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년으로 바뀐 것들1 >
1
하늘에 짙은 먹구름이 드리웠다.
머잖아 비가 내릴 모양이다.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방.
백발이 희끗희끗한 마법사는 기록을 막힘없이 써내려가고 있었다. 그가 지금 적는 내용은 제3시대의 종막과 제4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샤프라스 공방전에 관한 내용이었다.
그날 있었던 일은 후세에 반드시 전해져야만 하는 내용이었다. 역사적으로도 아주 중요한 사건이었고, 앞으로 마법계······ 아니, 정확하게는 이 세계의 운명을 크게 바꾸게 된 날이었으니까.
“후.”
노마법사는 펜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곧 비가 요란하게 쏟아질 것 같은 창가로 다가갔다.
그 이후로 10년.
모든 게 똑같았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하게 달라졌다.
하늘의 저편.
그 중심에 존재하는 구멍과 하늘에 띠를 만들며 가로지르는 저 아스트랄 라인이 바로 그것이다.
이 세계의 모든 신비와 기적, 그리고 무한의 한계를 내포한 빛의 강. 저것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이후로, 가장 많이 바뀐 것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바로 마법이었다.
문이 열린 뒤, 제4시대가 개막되었음을 알리는 가장 큰 변화. 마법계는 중흥기를 맞이하였다.
마법사들은 이전보다 훨씬 더 빠른 속도로 성장할 수 있었고, 전에 없던 마법을 발굴하듯이 나날이 새로운 마법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최초의 마법사 이래로 정립된 7가지······. 아니, 8가지의 법칙을 벗어난 마법들이 차례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기존의 마법으로는 그것들을 설명할 수 없었다.
그러나 모든 일에는 양면성이 존재하는 법이었다.
빛이 커지면서 자연스럽게 그늘도 짙어졌다.
노마법사가 고개를 돌렸다.
복도 저편에서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또 그것인가?’
쿵쿵!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격렬했다.
“들어오게.”
“탑주님, 폭주가 발생했습니다.”
“으음. 역시 그 일인가. 가지. 이번엔 누구인가?”
“1급 마법사인 웨인입니다.”
“웨인이?”
노마법사의 미간이 모여들었다.
마법사를 따라서 막 현장에 다다라서 보니 3급, 4급 마법사들이 한쪽 구석에 숨어 있었고, 시험장 한가운데에는 싯푸른 마나의 회오리에 휘감긴 마법사 한 명과 그를 억제하는 마법사 셋이 있었다.
“윽, 탑주께서 오셨군.”
마법사 중 한 사람이 진땀을 빼며 그를 반겼다.
“그의 상태는 어떤가?”
“아무래도 힘들 것 같습니다. 의식도 이미 흐려진 상태이니, 돌아올 가능성은 아주 희박합니다.”
그 말에 노마법사 케이틀란은 낮게 신음했다.
“탑주님, 결단을 내리셔야 합니다.”
“오래 버틸 수는 없습니다.”
나머지 마법사들이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대로다.
이 상황을 오래 끌 수는 없었다.
“알겠네. 웨인을 편하게 해주도록 하게.”
케이틀란의 결단에 나머지 마법사들이 일제히 손을 썼다.
세 명의 속박 하에 나머지 마법사들이 일제히 마법을 사용하여 웨인의 목숨을 빼앗는 것이다.
“끄르르륵!”
목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푸른 안광을 줄기줄기 토하며 마나를 뿜어대던 마법사는 이내 바닥에 무릎을 꿇고 쓰러졌다.
케이틀란은 쓰러진 웨인에게 다가갔다.
핏줄이 툭툭 불거져 나오고 온몸의 혈관에서 감도는 푸른빛은 마나 중독 현상을 보이고 있었다.
일찍이 알려진 폭주 현상이 그대로 보이고 있었다.
“끊이질 않는군. 전에 없던 현상이 젊은 마법사들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있어. 거기다가 이렇다 할 징후조차도 보이지 않으니 원······.”
마법사들이 웨인의 시체를 거두는 가운데, 케이틀란은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징후라면 분명히 존재한다.’.
웨인은 이십 대 중반의 마법사로, 마법을 배운지는 불과 10년 안팎이었다. 최근 수년 동안에는 다른 마법사들에 비해 크게 두드러지는 편은 아니었다.
그런데 1년 사이에 1급 마법사 시험에서 두드러지는 실력을 보여주더니, 그 이후로 고유술식을 만들었다며 발표까지 하였다. 갑자기 사람이 달라진 것 같은 성장력. 그 이후엔 이런 폭주 사태가 빈번하게 발생했다.
‘마법사들의 수 역시 10년 전과 비교하면 열 배 이상 늘었다. 매년 집계되는 마법사들의 수는 하루가 다르게 증가하고 있다.’
마법의 시대.
부흥과 중흥의 시기.
다만, 케이틀란은 우려를 감출 수 없었다.
달은 차면 기울고 꽃은 피면 지는 법이다.
지나친 것은 늘 부족한 것보다 못한 법이었고, 그가 보기에 지금의 시대는 자정작용을 잃어버린 것처럼 보였다.
2
“틀림없군요. 이로써 이번 달에 제가 확인한 것만 네 건입니다.”
청색 마탑의 깊숙한 곳.
이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젊은 마법사는 웨인의 시체를 확인하더니 그렇게 말했다.
“그렇다면 정확한 집계를 내면 그보다 훨씬 더 많은 게 틀림없다는 얘기군.”
“예, 거기다가······ 아직 무색 마탑에서 공식적으로 확인된 사항은 아닙니다만, 마법사가 아닌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폭주 사태가 발생했다는 말이 있습니다.”
“일반인들 사이에서 말인가?”
“조금씩이지만, 점점 더 많은 문제점이 발생할 것이라는 게 현재 무색 마탑의 판단입니다.”
“음, 역시 무색 마탑에서도 그렇게 판단했나.”
케이틀란은 힐끗 젊은 마법사의 얼굴을 보았다.
지금 그의 옆에 서 있는 이 마법사는 필립이라고 하는 젊은 마법사였다. 제라드의 제자이자, 현재는 무색 마탑의 마법사로서 활약하는 상당한 실력의 마법사.
“헌데, 마스터 제라드는 아직인가?”
“예, 연락도 되지 않는 상황입니다.”
“대체 어디에서 뭘 하는지 모르겠군.”
“5개월 전에 찾아왔던 독수리의 말에 의하면 현재는 제국 밖을 돌아다니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근데 지금은 어디에 계신지는······.”
“흐으음, 벌써 몇 년째 온 세상을 돌아다니는 것인지.”
케이틀란은 근심 어린 얼굴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먼 동부의 땅에 있는 그리 크지 않은 마을 코르사.
이곳은 지금 몹시 소란스러웠다.
뎅뎅뎅!
곳곳에서 종소리가 울려 퍼졌고, 머잖아 성인 장정들이 무기를 들고 뛰어나왔다. 그들은 기사들 주변에 모여들어 싸움을 준비했다.
나무를 뾰족하게 깎아서 만든 스파이크 따위로 마을 주변에 둘러놓고 싸움을 준비하는 이들의 얼굴에 긴장감이 역력하게 드리웠다.
아우우!
머잖아 저편에서 늑대의 그것으로 추정되는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노, 놈들이다!”
무기를 든 마을 사람들이 긴장한 얼굴로 소리쳤다.
조금 전에 들려온 소리는 바로 자이언트 울프가 우는 소리였다. 최근 인근의 야산에 별안간 나타난 녀석들은 금세 무리를 부풀리더니, 지금은 코사르 마을을 위협하기에 이르렀다.
아우우우!
사방에서 울려 퍼지는 울음에 모두가 긴장하는 가운데.
“무엇들을 그리 걱정하시오?”
흑마를 탄 마법사 한 명이 뒤에서 느긋하게 나타났다.
그는 이십 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인물로, 누더기 같은 볼품없는 망토를 걸치고 있었다.
“오오, 마법사님!”
마을 사람들이 그를 발견하더니 구원자가 나타났다는 얼굴을 하고서 큰 목소리로 소리쳤다.
옅은 금발에 준수한 외관의 마법사는 절제된 표정으로 그들의 사이를 지나쳤다.
바로 그때, 저 언덕에서 무엇인가가 어슬렁거리며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황혼녘이었으므로 멀리서 보면 그것은 꼭 개처럼 보였는데, 조금씩 다가오기 시작하면서부터는 그런 생각은 들지 않았다.
개나 늑대와는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거대한 몸집과 육중한 몸.
몬스터다.
마침내 푸르스름한 어둠을 타고 어슬렁거리며 다가오는 몬스터의 붉은 눈동자가 어둠을 꿰뚫기 시작했다.
바로 그 순간, 어둠을 밝히며 번쩍 터지는 스파크.
파지직.
사람들이 깜짝 놀라는 가운데, 말에서 내린 마법사는 손을 휘저으며 앞으로 나섰다. 그때마다 손끝을 타고 벼락이 요동치며 뻗어 나가더니 지척에서 다가오던 자이언트 울프의 머리를 그대로 강타했다.
캐앵!
벼락에 얻어맞은 늑대는 뒤로 나자빠져 뒹굴다가 이내 몸을 벌떡 일으켰다.
“튼튼하기도 하구나!”
눈을 부릅뜬 마법사가 양손을 합장하듯 부딪치더니, 뇌전을 줄기줄기 뿜어내며 전방에 흩뿌렸다.
파지지지직!
어둠을 꿰뚫는 뇌전은 조금 전의 뇌전보다 훨씬 강력한 기세로 날아들어 자이언트 울프들을 한꺼번에 덮쳤다.
캐캐캥!
뇌전망 앞에서 자이언트 울프들은 버티다가 이내 천천히 뒤로 물러나기 시작하였다. 몬스터들은 하나같이 마법에 대한 저항력이 높은 편이었지만, 계속되는 마법에 위협을 느낀 것이다.
“놓치지 마라. 모두 잡아라!”
기사들을 이끄는 조장이 다급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들은 몬스터를 잡기 위해서 이곳에 파견된 이들이었다. 여기에서 자이언트 울프를 잡아서 돌아가지 못한다면 그들은 이곳에 온 이유가 없게 되는 셈이었다.
두두두.
말발굽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지는 가운데 기사 다섯 명이 산으로 다시 돌아가려는 늑대들의 뒤를 쫓았다.
“마법사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마을 사람들이 하나같이 감사의 인사를 전해왔다. 그러자 마법사는 피식 웃으며 별거 아니라는 듯 손사래를 쳤다.
“이 정도는 대단한 일도 아니지요.”
“아무렴요! 이분이 그 대마법사님이 아니십니까! 여러분, 대마법사님이 우리를 구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위협에 빠뜨리는 저 몬스터를 모두 해치워주실 것입니다!”
한 사람이 그렇게 일어나서 크게 소리치자, 마법사는 나직한 웃음을 터뜨렸다.
대마법사.
현재 세상에서 그렇게 불리는 마법사는 단 한 사람뿐이다.
10년 전, 샤프라스의 요새에서 처음으로 대마법사라고 불린 마법사. 그의 이름은 제라드 란스터였다.
“절 믿어주시는 여러분의 성원에 응답하기 위해서 반드시 코르사 마을을 위협하는 저 몬스터 무리는 제가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와아아!”
“대마법사님!”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제라드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마법사는 손을 들어 그들의 성원에 호응하다가 이내 다시 말에 올라탔다.
“자, 그럼 기사님들을 따라서 마저 저 못된 놈들을 모두 정리하지요.”
“알겠습니다. 그럼 저희는 마법사님께서 돌아오시는 것만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하하. 알겠습니다.”
마법사는 부드럽게 웃으며, 말 고삐를 튕겼다.
바로 그때였다.
우지지직!
전혀 엉뚱한 뒤쪽에서 별안간 나무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나무 스파이크가 박살이 나는 소리다.
“이런. 다른 무리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먼저 저 겁 없는 놈들부터 처치해야겠습니다.”
그는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말하며 말머리를 돌렸다.
저편의 큰길에서 일단의 늑대 무리가 엄청난 속도로 달려오는 게 보였다. 고작 셋이었지만, 그 중심에 있는 녀석은 다른 자이언트 울프와 비교해도 1.5배는 더 큰 모습이다!
“히익!”
사람들이 경악하여 뒤로 주춤주춤 물러나는 가운데.
마법사는 다시 말에서 가뿐하게 내려 마법을 발동하였다.
파지지직!
뇌전이 손끝에서 요동치는 가운데, 마법사는 손을 휘저으며 뇌전줄기를 쏟아냈다.
그러나 달려오던 자이언트 울프 리더는 앞발로 날아들던 뇌전줄기를 후려치며 찢어버렸다.
“건방진!”
일그러진 얼굴로 이를 간 마법사는 다급히 다음 마법을 쏟아냈다. 전보다 더 강력한 벼락 줄기.
그러나 이번에는 발로 쳐내는 게 아니라, 날렵하게 옆으로 피하거나 몸으로 견뎌내는 자이언트 울프 리더!
시시각각 거리가 좁혀오는 가운데, 마법사는 이를 갈며 더욱 마나를 끌어올렸다.
‘더 큰 마나로 한 번에 해치운다!’
그렇게 한계 이상의 마나를 끌어 올릴 때였다. 마나의 흐름이 점점 더 세차게 바뀌었다. 평소보다 훨씬 더 큰 힘이 그의 내부에 휘몰아친다.
“좋아, 이걸로 끝내주마!”
그가 그렇게 소리쳤을 때, 그의 온몸의 혈관에 푸른빛이 감돌기 시작하였고, 눈동자에 푸른 안광이 맺히기 시작했다.
콰르르릉!
조금 전까지 쏟아낸 뇌전과는 차원이 다른 뇌전이 날아들어 자이언트 울프 리더의 몸에 적중되었다.
캐앵!
이번엔 녀석도 도리가 없었는지 바닥에 나뒹굴기 바빴다.
리더가 비틀거리며 일어나서 뒤로 내빼기 시작했다.
와아아! 대마법사! 대마법사!
사람들의 환호가 터지기 시작했을 때, 마법사의 입가에 득의양양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러나 그 미소는 오래가지 않았다.
‘뭐, 뭐지?’
손끝이 덜덜 떨리기 시작하더니, 이내 온몸이 미친 듯이 떨리기 시작했다.
덜덜덜.
마나를 갈무리하려고 하였는데, 그게 되지 않았다. 한 번 둑이 터진 마나의 흐름은 점점 더 기세를 더해가고 있었다.
“마, 마법사님.”
곁에 있던 마을 사람들이 당황한 얼굴로 그렇게 중얼거리는 가운데, 마법사의 주변으로 푸른색 기운이 거칠게 요동치치더니, 마을 사람들을 후려쳤다.
“커억!”
나가떨어진 마을 사람들이 신음하는 가운데.
“가까이 가지 마세요.”
한 사람이 그렇게 말했다.
그는 은발에 가까운 흰색으로 물든 머리칼을 뒤로 질끈 묶은 덩치 큰 사내였다. 아무렇게나 기른 턱수염을 다듬지 않은 그 인물은 방랑객으로 보였다.
“이, 이보시오! 위험하오! 조금 전에 보지 못했소!”
마법사에게 다가가는 발랑객을 말리는 마을 사람.
그러자 그는 씩 웃을 따름이다.
“마법사님이 곤경에 처했으니, 도와드려야겠지요.”
“아, 아니 너무 위험하다니깐······.”
마을 사람들이 어쩔 줄 모르는 가운데, 성큼성큼 다가가는 사내에게 격렬한 마나의 기운이 세차게 날아들었다.
그러나.
팡.
날아들던 마나의 채찍은 그 사내의 몸에 닿는 순간, 무력하게 흩어졌다. 몇 번이고 그런 광경이 이어지는 와중에 사내는 큰 손을 뻗어서 사내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 순간, 벌벌 떨던 사내의 눈이 홱 돌아갔다. 푸른 안광을 쏟아내는 눈동자에는 광기가 요동쳤다.
“나, 나는······ 나는 제라드······. 대, 대마법사······.”
고오오오.
폭주하는 마나에 휘감길 것처럼 보이는 방랑객.
그러나 그는 겸연쩍은 듯 머리를 긁적였다.
“엉뚱한 곳에서 내 이름을 들으니 기분이 이상한데.”
그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쿠웅.
요동치던 마나를 한 번에 짓눌러버렸다.
그리고 그것에 그치지 않고, 마법사의 의지를 벗어난 마나를 한 번에 흡수하여 뽑아낸다.
그러자 조금 전까지 푸른빛을 온몸으로 내뿜던 마법사는 그 순간, 힘이 빠진 것처럼 풀썩 쓰러져버렸다.
“마, 마법사님!”
마을 사람들이 그제야 다가오는 가운데, 사람들은 경계심 가득한 얼굴로 사내를 쳐다보았다. 대마법사를 한 번에 제압하는 이 사내는 대체 누구란 말인가?
“귀, 귀하는 도대체 누구시오?”
“저요? 그냥 지나가는 여행객입니다.”
사내는 하하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 10년으로 바뀐 것들1 > 끝
ⓒ 양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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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년 동안 바뀐 것들2 >
3
“워워.”
기사들은 피곤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멈춰 세웠다.
“두 마리를 그렇게 허무하게 놓치다니. 죄송합니다. 제가 조금 더 제대로 몰았어야 했는데.”
“아니야. 너무 어두운 데다가 길이 험해서 그 이상은 좇기 어려웠어. 자책하지 말게. 어차피 리더로 보이는 녀석을 잡지 못했으니, 또 습격해올 게 뻔하니 말이야.”
기사들의 리더인 벤텀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속으로는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설마, 그렇게 빠를 줄이야. 도저히 쫓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마을로 돌아와서 보니, 사람들이 온통 여관 앞에 모여서 하나같이 수군거리기 바쁜 모습이었다. 누가 크게 다치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아니, 무슨 일인가?”
“아, 기사 나리들 오셨습니까?”
“무슨 일인데, 사람들이 이렇게 한곳에 모여 있나? 혹 우리가 나간 동안, 무슨 일이라도 생겼는가?”
“그게······.”
마을 사람들이 벤텀에게 구체적인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런데 가만히 들어보니, 이야기가 이상했다.
대마법사인 제라드가 이상한 모습을 보였는데, 갑자기 웬 여행객이라는 사람이 와서 그를 제압했다는 것이다.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가 다 있는가?”
“저, 저희도 뭔가 이상해서······.”
“내가 직접 그를 한 번 만나보겠네.”
벤텀은 여관 안으로 들어갔다. 여관의 안쪽 방에는 촌장과 웬 사내 한 명이 있었다.
“오, 오셨군요, 벤텀 경.”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벤텀은 그렇게 대답하면서 옆에 있는 인물에게 시선을 던졌다.
“귀하가 그 대마법사님을 제압하였다는 여행객이오?”
“당치 않습니다. 저는 그저 살짝 도움을 드렸을 뿐입니다.”
겸손한 태도에 벤텀은 헛기침을 하였다.
“도움이라니. 그분은 대마법사시오. 헌데, 무슨 도움을 드린단 말이오? 귀하 역시 마법사요?”
“예, 뭐 대단한 수준의 마법사는 아닙니다.”
“그렇구려. 그럼 혹 대마법사님께 무슨 문제가 있소?”
“아니요. 큰 문제는 아닙니다. 그냥 조금 지치신 것 같습니다. 이대로 푹 쉬면 괜찮아지겠지요.”
“······일단 무슨 말인지는 잘 알겠소. 대마법사님을 잘 부탁하겠소.”
벤텀은 그렇게 말하곤 방에서 나갔다.
홀로 남은 사내, 제라드는 머리를 긁적였다.
‘얼굴이 화끈거려서 원······.’
-귀하가 마법사라면 들어봤을 것이오. 아르메스 제국 최고의 마법사이자, 구국의 영웅이라고 화자 되는 대마법사 제라드 란스터의 이름을. 그분이 비록 나이가 어리긴 해도, 마법사뿐만이 아니라, 만인의 존경을 한몸에 받으시는 분이오. 만에 하나라도 결례가 되는 일을 해서는 안 될 것이오.
나가기 전 벤텀이 신신당부를 했던 말이다.
“아무래도 그동안 내 이름이 엄청나게 유명해진 모양인데.”
제라드는 수년간 제국 밖을 돌아다니며 세상을 보고 다녔기에 그동안 제국 내에서 자신의 이름이 어떤 식으로 유명해졌는지를 잘 알지 못했다.
“확실히 예전의 나랑 비슷하긴 한데.”
젊은 마법사. 옅은 금발 머리칼. 그리고 뇌전 마법.
그러나 그것도 이제 예전 얘기다.
제라드의 지금 모습은 예전과는 꽤 달라져 있었다. 특히 머리칼의 색이 그러하다. 지난 세월 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으으음······.”
낮은 신음과 함께 제라드를 사칭했던 마법사가 눈을 부스스 떴다.
“정신이 듭니까?”
제라드의 물음에 그는 핏기없이 창백한 얼굴로 제라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바로 그 순간, 의식이 끊기기 직전의 순간이 뇌리를 스쳤다. 전율적인 감각과 함께 온몸이 나른해지는 느낌이 선명하였다.
“귀, 귀하는 누구십니까?
“그건 내가 물고 싶은 질문이군요. 왜 사칭을 하고 다니지요? 감당하기 어려운 사람의 이름을 말입니다.”
“그, 그건······.”
사내는 굳은 얼굴로 어쩔 줄 몰라하였다.
4
끼익.
문을 열고 나온 제라드가 놀란 얼굴을 했다. 마을 사람들이 모두 어젯밤에 있던 그 모습 그대로 꼬박 밤을 샌 모양이었다.
“대마법사님은 어떻게 되셨습니까?”
“괜찮으신 거지요?
한꺼번에 물어보는 마을 사람들. 그들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하다.
“예, 괜찮습니다.”
“어휴. 다행입니다.”
제라드는 안도하는 사람들 사이를 지나서 밖으로 나왔다.
괜찮다······. 그건 목숨의 이야기다.
‘폭주 현상은 되돌릴 수 없다. 그는 이제 통상적으로는 마법을 쓸 수 없는 몸이 되었다.’
목숨을 구하였지만, 그의 사정을 들어보니 딱하였다.
“모두 저것 때문이군.”
제라드는 하늘을 보았다. 구름 낀 하늘 저편에 드리운 구멍과 그 구멍에서 흘러나와서 하늘을 가로지르는 빛의 강. 아스트랄 라인.
제라드의 눈동자가 무겁게 침전하였다.
10년 전 그날.
샤프라스 요새의 메시우스의 몸에서 일어난 대폭발과 빛의 기둥. 그것이 하늘을 꿰뚫었을 때, 무엇인가가 크게 변하였고 그때부터 세상은 급변을 맞이했다.
마법사의 수는 엄청나게 늘어났고, 마법사들은 전에 없던 높은 수준의 마법을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혹자는 말했다.
마법의 중흥기가 돌아왔노라고.
그러나 제라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제라드는 세계 각지를 돌며 최근 10년간 세계에 일어나는 변화를 두 눈으로 보고 느꼈다.
“이 모든 변화는 너무 부자연스럽다.”
최근 각지에서 몬스터들이 기승을 부리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마법사들의 몸에 일어나는 폭주 현상과 같은 일이 몬스터들에게서도 일어나고 있었다.
제라드는 힐긋 고개를 돌렸다. 오직 그의 눈에만 보이는 베리타스. 베리타스는 10년 전, 그날 이후로 쭉 눈을 감고 있었다. 아무리 말을 걸어도 일어나는 일도 없이 그저 제라드의 곁을 지킬 뿐, 잠이 든 것처럼 말이다.
“이 녀석은 대체 언제 일어날는지.”
그렇게 중얼거렸을 때였다.
뎅뎅뎅!
별안간 종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그 순간, 조용했던 마을이 몹시 소란스러워졌다.
이렇게 종소리가 울려 퍼지는 상황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몬스터.
“역시 또 왔나.”
제라드는 고개를 돌렸다. 어제 미처 다 처치하지 못한 자이언트 울프 무리가 재침공을 감행해온 것이다.
아스트랄 라인으로 강화된 녀석들답게 집요하고 인간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럇!”
다그닥! 다그닥!
말발굽 소리와 함께 힘차게 달려나가는 기사들의 모습이 보였다. 어제 그들이 자이언트 울프를 끝까지 쫓다가 되돌아왔다는 것을 들었다.
“위험하겠어.”
몬스터와 짐승은 다르다.
똑같은 방식이 몇 번이고 통하지 않는단 얘기다.
5
크르르.
자이언트 울프 두 마리는 나무 스파이크 근처에서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기만 했다. 울음을 토하는 녀석들은 마치, 뭔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보였다.
바로 그때, 머잖아 말발굽 소리와 함께 기사들이 달려나오는 소리를 들은 녀석들이 그대로 산자락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좋아, 오늘은 놓치지 않는다.”
벤텀이 이를 갈았다.
그들은 말과 하나가 된 것처럼 날렵하게 완만한 길을 따라 움직이며 자이언트 울프들의 뒤를 따랐다. 어제 놓쳤던 것은 밤이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얘기가 달랐다.
“카잔 경!”
“알겠습니다!”
벤텀의 외침과 함께 우측으로 달려나가는 기사.
짐승을 사냥할 때엔 반드시 몰이꾼이 따로 있어야만 했다.
“자, 얌전히 산 아래로 모습을 드러내라.”
벤텀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서서히 몰이꾼을 맡은 기사들의 움직임에 동조하여 움직였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였다.
“좋았어.”
벤텀이 저 멀리서 움직이는 날렵한 자이언트 울프의 움직임을 읽으면서 막 땅 사이의 틈을 뛰어넘을 때였다.
크아아앙!
별안간 어둠의 틈에서 괴성과 함께 튀어나온 시꺼먼 자이언트 울프!
“큭!”
벤텀이 깜짝 놀라서 뛰어오르는 가운데, 말은 거칠게 바닥에 처박혔다. 말의 뱃가죽은 찢겨서 내장을 게워내고 있었다.
“저게 대체······.”
벤텀은 간담이 서늘한 것을 느끼며 자신을 습격한 자이언트 울프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그것은 더는 늑대의 그것이라고 할 수 없는 형태를 하고 있었다.
덩치는 지금껏 봐온 자이언트 울프의 1.5배에서 두 배는 더 큰 모습을 하고 있었고, 붉은 눈동자에서는 푸르스름한 기운이 일렁이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온몸에서 일렁이며 피어오르는 푸른 기운은 틀림없는 마나였다.
‘어설프게 싸우다간 죽는다.’
벤텀이 마른침을 삼키며 칼을 쳐들어 올릴 때였다.
크르르.
녀석이 낮게 울더니, 별안간 땅을 박차고 달려 들어왔다.
“헉!”
벤텀이 깜짝 놀라서 눈을 부릅떴다.
그 움직임이 상상을 초월했기 때문이다.
다급히 검에 마나를 덧씌워 오러를 줄기줄기 뿜어내며 대응한 순간이었다.
콰가가각!
“크으윽!”
벤텀이 신음을 흘리며 주르르륵 뒤로 밀려났다.
온몸의 뼈가 시큰거릴 정도로 묵직한 일격이었다.
‘이럴 수가? 이게 몬스터란 말인가?’
아연실색한 벤텀이 자신의 칼을 보았다. 이가 빠진 모습. 조금 전의 일격 때문이었다. 힐끗 보자, 이를 드러낸 녀석의 손톱과 이빨에 푸르스름한 기운이 일렁이는 게 보였다.
“빌어먹을, 오러까지 쓴다 이거냐······.”
싸움이 쉽지 않을 듯했다.
한편, 마을에서는 사방에서 종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나타났다!”
“또, 또 온다!”
마을을 주변으로 빙글빙글 돌면서 계속 주의를 흔드는 자이언트 울프들. 놈들은 그냥 평범한 짐승 따위가 아니었다. 명백하게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대, 대마법사님, 큰일 났습니다. 도와주십시오!”
촌장은 다급하게 여관으로 가서 그렇게 부탁했다.
누워서 꼼짝 못하고 있던 인물은 그 소리에 입술을 질끈 깨물며 밖으로 나왔다.
-당신은 이제 마법을 쓸 수 없습니다.
그는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내가 마법을 쓸 수 없다고······.’
으드득.
카일은 이를 갈면서 밖으로 나왔다. 여전히 머리가 윙윙 울렸고, 온몸이 무거웠지만, 해야 할 일을 해야만 했다.
‘정신 차려라. 너는 지금 아무것도 아닌, 카일이 아니야. 지금 너는······ 대마법사 제라드의 이름을 짊어지고 있단 말이다.’
위대한 대마법사.
그의 이름을 짊어진 순간부터 그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될 수 있었다. 사람들을 돕고, 자신을 증명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런 그가 마법을 쓰지 못한다면 그는 대체······.
“여, 여기입니다! 여기입니다. 대마법사님!”
카일은 정신을 차리고 자신을 부르는 곳으로 갔다. 늑대의 노린내가 코끝을 찔렀다. 저편에 있는 것이다. 손을 그곳으로 뻗고 정신을 집중한다. 하지만 마나가 모이는 일은 없었다. 그의 마나 코어에서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정말로······ 그는 마법을 쓸 수 없는 몸이 된 것이다.
“대, 대마법사님!”
마을 사람들이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카일을 불렀다.
“제발, 제발······.”
카일은 몇 번이고 시도했다. 하지만 안 되는 것은 어떻게 해도 안 되는 법이었다.
‘이러면······ 이러면 예전의 나와 다른 게 하나도 없잖아!’
병든 동생이 죽어가는 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어린 시절. 카일은 그때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제발. 피언, 내게 힘을 줘. 내가, 내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을 하게 도와줘!’
바로 그 순간이었다.
퍽!
“오오!”
카일이 눈을 번쩍 떴다.
마을 사람들의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퍼퍽!
또다시 뭔가가 터져나가는 소리.
“역시 대단하십니다!”
사람들이 감탄하는 가운데, 카일은 나무 스파이크 앞쪽으로 다가갔다. 그곳에 머리가 터져버린 채로 바닥에 널브러져 꿈틀거리는 자이언트 울프들의 모습이 보였다.
“······.”
카일은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이건 그가 한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 엄청난 마법이다. 국소 부위를 정확하게 타격해서 쓸데없는 마나의 소모를 극단적으로 줄였어. 정확하게 컨트롤 한 거야. 흔적으로 봐서는 뇌전계 마법인데······.’
카일이 감탄을 금치 못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바로 그때, 저편에 누더기 같은 행색을 한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산자락에 서 있는 그는 카일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 그 사람이다. 조, 조금 전의 마법도 역시 저 사람이······.’
은발 머리칼의 마법사.
카일은 다급히 그의 뒤를 따랐다.
그는 산자락을 오르고 있었다.
“대마법사님, 어디 가십니까!”
마을 사람들이 카일을 불렀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잠깐만······ 잠깐만 기다려주세요!”
카일은 다급한 목소리로 제라드의 뒤따랐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도무지 쫓아갈 수가 없었다. 뛰지도 않는 것 같은데, 너무 빠르다.
“헉헉!”
산자락이 험해졌지만, 카일은 멈추지 않았다. 숨을 헐떡이면서도 뛰었다. 그가 자신을 구했다. 그리고 자신이 보여준 마법과는 차원이 다른 것을 보여주었다. 어쩌면······.
바로 그때, 한참 나아가던 제라드가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그 앞에선······.
크허허헝!
“어, 어제 그놈이다!”
전날, 카일의 마법을 깨부쉈던 자이언트 울프. 지금 그 몬스터와 벤텀이 맞붙고 있었다.
그런데 상황이 좋지가 않았다.
벤텀은 밀리고 있었고, 저 멀리서 몰이하던 나머지 기사들도 함정에 빠진 것 같았다.
“위험할 것 같더라니.”
제라드는 혀를 차면서 손을 뻗었다.
공간 그 자체를 포착하고 마나로 휘감아서 비틀어버린다.
콰드드득!
< 10년 동안 바뀐 것들2 > 끝
ⓒ 양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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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년 동안 바뀐 것들3 >
6
우드드드득!
공간이 짓이겨지는 소리와 함께 공간이 뒤틀렸다.
본능적으로 위기를 감지한 시꺼먼 자이언트 울프는 바로 몸을 비틀며 그 영역에서 벗어나려고 하였다.
그러나 제라드의 마법은 놀랍도록 빠르게 발동하였다.
그 영역 안에서 완벽하게 빠져나간다는 건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크허허헝!
고통에 가득 찬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철푸덕 쓰러지는 녀석. 그 찰나 간에 팔 한쪽과 가슴팍만 뜯겨나간 모습이다.
자이언트 울프는 이글거리는 안광을 쏟아내며 제라드를 노려보았다. 지금 당장 해치워야 할 적이 눈앞에 있는 벤텀이 아니라, 바로 저곳에 있는 마법사라는 것을 알아차렸다는 듯이 말이다!
꽝!
대지를 박차고 달려오는 자이언트 울프.
한쪽 팔과 가슴팍이 뜯겨 나갔음에도 한달음에 산길을 박차고 이곳까지 뛰어오는 기세는 맹렬했다. 뒤에서 숨을 헐떡이던 카일이 깜짝 놀라서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마법을 사용하려고 했다.
그 순간.
쿠웅!
보이지 않는 거대한 힘이 달려들던 자이언트 울프의 몸을 위에서 짓눌렀다. 바닥에 짓눌린 자이언트 울프는 그르릉 이를 갈아대며 울어대며 오러를 줄기줄기 내뿜었지만, 어림도 없었다.
누더기 같은 망토가 너풀거리는 가운데, 한층 더 강력한 힘이 자이언트 울프의 몸을 짓눌렀다.
퍼억!
살점이 터지는 소리와 함께 파르르 떠는 자이언트 울프는 더는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견딜 수 있는 물리력의 한계를 넘어간 것이다.
파르르 떨던 몸은 이내 멎었다.
실로 전율적인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특히나 그 자이언트 울프와 생사의 전투를 벌이던 벤텀의 얼굴은 엉망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그가 만든 오러를 깨부수고 무기의 이를 빠지게 할 정도로 강력했던 몬스터가 고작 한 순간에 피떡이 되어 죽은 것이다.
‘혹시 저 마법사가?’
벤텀은 제라드를 보다가 이내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손을 뻗거나 어떤 제스처도 없었다. 반면에 그 옆에 있는 카일은 손을 뻗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럼 그렇지.’
“후. 대마법사님의 도움이 아니었더라면 큰일 날 뻔했습니다. 감사합니다.”
“······.”
카일은 당황한 얼굴로 제라드를 보았다.
그러자 그가 고개를 저었다.
누가 했는가, 그건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크헝!
저편에서는 여전히 싸움이 이어지고 있다.
“저, 송구스럽습니다만, 부하들을 좀 도와주시겠습니까? 제가 상처를 입은 지라······.”
벤텀이 그렇게 부탁해오자, 카일은 제라드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자 제라드는 대수롭지 않은 듯.
“자, 가시지요, 대마법사님.”
그렇게 말해왔다.
카일은 부끄러웠다. 마법도 쓰지 못하는 지금······. 그는 이전보다 더 대마법사와 멀어진 상태였다.
7
싸움은 손쉽게 정리되었다.
카일이 자신의 손을 들여다본 순간, 제라드는 바로 마법을 날렸다. 극도로 정밀한 섬전은 정확하게 자이언트 울프의 머리를 단번에 터뜨렸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토록 강력하고 정확한 마법은 정말로 본 적이 없습니다······.”
연신 제라드의 마법의 대단함을 칭찬하는 기사들. 카일은 어색하게 대답할 따름이었다. 그가 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자이언트 울프의 시체를 끌고 마을에 오자, 사람들은 크게 환호하며 기사들과 제라드의 이름을 높이 불렀다.
“연회 준비를 서두릅시다!”
그렇게 연회 준비가 한창 이어지는 동안, 카일은 사람들의 감사 인사를 받으며 마음이 몹시 불편했다.
‘마법을 잃었다.’
그는 자신의 손을 쥐었다가 펴보았다. 마나 코어는 처음부터 없었던 것 같았다. 있어야 할 곳에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마나를 쌓을수록 훤히 보였던 시야는 어느새 다시 침침하게 돌아갔고, 온몸은 무거웠다.
꽈악.
“대마법사님?”
연회 준비가 한창인 와중에 자리에서 일어나는 카일의 모습에 사람들이 그를 불렀지만, 카일은 뒤돌아보지 않고 황급히 뛰어갔다.
‘어디지? 어디에 있는 거지?’
카일은 마을 곳곳을 뛰어다녔다. 도중에 마주치는 사람들이 계속 감사의 인사를 전해왔지만, 그는 인사를 받을 겨를이 아니었다.
그렇게 얼마나 뛰어 다녔을까.
한참 뛰어다니던 도중에 가죽을 벗겨 내고 있는 사냥꾼들의 곁에서 자이언트 울프를 가만히 살피는 제라드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여, 여기 계셨군요!”
“오, 대마법사님이 아니십니까. 연회가 한창인데, 왜 이곳에 오셨습니까?”
피비린내가 가득한 가운데, 사냥꾼들이 카일을 알아보고 감사의 인사를 전해왔다.
카일은 그들이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면서 제라드를 보았다. 그는 카일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자이언트 울프의 사체를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었다.
“저······.”
“이보시오. 대마법사님이 부르시지 않소! 예까지 당신을 찾아온 것 같은데, 지금 뭐하는 거요?”
“그, 그러지 마십시오!”
옆에 있던 사냥꾼이 제라드에게 눈치를 주자, 카일이 다급한 목소리로 그를 말렸다. 그러자 제라드가 그제야 카일을 본 듯,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무슨 일입니까?
“저, 잠깐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습니까?”
“알겠습니다.”
제라드가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두 사람이 아무도 없는 마을 외곽으로 가자, 사냥꾼들은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흐음, 이상하지 않은가? 대마법사님이라고 하면 엄청나게 위대하신 분이잖아. 근데 저 마법사인지, 뭔지 알 수 없는 양반에게 엄청나게 깍듯한 것 같으이.”
“예끼! 대마법사님은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도 항상 예의를 잃지 않으시는 분이 아닌가. 상대가 어떤 사람이라도 같으신 게지. 그게 바로 배운 사람이라는 게야.”
“흐음, 그런 것인가······.”
처음 의문을 표했던 사내는 아무리 생각해도 잘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로 그렇게 거듭 고개를 갸웃하다가 이내 가죽 벗기는 작업에 몰두하였다.
비록, 중요한 부분이 훼손되기는 했어도 이 정도 양질의 가죽은 분명히 상당한 가격으로 거래되기 때문이었다.
8
털썩.
무릎을 꿇는 카일.
“······제가 감히 사칭해서는 안 될 분의 이름을 멋대로 썼다는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이런, 이런 식으로 마법을 잃을 수는 없습니다!”
고개를 조아리는 카일은 몹시 간절하였다.
제라드는 이미 그와 대화를 나누었으므로, 그 사정이 무엇인지 대충 다 알고 있었다.
‘자신의 증명.’
무능력하고 주어진 운명에 그저 휩쓸릴 수밖에 없었던 지난날의 자신을 뒤로하고서 다른 누군가를 도울 수 있는 존재로 거듭나는 것. 그것이 바로 카일이 택한 삶이었다.
타인의 이름이라도 좋다. 도움이 필요한 누군가를 돕는 삶을 살아간다고 정한 것은 그가 택한 정의이고 방식이었다.
‘비록, 조금 비틀린 삶의 방식이라고 해도 그 마음 자체는 잘못된 것은 아니다.’
다만, 그 마음과는 무관하게, 그의 길은 여기서 끊어졌다.
“무슨 마음인지는 알겠지만, 마나 코어의 폭주에 관해서는 들어봤을 겁니다. 한 번 폭주한 마나 코어는 이미 그릇으로서 아무런 역할을 할 수가 없습니다.”
“저, 저는 대단치 않은 마법사라서 무슨 방법이 있는지 모릅니다. 하, 하지만 당신께서는 알고 계시지 않으십니까? 저따위가 감히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로 대단하신 분이니까요. 제발, 제발 부탁드립니다. 마법을 사용할 수 없다면 저는······ 저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제 존재 가치는 없어집니다!”
간절한 외침에도 제라드는 침묵을 지킬 따름이었다.
카일의 말대로다. 아예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수없는 폭주 현상을 보았고, 아득하게 높은 마법의 비의를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라드는 어두운 하늘을 우러렀다.
아스트랄 라인.
저것이 세상에 드리운 이후로, 수많은 마법사들의 역량이 이전과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진일보한 것처럼 마법의 한계는 무한히 늘어났다. 그 모든 신비의 중심. 어쩌면 제라드는 지금 저 아스트랄 라인에 가장 가까운 존재일는지도 몰랐다.
‘더 많은 이들이 무한의 법칙에 다가가는 것. 그게 옳은 일일까.’
그 답은 쉽게 나오는 것이 아니었기에 제라드는 지난 10년을 돌아다녔고, 많은 것을 보며 생각해왔다. 답은 여전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카일의 의지는 순수했다.
남을 도와서 자신을 증명한다는 것은 하나보다 전체를, 전체에서 하나를 찾는 것이다. 그것은 제라드가 다다른 마법의 경지에 한없이 가까운 이념이었다.
자격이 있는지, 그걸 확인해볼 때다.
바로 그 순간, 제라드의 표정이 변했다.
그 순간, 이 주변의 공기도 바뀌었다.
“헙.”
카일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묵직한 공기가 그를 압박해오고 있었다.
“똑똑히 듣도록 하라. 그대가 지금부터 이룩한 모든 것들이 어쩌면 한순간에 흩어지는 연기와 같은 것이라고 해도 상관없나? 그대가 얻게 된 것들은 이미 모두 이미 그렇게 흩어졌고, 이 앞에 존재하는 길조차도 그러할 것이다.”
나직한 물음이었으나, 입을 열기조차 쉽지 않다.
주변의 모든 풍경이 다 사라지고, 오직 눈앞의 제라드만이 산처럼 거대해지는 감각. 그 압도적인 압박감 속에서 카일은 숨이 턱 막히고 눈앞이 하얗게 변하는 듯하였다.
지금 그가 눈앞에 둔 존재는······ 생각하던 것 이상으로 엄청난 마법사였다. 그렇기에 조금 전의 물음에 대답하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힘이 필요했다.
“부······ 부탁······ 드, 드립니다······.”
마침내 그 말을 다 내뱉었을 때, 카일은 자신에게 쏟아지던 그 무형의 압박감이 별안간 씻은 듯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헉헉!”
카일은 숨을 몰아쉬었다.
“그 정도 신념이라면 마법사로서 부족함은 없는 듯하군. 그래서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부정한 재물을 쌓거나 하진 않았겠지.”
“호, 혹시라도 제가 굶어 죽지 않을 정도의 보답을 받은 것도 부정한 재물을 쌓은 거라면······ 그건 그렇다고밖에 대답 드릴 수 없습니다만······.”
카일이 뒷말을 흐리며 아무런 말도 못하는 가운데, 제라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어나라.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묻겠다. 너는 마법을 익힌 이후로 줄곧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도움이 필요한 곳에 대마법사의 이름을 팔고 도움을 주었다고 했다.”
“그렇습니다.”
“그렇게 4년의 세월 동안 뭘 알아냈지?”
제라드가 어둠이 깔린 마을을 걸으며 그렇게 물었다.
카일은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이내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저는······ 변화를 보았습니다.”
“무슨 변화지?”
“몬스터들의 변화입니다. 제가 할 수 있는 마법은 한둘뿐이라서 고작해야 치안이 좀 허술한 마을을 돌아다니며 출몰하는 몬스터를 처치하는 게 고작입니다. 처음에는 정말로 대수롭지 않은 괴물뿐이었는데, 최근에는 점점 버거울 정도로 강한 몬스터들이 출몰하기 시작했습니다. 자이언트 울프 중에 변종이 있었던 것처럼요.”
카일은 그렇게 말하다가 이내 제라드의 눈치를 보았다.
“내 눈치를 보지 마라. 마법사라면 자신의 말에 확신이 있어야 해. 너보다 빼어난 마법사가 걸어온 길을 무조건 따르기만 할 참은 아니겠지.”
“죄, 죄송합니다.”
“하지만 확실히 제대로 봤다. 수년 동안 세상엔 많은 변화가 있었다. 마법사로서 기량을 갖춘 자들이 늘어난 것과 더불어서 몬스터들 중에 변종도 많아졌어. 더는 변종이라고 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말이야.”
제라드가 아까 살피고 있던 건 흔적이었다.
폭주의 흔적.
푸르륵.
제라드는 마구간에 묶어둔 고삐를 풀었다. 카일도 자신의 말의 고삐를 풀었다.
“지금부터 우리는 서쪽으로 갈 참이다.”
“제국으로 가십니까?”
“아니, 베너하임 공국으로 간다. 샤프라스 요새의 싸움 이후로 10년. 그곳에 무슨 변화가 있었는지, 그걸 확인할 때가 됐다.”
“저 그런데······ 현재 베너하임 공국은······.”
“그곳이 지금 어떤지는 내가 그대보다 더 잘 알고 있고 있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카일은 망설임없이 그렇게 대답했다. 혹 그곳에 그 어떤 고난과 역경이 있다고 해도, 눈앞의 마법사라면 능히 넘을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랴.”
제라드가 능숙한 솜씨로 말을 이끌며 서쪽 길로 말을 모는 가운데, 카일은 그 뒤를 따랐다.
“엇! 대마법사님, 어디로 가시는지요!”
길로 나오자, 마을 사람들이 카일을 보고 소리치기 시작했다. 카일은 그저 고개를 살짝 숙여 그들에게 인사를 전할 뿐이었다.
“대마법사님!”
마을 사람들의 외침이 뒤에서 흩어지는 가운데, 어둠을 헤치며 나아가는 제라드와 카일. 그러던 중 카일은 불현듯 아직 은인의 이름조차도 듣지 못했음을 알았다.
“저, 제가 경황이 없어서 아직 은인의 존함조차 모르고 있었습니다. 혹 존함이 어떻게 되시는지요!”
거침없이 달려가는 제라드의 옆에 붙은 카일이 그렇게 물었다. 그러자 제라드가 그를 힐끗 바라보더니 피식 웃었다.
무엇이 웃긴 것일까.
카일이 가만히 그의 대답을 기다릴 때였다.
“제라드. 내 이름은 제라드다.”
그 대답을 듣는 순간, 카일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제라드.
그 이름에 저토록 엄청난 마법사는 세상에 단 한 명뿐이었다. 그와 같은 가짜가 아니라 진짜 마법사!
하얗게 질렸던 카일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제라드 앞에서 ‘대마법사 제라드’ 흉내를 내고 있었다니. 세상에 이렇게 창피한 일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하하하.”
제라드가 카일의 반응이 재미있다는 듯 크게 웃었다.
< 10년 동안 바뀐 것들3 > 끝
ⓒ 양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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