는 렉터의 앞에 섰다. 

“그대는 누구인가! 누가 허락도 없이 이곳에 들어와도 좋다고 했지?” 

“렉터 경, 그렇다면 그대가 죄인이 아니란 말인가?” 

“뭣이? 내가 누구인 줄 알고 감히 그대라고 하느냐!” 

그렇지 않아도 필립과 언성을 높이며 싸우던 렉터는 참을 수 없다는 듯이 허리춤의 칼에 손을 얹었다. 

“무릎을 꿇어라. 당장 무릎을 꿇지 않으면 그 목을 베어버릴 것이다.” 

“그대의 욕심 때문에 죽지 않아도 좋을 사람들이 죽었다. 사람이라면 응당 책임감을 느껴야 할 거야.” 

“네놈!” 

챙. 

칼이 뽑혀 나온 것은 찰나였다. 

벼락같이 호선을 그리는 칼. 

그것은 틀림없이 눈앞에 있는 이 무례한 자의 목을 향해 날아들고 있었다. 경고는 끝났다. 정말로 베어버릴 참이다. 

그러나. 

턱. 

“아니!” 

허공에서 잡힌 칼. 

렉터가 두 눈을 크게 떴다. 

자신의 칼이 맨손에 잡혀 있었다. 이 정체불명의 사내의 손에 말이다. 

“익! 이익!” 

렉터의 얼굴에 핏줄이 툭툭 불거져 나왔다. 손에 잡힌 칼을 다시 회수하려고 하는데, 그게 마음처럼 안 됐다. 

“이놈!” 

렉터가 마나를 개방했다. 머잖아 칼끝에서 오러가 깃들기 시작하였다. 마나를 벼리는 실력이 나쁘진 않다. 10년 전의 기준이라면 말이다. 

“10년 전에나 통할 정도의 실력으로 용케 그렇게 목에 핏대를 세웠군.” 

쿠우웅. 

나직한 말과 함께 막사 내부의 공기가 뒤바뀌었다. 숨을 쉬는 것조차도 어려워졌을 때, 렉터의 안색이 바뀌었고. 

쨍강! 

이내 칼이 부러졌다. 

렉터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눈앞의 존재를 보았다. 후드 아래에서 푸른 안광을 내뿜는 눈동자가 보였다. 

“주제를 알아라.” 

그 말과 함께 복부에 꽂히는 묵직한 감각에 속이 뒤집히는 느낌이 들었다. 보이지 않는 무형의 마탄이 꽂힌 것이다. 

“우욱!” 

마탄은 단발에 그치지 않았다. 얼굴, 몸, 팔, 등에서 연이어 구석구석에 쏟아진다. 

“커헉······.” 

바닥에 주저앉은 렉터는 피를 뚝뚝 흘리며 몸을 떨어댔다. 

그러자 눈앞의 사내가 천천히 무릎을 굽혀왔다. 두려움에 질린 렉터가 몸을 움찔하자, 그는 속삭이듯 말해왔다. 

“렉터 경, 마스터 제라드의 이름으로 협조 좀 부탁하지. 철수 계획에 동의해주게.” 

“마, 마스터 제, 제라드······?” 

렉터의 얼굴은 이제 사색이 되었다. 

철수 준비는 금방이었다. 

광산의 입구 전체가 무너졌으니, 이곳에서 더 머뭇거릴 이유도 없었다. 무슨 이유에선지 얼굴이 퉁퉁 부은 렉터는 몹시 고분고분한 태도였다. 

기사단은 그 연유를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가 지금 이 행렬에서 누군가의 눈치를 보고 있다는 걸 알았다. 

“이상한걸. 단장님께서 왜 마법사들의 눈치를 보는 거지? 설마, 얼굴이 저렇게 되신 게 마법사들과 어떤 연관이 있는 건가?” 

“말도 안 되는 소리. 단장님의 성정을 모르나? 그랬다면 절대로 가만히 있으실 분이 아니야. 아마도 어제 그 몬스터인지 뭔지······ 그놈과의 싸움 때 다치신 게지.” 

기사들이 그렇게 이야기만 나누는 가운데, 인부들의 행렬은 알타자르 산맥의 영역을 벗어나 큰길에 올랐다. 

제라드는 행렬의 뒤쪽에 있었다. 

“죄송합니다, 스승님. 다 제가 부족한 까닭입니다.” 

“나한테 죄송할 건 없다, 필립. 나 역시 그 광산 안에 그런 고대의 마법이 있었다는 건 몰랐으니까. 하지만 위험하다는 건 미리 경고했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자리를 비운 동안은 네게 그곳을 맡겼고.” 

“······.” 

“네가 그 상황이 일어나길 바랐던 게 아니라는 건 알지만, 결과적으로 일어난 모든 상황에서 너는 자유로울 수 없다. 그건 분명히 알아둬야 할 거야.” 

“예, 알겠습니다.” 

필립은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당장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알았다. 그건 그냥 자기 자신에 대한 변명일 뿐이었다. 필립은 제라드의 경고를 들었다. 그런데도 일이 이 지경이 되게 놔두었다. 

‘이건 내 잘못이다.’ 

필립이 그렇게 반성하는 동안, 제라드의 시선은 줄곧 마정석이 가득 쌓여 있는 수레에 꽂혀 있었다. 

‘보통 마정석이 아니야. 특히나 깊은 곳에서 채굴한 마정석에 깃든 힘은 농도가 아주 짙어. 저런 마정석이 존재한다는 얘기는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제라드의 표정이 무거워졌다. 이미 채굴한 것을 가져가지 말라곤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문제는 저 마정석에 깃든 힘이 제라드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강력하다는 게 문제였다. 

‘자칫 주변의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쳐서 마나 폭주가 일어날 가능성도 있어.’ 

제라드가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별안간 행렬이 멈추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아직 감시자의 요새까지는 거리가 조금 있었기에 벌써 멈출 이유가 없었던 까닭이다. 앞쪽에서 행렬 앞쪽에서 웅성거림이 들려올 때였다. 

“이랴!” 

“스승님!” 

별안간 앞으로 치고 나가는 제라드를 뒤따르는 필립. 

그런데 도무지 쫓을 수가 없었다. 

‘너, 너무 빠르다.’ 

바람처럼 내달리는 제라드의 말은 엄청나게 빨랐다. 

그리하여 순식간에 행렬 앞쪽까지 다다른 제라드는 바닥에 쓰러져 몸을 벌벌 떨고 있는 한 기사에게 꽂혔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겁니까.” 

“모, 모르겠소. 줄러 경이 갑자기 발작을 일으키다가 쓰러졌소. 그런데 뭔가 이상하오. 몸 상태가 안 좋은 게 틀림없는데, 흘러나오는 마나는 점점 더 커지는 게······.” 

“제가 좀 보겠습니다.” 

제라드가 그렇게 말하며 말에서 내려 다가가자, 기사들이 좌우로 비켰다. 그러다가 뭔가 이상하다는 걸 알았다. 무색의 마법사인 줄 알았는데, 행색이 그러지가 않은 것이다. 

“아니, 귀하는 대체 누구시오?” 

옆에 있던 기사가 경계심 가득한 얼굴을 하고 그렇게 물었을 때였다. 

“크악!” 

바닥에 쓰러져 있던 기사가 별안간 고통에 가득 찬 비명을 내지르며, 몸을 벌떡 일으켰다. 

“줄러 경!” 

주변인들이 깜짝 놀랄 때였다. 줄러의 눈에서 푸른빛이 흘러나왔고, 피부색도 푸른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이, 이게 갑자기 무슨······.” 

그를 지켜보던 이들이 하나같이 경악한 얼굴을 했다. 

제라드도 놀란 건 마찬가지였다. 

마정석의 강력한 기운에 마나 폭주가 일어난 줄 알았는데, 이건 또 전혀 다른 반응이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된 거지. 조금 전까지는 마나 폭주와 반응이 똑같아. 그런데 이 변화는 대체······.’ 

제라드가 막 그의 몸에 손을 얹었을 때였다. 

오싹. 

그의 등줄기에 소름이 치달렸다.

< 마스터의 귀환2 > 끝

ⓒ 양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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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스터의 귀환3 >

‘이건 단순한 마나 폭주가 아니야.’ 

제라드는 그동안 수도 없이 마나 폭주 현상을 봐왔다. 그래서 그 징후나 현상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는 건 그런 보편적인 상황과는 조금 달랐다. 

마나가 단순히 사용자의 의지와 무관하게 날뛰는 것에 그치지 않고, 머리까지 치솟아서 그곳에 세상과의 소통을 시도하고 있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마법사의 경지로 따지자면 7페이즈 단계인 오버 라이트의 단계까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 있어. 그게 마나를 다루는 본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이루어질 수가······.’ 

제라드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바로 조금 전까지 고통에 몸부림치던 줄러가 별안간 잠잠해지는 것이 아닌가. 

“이, 이봐! 줄러 경, 괜찮은가?” 

“숨은 쉬는가?” 

“숨은 쉬는데······ 조금 전의 그건 대체······.” 

기사들이 어안이 벙벙한 얼굴을 하고 있을 때였다. 감시자의 요새에서 지원 나온 엑사르 기사단과 무색 마법사들이 차례로 당도했다. 

이즈음 줄러는 이제 꼭 깊이 잠든 것처럼 보였다. 푸른색으로 빛나던 피부도 온데간데없이 다시 평범한 모습이었다. 

“웬 소란이지. 무슨 일이라도 일어났나?” 

뒤에서 온 엑사르 기사단의 기사들이 줄러의 상세를 살피는 가운데, 제라드는 손을 떼고 한발 물러나 그들의 무리에서 벗어났다. 

“스승님, 어떻게 된 일인지요. 혹 마나 폭주입니까?” 

사람들에게서 벗어난 제라드에게 다가온 필립이 그렇게 물어왔다. 하지만 제라드는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아마도 주변의 소리를 못 들었을 정도로 생각에 깊이 잠긴 모습이었다. 

“흐음, 무슨 일인지······.” 

뒤늦게 와서 상황을 보지 못한 필립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앞뒤 상황을 다른 기사들에게 물어보다가 직접 줄러의 몸에 손을 얹어볼 따름이었다. 

‘마나 폭주인가? 아니, 아니야. 그렇다고 보기엔 잠잠하고. 단순히 잠들었다고 하기엔······ 허어, 근데 이 기사님의 성취가 보통이 아니구나.’ 

필립은 마나가 머리에 끝에 머무르며 금방이라도 솟구치려고 하는 듯한 흐름을 느끼며 그렇게 생각했다. 

소란은 머잖아 그쳤고, 잠깐 멈추었던 행렬이 다시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 그럼······ 우리는 여기서 그만 돌아가 보겠소.” 

렉터는 갈림길에서 옆으로 나뉘었다. 그들은 이제 감시자의 요새로 돌아가는 것이다. 

필립은 말없이 고개를 살짝 숙였을 따름이었다. 렉터에겐 그 이상의 예를 갖추고 싶은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렉터도 필립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의 시선은 오직 무거운 생각에 잠겨 있는 제라드에게 꽂혀 있을 뿐이었다. 

눈치를 살피던 렉터는 이내 말고삐를 당기며 말머리를 돌렸다. 

“이럇!” 

두두두. 

말발굽 소리와 함께 멀어져가는 엑사르 기사단. 

필립은 힐끗 제라드를 살폈다. 

‘그나저나 스승님께서는 계속 저런 모습이시군.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걸까? 아니지. 혹 어떤 깨달음이라도 얻으신 것일지도 모르지······.’ 

필립은 이내 신경을 껐다. 그가 아무리 궁금해한다고 해도 제라드가 저렇게 입을 다물고 있으면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 뒤로 여정은 지루하게 이어졌다. 

어제와 오늘이 비슷한 하루가 나흘이 넘도록 이어졌고, 머잖아 풍경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하였다. 한없이 펼쳐져 있던 황야와 같았던 평야가 끝나고 녹지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수도까지 갈 길은 멀었지만, 이젠 숙영을 하지 않아도 됐다. 

밤이 깊은 조용한 밤. 

불침번을 제외하면 깨어있는 이가 없는 새벽. 

삐이익. 

별안간 저편에서 들리는 울음소리에 불침번을 서던 병사들이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으음. 맹금류 녀석들이 야행성이던가?” 

“그게 무슨 멍청한 소리야. 밤에 녀석들의 눈에 뭐가 보인다고 사냥을 해.” 

“아니, 근데 조금 전에 울음소리는 매나 독수리가 내는 울음소리 아니었나?” 

“흠. 그건 그렇긴 한데······.” 

“그래, 맞잖아. 내가 잘못들은 게 아니라고. 녀석들은 사실 야행성이었던 거야. 우리가 밤엔 눈이 어두워서 보지 못했던 것뿐이지.” 

“그런가? 그런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는데 말이야.” 

불침번 병사들이 이야깃거리를 낚았다는 듯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낼 때였다. 

어둠 속의 막사 속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한 사람의 그림자가 있었다. 

그는 바로 제라드였다. 

밖으로 나온 제라드는 고개를 돌려 하늘을 향해 손을 들어 올렸다. 그 순간, 저 어둠 속에서 바람을 일으키며 거침없이 날아오는 커다란 새 한 마리. 그것은 검독수리였다. 10년 전, 제라드의 패밀리어 마법으로 길들인 검독수리 몇 마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 곳곳에 퍼져 있었다. 

익숙한 듯, 제라드의 팔에 앉은 검독수리의 눈동자가 푸른빛을 내뿜었다. 제라드와 검독수리가 연결된 순간이었다. 바로 그 순간, 머릿속으로 어떤 메시지가 전달되었다. 그것은 아주 익숙한 사람의 목소리였다. 

‘이건 스승님의 메시지다.’ 

삐익. 삑. 

메시지를 모두 전달한 검독수리는 작게 울었다. 

짧지 않은 메시지였다. 그리고 내용은 무거웠다. 

제라드는 한창 무거운 표정을 짓다가 이내 검독수리를 하늘 높이 날렸다. 

삐이익! 

크게 울며 어둠 저편으로 모습을 감추는 검독수리. 

어둠 속. 

제라드의 눈빛은 호전적으로 빛나고 있었다. 

“막을 테면 막아보라지.” 

행렬은 이제 수도를 바로 코앞에 두고 있었다. 

앞으로 내일이면 수도에 입성하게 될 터였다. 

마을의 주점에 모인 인부들은 저마다 알타자르 산맥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하기 바빴다. 사람들은 그런 그들의 이야기를 듣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떠들썩한 분위기를 피해 외진 곳에 나온 사람들도 있었다. 제라드와 필립이 바로 그러했다. 

“스승님, 무슨 일이십니까? 굳이 이런 외곽까지 나와서 이야기를 나눌 필요가 있었는지요······.” 

“필립, 잘 들어라. 난 오늘 밤에 떠날 생각이다.”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수도에 들어가지 않으실 참이십니까?” 

“아니, 수도에는 갈 생각이다.” 

“아, 그럼 급히 어디 다른 곳에 다녀오셔야 하는지요?” 

“그런 게 아니야. 나는 이대로 수도에 들어갈 생각이다. 다만, 그걸 대외적으로 알리지 않을 뿐이다.” 

“저······ 제가 모자라서 그런지, 스승님께서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왜 그럴 필요가 있는지요?” 

“내가 아리만에 들어오는 걸 원하지 않는 이들이 있다.” 

제라드의 말에 필립이 눈을 크게 떴다. 

“아니, 감히 어떤 자가 마스터의 귀환을 막는단 말입니까? 그런 자가 있다면 무색 마탑과 황실이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겁니다.” 

“그 황실이나 마탑이 연관되어 있다고 한다면 어떠냐.” 

“예? 서, 설마, 그런 일이 있겠는지요.” 

“세상에는 이런저런 일들이 많이 일어나는 법이다. 누구도 앞날을 완벽하게 예견할 수는 없는 법이지. 더욱이 지금과 같은 세상이라면 더더욱 말이다.” 

“스, 스승님께서는 제국의 영웅이십니다. 그리고 마스터세요. 감히 어떤 자가······.” 

“필립, 그런 세간의 평가는 언제든 바뀔 수 있는 법이다. 세상에 영원한 건 없어. 세간의 눈이 달라지면 영웅이 악당이 되는 건 한순간의 일이다.” 

“혹 그렇다고 한다면 저는 스승님을 따를 것입니다. 세상 사람이 어떻게 한다고 해도 저는 스승님의 사람입니다!” 

필립이 단호한 태도로 그렇게 말하자, 제라드는 피식 웃으며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래, 고맙다. 하지만 지금은 정확한 상황을 파악하는 게 먼저다. 곧 모든 것이 명확해질 것이다. 만약 그때가 되어서도 네 생각이 같다면 그때 부탁하마.” 

“스승님······.” 

필립은 복잡한 얼굴로 돌아서는 제라드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푸르륵. 제라드와 함께하는 흑마의 말발굽 소리가 어둠 속으로 지워졌다. 

“하아.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필립은 덩그러니 그곳에 홀로 남아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사람의 말도 아니고, 제라드가 한 말이다. 

절대로 허튼소리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좀처럼 믿기 어려운 이야기였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제국 동부에서 일어난 흑마법사 전쟁을 종결한 영웅을 감히 누가 적대한단 말인가. 

“정말 모르겠구나.” 

필립도 이내 발길을 돌렸다. 

간밤 사이에 제라드가 사라졌다는 것을 아는 이는 몇 되지 않았다. 누더기 같은 망토에 후드를 걸치고 말없이 마법사들 사이에서 걷던 그를 기억하는 이는 별로 많지 않았다. 

그나마 제라드의 정체를 아는 무색의 마법사들만이 의문을 가질 뿐이었다. 

“필립, 그분께서는 어디에 가셨습니까?” 

“아침부터 통보이질 않으십니다.” 

“그게······ 잠깐 다녀오실 곳이 있다고 하더군요.” 

필립은 그렇게 적당히 둘러댔다. 

그렇게 행렬은 오후 무렵이 되어서 수도의 검문소까지 다다랐다. 

“레이븐 상단입니다.” 

“음, 수고하였소.” 

상단의 사람임을 증명하는 몇 가지 조사를 거친 뒤에 행렬은 수도에 입성할 수 있었다. 모든 게 평소와 같았다. 그때까지는 말이다. 

두두두. 

“잠깐 멈춰라!” 

저 멀리서 들려온 고함과 함께 여러 기의 말이 검문소를 넘어오는 사람들의 앞을 막았다. 

“잠깐 몇 가지 확인해야겠소. 혹 이곳에 상단의 사람이 아닌 이가 있진 않소? 예를 들면 마법사의 행색을 한 사람이라든지······.” 

“엇! 이, 있습니다. 분명히 마법사님들과 함께······.” 

앞에서 그런 이야기가 나온 직후로, 저편에서 기사들이 행렬의 뒤쪽으로 다가왔다. 하나같이 삼엄한 눈빛을 한 그들은 필립과 나머지 마법사들을 훑었다. 

“이곳에 상단과 무관한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소. 검문에 협조를 좀 해주실 수 있겠소?” 

“······.” 

필립은 그들이 짊어진 문장을 보았다. 

‘저 문장은 제1 중앙 기사단의 문장.’ 

그러는 사이 마법사들의 상세를 살피는 기사들. 그들의 태도는 몹시 조심스러웠고 경계심이 가득한 것처럼 보였다. 

‘이들이 스승님을 찾는 건 분명해. 하지만······ 하지만 어째서지? 왜 황실에서 스승님을······. 혹 스승님이 무슨 죄라도 지었다는 건가?’ 

그때였다. 이 상황에 의문을 품던 마법사 한 명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 

“저는 무색의 탑 소속 마법사 니론이라고 합니다. 제1 중앙 기사단에서 대체 무슨 일로 검문소를 조사하고 계시는지요? 혹 뭔가 중요한 일이라면 저희가 도울 수도 있을 겁니다.” 

“으흠! 대놓고 밝힐 일은 아니기에 발설할 수 없음을 이해해주시오. 구체적인 사안은 아마 무색의 탑에 돌아가면 다 알게 될 것이오.” 

그 뒤로도 중앙 기사단의 기사들은 검문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그 사람을 찾을 가능성은 없다. 왜냐하면, 제라드는 바로 전날 행렬을 떠났기 때문이다. 

긴 검문이 끝나고, 검문소를 통과하는 행렬. 상단의 행렬은 상단의 건물이 있는 곳으로 향하였고, 무색의 마법사들은 거기서 갈려져 나와 8년 전에 세워진 무색의 탑으로 향하였다. 

“어서 오십시오!” 

긴 여정을 끝내고 돌아온 그들을 발견한 후배 마법사들이 기쁜 얼굴을 하고서 맞이해주었다. 하지만 필립은 인사도 받지 않고 즉시 탑주실로 향하였다. 

똑똑. 

“필립입니다. 들어가겠습니다.” 

마음이 급한 필립은 바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탑주실에는 엘란이 심각한 얼굴을 하고서 팔짱을 끼고 있었다. 그는 불과 한두 달 사이에 10년은 더 늙은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음······. 필립, 돌아왔군. 광산의 일은 대충 들었다네.” 

“탑주님, 그 이야기는 나중에 다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보단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검문소에서 제1 중앙 기사단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누구를 찾고 있다는 얘기는 하지 않았습니다만, 확실히 스승님을 찾고 있었습니다.” 

“흐으으음······.” 

광산의 일은 엘란도 전해 들었다. 나흘 전에 감시자의 요새에서 소식을 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 광산의 일보다 더 큰 문제 때문에 골치를 앓고 있었다. 

“혹······ 마탑 회의에서 뭔가 스승님에 관한 얘기가 나왔습니까?” 

“필립, 예언에 관해 알고 있느냐?” 

“예언이라면······ 혹 신전에서 곧잘 이야기하는 그것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그걸 말하는 것이다.” 

“이야기는 몇 번 들어봤습니다. 각 신전에서는 신이 암시하는 예언이 있다고 말입니다.” 

“그래, 그렇다면 이야기가 빠르겠구나. 각 신을 모시는 신전에서 얼마 전에 공통된 예언을 발표했다.” 

“잠시만요. 그게 스승님과 무슨 연관이 있습니까?” 

“문제는 우리 마탑의 탑주들도 모두 공통된 꿈을 꾸고 있다는 거다. 그런데 그게 그 예언과 일치한다.” 

“그,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신전의 예언이라는 것은 예전부터 존재했던 것이다. 그러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그것이 늘 맞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만, 그 예언이라는 게 각 신전에서 똑같이 나왔다는 것. 그리고 마탑의 탑주들이 그것을 보았다는 것은 단순한 우연으로 치부할 수는 없었다. 

“탑주님, 설마, 그 예언에 스승님이 나오는 겁니까?” 

“모르겠구나. 그 어둠의 존재가 마스터 제라드라고 확신할 수는 없다. 다만, 그가 하늘의 문을 닫으려고 한다는 것만큼 분명하다. 얼마 전 마탑 회의에서 청색 마탑주 하늘의 문이 미치는 부정적인 여파를 마스터 제라드가 말해주었다고 했었지.” 

“그게 어떤 문제가 됩니까?” 

“필립, 진정 그게 왜 문제가 되는지 모르겠더냐? 10년 전, 모종의 이유로 아스트랄 라인이 나타난 이후로 마법은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다소의 문제점들이 있긴 하지만, 그건 얻게 된 것에 비하면 사소한 문제일 뿐이야. 이 시대의 마법은 매 순간 새로운 영역으로 향하고 있다. 그런데 만약 문이 닫히면 어떻게 되겠느냐?” 

“······.” 

“예언과 꿈······. 그 모든 것들은 어쩌면 이 세계가 보내고 있는 경고일지도 모른다. 문을 닫게 되면 제2시대의 끝을 재현하게 된다는 것을 말이야.” 

“제2시대의 재현이라면······.” 

“마법의 종말.” 

엘란의 목소리가 무겁게 울려 퍼졌다.

< 마스터의 귀환3 > 끝

ⓒ 양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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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스터의 귀환4 >

유난히 어두운 새벽이었다. 

먹구름이 자욱하게 드리워 달을 삼켰고, 기묘한 기운이 온 세상에 가득 찬 듯했다. 

제국의 수도 아리만의 고성. 

전통과 역사를 자랑하는 이 땅의 고성은 온갖 마법으로 보호되고 있었고, 경계는 삼엄했다. 

그런 이곳으로 지금 이 순간, 어둠을 헤치고 다가오는 한 사람의 그림자가 있었다. 

휘이잉. 

“응?” 

경비병 한 사람이 깜짝 놀라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조금 전까지 살짝 졸고 있던 그는 목 언저리를 스치는 스산한 바람에 잠이 싹 달아난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상하네. 뭐가 지나간 것 같은데······.” 

그렇게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달리 보이는 건 없었다. 

“하아암. 착각이었나. 정신 바짝 차려야지.” 

그러나 사람의 감이라는 것은 때때로 아주 놀라울 정도로 들어맞을 때가 있다. 

경비병이 지키는 곳. 그림자가 가득 드리운 어둠. 그곳에서 지금 이 순간, 움직이는 한 사람이 있었다. 

놀랍게도 어둠에 완전히 동화된 그 사내는 아무렇지도 않게 성 안으로 들어갔고, 고요한 복도를 걷다가 별안간 우뚝 멈춰 섰다. 

그는 바로 제라드였다. 

침묵에 잠긴 성내의 복도는 어둠을 희미하게 밝히는 불빛만이 보일 따름이었다. 

제라드는 섣불리 발을 떼지 않았다. 이 앞부터는 온갖 마법진이 다 설치되어 있었다. 

‘10년 전보다 훨씬 많은 마법진이 존재하는군. 하나같이 보통 마법진이 아니야. 마법의 수준 자체가 전과 비교하기 어렵군.’ 

제라드는 그 마법진들을 꿰뚫어 보았다. 10년 전에도 가능했던 일은 지금에 와서는 너무나도 당연한 일 같았다. 

‘접촉.’ 

제라드는 마법망에 개입했다. 당장 포착되는 마법망의 수만 해도 다섯 개가 넘었다. 

한 번에 마법망이 손에 넘어가는 걸 막기 위해서 독립적인 마법망을 갖춰놓은 것이다. 그 마법망에 동시에 접촉하는 것은 웬만한 탑주급 마법사들도 어려워하는 일이었지만, 지금의 제라드에게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제라드는 다시 발걸음을 떼고 복도를 나아가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놀랍게도 이 앞에 존재하는 어떤 마법진도 반응하지 않았다. 허가받지 않은 존재가 접근하기만 해도 반응하는 마법진임에도 말이다. 마법진은 제라드의 존재를 아예 포착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모퉁이를 지나서 안쪽으로 향하는 동안, 복도 저편에서 시녀가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조금이라도 긴장할 법도 하건만, 제라드는 그들을 피하지도 숨지도 않았다. 시녀와의 거리가 코앞에 다다랐다. 하지만 시녀들은 경비병들과 똑같이 제라드를 아예 보지 못했다. 어둠 속에 녹아든 제라드의 존재감은 범인이 포착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성의 중심부로 나아가는 동안, 그런 상황은 몇 번이고 일어났다. 하지만 누구 한 명도 제라드를 보지 못하였다. 하지만 멈출 것 같지 않았던 제라드의 걸음도 어느 순간 우뚝 섰다. 

복도 끝이었다. 그곳에 굳게 닫힌 문이 있었고, 그 앞을 지키는 기사들이 보였다. 

황족의 문.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존재들이 기거한다고 하는 곳. 저곳에 들어갈 수 있는 건 정말로 선택받은 몇몇 존재뿐이었다. 제라드도 직접 저곳을 목도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황제와 알현할 때에도 저 너머로 나아갔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과연 황족의 거처라 이건가.’ 

저 굳게 닫힌 문의 앞을 지키는 기사들을 속이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하지만 저 문을 여는 건 쉽지 않았다. 

‘고전적이지만, 확실한 방식이로군.’ 

문을 연다는 것. 바로 그 행위 자체만으로 반응하게 되어 있는 잠금장치다. 복잡한 마법적 회로가 따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오직 그 간단한 장치만을 위한 마법진이기에 저 문이 열리면 어떤 식으로든 알려지게 된다. 

제라드는 저 문을 열고 들어갈 것인가를 두고 고민하였다. 하지만 이내 문을 열지 않기로 하였다. 문이 열리게 되면 엄청난 소란이 일어나게 될 것이다. 가장 먼저 황제의 친위대가 움직일 것이고, 그렇게 되면 교전을 치러야만 했다. 

‘쓸데 없는 소란을 만들 필요는 없다.’ 

그 외에도 방법은 있다. 

제라드는 걸음을 돌렸다. 

왔던 복도를 걷다가 이내 오랜 시간 쓰이지 않은 방에 조용히 들어갔다. 

사람의 냄새가 존재하지 않는 잘 정돈된 공간. 제라드는 그 중심에 섰다. 그리고 마법망 자체를 구축하기 시작하였다. 

임시로 공방을 만드는 것이다.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진행되는 그 작업은 순식간에 완성되었고, 머잖아 성 내부로 이어지는 마법망을 단숨에 잠식하기 시작하였다. 

마법망의 제어권을 빼앗았으니, 어떤 식으로든 마법사들에게 알려지게 될 것이다. 그들이 이곳의 공방을 찾기까지는 길어봐야 30분. 

그러나. 

“그 정도면 충분하다.” 

황족의 거처 깊숙한 곳. 

넓고 화려한 침실의 수려한 침대 위에는 날카로운 인상의 사내 한 명과 양옆에 빼어난 미모의 여인 두 사람이 누워 있었다. 하나같이 나체인 그들의 모습은 지난밤, 이곳에서 얼마나 뜨거운 정사가 있었는지를 대신 말해주는 듯하였다. 

“으음.” 

왼편에 있던 나체의 여인이 뒤척이며 몸을 돌렸다. 사내의 튼튼한 가슴에 얼굴을 파묻으려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이었다. 

가운데에 누워있던 사내가 별안간 눈을 번쩍 뜨더니 상체를 일으켰다. 그는 조금 전까지 깊은 잠에 빠져 있었던 사람이라는 게 믿기지 않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주변을 슥 훑다가 이내 어느 한곳에 시선을 집중하였다. 

그곳엔 자욱한 어둠만이 가득하다. 하지만 그는 알고 있다. 지금 이곳에 불청객이 와 있다는 것을 말이다. 

“누구냐.” 

나직한 물음이었다. 

잠깐의 적막이 흘렀을 때였다. 머잖아 어둠 저편에서 희미한 빛이 모여들더니, 한 사람의 형상이 되어 나타났다. 

사내의 눈매가 매섭게 빛났다. 

“무엄한 자로구나. 짐은 알현 허가를 내린 적이 없거늘.” 

[일이 번거로워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에 그리하였습니다. 폐하께서도 제가 폐하의 군대와 맞서 싸우는 것은 원하지 않으실 테지요.] 

“감히······.” 

황제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랬다. 

지금 그 사내의 정체는 바로 아르메스 제국의 황제였다. 

침실에서 일어선 나체의 황제는 부끄러움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는 태도로 어둠의 저편을 눈에 담았다. 

그 순간, 그곳에서 희뿌연 빛과 함께 한 사람의 형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마법의 환영이었다. 

“오랜만의 해후가 이런 식이라니. 제라드여, 짐을 얼마나 실망하게 할 셈이냐.”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폐하께서도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저는 폐하께서 하늘의 문을 닫는 것을 윤허하지 않겠노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을 들었습니다.] 

“잘못된 행동을 어찌 윤허하겠느냐.” 

잘못된 행동. 

황제는 그렇게 말했다. 

[그래서 저를 잡아두시려고 하십니까? 기사단을 풀고, 마탑의 마법사들을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청색 마탑주가 괘씸한 짓을 하였구나.” 

황제의 눈이 무섭게 빛났다. 

그랬다. 

제라드가 아리만을 코앞에 두고 별안간 행렬에서 벗어났던 것은 바로 케이틀란이 전해준 이야기 때문이었다. 

-폐하와 마탑주가 하늘의 문을 닫는 것에 반대했다. 더욱이 그 일을 행하고자 하는 너를 잡아들이려고 한다. 당장 몸을 피하거라. 

 그것이 검독수리가 전달한 메시지였다. 

“여전히 모르고 있군. 하늘의 문은 이 땅에 드리운 성스러운 빛. 만물을 이롭게 하고, 무한한 가능성을 여는 힘이다. 새로운 시대의 초석이 이 앞에 있음인데, 몇 가지 대수롭지 않은 문제들 때문에 문을 닫는다니. 도저히 마법사가 내놓을 답이 아니로다!” 

황제는 확고한 태도로 그렇게 소리쳤다. 

‘예상은 했지만, 지금은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겠구나. 하늘의 빛은······ 황족들에게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제라드가 그렇게 확신하는 이유는 다른 게 아니다. 

지금 황제의 모습이 그러하다. 

황제의 모습은 10년 전과 너무나도 달라져 있었다. 

일단 외관상으로는 나이를 아예 먹지 않은 듯하였고, 육체는 그때보다도 훨씬 더 건장해진 모습이었다. 웬만한 기사 이상으로 말이다. 하지만 지금 주목해야 할 것들은 그런 것들이 아니었다. 

제라드의 시선은 황제의 두꺼운 눈썹 사이의 이마에 꽂혀 있었다. 황족이라면 누구든 보유하고 있는 드래고닉 패턴. 그런데 마지막으로 봤을 때와는 그 형태가 달랐다. 

‘드래고닉 패턴이 그때보다 더 커진 것은 물론이고, 형태까지 달라졌다.’ 

단순한 마름모꼴의 형태였던 드래고닉 패턴은 이제 위쪽 양쪽 변에 뿔처럼 생긴 형태가 길게 자라나서 눈썹으로 이어져 있었다. 

제라드는 그 변화를 단순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황제는 굳은 얼굴로 제라드에게 권유해왔다. 

“제라드여, 짐은 그대의 능력을 존중하고 높이 산다. 짐이 험한 결단을 내리기 전에 그대 스스로 뜻을 꺾고 짐의 앞에 서도록 하라. 이것이 마지막 경고이니라.” 

[죄송합니다, 폐하. 그럴 수는 없습니다.] 

“제국의 영웅이라고 불렸던 존재가 기어이 악의 길로 향하려고 한단 말인가!” 

황제의 눈빛에 노기가 드리웠을 때였다. 머잖아 그의 눈동자에서 빛이 흘러나왔고, 드래고닉 패턴엔 빛이 들어왔다. 

기묘한 일이었다. 

황족의 권능이라고 전해지는 것은 싸이콜로지 사이트. 표면 심리를 읽어내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지금 황제에게서 일어나는 일련의 변화들은 그 권능과는 거리가 멀었다. 

“짐의 뜻을 거스른 것을 후회하게 해주겠노라.” 

황제가 그렇게 말한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쩌어어억! 

황제의 앞에 뚜렷한 형체로 존재하던 제라드의 환영이 부욱 찢기더니 바람에 흩날리는 것처럼 튕겨져나간 것이다. 

놀랍게도 제라드의 마법이 파괴된 것이다. 

그 순간, 황실의 거처에서 제법 떨어진 쓰이지 않는 방. 

그 안쪽에 미동 없이 앉아있던 제라드는 별안간 눈을 번쩍 떴다. 그리더니. 

“웩!” 

피를 왈칵 토했다. 

“헉헉.” 

제라드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숨을 헐떡였다. 

오장육부가 다 끊어지는 듯한 충격. 

일반적인 마법사였더라면 조금 전의 리바운드로 바로 목숨이 끊어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아니, 조금 전과 같은 리바운드라면 10년 전의 제라드라고 해도 중상을 면하기 어려웠을 터였다. 

‘마법망이······ 흔적도 없이 찢겼다. 내가 구축한 마법망만이 아니야. 황실의 거처를 지켜왔던 고대의 마법조차도 모두 한꺼번에 부쉈다. 이건······.’ 

제라드는 아연실색했다. 

왜냐하면, 이토록 상식과 크게 어긋난 방식의 마법을 그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잊고 있었다. 

10년 전, 그 전투의 대폭발과 함께 모든 흑마법사들은 자취를 감추었고, 그 마법 역시 사라졌기 때문이다. 

스펠 브레이커. 

마법을 파괴하기 위해 존재하는 마법. 

황제가 조금 전에 사용했던 그 마법은 스펠 브레이커와 아주 유사했다. 하지만 그 파괴력과 완성도는 이전의 그것과는 완전히 궤를 달리하고 있었다. 

‘비슷하면서도 완벽히 다른 마법이었다. 설마, 그 스펠 브레이커가 드래고닉 패턴이 강화되면서 생긴 새로운 권능이라는 건가?’ 

제라드가 눈살을 찌푸리고 있을 때였다. 

별안간 복도가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위치가 발각됐다. 

친위대와 근위 기사단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 마스터의 귀환4 > 끝

ⓒ 양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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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스터의 귀환5 >

10 

제라드는 어둠에 동화된 모습으로 밖으로 나왔다. 

그는 제국을 적으로 돌릴 생각은 없었다. 

그저 확인하고 싶었던 것뿐이다. 

‘아나트리에는 말했었다. 어떤 목소리가 들린다고.’ 

그것은 명령과도 같은 강력한 힘을 가진다고 그랬다. 근원의 마법과 연관이 되어 있을수록 그 영향력은 강해진다. 

그렇기에 드래곤의 피가 존재하는 황족도 그 영향력에서 완벽히 벗어날 수는 없는 법이었다. 제라드는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오늘 성을 찾았던 것이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걸 목도했어. 스펠 브레이커라니.’ 

생각하던 것 이상으로 일이 심상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늘의 문에 정말로 어떤 의지가 존재하여, 그것이 제라드가 하고자 하는 일을 막는 것인지, 그게 아니면······. 

‘다른 누군가가 세계의 의지에 접촉하여 이 모든 일을 하는 것인지 명확하지 않다.’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제라드는 발걸음을 옆으로 돌렸다. 

기사들이 성 외곽으로 향하는 모든 길목을 차단하고 있는 게 느껴졌다. 하나같이 보통 실력자가 아닌 듯, 상당한 존재감을 내뿜고 있지만, 그들 중에서도 한둘씩은 다른 존재들과도 차원이 달랐다. 

‘이 느낌, 친위대인가······.’ 

친위대는 제국 내에서도 최강의 실력자들로만 구성되어 있다.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황실의 기사들이기 때문이었다. 

그들과 싸우면 제라드도 적당히 싸울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 하나하나가 마스터급에 근접한 실력자들이기 때문이다. 

쯧, 제라드는 속으로 혀를 찼다. 

지금까지는 어떻게든 포위망의 틈을 찾으려고 했다. 하지만 도무지 틈이 보이질 않았다. 길은 한정되어 있었는데, 그 모든 길을 포위하고 있다. 

물론,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제라드는 벽에 손을 얹고 마법망에 접촉했다. 

활성화된 마법망에 접촉한 마법사들의 수가 당장 10명 정도가 포착되었다. 마법이나 싸움이 일어남과 동시에 침입자의 위치를 정확히 잡아내기 위해서 마법망에 제어권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일반적인 방식의 싸움법이었다. 

문제는 그들의 상대인 제라드가 그 전투 방식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는 점이다. 

제라드는 마법망을 타고 이곳과 떨어져 있는 곳에서 마법을 사용했다. 

콰앙! 

별안간 복도 한복판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치, 침입자가 나타났다!” 

누군가가 그렇게 소리쳤다. 

그 순간, 제라드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드리웠다. 

모든 방향에 촘촘하였던 포위망이 별안간 느슨해지더니, 폭발이 일어난 곳으로 이목이 확 쏠렸다. 

‘자, 조금 더 흔들어볼까.’ 

이번엔 조금 전 폭발을 일으킨 곳과는 정반대 방향에서 폭발을 일으킨다. 

콰앙! 

폭발에 휘말린 이는 딱히 없었지만, 마법이 그곳에서 터졌다는 것 때문에 포위망이 우왕좌왕하면서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그중에서도 특히 모든 상황을 파악해야 할 마법사들이 가장 당황하였다. 모든 마법은 영역권 안에서 발동하는 게 상식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은 그렇지가 않다. 

“침입자가 여럿이다!” 

그 외침이 터졌다. 

상식적으로 당연한 판단이었다. 

모두 제라드의 생각대로 되어갔다. 머잖아 폭발이 들렸던 곳으로 움직이면서 출렁이는 포위망. 그리고 마침내 포위망에 구멍이 생겼다. 드디어 빠져나갈 구멍이 생겨난 것이다. 

어둠 속에 모습을 감춘 제라드는 유유히 복도를 따라 움직였다. 다급히 뛰어다니는 사람들 속에서 그는 이 모든 일과는 무관한 사람인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포위망을 막 넘었을 때였다. 

스르릉. 

이 모든 소란 속에서도 분명하게 들리는 단 하나의 청명한 소리. 칼을 뽑아드는 그 소리가 제라드의 귓가에 뚜렷하게 울려 퍼졌다. 

제라드의 시선이 그 존재에게 꽂혔다. 

그곳에 한 젊은 기사가 서 있었다. 

태양처럼 빛나는 찬란한 금발 머리칼의 기사. 제라드와 비슷한 또래로 보인다. 그의 시선은 정확히 제라드에게 꽂혀 있었다. 

‘놀랍군. 나의 위치를 정확히 꿰뚫어 보고 있어.’ 

제라드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그 기사의 칼에 꽂혔다. 

푸른 오러에 선명하게 휘감긴 칼에는 어떤 술식이 음각으로 새겨져 있었다. 

‘아티팩트 계열의 검인데, 예사 마법이 아니야. 세계어가 박혀 있다.’ 

“후우우.” 

기사가 날숨을 깊게 토한 순간이었다. 

번쩍. 

오러가 궤적을 그린다고 생각한 순간. 

스팟! 

삼십여 미터의 거리를 무시하고 매서운 예기가 제라드의 몸 깊숙한 곳을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갔다. 

기사는 몹시 놀란 얼굴이었다. 조금 전의 공격을 피했다는 사실이 믿기 어려운 듯했다. 

그러나 그 놀라움은 잠깐이었다. 

이내 연이어 피할 공간을 주지 않겠다는 듯이 연격을 펼쳐오는 기사. 마치, 공간을 휘감아오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예리하고 날카로운 공격이다. 

‘저건 틀림없는 공간을 관장하는 세계어의 술식. 당대 수준의 마법으로는 아직 그 영역의 마법을 문자로 나타낼 수 없을 터인데, 어디에서 저런 마법검이······.’ 

제라드는 놀라움을 잠깐 접어두기로 했다. 저 기사가 누구이고, 어떻게 저런 무구를 손에 넣었는지는 몰랐지만, 중요한 것은 그를 넘지 못하면 이곳에서 빠져나가는 건 어림도 없다는 사실이다. 

쉬악! 

제라드는 날아드는 공간검을 피하면서 거리를 좁혔다. 30미터에 달했던 거리는 어느새 10미터 안팎으로 줄어들었다. 

기사의 눈빛이 점점 더 날카롭게 변했다. 당연하게도 근접거리는 마법사의 영역이 아니라, 바로 기사의 거리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극에 다다른 것은 본래 구분이 모호해지는 법이었다. 더욱이 제라드처럼 본래부터 온갖 마법을 두루 익히고 육체 단련까지 게을리하지 않았던 존재라면 더더욱 말이다! 

꽈르릉! 

지척에서 날아든 검과 제라드의 벼락에 휩싸인 주먹이 충돌하면서 요란한 굉음이 울려 퍼졌다. 

“윽!” 

기사는 오러에 휘감긴 검이 튕겨 나갈 정도의 위력적인 주먹에 깜짝 놀라며 뒤로한 발자국 물러났고, 제라드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퍼퍼펑! 

기사의 전신에서 일어나는 폭발. 하지만 그 공격은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 마법에 관한 내성이 상당히 높다. 

‘좋아, 그렇다면.’ 

제라드는 물러나는 기사의 공간 그 자체를 접어서 잡아당겼다. 

“엇!” 

기사가 깜짝 놀란 순간. 

퍼퍼퍼펑! 

다시 그의 전신에서 연이어 폭발이 일어났고, 제라드는 그 폭연을 향해 양손에 벼락을 머금고 앞으로 쏟아냈다. 

콰앙! 

“크악!” 

기사는 비명을 지르며 벼락 줄기에 붕 떠올랐다가 바닥에 널브러졌다. 바로 지척에서 맞은 공격. 그대로 기절하거나 죽었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놀랍게도 기사는 바닥에서 벌떡 몸을 일으키더니. 

“타합!” 

기합을 내지르며 공간을 크게 베었고, 그 순간 초승달의 모양으로 오러가 쏟아져나왔다. 

거리가 벌어져 있는 상황. 막을 방법은 충분했지만, 제라드는 저 검이 보통의 마법검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중간에 공간을 접겠지.’ 

아니나 다를까. 초승달의 모양으로 쏟아져 나온 기운은 별안간 모습을 감추더니, 단숨에 제라드의 앞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회심의 공격. 

그러나 그 공격은 제라드에게 다다르기 직전에 옆으로 꺾이더니, 벽에 쏟아졌다. 왼쪽에 왜곡장을 만들어 공격의 흐름을 꺾어버린 것이다. 

콰콰콰! 

초승달의 오러는 벽에 쏟아져 그대로 모든 것을 썽둥 찢으며 이내 흩어져갔다. 

“이, 이럴 수가!” 

자신의 회심의 공격이 먹히지 않자, 기사가 경악하는 가운데, 제라드의 눈빛이 변했다. 

‘보통 빼어난 마법 내성이 아니다. 제압하는 수준으로는 안 돼. 전투 경험이 부족하긴 해도 그 기량은 이미 마스터급. 쓰러뜨려야 한다. 더 시간을 끌 수는 없어.’ 

제라드가 막 그런 결단을 내린 때였다. 

“허윽!” 

조금 전까지 아무렇지도 않았던 기사가 별안간 몸을 부르르 떨더니, 바닥에 털썩 주저앉는 게 아닌가. 

‘뭐지?’ 

제라드가 한 게 아니었다. 뒤늦게 마법의 충격을 받았다고 하기엔 석연찮았다. 그렇다고 어떤 특별한 마법적인 작용이 일어난 것도 딱히 느끼지 못하였다. 

바로 그때였다. 

달칵. 

조금 전에 초승달의 오러에 갈려나간 방문이 열리며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나리엘 공녀 전하?” 

“어서 안쪽으로 들어오세요.” 

“이곳엔 대체 왜······.” 

“시간이 없어요. 얼마 버티지 못해요.” 

제라드는 그녀의 이마에 있는 드래고닉 패턴이 빛을 뿜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녀가 지금 피에 깃든 권능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가 저 기사를 제압하고 있다는 건가?’ 

제라드는 잠깐 머뭇거리다가 이내 그녀가 있는 방 안으로 들어갔다. 어떻게 된 것인지는 몰라도 그녀는 제라드를 도우려고 하고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이곳이 막다른 방이라는 것이다. 

제라드가 막 아나리엘을 쳐다보았을 때였다. 

그녀는 이미 다음 행동을 하고 있었다. 

벽에 손을 얹고서 정신을 집중하는 모습. 이마의 드래고닉 패턴은 더 밝은 빛을 토하였고, 머잖아 그녀가 손을 얹은 벽면의 공간은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일그러진 벽면의 저편에는 전혀 다른 공간의 모습이 존재하였다. 

제라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10년 전, 제라드가 샤프라스 요새에서 다급하게 펼쳤던 그 공간 도약 마법과 완벽하게 일치하는 신비를 아나리엘이 펼치고 있었다. 

“어떻게······.” 

“설명은 나중에 할게요······. 제라드, 이제 시간이 없어요. 한계가······.” 

“공녀 전하!” 

아나리엘은 말을 하다가 갑자기 맥없이 쓰러졌다. 

제라드는 거의 반사적으로 그녀를 안아 들었다. 

엄청난 무리를 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 와중에도 공간의 문은 닫히지 않았다. 의식이 없는 지금도 필사적으로 문을 열고 있는 것이다. 

제라드는 아나리엘을 믿기로 했다. 그는 아나리엘과 함께 공간의 저편으로 몸을 들이밀었다. 

그 순간, 문은 닫혔고 두 사람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11 

“으음······.” 

아나리엘은 신음하며 눈을 천천히 떴다. 머리가 지끈거렸고, 몸이 무거웠다. 

“일어나셨습니까?” 

그녀는 익숙한 남성의 목소리를 들으며 이내 정신이 번쩍 들었다. 몸을 일으키자, 그곳에 제라드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이 주변의 모습까지도. 

“이곳은 성의 지하더군요.” 

“······이목을 피하려면 오히려 더 깊숙한 곳으로 가는 게 맞는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그게 정답이었습니다. 실제로 지금 이 지하에는 공녀 전하와 저 둘뿐이니까요.” 

아나리엘이 의식을 잃고 있는 동안, 이미 이 지하 공간 전체를 훑고 마법의 눈과 감각을 곳곳에 설치해둔 제라드였다. 

그리하여 오랜 시간 사용하지 않은 이곳 지하에는 새까만 어둠이 드리워 있었음에도 지금 제라드에게는 대낮처럼 환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그럼 이제 대답해주시겠습니까? 어째서 절 도와주셨습니까, 공녀 전하. 절 돕는 일이 황제 폐하를 거스르는 일이 된다는 것을 알고 계실 텐데요.” 

“그게 옳은 일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어둠 속에서도 환하게 빛나는 아나리엘의 눈동자. 10년 전과 하나도 달라지지 않은 눈빛이다. 

“글쎄요. 옳은 일이라는 것의 경계는 상당히 모호한 법이죠. 어쩌면 하늘의 문의 의지가 모든 것을 이롭게 하고 올바른 발전 방향으로 인도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제가 택한 길이야말로 정말로 틀린 길일지도······.” 

“그런 마음에도 없는 말은 그만두세요. 당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절대로. 만약 정말로 그랬더라면 당신은 그 길을 고집하지 않았을 거예요. 제라드, 당신은 확신하고 있잖아요. 오직 하늘의 문을 닫는 것만이 이 세상을 구하는 일이라는 걸 말이에요.” 

아나리엘의 말에 제라드가 어안이 벙벙한 얼굴을 하고 있다가 이내 피식 웃었다. 

“부끄럽군요. 속내를 다 읽힌 기분입니다. 하지만 제 확신과 공녀 전하의 결단이 어떤 연관이 있는지 모르겠군요. 공녀 전하께서는 어째서 그게 옳다고 생각하셨습니까?” 

“저는······ 두려워요. 제게 일어나는 변화와 폐하, 그리고 우리 황족들에게 일어나는 변화가 말이에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몸을 떨었다. 

“하늘의 문이 열리고 10년······. 세상이 변한 것 이상으로 우리는······ 변해가고 있어요. 의지와는 무관하게 말이에요.” 

‘역시······.’ 

제라드의 얼굴이 굳었다. 

황제의 그 강압적이었던 태도와 적의, 그리고 알 수 없는 힘을 사용하던 모습은 알타자르 산맥의 엘프들과 똑같았다. 

즉, 하늘의 문이 황족에게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제라드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렇다면······ 공녀 전하께서도 어떤 목소리 같은 게 들리는 겁니까?” 

“목소리······. 그래요. 어쩌면 목소리라고 할 수도 있겠네요. 안에서 점점 차오르는 이 감정의 충동은 어떤 목소리라고 해도 좋을 거예요. 전 변해가고 있어요. 내가 아닌 다른 무엇으로······.” 

제라드는 아나리엘이 말하는 그게 무엇인지 짐작해보았다. 

그녀의 이마에 새겨진 드래고닉 패턴이 커진 것과 연관이 있을 터였다. 

‘하늘의 문이 열리고 10년. 시간이 흐르면서 황족의 몸에 흐르는 피가 강해지고 있다는 거겠지. 용의 피가 말이야. 만약 용의 피가 점점 더 깨어나게 되면 그때는 삼켜지게 될 거야······.’ 

최초의 생명체인 드래곤. 그들의 힘은 감히 인간의 몸으로 견뎌낼 게 아니었다. 

제라드는 이제는 아무것도 남지 않은 동부의 베너하임 공국에서 드래곤 하트를 자신의 몸에 이식하던 존재들을 떠올렸다. 드래곤의 생명력에 잠식되어가던 자들······. 

바로 그 순간이었다. 

‘드래곤의 육신과 피가 합쳐진다면······ 어떻게 되는 거지?’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그 두 가지가 합쳐지게 된다면······ 어쩌면 인간의 손에 의해서 탄생하였던 불완전한 드래곤인 메시우스와는 비교도 안 되는 존재가 이 땅에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말이다.

< 마스터의 귀환5 > 끝

ⓒ 양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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