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울 때 채워지는 것1 >
1
제라드는 멈추지 않고 서쪽으로 향하였다.
평야가 나오고 험한 산세를 넘기도 하였다.
10일이 훌쩍 지나가는 동안, 카일은 제라드를 줄곧 지켜보았다. 그동안 몇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저분이 정말로 그 대단한 대마법사님인가?’
카일은 고개를 갸웃했다.
대마법사 제라드 란스터에 관한 소문은 아주 무성하였다. 젊은 나이에 세계 최고의 마법사가 된 그는 아주 오만한 마법사라는 얘기부터 황제의 권력을 등에 업은 권력자라는 얘기까지······.
‘그런데 지금까지 지켜본 바로는 어떤 이야기도 모두 해당하지 않는 듯한걸.’
그러고 보면 처음부터 그랬다.
제라드는 코르사 마을에서 봤을 때부터 전혀 대마법사로서의 위엄 같은 게 없어 보였다. 그냥 어디에나 있을 법한 여행객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지금까지 내가 봤던 대단한 마법사들은 전부 뭐라고 표현하기 어려운 특별한 분위기를 풍겼는데, 저분은 어쩐지 마법사라는 것조차도 잘 모르겠단 말이지.’
땔감을 열심히 구하는 카일은 바쁘게 움직이면서도 힐끗거리며 제라드를 살피기 바빴다.
타닥타닥.
야영 준비를 간단히 끝내고 타들어 가는 화톳불 앞에서 두 사람은 육포를 뜯었다.
“그래서 열흘 동안 진전은 좀 있나?”
“저, 그게······ 죄송합니다.”
“틀을 깨는 건 쉬운 일이 아니지.”
제라드는 대수롭지 않다는 얼굴로 말했지만, 카일은 속이 답답했다. 조급해지고 싶지 않았지만, 그게 마음처럼 쉽지가 않았다. 여전히 개념조차도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채워진 것들을 모두 비우는 게 선결이 되어야 할 거다. 너를 채운 모든 것이 방해될 거야.”
뜬구름을 잡는 듯한 말.
그 말을 곱씹으며 카일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제라드는 더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았다.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모든 것을 듣는다고 해도 알지 못한다.
‘쉽지 않겠지. 하지만 카일은 모든 것을 잃었기에 어쩌면 손쉽게 다다를 수 있을 거야.’
반면, 당장 마탑의 내로라하는 1급 마법사, 크라운급 마법사들을 데려와서 가르친다고 해도 이 마법을 배우는 데에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올라가는 과정이 아니라, 멀리 가는 과정이라는 걸 이해하기란 쉽지 않겠지. 더욱이 많은 것을 배운 마법사라면 더더욱 말이야.’
나이가 들고, 많은 것을 배운 마법사는 오히려 더욱 자기가 이룩한 것들의 법칙에 빠져서 더 큰 것을 보지 못하게 된다.
기존의 마법은 이를테면 높이 올라가는 것과 같다. 오르면 오를수록 더 많은 게 보인다.
그러나 지금 제라드가 카일에게 말하는 마법은 높이 오르는 게 아니라, 멀리 가는 것에 비유할 수 있었다. 있던 곳에서 벗어나 먼 곳에 다다르면 그곳에서 보이는 풍경은 또 다르다. 그 전혀 다른 개념을 이해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후우우.”
“카일, 그토록 쉽게 답을 낼 수 있었더라면 누구든 마법에 다다랐겠지. 안 그래?”
“······대마법사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건 처음부터 알고 시작했던 일인데, 계속 마음이 조급해집니다.”
“사람이라면 어쩔 수 없는 일이야.”
제라드는 그렇게 말하다가 별안간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의 시선이 하늘 저편, 시꺼먼 밤하늘 너머에 꽂혔다.
까악.
까마귀의 울음이 들려왔다.
뭐야, 까마귀였나, 하고 카일이 신경을 껐을 때였다.
“마나의 감지는 이전보다 훨씬 더 민감해졌을 거야.”
“예, 맞습니다. 그런데 그 마나를 어떻게 할 방법이 없습니다. 마치, 손발이 잘려나간 기분입니다. 통제할 수가 없어서 도무지······.”
“통제야 아니야. 감응과 조화가 시작이다. 그 안에 너를 새겨넣는 과정이라고 했을 텐데.”
“감응과 조화······.”
제라드의 말은 카일에게는 그저 뜬구름을 잡는 소리처럼만 들릴 따름이다.
“느껴봐.”
바로 그 순간이었다.
화르륵!
화톳불의 기세가 강해지면서 불꽃이 하늘 높이 솟구쳤다.
카일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법이다.
그런데 제라드는 마법의 발동 제스처도 취하지 않았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에게선 어떤 마나의 흐름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현상만이 존재할 뿐이다.
카일이 전율할 때였다.
“만물에는 마나의 흐름이 존재한다. 내 몸속에 있다고 해서 무작정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몸 밖에 있다고 해서 전혀 다룰 수 없는 것도 아니야.”
화아악!
제라드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화톳불에서 용솟음친 불꽃은 하늘 높이 날아오르더니, 단숨에 어둠을 꿰뚫고 시꺼먼 까마귀를 휘감았다. 그러자.
까아아악!
요란한 울음에 카일은 몸이 바싹 얼어붙는 걸 느꼈다.
“피어······?”
화톳불에서 시작된 불꽃은 까마귀를 휘감고 지상으로 떨어져내렸다.
까악! 까아악!
불꽃에 휘감긴 까마귀는 거칠게 바동거렸다.
그런데 그 까마귀의 모습이 몹시 기괴했다.
“모, 몬스터······.”
“그래, 하지만 이 까마귀는 몬스터로 변했다. 하지만 아스트랄 라인의 영향 때문만은 아닌 것 같군.”
카아아악!
흉흉한 안광을 토하며 날뛰는 까마귀의 몸이 이내 부풀어 오르기 시작하였다. 그러더니, 이내 시꺼먼 깃털 사이에서 비늘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모든 변화가 이윽고 끝났을 땐, 까마귀의 형상은 온데간데없는 기괴한 모습이다. 파충류의 그것처럼 긴 꼬리와 깃털 사이엔 박쥐 날개와 같은 피막이 존재했다.
“이, 이건 꼭 드래곤처럼······.”
캬아아아!
까마귀인지 드래곤인지 알 수 없는 그것은 입을 쩍 벌리더니 피어를 다시금 터뜨렸다. 또다시 움찔하는 카일. 하지만 제라드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화르르륵!
불꽃은 이윽고 까마귀를 완전히 집어삼켰다. 녀석은 날뛰면서 저항했지만, 무의미했다. 화염의 열기는 녀석의 몸에 서서히 스며들어 완전히 불태웠다.
제라드는 이글거리는 불꽃을 지켜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심상치 않군.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지?”
제라드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서쪽의 땅.
베너하임 공국의 땅이 얼마 남지 않은 지금, 제라드는 불안을 느꼈다. 10년 전, 모든 것이 끝나고 시작되었던 땅. 그곳에서 어떤 싹이 발아한 듯했다.
2
산세는 점차 험하게 변해갔다.
“어, 언제까지 이런 길로 가실 생각이십니까?”
카일이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
그러나 대답은 없었다.
카일은 속이 몹시 답답하였지만, 입을 다물고 그 뒤를 따랐다. 산의 밤은 금세 찾아온다. 어둠이 사방에 자욱해지면 그때부터는 야영 준비였다.
산에서만 벌써 사흘째였다.
‘또 해가 지겠어.’
카일이 곧 야영준비를 해야겠노라고 생각할 때였다.
“악!”
외마디의 짧은 비명이 멀리서 들려왔다.
카일이 깜짝 놀라서 고개를 돌렸고, 그 순간 돌풍이 휘몰아쳤다.
“대마법사님도 들으셨습니까?”
카일이 그렇게 물었다. 그런데 바로 코앞에 있었던 제라드의 모습이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대마법사님!”
카일이 깜짝 놀란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제라드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어디 계십니까!”
곧 해가 진다.
밤이 깊으면 산에서 돌아다니는 것처럼 어리석은 짓은 없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정신이 팔린 나머지 제라드를 놓친 모양이었다.
‘내가 잘못 들은 건가?’
카일이 눈살을 찌푸릴 때였다.
“도와주세요······ 누가 좀 도와주세요.”
또다시 그런 외침이 들려왔다.
“착각이 아니야. 이럇!”
카일은 말에 올라서 비명이 들린 곳을 향해 달렸다.
어둠이 드리우기 시작한 산은 이제 한 치 앞도 살피기 어려웠다. 한 번 잘못 발을 디디면 말이 고꾸라지는 것도 한순간이었다. 하지만 카일은 거침이 없었다.
“도와주세요······.”
비명은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었다.
“기다려! 금방 갈 테니까!”
카일은 크게 소리쳤다.
그렇게 얼마나 나아갔을까. 머잖아 울음이 섞인 목소리가 커다란 나무 근처에서 들린다는 것을 알았다.
“워!”
히히힝!
말을 멈춰 세운 카일은 커다란 고목 뒤쪽에 쓰러져 있는 한 소녀를 보았다. 십 대 초반에서 중반이나 되었을 법한 아이는 몹시 지저분한 모습으로 눈물범벅에 겁에 질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도와주세요. 도와주세요······.”
“괜찮아. 이제 괜찮으니까, 가만히 있는 거야. 알았지?”
아무래도 세월이 지나면서 흙이 휩쓸리면서 드러난 굵은 뿌리 따위에 다리가 엉킨 모양이었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도 않고, 그렇다 보니 당황한 것이리라.
“이런 산간까지는 왜 올라온 거야? 산은 위험해. 더군다나 이 산 너머에는 이렇다 할 마을도 없잖······.”
카일은 소녀를 안심시키기 위해서 이런저런 말을 막 하다가 갑자기 말을 멈추었다.
오싹.
별안간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소름.
꿀꺽.
카일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뒤쪽이다.
지금 그의 뒤쪽에 뭔가가 나타났다.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전신의 모든 감각이 한 올씩 다 깨어나면서 이 뒤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존재감을 포착하였다. 모든 신경이 빨려 들어가는 듯했다.
‘모, 몬스터. 하필이면······.’
카일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고 말았다. 지금 그는 타인을 지키기는커녕 자신조차도 지킬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하면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을까!
수많은 생각이 떠올랐지만, 뚜렷한 방법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거, 걱정할 것 없어. 다리를 조금씩 아주 조금씩 움직여 봐. 잘 움직이지? 당황해 하지 말고, 내가 숫자를 셋 세면 바로 저쪽으로 도망가는 거야. 알았지?”
“안 돼요······. 안 돼요······. 엉엉······.”
“괜찮아. 괜찮대도.”
카일은 소녀가 겁먹은 줄 알고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소녀는 이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엄마를 이대로 두고 갈 수는 없어요······. 엄마를 도와주세요······. 제발 도와주세요······.”
“뭐?”
“우리 엄마를 도와주세요. 제발요······.”
카일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소녀가 도와달라고 했던 것은 자기 자신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카일이 고개를 돌렸다.
어둠이 자욱한 곳.
그곳에 한 존재가 서 있었다. 눈동자는 황금빛으로 일렁였고, 온몸에서는 뜨거운 열기를 토해내고 있었다.
“엄마, 엄마······.”
소녀의 울음을 들으면서 카일은 머리가 하얗게 변하는 것 같았다.
그곳에 있는 존재는 ‘사람’과 비슷한 형태를 하고 있었지만, 도무지 ‘사람’이라고는 할 수 없는 모습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 저게 대체 뭐야.’
전신을 가득 덮은 비늘.
파충류의 그것처럼 희번덕대는 황금색의 눈동자.
타오르는 듯한 붉은색 머리칼.
그 일련의 특징은 제라드에게 10년 전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메시우스······.”
카누스가 만든 육신에 깃들었던 최초의 종족 드래곤 메시우스. 레드 드래곤이었던 그의 특징이 그대로 배어 있는 한 인간이 지금 저 아래에 있었다.
카일이 저 소녀를 찾기도 전에 이미 제라드는 하늘로 올라서 이곳에 당도해서 지켜보고 있었다.
“드래곤도 인간도 아니다. 저건 대체······.”
제라드가 무서운 얼굴로 그렇게 중얼거릴 때엿다.
그르륵.
인간의 목에서는 나올 수 없는 낮은 그르릉 소리와 함께.
“메······ 리. 메, 메리······ 내, 내 딸······ 어, 어미가······ 구, 구해줄······ 게······.”
고오오오!
그 존재의 몸에서 뜨거운 열풍이 쏟아져나왔다.
비늘이 파르르 떨리며 붉은색으로 바뀌었으니, 마나가 폭발적으로 이 일대를 짓누르기 시작했다. 지금의 이 열풍이 불꽃으로 바뀌는 건 순식간이리라!
“카일, 마나의 흐름에 감응하는 거다!”
제라드는 천둥 같은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러자 카일은 거의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내가 지킬 거야. 피언, 다시는······ 난 다시는 물러나지 않을 거야. 이곳에서 죽는다고 해도 말이야!’
난생처음이었다.
마법을 배우고도 가질 수 없었던 자신감.
마음의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서 염원했던 신념.
그 마음의 불균형 속에서 카일은 다른 사람의 이름을 처음으로 썼다. 처음에는 적당한 마법사의 이름을 썼다. 하지만 이내 그걸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허한 자신을 감추고 지워버리기 위해선 더 대단한 사람의 이름을 빌려야 했다. 더 큰 사람이 되기 위해서, 자신을 조금 더 극한까지 몰아붙여야만 했다.
그래서 카일은 대마법사의 이름을 썼고, 비로소 당당할 수 있었다. 사람들이 보는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 대마법사였으니까.
······하지만 바로 지금.
카일은 처음으로 다른 누가 아닌, 자신으로 이곳에 있었다.
마음에 가득 찬 의지와 신념이 자기 자신이라는 세계를 깨부수고 흘러넘쳤다.
‘마법은 수식과 계산, 연산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영역이 확장되기 시작하면 이내 한없는 무한한 영역에 다다른다. 그렇기에 제3시대의 마법은 그 틀이 명확한 데 반해, 제2시대의 마법은 무한하다.’
모든 상황을 놓치지 않고 지켜보는 제라드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드리웠다.
비로소 카일의 내부에서 무엇인가가 끝났고, 그 대신에 무엇인가가 시작된 것이다.
< 비울 때 채워지는 것1 > 끝
ⓒ 양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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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울 때 채워지는 것2 >
3
화르륵!
저 아래로 불지옥이 펼쳐졌다.
강렬한 불꽃은 숲을 불태우고 모든 것을 잿더미로 만들고 있다.
제라드는 그 광경을 눈에 잠자코 담고 있었다.
“저건 메시우스의 불꽃과는 또 다른 불꽃이구나.”
제3시대의 마법은 정교한 술식으로 빚어낸 마법.
반면 지금 이 불꽃은 정교함과는 거리가 멀다. 자연현상에 한없이 가까우면서도 날것 그대로인 점은 제2시대의 틀이 없는 마법과 닮아있었다.
화아악!
일렁이는 불길 속에서 반투명한 막이 보였다.
카일이 만든 방패였다.
그것은 어떤 속성의 마법도 아니었다.
카일은 자신이 하고도 믿기 어렵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이게······ 내 마법이라고.”
카일은 자신의 내부에 닫혀있던 어떤 문이 열렸음을 알았다. 아직 완전히 열린 것은 아니지만, 그 작은 문의 틈으로 조심스럽게 그 내부를 엿본 듯한 느낌이다.
“끝까지 정신을 집중해라. 그리고 그 감각을 기억해.”
제라드의 말에 카일은 깜짝 놀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허공에 가만히 떠 있는 제라드의 모습이 보였다.
“대마법사님!”
“지금 그 감각이 네가 잡아야 할 마법이다. 조금 전에 어떤 생각, 어떤 느낌으로 그 마법을 사용하였는지, 그걸 잊지 마.”
“······.”
카일이 진지한 얼굴로 조금 전의 감각을 곱씹을 때였다.
휘오오오!
별안간 세찬 바람이 이 일대를 휩쓸었다.
제라드가 일으킨 바람이었다.
그 순간, 격렬하던 불길은 이내 찢기듯 다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그 안에서 드래곤과 닮아 있는 그 존재는 벌거숭이가 된 것처럼 모습을 드러냈다.
그르륵.
그제야 제라드에게 시선을 돌린 존재는 황금빛 눈동자를 희번덕거리며 적의를 발산했다.
“······어, 엄마를 도와주세요! 제발 도와주세요. 엄마 잘못이 아니에요! 엄마를 구해주세요!”
소녀가 애절하게 소리쳤다.
제라드도 그럴 참이었다. 할 수 있으면 말이다.
그 순간, 묵직한 바람이 붉은 비늘에 뒤덮인 여인의 몸을 구속하였다.
“크르르륵!”
그녀는 즉각적으로 반응하며 당장 벗어나려고 몸부림쳤다.
“메리······ 메리는, 절대, 빼앗아 가게······ 두지 않아······.”
“저는 당신의 딸을 빼앗으려고 하는 게 아닙니다.”
“내 딸에게······ 그런 짓, 하게 두지······ 않아!”
고오오.
그녀는 희미하게 남은 자아를 부여잡고 더욱 무섭게 기세를 발산해왔다.
제라드의 눈엔 모든 게 똑똑히 들어왔다.
분노와 마음을 양식으로 삼아서 생명을 연소하여 불태우는 불꽃. 저것은 그녀의 목숨을 완벽히 다 태울 때까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제라드는 착잡한 얼굴로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눈동자는 여전히 무섭게 빛나고 있었다.
마침내 제라드가 손을 뻗었을 때, 무서운 열기가 치솟으며 제라드의 팔을 통째로 집어삼키려고 하였다.
그러나 제라드는 물러나지 않고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 순간, 그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정말 참담하구나.’
잡혀먹힌다는 것은 이런 때에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지금 그녀의 몸 안에 깃든 드래곤의 씨앗은 그녀의 목숨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나무에 붙은 작은 불꽃이 종래에는 나무와 숲 전체를 불태우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건 단순히 불꽃을 끈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야.’
막 불이 커지기 시작했을 때에는 진화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것이 거의 다 타들어 가고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었을 때에는 불꽃을 제압한다고 해도 바뀌는 것은 없었다.
‘너무 늦었어.’
지금 제라드가 할 수 있는 건 최소한의 조치뿐이었다.
“딸에게 마지막 인사조차도 하지 못하고 간다면 당신도 잠들지 못할 테지요.”
그 순간, 제라드의 손에서 서늘한 냉기가 흘러나와서 그녀의 내부를 휘감기 시작하였다.
사납게 날뛰는 불꽃에 황폐해진 몸 내부를 다스리는 바람이었다. 조금 전까지 활활 타오르는 불꽃을 뿜어내는 듯했던 그녀의 눈동자는 서서히 부드럽게 변해가고 있었다.
‘지금이다.’
제라드는 그녀의 분노가 한풀 꺾였을 때, 바로 그녀의 정신에 접촉했다.
쓰스스.
자욱한 의식의 안개가 한동안 이어지다가 이내 검고 습한 공간이 펼쳐졌다.
4
여인은 벽에 기댄 채 벌벌 떨고 있었다.
저벅저벅.
제라드의 발걸음이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내 딸은······ 내 딸은 안 돼······. 내 딸 만큼은 안 돼.”
그녀는 벌벌 떨면서 그 말만 계속 반복하고 있었다.
이미 그녀가 의식하고 있는 공간의 형태조차도 불분명했다. 이제 그녀라는 인간을 구성하는 인격이 이것밖에 남아 있지 않다는 얘기였다.
“그만 나가시지요. 메리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메리는 안 돼······. 메리는 안 돼······. 메리만큼은 절대로 안 돼······.”
무슨 말을 해도 들리지 않는 듯한 모습이다.
제라드는 안타까운 얼굴로 다가갔다.
“오지마! 안 돼! 오지마아아아!”
그녀는 제라드에게 소리쳤다. 지금 그녀를 구성하는 이 세계는 끝에서부터 조금씩 사멸해가고 있었다. 이제 시간이 얼마 없었다.
제라드는 멈추지 않고 단호하게 다가갔다.
“아아아악!”
“날 똑바로 보세요.”
“싫어······ 싫어! 싫어어어어!”
그녀는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제라드는 말이 통하지 않음을 알고 자신이 보았던 메리의 모습을 그녀에게 직접 투영하여 보여주었다.
-엄마를 구해주세요!
울음이 뒤섞인 목소리로 애타게 소리치는 메리의 모습.
바로 그 순간이었다. 여인은 비명을 멈추었다. 그리고 더듬더듬 중얼거렸다.
“메리······. 메리, 내 딸······.”
“이제 시간이 없습니다. 적어도 마지막 인사는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마지막 인사······.”
그녀는 멍한 얼굴로 그렇게 중얼거리다가 몸을 일으켰다.
바로 그때였다.
그녀의 뒤편에 존재하던 시꺼먼 벽에서 별안간 새하얀 빛이 흘러나왔다. 조금 전까지 고통에 가득 찼던 여인의 얼굴은 조금씩 편안하게 바뀌기 시작했다.
“메리, 내 딸.”
그녀가 온화한 얼굴로 그렇게 중얼거린 순간, 빛나던 벽은 서서히 무너졌다. 그리고 그 저편에 있던 것들이 나타났다.
바로 그 순간, 제라드의 눈이 떨렸다.
그곳에 있던 것은 그녀가 끝까지 지키고 있던 것들이었다.
“엄마!”
“여기에요.”
“엄마, 엄마!”
꺄르르.
아주 어린 시절의 메리. 그리고 지금의 모습에 이르기까지. 그곳엔 수없이 많은 메리들로 가득했다.
제라드는 잠깐 동안 아무 말없이 그 광경들을 눈에 담았다. 그녀가 얼마나 딸을 소중히 여기는지는 더 듣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어서 가지요. 지금 메리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제라드는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그 손을 잡았다.
바로 그 순간, 두 사람의 의식은 거침없이 치솟았다. 의식의 안개를 넘어서, 제라드는 그녀와의 동조에서 헤어나왔다.
번쩍.
그렇게 다시 눈을 떴을 때, 제라드는 여인의 눈빛이 온화하게 바뀌어 있음을 알았다. 황금색의 파충류의 그것처럼 변해버린 눈동자였지만, 전처럼 탁하지 않았다.
“고, 고맙습니다······.”
여인이 조용하게 말했다.
제라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옆으로 물러났다.
이제 그가 할 일은 없었다.
“메리.”
“엄······ 마?”
“오, 메리······.”
“엄마!”
메리가 카일의 뒤에 있다가 밖으로 달려나왔다.
지금 이 순간, 가까스로 의식을 되찾았다고 해도 그녀의 모습은 처음 그 상태 그대로였다. 그건 어떻게 해도 되돌릴 수 없는 일이었다.
메리는 엉엉 울며 여인의 품에 안겨서 울었다.
여인도 소리 없이 몸을 떨며 딸을 꽉 안았다. 하지만 그녀의 눈가에선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나 잠깐의 시간이 흘렀을 때였다.
“메리, 잘 들어. 이제 엄마는 가야 해.”
“싫어요. 같이 가요!”
더욱 품에 파고드는 메리.
아직 다 크지 않은 딸을 놓고 가야만 하는 부모의 마음은 오죽하랴. 그럼에도 그저 슬퍼하고만 있을 수는 없다. 시간은 한정되어 있으니까.
“메리, 괜찮아. 괜찮을 거야.”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메리는 그냥 계속 울뿐이었다. 지금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는 모양이었다. 누구든 그럴 것이다.
바로 그때, 그녀가 고개를 들어 제라드를 똑바로 보았다.
“염치가 없는 부탁이라는 건 잘 알지만······ 이 아이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이곳에서 아주 먼 곳으로, 안전한 곳에서 살아갈 수 있으면 저는 그걸로 충분합니다······.”
“알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정말로 고맙습니다······.”
머잖아 그녀의 목소리에서 힘이 빠졌고, 몸에 돋아난 비늘은 윤기를 잃고 회색으로 변하였다.
“메리······. 잘 살아야 해. 알았지······ 행복하게······.”
목소리는 조금씩 끊어지면서 들렸고, 마침내 그녀의 눈동자는 빛을 잃었다.
불꽃이 꺼졌다.
어느새 비늘은 전부 돌처럼 변해버렸고, 피부는 회색으로 변해버렸다.
“엄마, 엄마······.”
메리는 하염없이 울었다.
그러는 사이, 황량한 바람이 불어왔다.
돌처럼 변해버린 메리의 어머니는 불어오는 바람에 흩날리기 시작했다. 메리의 울음만이 구슬프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5
타닥타닥.
모닥불이 어둠을 힘겹게 쫓아내고 있었다.
산 끝자락.
며칠 이어졌던 산행이 드디어 끝나가고 있었다. 이제 내일이면 그들은 산에서 완전히 벗어날 것이다.
그러나 카일은 지금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했다.
지금 이 순간, 그의 가슴을 꽉 채운 건 분노였고, 슬픔이었다. 두 눈으로 보고도 믿기 어려울 정도로 충격적인 광경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카일, 느꼈나?”
“갑자기 무슨 말씀인지······.”
“어느 때에도 감각을 열라고 했을 텐데. 눈으로 보고 듣고 느끼는 것 외에 그 이면의 것을 감지하라고 말이야.”
“······.”
카일은 입을 다물었다.
불만스러운 얼굴이었다. 그 광경을 모두 보았으면서 이 와중에 마법 얘기란 말인가.
“대마법사님은······ 아무렇지도 않으십니까? 한 아이의 어머니가 그토록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제가 지금 생각할 수 있는 건 그 비참한 일들에 관한 것뿐입니다.”
카일이 씩씩대면서 말을 끝맺었다.
그런데 제라드는 담담한 얼굴로 지쳐 잠든 메리를 지켜볼 따름이었다.
“······그래서 느껴보라고 말하는 거다. 저 아이에게 그런 비참한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될 테니까 말이야.”
“그게 무슨 말씀······.”
카일이 돌로 머리를 맞은 것처럼 멍청한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돌려 메리를 보았다. 지쳐 잠든 메리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설마?”
카일은 정신을 집중했다.
겨우 열게 된 문의 틈. 그곳을 통해서 세상의 이면에 접촉한다. 그러자 그전까진 알 수 없었던 것들이 느껴졌다.
“헉!”
메리의 깊숙한 곳 내부. 두근두근 뛰는 심장의 바로 옆에 무엇인가가 존재하였다.
그것은 저 어린아이의 몸에 자연히 존재한다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강렬한 생명력의 정수였고, 불꽃처럼 뜨거운 것이었다. 카일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어, 어째서······.”
“끝이라는 건 늘 시작을 예고하는 법이지. 좋은 방향이든 나쁜 방향이든 말이야.”
모닥불을 들여다보는 제라드의 눈빛이 무겁게 침전했다.
< 비울 때 채워지는 것2 > 끝
ⓒ 양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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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울 때 채워지는 것3 >
6
“아아아악!”
날카로운 비명을 내지르며 벌떡 몸을 일으키는 메리. 온몸이 식은땀 범벅이다. 그녀는 잔뜩 겁먹은 눈으로 주변을 허겁지겁 두리번거렸다.
“엄마, 엄마! 어딨어요!”
메리가 다급하게 소리칠 때였다.
“진정해라.”
기세가 한껏 약해진 모닥불 옆에서 들려온 소리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홱 돌리는 메리. 그녀의 눈은 몹시 표독스러웠다.
“괜찮다. 진정해. 아무 일도 없어.”
다시금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
메리는 그 남자의 얼굴을 보았다. 아무렇게나 기른 수염에 은발에 가까운 머리칼이 인상적이었다. 날카로웠던 메리의 눈동자가 서서히 부드럽게 변했다.
그제야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보았기 때문이다.
차분하고 맑은 눈동자는 하늘과 같았고, 동시에 아주 깊은 호수와 같았다. 메리는 이제 한결 안정된 얼굴이 되었다. 조금 전까지 잔뜩 긴장하던 얼굴이 조금씩 풀렸다.
제라드와 메리는 나란히 앉았다.
타닥타닥 모닥불만이 타들어 가고 있었다.
“네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얘기해줄 수 있겠니?”
“······.”
메리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나 잠깐의 긴 침묵이 지났을 때, 그녀는 굳게 닫고 있던 입을 열었다.
“저는······.”
긴 이야기가 끝났을 때, 메리는 다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제라드는 마나를 풀어서 메리의 몸을 감싸 안아 주었다. 꾸벅꾸벅 졸던 메리는 부드러운 감각에 휘감겨 다시 잠을 청하였다.
‘베너하임 공국인가.’
제라드는 무거운 얼굴로 서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던 일이었다.
저편에 잠자코 앉아 있는 카일은 주먹을 꽉 쥐고 분노를 삭이고 있었다. 누구든 조금 전 메리의 이야기를 듣는다면 그렇게 반응할 것이다. 그리고 그건 제라드 역시 마찬가지였다.
‘재앙이 벌어진 땅. 그곳에서 다시 피어나야만 하는 것은 희망이었어야 했을 텐데······. 하필 그곳에서 피어난 것이 비뚤어진 악의 꽃이라니.’
제라드는 고개를 들었다.
어둠이 짙게 드리운 밤하늘.
커다란 구멍과 그곳에서 새어나온 아스트랄 라인은 지금 이 순간에도 뚜렷하게 들어왔다.
이튿날이 밝았다.
푸르스름한 새벽녘이 온 세상에 가득했다.
제라드는 불씨를 완전히 지웠다.
“메리.”
“으음······.”
메리는 뒤척이다가 새벽의 찬 공기에 몸을 바르르 떨면서 부스스 일어났다. 그러다가 자신을 깨운 사람의 얼굴을 보더니 깜짝 놀란 얼굴을 했다.
“어, 어어······ 마법사님······.”
“출발해야지.”
제라드의 부드러운 음성에 메리의 표정이 굳었다.
새벽에 나누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곳에 들어갈 거예요?”
“들어갈 생각이다.”
“······.”
메리는 겁에 질린 얼굴을 했다.
베너하임 공국의 동부 시가지.
메리와 그녀의 어머니는 그곳에서 필사적으로 탈출했다.
그런데 지금 제라드는 그곳으로 들어가겠다고 한다. 가고 싶지 않은 게 당연하였다.
“괜찮아, 내가 널 지켜줄 테니까.”
벌벌 떨던 메리가 고개를 들어 제라드를 보았다.
마음을 몹시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목소리다.
“메리, 그곳에 있는 많은 사람이 너처럼 똑같이 고통받고 있을 거야. 네게 그 사람들을 구할 힘이 있다면 마땅히 그 사람들을 도와줘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니?”
“······도와줘야 해요.”
잠자코 있던 메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게 말했다.
그 안에서 고통받던 사람들의 모습과 앞으로 자신이 어떻게 변해갈지도 모르고 의지하는 사람들의 모습. 메리는 그곳에서 겨우 도망쳐 나왔지만, 여전히 그곳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 사람들을 도와주세요!”
언제 겁먹었느냐는 듯이 메리가 큰 목소리로 말하자, 제라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래, 그 사람들을 도와주러 가자.”
7
제라드는 앞에 메리를 태우고 큰길에 다다랐다.
오후 무렵이 되었을 땐, 시가지가 보이기 시작하였다.
‘변한 게 없는 것 같은데.’
구 동부 시가지는 황폐한 모습 그대로였다.
가까이 다다라서 도심 안에 들어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엉망으로 꼬여 있는 마나장.
그 영역을 훑어나가는 동안, 메리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메리의 말을 들어보자면 이곳 안쪽 어딘가에 그곳이 있다고 그랬는데.’
하지만 그 뒤로 시가지 곳곳을 뒤져봐도 멀쩡한 도시 지역이나 재건된 곳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흐음.”
카일이 고개를 갸웃하였다.
열심히 돌아다녔지만, 어딜 봐도 똑같았기 때문이다.
멀쩡한 건물도 몇 개가 보이긴 했지만, 대개는 다 10년 전 그날, 흑마법사의 공세와 망자의 무리가 일어나던 그 이후로 하나도 변하지 않은 모습이었다.
“아무것도 안 보입니다.”
카일이 또 한 바퀴 돌고 와서 그렇게 말했다.
제라드는 이미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별로 놀랍지도 않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이제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우리의 계획이 언제 바뀌었던가?”
“예? 아니요.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이대로라면 적의 소굴을 찾는 건 어림도 없는 일이 아닐는지요.”
“적의 소굴은 찾았어.”
“찾았단 말입니까?”
눈을 동그랗게 뜨는 카일.
당연히 그럴 수밖에.
지금 그들은 동부 시가지를 구석구석 다 뒤져보았다. 하지만 어느 곳에서도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감각을 열고 잘 느껴봐.”
제라드의 말에 카일이 눈살을 찌푸렸다.
설마, 무슨 마법이라도 있단 말인가. 정신을 한껏 집중하는 카일. 바로 그때, 제라드가 말머리를 돌려 성큼성큼 그곳으로 나아갔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어, 어라?”
카일의 표정이 이상하게 바뀌었다.
놀랍게도 바로 그 순간, 어떤 강렬한 위화감이 느껴지기 시작하면서 제라드가 나아가는 방향이 엉뚱한 방향으로 틀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몹시 자연스러운 듯하면서도 괴상하기 짝이 없었다.
“어때. 이상한 점을 느꼈나?”
“이 앞에 우리가 다가오지 못하도록 하는 어떤 마법의 힘이 작용하고 있다는 거군요.”
“그래, 맞아. 워낙에 자연스럽기도 하고 마나장의 영향 때문에 감각이 뒤엉켜 있어서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으면 웬만한 마법사들도 전혀 느끼지 못할 정도야.”
“······부끄럽습니다.”
카일은 할 말이 없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매번 제라드의 앞에서는 아무것도 못 하는 어린애가 되어버리는 기분이었다.
“모르는 건 부끄러운 게 아니야. 하지만 모르면서 배우려고 하지 않는 건 부끄러운 거다.”
“후우······. 제가 한 번 이 마법을 뚫어봐도 되겠습니까?”
“얼마든지.”
제라드는 옆으로 물러났다.
카일은 호흡을 가다듬더니 굳은 얼굴로 걸음을 천천히 옮겼다. 미간에 잔뜩 골이 파인 모습으로 느리게 나아간다. 그러던 중 어느 순간 발걸음이 딱 멎었다.
‘좋아. 정확하게 결계의 시작점을 찾았어. 확실히 마나의 흐름을 읽는 법은 알게 된 것 같군.’
제라드가 흐뭇한 표정을 하고 있을 때, 카일은 더욱 정신을 집중하였다.
‘포착하는 거다. 일정한 법칙에 개입할 수 있도록 말이야.’
마법의 근간은 결국 마나. 법칙을 갖추었다고 해도 흐름을 읽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그 과정은 절대 쉽지 않다.
카일은 한참을 그러다가 이내 끙 소리를 냈다. 이마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그러던 중이었다.
갑자기 한 걸음을 앞으로 내미는 카일.
“틀렸어.”
제라드가 나직하게 중얼거린 순간이었다.
쩡!
카일이 눈을 부릅뜨더니 그대로 헛구역질을 해댔다.
“웩!”
마나의 폭류에 휘말린 것이다.
“정확하게 흐름을 포착하지도 못했는데, 너무 무리하게 진입했어. 그런 식으로는 역으로 몸을 망치게 될 뿐이야.”
“죄, 죄송······ 웩!”
카일을 말하다가 말고 몇 번이고 그렇게 헛구역질을 하다가 이내 뒤로 물러나서 쓰러져버렸다.
“헉헉······.”
“괜찮으세요?”
메리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카일을 걱정하는 가운데, 제라드는 이 거대한 결계를 가만히 살폈다.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잘 만들어진 마법이로군.”
조금 전 카일의 반응을 보면서 알았다.
법칙을 감출뿐더러, 개입에 대한 함정을 파는 기능까지 내재된 복잡한 결계형 마법진이다.
“조, 조심하십시오······.”
제라드가 손을 뻗자, 카일이 그렇게 말해왔다.
피식.
제라드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 순간.
파직!
제라드의 손가락 끝에서 스파크가 튀었다.
제라드의 눈에서 푸른 안광이 더욱 선명하게 흘러나오기 시작하였고, 머잖아 그냥 폐허가 되어버린 시가지의 모습들에 금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쩌저저적!
“세상에······.”
카일이 낮게 신음했다.
그것은 흡사 세계를 부수는 것처럼 보였다.
사방으로 퍼져 나간 균열 사이에서 반짝거리는 빛이 흘러나오기 시작하였고, 머잖아 드드드 땅이 떨렸다.
그 광경이 한동안 이어지다가.
쨍그랑!
유리가 한꺼번에 와르르 깨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눈앞의 세계가 무너졌다. 그리고 전혀 다른 세계가 눈앞에 나타났다.
휘오오오!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이 외부의 세계와 저 내부의 세계 간에 존재하던 마나의 흐름이 달라져서 생기는 문제였다.
“들어가지.”
제라드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한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카일은 메리를 말에 태우고 제라드의 뒤를 따랐다.
‘아차! 내가 또 그새 잠깐 잊고 있었구나.’
일견 평범하게만 보이는 제라드.
그러나 그 정체는 절대로 평범하지가 않았다.
8
“앙큼한 짓을 하는군.”
제라드는 웃는 얼굴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 입가에 깃든 미소는 즐거움에서 우러나는 미소가 아니었다. 싸늘한 분노다.
조금 전까지 폐허의 풍경을 하고 있던 안개 낀 도심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결계 내부의 세상은 다시 재건하여 올린 건물들의 모습과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저편에서 다급하게 달려오는 검붉은 로브를 걸친 마법사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마나에는 살기가 잔뜩 배어 있었다.
“신성한 터전에 들어온 침입자를 죽여라!”
저들 중 누군가가 그렇게 소리친 순간이었다.
화르륵!
그들의 몸에서 터져 나오는 화염의 세례가 제라드를 맹렬히 덮쳐왔다. 그것은 이전 메리의 어머니에게서 보았던 그 불꽃과 정확히 일치하였다.
“아저씨!”
메리가 기겁한 얼굴로 비명을 질렀다.
제라드가 불꽃에 휩싸였기 때문이다.
“메리, 괜찮아. 저분은 아무렇지도 않아. 저런 불꽃으로는 아무런 타격도 받지 않으시는 분이야.”
“저, 정말요?”
“물론이지. 봐라.”
메리가 다시 앞을 보았다.
맹렬히 쏟아지던 불꽃. 그 불꽃에 휩싸인 제라드는 뼈도 못추렸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안에서 드러나는 제라드는 담담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물론, 여전히 시뻘건 불꽃에 휩싸여있는 것만 빼면 말이다.
“아저씨가 뜨거우실 거예요······.”
메리가 걱정스럽다는 듯 그렇게 말했다.
카일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저 불꽃이 뭔가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 저 불꽃은 조금 전의 불꽃과 다른 불꽃이야.’
카일이 정확하게 보았다.
지금 제라드를 휘감은 불꽃은 다른 불꽃이다.
조금 전에 날아들었던 불꽃보다 훨씬 더 정교하고 밀도가 높으며 그보다 밝게 타오르는 불꽃!
“홍염인가!”
카일이 그 순간 생각났다는 듯 소리쳤을 때였다.
제라드의 몸에 붙은 불꽃이 엄청난 기세로 불꽃을 쏟아낸 이들에게 날아들었다.
화아아악!
“흐아아아악!”
“아아악!”
비명을 질러대는 이들.
제라드는 그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다그닥다그닥.
말조차도 온몸을 휘감은 불꽃에 겁먹지 않는 모습이다. 이미 제라드의 말조차도 마법을 이해하는 영물이라는 얘기였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크르륵!”
불타면서 괴로워하던 이들이 별안간 몸을 뒤틀기 시작하더니, 그들의 피부에서 비늘이 자라나고, 모습이 바뀌기 시작했다. 그 모습은 일찍이 보았던 그 드래곤도 인간도 아닌 사람들의 모습과 정확히 일치했다.
“오오, 용의 사제님들이 마침내 불꽃의 화신이 되셨다!”
이 싸움을 지켜보던 길거리의 사람들이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그렇게 소리치기 시작했다.
불꽃의 화신.
그들은 저것을 그렇게 부르고 있었다.
“불꽃의 화신이라고.”
제라드의 눈빛이 무섭게 변했다.
그르륵.
변화를 거듭해가는 그들의 눈동자에는 서서히 광기가 드리우기 시작하였고, 황금빛으로 번들거렸다. 인간성을 상실하고 드래곤이라는 종의 씨앗에 잡아먹히는 저것을 어떻게 불꽃의 화신이라는 그럴싸한 명칭으로 부를 수가 있단 말인가.
절대로 그런 이름으로 불려서는 안 됐다.
“크어어어어!”
마침내 붉은 비늘에 뒤덮이면서 몸이 1.5배는 더 커진 존재가 크게 고함을 지르며, 광기를 터뜨렸다.
피어에 지켜보던 사람들이 다 굳은 얼굴로 그 자리에서 쿵쿵 쓰러져 옴짝달싹도 하지 못하는 가운데.
“크르륵.”
이지를 완전히 상실하고 괴물이 되어버린 존재가 제라드를 향해 손을 뻗어왔다.
그대로 잡으려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퍼억!
“크워!”
별안간 오른쪽 손이 통째로 터지면서 핏물이 튀었고, 그 다음엔 팔뚝 전체가 날아갔다.
제라드는 그저 그 자리에 가만히 있을 따름인데, 그와 같은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옆에서 보자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광경이었다.
그러나 뒤에서 정신을 집중하고서 처음부터 모든 마나의 흐름을 포착하고 있는 카일은 그야말로 전율하고 있었다.
제라드가 이 주변에 흐르는 모든 마나를 완벽하게 잡아서 그것을 수족처럼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다시 저 괴물의 몸에 파고든 마나. 그것은 곧 마법이 되어서 폭발했다.
퍼억!
나머지도 예외는 아니었다.
“카아아악!”
피어를 터뜨리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그것이 최후의 발악이었다.
퍼퍽!
곧 그들의 머리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으니까.
꿀꺽.
카일은 흥분을 금치 못했다.
“나는 감히 짐작도 못 하겠구나. 도대체 어느 경지에 경지인지······.”
< 비울 때 채워지는 것3 > 끝
ⓒ 양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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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울 때 채워지는 것4 >
9
용의 사제.
그들은 그렇게 불렸다.
‘이름이야 아무래도 좋지만, 하나같이 모두 똑같군.’
그들의 몸 깊숙한 곳. 그곳에는 레드 드래곤의 씨앗이 발아한 상태였다.
약 60%에 해당하는 침식률.
마법의 생물 드래곤의 유전자에 침식된 그들은 마법을 익히지 않았음에도 자연스럽게 불의 권능을 사용하는 게 가능하였다.
“용의 사제님들이여!”
또다시 들리는 목소리에 제라드의 눈썹이 휘었다.
계속 나타나는 용의 사제들이라는 존재들을 물리치는 동안,이 결계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태도가 몹시 거슬렸다.
그들은 경이로운 것을 보기라도 한 것처럼 용의 사제들이라는 자들이 나타날 때마다 합장하고 기도를 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한심한······.”
제라드는 싸늘한 목소리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퍼퍼퍽!
또다시 눈앞의 존재들의 몸에서 일어나는 폭발과 바닥에 널브러지는 용의 사제들. 눈앞의 현실을 보여주는 데도 그들은 오히려 더 크게 소리를 지를 뿐이다.
드래곤화.
인간의 몸으로 견딜 수 없는 데미지를 한꺼번에 받은 순간, 그들의 몸에 깃든 드래곤의 씨앗은 별안간 무서운 속도로 몸을 침식하였고, 그 순간 그 변화는 일어났다.
‘드래곤의 회복력이 인간의 그것을 아득하게 뛰어넘고 있기 때문에 아슬아슬하게 유지되던 균형이 깨져버리는 거다.’
애초에 인간의 몸으로는 드래곤을 받아들일 수 없다. 그런데 그것의 일부를 몸 안에 키운다는 것 자체가 미친 발상이다.
“크워어어어어어!”
쩌렁쩌렁 피어를 터뜨리며 일어나는 존재들.
이미 인간으로서의 이지를 상실한 그들은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건넜다.
퍼엉!
제라드의 눈에 살기가 맺힌 순간, 그들의 머리는 흔적도 없이 터져버렸다.
“이럴 수가! 요, 용의 사제님들이 저토록 허무하게······.”
“악마들이다. 악마들이야!”
“이 악마들!”
일방적인 전투가 이어지는 동안, 지켜보던 사람들이 그렇게 제라드를 매도하였다.
처음엔 그들을 한심하게 여겼던 제라드.
그런데 계속 그들의 모습을 보다가 한 가지 공통점을 찾게 되었다.
‘그들 모두가 전부 병자들이구나.’
얼굴에 떠오른 병색과 사지 중 어디 하나씩은 다 불편한 모습이다. 그들의 얼굴에 푸른빛이 드리운 것을 보자니, 마나 중독 현상도 심각하였다.
“이놈들, 설마······.”
제라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상황이 어떻게 된 것인지는 그야말로 일목요연하였다.
드래곤의 회복력.
그것은 인간의 그것이 비할 바가 아니었다.
인간의 힘으로 어쩌지 못하는 상처나 병. 그것을 치료한다는 명목으로 사람들을 모은 게 틀림없었다. 실제로 드래곤의 씨앗 일부를 몸 안에 받아들이게 되면 병이 낫고, 사지의 불편함이 해소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작은 불을 끄기 위해서 큰불을 붙이는 것과 같았다. 드래곤의 씨앗은 한 번 타오르기 시작하면 순식간에 그들의 몸을 집어삼킬 테니까.
“모두 막읍시다! 신전으로 가게 둘 수는 없습니다!”
“현자님을 지켜야 합니다!”
“악마야 물러가라!”
사람들이 광기에 일그러진 얼굴로 제라드의 앞으로 나섰다.
그들이 막아서는 곳.
그곳에 이 모든 일을 벌인 수괴가 있을 터였다.
“내 앞을 막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제라드는 무서운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쏟아지는 저주와 욕 앞에서도 그의 눈빛은 흔들림이 없었다. 그리고 머잖아 바람이 일었다.
“어어어!”
그들은 깜짝 놀란 얼굴로 허우적대는 사람들. 이내 좌우로 주춤주춤 물러나다가 사방으로 나가떨어지기 바쁘다.
“어이쿠!”
제라드는 그 사이를 걸어나갔다.
뒤에서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던 카일은 급히 정신을 차리고 그 뒤를 따랐다.
10
앞을 막는 존재들은 차례차례로 계속 나타났다.
그러나 단 한 순간도 제라드의 앞을 막을 수는 없었다.
“흐억!”
붕 날아올랐다가 건물에 부딪혔다가 고꾸라지는 용의 사제들. 처음부터 그랬지만, 그들은 제라드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전투력의 차이가 하늘과 땅이었다.
그러는 사이, 그 큰길은 마침내 어느 한 곳에 다다라 끊겼다. 그곳엔 수십 명의 검붉은 로브를 걸친 자들이 빼곡하게 서서 결사의 각오로 서 있었다.
제라드는 그들이 아니라, 그들의 뒤쪽에 있는 건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빛의 신 엘타르를 모시는 대신전.
제라드는 저곳을 알고 있었다.
망자의 무리가 공국을 침공하면서 저 빛의 신전은 전혀 엉뚱한 존재의 터전이 되고 말았었다.
‘메시우스.’
제라드는 3시대를 끝내는데 핵심적인 존재가 되어버린 그 존재를 떠올렸다. 인간의 손에 만들어진 그릇에 깃들게 된 용의 영혼. 불완전한 최초의 종족은 그런 상태임에도 당대 세 명의 마스터와 한 명의 원로 마법사를 상대로 좀처럼 밀리지 않는 싸움을 벌였다. 그리고 그 결과는 제3시대의 종막이었다.
“사악한 의지를 품은 존재여. 원초로의 회귀를 막게 놔둘 수는 없다. 썩 물러가라!”
“물러가라!”
그들의 목소리가 하나가 되었다.
수십의 목소리를 모아 의지를 발산해온다.
그 순간, 카일은 온몸이 뻣뻣하게 굳는 것을 느꼈다.
‘이건······ 마법이다.’
관념, 의지.
그들이 그것을 인지하고서 사용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들은 하나가 되어 오직 단 하나의 일념을 토해내고 있었다.
그것은 이 세상에 흐르는 마나에 스며들고 있었으니, 곧 무한의 영역에 존재하는 법칙의 소용돌이에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카일이 뻣뻣하게 굳어 있는 가운데, 메리도 벌벌 떨었다.
꿀꺽.
‘이것이 그들의 진정한 힘이구나. 그들은 말로써 행동을 강제[Word]하고 지배하고 있었던 거야. 이토록 강력한 힘이라면······ 그 누가 감히 그들을 거스를 수가 있을까!’
“악하고 교만한 자여, 원초의 위대한 생명력 앞에 무릎을 꿇어라!”
카일은 몸이 들썩이는 것을 느꼈다.
이대로라면 말에서 내려 땅에 무릎을 꿇을 것 같았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어리석은 자의 손에는 칼을 쥐여주지 않는 법이라고 하였으니. 오늘 그 이치를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보게 되는구나.”
제라드의 나직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과 동시에 이 일대를 휘감고 있던 강력한 힘이 씻은 듯이 사라져버렸다.
“어리석은 자들이여. 대가 없이는 아무것도 얻을 수가 없는 법이다. 오늘날, 그대들이 잃은 것은 무엇이고, 얻은 것이 무엇인지 똑똑히 보라!”
바로 그 순간, 이 일대에 있는 사람들의 눈앞에 어떤 광경이 바쁘게 스쳐 지나갔다.
그것은 괴물이 되어가는 용의 사제들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서 머잖아 메리와 그녀의 어머니 모습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메리······. 잘 살아야 해. 알았지······ 행복하게······.
그 말을 끝으로 눈앞의 모든 광경이 끝났다.
“허억! 헉!”
사람들은 이내 다리에 힘이 풀린 듯이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하얗게 질린 얼굴로 숨을 헐떡이는 그들의 시선은 자연히 제라드의 뒤쪽에 있는 카일과 카일의 품에서 울먹이는 소녀를 보았다.
“······.”
누구도 입을 여는 자가 없었다.
어머니와 딸.
그 둘에게 일어난 비극은 어떤 말로도 꾸밀 수 없기 때문이었다.
“모두 물러나라.”
제라드는 재차 말했다. 그 말에는 확고하고 분명한 힘이 깃들어 있었다. 거부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수십 명의 사람이 주춤주춤 물러나기 시작하는 가운데, 제라드는 닫혀있는 신전의 문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 순간, 문에서부터 마나가 소용돌이치기 시작하더니, 이내 마법이 되었다.
콰드드드득!
공간이 비틀리며, 그 거대한 강철의 문은 종잇장처럼 허무하게 구겨지고 말았다.
쿠우웅!
울려 퍼지는 굉음.
제라드는 말에서 내렸다.
“이곳에서 카일과 함께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라.”
푸르륵.
말귀를 알아듣는 것처럼 말은 투레질해댔다.
제라드는 구겨진 철문을 지나서 안으로 들어갔다.
11
저벅저벅.
제라드의 발걸음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려 퍼졌다.
마침내 본당에 다다랐을 때, 제라드는 10년 전에 보았던 풍경과 지금 이 순간을 겹쳐 보았다.
그때는 이 본당의 끝에 있는 제단에 작과 같은 형상을 한 것이 있었으나, 지금 이곳엔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 대신에.
“환영하오. 위대한 존재의 침전에 온 것을.”
그 자리엔 민머리의 사내 한 명이 서 있었다.
쿵! 쿵! 쿵!
별안간 본당의 모든 문이 닫혔다. 그리고 이곳의 마나의 흐름이 바뀌었다. 신전의 입구를 막고 있던 그 존재들의 광기 어린 외침이 강렬한 언령의 힘[Word]이 되어서 억압해왔던 것과 같다. 그 힘은 외부의 그것과는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강력하였다.
“자, 저항하지 마시오. 최초의 세계가 지금 그대를 반기고 있소. 나는 그대의 마음에 깃든 탐구욕을 일깨우는 자. 지식을 밝히는 자. 그리고 진리로의 초대자요.”
사내의 얼굴에 깃든 미소는 더욱 짙어졌고, 그의 눈동자는 황금빛을 토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인간의 눈동자가 아니었다.
그 순간, 뻣뻣하게 굳어 있던 제라드가 이윽고 주춤주춤 앞으로 걸어나왔다.
“좋습니다. 그걸로 된 겁니다.”
그 사내의 입가에 드리운 미소는 더욱 짙어졌다.
현자. 그는 사제들과 사람들에게 그렇게 불렸다.
두 사람의 거리가 가까워지는 동안, 그의 눈동자는 더욱 밝은 빛을 토하였다.
“참으로 놀랍군요. 그저 평범한 인간의 육신으로 만물의 이치를 꿰뚫어볼 수가 있다니 말입니다. 그 정도의 가능성을 가진 그대가 만약 최초의 생명력을 몸에 받아들이게 된다면 그때엔 어떻게 될까요. 가히 신에 필적하는 힘을 손에 넣게 될 것입니다.”
그러는 사이 두 사람의 거리는 바로 코앞까지 다다랐다.
“잘 왔소.”
현자는 그렇게 말하더니, 저편을 향해 손을 저었다.
그 순간, 어둠 가득한 그곳에서 커다란 그릇과도 같은 것이 끌려오듯이 이 앞으로 다다랐다. 그 뚜껑을 열었을 때, 그 안에서 흘러나오는 강력한 마나의 소용돌이가 순식간에 본당을 가득 메웠다.
“······.”
제라드가 그것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사이에 현자라고 불린 사내는 흐흐흐 웃음을 감추지 못하였다.
“놀랐을 것이오. 필시 놀랐을 테지. 어디에서 이런 위대한 물건을 볼 수가 있었겠소. 위대한 최초의 의지이자 생명력. 그 모든 게 바로 이곳에 있소. 자, 준비는 되었소? 그 어떤 마법보다도 위대한 것이 시작될 것이오. 그리고 이제부터 그대는 새로운 세상으로 한 걸음······ 자, 잠깐 뭘 하는 것이오. 멈춰라! 당장 손을 그 손을 떼란 말이다!”
제라드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현자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제라드가 갑자기 손을 뻗어서 그 그릇 안에 담긴 것을 손으로 쥐었기 때문이다.
구구구구궁!
손으로 쥔 순간, 뿜어져 나오는 강력한 마나의 파동. 그 힘에 신전이 금방 무너져버릴 듯했다.
“이놈! 놓으라고 하지 않았느냐! 나의 말을 들어라!”
현자가 거듭 그렇게 소리쳤다. 언령으로 제라드를 통제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제라드는 피식 웃을 따름이었다.
“그깟 언령에 내가 굴복할 줄 안 모양이군.”
“뭐, 뭐라고! 이놈, 물러나라. 어서 물러나란 말이다!”
“물러날 건 네놈이다.”
쾅!
제라드가 맞받아친 순간, 현자가 눈을 크게 뜨면서 뒤로 날아가서 벽에 처박혔다.
제라드는 현자에게 관심을 끊고 그릇 안에서 그것을 꺼내 들었다. 그것은 검붉은 핏덩이와 같은 생체 조직 따위였다.
‘틀림없군. 이건 메시우스의 심장 파편이다. 드래곤 하트의 일부······.’
드래곤을 구성하는 가장 강력한 마나의 저장고.
그러나 메시우스의 육신은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거짓된 심장. 그 안에 깃든 것은 한없이 불안정한 것이었다.
“그때 모든 것이 사라진 줄 알았는데, 그 대폭발 속에서 무엇인가가 남았다는 건가······.”
제라드가 그렇게 중얼거릴 때였다.
별안간 등줄기가 오싹한 감각이 느껴졌다. 무엇인가가 연결되는 듯한 감각. 새로운 감각이 활성화되는 듯한 느낌. 그것은 몹시 익숙하였다.
‘설마?’
제라드가 고개를 돌린 순간이었다.
10년.
자그마치 10년 동안 잠들어 있던 베리타스가 눈을 반쯤 뜬 채로 메시우스의 심장 파편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베리타스······.”
제라드가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하였다.
베리타스가 깨어난 것이다.
< 비울 때 채워지는 것4 > 끝
ⓒ 양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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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울 때 채워지는 것5 >
12
공기가 변했다.
“뭐, 뭐지?”
밖에서 제라드가 나오기만을 기다리던 카일은 신전 주변의 공기가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고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바로 그때였다.
“오오!”
조금 전까지 제라드의 언령의 힘에 속박되어 있었던 사람들이 한둘씩 자리에 엎드리더니 탄성을 지르기 시작하였다. 그들의 시선은 하나같이 신전을 향해 있었다.
“무,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거지?”
“그, 그게 그릇에서 나온 거예요.”
“뭐?”
“그, 그릇 안에 있는 게 밖으로 나온 거예요······.”
메리가 두려움에 질린 얼굴로 벌벌 떨어댔다.
카일은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에 깃든 힘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것인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바로 조금 전부터 신전 안쪽에서부터 엄청난 양의 마나가 새어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싹. 오싹.
“대체 저게 무엇이기에······.”
카일이 그렇게 중얼거린 순간이었다.
“어, 어그그극!”
엎드려 손을 합장하고서 무엇인가를 중얼거리며 외던 사람 한 명이 갑자기 발작을 일으키더니, 몸을 뒤틀어대기 시작했다.
“오오! 축복을 받으셨다!”
“축복이다!”
하나같이 외쳐대는 사람들. 그들의 얼굴에 떠오른 광기를 보면서 카일의 얼굴은 완전히 일그러졌다. 그들이 말하는 축복이라는 게 무엇인지 알아보았기 때문이다.
뚜드드득.
발작을 일으키던 사람의 몸이 부풀어 오르는 게 보였다.
카일의 눈에서 빛이 일렁였다.
느껴졌다.
지금 저 신전 깊숙한 곳에서 흘러나오는 어떤 에너지가 그의 몸에서 기생하는 씨앗을 촉진하고 있었다. 다행히도 모든 사람에게 다 통용되는 건 아닌 것 같았다.
“크르르.”
마침내 변화가 거의 끝나갈 즈음에 그 사람의 목에선 더는 사람의 그것이라고 보기 어려운 울음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화신님이시여, 우리를 인도하소서!”
바로 옆에 있던 창백한 낯빛의 사내가 그렇게 소리쳤을 때였다.
천천히 몸을 일으킨 드래고니안(용인)이 커다란 손을 펼쳐 그 사내의 머리를 잡았다.
“멈춰!”
카일이 깜짝 놀라서 소리쳤다. 저것이 무슨 짓을 하려는지 알아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콰득!
단련되지 않은 인간의 연약한 몸으로는 이미 인간이 아니게 된 존재의 손아귀 힘을 견딜 재간이 없었다.
쏟아지는 핏물 속에서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화, 화신이시여! 왜, 왜 저희를······.”
“용서하십시오!”
그들은 이런 와중에도 그런 소리를 해대고 있었다.
“당장 물러나요! 머뭇거리다가는 다 죽는다는 걸 모르겠습니까!”
카일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그러자 몇 명이 정신을 차렸는지 다급히 도망가려고 하였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일대의 공기가 얼어붙는 감각이 느껴졌다. 피어였다.
카일조차도 순간적으로 숨이 턱 막혔다.
이 일대의 모든 시간이 멈추는 감각.
그 속에서 오직 이지를 상실한 드래고니안만이 유일하게 자유로웠다.
“그르르.”
녀석은 다음으로 누구를 해치울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처럼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대고 있었다. 그러다가 황금빛의 눈동자가 사십 대의 한 여인에게 꽂혔다.
“으, 으으으.”
여인은 몸을 발발 떨어대면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제길. 제길!’
카일은 속으로 거듭 욕을 내뱉었다. 굳어버린 자신의 몸이 풀리기를 몇 번이고 염원했다. 저런 개죽음을 보기 위해서 여기까지 온 게 아니었다.
바로 그때였다.
드래고니안의 몸에서 피어오르기 시작한 열기가 뜨거운 불꽃이 되어 일렁이기 시작하는 게 카일의 눈에 들어왔다.
그 순간, 모닥불을 앞에 두고 제라드가 했던 말이 벼락처럼 머리를 스쳤다.
-통제야 아니야. 감응과 조화가 시작이다. 느껴봐.
카일은 바로 두 눈을 감았다.
쓸데없는 것들을 버리고 오직 감각의 영역에 모든 것을 기울이는 것이다.
‘할 수 있어. 난 이미 한 번 했었잖아.’
한 번 갔던 길.
그 감각은 카일의 내부에 확실히 새겨졌다.
비스듬히 열린 문.
카일은 다시 그 문의 앞에 섰다.
마나 코어를 잃은 지금, 그가 그동안 익혔던 마법과 지식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들이었다. 무수한 술식과 통제. 그런 것들은 모두 버려야 할 것들이다.
‘비울 때, 비로소 채워진다.’
새로운 것은 새 그릇에.
카일은 자신의 내부에 살짝 열린 틈을 억지로 비집고 열어서 그 내부를 들여다보았다. 그러자 이 일대에서 회오리치는 마나들이 눈에 선명하게 보이는 것처럼 느껴지기 시작하였다.
지금이라면 붙잡을 수 있다.
눈을 번쩍 뜬 순간, 이 일대를 아우르던 강렬한 피어는 깨졌다.
“크르르!”
드래고니안의 살기 가득한 눈동자가 카일에게 향한 순간, 카일은 손을 뻗었다.
의지를 새긴다.
이 공간에, 이 영역에, 그리고 사람들을 구한다.
구상하는 것은 뇌전. 그 어떤 것보다도 빠르고, 파괴적인 속성의 마법을 이곳에 발현시킨다!
파지지직!
스파크가 튀었고, 번쩍이는 뇌전이 드래고니안의 몸 중심부에서 폭발하였다.
13
신전의 내부.
제라드는 깨어난 베리타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베리타스가 깨어났다. 그동안 어떻게 해도 깨어나지 않았는데, 어째서······.’
제라드가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두근두근.
제라드의 손에 있는 드래곤 하트가 요동치며 제라드의 손아귀로 침식해오는 게 느껴졌다.
가닥가닥 일어나는 생체뿌리조직이 제라드의 팔을 타고 잠식해오는 것이다.
그러나 빈틈없는 제라드의 마법저항력은 그것을 절대로 허용하지 않았다.
‘이제야 알겠어. 지금까지 이런 식으로 사람의 몸에 배양시켜왔던 거군. 조금씩 크기를 키워왔던 거야.’
드래곤 하트는 사람의 몸을 잠식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
“크으으······. 네, 네놈. 네놈 도대체 뭘 하는 놈이더냐······. 어떻게 나의 공방에서 나의 힘에 저항할 수가 있지?”
현자가 저편에서 신음을 토하며 몸을 일으키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불신 가득한 눈을 하고 있었다.
“거기다가 대체 어떻게······ 어떻게 드래곤 하트의 침식을 거부할 수가 있단 말이냐.”
“내가 허락지 않았으니, 들어오지 못할 뿐이다. 그리고 이 정도의 공방 따위로 나를 어찌할 줄 있을 줄 안 모양이지?”
“······네놈은 대체 누구냐. 이 공방의 마법은 당대 마법사들의 비전으로는 감히 다다르지 못하는 신비의 영역이다! 그런데 대체 네놈이 어떻게?”
바로 그 순간이었다.
제라드가 왼손을 뻗어 그를 가리켰다.
그 순간, 보이지 않는 힘이 그를 휘감아서 속박하였다.
“큭!”
“눈을 떠라. 네가 다다른 그곳이 하늘인 것 같더냐?”
점차 죄어오는 무형의 힘에 현자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이 힘은 그의 마법력으로는 어찌할 힘이 아니었다.
“이, 이놈! 나는, 나는 선택받은 존재다!”
바로 그 순간, 현자가 변화하기 시작했다.
붉은색 비늘이 돋아나기 시작하였고, 귀 옆으로 날카로운 뿔이 돋아났으며, 몸은 부풀어 오르며 커지기 시작했다.
괴물의 형상으로 변하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도 제라드의 얼굴엔 별다른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꽝!
불꽃을 머금은 열기를 내뿜던 현자는 이윽고 몸을 휘감은 구속을 부수고 땅에 쿵 떨어졌다.
“봐라! 이것이 바로 최초로의 회귀다. 전능한 육신과 정신, 그리고 힘의 앞에 굴복하라!”
이지러지는 목소리로 고함을 내지르는 현자. 그는 놀랍게도 드래고니안의 상태로 자기 자신을 잃지 않았다.
그러나.
“고작 그 정도 수준을 두고 전능이라는 말을 붙이는가?”
제라드는 경멸을 가득 담아서 그렇게 말했고.
퍼엉!
“크아악!”
별안간 드래고니안으로 변한 현자의 오른쪽 팔이 갈기갈기 찢겨나갔다.
폭발.
어떤 마법의 징후도 없는 단발성 폭발이었으나, 문제는 드래고니안이 된 강철과 같은 피부가 한 번에 박살이 나버렸다는 점이었다.
“이, 이놈!”
피어를 터뜨리며 회복력을 극도로 끌어올리자, 엉망진창이 되었던 팔이 금세 다시 복구되었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연이어 가슴, 다리, 얼굴, 팔 따위에서 연이어 터지는 불꽃의 회오리.
퍼퍼퍼펑!
“끄아아아아악!”
비명을 내지르는 현자. 그는 이내 털썩 주저앉았다. 드래곤의 조직이 그를 치유하고 되살리고 있었으나, 그것은 죽음을 뒤로 미루는 일일 뿐, 생명력은 유한하였다.
“나는 네가 누구인지 알고 싶지도 않고 관심도 없다. 네가 다다랐다고 생각한 진리는 그저 어설픈 광기일 뿐, 지식이나 경지와는 무관한 것이다.”
“나, 나는 최초의 종족에 다다랐을 터인데······. 어째서 하등한 인간에게······.”
“문이 열리고 마법은 무한의 영역에 들어섰다. 그 영역에 다다르는 자. 곧 무한한 영역을 한 손에 쥐는 것과 같다. 최초와 최후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무한의 영역에서 말이다.”
제라드의 말은 그의 지식으로는 감히 헤아릴 게 아니었다.
그러나 현자는 어렴풋이 한 가지만큼은 분명하게 알았다. 눈앞의 존재가 일반적인 마법사의 영역을 아득하게 넘어선 존재라는 것을 말이다.
“사라져라.”
그 말은 명령과 같았다.
공간이 일그러졌다.
드래고니안이 된 현자는 자신을 휘감는 마나에 깃드는 의지에 저항하려고 하였다. 그 역시 언령의 힘 일부를 사용하는 존재. 더군다나 이 공간은 그의 공방이었다.
“나는, 나는 드래곤의 힘을 손에 넣은 존재란 말이다!”
그는 발악하였으나, 이내 구겨지기 시작하는 자신의 몸을 볼 수밖에 없었다. 고통이 엄습해왔으니, 고함은 이윽고 비명이 되어 흩어져갔다.
콰드드득!
살점 조각이 산산이 흩어지는 와중에 제라드는 베리타스를 보았다. 베리타스는 여전히 제라드의 오른손에 들린 드래곤 하트를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었다.
“베리타스, 이걸 원하는 거냐?”
제라드가 그렇게 물으며 드래곤 하트를 내민 순간 눈을 부릅뜨는 베리타스. 촤락 펼쳐진 페이지의 내부에서 빛이 소용돌이쳤다. 제라드는 그 빛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이 빛······.”
제라드가 기묘한 표정을 짓는 가운데, 드래곤 하트는 베리타스의 내부로 빨려 들어가더니 이내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하였다.
스스스스.
이 일대를 휘감고 있던 열기도 머잖아 완전히 사라졌다. 이제 어디에서도 드래곤 하트의 감각은 느껴지지 않았다.
“먹어치운 거냐?”
제라드가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다가 이내 신전 밖으로 황급히 달려 나와서 하늘을 우러렀다.
하늘 높은 곳에 존재하는 구멍. 그 안에서 소용돌이치는 빛이 보였다. 그 빛에서 흘러나온 아스트랄 라인까지.
“······역시 똑같아.”
제라드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왜 지금까지 몰랐을까.
똑같았다!
지금껏 수도 없이 봐왔던 비문의 빛.
그것은 지금 저 하늘에 드리운 구멍에서 흘러나오는 빛과 같았다.
“그래, 이제야 알겠어.”
제라드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막연히 짐작만 하던 베리타스의 정체를 알 것 같았다.
타인의 눈에는 보이지 않으면서, 이 세계의 온갖 기록을 가지고 있으며 성유물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마도서.
“베리타스, 너는 진리와 이어진 문이었어.”
진리, 근원, 세계, 기록, 기원······. 무수한 이름으로 불리는 그것은 모든 마법의 끝이자, 이 세상의 기원 그 자체이기도 했다.
“아니······ 문이자, 열쇠라고 해야 할지도.”
제라드의 눈빛이 무겁게 침전했다.
하늘의 구멍, 카누스의 마도서, 그리고 2종 비문, 종막의 날에 보았던 세계수 파괴에 이르기까지······. 모든 기록이 하나로 맞물렸다.
-지금부터 이 세계의 모든 마법을 끝낸다. 그걸로 된 거겠지, 베리타스.
2종 비문의 기록의 끝자락에서 사내는 그렇게 물었다. 그리고 그 물음에 베리타스는 대답했다. 제라드는 그것을 듣지 못했지만, 지금은 분명하게 들을 수 있었다.
-진리의 문을 닫아라. 모든 마법을 끝내라.
그리고 찬란했던 제2시대의 영광은 그곳에서 끝났다.
제라드는 하늘에서 고개를 내려 지상을 보았다.
지난 10년. 그가 보고 경험한 모호한 모든 것들이 지금 이 순간, 명확한 단 하나의 진실로 정리되었다.
“······10년 전에 시작된 건 제4시대가 아니었어. 닫힌 문이 열리고 제2시대가 다시 시작된 거야.”
< 비울 때 채워지는 것5 > 끝
ⓒ 양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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