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화 (25/38)

< 주도권1 >

키르메인이 경악한 얼굴이었다. 

“무슨, 무슨······ 무슨 짓을 한 거냐? 네놈, 네놈은 지금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 

벌벌 떨리는 몸. 이미 마나 코어가 폐쇄되어 그는 마법사라고 할 수 없는 몸이 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나를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 이건 말도 안 돼.” 

지금 그는 제라드의 몸에서 일렁이며 피어오르는 어떤 기운을 분명하게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아주 익숙한 마나의 감각이었다. 

그냥 마나를 개방하는 것만으로는 이런 느낌을 받을 수 없었다. 이건 여러 속성이 한데 뒤얽힌 마나 특유의 감각이다. 

“서, 설마 퍼, 퍼스트 오리진에 다다랐단 말이냐?” 

키르메인이 두려움에 사로잡힌 얼굴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러는 사이, 정작 당사자인 제라드는 외부의 모든 감각에서 헤어나와 전혀 무관한 자신만의 세계로 점차 빠져들고 있었다. 

‘신비로운 느낌이다.’ 

절대로 하나가 될 수 없는 속성들이 자연스럽게 섞여서 기묘한 조화를 이루었고, 그 조화 속으로 또 다른 속성들이 자연스럽게 휘감기며 얽힌다. 

그리하여 여러 가지의 색이 한데 얽혀 저마다 개성이 강하였던 속성들은 조금씩 하나가 되어갔다. 

완전한 하나. 

그 안에 존재하는 마법. 

그것은 퍼스트 오리진이라고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다. 

원형(原形). 

틀을 벗어난 마법은 몹시 자유로웠다. 한계가 없었다. 무한한 가능성이 있었다. 

제라드는 직감했다. 

이것이야말로 이전 시대에 존재했던 마법의 형태라는 것을 말이다. 

그러는 사이, 제라드의 몸 안에서 8개의 속성이 완전한 하나가 되었다. 이제 게이트를 통한 전환도, 증폭도 의미가 없어졌다. 길은 비로소 모두 이어졌다. 

‘그럼 이 마법은 무엇이 되는 거지?’ 

제라드의 물음이 공허하게 울려 퍼졌다. 

그러나 질문도 대답도 결국은 스스로 낼 수밖에 없었다. 

‘어리석은 물음이구나. 무엇이 되는가, 그것 또한 내가 결정하는 것인데!’ 

키르메인이 다다른 마법의 궁극적인 지향점은 공간의 비틀림이었다. 

‘좋아, 그걸 해보자.’ 

그 순간, 제라드의 의식이 표면으로 부유하였다. 

푸른 안광이 어둠이 드리운 감옥을 비추는 가운데, 제라드는 자신의 의지를 따라 움직이는 마나. 그것은 단숨에 쇠창살에 휘감기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비틀려라.” 

그 순간, 마나의 결은 법칙이 되어서 현현하였다. 

우드드드드득! 

“헉!” 

엘란이 깜짝 놀라 숨을 들이켰다. 별안간 감옥의 창살이 뒤틀리면서 꺾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저건 단순한 힘의 발현이 아니었다. 

“고, 공간이 뒤틀리고 있다.” 

꿀꺽. 

엘란이 마른 침을 삼켰다. 

‘똑같다!’ 

무색의 공동에서 키르메인이 사용했던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마법. 지금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마법이 제라드의 손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드드드득! 

마침내 창살은 사람 한 사람이 손쉽게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크게 벌어졌다. 

“어, 어떻게······ 이, 이럴 수가······.” 

키르메인은 충격에 제정신이 아닌 모습이었다. 

믿을 수 없었지만, 지금 제라드는 퍼스트 오리진을 사용하였다. 그가 착각한 게 아니었다. 이건 틀림없는 퍼스트 오리진이었다. 

“네, 네가 어떻게 퍼스트 오리진을······.” 

“좋을 걸 배웠다고 말했을 터.” 

“고, 고작 그런······ 그런 말을 듣고서 그 마법에 다다랐다고······.” 

창백하게 변하는 키르메인의 얼굴. 

그가 평생을 걸쳐 도달한 길. 

그 길에 다다르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노력이 필요했단 말인가. 그런데 지금 제라드는 그저 말 한 마디에서 모든 것을 유추하고 도달하였다. 

“너, 너는 대체 어찌 된 놈이란 말이냐······.” 

키르메인이 절망에 일그러진 채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제라드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마법엔 무한한 가능성이 존재한다.’ 

제라드는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있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엘란의 말에 제라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제라드를 포위한 열 명의 무색 마법사들은 거의 동시에 자신이 가장 자신 있게 펼칠 수 있는 마법을 사용했다. 그 시전 속도가 제법 나쁘지 않았다. 

그들 중 가장 빼어난 것은 엘란이었다. 

그의 마법은 매 순간 아주 놀라운 속도로 진보하고 있었다. 제라드의 마법이 그의 시야를 열어주고 있다는 증거였다. 

꿀꺽. 

엘란이 마른침을 삼켰다. 

지금 제라드에게는 영혼석이 없었다. 

제아무리 빼어난 마법사라고 해도, 이렇게 한꺼번에 쏟아지는 마법에 대항할 방법은 그리 많지 않았다. 마법 자체를 부숴버리는 스펠 브레이커가 아니라면 말이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이었다. 

제라드의 중심으로 거대한 뒤틀림이 발생하였다. 

그 순간, 제라드를 향해서 날아들던 바람의 칼날이 꺾이기 시작하더니, 엉뚱한 방향으로 튀었다. 

꽈앙! 

그 방향에서 날아들던 불꽃 덩어리와 엘란이 날린 바람의 칼날이 충돌, 충격파가 발생하면서 나머지 마법에 영향을 일으키며 연쇄 폭발이 일어났다. 

폭연이 자욱하게 흩어지는 가운데, 잠깐의 시간이 지나고 그 안에서 멀쩡한 제라드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의 몸 주변에는 반투명한 막이 있었다. 그것 역시 지금까지 보지 못한 어떤 특별한 마법이었다. 

“해내셨군요, 마스터 제라드!” 

엘란이 자기 일처럼 기뻐하였다. 

제라드가 키르메인의 말에서 어떤 것을 얻었는지는 잘 알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는 엘란이 전혀 알지 못하는 어떤 경지에 다다랐다. 그것만큼은 분명했다. 

“그럼······. 이제 마지막 시험을 하겠습니다. 마스터, 제라드 준비되셨습니까?” 

“언제든지 하세요.” 

엘란은 조금 전보다 더 긴장한 얼굴을 했다. 

중요한 것은 바로 지금 이 순간부터였다. 

제라드의 마법은 그전에도 엄청난 마법사였다. 하지만 그렇게 대단한 제라드조차도 스펠 브레이커에 자유롭지 못하였다. 

엘란은 호흡을 다스리다가 이내 손을 뻗었다. 

숨이 턱 막히는 듯한 느낌과 함께 온몸의 기운이 쭉 빠졌다. 그 순간, 그의 몸 주변을 돌던 영혼석 하나가 절반의 크기로 줄어들었다. 

팟. 

스펠 브레이커가 발동하였고, 제라드의 몸 주변을 뒤덮고 있던 반투명한 막이 별안간 흩어졌다. 

“아!” 

엘란이 저도 모르게 탄식한 순간이었다. 흩어지기 시작하던 반투명한 마법의 막이 다시금 제라드를 휘감았다. 

열 명의 마법사들이 하나같이 놀란 얼굴을 했다. 

스펠 브레이커가 발동하였는데, 마법이 완전히 파괴된 것처럼 보이다가 이내 다시 제라드를 휘감았기 때문이다. 

“마, 마스터 제라드!” 

엘란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며 제라드도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꽉 쥐었다. 

그가 예상한 그대로였다. 

퍼스트 오리진이 있으면 스펠 브레이커에 대항할 수 있다. 

무색의 공동. 

지금 이 자리에는 탑주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이곳에서 피바람이 분 뒤로 벌써 사흘이 지난 무렵이었다. 

“제 계획에 관해서는 이전에 다 말씀드렸던 그대로입니다. 저는 마탑의 일원화하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적들과의 싸움이 끝날 때까지 말입니다.” 

“음.” 

제라드의 말에 라엘카가 입을 다물었다. 

그는 솔직하게 말해서 제라드의 말에 찬성하진 않았다. 각 마탑마다 개성과 다양성이 저해될 게 분명하였기 때문이다. 그건 마법을 연구한다는 측면에서는 도움이 전혀 되지 않는다. 

그러나. 

힐긋. 

라엘카는 겔론 마탑과 테라 마탑의 탑주들을 보면서 무거운 표정을 지었다. 

‘물이 고여서 썩어가는 줄도 모르고 있었던 게지. 아마도 우리 마탑의 이름 또한 벤투스 님의 이름이 붙지 않은 연유를 파고 들어가면 4인의 후계자들과 어떤 식으로든 큰 연관이 있으리라.’ 

“반대는 없으십니까?” 

제라드는 좌중을 훑으며 그렇게 물었다. 

반대는 없었다. 

애초에 지금 이 자리에서 제라드에게 존중을 받는 인물은 단 한 명. 처음부터 제라드의 편이 되기로 하였던 라엘카뿐이었다. 다일론은 중립을 취하였으므로, 존중도 하대도 아닌 모호한 예우를 받았고, 그 나머지는 말할 것도 없었다. 

적막이 흐르는 가운데, 제라드의 의견은 가결되었다. 

“좋습니다. 그럼 사태가 급하니 즉각 전 마탑의 탑주님들은 봉쇄령을 시행하기 위해 움직여주십시오.” 

“봉쇄령이라니요?” 

라엘카가 그렇게 되묻는 가운데. 

“루스, 아쿠아 마탑의 봉쇄령입니다. 두 마탑이 어떻게 움직일지 알 수 없는 지금, 그들을 이 체제 아래 굴복시켜야 합니다.” 

과격하고 파격적인 결단에 다른 탑주들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제라드의 뜻은 단호했다. 

‘과거의 잔재를 완전히 뿌리 뽑아내지 못한다면 미래도 없는 법이다.’ 

제라드는 마탑 회의의 결정 사항을 황제와의 독대 자리에서 모두 전하였다. 

“과감한 결단이로다. 다만, 우리의 적들이 코앞까지 다가온 이 시점에 너무 많은 피가 흐르지는 않겠는가?” 

“피가 흐르는 것을 두려워하여 고름을 짜내지 못한다면 상처는 썩습니다, 폐하.” 

“고름이라······. 좋다.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그대의 뜻대로 하라.” 

“감사합니다, 폐하.” 

“허면, 그 일을 다 마무리하고 동부의 일을 처리할 참인가?” 

동부. 

황제가 말하는 건 다른 게 아니다. 

제국 동부 국경의 끝, 베너하임 공국에서 벌어진 일을 이르는 것이다. 

그곳은 지금 흑마법사들의 손에 완전히 떨어진 상황. 크루드 마탑의 마법사들은 이미 공국에서 물러나 국경 요새까지 물러난 상황이라는 서신이 이틀 전에 당도하였다. 

눈앞의 적은 분명한데, 그것을 앞에 두고 내부에서 힘을 빼도 괜찮은 것인지, 황제는 그것을 묻는 것이다. 

“공국이 적의 수중에 떨어진 상황이 길어지면 짐도 더는 이 일을 그대에게 맡겨둘 수는 없다.” 

“알고 있습니다. 적이 우리의 사정을 이미 알고 있을 터이니, 모든 일을 끝마칠 때까지 기다릴 생각은 없습니다. 저는 그전에 움직일 생각입니다.” 

“좋구나, 허면 방비책은 준비되어 있는가? 적이 노리는 것이 황족이라면 마스터 제라드, 그대가 동부로 간 동안 적들이 이곳을 재차 노려올 수도 있다.” 

“폐하의 말씀대로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곳에 있으면서도 없는 존재가 될 예정입니다.”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이었지만, 황제는 그 말을 듣자마자 웃음을 터뜨렸다. 

“과연, 제법 유쾌한 생각을 하였군. 좋다, 그대의 뜻대로 하도록 하라.” 

“감사합니다, 폐하.” 

제라드는 고개를 조아리고 물러갔다. 

홀로 남은 황제는 턱을 괴고 한참 웃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래서 네가 보기에 그는 어떻더냐, 아나리엘.” 

황제가 갑자기 그렇게 말했다. 

바로 그 순간, 황제의 뒤편 저 안쪽의 방에서 한 사람이 걸어나왔다. 그녀는 아나리엘이었다. 조신한 태도로 걸어온 그녀는 황제의 옆 자리에 앉았다. 

“마스터 제라드와 너는 연이 짧지 않다. 그리고 내가 보기엔 너 역시 그를 나쁘게 생각지 않는 듯한데. 그와의 혼담을 네게 제안한다면 어떻더냐?” 

“······.” 

아나리엘은 그저 수줍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비록 아나리엘은 방계이기는 하나, 황가의 일족이라고 불리기엔 부족함이 없었다. 제국의 위성국가를 통치하는 이들은 모두 황족이었기 때문이다. 

“흐음, 황녀인 에일린의 나이가 세 살 정도만 더 많았더라도 좋았을 텐데, 아쉬울 따름이군.” 

“폐하, 황녀 전하의 나이가 세 살이 더 많다고 해도 고작 14살의 나이입니다. 혼인하기엔 적합하지 않겠지요.” 

“뭐라? 하하하핫.” 

황제가 유쾌한 듯 웃었다. 

황족들의 혼인 적령기는 남자는 16살에서 17살이었고, 여자는 14살부터였다. 그건 아나리엘 역시 알고 있을 터인데도 저리 말하는 것을 보면 그 마음이라는 게 뻔하였다. 

“좋다, 그러면 그가 모든 일을 속전속결로 해치우기 전에 한 번 자리를 주선할 것이다. 그 이후는 아나리엘, 네 일이다. 제아무리 빼어나고 기량이 출중하다고 해도 남자는 남자. 어렵게 생각하면 한없이 어려운 것이요, 쉽게 생각하면 한없이 쉬운 법이로다.” 

황제는 턱수염을 매만지며 수줍어하는 아나리엘의 얼굴을 보며 즐거운 표정을 지었다.

< 주도권1 > 끝

ⓒ 양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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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도권2 >

늦은 밤이었다. 

푸르륵. 

미리 준비된 흑마 한 기가 고개를 털며 울었다. 

새벽녘의 차가운 공기가 뺨 언저리부터 목을 스치는 가운데, 누더기처럼 볼품없는 망토와 후드로 자신의 모습을 감춘 한 인물이 말고삐를 끌었다. 

“스승님, 다녀오세요.” 

그의 옆에 선 한 소년이 공손하게 고개를 숙여왔다. 

소년의 이름은 필립. 

아직 견습 마법사지만, 근래의 성취가 예사롭지 않다. 

“필립, 네가 서둘러 배우고 싶어한다는 건 알고 있지만, 절대로 서두르지 마라. 할 수 없는 걸 억지로 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건 없는 법이야.” 

“네, 스승님······.” 

필립은 그렇게 대답했지만, 마음으로 받아들이진 않은 모양이었다. 아마도 마음이 조급할 것이다. 필립은 하루라도 빨리 한 사람의 마법사로서 인정을 받고 제라드의 도움이 되고 싶어하였으니까. 

‘내가 필립이었더라도 그랬겠지. 조급함 때문에 자기자신을 망치는 일만 삼갔으면 좋겠는데.’ 

제라드는 필립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 위에 올랐다. 

오늘 그가 수도를 빠져나가는 것은 아무도 모르는 일이어야만 했다. 실제로 이 일을 알고 있는 것은 황제를 비롯하여 극히 소수에 불과하였다. 

그런데 쪽문으로 빠져나가는 동안, 새벽 안갯속에서 한 사람이 그를 기다리는 모습이 보였다. 

‘엘란.’ 

제라드가 수도에 없는 동안, 그의 대역을 맡을 마법사. 그리고 지금 수도에서 가장 믿음직한 마법사였다. 나오지 말라고 했는데도 굳이 나온 것이다. 

엘란은 말없이 공손한 태도로 고개를 살짝 숙였고, 제라드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거침없이 달려나갔다. 

다그닥. 다그닥. 

말발굽 소리가 힘차게 새벽의 거리 사이로 울려 퍼졌다. 

‘마탑 회의가 끝나고 벌써 나흘. 어떤 식으로든 반응이 있겠지. 아쿠아 마탑은 웬만해서는 저항하지 않을 거다. 아쿠아가 4인의 후계자 중 한 명이라고 해도, 이미 모든 것이 결정난 상황이니까. 하지만 문제는 루스 마탑이다.’ 

루스. 

빛의 마법사. 

여덟 제자 중에서 유일하게 다른 속성의 마법까지도 익힌 존재. 그리고 엘레멘탈 마스터의 비전 그 자체를 손에 넣은 인물이기도 했다. 

‘그런데도 엘레멘탈 마스터는 그를 후계자로 삼지 않았다. 아마도 그의 됨됨이를 알아본 거겠지.’ 

이건 제라드의 예감이었지만, 그런 루스의 의지를 이어받은 마탑이 칙령이나 마탑 회의의 결정에 순순히 따를 것 같지 않았다. 

“어쩌면 이미 싸움이 벌어지고 있을지도.” 

제라드는 남쪽으로 한참을 내달렸다. 

어느새 망토는 흙먼지로 범벅되어 있었고, 깔끔했던 얼굴엔 턱과 입가엔 수염이 살짝 자라있었다. 

“워.” 

언덕을 막 넘었을 때, 제라드가 말 고삐를 당기며 말을 멈춰 세웠다. 

“키마인.” 

저편에 도시의 모습이 보였다. 

루스 마탑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존재하는 마법도시 키마인이 틀림없었다. 드디어 루스 마탑의 지척에 다다른 것이다. 

그런데 키마인의 분위기가 뭔가 이상했다. 사람들의 행렬이 자꾸만 북쪽으로 빠져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어이 서두르라고! 마법사란 족속들이 얼마나 괴물인지 몰라? 싸움이 격렬해져서 여기까지 여파가 미치면 그땐 다 같이 죽을 거야.” 

상단의 무리가 눈치를 살피며 조용하게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조금 전의 말씀이 무슨 뜻이었는지 좀 물어도 되겠습니까?” 

“어이쿠! 깜짝이야······.” 

조금 전까지 뒤만 살피던 상인은 앞에서 조용히 나타난 제라드를 보며 간 떨어지는 줄 알았다는 얼굴을 했다. 

“흠흠, 행색을 보아하니 외지에서 온 사람인 모양인데, 루스 마탑 쪽으로 가는 거라면 생각 바꾸시오. 지금 그곳에서 마법사들끼리 싸움이 대판 벌어진 상황이니까.” 

마지막 말은 거의 속삭이듯 하는 상인. 

“고맙습니다. 이럇!” 

제라드는 그렇게 말하며 고삐를 튕겼다. 

“어어, 말귀를 못 알아들은 건가. 겁도 없지.” 

쯧쯧. 

사내는 그렇게 혀를 차면서 길을 서둘렀다. 

‘불길한 예감은 꼭 이럴 때 정확하게 들어맞는군.’ 

거침없이 내달리는 제라드. 

흙먼지를 자욱하게 일으키며 얼마간을 내달렸을까. 

머잖아 저편에 하늘 높이 뻗은 검은 탑이 보였다. 

루스 마탑이 이제 정말로 코앞이었다. 

그런데 별안간 그곳에서 흙먼지가 하늘 높이 자욱하게 치솟는 모습이 나타나더니, 불꽃이 솟구치는 모습들이 눈에 들어왔다. 

마법전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바람이여.” 

제라드는 바람의 정령을 불러 모았다. 

그 순간, 내달리는 흑마의 속도는 엄청나게 빨라지기 시작하였다. 

두두두. 

제라드는 땅을 힘차게 나아가는 말의 등자에 아슬아슬하게 올라타더니, 그대로 하늘 위로 펄쩍 뛰어올랐다. 중력의 법칙을 벗어난 것처럼 날아오른 제라드는 서서히 몸이 활강하기 시작한 순간, 바람길을 만들었다. 

휘오오오. 

하늘의 파도를 타는 것처럼 날아오르는 제라드는 이내 거침없는 속도로 나아가기 시작하였고, 머잖아 마탑 주변의 풍경들이 속속들이 눈에 들어왔다. 

적색, 황색, 백색의 마법사들이 대치 상황을 벌이는 와중에 곳곳에서 마법이 보였다. 

더 볼 것도 없는 상황이었다. 

제라드는 바람의 길을 끊고 백색 마법사들의 진형 한복판으로 그대로 떨어지기 시작하였다. 

“어리석은 놈들. 그렇게 말해도 모르겠단 말이냐!” 

블레이즈가 불같이 화를 냈다. 

봉쇄령은 이미 마탑 회의에서 통과된 사안이었고, 그 정도의 결정은 황제의 재가가 있어야만 했다. 

즉, 이 모든 일은 이미 국가적인 관점에서 시행되는 칙령이라고 봐도 무방하였다. 

그런데 그들이 이런 식으로 대응한다면 그들 역시 처벌을 면하기 어려웠다. 봉쇄령과 반역죄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된다. 

“블레이즈, 이제 더는 상황을 좌시할 수는 없을 것 같군. 지금부터 봉쇄령을 집행하는 데에 방해되는 자들이 있다면 적으로 간주해도 좋네. 알겠는가?” 

봉쇄령 집행을 위해 이 자리에 와 있는 다이론이 냉정한 얼굴로 그렇게 결단을 내렸다. 

“탑주님, 제가 조금 더 그들을 설득해보겠습니다.” 

“아니, 이미 기회는 충분히 주지 않았나. 지금 이게 그들의 대답이다. 이런 식으로 저들에게 시간을 빼앗기고 있는 사이에도 우리의 진정한 적들은 시시각각 우리의 숨통을 죄어오고 있을 걸세. 내 말이 틀렸는가?” 

“······.” 

블레이즈는 입을 다물었다. 

‘탑주님께서 공을 서두르시는구나.’ 

지난날, 무색 공동에서 다일론은 제라드가 보여준 진실 앞에서도 중립을 표방했다. 그리고 모두 공평하였던 일곱 마탑의 위치가 어떻게 바뀌는지 모두 보았다. 

황제의 권력을 등에 업은 상황인 제라드는 무색의 마법사로서 자신의 위치를 표명하였고, 통합 마탑으로서 일원화를 결정하였다. 

다일론은 실리적인 사람이었으므로,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잘 알았다. 그리고 블레이즈도 그런 다일론을 이해했다. 

‘이렇게 된 이상, 괜히 머뭇거리다가 쓸데없는 피가 더 흐르기 전에 내가 전면에 나서는 게 나을 터.’ 

“케이시, 가자꾸나. 피해는 최소화하는 게 좋을 게다.” 

“네, 알겠습니다, 스승님.” 

머잖아 두 사람의 전신에서 불꽃이 요동치며 솟구쳤다. 

그 순간, 백색 마법사들의 사이에서 작은 소란이 일었다. 불꽃에 몸이 휘감기는 저 특유의 불꽃 마법을 모르는 이가 없었다. 

홍여 마법의 블레이즈와 그의 진전을 잇는 케이시가 함께 나타난 순간, 팽팽했던 긴장감이 깨졌다. 

케이시가 각오를 다지고 있을 때였다. 

오싹. 

‘이 마나는······.’ 

케이시는 이 마나의 감각을 잘 알았다. 

블레이즈 역시 그 감각을 막 느낀 참이었다. 

“아무래도 우리가 나설 필요가 없겠구나.” 

블레이즈가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의 시선은 하늘 저편에 꽂혀 있었다. 

케이시의 시선 역시 그를 따라 하늘로 향했다. 

하늘 높은 곳에서 중력의 법칙을 거스르고 천천히 떨어지는 한 명의 마법사가 보였다. 

누더기 같은 망토를 걸친 그 인물은 후드를 깊게 눌러쓴 그는 누구인지 알아보기 어려웠다. 

그러나 알만한 사람들은 모두 알았다. 

“······그가 직접 온 것인가.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아쿠아 마탑쪽으로 간다고 할 것을.” 

다일론은 혀를 찼다. 

백색 마법사들 사이에 떨어진 제라드. 

그가 나타난 모습에 백색 마법사들이 모두 놀란 표정으로 머뭇거렸다. 그렇지 않아도 홍염의 마법사 블레이즈가 나타난 이후로 모두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머뭇거리던 상황이었다. 

“놈은 적이다! 망설일 것 없다. 루스 마탑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싸워라, 마탑의 제자들이여!” 

마법사 중 누군가가 그렇게 외쳤다. 

그것이 채찍질이 되었음은 분명했다. 

잠깐 소강상태가 되었던 대치 상황 속에서 백색 마법사들의 눈빛에 다시 적의가 드리웠다. 

전면에서 대치하는 이들은 블레이즈와 케이시를 향하여 적의를 품었고, 뒤쪽에 있는 마법사들은 느닷없이 나타난 마법사를 향해서 적의를 발산했다. 

그러나 그들이 마법을 쓰기도 전에 제라드의 신형은 검은 잔상을 남기며 쭉 뻗어 나갔다. 

“섀도우!” 

마법사 중 누군가가 그렇게 소리쳤다. 

그러나 그 마법이 무엇인지 아는 것과 대비하는 것은 애초에 전혀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헉!” 

조금 전의 상황을 독려하였던 마법사는 기겁하며 뒤로 주춤주춤 물러나다가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제라드가 거칠게 멱살을 잡아당겼기 때문이다. 뭘 어떻게 해볼 새도 없이 일어난 일이었다. 

“묻겠다. 루스 마탑은 마탑 회의의 결정사항을 따르지 않겠다는 얘기겠지?” 

“그, 그건······.” 

“똑똑히 대답해라. 그대의 대답에 그대를 비롯하여 이곳의 무수한 사람의 목숨이 걸려 있다.” 

꿀꺽. 

멱살을 잡힌 마법사는 마른 침을 삼켰다. 

그러는 사이 제라드는 그의 체내에서 느껴지는 마나의 양으로 상대의 직급을 짐작하였다. 

‘이 정도의 마나 수준이라면 1급 마법사인가.’ 

아마도 어떤 대답을 할 수 없는 위치이리라. 

바로 그때였다. 

쉬아악! 

저편에서 날아드는 바람의 칼날. 

제라드와 함께 그의 손에 잡혀 있는 마법사까지 한꺼번에 해치우겠다는 의도다. 

그 순간, 제라드의 망토가 나풀거렸다. 

마나가 개방된 것이다. 

오른손을 뻗은 순간, 반투명한 막이 그의 측면을 가득 메웠다. 

쿠쿠쿵! 

반투명한 막이 가볍게 흔들리는 가운데, 제라드의 시선이 저편에 서 있는 마법사에게 닿았다. 중년의 마법사다. 

“그대도 잘 알고 있겠지만, 조금 전의 마법은 나와 함께 그대까지 베어버리려고 했다.” 

“······.” 

“한 가지 묻지. 저자는 원로 마법사인가?” 

“그, 그건······.” 

그는 지금 자신의 목숨까지 해치우려던 상대 때문에 아직도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었다. 어리석은 충섬심이었다. 

제라드의 눈빛이 서늘해지자, 마법사는 이내 이를 질끈 깨물며 대답했다. 

“맞습니다. 저분은······ 엑시오르 원로 마법사님입니다.” 

“그렇군. 잘 생각했다. 그릇된 것을 알고서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는 법이다.” 

제라드는 사내의 멱살을 놓고 고개를 돌렸다. 

엑시오르. 그는 원로 마법사라고 하였다. 

조금 전의 마법력만 봐도 대충 짐작은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가 마탑 회의의 결정사항인 봉쇄령에 따르지 않았다는 것은 그 역시 4인의 후계자들 사이의 일을 잘 알고 있다는 얘기였다. 

제라드는 엑시오르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러자 두 사람의 사이에 있던 백색 마법사들이 서서히 비켜서기 시작했다. 

“이 겁쟁이 놈들!” 

엑시오르는 마나를 개방하면서 손을 하늘 높이 뻗었다. 

휘오오오오! 

매서운 바람이 불기 시작하였다. 

서서히 강해지는 바람.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엑시오르의 전신에서 빛이 일렁이더니, 바람이 한 번에 증폭되었다. 

바람은 폭풍이 되었다. 

고오오! 

폭풍은 이제 이 일대의 모든 것을 집어삼키기 시작하였다. 

“으아악!” 

뒤로 물러나던 루스 마탑의 제자들도 그 바람에 휘말려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그러나 엑시오르는 그런 것 따위는 아무 신경도 쓰지 않는 듯했다. 

“루스 마탑에 겁쟁이는 필요 없다. 오직 강력한 마법을 따르는 강철의 의지를 갖춘 자들만이 백색의 무게를 짊어질 수 있다!” 

엑시오르가 무섭게 소리쳤다. 

강력한 마법. 저 정도면 가히 자연재해에 가까운 위력이다. 바람 속성의 마법을 저 정도로 쓸 수 있는 마법사는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된 일인지, 몰아치는 바람 속에서도 제라드는 흔들림 없이 앞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엑시오르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대, 대체 어떻게······.” 

“그대의 탑주가 내게 아주 좋은 가르침을 주었다.” 

“서, 설마 퍼, 퍼스트 오리진······.” 

엑시오르가 경악했다. 지금 이 순간, 제라드를 중심으로 기이하게 요동치는 이 마나의 흐름! 

그 순간, 제라드가 손을 뻗었다. 엑시오르는 자신의 모든 마나가 꺾이며, 뒤틀려 균형을 잃는 것을 느꼈다. 

“이럴 수가!” 

엑시오르가 그렇게 중얼거린 순간, 모든 바람은 찢기며 사라졌다. 

그리고. 

쿠웅! 

“크으으윽!” 

엑시오르는 자신을 짓누르는 엄청난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바닥에 처박히듯 쓰러졌다. 

순식간에 벌어진 상황이었다. 

“으아아!” 

폭풍이 사라지자마자 중력의 법칙에 따라 떨어지는 마법사들. 그 수가 적지 않았다. 

“비틀려라.” 

제라드는 하늘을 향해 두 손을 뻗고 공간을 일그러뜨렸다. 

그러자 사방에 떨어지던 마법사들이 별안간 한곳으로 모여들었고, 중력의 법칙에서 벗어나 안전하게 땅에 착지하였다. 그들은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알지 못하였다. 

“세상에······.” 

엑시오르를 제압하고 루스 마탑의 마법사들까지 구하는 제라드의 모습에 모두가 말을 잇지 못하는 가운데. 

“루스 마탑은 마탑 회의의 결정을 받아들여라. 그렇지 않으면 집행의 칼끝은 그대들의 목숨과 지금껏 쌓아올린 모든 지식의 산물을 베어버릴 것이다.” 

제라드의 천둥 같은 고함이 울려 퍼졌다. 

그렇잖아도 루스 마탑 마법사들의 전의는 완전히 꺾인 상황이었다. 끝까지 저항해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였던 원로 마법사 엑시오르도 지금 제라드의 앞에서 고개를 처박고 옴짝달싹도 못하는 상황. 이미 싸움은 끝난 것이다. 

블레이즈가 그런 제라드를 보면서 머리를 긁적였다. 

“어느 쪽도 피 흘리는 일 없이 잘 마무리되어서 다행이긴 한데······. 우리 탑주님 속은 지금쯤 까맣게 타들어 가고 있겠군.”

  

< 주도권2 > 끝

ⓒ 양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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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도권3 >

입성. 

루스 마탑의 문은 열렸다. 

좌우로 도열한 백색 마법사들은 마탑 회의의 결정을 드디어 받아들인 것이다. 

최상층에서는 원로 회의가 열렸고, 그 자리에는 엑시오르 다음으로 발언권을 가진 원로 마법사가 대신하는 가운데, 긴 회의가 진행되었다. 

“네 녀석은 정말 바쁘게도 돌아다니는구나.” 

“루스 마탑의 일은 제가 직접 와서 정리해야만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뭐, 그건 좋다만. 그렇게 모든 일을 혼자 도맡아 하려다가는 언젠가 힘에 부치는 때가 올 거다. 너무 무리하지 마라. 세상은 혼자 살아가는 게 아니야.” 

“네, 스승님.” 

제라드의 대답을 들으며 블레이즈는 씩 웃었다. 

단단한 대답이다. 

자신의 대답을 책임질 수 있을 정도로 어른이 되었다는 얘기일 것이다. 

‘녀석, 그동안 성장했던 건 마법사로서의 역량만이 아니었다는 얘기군. 더는 어리게 볼 수 없겠어.’ 

“그럼,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이후의 일은 두 마탑의 탑주들께 맡기겠습니다.” 

“그래, 여기 일은 이제 우리에게 맡겨라. 그리고 너는 이제 동부의 일을 신경 써라.” 

동부의 일. 

베너하임 공국의 일을 말하는 것이다. 

“적이 우리의 내부가 완전히 정리될 때까지 줄곧 기다려줄 것 같지는 않구나.” 

푸르륵. 

고개를 터는 말을 쓰다듬는 제라드. 

“그래, 푹 쉰 모양이구나.” 

반나절. 

전투가 끝난 뒤로 벌써 그런 시간이 흘렀다. 

‘돌아갈 땐 바람의 정령을 이용해서 더 빠르게 돌아가는 게 좋겠어.’ 

제라드가 막 그렇게 생각하며 말 위에 오르려고 할 때였다. 

“저, 저기······.” 

별안간 뒤쪽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우뚝 멈춘 제라드. 

그곳으로 고래를 돌리자 머뭇거리는 한 여인의 모습이 보였다. 

‘2년인가.’ 

제라드에겐 모든 일들이 바로 불과 얼마 전의 일처럼만 느껴지는 시간들이다. 하지만 그동안 그녀의 모습은 많이 바뀌어 있었다. 분위기도 그렇고, 모습도 그렇다. 그녀는 이제 완연히 성숙해진 모습으로 제라드의 앞에 있었다. 

“오랜만이야.” 

“응.” 

두 사람 사이엔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제라드는 어째서 그들 사이에 이런 무거운 기류가 흐르게 된 것일까, 잠깐 생각해보았다. 답은 나오지 않았다. 

“루스 마탑에 관한 건 이제 스승님과 다일론 탑주께 맡길 참이야. 케이시, 네게도 부탁할게.” 

“······.” 

제라드가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돌릴 찰나였다. 

“저기! 너, 너무 변하지 마.” 

“······.” 

제라드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네가 어떤 자리에 있다고 해도 넌 제라드야. 그렇지?” 

그녀의 물음은 어딘가 간절하게 들렸다. 

제라드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그것에 관해 잠깐 고민했다. 이전의 자신과 지금의 자신. 어떤 것이 바뀌었고, 어떤 것이 달라진 걸까. 

“아마도 그럴 거야.” 

제라드는 조금은 자신 없는 목소리로 그렇게 대답했다. 

그러자 케이시가 다가와서 제라드의 팔을 잡아당겼다. 

“사람의 본질은 바뀌지 않아. 난 알아!” 

“······.” 

제라드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케이시의 큼지막한 눈동자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있는 게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면서도 고집스럽게 빛나는 그 눈매에 제라드도 아주 오랜만에 웃었다. 

“그래, 케이시. 네 말대로야. 널 보니까 알겠어.” 

제라드는 황야를 가로질렀다. 

꺄르르. 

바람의 정령이 웃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마나가 그와 흑마의 전신을 휘감고 있었다. 

바람을 탄다고 하는 표현은 바로 이럴 때 두고 하는 말일 터였다. 

‘동부의 상황은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 크루드 마탑의 마법사들이 잘 버텨주고 있을까?’ 

만약 내가 적의 입장이었더라면······. 

한참 그런 생각에 잠겨 있을 때였다. 

번뜩. 

제라드는 고개를 돌렸다. 

잠잠하였던 베리타스가 별안간 동쪽을 향해 고개를 홱 돌렸다. 그 눈동자가 심상찮게 빛나기 시작하였다. 

[구원의 서 개방 감지. 아스트랄 라인에 새겨진 정보 일부 유출. 해당 정보 2종 비문에 해당.] 

“뭐?” 

제라드가 그렇게 되물은 순간이었다. 

별안간 제라드의 눈앞에 세계수에서 흘러나온 2종 비문의 영상이 엄청난 속도로 지나갔다. 

정신이 아찔해지는 순간 속에서, 제라드는 별안간 머리가 깨질 것 같은 통증을 느꼈다. 

“으으으윽!” 

제라드가 비명을 내지르며 몸을 부들부들 떠는 가운데. 

별안간 제라드의 의식은 남부 황야의 땅이 아니라, 먼 저편의 황야, 그리고 그 너머에 존재하는 도시로 날아가고 있었다. 

꽈르르릉! 

무섭게 요동치는 벼락. 

그곳에 등이 굽은 한 마법사가 서 있었다. 

죽은 자들이 수도 없었고, 시체 썩은 내가 진동하였다. 

요동치는 마력 속에서 별안간 그의 몸이 뒤틀리기 시작하였다. 

뚜두둑! 

뼈가 부서지고 다시 맞춰졌다. 

그런 가운데, 그의 온몸에서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끄어어.” 

그는 죽어가는 신음을 길게 토하였다. 

이윽고 그의 온몸에서 살점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하였고, 그의 온몸에서 푸른빛의 기운이 세차게 흘러나오며 그 자리를 대신하였다. 

스아아아. 

숨을 토하였건만, 흘러나오는 것은 냉기였다. 

번쩍. 

눈동자가 있어야 할 곳에서 출렁이는 어둠. 그 속에서 번뜩이는 푸른 안광! 

[흘흘흘. 드디어 손에 넣었구나. 불멸영생을 말이야.] 

“축하한다, 크라니움.” 

[······감사하다는 말로는 지금 나의 이 마음을 다 전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분께 향한 충성은 결과로서 보여드리겠다.] 

크라니움. 

그는 음산한 목소리로 말해왔다. 

그런데 그 목소리는 더는 육성의 그것이 아니었다. 

일종의 사념파. 

고개를 돌린 순간, 그의 흉측한 모습이 드러났다. 

누더기 같은 검은색 로브를 걸친 그의 얼굴에는 백골만이 앙상하였고, 그 안에서는 푸른빛의 영혼이 휘돌고 있었다. 

그것은 죽은 자를 일깨우는 마법과 비슷한 듯하였으나, 그와는 또 전혀 다른 것이었다. 

[지금이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 

크라니움은 그렇게 소리치더니, 양손을 펼쳤다. 

고오오오오. 

그의 마나에 온 땅에 새겨진 마법진이 요동치며 반응하였다. 각 축에 끼워놓은 영혼석이 그 사악한 힘에 반응하며 힘이 점차 증폭되어가는 가운데, 이 일대에 가득하였던 시체들이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생환의 마법이었다. 

머잖아 육신의 살점이 불타오르기 시작하더니 그 안에서 푸른색 불꽃에 휘감긴 뼈다귀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끼아아아······. 

비명과도 같은 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졌다. 그 귀곡성을 듣는 것만으로도 보통 사람은 미쳐버려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으나, 크라니움에게는 탄생의 기쁨을 노래하는 것처럼 들렸다. 

[자, 끝에서 모든 것이 다시 시작되는 순간이다.] 

해골 마법사는 그렇게 웃었다. 

우우우우. 

망자들의 울음이 울려 퍼졌다. 

그 수는 고작 수십, 수백 정도가 아니다. 

이곳은 베너하임 공국. 

지금 이 순간, 이 공국에 푸른 영혼의 파도가 퍼져 나가고 있었다. 

[모든 것을 정화한다.] 

크라니움이 외친 순간, 기기기 뼈들이 맞물리며 이상한 소리를 내는 가운데, 스켈레톤들이 기어 와서 크라니움을 떠받들었다. 

망자의 군대가 움직이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탁. 

책이 덮이는 소리가 들렸다. 

붉은색으로 타오르는 빛이 일렁이는 가운데, 카누스는 고개를 돌렸다. 

머잖아 그의 온몸이 그림자에 녹아들 듯이 사라지기 시작하더니, 단숨에 먼 곳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곳은 대신전. 공국에서도 가장 큰 신전으로서 과거에는 빛의 신 엘타르를 모시는 신전이었으나, 지금은 엉뚱하게도 어느 한 위대한 존재의 터가 되어 있었다. 

저벅저벅. 

그의 발걸음이 복도에 울려 퍼졌다. 

머잖아 신랑으로 이어지는 복도식 본당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가 그 안쪽까지 걸어갔을 때였다. 제대의 중심부에서 한 존재가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그 순간, 대신전 전체가 뜨거운 열기에 잠기는 듯하였다. 

어둠 속에서 선명하게 타오르는 황금빛 눈동자가 나타나자, 카누스는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위대한 신 앞에 고개를 조아리는 인간처럼 말이다. 

“메시우스 님이시여,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르르릉. 

인간의 목울대에서는 나올 수 없는 울음과 함께 그 존재가 어둠에서 걸어나왔다. 타는 듯한 붉은 머리칼의 사내는 나체였다. 그의 몸 중앙을 가로로 가로지르는 흉측한 상처는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으나, 이제 아물었다고 할 수 있으리라. 

“제물을 준비해라. 이번에는 그 불완전한 소멸의 빛 따위에 물러서는 일 따위는 없다. 이 세상을 올바르게 정화하는 것은 바로 우리 드래곤의 사명이다.” 

“위대한 분의 뜻대로 하소서.” 

카누스는 고개를 조아렸다. 

아르메스 제국의 동부 국경에 존재하는 요새 샤프라스. 

긴 세월 평화에 잠겨있던 이곳은 지금 이 순간, 무거운 어둠에 잠겨 있었다. 

“베너하임에서 적들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조금 전의 정보 때문이었다. 

베너하임 공국에서 샤프라스 요새까지는 불과 사흘 남짓의 거리. 대규모 병력이 쳐들어온다고 해도 닷새를 넘기지 않을 정도의 거리였다. 

각지에서 지원을 나온 병력의 수는 수천에 육박하였고, 기사단의 수도 적지 않았으나, 문제는 그들이 전투 경험이 거의 없다는 사실이었다. 

거기다가 그들의 전투 경험이라는 건 기본적으로 사람과의 전투였다. 

“쉽지 않은 전투가 될 것이오.” 

현재 크루드 마탑의 임시 탑주직에 있는 케이틀란의 말에 나머지 마법사들이 입을 다물었다. 

그들의 얼굴엔 벌써 패색이 짙었다. 그들도 지금은 모두 이야기를 알고 있었다. 수일 전 아리만의 마탑 회의에서 있었던 일과 풀고르의 죽음과 관련된 그 일화에 관한 이야기를 전부 말이다. 

정통성의 상실. 그 사실을 받아들인 이후로 그들은 줄곧 이런 상황이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하리라. 케이틀란 역시 절망하고 낙심하였으니까. 

하지만. 

“어깨를 펴고 고개를 드시오. 바뀐 것은 없소. 우리는 탑주님의 전철을 밟지 않을 것이오. 해야 할 일을 하고, 청색의 이름에 부끄럽지 않도록 싸울 것이오. 그리고 증명해내고 말 것이오.” 

케이틀란은 그렇게 말했지만, 모두가 그 말을 받아들인 것 같진 않았다. 

‘정말 큰 일이로구나.’ 

휘이이이이. 

동부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몹시도 스산한 바람이었다. 

성벽에 선 케이틀란은 무거운 얼굴로 각오를 다졌다. 

지금껏 마법사들을 여러 번 불러 모아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하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말이란 많이 할수록 가볍게 흩어지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줘야만 한다. 나의 각오를, 그리고 청색의 의지가 꺼지지 않았음을 말이다.’ 

케이틀란이 그렇게 각오를 다지며, 주먹을 말아 쥐고 있을 때였다. 

“케이틀란 원로님.” 

“벨자 원로.” 

케이틀란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 벨자가 있었다. 그를 따라서 나온 모양이었다. 그의 옆에 선 그녀 역시 굳은 얼굴로 탁 트인 동부 땅 저편을 눈에 담았다. 

꾸르릉. 

시꺼먼 하늘의 저편에서 불길한 벼락이 치는 모습이 보였다. 

“수도에서 지원을 올까요.” 

“아마도 지원은 올 것이오. 하지만······ 이번 싸움에 필요한 정도의 전력을 보내주진 못할 것이오. 현재 각 마탑은 봉쇄령을 시행하는 것만으로도 거의 전력을 쏟고 있으니까. 그들의 힘을 하나로 다시 모으는 데만 해도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오.” 

케이틀란은 냉정하게 그렇게 말했다. 

그게 현실이었다. 

그들에겐 시간도 인력도 부족하다. 

상대는 망자의 군대. 

어설픈 전력은 오히려 적들의 힘을 보태는 꼴이 될 것이다. 

그런데 벨자는 그의 말에 썩 공감하지 않는 얼굴이다. 

“글쎄요. 케이틀란 원로님께서 이번 싸움에서 필요한 전력을 어떻게 보고 계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단 한 사람만 이곳에 있어준다면 얘기가 전혀 달라질 수도 있겠지요.” 

케이틀란은 벨자의 얼굴을 보았다. 

벨자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얼굴이었다. 

그 확신에 찬 얼굴을 본 순간, 케이틀란도 이상하게 조금 전까지 무거웠던 가슴이 가볍게 풀리는 것을 느꼈다. 

냉정하게 생각해보자면 그것은 몹시 비상식적인 기대였다. 

그러나 영웅의 출현이나 전설이라는 건 어쩌면 바로 이런 순간에 생겨나는 것일는지도 몰랐다. 

“이 싸움의 주도권······. 그건 저쪽이 아니라, 우리 쪽에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우리가 이곳을 지켜낸다면 우리의 청색은 과오를 씻어낼 수 있게 될 것이고, 그때는 이곳에 대마법사가 함께할 테니까요.” 

케이틀란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대마법사. 

그 별칭은 지금껏 오직 단 한 사람에게 주어졌던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벨자는 그 젊은 마법사에게 그 별칭을 붙여 부르고 있었다.

< 주도권3 > 끝

ⓒ 양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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