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흥1 >
1
2시대의 종막.
세계수를 앞에 둔 그 혈전의 끝은 마침내 세계수 파괴로 이어졌다. 모든 것이 끝나고 케이틀란은 마침내 그 영역에서 헤어나왔다.
“허어억!”
참고 있던 숨을 몰아쉬듯이 식은땀을 뻘뻘 흘리는 케이틀란. 예전 제라드와 비슷한 반응이었다. 당연히 그럴 것이다. 세계의 기록에 접촉하였으니, 리스크는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
케이틀란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2시대와 3시대의 결정적인 차이. 그것은 문이 존재하느냐의 여부였다. 문이 존재하는 세상과 문이 존재하지 않는 세상. 그리고 마법이 찬란하게 꽃을 피웠던 시대와 모든 것이 사라져서 다시 그 뿌리부터 더듬으며 찾아야 하는 시대.
“그렇다면······ 하늘의 문이 이 세상을 좀먹는다는 것이냐?”
“단언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찬란했던 2시대가 결국은 끝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 저는 그걸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케이틀란은 믿기 어렵다는 얼굴로 머뭇거렸다.
그렇단 얘기는 결국 지금 이 시대의 끝이 마법의 종말로 이어진다는 얘기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제라드가 정말로 이 세상에 빛을 끝내는 자란 말인가?’
케이틀란이 생각에 잠겨 있을 때였다.
“스승님, 지금이라면 베리타스가 보이실 겁니다.”
“뭐가 보인다고?”
케이틀란은 제라드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제라드가 어딘가를 가리키고 있었다.
아무것도 없는 곳이었다. 대체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파지직.
뜨겁게 달궈진 뇌에 전류가 흐르는 듯한 감각.
그 순간, 케이틀란은 이 공간의 감각이 바로 손에 훤히 잡힐 것처럼 한 번에 느껴지는 감각을 느꼈다.
아무것도 없는 곳.
그곳에 무엇인가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였다.
“으음.”
케이틀란이 작게 신음하는 가운데, 그의 눈에 드디어 무엇인가가 잡히기 시작했다.
빛이 흘러나왔던 곳.
그곳에 무엇인가가 존재하였다.
“채, 책? 책인가?”
그 순간, 제라드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드리웠다.
‘역시 스승님은 준비되셨구나.’
벽을 넘은 순간부터 케이틀란은 이미 이 세계의 근원의 기록에 다다를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케이틀란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제라드가 가리킨 곳을 다시금 잘 보았다. 희미하게 보였던 검은 책의 모습이 제대로 보였다.
검은 책의 중심부에는 커다란 눈이 있었다. 도르륵 굴러가는 눈동자가 빙글빙글 돌더니, 케이틀란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꿀꺽.
케이틀란이 마른침을 삼켰다.
“제, 제라드······. 저, 저게 대체 무엇이더냐?”
“세간에서 널리 부르던 성유물. 그게 바로 베리타스입니다. 그리고 바로 베리타스야말로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기록에 접촉할 수 있는 열쇠이자 문입니다.”
“성유물! 성유물이라고!”
그냥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실재한다는 얘기다. 케이틀란이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을 했다.
“지난 10년 동안 얻은 게냐? 아니······ 아니지. 넌 이전 최초의 마법사와 얽힌 비화도 이런 식으로 보여주었다. 그때도 넌 저 책을 손에 넣은 상태였던 거야. 그러면 대체 언제부터였느냐?”
“처음부터입니다.”
“처음부터? 그러니까 그 처음이 대체 언제부터였느냐고 묻는 게 아니더냐.”
“······스승님, 처음부터라는 건 제가 세상에 태어나고 기억이 시작된 시점부터를 말씀드리는 겁니다.”
“뭐, 뭐라?”
2
“······.”
긴 침묵.
케이틀란은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제라드가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던 비밀.
지금 케이틀란은 그 유일한 비밀을 들은 사람이 되었다.
베리타스.
이 세상의 모든 지식을 담은 책.
그것이 제라드가 마법을 배울 수 있게 해준 물건이고, 이 세상에 감춰진 비문의 기록을 모을 수 있게 해줬다고 했다. 그리고 10년 전의 대폭발조차도 책이 연관되어 있다고 한다.
“······그런 엄청난 이야기를 왜 지금껏 하지 않았던 게냐.”
“증명할 방법이 없었으니까요.”
“증명하지 않았더라도 나는 믿었을 게다.”
알고 있다. 케이틀란이라면 믿어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증명하려면 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제라드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나는 마법사니까.’
“후우. 어쨌거나 일이 더 복잡하게 흘러가는 것 같구나. 그렇지 않아도 네가 오면 이야기를 해줄 게 하나 있던 참이다. 그게 지금 이 상황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으니, 그냥 이 자리에서 이야기를 꺼내도록 하마. 그 이야기란 현재 탑주와 황족들 사이에서 공통으로 꾸는 한 가지 꿈에 관한 이야기다.”
케이틀란은 꿈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마치 예지몽 혹은 예언처럼 두루뭉술한 이야기였다.
그러나 제라드의 미간은 점점 모여들었다.
“꼭 그 꿈에서 나오는 어둠의 존재가 저를 지칭하는 듯하군요.”
“그래, 나도 그렇다고 생각했다.”
“스승님께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생각을 정리했습니다. 그래서 이곳에 돌아온 겁니다.”
“음, 문을 닫아야 한다는 쪽이 네 결정이겠지.”
“예, 이대로라면 이 세계엔 마법이 점점 넘쳐 흐르게 될 겁니다. 이미 어떤 징후는 나타나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징후?”
“예, 트리알린 상단에 관한 이야기입니다만······.”
“트리알린 상단이라. 그래, 나도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구나. 알타자르 산맥에서 큰 변을 당했다고 말이야. 엘프가 연관되어 있는 것 같긴 하다만, 푸른 마녀들의 일일 수도 있고, 몬스터일 수도 있는데, 그게 징후란 말이더냐?”
“어쩌면 제가 너무 과하게 생각하는 건지도 모릅니다만······. 일단 제 눈으로 확인은 해봐야 알 것 같습니다. 어쩌면 하늘의 문이 몰락한 종족들의 운명을 크게 뒤틀어놓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으음······.”
케이틀란은 거듭 신음만 흘렸다.
중대한 선택의 기로였다. 그리고 이 선택은 마법계와 나아가서 이 세상의 운명을 뒤바꿀 수도 있었다.
“쉽게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일은 아니로구나.”
“그럴 테지요. 더군다나 현재 스승님은 많은 마법사들을 책임져야 하는 위치에 계시니까요.”
“그래, 알아줘서 고맙구나. 아무래도 결단을 내리기까지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저는 그동안 알타자르 산맥에 다녀오겠습니다. 스승님께서는 스승님이 옳다고 생각하는 길을 선택하시면 됩니다.”
제라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침없는 모습이다. 케이틀란이나 세상이 어떤 결론을 내놓더라도 제라드는 자신이 정한 길을 바꿀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제라드.”
“예, 스승님.”
제라드가 막 방을 나서기 전에 케이틀란이 그를 불렀다.
“2시대의 종막. 그 치열한 싸움 속에서 홀로 싸웠던 그 사람은 세계와 싸웠던 것이더냐?”
“아마도 그렇겠지요. 누구든 세상에 가득 찬 빛을 빼앗아 가려고 한다면 그것을 가만히 두고 보지 않을 테지요. 손에 쥔 것을 빼앗기는 기분일 테니까요.”
“······.”
그럼 보름 뒤에 뵙겠습니다, 제라드는 그렇게 고개를 숙이며 다시 방을 나서려고 할 때였다. 케이틀란은 재차 그를 붙잡았다.
“제라드, 넌 세계와 싸우기라도 할 참이더냐?”
“필요하다면 그렇게 할 겁니다.”
“뭘 위해서냐.”
케이틀란이 무거운 얼굴로 물었다.
그러자 제라드가 이내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그 대답이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었기에 케이틀란은 제라드가 방을 나선 이후에도 한동안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다가 이내 피식 웃었다.
“녀석······.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순진한 대답을 하는군.”
3
“벨자 원로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래, 알았어. 이 아이는 걱정하지 마.”
벨자가 고개를 끄덕였을 때였다.
메리가 얼굴을 잔뜩 찌푸린 얼굴로 앞으로 나왔다.
“아저씨, 그냥 저도 같이 가면 안 돼요?”
“메리, 너는 나처럼 사람들을 돕고 싶다고 그랬었지.”
“네, 그렇게 하고 싶어요.”
“그렇게 하려면 먼저 강해져야 해. 누군가를 돕는다는 건 자신을 돌볼 수 있는 사람이라는 얘기다. 메리, 너는 자신을 돌볼 수 있는 사람이야?”
“······.”
메리는 입을 다물었다.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던 까닭이다. 제라드는 그런 메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메리, 벨자 원로님은 대단한 마법사님이야. 저분의 아래에서 네가 뭘 배울 수 있는지를 배워. 자기 자신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이 남을 돕는다는 건 과욕이다.”
“알겠어요. 저 배울게요. 나중에 아저씨를 도울 수 있을 정도로 배우고 또 익힐 거예요.”
“그래, 착하구나.”
제라드는 벨자를 보았다.
벨자는 걱정하지 말란 듯 담담한 얼굴이었다. 아마도 메리는 많이 힘들 것이다. 벨자의 마법은 일반적인 왕도를 많이 벗어나 있으니까. 하지만 그렇기에 딱 좋다.
메리의 마법력 역시 일반적이지 않으니까.
‘문제는 카일인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저도 이곳에 남고 싶은데,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별일이군. 너는 끝까지 따라온다고 할 줄 알았는데.”
“······조금 전의 말씀은 메리에게만 통용되는 이야기가 아니었으니까요. 지금의 저는 대마법사님께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질 않습니까. 그런 제가 뒤따라봤자, 짐만 되겠죠. 그러고 싶진 않습니다.”
“현명하군. 어차피 그리 머지않은 시일 내에 다시 만나게 되겠지. 그때 보자고. 어디 얼마나 실력이 늘었는지 보겠어.”
“실망하게 해드리지 않겠습니다.”
카일은 각오에 가득 찬 얼굴로 그렇게 대답했다.
제라드는 고개를 돌렸다.
로비로 향하는 동안, 많은 마법사가 제라드를 보면서 깍듯하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해왔다. 이런 게 불편해서 그동안은 아웃랜드를 돌아다녔던 것이다.
마탑을 나오자, 새벽녘의 서늘한 공기가 제라드를 반기고 있었다.
푸르륵.
김을 쏟아내며 힘차게 고개를 터는 흑마.
어제 하루 꼬박 쉬더니 다시 달리고 싶어하는 듯하다.
“가자.”
제라드는 말 위에 올랐다.
목표는 북쪽이다.
“이럇!”
제라드가 푸르스름한 새벽녘의 어둠을 뚫고 거침없이 달려나갔다. 머잖아 바람이 말을 휘감기 시작하였고, 말의 속도는 조금 전과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빨라졌다.
두두두두.
어둠 속으로 자취를 감추는 말의 뒷모습은 이내 보이지 않게 되었다. 탑의 최상층. 제라드의 뒷모습을 뒷짐을 지고 지켜보는 케이틀란의 표정은 복잡했다.
-제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키고 싶어서요.
제라드는 쑥스러운 듯이 머리를 긁적이며 그렇게 말했었다. 냉철하고 흔들림 없이 숨겨왔던 이야기를 해나가던 마법사의 모습은 온데간데없는 순진한 소년 같았던 모습이었다.
“어쩌면 끝까지 가면 갈수록 더 순수해지는 것일는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어렵기만 하구나······. 나는, 그리고 우리는 과연 무엇을 포기하고 무엇을 얻게 되는 것일까.”
하늘이 점차 푸르게 밝아오는 가운데, 케이틀란은 가만히 하늘의 문을 우러렀다.
마법의 문.
누군가는 그렇게 말했다.
저 문이 열린 뒤로, 마법의 전성기가 왔노라고.
케이틀란도 부정하지 않았다.
막혀있던 벽을 뚫을 수 있었던 것도 돌이켜보자면 모두 저 문이 열린 이후에 있었던 일이었으니까.
그러나 그렇다고 한다면······.
“나는, 마법을 포기할 수 있는가?”
자문하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케이틀란은 주먹을 꽉 쥐고 고개를 돌렸다.
4
제라드는 강행군을 이어나갔다.
바람의 정령을 통해 가호를 받는 말은 거침없는 속도로 북쪽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곧 도착이다.’
불과 사흘 만에 황야를 넘어서 북쪽의 땅까지 다다른 제라드였다. 놀라운 속도였다. 해가 질 즈음이 되어서 머잖아 저 멀리 어둠에 잠긴 알타자르 산맥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언제 봐도 경이로운 곳이었다. 하늘 높이 뻗은 산맥은 구름의 저편에 잠겨 있었고, 사람의 출입을 불허 하는 신비로운 기운이 가득하였다.
“이곳에 다시 올 일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제라드는 어둠에 휩싸인 감시자의 요새를 눈에 담았다.
굳이 저 안쪽까지 들어갈 필요는 없으리라.
말에서 내린 제라드는 이 일대에 보이지 않는 마법진을 만들어 설치하였다. 이걸로 짐승이나 몬스터 따위가 말을 어찌하진 못하리라. 이 일대 주변은 초원. 말을 방목해두어도 말이 굶어 죽을 일은 없었다.
“다녀올 테니 기다리고 있어.”
푸르륵.
제라드는 말의 머리를 쓰다듬고 고개를 돌렸다.
전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지금은 여러 개의 하늘길이 보였다. 저 중에는 세계수가 있는 하늘봉우리로 이어지는 길도 있으리라. 하지만 제라드는 당장은 그곳으로 갈 생각이 없다.
트리알린 상단이 공격받았던 광산.
그곳에 무엇이 있는지 그걸 확인하는 게 선결이었다.
둥실.
제라드의 몸이 하늘로 떠올랐다.
바람이 온몸을 휘감았고, 머잖아 제라드는 하늘의 길을 타고 거침없이 협곡을 돌아서 동쪽으로 이동하였다.
< 부흥1 > 끝
ⓒ 양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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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흥2 >
4
험준한 협곡의 외곽을 따라서 이동하기를 두 시간.
제라드는 머잖아 험하기만 하였던 협곡이 낮아지기 시작하면서 협곡이 굽이치는 길로 변해가는 것을 목도하였다.
‘물 냄새가 난다.’
살짝 비린 냄새와 습기를 머금은 공기.
제라드가 속도를 서서히 늦추기 시작하였다. 돌이 잘게 부서진 자갈과 평평한 땅이 나타났다. 인위적인 풍경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사람이 지나다니기 좋게 만들어놓은 것처럼 말이다.
“여기구나.”
마차가 지나다니기 좋을 정도로 길이 어느 정도 정리된 땅을 막 지날 때였다. 제라드가 어둠 속에서 무엇인가를 발견하고 멈춰 서서 지상에 내려왔다.
하마터면 그냥 지나쳐갈 뻔했던 흔적.
제라드는 땅을 살폈다.
그곳에 마차 바퀴의 흔적이 새겨져 있었다.
그건 이상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그 사내의 기억대로라면 이곳에서 일이 터진 것은 거의 수개월은 더 된 일이었기 때문이다. 수백 명이 죽은 땅. 발길은 완전히 끊어졌을 터였다.
‘설마, 그 이후에 또 다른 사람이 왔다는 건가?’
제라드는 고개를 들고 오감을 곤두세웠다. 청각이 예민해지기 시작하였다. 조금 전까지 들리지 않았던 수많은 소리들이 포착되기 시작하였다. 밤벌레들이 우는 소리가 천둥처럼 크게 들리고, 부는 바람에 모래가 굴러가는 소리가 선명하게 잡혔다.
그 소리의 너머.
그곳에서 사람들의 소리가 들렸다. 물건을 나르는 소리. 메아리치듯이 울려 퍼지는 동굴의 소리까지.
“어리석은······.”
제라드는 나직하게 중얼거리더니, 바로 땅을 박차고 하늘에 올랐다.
휘이잉.
바람이 그 일대를 거칠게 훑었다.
제라드는 단숨에 하늘로 높이 치솟았다. 50미터가 넘는 하늘 위에 올라서 소리가 들린 곳을 향해 나아간다. 그러자 머잖아 그쪽에서 불꽃이 일렁이는 게 보였다.
사람의 불꽃이 틀림없었다.
제라드는 그곳을 향해 다가갔다.
가까이 다가가자 모든 게 훨씬 더 눈에 잘 들어왔다.
그 불꽃은 숙영지의 불꽃이었다.
덜그럭대는 수레 소리와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과 주변의 경계를 서는 병사들의 모습까지.
‘마정석을 얻기 위함인가?’
마정석은 마나가 깃든 특이한 광물을 일컫는다.
생긴 것은 그냥 평범한 돌처럼 생겼는데, 특이하게도 어느 한 곳에 머물지 않는 마나의 성질과 맞지 않게 내부에 고밀도의 마나가 고정되어 있다.
그런 까닭에 마법 아티팩트를 만드는 데에는 반드시 필요하다. 잘 만들어진 아티팩트의 가격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으니, 마탑은 여기서 상당한 재정적 수입을 얻었고, 마정석을 조달하는 상단도 막대한 수익 일부를 손에 넣었다.
목숨을 걸 정도의 가치.
상급의 마정석엔 그 정도의 가치가 있었다.
제라드는 이 주변을 훑기 시작하였다. 산자락이 시작되는 험준한 협곡의 위. 저곳이라면 이 숙영지가 한눈에 들어올 터였다.
제라드는 하늘에서 내려와 땅에 착지했다.
‘그래, 이곳이구나.’
지금 제라드가 서 있는 곳. 지금 이곳에선 야영지가 한눈에 들어왔다. 만약 습격한다면 이곳만큼 좋은 곳이 없었다.
제라드는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돌려보았다.
엘프들은 결행의 밤. 이곳에 있었을 것이다. 무수히 많이 모인 엘프들. 그들은 이곳에서 소리 없이 자연과 하나가 되어 있었을 것이고, 거의 일제히 움직였으리라.
협곡의 험준한 내리막 따위는 문제가 아니다. 정령의 친구인 엘프들은 이런 길쯤은 손쉽게 달려왔을 테니까.
‘그때와 똑같은 일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뭐지?’
꿈틀.
제라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알타자르는 이 세상 어느 곳보다도 많은 정령이 숨 쉬는 곳. 처음부터 느껴지던 이 감각은 틀림없이 그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가만히 느껴보니 그게 아닌 듯하였다. 지금 제라드의 신경을 거스르는 이 감각은 그것과는 좀 달랐다. 그보다 훨씬 더 정적이고, 잘 정립된 듯한 감각이다.
‘이건······ 마법이다.’
제라드가 마법의 근원지를 더듬으며 고개를 돌릴 때였다.
쉬아악!
별안간 날카로운 바람이 숲 속에서 쏟아져 나왔다. 바람의 칼날. 이건 맞으면 상처가 생기는 정도로는 끝나지 않는다.
제라드가 그 마법을 포착한 순간, 그의 눈앞에 보이지 않는 무형의 방벽이 차례로 형성되었다.
카가가각!
방벽을 긁는 칼날의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그러나 칼날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또다시 날아들었다. 이번에는 전보다 더 많은 칼날의 폭풍이다.
‘상당한 수준의 전투 마법사다.’
제라드는 그렇게 평가했다.
처음에 마법을 투사했을 때, 상대의 위치를 완전히 포착했다고 생각했는데, 조금 전에 날아든 공격으로 다시 위치를 알 수가 없게 되었다. 철저하게 자신의 위치를 감출 줄 안다.
그뿐만이 아니다.
파지직!
섬광이 번쩍이면서 좌우에서 벼락 줄기가 쏟아져나왔다. 이번에도 무형의 방벽이 나타나며 그 공격을 속절없이 차단하였다.
‘수준도 상당하고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도 잘 알고 있어. 더 싸웠다가는 상황이 험악해질 수도 있겠어.’
제라드는 이 싸움을 그만 끝내기로 했다. 상대가 마법사라면 아마도 지금 저 아래에서 일하는 무리의 동료라고 보는 게 타당하였기 때문이다.
그 순간부터 제라드의 눈동자에서 푸른 안광이 줄기줄기 흘러나오기 시작하였다.
5
제라드의 머릿속으로 여러 정보가 동시에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그는 자신이 원할 때, 이 일대의 모든 정보를 한 번에 손에 넣는 게 가능하였다. 공간과 영역 그 자체의 정보를 단번에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30미터 전방에 한 명. 20미터 떨어진 왼쪽에 둘. 오른쪽에 한 명. 이동하면서 다음 마법을 준비하고 있군.’
파악은 끝났다.
제라드는 바로 전방의 영역에 균열점을 만들었다.
“빨아들여라.”
제라드의 명령은 언령과 같았으니.
쓰오오오.
균열점 중심부에서 발생한 왜곡점이 무시무시한 흡력을 발산하면서 주변의 모든 것을 빨아들이기 시작하였다.
“큭!”
어둠속의 마법사가 당황한 얼굴로 흡력에 저항하기 시작하였다. 그 순간, 나머지 마법사들의 동선도 꼬이기 시작하였다. 그걸로 됐다. 제라드가 처음부터 노렸던 것은 그들을 제압하는 일이었으니까.
제라드는 공간 마법이 빛을 발한 순간이었다.
영역 전체를 압도적인 힘으로 짓누른다.
쿠웅.
별안간 중력이 수 배로 늘어나는 듯한 그 압박감 속에서 마법사들은 무력화되었다.
저벅저벅.
그들을 향해 걸어가는 제라드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마침내 어둠 속에서 바닥에 쓰러져 있는 마법사들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들이 걸친 로브의 색이 몹시 낯이 익었다.
“어라?”
제라드가 이내 그런 소리를 중얼거렸다.
어둠이 짙게 드리웠지만, 제라드가 착각할 리가 없었다.
그것은 틀림없는 잿빛의 로브였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저 잿빛의 로브를 걸칠 수 있는 마법사들은 오직 한 부류뿐이었다.
“무색의 마법사?”
“크윽.”
마법사들이 낮은 신음을 토하다가 이내 고개를 들어 올렸다. 바로 그 순간, 그들을 짓누르던 모든 무게는 온데간데없이 깔끔하게 사라졌다.
머리부터 짓누르던 그 감각이 사라지자마자 바로 몸을 벌떡 일으키며 거리를 벌리는 마법사들. 잘 훈련되어 있음을 증명하듯 곧 전투태세를 갖춘다.
“그, 그대의 정체를 밝혀라! 도대체 누구이며, 왜 이곳에 있었던 거지?”
“그건 내가 당신들한테 묻고 싶은 질문인데.”
“질문은 이쪽이 먼저다. 어서 대답해라!”
위압적인 태도. 아무래도 저들은 바로 얼마 전에 이곳에서 벌어진 공격이 마법사의 소행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흐음, 무색 마탑에서 직접 이 일에 나섰다는 건가? 어째서지? 단순히 대외적인 활동을 폭넓게 한다고 하기엔······.’
“대답하지 않겠다면 적으로 간주하겠다!”
제라드가 잠깐 생각에 잠겨있는 동안 그렇게 소리치며 다시금 마법을 전개하는 마법사.
그러나 제라드는 그들의 마법이 발동하기도 전에 개입하여 마법을 방해하였다.
“이, 이럴 수가······.”
“성급하게 굴지 마라. 내가 그대들의 적이었더라면 이런 식으로 그대들을 살려두는 일은 없었을······.”
제라드가 말을 잇다가 눈살을 찌푸렸다.
사아아아아.
별안간 숲이 울기 시작했다.
그 이변은 제라드만 포착한 게 아니었다.
무색의 마법사들 역시 그 이변을 느꼈다.
“네놈, 동료를 불렀구나!”
“한심한 소리는 그쯤 해둬. 감각을 열고 제대로 느껴라. 마법사가 숲 전체를 통제하는 마법을 익혔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나 있나!”
제라드가 언성을 높이자, 그들이 움찔하였다. 조금 전까지와는 태도가 달랐다.
“자, 온다.”
제라드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바로 그 순간, 술렁이던 숲의 울음이 그쳤다. 그리고 저편의 어둠 속에서 소리 없는 유령처럼 흔들거리며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산맥의 주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제라드의 눈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뭔가가 다르다.’
엘프들의 존재감과 그들에게서 풍겨 나오는 이 감각은 이전에 봤던 엘프들에게서 흘러나오던 분위기와는 본질적으로 달랐다.
흡사, 이 산맥의 기운을 한몸에 받는 듯한 그들은 진정 이 숲의 일부가 된 것처럼 한순간씩 제라드의 영역에서 나타났다가 들어오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위험하다. 살기가 보통이 아니야.’
제라드는 바로 한 걸음 나섰다. 후드를 걷는 순간, 그의 눈동자에서 줄기줄기 흘러나오는 푸른빛의 안광이 어둠을 훑었다.
“그대들과 싸우고 싶지 않다. 나는 하늘봉우리의 수호자와 긴밀한 관계를 맺은 인간으로서 중재자로서 이곳에 왔다. 엘프와 인간들 사이에 불필요한 싸움은 피하고 싶다. 대화로 풀 수 있는 문제를 어렵게 만들 필요는 없을 터.”
그걸로 이야기는 충분할 터였다. 제라드는 과거 알타자르 엘프 일족의 은인이나 다름없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제라드의 생각은 빗나갔다.
이 일대를 가득 메운 위험한 살기는 조금도 줄어든 기색이 없었다.
사아아아.
다시 숲이 우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엘프들 사이에서 메아리치는 목소리가 들렸다.
“과거의 어떤 연으로도 앞으로의 일을 피할 수는 없다. 오만한 인간들이여, 너희의 시대는 끝났다. 이건 싸움이 아니다. 사냥일 뿐.”
담담한 선고.
그것이 대화의 끝이었다.
그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어둠 속에서 녹색의 빛이 쏟아지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땅과 바람의 정령이 한데 뒤섞인 정령의 화살이었다.
슈슈슈슉!
제라드는 곧장 뒤로 물러나면서 마법을 전방에 펼쳤다.
그 순간 화살이 무형의 방패 위를 두들겼다.
콰콰콰쾅!
요란한 굉음이 울려 퍼졌다.
화살 하나하나의 파괴력이 상상을 초월하고 있다.
‘말도 안 돼. 이게 정령의 사수라고? 어떻게 이런 파괴력이······.’
제라드의 안색이 바뀌었다.
“당장 뒤로 물러나!”
제라드가 뒤편에서 굳어 있던 무색의 마법사들에게 그렇게 소리쳤다.
콰앙! 콰콰쾅!
이 와중에도 폭발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고, 펼쳐놓은 무형의 방패에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제라드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엘프들은 진심으로 그들을 해치우려고 하는 것이다. 사내의 기억 속에 존재했던 숲의 암살자들 그대로다.
파지지직!
제라드는 양손을 펼쳤고, 새하얀 뇌전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말이 통하지 않는다면 통하게 해줄 수밖에.”
< 부흥2 > 끝
ⓒ 양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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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흥3 >
6
꽈르르릉!
벼락이 곳곳에서 번쩍거리며 터졌다.
불똥이 튈 때마다 마치 서로 연결된 것처럼 펼쳐지며 덤벼오던 엘프들이 튕겨 날아갔다.
사아아!
또다시 숲이 우는 소리가 들렸다.
숲의 메아리가 그들끼리의 암묵적인 신호인 듯했다.
언제 튕겨져 나갔었느냐는 듯, 곧바로 바닥에서 튕기듯 일어나며 산개대형으로 포진하는 엘프들. 그들은 유기적으로 이어진 채, 흐트러짐이 없는 모습이다.
잠깐의 대치 상황 속에서 뒤로 물러났던 네 명의 마법사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엘프!”
숲 속의 어둠 속에 모습을 감춘 수십 명의 존재들.
그들은 틀림없는 전설 속의 엘프였다.
놀랄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바로 조금 전까지 그들이 상대하던 마법사가 펼친 마법. 그것은 어떤 속성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마법이다.
즉, 속성의 한계를 넘어선 마법사라는 얘기였다. 그리고 그 경지에 이른 마법사는 흔하지 않았다.
“서, 설마?”
무색 마법사 중 한 사람이 눈을 크게 떴다.
“필립, 왜 그러십니까.”
“저, 저 마법사······ 제가 아는 분인 것 같습니다.”
“예? 아는 마법사입니까?”
“제가 잘못 본 게 아니라면 말입니다.”
생각해보면 처음부터 심상치 않았다.
‘나를 포함한 넷은 무색의 탑에서도 상위에 속하는 실력자들이다. 그런데 저자는 그런 우리 넷을 상대로 완전히 압도하지 않았던가.’
“······일단은 우리도 가담하는 게 좋겠습니다.”
필립이 그렇게 결정을 내리자, 나머지 셋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리더가 결정을 내렸다면 그들은 따를 뿐이었다.
엘프들이 바로 움직였다.
네 명의 마법사들이 제라드에게 다가오기 시작했을 때, 그게 신호탄이 된 것 같았다.
그러자 제라드 역시 바로 반응하였다.
꽈르르르릉!
엘프들의 움직임에 맞춰서 그들의 코앞에서 벼락이 번쩍번쩍 터졌다. 산발적인 체인 라이트닝이었다.
그러나 엘프들도 만만히 당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미리 제라드의 마법을 읽은 것처럼 아슬아슬하게 곡예와 같은 몸놀림으로 공격을 피했다. 파도가 물러가듯이 한 번에 빠지는 그들의 움직임은 일사불란하다. 하지만 파도란 썰물과 밀물이 있는 법.
뒤로 물러난 엘프들의 자리를 메우며 뒤에서 달려오는 엘프들. 그들은 허리춤에서 칼을 뽑아들면서 제라드와의 거리를 좁혀왔다.
‘빠르다.’
제라드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불과 찰나라고 해도 좋을 정도의 시간. 그 순간을 놓치지 않은 엘프 검사들은 거리를 좁혀와 단숨에 허공을 베었다.
쉬아악!
인간이 구현할 수 없는 기괴한 투로의 검술. 하지만 그 검에 실린 위력은 능히 강철도 찢어놓기에 부족함이 없다.
제라드의 몸이 찢기기 직전의 순간.
드드드득.
엘프들의 검이 날아들던 공간이 뒤틀리면서 투로가 바뀌었다. 엘프들의 눈이 놀라움으로 일그러졌을 때.
퍼퍼퍼펑!
지척까지 달라붙은 엘프들의 몸에서 뇌화가 일제히 터졌다.
“큭!”
낮은 신음을 토하며 이곳저곳으로 고꾸라지는 엘프들.
폭연이 이 일대를 가득 메우는 가운데, 엘프들은 뇌화에 적중되어 나가떨어진 동료들을 부축하면서 거리를 벌리기 시작했다.
‘흐음, 회복 속도 역시 비정상적이야.’
쓰러진 엘프들은 뇌화에 적중되면서 뼈가 다 부서지고 살점이 다 찢겨 피가 줄줄 흘렀다.
그런데 부축을 받고 물러나는 엘프들의 상처가 빠르게 낫는 모습이 육안으로도 식별될 정도였다.
“피를 보는 상황은 피할 수 없다는 건가.”
쿠웅!
주변의 공기가 바뀌었다.
제라드가 마나를 개방한 것이다.
이 일대를 숨 막히게 하는 엄청난 양의 마나가 몸 안에서 넘실넘실 흘러나오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움찔.
엘프들이 몸을 떨었다.
마나에 민감한 그들은 이 일대에 일어난 변화의 중심에 제라드가 있음을 알았다.
“자연의 품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면 알아서 빼라.”
제라드는 경고했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엘프들이 제라드를 향해 육박해오기 시작했다. 그가 큰 마법을 쓰려고 한다는 것을 바로 눈치챈 것이다.
“저도 돕겠습니다!”
워낙 순식간에 벌어진 싸움이었기에 미처 끼어들지 못하고 있던 무색 마법사들이 그렇게 외쳤을 때였다.
제라드는 오른손을 하늘 위로 번쩍 들어 올렸다.
그러자, 공기가 바뀌었다. 정확히는 마나의 흐름이 바뀌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고오오오오.
달려들던 엘프들은 등줄기를 스치는 오싹한 감각에 땅을 박차며 좌우로 피하였다.
“현명한 판단이다.”
제라드는 그렇게 말하며 들어 올렸던 손을 눈앞으로 떨어뜨렸다. 바로 그 순간, 소용돌이치는 바람이 제라드의 전방을 모조리 휩쓸었다.
콰콰콰콰콰!
7
스톰 블레이드.
제라드는 그것을 그렇게 불렀다.
현재 제라드가 구현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마법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었다.
마법사의 내부에 깃든 마나와 세계에 존재하는 마나. 성질이 다른 두 개의 마나는 온전히 하나가 될 때, 술식과 법칙의 한계를 초월하게 된다. 의지가 술식 그 자체가 되는 순간이라고 해도 좋다.
후두두둑.
흙먼지가 흩날렸다. 그리고 이 흙먼지가 거의 다 가셨을 때, 이곳에 드리운 처참한 참상이 모습을 드러냈다.
피범벅이 되어 널브러진 엘프들의 모습이 제라드의 눈에 들어왔다.
하나같이 정상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일단 눈에 보이는 이들은 전부 다 목숨이 붙어 있는 듯했다.
“쿨럭!”
힘없이 기침을 해대며 바들바들 떨어대는 엘프들. 그들의 눈동자엔 불신이 가득했다. 단 한 번에 내뿜는 강력한 마법. 그들은 그것에 모조리 휩쓸렸다. 어찌해볼 도리도 없이 말이다.
울창했던 숲의 모습도 엉망진창이었다. 나무는 뽑혀서 쓰러졌거나, 베여서 바닥에 형편없이 나동그라진 모습이었고, 땅엔 깊은 상처에 드리워 있었다.
압도적인 힘의 증명이었다.
제라드는 지금 손가락을 까닥하지 않아도 널브러진 엘프들의 목숨을 손쉽게 빼앗을 수 있었다.
“지금 물러난다면 목숨은 빼앗지 않겠다. 하지만 지금부터는 더는 자비는 없을 거다.”
제라드의 서슬 시퍼런 어조에 엘프들이 주춤주춤 일어나더니 물러서기 시작하였다. 그들에게선 이미 전의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수호자에게 전해. 제라드 란스터가 곧 하늘봉우리로 찾아가겠노라고 말이야.”
제라드가 그리 말하며 손을 뻗었다.
휘오오!
매서운 바람이 단숨에 저들의 몸을 덮쳤다.
몸을 가눌 새도 없이 땅을 구르는 엘프들. 처음 이곳에 당도할 때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비교적 뒤쪽에서 스톰 블레이드의 영향권을 피한 엘프들이 나머지 엘프들을 부축하며 한둘씩 물러나기 시작했다.
제라드는 마지막 엘프가 물러날 때까지 그 광경을 지켜보다가 이내 한숨을 푹 쉬었다.
불길한 예감은 적중했다.
‘틀림없어. 하늘의 문이 엘프들을 강하게 만들고 있다. 조금 전의 엘프들은 예전 하늘봉우리에서 봤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전투력이 향상된 모습이었다. 게다가 도저히 이전의 그 엘프들의 모습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호전적이었어. 그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지기라도 한 것인가? 그게 아니면 엘프의 영역에서 마정석을 가져간다는 게 큰 문제라도 된다는 건가?’
하지만 그렇다면 그들은 애초에 감시자의 요새가 세워지는 것을 용납해서는 안 됐다.
‘내가 직접 가서 묻고 확인해보는 수밖에 없겠어.’
제라드가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들었다. 이대로 하늘길에 오를 셈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스승님!”
제라드는 별안간 뒤쪽에서 들려오는 커다란 목소리에 상념에서 헤어나왔다. 그 부름이 제라드를 향한 것이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누구지?’
제라드는 고개를 돌렸다.
저편에서 무색의 마법사 중 한 사람이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걸어오는 게 보였다. 그의 눈동자가 꼭 금방 눈물이라도 쏟아낼 것 같았다.
“저, 저 모르시겠습니까? 저 필립입니다!”
“필립?”
제라드가 깜짝 놀란 표정으로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필립? 네가 그 필립이라고?”
“네, 맞습니다! 제가 그 필립입니다!”
“세상에!”
제라드가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을 하는 사이, 필립은 하하 웃으며 다가와서 제라드를 와락 껴안았다.
“정말로 다시 만나 뵙고 싶었습니다.”
필립은 진심을 담아 그렇게 말했다.
설마했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가담하기로 했을 때에도 확신하진 못했다.
그러나 제라드는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바로 그 순간,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
“그동안 시간이 많이 흐르긴 많이 흘렀구나. 네가 이렇게 크다니 말이야.”
“그럼요······. 10년이라는 시간은 길다고요.”
스승과 제자.
비록 짧은 인연이었지만, 부모를 잃고 천애고아가 되어버린 필립은 제라드와 만나면서 마법사가 될 수 있었다.
“스승님은 대체 그 긴 시간 동안 어디에······.”
필립이 막 그렇게 말하다가 말을 멈췄다.
야영지가 몹시 소란스러웠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일어난 전투 때문에 수색조를 동원한 모양이었다.
“이런······. 먼저 저곳부터 정리하는 게 우선이겠군요.”
“아뇨. 뒷정리는 저희가 하겠습니다.”
“예, 맞습니다. 두 분께서는 오랜만에 해후를 나누시지요.”
필립과 함께 온 무색 마법사들이 제라드를 보면서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제라드와 눈이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영광이라는 듯이.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제라드가 누구인가.
살아 있는 전설, 그 자체였다.
늦은 야산의 밤.
어지럽게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횃불들도 머잖아 잠잠해졌고, 시끌시끌하였던 숙영지도 조용해졌다.
“스승님께서는 정말 분위기가 많이 바뀌신 것 같습니다.”
“그래? 난 별로 달라진 것도 없다고 생각하는데.”
“아닙니다. 정말로 처음엔 몰라뵈었습니다.”
필립이 기억하는 제라드는 귀족적인 태가 자연스럽게 묻어나는 그런 사람이었다. 며칠을 못 씻어도 그 특유의 분위기는 전혀 사그라지는 법이 없었다. 옅은 금발은 햇빛을 받을 때면 반짝거렸고, 우수에 잠긴 눈동자는 끝을 알기 어려울 정도로 깊었다.
지금도 그 눈동자의 깊이는 여전하다. 하지만 그 옅은 금발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귀족적이었던 태는 온데간데없이 희미했다. 나이가 들었다고 하기엔 모호하다. 수염 때문에 나이가 좀 든 것처럼 보이긴 했지만, 수염만 말끔히 자르면 이십 대 중반 정도로 보일 터였다.
‘뭔가 그런 것과는 달라. 전에는 어디에 있어도 눈에 띄는 그런 느낌이었는데, 지금은 존재감이 희미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이내 고개를 갸웃하는 필립이다. 뭔가 이상했기 때문이다. 바로 조금 전의 제라드의 존재감은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하지 않았던가.
필립은 미처 알지 못했던 것이다.
특별한 경지가 아니라, 초월적인 영역에 다다른 존재는 오히려 평범하다 못해 희미하게 느껴진다는 것을 말이다.
“그나저나 오랜만에 뵌 스승님은 정말 엄청나군요. 전에도 굉장하다고 느꼈지만, 이제 한 사람의 마법사로선 부끄럽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제 눈으로 스승님의 마법을 보니, 앞이 막막할 지경입니다.”
“필립, 네 성장 속도는 훌륭해. 솔직하게 감탄했다. 네 재능은 평범한 수준이었다. 그런데 10년 사이에 이 정도라니. 그동안 얼마나 노력했었는지 알 것 같다.”
“······.”
필립이 어색하게 웃었다.
‘평범한 수준의 재능······ 인가.’
제라드를 제외한 모든 마법사가 필립의 재능을 빼어나다고 하였다. 하지만 제라드가 보기엔 평범한 것이리라.
‘스승님의 눈엔 내 재능이 부족해 보이겠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제라드다.
그러려니 하는 수밖에.
“헌데, 무색 마탑이 언제부터 이렇게 변경의 일까지 직접 나서게 된 거지? 마법사들의 수가 늘어나서 대외적인 일에 개입하게 된 건가?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상한걸. 이곳의 일이라면 청색 마탑이나 적색 마탑에 맡기면 될 텐데.”
“아, 아니요. 이건 폐하께서 직접 지시하신 일입니다.”
“폐하께서?”
제라드가 의아한 얼굴로 눈살을 찌푸렸다.
확실히 트리알린 상단의 사상자는 적지 않았다.
그러나 아무리 그것 때문이라고 해도 황제가 무색 마탑에 이 일을 지시하는 건 모양새가 뭔가 이상했다.
이 일은 마법계의 일이다.
즉, 현재 무색 마탑의 총책임자인 탑주 엘란이 신경 써야 하는 이야기란 얘기다.
“뭔가 이상한 얘긴데. 10년 전, 나는 무색 마탑을 황실의 직속기관에서 독립시켰다. 엘란이 내규를 바꾼 건가?”
“그게······.”
< 부흥3 > 끝
ⓒ 양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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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흥4 >
8
“······일이 그렇게 되었습니다.”
필립의 이야기가 끝났다.
그 이야기를 들어보니 전후 상황부터 이 상황에 이르기까지가 일목요연하였다.
트리알린 상단이 알타자르 산맥에서 의문의 공격을 받았고, 다량의 마정석이 깃든 광산이 그대로 폐광이 될 위험에 처했다.
그리하여 이 상황은 고스란히 황실의 귀까지 전달되었고, 황제가 무색 마탑에 이 일을 명백히 밝혀낼 것을 촉구한 것이다. 그리고 광산을 다시 재가동하라는 말과 함께.
즉, 이야기는 앞뒤가 맞는다.
다만 이해가 안 가는 점도 분명하게 존재했다.
‘어째서 폐하께서는 다시 무색 마탑에 다시 영향력을 행사하셨는가?’
제라드의 의문은 바로 거기에 있었다.
마법계와 정계가 너무 가까워지게 되면 문제는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10년 전 아리만에서 있었던 영혼석 대의식도 그와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제라드는 무색 마탑을 수도 내에 모든 마법의 감시자이자 관리자의 첨탑으로 삼았던 것이었다.
그런데 황제가 이 일에 나서서 무색 마탑에 영향력을 행사해온다면 자연히 독립된 기관의 지위는 흔들리게 될 터였다. 무색 마탑은 다시 황실의 직속 기관으로 전락할 수도 있었다.
필립은 제라드가 생각에 잠긴 것을 보고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스승님. 폐하께서 워낙 강경하게 말씀하셔서 마스터 엘란께서도 어쩔 도리가 없으셨습니다.”
“괜찮다. 별수 없는 일이겠지. 폐하의 명을 제국 내의 누가 거스를 수 있을까.”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라드는 이해하고 넘긴 듯했다. 하지만 그 속내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
‘이 일은 필립에게 더 물어도 소용이 없는 일이야. 자세한 사정은 내가 직접 확인하는 수밖에 없을 터. 아리만도 한 번 보고 올 수밖에 없겠어.’
생각을 정리한 제라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필립, 넌 이곳을 지켜라. 난 하늘봉우리에 다녀오겠다.”
“예? 혼자서 산맥에 오르시겠단 말씀이십니까?”
“그래.”
무모합니다, 그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하지만 필립은 눈앞의 마법사가 누구인지 다시금 상기하였다.
제라드 란스터가 누구란 말인가? 무모하다는 말은 그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만약 일이 잘못되어서 내가 하늘봉우리에 오른 사이에 엘프들이 이곳을 다시금 습격해온다면 저 사람들을 지켜야 하는 건 바로 너다, 필립.”
“알겠습니다.”
필립의 각오에 찬 대답을 들으며 제라드는 소용돌이가 흉하게 할퀴고 지나간 대지로 발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씩.
발걸음을 뗄 때마다 제라드의 주변에 바람이 모여들었다. 그러다 이내 둥실 떠오른다. 그 광경에 필립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게 시작이었다. 제라드는 점차 하늘을 향해 상승하였다.
“스승님은······ 하늘을 날 수 있으시구나.”
제라드가 하늘에서 뚝 떨어지듯이 나타난다는 얘기. 대개는 소문이 부풀려져서 만들어진 이야기로 치부하였다. 필립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어느새 제라드는 저 하늘 너머로 모습을 완전히 감추었다.
“하늘을 나는 마법이라니. 배우고 싶다고 조르면 알려주시려나······.”
9
어둠을 뚫고 나아가는 제라드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황실에서 어째서 마정석에 그토록 눈독을 들이는 걸까.’
제라드는 어두운 얼굴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이내 그 생각들을 가슴 한 구석으로 미뤄 두었다.
‘지금은 눈앞의 일에 집중하자.’
머잖아 가파르고 험준한 산세가 제라드의 눈앞에 드리웠다.
휘오오오.
하늘길이 가까웠다. 하늘봉우리에서부터 알타자르 산맥 곳곳으로 이어지는 정령의 길. 제라드는 그 길에 몸을 실었다.
바로 그 순간, 등을 확 미는 듯한 감각과 함께 밀물에 떠밀려가는 것처럼 하늘로 붕 치솟는다. 조금 전까지도 빨랐지만, 지금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순식간에 구름이 드리운 하늘까지 다다라 이제 하늘봉우리를 코앞에 두고 있을 때였다.
쐐애애액!
제라드가 바로 몸을 튕기며 하늘길에서 벗어났다. 조금 전 지상에서 솟구친 하늘을 꿰뚫는 한 줄기의 거대한 빛의 화살. 그것에 깃든 위력은 보통 무시무시한 게 아니다.
“정령의 사수.”
제라드의 시선이 저 아래 숲으로 향했다.
사아아.
숲이 우는 소리.
엘프들의 목소리가 메아리치며 울리고 있었다. 제라드의 눈에서 푸른 안광이 흘러나오기 시작하였고, 머잖아 저 숲 아래에 수많은 엘프들의 기척이 손에 잡힐 것처럼 포착되었다.
‘수십······ 아니 수백이 넘는다. 엘프가 이렇게 많다니······.’
제라드가 눈살을 찌푸리는 사이, 숲 저편에서 또다시 빛이 번쩍하였다.
쐐애애액!
정령의 정수를 한데 모은 빛의 화살이 또다시 제라드가 있는 곳을 향해 날아들었다.
한두 발이 아니다.
꼬리에 꼬리를 물 듯, 화살 세례가 이어지고 있었다.
제라드는 바람을 타고 미끄러지듯이 공격들을 피하였다.
쐐액!
바로 옆을 아슬아슬하게 스치는 빛의 화살.
빠르게 그 지역을 벗어나도 상황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온갖 곳에 엘프들이 다 포진해있었다.
“하늘봉우리에 오르지 못하게 하겠다는 건가. 하지만 그렇게 되진 않을 거다.”
연신 날아드는 공격을 피해서 마침내 구름을 뚫고 세계수가 보이는 영역에 다다랐을 때, 쏟아지던 공격은 잦아들기 시작하였고, 제라드의 눈은 찢어질 것처럼 크게 뜨였다.
“세계수 안에서 생명력. 생명력이 느껴진다. 어떻게······.”
제라드가 그렇게 중얼거리다가 하늘로 고개를 들었다.
하늘의 문과 아스트랄 라인······.
“설마, 세계수가 그때로 돌아가고 있다는 건가?”
온갖 생명의 힘을 머금고 있었던 찬란했던 제2시대의 세계수. 그때의 모습으로 말이다.
‘접촉해서 확인해보는 수밖에 없겠어.’
제라드가 그렇게 생각하며 세계수를 향해 다가갈 때였다.
쉬악!
허공을 가르며 쏟아지는 칼바람이 제라드의 앞머리를 스쳤다. 거의 반사적으로 몸을 튕기며 뒤로 물러난 제라드였지만, 공격이 얼마나 빨랐는지, 몇 올의 머리칼이 잘려서 흩날렸다.
그러나 공격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물 흐르듯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제라드의 목, 가슴, 배를 노리면서 말이다.
한 호흡을 내뱉는 그 찰나 간에 거의 세 번의 공격이 동시에 밀려들자, 제라드는 배리어를 만들며 공격에 방비했다.
그러나.
쩡!
강력한 배리어가 바로 찢겼고, 허점은 드러났다.
물결치듯 솟구친 칼이 단숨에 제라드의 목을 노려왔다.
그 순간, 제라드의 신형이 흔들대다가 쭉 늘어지며 뒤로 물러났다. 섀도우 마법으로 피한 것이다. 계속 이어지던 공격은 끊겼고, 제라드는 목 언저리를 쓰다듬었다.
‘강하고 빨라.’
간담이 다 서늘했다. 만약 섀도우 마법을 제때 펼치지 않았더라면 이미 목이 달아났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제라드는 조금 전 공격해온 상대를 눈에 담았다.
역시 엘프였다.
다만.
‘조금 전까지 상대해왔던 엘프와는 또 다르다.’
반짝거리는 은발을 길게 늘어뜨린 엘프는 마른 듯한 모습이었지만, 탄력적인 근육으로 가득하였다. 그는 메마른 눈으로 제라드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 눈동자엔 오직 살기와 적의뿐이었다.
‘엘프가 이렇게까지 강해질 수가 있는 건가?’
바로 그때였다.
[대상 세계수 접촉자. 아스트랄 드라이브 사용 중으로 확인됨.]
잠잠했던 베리타스가 별안간 그렇게 말을 걸어왔다.
‘아스트랄 드라이브?’
제라드가 그런 의문을 토한 순간, 머리로 어떤 정보가 물밀 듯이 들어오는 게 느껴졌다.
-아스트랄 드라이브. 아스트랄 드라이브의 방대한 정보량에 접촉하여 세계의 에너지를 사용하는 능력. 아스트랄 라인이 한창 활성화되어 있던 2시대의 마법 유산.
베리타스의 정보였다.
제라드와 베리타스의 연결이 전에 없이 긴밀해지면서 이제 책이라는 어떤 정보의 형태가 아니라, 지식 그 자체를 바로 열람할 수 있게 된 것 같았다.
바로 그때, 눈앞의 은발의 엘프가 숨을 깊이 들이마시는 게 보였다. 그것만으로도 마나가 엘프의 몸 주변으로 모여들면서 요동치는 게 느껴졌다.
“너희 인간은 성역에 들어올 자격이 없다.”
쉬악!
엘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의 주변에서 요동치던 기운이 칼날이 되어 제라드를 향해 날아들었다.
쩌엉!
그 바람의 칼날은 제라드에게 닿기 직전에 허공에서 찢기며 흩어졌다. 하지만 저 앞에 있던 엘프의 모습은 이미 찾아볼 수 없었으니.
‘섀도우랑 비슷한 기술인가. 아니, 이건 그것보다는 한 차원 더 높은 공간 마법 쪽에 더 가깝다.’
제라드는 감각의 영역에 집중했다.
그 순간, 이 주변의 모든 감각이 손에 잡힐 듯 포착되었다.
제라드는 바로 몸을 튕기며 주먹을 내뻗었다. 라이트닝 블로우가 거의 찰나 만에 펼쳐졌다.
꽝!
우렁찬 굉음과 함께 조금 전까지 아무것도 없던 곳에서 엘프의 흩날리는 은발이 나타났다.
파즈즈즈즈!
오러와 마법의 팽팽한 힘겨루기가 한창 이어지다가 두 사람이 거의 동시에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두 사람의 모습이 흐릿하게 흩어지는 듯하다가 이내 충격파가 연이어 일어났다.
쾅! 콰쾅!
‘쯧. 무기가 없어서 그런지 공격을 더 읽기가 어렵다. 공수의 변환이 자유자재인 데다가 일정한 틀이 없어.’
날아드는 공격은 빠를 뿐만 아니라 묵직하다. 고작 한두 번의 충돌인 것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그 두 배를 훨씬 뛰어넘는 수가 오간 상황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지이잉.
엘프의 정수리 위에 드리운 빛이 선명해지는 게 감지되었다. 그리고 그 빛이 하늘 위에 닿아있다는 것도. 아스트랄 드라이브를 더 강화한 것 같았다.
온다.
제라드가 그렇게 생각했을 때.
팟!
“큭!”
무음의 영역에서 날아드는 칼날을 피한 제라드. 하지만 완벽하게 피할 수는 없었다. 망토가 찢어졌고, 팔뚝에서 핏물이 주륵 흘러내렸다. 화끈한 통증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더 빨라졌다. 이젠 저 움직임에 반응 속도로 따라갈 수 없어. 내 감각의 영역을 벗어나고 있다. 수를 아끼면서 싸울 때가 아니야.’
제라드는 눈을 번쩍 떴다.
그 순간, 제라드의 몸에서 흘러나온 마나가 일제히 어떤 형상을 이루며 빛의 형태를 이루었다. 그것은 등 뒤에서부터 희뿌옇게 나타나기 시작하여 이내 커다란 거인의 형상이 되었다.
쿠르르릉!
벼락이 우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고, 하늘에 별안간 먹구름이 드리웠다.
그것은 흡사 신의 형상과도 같았다. 거대한 몸에 찬란한 갑주를 두른 그 존재는 한 손에는 벼락을 쥐고 있었다.
아바타.
자신의 내면에 새겨진 것들을 의지로 불러내 마법으로 승화하는 마법. 이 마법은 자신과 세계를 완전히 소통시켜 마나의 합을 이루는 과정의 너머의 영역이다.
정신, 의지, 마나.
세 개를 합치하여 자신의 세계를 구현시키는 과정이라고 해도 좋다. 지금 제라드의 내부에서 현현한 이 빛의 거신이야말로 제라드의 정수였다.
팟.
그 순간, 제라드의 뒤편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은발의 엘프. 그 손끝에 맺힌 푸른빛은 흡사 저 하늘의 빛과도 같았다. 미처 방비하지 못한 제라드는 그대로 몸이 꿰뚫릴 듯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없었다.
쾅!
빛의 거신이 벼락을 땅에 꽂아 벽을 세워 엘프의 일격을 막았다. 엘프는 눈을 크게 뜨고서 빛의 거신을 눈에 담았고, 제라드가 고개를 돌렸다.
“뒤를 잡을 줄 알았다.”
그 순간, 벼락의 화신은 다른 한 손으로 뇌전 줄기를 움켜잡았다.
꽈르르릉!
하늘의 진노가 지상에 내리쳤다.
< 부흥4 > 끝
ⓒ 양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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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흥5 >
10
파지지직.
대지에 뇌전의 기운이 만연했다.
몰아친 낙뢰.
그곳에 새겨진 커다란 크레이터는 뇌신의 분노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감히 짐작게 하였다.
그러나 그 크레이터 어디에도 엘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바타에 휘감긴 제라드의 시선은 주변을 훑었다.
‘피한 건가. 아니, 피할 수 있는 공격이 아니었다.’
조금 전의 벼락은 일차원적인 공격이 아니었다.
3시대의 마법으로는 공간을 접는 그 움직임을 관통하는 게 불가능하다.
그러나 지금 제라드가 구현한 아바타는 3시대의 마법으로는 절대로 만들어낼 수 없는 기적. 세계를 관통하는 낙뢰는 공간을 접는다는 임기응변으로는 피하는 게 불가능하다.
제라드의 시선이 한 곳에 꽂혔다.
20미터 정도 떨어진 곳. 세계수를 등진 방향에 물러난 엘프의 모습이 보였다. 조금 전 지상에 내리친 벼락을 피하지 못했다는 것을 증명하듯, 한쪽 팔은 새까맣게 타버렸고 반신은 갈기갈기 찢겨 나간 흉측한 모습이었다.
더 말할 것도 없는 중상. 하지만 이내 그 비정상적인 회복이 눈에 들어왔다. 까맣게 타버린 오른팔의 껍질이 바스라지며 흩날렸고, 그 안에서 새살이 돋아났다. 벼락 줄기에 갈기갈기 찢긴 반신도 빠른 속도로 아물고 있었다.
제라드의 시선이 엘프의 너머, 세계수에 꽂혔다.
‘세계수에 깃든 생명력의 힘이 엘프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거겠지. 그리고 그 원인은 하늘의 문일 테고.’
“크으으.”
엘프가 낮은 신음을 토하였다. 상처는 완전히 수복되었다. 저건 상처 때문에 흘리는 신음이 아니다.
쩌저적.
엘프의 온몸에 균열이 생겼다. 평범한 상처가 아니었다. 존재 자체의 붕괴를 알리는 신호탄이라고 해도 좋았다.
제라드의 눈이 가늘게 변했다.
엘프의 머리 위 정수리에서 흘러나오는 빛은 더욱 커지고 있었다. 아스트랄 드라이브를 한 단계 더 끌어올리는 게 틀림없었다. 그것이 자신의 파멸에 한 발자국 더 다가가는 것이라고 해도 말이다.
고통에 일그러진 엘프의 눈은 살기로 번들거렸다.
“나는 이 성역의 수호자다. 그리고 너희 종족은 이 영역에 들어올 자격이 없다. 앞으로 영원히 말이다!”
쩌저적!
균열은 더욱 커지며 벌어졌고 그 안에서 빛이 요동치며 흘러나왔다.
고오오오.
제라드는 오싹 등줄기로 소름이 내달리는 것을 느꼈다. 바로 그 순간, 엘프의 모습이 사라졌다. 고작 눈을 한 번 깜빡일 정도의 찰나다.
그리고.
콰앙!
“큭!”
제라드가 신음을 흘리며 옆으로 고꾸라지며 밀려났다. 아바타를 통해 후려친 벼락의 검으로 공격을 튕겨냈지만, 조금 전의 공격을 완전히 상쇄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제라드가 바로 몸을 튕기면서 자세를 다잡았다.
‘어디냐.’
엘프의 위치를 포착하기 위해 감각을 곤두세웠다.
그러나 엘프의 위치를 정확히 포착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처럼 여겨졌다. 공간의 저편을 오가는 움직임은 이미 그전부터 제라드의 감각을 벗어나 있었다.
쾅!
또다시 좌측에서 날아드는 바람 칼날을 또다시 아슬아슬하게 막는 제라드.
드드드.
‘이런 식이라면 벼락의 검이 먼저 깨지겠어.’
제라드의 이마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성역의 수호자. 자신을 그렇게 밝힌 엘프의 공격력은 지금까지 상대했을 때보다 더 강해져 있었다. 아스트랄 드라이브를 한계 너머까지 활성화한 엘프의 공격은 아바타의 힘과 거의 동등한 수준이었으니, 만약 지금과 같은 수준에서 공격을 더 받아낸다면 벼락의 검이 부서지고 말 터였다.
‘검이 아니라, 방패로 받아내야 한다.’
제라드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벼락을 쥔 아바타의 왼팔에 별안간 강철의 방패가 드리웠다. 찬란한 빛을 드리우는 방패가 제라드의 몸을 감싸 안았을 때였다.
스팟.
별안간 좌측의 허공이 이지러지더니, 그곳에서 불쑥 엘프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리고 두 손에 깃든 찬란한 푸른빛이 요동치며 방패 위로 떨어졌다.
콰아앙!
엘프보다 세 배는 더 큰 거신이 그 공격에 짓눌리며 방패째로 땅이 쿵 짓눌렸다. 그 파괴력이 얼마나 무시무시했는지 제라드는 한순간 숨이 턱 막힐 지경이었다.
그러나 공격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콰콰쾅!
“성역에서 사라져라!”
엘프는 증오가 가득한 목소리를 토하며 공격을 계속 쏟아냈고, 제라드의 얼굴은 점점 일그러졌다. 쏟아지는 일격에 깃든 파괴력이 너무나도 강했다.
‘이렇게나 강하다니······.’
쩌저적.
거신의 방패에 균열이 생겼다. 만약 방패가 깨진다면 그땐 저 무지막지한 공격을 막을 방법은 없다.
제라드는 땅을 쾅 내리쳤다.
콰드드드!
주변의 대지가 요동치다가 이내 송곳니처럼 불쑥 치솟으며 엘프의 몸으로 쇄도했다. 그러나 엘프의 몸에서 분분히 일어나는 칼날은 날아드는 공격을 단번에 짓이겨버렸다.
[아스트랄 드라이브 사용자에게는 일반적인 마법은 통하지 않음. 아스트랄 웨이브는 모든 통상 에너지 차단함.]
베리타스가 그렇게 정보를 전달해왔다. 하지만 제라드도 그걸 모르는 게 아니었다. 눈앞의 엘프와 조금만 상대해보면 바로 알 수 있었다.
그럼에도 그런 수를 사용했던 것은 그만큼 제라드가 수세에 몰려 있었다는 것이었고, 당장 더는 수가 없었다는 얘기다.
그리고.
콰아앙!
직경 6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바람의 참격이 날아들었다.
이윽고 소음이 사그라졌다.
11
위이이잉.
숨이 턱 막히는 감각.
머리가 멍해졌고, 의식이 한순간 먼 곳으로 날아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감각 속에서 제라드는 자신의 거친 숨소리가 마치 천둥벼락 소리처럼 들린다고 생각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지.’
바로 그 순간, 조금 전까지의 전투가 머리를 스쳤다.
성역의 수호자.
아스트랄 드라이브.
······.
‘내 방패로는 막을 수 없었다.’
날아드는 공격은 아바타가 휘두르는 벼락의 검격과 거의 동일한 수준의 파괴력이었고, 마지막 일격은 뇌신의 분노나 스톰 블레이드와도 비슷할 지경이었다.
제라드의 방패는 붕괴되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은 어쩌면 죽음 직전에 보게 된다는 그 찰나의 순간일는지도 모른다.
바로 그때였다.
제라드의 눈앞으로 베리타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붉은빛을 머금은 눈동자는 제라드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베리타스.’
제라드는 베리타스를 보았다. 베리타스도 제라드를 가만히 보고 있었다. 말은 없었다. 들려오는 목소리도 없었다. 하지만 제라드는 지금 베리타스가 자신에게 말을 걸어오고 있음을 알았다.
-끝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렇게 묻는 듯한 눈동자.
‘할 수 있는 건 전부 다 했어.’
제라드는 그렇게 대답했다.
아스트랄 드라이브. 세계와 동기화하는 저 강력한 힘은 이 세계 전체의 모든 에너지를 빌리는 것과 같다.
제라드가 세계의 문을 열고 그 안에 깃든 지식을 이용하여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였다고 해도 그 차이는 클 수밖에 없었다. 한계는 처음부터 명확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누가 그렇게 정했지?
제라드가 베리타스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바로 그 순간, 베리타스의 모습이 빛에 감기더니 다른 모습으로 변하였다.
그것은 문이었다. 새하얀 문. 그 문에는 온갖 기묘한 언어가 음각으로 새겨져 있었다.
제라드는 저도 모르게 그 문 앞에 서서 그 음각에 손을 얹었다. 그것은 일반적인 언어가 아니었다. 이 세계에 통용되는 가장 근원적인 기록의 방식이자, 모든 언어의 뿌리 그 자체다.
세계어.
제라드는 그 언어를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게 가능한 이유는 제라드는 이미 문을 열었기 때문이다.
그 순간, 제라드의 머릿속에 벼락이 쳤다.
그렇다.
제라드는 문을 열었다. 이미 이 세계의 근원에서 소용돌이치는 기록을 받아들였다. 그것이 세계의 의지를 수용하는 방식인가, 그렇지 않으면 그것을 손에 쥐는가의 차이다.
즉, 아스트랄 드라이브는 이미 제라드의 내부에도 있었다!
-그래, 정답이다.
바로 그 순간, 제라드의 손끝에 빛이 소용돌이치면서 열쇠가 나타났다. 그러자 새하얀 문의 중심에 열쇠 구멍이 나타났다.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은 하나다. 열쇠로 눈앞의 문을 여는 것.
철컥.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문고리가 돌아갔다. 새하얀 문이 열렸다. 그 안에서 빛이 소용돌이치며 흘러나왔다.
‘그렇구나.’
제라드는 그 빛에 휘감기며 그렇게 되뇌었다.
세계와 나.
전체와 하나.
그것은 다름이 아니다.
전체 안에 하나가 있고, 세계 안에 ‘나’가 있다.
하나가 전체가 되는 것처럼 ‘나’가 곧 세계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눈앞의 적은 강하다.
당연하다.
그는 자신의 안에서 힘을 찾는 게 아니라, 세계의 의지에 자신을 내맡겼다. 그 안에 소용돌이치는 정보의 집약은 접촉자의 의지에 반응한다. 나를 세계의 흐름에 내맡겼으니 강한 건 당연하다.
그렇다면 그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제라드가 구축한 세계 안에서 답을 찾으려고 해서는 안 됐다. 적어도 동일 선상, 혹은 그 이상의 영역으로 나아가야만 한다.
“베리타스, 방패다. 지금 내게 필요한 건 가장 강력한 방패야.”
그 순간, 빛이 이 주변의 모든 것을 감싸 안았다.
12
꽈아아앙!
성역의 대지는 금방이라도 붕괴할 것처럼 뒤흔들렸다.
대지 위에 새겨진 상처는 흉흉하였다.
완전한 파괴의 그림자가 지금 이 땅에 드리워 있었다.
“끄으으으.”
싸움이 끝났다고 생각한 수호자는 서서히 아스트랄 드라이브의 단계를 낮추었다. 몸에 생겨난 균열이 닫히면서 빛이 약해졌고, 눈동자에서 흘러나오던 빛도 약해졌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오싹.
대지의 상흔.
온 힘을 다해서 쏟아낸 바람의 칼날이 쏟아진 대지의 저편. 그곳에서 있을 수 없는 감각이 그에게 경고를 해오고 있었다.
흙먼지.
그 저편에서 한 존재가 저벅저벅 걸어나왔다. 그 존재의 등뒤로는 빛의 거신이 드리워 있었으니, 찬란한 방패를 앞세운 모습이었다.
그런데 그 방패의 모습이 기묘했다. 원형 방패에는 알 수 없는 문자들이 음각으로 가득 새겨져 있었고, 그 가운데에는 커다란 눈동자가 있었다.
“엘사리우스?”
수호자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럴 리가 없다······.”
그것은 이 세계가 만들어진 이래, 모든 유사 종족이 뜻을 한데로 모아 만든 가장 완벽한 방패였다. 하지만 그것은 사라졌다. 이 세계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거짓된 세계의 선지자여······. 얼마나 더 세계를 우롱해야겠느냐.”
쩌저적!
다시금 엘프의 몸에 균열이 벌어지면서 눈동자에서 흘러나오는 빛이 강해졌다. 그리고.
팟!
또다시 수호자가 공간의 저편을 향해 내달렸다.
상황은 달라진 게 없다.
제라드는 여전히 수호자의 움직임을 읽지 못했다.
그러나.
콰콰콰콰쾅!
쏟아지듯이 전방위에서 날아드는 바람칼의 공격은 제라드에게 아무런 해도 끼치지 못했다.
제라드의 방패가 날아드는 모든 공격을 막아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제라드의 의지와는 무관했다.
제라드의 힘으로 불가능하다면 세계의 기록. 그곳에 존재하는 가장 위대한 방패를 이 자리에 제라드의 의지로 불러낼 수밖에.
“아스트랄 드라이브 인 엘사리우스.”
속도, 파괴력. 그런 것은 모든 것을 막아내는 이 방패 앞에서 의미를 잃는다. 그 수준의 개념에서 뚫을 수 있는 무장이 아니기 때문이다.
몰아치는 공격 속에서 제라드의 아바타가 벼락의 검을 들어 올렸다.
콰르릉!
하늘이 요란하게 울었다.
먹구름이 모여들었고, 이내 빙글빙글 맴돌았다.
쿠르릉.
이윽고 하늘에 모여든 구름의 소용돌이가 정점에 달한 그 순간, 그 가운데에서 낙뢰가 떨어졌다. 그것은 이내 벼락의 검에 꽂혔고, 충만한 뇌전에 휘감긴 검이 이 일대에 강력한 뇌전장을 일으켰다.
파지지직!
수호자의 움직임을 포착하는 게 불가능하다면 방법은 하나다.
“한꺼번에 날려버린다.”
제라드는 충만한 뇌전으로 요동치는 벼락의 검을 바닥에 내리꽂았다.
라이트닝 볼텍스.
소용돌이치는 뇌전이 성역 깊숙한 곳에 파고들었고, 균열에서부터 시작된 뇌전은 사방으로 줄기줄기 솟구쳤다.
피할 곳은 없었다. 그것은 이 일대의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파괴, 그 자체였으니까.
이내 세상의 모든 소리가 사라졌다. 비로소 이 치열했던 싸움이 끝을 고한 것이다.
< 부흥5 > 끝
ⓒ 양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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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흥6 >
13
무음.
소리가 사라지는 영역.
제라드는 이 고요한 세계가 도래하는 순간을 잘 안다.
아주 오래전 케이틀란이 보여주었던 뇌전.
제라드의 심상에 새겨진 궁극적인 파괴의 이미지는 바로 거기에 있었다. 무음의 세계란 모든 것이 사라지고, 모든 상황이 끝나는 순간이다.
제라드가 구축한 자신의 세계. 거신 아바타는 서서히 허공에 녹아들 듯이 모습을 감추었고, 제라드는 이내 신음을 토하며 땅에 털썩 주저앉았다.
전신 구석구석에 경련이 일었다. 전신에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
엘사리우스.
2시대의 초기. 모든 종족의 지식을 한데로 집약하여 평화와 균형의 염원을 담아 만들었던 방패. 드워프가 주조하고 엘프의 입김이 불어넣었으며, 인간의 의지가 깃든 그 방패에 깃든 개념의 이름은 ‘세계를 지키는 자’라고 불렸다.
제라드는 아스트랄 드라이브에 접촉, 기록에 남은 엘사리우스를 재현한 것이다.
무한하다고 해도 좋을 세계의 기록에 접촉한 순간이다. 제아무리 제라드라고 해도 리스크를 피할 수는 없었다.
제라드는 자신의 몸 안을 보았다.
몸 구석구석에 빛이 일렁이는 균열이 일어났음이 보였다.
‘아스트랄 드라이브에 접촉한 존재가 감당해야 할 리스크라는 건가······.’
제라드는 이를 악물고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아스트랄 드라이브와의 접촉을 모두 끊고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온몸에서 흘러나오던 빛은 완전히 사라졌고, 균열은 완전히 닫혔다.
제라드는 이마의 땀을 훔치며 자리에서 가까스로 일어났다. 그제야 저편에서 희미한 존재의 감각이 느껴졌다.
“아직도 살아 있는 건가······.”
제라드는 질렸다는 얼굴을 하고서 수호자의 존재감이 느껴지는 곳으로 걸어갔다. 엉망이 된 성역의 땅. 그곳에 하반신이 사라진 채로 엉금엉금 기고 있는 수호자의 모습이 보였다.
“종족의 부흥이······ 우리 종족이 부흥하는 길이 바로 눈앞에 있다······.”
수호자는 엉금엉금 바닥을 기면서 그 말만을 반복하고 있었지만, 이미 끝은 다가왔다. 그의 몸은 조금씩 파괴되어 바스러지며 자연의 품 저편으로 사라져가고 있었다.
“또, 똑같은 과오를······ 반복할 수는 없다······.”
무서울 정도의 집념이었다.
무엇이 그를 이렇게 만드는 것일까.
제라드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필사적으로 세계수를 향해 내뻗던 수호자의 손끝이 제라드의 발치에 닿았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제라드는 수호자와 접촉한 순간, 몸 안쪽으로 어떤 것이 쏟아져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머잖아 눈앞의 풍경이 바뀌기 시작하였다.
‘비문의 기록인가?’
제라드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제법 익숙한 광경이었다. 제2시대의 종막의 풍경.
그러나 지금까지 봤던 것과는 조금 다르다. 지금 이 순간, 제라드가 보는 광경은 제3자가 아니라, 한 존재의 시점으로 이 순간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건······ 비문의 기록이 아니야. 성역의 수호자. 그 엘프의 기억이다.’
쿠르르릉!
별안간 벼락이 쳤다.
“모두 들어라! 거짓된 선지자가 오고 있다. 그의 목적은 세계수다. 세계수가 파괴되면 우리 종족의 운명은 몰락한다. 아니, 그뿐만이 아니리라. 이 세계의 운명이 그 파괴자의 손에 끝이 나고 만다. 다시는 이 세계가 그러한 운명을 맞이해서는 안 된다. 가장 고귀한 종족이여, 오늘 우리는 성역을 지킨다!”
제라드의 입. 아니, 정확하게는 수호자의 입에서 그런 외침이 흘러나왔다. 그러자 이 주변의 수백 수천의 엘프가 이에 동조하여 우우우 울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꼭 휘파람 소리 같기도 했고, 숲이 바람에 흔들리며 울리는 소리처럼 들리기도 하였다.
“가자.”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엘프들의 머리 위에 빛이 드리우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아스트랄 라인의 빛이었다. 그곳의 엘프들 전원이 아스트랄 드라이브를 사용하고 있었다.
그들은 바람을 갈랐고 공간을 접었다가 펴며 그 시대 최고의 마법을 아낌없이 펼쳤다. 마법의 종족이라는 별명이 아깝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런 그들의 필사적인 결의도 그 존재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거짓된 선지자는 마법을 파괴하였고, 간단히 공격을 막았다. 피 칠갑 속에서 걸어오는 그는 도저히 대적할 자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손을 휘저으면 엘프 여럿이 허무하게 쓰러졌고, 다른 손을 휘저으면 벼락이 휘몰아쳤다. 걸음마다 땅이 진동했고, 뛰기 시작하면 폭풍이 몰아쳤다.
그 존재 자체가 이미 마법이라고 해도 좋을 지경이었다.
“흐아아악!”
비명을 내지르며 나가떨어지는 동족들의 모습을 보면서 수호자 역시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하였다.
지켜야 한다. 이 목숨을 내던져서라도 세계수만큼은 반드시······. 오직 그 일념 하나로 말이다.
그러나.
“헉헉.”
무용지물.
마법의 종족. 최초로부터 이어진 씨앗에서 태어난 뿌리. 그런 수많은 이름도 지금 이 순간에는 무의미하였다. 왜냐하면, 전혀 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째서냐······. 너는 어째서 세계수를 파괴하려고 하느냐.”
“어차피 서로 이해하지 못한다. 그 질문은 잘못됐어.”
“대답해라! 세계수는 이 세계의 중심이다. 이 세계의 모든 것이라고 해도 좋다. 너희 인간도 우리 엘프도······ 모두 예외는 아니다. 그런데 어째서 섭리를 거스르지? 만물의 어머니를 해하려고 하는 것이 정상이란 말이냐!”
수호자는 피범벅이 된 채로 고함을 내지르며 눈앞의 재앙을 눈에 담았다. 이 세계를 끝내고자 하는 존재를 말이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그 사내의 얼굴이 낯이 많이 익었다.
그 사내가 말했다.
“그 만물의 어머니가 이 세계를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어가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생각해본 적은 없는 모양이지.”
“하찮은 너희 종족이 감히 뭘 안다고······.”
수호자는 몸을 폈다. 온몸의 균열을 억누르는 것만으로도 모든 힘을 다 쓰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힘겨운 걸음을 떼서 그의 앞을 막는다.
“······너는 나를 막을 수 없다. 그건 너뿐만이 아니야. 이 세상의 모든 존재가 똑같다. 나는 이미 모든 열쇠를 모았어. 이곳이 마지막이다.”
“네놈은······ 세계의 적이다.”
“알고 있다.”
사내는 흔들림 없는 얼굴로 그렇게 대답했다.
그 순간, 바람이 불어닥쳤다. 수호자는 저항하지 못하고 붕 떠올라서 바닥에 곤두박질쳤다.
안 돼······. 안 돼. 안 돼!
수호자는 더는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 상황에서도 그렇게 끊임없이 소리쳤다. 하지만 덧없이 흩어지는 그 소리만으로는 멀어져가는 파괴자의 발목을 잡을 수 없었다.
수호자는 절망 속에서 모든 것이 사라지는 것을 목도했다. 세계수가 빛을 잃는 것을 보았고, 몸 안에 충만했던 것들이 사멸하는 것이 느껴졌다. 하늘에서 태양보다 더 찬란하게 빛났던 문이 닫혔다.
모든 것이 끝났다. 죽음보다 더 비참한 최후가 도래한 것이다. 하지만 사멸하는 세계수의 힘은 그들의 자손이 그냥 사라지도록 두지 않았다. 그들의 몸과 육신을 붕괴한 대지의 깊숙한 곳에 안치하였다.
세계수의 뿌리가 그들의 몸을 감싸 안았다. 그렇게 비참함과 절망감에 휩싸인 채로 수호자는 잠들었다.
길고 긴 잠이었다.
시간이 멈춘 곳에서 영원을 꿈꾸며······.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수호자는 다시 눈을 떴다. 멈췄던 심장이 다시 뛰고 있었다. 아니, 그건 아무래도 좋았다. 세계수가, 세계수가 살아 있다는 게 느껴졌다.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연약하였지만, 여전히 그곳에 남아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닫혔던 하늘의 문은 다시 열려 있었다.
긴 시간이 흘렀다는 것은 자연스럽게 알 수 있었다.
“마지막 기회가 주어졌다는 것인가?”
알타자르 산맥.
이전 시대의 유산 속에서 그들은 깨어났다. 동족들이 수백. 그들은 하나같이 종족의 부흥을 염원하며 세계수를 향해 오르기 시작하였다.
14
수호자의 기억이 끝났다.
제라드는 다시 주변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붕괴한 땅과 죽은 세계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휘이잉.
황량한 바람이 불었다.
바닥에 쓰러져 있는 수호자의 육신은 이제 거의 흔적도 남지 않았다. 사멸 직전에 다다라서 그의 기억이 모두 끝난 것이다.
“그렇게 된 거였군.”
제2시대의 종막과 함께 알타자르 산맥 깊숙한 곳에 잠들었던 엘프들. 그들은 하늘의 문이 열리고 세계수가 깨어나면서 일어나게 된 것이다.
“하늘의 문이 세계수를 되살리고 있다. 모든 것들을 되돌리고 있어.”
제라드는 세계수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조금 전의 기억 속에서 들었던 모든 이야기들이 제라드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열쇠.
파괴자라고 불렸던 그 존재는 분명히 모든 열쇠를 모았다고 하였다.
‘그 말인즉슨 하늘의 문을 닫는 데에는 복수의 열쇠가 필요하다는 얘기야. 열쇠라는 건 대체 뭘 의미하는 거지? 지금의 세계가 이전으로 되돌아가고 있다고 한다면 열쇠도 존재할 텐데.’
그러는 사이 제라드는 코앞에 세계수를 두었다.
이곳에 선 것은 오늘로 두 번째. 하지만 제라드는 난생처음으로 세계수 앞에 선 것 같았다.
‘그전과는 뭔가가 달라. 이 안에서 소용돌이치는 강력한 생명력이 느껴진다. 그게 조금씩이지만, 강해지고 있다는 것도 말이야.’
“그렇다면 또다시 세계수가 열쇠가 되는 것인가?”
제라드는 그렇게 중얼거리다가 무심코 케이틀란에게 들었던 그 꿈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여덟 개의 빛의 탑과 그 안에서 치솟는 빛의 기둥.
“설마, 그 빛의 탑은 열쇠를 말하는 거였나?”
여덟 개의 탑이라는 걸 들었을 때는 무조건 마탑을 상징하는 의미로만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상황을 보자면 어쩌면 그게 아닐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감이지만, 세계수는 그 여덟 개 중 하나가 아닐 거예요. 적어도 지금의 시대에는 말이죠.”
제라드는 고개를 돌렸다. 세계수에 다가갈 때부터 저편에서 이곳으로 천천히 걸어오는 한 엘프의 존재감을 느꼈기에 그리 놀라진 않았다.
“아나트리에.”
“오랜만에 뵙는군요, 제라드.”
“예, 오랜만에 뵙네요. 하지만 해후를 나룰 분위기가 아닌 것 같군요.”
제라드와 아나트리에는 성역의 끝자락에 섰다.
“여기까지가 세계수의 영역. 즉, 성역이에요. 하늘의 문이 열리고 세계수에 다시 생명력이 깃들기 시작한 이후로, 이곳은 오직 수호자들만이 들어올 수 있지요. 나머지 동족들은 세계수의 힘을 견디지 못해요. 저조차도 처음에는 견디는 것만으로도 고작이었어요. 물론, 시간이 지나면서 많은 게 달라졌지만 말이에요.”
아나트리에의 말대로였다.
제라드는 그녀의 내부에서 성역의 수호자와 비슷한 힘이 소용돌이친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당신도 세계수와 접촉했군요. 아스트랄 드라이브의 접촉자가 된 거예요. 내 말이 맞습니까?”
“네, 맞아요. 이전 시대의 선조······. 진정한 수호자님께서 제게 그 길을 인도해주셨지요.”
진정한 수호자.
그녀가 부르는 그 존재는 바로 조금 전 제라드의 손에 사멸한 그 엘프를 말하는 것이리라.
“저를 원망하십니까?”
“아뇨.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그거 이상하군요. 왜 그렇게 생각합니까?”
“하늘의 문이 열리고 너무 많은 게 바뀌고 있어요. 특히 우리 엘프의 변화는······ 당신들 인간의 변화와는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급격하고 빨라요. 저 자신의 변화가 그러한 것처럼 말이죠. 그건 종족의 부흥이라고 할 수도 있을 거예요. 하지만 그것과는 뭔가 다르다는 생각이 들어요. 우리의 의지와는 무관한 어떤 강력한 운명의 소용돌이. 그것에 휘말리고 있는 느낌이 들어요.”
“운명의 소용돌이라······.”
제라드는 그 말을 곱씹었다. 그는 엘프들이 느끼는 운명의 소용돌이라는 걸 알진 못했기에 그저 어렴풋이 짐작만 하였다.
엘프는 마법의 종족. 그들의 운명은 하늘의 문이 열려 있었을 때에 정점에 다다라 있었고, 하늘의 문이 닫힐 때 몰락하였다. 그러니 문의 개폐 여부가 그들의 운명을 크게 좌우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한 일이었다.
“아까 말했었지요. 세계수가 그 빛의 탑이 아닐 거라고 말입니다. 그 얘기인즉슨 그 꿈을 당신도 보았습니까?”
“그건 단순히 꿈이 아니에요. 세계의 경고입니다.”
“세계의 경고? 그게 무슨 의미죠? 이 세계에 명확한 의지가 있단 말입니까?”
그 물음에 아나트리에가 물끄러미 제라드를 바라보다가 베리타스가 있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미 알고 계실 텐데요.”
“보이는 거군요. 베리타스가.”
“예, 지금은요.”
아나트리에는 그리 놀라지 않은 듯한 모습이었다.
“베리타스가 세계의 의지······.”
“당신이라면 이미 알고 있었을 거예요. 저보다 더 많이 말이에요.”
“······.”
제라드는 입을 다물었다.
아나트리에는 지금 묻고 있는 게 아니었다.
확신을 담아서 말하고 있었다.
너는 이미 알고 있다고.
‘나는······.’
제라드는 베리타스를 보았다.
태어나서 지금에 이르기까지, 제라드는 단 한 번도 어떤 의지가 자신의 결정을 이끌어왔다고 생각지 않았다. 그의 운명은 오직 그 자신의 것이었다.
‘하지만 베리타스에게 적지 않은 도움을 받았다는 것도 사실이야. 그렇다면 내 운명이 곧 베리타스의 운명과도 같다는 얘기인가?’
제라드에게 베리타스의 존재가 너무 당연했다.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그렇기에 어떤 특별한 의미를 생각해보지 않았었다.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어요. 모든 것은 때가 되면 자연히 밝혀지게 될 일들이니까요. 다만, 도와드리기는 어렵겠군요. 저는 끊임없이 목소리를 듣습니다. 우리 종족은 그 굴레에서 벗어나기 어려워요.”
“그 목소리라는 건 명령 같은 겁니까?”
“그와 비슷해요. 지금 이 순간에도 당신에게 이유를 알 수 없는 적의가 자꾸 샘솟아요. 제 의지와는 무관하게요.”
“세계의 적······. 이 세계가 제가 무얼 하고자 하는지 알고 있다는 거군요.”
제라드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세계수의 앞으로 향했다.
한 가지.
수호자의 기억을 통해 2시대의 종막을 본 이후로, 줄곧 마음에 걸리는 게 한 가지 있었다.
제라드는 세계수에 손을 얹었다.
맥동하는 강렬한 생명력이 느껴진다.
“베리타스, 넌 제2시대가 어떻게 끝나는지 정확히 알고 있어. 그리고 세계의 적이 되어서까지 싸웠던 그 존재가 누구인지도 말이야.”
지금까지는 별로 궁금하지 않았다. 2시대가 어떻게 끝나게 되었는지, 앞뒤 사실만 확인하면 되는 일이었으니까.
그러나 지금은 얘기가 달라졌다.
제라드는 고개를 돌려 베리타스를 보았다.
“보여다오. 내가 보지 못한 진실을 말이야. 지금의 나는 준비가 되어 있다.”
베리타스는 그 말을 듣자마자 이내 펼쳐졌다.
책 안쪽에서 새하얀 빛이 쏟아져 나왔다.
그 순간, 제2시대의 끝. 세계수가 몰락하는 그 순간이 다시금 눈앞에 드리웠다. 그리고 시체의 산, 피의 강을 넘어서 저편에서 한 사람이 지친 걸음으로 세계수로 올라오는 모습이 보였다.
제라드는 그를 보았고.
그는 제라드를 보았다.
이 기록은 과거의 기록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그 머나먼 과거의 존재는 제라드를 똑바로 인지하고 있었다.
어째서 제라드는 지금껏 단 한 번도 궁금해하지 않았던 걸까. 2시대를 끝낸 종결자이자, 세계의 적이라고 불리며 모든 것과 맞서 싸웠던 존재.
성역의 수호자가 남긴 기억 속에 있는 그의 얼굴이 낯이 익었던 건 다른 이유가 아니다.
눈앞에 거울이라도 있는 것처럼 두 사람의 모습은 놀랍도록 닮아 있었다. 제라드가 마치, 두 명인 것처럼 말이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제라드가 물었다.
< 부흥6 > 끝
ⓒ 양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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