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화 (23/38)

< 무색의 마법사1 >

“오만하고 무지한 인간 놈들!” 

드래곤의 붉은색 머리칼이 하늘 높이 올올이 흩날렸다. 

그 진노 앞에 드라이곤은 전율하였다. 

눈앞의 존재가 무엇인지는 몰랐다. 하지만 그가 인간이 아닌 그 무엇이라는 것만큼은 너무나도 명백했다. 

‘애송이는 이런 존재와 싸우고 있었단 말인가.’ 

꿀꺽. 

드라이곤은 마른침을 삼키며 죽음을 각오했다. 그 정도의 각오도 없이, 눈앞의 존재를 막는다는 것은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고오오. 

이 일대의 공기가 변했다. 

뜨겁게 타오르는 열기에 휘감겼다. 

드래곤에게서 흘러나오는 마나는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거대했고, 몸에서 터져 나오는 불꽃은 점점 더 뜨겁게 기세를 더 해갔다. 

“이거 애송이 놈한테 당당하게 소리쳐놓았는데 큰일이군.” 

드라이곤은 바짝바짝 타들어 가는 입술을 혀로 핥으며 긴장감을 애써 털어내고 자신의 애병, 이베란티아를 꽉 쥐었다. 

눈앞의 존재가 제아무리 절대적인 존재라고 해도 그 역시 쉽게 당하진 않는다. 

“후우우.” 

드라이곤은 날숨을 깊이 토하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이제부턴 오직 눈앞의 적에게만 집중한다. 

“잿더미로 만들어주겠노라.” 

드래곤의 무궁한 진노가 막 눈앞으로 쏟아질 찰나. 

쿠구구구구궁! 

별안간 땅이 무섭게 뒤흔들렸다. 

느닷없이 바닥이 요동치자, 드래곤의 시선이 돌아갔다. 지금 그의 시선은 영혼석 앞에 있는 제라드에게 닿아 있었다. 

바로 그 순간, 조금 전까지 분노로 일그러졌던 드래곤의 눈빛이 변했다. 지금 그 절대적인 존재의 눈동자에 새로운 감정이 떠올랐다. 그것은 두려움이었다. 

‘지금이다!’ 

드라이곤은 왜 갑자기 드래곤이 저러는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바로 지금이 기회라는 것만큼은 알았다. 

“타합!” 

땅을 박차고 솟구치듯이 날아오른 그의 검이 허공을 찢어발기며 매섭게 쏟아졌다. 전신에서 솟구치는 오러가 그의 칼끝으로 모여들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하찮은 놈이 감히!” 

화르르륵! 

순식간에 눈앞으로 치솟는 불꽃의 장벽. 하지만 드라이곤도 물러나지 않았다. 

‘지금 물러나면 다시 기회는 없다!’ 

크룩스가 익힌 마법을 자르는 검술은 바로 드라이곤의 검술. 마법의 벽 따위는 손쉽게 잘라낼 수 있었다. 

쉬아아악! 

화염을 찢으며 달려드는 드라이곤의 돌파력은 무서웠다. 

푸확! 

사선으로 몸을 가로지르는 날카로운 검상. 평범한 인간이라면 치명상이었을 공격이었다. 하지만 상대는 인간이 아니었다. 

“크으윽. 이 벌레 놈이!” 

드라이곤의 얼굴에 낭패의 빛이 어린 순간, 불꽃의 폭풍이 매섭게 쏟아졌다. 

퍼어엉! 

드라이곤을 통째로 집어삼키는 폭연에 휘감긴 드라이곤의 몸은 튕겨 날아가서 바닥에 처박혔다. 

그러나 드래곤은 더는 그에게 신경 쓰지 못했다. 별안간 드라이브 제로의 빛줄기가 드래곤의 몸을 슥 훑고 지나간 것이다. 

“크학!” 

드래곤이 비명을 내질렀다. 

빠른 속도로 아물던 몸의 상처가 갑자기 쭉 벌어졌다. 하지만 그가 비명을 내지른 이유는 단순히 고통 때문만이 아니었다. 

“소, 소멸의 빛! 소멸의 빛이란 말이냐!” 

틀림없었다. 이 반응, 이 저주받은 빛을 그가 잊어버렸을 리가 없었다. 

쿠구구궁! 

땅의 굉음은 바닥에 스며든 영혼석 정제 의식이 갈기갈기 파괴되고 있다는 증거였다. 

이제 드래곤의 눈에서 감돌았던 오만은 지워지고 없었다. 투쟁심도 없었다. 두려움. 그 눈빛에는 오직 두려움만이 가득했다. 

“저 빛을, 저 빛을 다시 보게 될 줄이야······.” 

그는 바로 그곳을 벗어났다.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저 빛에 휩쓸리면 ‘이번에야말로’ 정말 끝이다. 

그러는 사이 땅의 떨림은 기세를 더해가고 있었다. 

쩌저적! 

땅에 균열이 발생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땅에 칼을 꽂은 채로 힘겹게 일어나서 숨을 몰아쉬는 드라이곤은 황망하게 멀어져가는 초월적 존재를 지켜볼 따름이었다. 

“노, 놈은 저 빛을 두려워하고 있다······.” 

드라이곤은 어느새 이 일대를 가득 메운 빛을 멍하니 지켜보고 있었다. 빛은 몹시 고요했다. 그것은 이 땅에 깃든 모든 더러움을 정화하는 빛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잠깐이었다. 

“이건······ 그런 게 아니로구나. 정화가 아니라······.” 

드라이곤이 멍하니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것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다가오는 빛에 홀려버리기라도 한 듯했다. 

바로 그때였다. 

고요한 빛 중심에서 별안간 균열이 발생하였고, 이내 빛이 갈기갈기 찢어지더니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바로 그 순간, 세상에 찾아들던 적막은 깨졌다. 

광채의 안쪽에 남은 붉은빛의 기운이 무섭게 일렁이더니 이내 폭발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콰콰콰쾅! 

굉음이 모든 것을 휘감았다. 

단번에 광장의 분수가 사라져버리고 주변 건물이 일거에 휩쓸렸다. 

재앙. 

이 땅에 재앙이 현현하고 있었다. 

“끄응.” 

드라이곤이 신음을 토하며 일어났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하늘은 이제 검게 물들어 있었다. 

“살아 있군······.” 

드라이곤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자신의 몸 상태를 살폈다. 오러의 균형이 무너지면서 단련된 몸은 엉망진창이었다. 

“······엉망진창인 건 내 몸만이 아닌가.” 

드라이곤의 눈에 처참한 동부 광장 일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광장은 물론이요, 이 일대의 모든 건물이 전부 폭삭 무너진 모습이 보였다. 

이제 이 땅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끙.” 

드라이곤은 비틀대면서 이 모든 파괴의 중심부를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외곽에서 그 내부를 들여다 보았다. 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드리웠다. 

“거 애송이 놈의 명줄이 참으로 길기도 하구나.” 

거대한 크레이터. 그 중심에 제라드가 쓰러져 있는 모습이 보였다. 어쩐지 멀쩡하게 살아 있을 것 같더라니, 그의 예감이 그대로 적중한 순간이었다. 

휘오오오. 

쓸쓸한 바람이 불어왔다. 

드래곤이 내뿜던 무시무시한 열기는 이제 없었다. 머잖아 저 멀리 뒤쪽에서 병사들이 달려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모든 것을 소멸시키는 빛인가······.” 

드라이곤은 막연하게 그렇게 중얼거렸다. 

꿈을 꿨다. 

그것은 아주 먼 옛날의 기록. 

최초의 마법사와 그의 유지를 잇는 7인의 마법사. 그리고 모두가 잊어버린 한 사람을 포함한 총 여덟 명의 후계자들이 마침내 다다르게 된 결말의 기록이다. 

그 모든 기록이 순차적으로 재생되다가 마침내 끝났을 때. 

번쩍. 

제라드는 눈을 떴다. 푸른색 동공이 수축과 이완을 거듭했다. 눈앞에 음각이 아름답게 아로새겨진 천장의 풍경이 보였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제라드의 눈앞에는 바로 조금 전까지 눈앞에 보였던 광경이 생생하게 연이어 펼쳐지고 있었다. 

‘녹스······.’ 

제라드는 그 이름을 속으로 되뇌었다. 어둠의 속성을 짊어졌던 그 마법사의 최후는 몹시도 비참하고 처참하였다. 

“그게 비어있던 마지막 퍼즐이었던가.” 

그렇게 중얼거린 순간이었다. 

스르륵. 

제라드의 시야에 별안간 베리타스가 나타났다. 언제나처럼 똑같은 초록색의 눈동자는 제라드를 물끄러미 들여다보고 있었다. 

“베리타스, 내가 본 꿈의 기억. 그게 바로 마스터 드라이곤께서 내게 준 성유물 조각의 파편이야?” 

끄덕. 

베리타스가 위아래로 흔들리더니, 별안간 촤라락 펼쳐지면서 비문의 목차가 나타났다. 

-1종 비문:엘레멘탈 마스터 

-1종 비문:8인의 후계자 

-1종 비문:알라모윈 몰락 

-1종 비문:후계자들의 결말 

-1종 비문:녹스 

-2종 비문:??? 

“후계자들의 결말인가······.” 

제라드는 자신이 손에 넣은 마지막 퍼즐 조각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그 내용은 사건과 사건을 잇는 교두보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제 모든 게 명확해졌다.” 

제라드는 끄응 신음을 토하며 몸을 일으켰다. 대체 며칠을 누워 있었는지, 온몸이 물을 먹은 솜처럼 무거웠고 두통은 극심하였다. 그러다가 별안간 마지막의 싸움이 뇌리를 스쳤다. 

최초의 종족. 그리고 영혼석 정제 의식······. 

“그러고 보니, 그 이후에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제라드가 그렇게 중얼거리며 뒤늦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크고 화려한 방은 귀빈실이었다. 아마도 정제 의식에 스펠 브레이커를 사용하여 개입한 직후, 의식을 잃은 제라드를 이곳으로 옮겨온 모양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누군가 온다.’ 

제라드는 밖에서 느껴지는 기척에 문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머잖아. 

똑똑. 

“실례하겠습니다.” 

나직한 목소리와 함께 방문을 열고 들어오는 시녀. 그녀는 익숙한 태도로 고개를 꾸벅 숙이다가 얼어붙었다. 제라드가 침대에 앉아서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침착한 태도로 인사해왔다. 

“일어나셨군요, 나리.” 

“동부 광장 이후로 며칠이 흘렀습니까.” 

“오늘로 닷새가 흘렀습니다.” 

“닷새. 그 이후에 대체 무슨 일이······.” 

제라드가 그렇게 묻다가 이내 입을 다물었다. 시녀에게 이런 걸 묻는다고 해도 알 리가 없었다. 

“지금 마스터 드라이곤은 어디에 계십니까.” 

벌컥 문이 열리며 산발의 사내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오셨군요.” 

제라드가 의자에서 일어나 드라이곤을 반겼다. 

그러자 드라이곤이 입가를 씰룩였다. 

“허. 애송이 놈이 아주 튼튼하기도 하군. 지난 며칠 동안은 도저히 일어날 것처럼 보이지 않더니 말이야. 일어났다는 말을 들어서 혹시나 했다만.” 

“저도 죽는 줄 알았습니다.” 

“큭큭. 제법 너스레를 떨어대는 걸 보니 이제 괜찮은 모양이로구나.” 

드라이곤이 그렇게 말하며 제라드의 마주 앞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싸움이 격렬했구나.’ 

그와 얼굴을 마주한 지금에야 비로소 보이는 것이 있었다. 외관의 찰과상이나 그을려 타버린 머리칼 따위는 별 대수롭지 않다. 

하지만 눈빛. 처음 보았을 때에만 해도 형형한 빛을 토하던 눈빛이 다소 탁해져 있었다. 격렬한 싸움 때문에 그의 내외부의 절묘한 균형을 이루던 마나의 흐름이 깨진 것이다. 

“그만 봐라, 이놈아. 사내놈의 뜨거운 시선 따위는 받고 싶지 않다. 그보다는 나나 너나 서로에게 듣고 싶은 게 있을 거다. 먼저 네가 듣고 싶은 것부터 말해라. 대답해줄 테니.” 

“저는 그 이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듣고 싶습니다.” 

“음, 네가 그 역겨운 물건에 접촉한 이후라면······.” 

드라이곤은 담담한 태도로 어떤 싸움이 있었는지 모두 설명했다. 그의 손끝에서 터져 나온 빛에 드래곤이 두려움에 빠진 모습으로 도망쳤다는 부분에서 제라드는 눈살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뭐냐, 질문은 그게 전부냐? 그럼 이제 내가 좀 묻자.” 

“예, 말씀하세요.” 

“넌 대체 뭘 알고 있는 거냐. 내 짐작대로라면 너는 이 모든 일이 일어나게 된 경위를 알고 있다. 내 말이 틀렸더냐?” 

“짐작하고 계신대로일 겁니다.” 

“으음, 역시 그런가······. 좋다, 그럼 한 가지 더 묻자. 그 마법. 마지막에 사용한 그 마법은 뭐냐.” 

“스펠 브레이커라는 고대의 마법입니다. 마법을 파괴하는 아주 강력한 마법입니다. 거의 반쯤은 도박을 건 셈이었는데, 그게 운 좋게 먹힌 모양이군요.” 

“흐으음, 그게 마법을 파괴하는 마법이라고?” 

드라이곤이 그렇게 되물으며 눈살을 찌푸렸다. 제라드의 눈동자를 보면 거짓말이 아니라는 건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건 단순히 그런 것이 아니었다. 

“네 말이 사실이라면 스스로도 잘 모르는 마법을 사용한 모양이군. 마법에 관해서는 너보다 잘 아는 건 아니지만, 내 직감이 말하는데, 그건 단순히 그런 마법이 아니었다. 그보다 훨씬 더 위험한 무엇인가였어.” 

드라이곤의 경고에 제라드는 생각에 잠긴 얼굴을 했다. 

‘성유물에는 아직 밝혀지지 않은 비밀이 많다. 어쩌면 1종 비문의 모든 사실을 다 밝힌 지금······ 2종, 혹은 3종의 비문이 서서히 반응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뭐, 여기서 알 수 없는 걸 구구절절 떠드는 것보다는 자세한 건 직접 보는 게 낫겠지. 지금 당장 현장에 가보는 건 어떠냐. 네 녀석의 몸이 그 정도로 괜찮아졌다면 말이다.” 

“예, 좋습니다. 지금 당장 가시죠.” 

제라드도 마침 그렇게 제안하려던 참이었다. 방에서 나온 두 사람은 성 밖으로 나와서 준비된 말 위에 올랐다. 

“아, 그리고 깜빡하고 말하지 않은 것 같은데, 마음의 준비를 해둬라. 네가 지금부터 두 눈으로 보게 될 것들은 마법의 흔적만이 아니니까 말이야.” 

제라드가 드라이곤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가운데. 

그그그긍. 

성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열렸고, 드라이곤이 앞장서서 달려나갔다. 

히히힝! 

제라드는 바로 그 뒤를 따랐다. 그리고 동부 광장으로 향하는 큰길에 올랐을 때, 그는 비로소 드라이곤이 했던 말의 의미와 무게를 실감할 수 있었다.

< 무색의 마법사1 > 끝

ⓒ 양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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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색의 마법사2 >

동부 광장의 큰길에 다다르자 이곳저곳에 피범벅이 된 사람들과 고통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리고 그 사람들 사이에서 부모를 찾는 아이들의 모습과 절규로 가득 찬 울음소리가 뒤섞여 있었다. 

제라드는 어느새 멈춰 서서 그 풍경을 눈에 담고 있었다. 

아르메스 제국 그 어느 곳보다도 번화한 도심의 풍경은 온데간데없이 동부 광장 일대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지금 이곳엔 오로지 공허한 폐허의 흔적과 고통에 신음하는 자들뿐이었다. 

“삶의 터전만을 잃은 건 그나마 나은 일이다. 그러나 예기치 못한 재앙에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다. 너무나도 많은 사람이 말이야.” 

“······.” 

제라드는 드라이곤의 말에 입을 다물었다. 

‘나는, 나는 그들에 관해서는 조금도 생각하지 못했어.’ 

이곳에 다다르기까지 제라드의 머릿속에 저들은 없었다. 

하나로 정리된 1종 비문의 사건들과 마지막에 나타났던 최초의 종족을 표방하는 존재. 그리고 사방으로 쏟아지던 새하얀 빛까지······. 

차례로 일어나는 일들에 정신이 팔려서 정작 눈앞에 펼쳐진 중요한 일들을 보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 

“나는 네 녀석에게 어떤 사명이 있는지 모른다. 하지만 말이야. 무슨 일을 하든 와중에 절대로 잊어선 안 되는 건 바로 지금 눈앞에 있는 이 풍경이다. 네가 보고자 했던 ‘현장’과 내가 보여주고자 했던 ‘현장’의 차이는 바로 이거다.” 

드라이곤은 담담하게 제라드를 꾸짖어왔다. 

무슨 할 말이 있으랴. 

주먹을 꽉 말아쥔 제라드는 고통과 슬픔으로 가득한 도심의 풍경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눈에 담았다. 

“발길이 쉽게 떨어지지 않을 테지만, 지금 이곳에서 네가 할 수 있는 건 없다. 그저 알아두라는 거다. 힘을 가진 자들은 늘 수많은 책임의 무게와 마주해야만 하는 법이라는 걸.” 

드라이곤은 그렇게 말하며, 동부 광장 중심부로 나아갔다. 

‘책임의 무게.’ 

제라드 역시 한참 동안 사람들의 행렬을 지켜보다가 무겁게 걸음을 옮겼다. 

영혼석 정제 의식의 중심부였던 동부 중앙 광장. 

그곳은 모든 파괴의 근원지라고 해도 좋았다. 

제라드는 아무것도 남지 않은 크레이터의 흔적을 눈에 하나하나 담다가 이내 자신의 손을 보았다. 

‘하얀빛······.’ 

자신은 그저 스펠 브레이커를 사용했을 뿐이었다. 정제 의식 전체를 마법이라고 인지하였기에 파괴할 수 있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것만이 아니었다는 건가.’ 

스펠 브레이커. 

불완전한 마법. 어쩌면 그 빛은 완성형과 어떤 밀접한 관계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제라드가 얼마나 생각에 잠겨 있었을까. 

“애송이, 넌 녹스란 자가 누구인지 알고 있겠지.” 

별안간 드라이곤이 그렇게 물어왔다. 

제라드는 놀란 얼굴을 했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드라이곤이라면 그 이름을 알아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는 보았다고 하지 않았던가. 성유물의 기록을 말이다. 

“마스터 드라이곤께서는 마법의 역사는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최초의 마법사와 그의 유지를 잇는 7인의 마법사에 관해서는 다 알고 있다. 그건 단순히 마법의 역사에 그치는 이야기가 아니니 말이야. 내가 궁금한 건 녹스다. 

그와 7인의 후계자 사이에 어떤 연관이 있는 거냐.” 

“······7인의 후계자가 아닙니다. 최초의 마법사 엘레멘탈 마스터의 유지를 이은 건 7명이 아니라, 총 8인의 후계자입니다.” 

제라드는 누구에게도 꺼낸 적 없는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모든 것이 정리된 지금은 모두 다 이야기할 수 있었다. 

저 먼 곳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제라드의 이야기가 담담하게 이어지는 동안, 드라이곤은 때때로 눈살을 찌푸리면서 잠자코 들었다. 

“······그리고. 마스터 드라이곤께서 건네주신 그 성유물 조각의 기록을 끝으로 녹스는 그 정체불명의 힘과 접촉하게 됩니다.” 

“······.” 

드라이곤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듣고도 믿기 어려운 이야기. 

그러나 드라이곤은 보고 듣고 간접적으로 경험하였다. 녹스의 분노와 그 처참한 감정을 말이다. 그렇기에 믿을 수 있었다. 

“역사는 늘 승리자의 관점으로 가득 채워지는 법이지.” 

그 말을 끝으로 무거운 적막이 흘렀다. 

제라드의 고뇌도 깊어갔다. 

최초의 마법사 이래로 세워진 마법의 역사. 

그것이 사실은 거짓과 기만, 배신으로 날조된 것이었음을 알게 된 지금. 무엇이 진실이고 거짓인지조차도 알지 못한 채로 세상의 질서는 무너져가고 있었다. 

‘대체 어디서부터 뭘 어떻게 바로 잡아야만 하는 걸까······.’ 

드라이곤이 그런 제라드를 힐긋 보더니 혀를 찼다. 

“애송아, 뭐가 그렇게 어렵더냐. 어려운 일일수록 쉽게 생각하면 답은 명확해지는 법이거늘.” 

그 말에 제라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것은 이전 제라드가 도달했던 답과 정확히 일치했기 때문이다. 

“앞뒤를 모를 땐, 어렵게 생각하지 마라. 요는 네가 그 모든 걸 책임지고 감당할 수 있느냐다. 거기다가 내가 보건대, 네 녀석의 안에 답은 이미 나와 있어. 내 말이 틀렸느냐?” 

“······.” 

드라이곤의 말대로였다. 

답은 이미 나와 있었다. 

조금 전까지 답답했던 가슴이 별안간 뻥 뚫린 것 같았다. 

제라드는 파괴된 땅을 눈에 하나하나 다시 담다가 이내 드라이곤의 얼굴을 똑바로 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제라드의 눈빛은 이제 일말의 흔들림과 망설임도 없었으니. 드라이곤이 입가를 비틀었다. 

“좋구나, 그 눈을 보니 이제 애송이가 아니로구나.” 

“저는 마법사입니다. 단 하나의 진리와 진실이 눈앞에 있다면 그것을 증명하겠습니다.” 

“그 결과가 이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는다고 해도 말이냐.” 

“처음부터 잘못 쌓아올린 탑은 결국에는 무너지는 법입니다. 저는······ 모든 이 땅의 어그러진 질서를 바로잡겠습니다. 마스터 드라이곤, 저와 함께 해주시겠습니까?” 

“염치없는 놈! 그 길이 얼마나 힘든 길인지 알면서도 함께하자고 권하는 것이더냐?” 

“예, 염치없지만 저와 함께 싸워주십시오. 저 홀로는 세상과 싸울 수 없습니다.” 

드라이곤은 제라드의 맑고 투명한 눈동자를 보며 쯧쯧 혀를 찼다. 

“네 덕분에 말년에 아주 개고생을 하겠구나.” 

툴툴거리는 드라이곤. 하지만 그의 입가에는 미소가 드리워 있었다. 

“이제 뭘 어쩔 셈이냐. 계획을 말해봐라!” 

“힘을 모을 수 있는 합당한 절차를 밟아야겠지요. 폐하를 찾아뵐 참입니다. 그 후에는······.” 

그그긍. 

문이 열렸다. 

거대한 공동에는 잿빛 로브를 걸친 마법사 십여 명이 있었다. 그들은 좌우로 나란히 서서 한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저벅저벅. 

머잖아 복도의 저편에서 한 사람이 걸어왔다.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그 사람은 황실과 아리만을 지켜낸 어린 마법사였다. 

제라드 란스터. 

크루드 마탑의 1급 마법사. 

그런데 지금 이 거대한 공동의 빛으로 걸어 나오는 그의 로브는 푸른색이 아니었다. 지금 그가 걸친 로브는 이곳에 모인 마법사들과 똑같은 잿빛이었다. 

어떤 심경의 변화가 있기라도 했던 것일까? 

그들이 고개를 숙이며 예를 다 하는 가운데, 제라드는 공동의 중심에 섰다. 잿빛 로브의 마법사들은 그가 말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 제가 여러분을 이곳에 모은 이유를 아십니까?” 

“가르침을 주시지요, 마스터 제라드.” 

엘란이 공손한 태도로 말해왔다. 

오늘의 제라드는 잿빛 로브를 걸치고 있었다. 

그에겐 그것이 어떤 각오로 보였다. 

“제가 오늘 여러분을 이 자리에 불러 모은 것은 시대의 흐름 저편에 감춰진 진실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시대의 흐름 저편에 감춰진 진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엘란을 비롯한 잿빛 로브의 마법사들이 모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은 오늘 향후 방침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줄 알았기 때문이다. 

바로 그때, 제라드가 저 높은 천장을 향해 손을 뻗었다. 지난 약 열흘 동안 준비해온 마법이 지금 이 순간 빛을 발하는 것이다. 

지이이잉. 

바닥에서 빛이 흘러나왔다. 

“마스터 제라드, 이 마법진은 무엇입니까.” 

“제가 본 것을 여러분에게도 보여주기 위한 장치입니다.” 

제라드의 말이 끝나기가 무서웠다. 

그들은 별안간 눈앞에 어떤 광경이 펼쳐지는 것을 보았다. 

어두운 석실의 공간. 그들은 지금 이 순간, 그곳에 떨어져 있었다. 1종 비문의 첫 기록이었다. 그리고 차례로, 시대가 잃어버린 기록들이 그들의 눈앞에 아주 생생하게 펼쳐지고 있었다. 

머잖아 제라드도 눈을 천천히 감았다. 

바로 눈앞에 펼쳐지는 기록들이 보였다. 그것은 의식이 전부 저편으로 날아갈 정도로 분명하고 강렬하지는 않았으나, 진실을 알기엔 부족함이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곧 그 장면이 나타났다. 

1종 비문의 마지막 퍼즐, <후계자들의 결말>이 말이다. 

꽈르르릉. 

벼락이 쳤다. 

황량한 땅에는 재해에 가까운 마법이 쏟아졌다. 

그곳에는 다섯 명의 사람들이 있었는데, 저마다 각기 다른 색의 로브를 걸치고 있었다. 

벽색, 청벽색, 황색, 백색, 마지막으로 흑색. 

상기한 네 명의 마법사들은 검은 로브를 걸친 마법사를 공격하고 있었다. 

“모, 모두 그만둬. 아니야. 난 아니란 말이다!” 

“모든 정황이 녹스 너를 가리키고 있다! 스승님과 풀고르. 그리고 마법도시 알라모윈을 하루아침에 죽음의 폐허로 만들 수 있는 어둠의 마법을 도대체 누가 사용할 수 있단 말이냐.” 

싸늘한 시선 속에서 녹스는 뒤로 물러나기 바빴다. 네 사람의 합공을 버틸 재간은 없었다. 

꽈아앙! 

물과 얼음이 휘몰아쳤고 땅이 뒤흔들렸다. 

녹스는 어둠을 한데 끌어모아 온 힘을 다하여 막았다. 

“어째서······ 대체 어째서 나를 믿지 못하는가!” 

고통과 비참함으로 얼룩진 얼굴. 

연이어 몰아치는 공격 속에서 녹스의 얼굴이 일그러질 때, 별안간 빛이 터지며 그의 몸을 휘감은 어둠이 씻기듯 지워졌다. 공격은 그 순간을 노린 것처럼 쏟아졌다. 

“크아아악!” 

비명을 내지르며 나가떨어지는 녹스. 그가 버티는 것도 이젠 여기까지인 것처럼 보였다. 몸은 온통 피범벅이었다. 녹스는 원망으로 가득 찬 얼굴로 네 명의 동료를 노려보았다. 

“쿨럭! 나, 나는 억울하다······. 이건, 이건 모두 농간이란 말이다······. 나는, 나는 하지 않았어. 너희는, 너희는 속고 있는 거야······.” 

“틀렸다, 녹스. 우린 속고 있는 게 아니야. 누구도 속은 사람은 없다. 그저 단 하나의 진실만이 존재할 뿐이다.” 

“어, 어째서 그, 그토록 확신할 수가 있다는······.” 

녹스는 그렇게 되묻다가 별안간 입을 다물었다. 그들 네 사람이 희미하게 웃고 있는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가슴이 서늘해지는 순간이었다. 

“너, 너희가 설마······. 서, 설마 너희가······?” 

“녹스, 스승님과 형제를 배신한 사상 최악의 마법사여. 오늘 그대는 이 세상에서 사라진다. 역사는 그대를 기억하지 않을 것이고, 우리 역시 그러할 것이다.” 

“네, 네놈들. 네놈들이로구나······!” 

녹스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고함을 질렀다. 

그 순간, 온 세상이 어둠에 잠겼고 피를 흘리며 널브러져 있던 녹스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도망치게 두지 않겠다, 녹스!” 

죽지 않는다!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 절대로, 절대로 죽을 수는 없다! 

녹스는 필사적으로 어둠에 녹아들어 그곳을 벗어났다. 오로지 살아남겠다는 단 하나의 집념에 매달린 채로 말이다. 

그렇게 더는 몸도 마나도 움직이지 않게 되었을 때, 그는 한 동굴 안의 어둠 속에 있었다. 

이대로 죽을 수 없다. 이대로는, 이대로는 절대로 죽을 수 없어······! 

고통은 대수롭지 않았다. 

그러나 배신만큼은 도무지 용서할 수가 없었다. 

오직 그 일념으로 녹스는 버텼다. 그러자 놀랍게도 꺼져가던 생명의 불꽃은 조금씩 커졌다. 기적이라고 해도 좋았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내게로 오라. 

“누구냐······.” 

녹스가 느닷없이 들려온 목소리에 그렇게 중얼거렸을 때. 

-나는 그대가 다다를 수 있는 유일한 진리. 오라. 나에게 오라. 그리하면 그대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을지니. 나는 시련으로 그대를 가늠할지니, 합당한 자격을 갖춘다면 그대는 진리를 손에 넣으리라. 

진리! 

녹스는 눈을 번쩍 떴다. 

그것이 진리인지 아닌지,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벌벌 떨면서 일어나는 녹스의 눈은 붉은 핏물로 물든 채 무섭게 번뜩이고 있었다. 

“······그 진리라는 것이 나의 적들에게 파멸을 안겨줄 수 있는가?” 

-파는 파멸이요. 그대가 닿은 이 길에 끝에 존재하는 진리는 오직 그것만을 위한 길이다. 

파멸이라고. 

녹스는 흐흐흐 낮게 웃었다. 

지금 들려오는 이 목소리는 어쩌면 악마의 간교한 속삭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지금 녹스는 악마에게도 기꺼이 영혼을 팔 수 있었다. 

녹스는 비틀거리며 일어나서 목소리가 안내하는 곳을 향해 나아갔다. 그리고 끊임없이 중얼거렸다. 

“아쿠아, 겔루, 테라, 루스······. 아쿠아, 겔루, 테라, 루스······.” 

그 이름을 끊임없이 중얼거리며, 녹스는 어둠으로, 아주 오래된 고대의 마법을 향해서 나아갔다. 

어둠이 녹스를 완전히 휘감았다. 

제라드는 눈을 떴다. 

곧 마법진은 빛을 잃으며 흩어졌으니. 

좌중은 하나같이 충격과 공포에 잠긴 얼굴이었다. 

아마도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진실일 터였다. 

“믿고 싶지 않다면 믿지 않아도 좋습니다. 하지만 이 앞에 있는 불편한 진실과 마주할 마법사가 있다면, 나와 함께 싸워주십시오. 내가 어긋난 질서와 역사를 바로잡겠습니다.” 

제라드는 그렇게 선언했다. 

엘란의 생각은 맞았다. 

그가 청색 로브가 아닌 잿빛 로브를 걸친 것. 

그것은 역시 각오였다. 

세상을 뒤엎을 각오 말이다.

  

< 무색의 마법사2 > 끝

ⓒ 양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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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색의 마법사3 >

퍼퍼펑. 

연이어 허공에서 터지는 마법의 불꽃. 

폭연이 허공을 한가득 메우는 가운데, 엘란은 바로 다음 마법을 시전했다. 

휘오오. 

양손에 가득 휘몰아치는 바람의 기운. 

요동치는 바람이 폭연을 찢어발기며 좌우로 날아들었다. 

그러나 그 공격은 목적을 다루지 못했다. 

‘사라졌다!’ 

엘란의 눈이 날카롭게 마나의 잔향을 따라 움직였다. 

섀도우 마법이 틀림없으리라. 

엘란은 잔향의 흐름을 읽기 시작하였다. 아주 냉철하게 말이다. 곧 성난 바람이 엘란의 양손에 다시 맺히는 가운데, 그는 마침내 마나의 잔향을 읽었다. 

‘좋아, 찾았다.’ 

엘란의 눈이 번뜩인 그 순간이었다. 

번쩍! 

엘란의 머리 옆을 스치며 흩어지는 한 줄기 섬전! 

오싹. 

엘란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 제라드가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어, 어떻게······. 분명히 섀도우 마법의 흔적을 읽었는데······.”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을 무조건 신뢰하는 건 오히려 적에게 득이 되기도 하는 법입니다. 상대가 그 사실을 알고 보완할 수도 있는 법이니까요. 실력이 비등비등할 때엔 마법은 결국 수 싸움으로 갈리게 된다는 걸 기억해주세요.” 

“끄응. 감사합니다, 마스터 제라드. 오늘도 배웠습니다.” 

“확실히 실력이 많이 좋아졌습니다, 엘란.” 

제라드는 그렇게 말하며 다른 마법사들의 대련을 지도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은 몹시 자연스러웠고, 말투와 행동 하나하나에 기묘한 카리스마가 깃들어 있었다. 

‘며칠 되지도 않았건만 그 사이에 정말로 많은 것이 바뀌었구나.’ 

카이번의 체제 아래에 있을 때엔 모든 것이 정체되어 있었다. 변화도, 개혁도 없이 그저 오래된 전통을 수호하며 그 자리를 지키는 것이 바로 그들의 임무였다. 

그러나 이제는 바뀌었다. 

엘란은 자신보다 훨씬 어린 저 어린 마법사를 진심으로 존경하게 되었다. 마법 실력만이 아니다. 세상의 뒤틀림과 마주하고 싸워나갈 용기. 그것에 진심으로 감탄한 것이다. 

‘나는 어제보다 더 나아졌다.’ 

엘란은 주먹을 꽉 쥐었다. 

제라드가 비문의 내용을 궁중 마법사들과 공유한 뒤로 벌써 열흘에 가까운 시일이 흘렀다. 

그동안 정말로 많은 것이 바뀌었다. 

처음 무색의 공동에서 모든 사실을 보여주었을 때만 해도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던 궁중 마법사들. 

그러나 그들은 곧이어 제라드가 보여주는 제8의 속성 마법과 그 마법의 술식을 보면서 그들이 본 것이 모두 사실임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 이후에 그들은 비문에서 본 것을 토대로 저마다 마법의 연구에 파고들었다. 

“마스터 제라드, 실례합니다. 여쭤볼 것이······.” 

“마스터 제라드, 잠깐 시간 괜찮으신지요.” 

“마스터 제라드······.” 

마법사들이 계속 찾아오는 까닭에 제라드는 정말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하지만 제라드는 그걸 아주 좋은 징후로 보았다. 

‘엘레멘탈 마스터의 비문이 그들에게 큰 자극을 준 건 분명하구나. 모두의 이해도가 내가 기대하던 것에 훨씬 미치지 못하긴 하지만.’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제라드조차 엘레멘탈 마스터의 유산을 이해하기 위해서 수도 없이 그 영역을 들여다보지 않았던가. 일반적인 수준의 마법사들은 그중 단 한 가지만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도 벅찰 지경이었다. 

“하지만 이 정도의 성장세라면 모두 금방 빼어난 마법사가 될 수 있을 거다.” 

그와 함께 싸우기로 한 마법사들을 모두 원로급 이상으로 끌어올리는 것. 바로 그게 제라드의 목적이었다. 

완연한 보름달이 떴다. 

제라드는 오늘 밤이 바로 그날임을 알았다. 

그는 지금 한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기다리고 있었을까. 

별안간 저 복도 너머에서 저벅저벅 걸어오는 한 사람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산발의 머리칼을 한 사내. 

그의 눈빛은 어둠 속에서도 찬란하게 빛을 머금고 있었다. 

지난날, 드래곤과의 전투 이후에 탁해졌던 눈빛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기다렸습니다, 마스터 드라이곤.” 

드라이곤은 자리에 털썩 앉자마자 바로 보고 듣고 경험한 것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동부의 상황은 여전하다. 산발적인 교전이 일어나고 있지만, 크루드 마탑의 마법사들은 여전히 베너하임을 탈환하지 못하고 있다.” 

“역시 그렇군요.” 

제라드는 담담하게 대답하였다. 

그가 수도에서 움직이지 못하는 사이, 그동안 드라이곤은 동부로 향하여 베너하임 공국에 다녀왔다. 치열한 전장이 된 그곳의 상태를 몰래 살피고 온 것이다. 

“역시? 이미 예견했다는 거냐.” 

“예, 아마도 크루드 마탑은 끝끝내 베너하임을 탈환하지 못할 겁니다. 이전 수도에 모습을 드러냈던 그 드래곤과 같은 존재가 동부에도 곧 나타나게 될 테니까요.” 

“그 괴물과 같은 놈이 또 나타난다고? 대체 그렇게 확신하는 이유가 뭐냐?” 

“드래고닉 패턴 때문입니다.” 

“드래고닉 패턴?” 

“예, 그 불완전한 존재가 드래곤의 존재감을 내뿜을 수 있는 건 아무래도 그 드래고닉 패턴의 힘 때문일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말이 되지 않아요. 그리고 저들이 황족을 노리는 것도 말입니다. 아마 모종의 수법으로 드래곤의 힘 중 극히 일부를 재현하는 것이겠지요. 목표는 그들이 말하는 질서의 재정립일 겁니다.” 

“끄응······.” 

드라이곤은 신음했다. 그 터무니없는 존재가 여럿이라고 생각하니, 눈앞이 깜깜해지는 듯했다. 

“하지만 방법이 없는 건 아닙니다.” 

“끙. 네 녀석이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걸 보니, 방법이 없는 건 아니어도 아주 힘든 길이 되리라는 건 불 보듯 뻔하구나.” 

“어쩔 수 없지요. 그길 밖에 없다면 나아갈 따름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방법이라는 게 뭐냐?” 

“정면 돌파.” 

이튿날, 제라드는 황제에게 독대를 요청하였다. 

“발칙한 놈이로고.” 

황제는 새하얀 방에 들어와서 예를 다 하는 제라드를 보면서 바로 그 말부터 했다. 하지만 그는 웃고 있었다. 

“느닷없이 독대를 청하다니. 아무나 짐과 독대할 수 있는 줄 아느냐?” 

“마스터가 폐하께 독대를 청할 수 없다면 누구도 폐하와 독대하지 못하지 않겠나이까?” 

“뭐라? 흐흐흐. 그대의 말이 옳다! 마스터 제라드, 그대는 아무나가 아니지. 그대는 짐과 황족의 목숨을 구한 사람이며, 동부 광장의 재앙을 막은 구원자. 짐과 독대하지 못할 이유가 없지. 좋다, 말해보라. 짐과 독대를 청한 이유가 무엇인가?” 

“폐하께 청이 있어 감히 독대를 청하였나이다.” 

“흐음, 청이라······. 좋다, 말해보도록 하라.” 

“마탑 회의를 열고자 합니다. 폐하의 칙령으로 말입니다.” 

“발칙하다는 말은 그대를 위해 준비된 말 같구나. 감히 그대가 칙령을 운운하다니 말이야.” 

황제는 눈을 가늘게 뜨고서 제라드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이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좋다, 그대의 청을 들어주겠노라. 단, 나도 조건이 하나 있다.” 

이튿날, 각지로 칙령의 사자가 각지로 떠났다. 

그들은 바쁘게 내달려 동서남북으로 향하였으니. 

저마다 수일씩 내달려 저마다 마탑에 다다르게 되었다. 

“칙령이오!” 

칙령의 사자가 큰 목소리로 요란하게 외쳤고, 마법사들은 모두 무릎을 꿇었다. 

마법사들이 아무리 정치권과 직접적인 연결이 없다고 해도 지고한 황제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는 얘기는 아니었다. 그건 그 이전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칙령의 사자가 큰 목소리로 외쳤다. 

“······마탑 회의가 이번 달 말에 무색의 공동에서 개최될 예정이니라. 이는 현재 제국 각지의 환난을 막기 위한 자리이므로, 각 마탑의 사정과는 무관하게 이 일에 불참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크루드, 산도르, 아쿠아, 루스, 카로사, 테라, 겔론. 

일곱 마탑의 탑주들은 칙령에 기꺼이 따르겠노라는 뜻을 천명하였다. 황제의 칙령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지 않아서, 약속의 날까지 당도하기 위하여 각지에서 수도로 향하는 마법사의 마차가 여기저기서 보이기 시작하였다. 

마탑 회의는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수도에서 심상치 않은 일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이 광경을 보니 보통이 아니로군. 안 그런가, 케이틀란.” 

“예, 탑주님의 말씀대로입니다. 도대체 어떤 마법이 발동해야 이런 식의 결과가 나타나게 되는지, 알 수가 없군요. 어쩌면 이 일 때문에 마스터 카이번께서 황급히 마탑 회의를 연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으음. 일리가 있는 말일세.” 

케이틀란은 창밖의 공허한 풍경을 두 눈에 담았다. 

이곳에서 어떤 치열한 싸움이 치러졌는지는 아직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싸움에 제라드도 개입했을 거란 사실이었다. 

‘제라드, 너는 괜찮더냐?’ 

케이틀란은 근심 어린 얼굴을 했다. 

그러는 사이, 마차는 머잖아 황폐한 폐허를 지나서 천막이 수도 없이 펼쳐진 난민 지대를 지나서 성으로 이어지는 언덕길에 올랐다. 

그렇게 성문 앞에 다다랐을 때, 삼엄한 경계 속에서 기사 두 명과 잿빛 로브의 마법사 한 사람이 그들의 앞을 막아섰다. 

“나는 크루드 마탑의 탑주 그렌자일일세.” 

“저는 크루드 마탑의 원로 마법사 케이틀란입니다.” 

두 사람이 자신이 누구인지 밝혔다. 

그들의 앞을 막아선 잿빛 로브의 마법사와는 면식이 있었다. 서로 얼굴을 확인하고 상대가 누구인지 알았을 때, 잿빛 로브의 마법사는 옆으로 비켜서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어서 오십시오.” 

처처척! 

그 대답과 함께 앞을 막고있던 기사와 병사들이 좌우로 비켜섰다. 이내 문이 그그그긍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고성이 모습을 드러낸 가운데, 성문 안쪽에서 병사들이 흐트러짐 없는 태도로 그 내부를 지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절로 숨이 턱턱 막히는 광경이었다. 

‘이전과는 분위기부터가 다르구나.’ 

케이틀란이 그렇게 생각하는 가운데, 마차는 그들이 안내하는 곳으로 향하였다. 

곧 마차가 멈출 즈음이 다 되어서 보니, 그들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먼저 도착한 마차에서 익숙한 얼굴들이 내리고 있는 게 보였다. 

그들은 산도르 마탑의 탑주인 다일론과 1년 전에 원로 마법사가 된 블레이즈, 그리고 그의 제자 둘이었다. 

“오랜만에 보는군, 그렌자일.” 

“그렇군. 4년 만이던가, 다일론.” 

마탑의 탑주들이 그렇게 담담한 목소리로 인사를 나누는 가운데, 케이틀란 역시 블레이즈와 짤막한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블레이즈, 이런 자리는 안 좋아하지 않았던가?” 

“잘 알고 있군. 안 좋아하지만 어쩌겠어? 여기에 그동안 죽은 줄 알았던 제자가 있을지도 모르는데, 한 번 와서 만나봐야지. 네 녀석도 그거 때문에 온 것일 테지, 안 그런가?” 

“부정하지 않겠네. 그게 가장 큰 이유라고 할 수 있겠지.” 

케이틀란은 그렇게 대답하면서 그의 옆에서 몹시 초조해 보이는 한 여인을 눈에 담았다. 

‘이제 앳된 기색은 찾아볼 수가 없구나.’ 

케이시 그린우드.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아직 소녀였던 그 아이는 이제 어엿한 아가씨가 되어 있었다. 또렷한 눈망울에 로브로 가려지지 않는 유려한 곡선. 젖살이 빠지면서 그녀의 미색은 절정에 다다른 듯했다. 

“제라드가 너무 많은 사람을 걱정스럽게 만든 것 같군.” 

케이틀란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발걸음을 재촉하였다. 복도로 향하는 그들의 발걸음은 바빴다. 

“이곳으로 오시지요.” 

시녀가 공손한 태도로 그들을 안내하였다. 

마침내 공동으로 이어지는 큰 복도까지 다다르자, 잿빛 로브 마법사들의 모습과 먼저 도착한 다른 마탑의 탑주들의 보이기 시작했다. 

“음, 크루드와 산도르까지 왔으니, 이걸로 다 모인 셈이로군.” 

그렌자일과 다일론을 본 나머지 탑주들이 그렇게 한 마디씩 중얼거리며 인사를 나누었다. 

바로 그때, 공동의 문 앞을 막고 서 있던 엘란이 옆으로 비켜서면서 큰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모두 모이셨으니, 공동으로 입장해주십시오.” 

끼이이익. 

문이 열렸다. 공동 중심에는 원형의 탁자 하나가 보였다. 공동에는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준비된 의자는 총 여덟 개였다. 

탑주들은 저마다 한 자리씩 차지하며 앉았고, 탑주의 곁을 수행하며 따라온 마법사들은 모두 그 뒤에 서 있었다. 

이걸로 한 사람만 빼면 다 모인 셈이다. 

“이보게, 엘란. 마스터 카이번은 언제 오시는가? 모두가 모였는데도 아직 오시지 않다니. 그분답지 않으시군.” 

다일론이 그렇게 말했다. 

확실히 카이번답지 않다. 이렇게 마탑 회의가 있을 때면 그는 늘 다른 탑주들보다 먼저 자리를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그때 엘란이 말했다. 

“마스터 카이번은 오지 않으십니다.” 

“아니, 그게 무슨 소리인가? 마스터 카이번이 오질 않다니.” 

모두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은 알지 못했던 것이다. 

카이번이 지난날 이미 고인이 되었다는 것을. 그들이 정보에 둔한 게 아니었다. 황실이 이 사실을 외부로 알리지 않아서 아무도 알지 못하는 것뿐이었다. 

모두 의문이 가득한 시선으로 엘란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대답은 엘란이 아니라, 전혀 엉뚱한 곳에서 들려왔으니. 

“마스터 카이번은 돌아가셨습니다.” 

복도의 저편. 나직한 발걸음소리와 함께 한 사람이 공동으로 걸어들어왔다. 모두의 시선이 그곳에 쏠렸다. 

잿빛 로브를 걸친 이십 대 초반의 사내. 

그가 누구인지 알아본 이들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바로 그때였다. 좌우에 늘어선 잿빛 로브의 마법사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이며 마스터에 대한 예를 갖추었다. 

“아, 아니 이게 무슨······.” 

“일곱 탑주님들은 모두 예를 갖추어주십시오. 바로 저분께서 돌아가신 마스터 카이번의 뒤를 이어, 새롭게 마스터의 자리에 오른 마스터 제라드이십니다.” 

“마, 마스터라고?” 

모두가 경악한 순간이었다.

< 무색의 마법사3 > 끝

ⓒ 양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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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색의 마법사4 >

장내는 충격에 잠겼다. 

느닷없이 나타난 제라드를 향해 궁중 마법사들이 마스터라고 부르고 있는 상황이 아닌가. 명망 높은 마탑의 탑주들조차도 당황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가운데. 

“마스터 카이번이 돌아가시다니. 그게 대체 무슨 말인가, 엘란, 자세히 말해보라!” 

카로사 마탑의 탑주 라엘카가 눈을 날카롭게 치켜뜨고서 그렇게 물어왔다. 

그가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카이번의 출신은 바로 카로사 마탑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대답은 이번에도 엘란이 아니라, 제라드가 하였다. 

“수도에서 큰 변고가 있었습니다.” 

그는 차분한 태도로 나머지 한자리에 앉아서, 지난날 성내에서 있었던 일들을 모두 이야기하였다. 

“······.” 

이야기가 끝났을 때, 좌중은 침묵하였다. 

특히 조금 전까지 언성을 높이던 라엘카의 얼굴은 완전히 일그러져 있었다. 

베네론 라인포스가 적이었다는 사실 때문이다. 

카이번도 베네론도 모두 카로사 마탑 출신의 마법사였기 때문이다. 마스터였던 카이번이 죽은 것도 뼈아픈 일인데, 그 와중에 배신자까지······. 

“믿을 수 없다. 그대처럼 젊은 마법사가 그 모든 것을 간파하였다고!” 

“말씀을 삼가시지요, 라엘카 탑주님. 나이와는 무관하게 마스터 제라드는 폐하께서 직접 임명하신 마스터이십니다.” 

엘란이 끼어들자, 라엘카의 눈매가 파르르 떨렸다. 하지만 엘란의 말대로였다. 제라드는 마스터였다. 예우를 갖추는 게 맞았다. 

“······내 마스터의 이야기만 듣고는 도저히 이해가 안 가는 점이 있으니, 부디 상세한 설명이 듣고 싶군요.” 

라엘카의 말은 정중하게 변하였으나, 그 안에 담긴 속뜻은 여전하였으니, 제라드의 담담한 태도로 말했다. 

“마법사는 증명하는 존재지요. 증명되지 않은 존재를 의심하고 못 미더워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자, 그럼 어떻게 절 증명하는 게 좋을는지요.” 

“증명이라고 함은······.” 

라엘카가 막 그렇게 말을 이어가다가 멈추었다. 

그의 눈매가 꿈틀거렸다. 

지금 이 순간, 제라드는 턱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겨 있는 듯한 모습이다. 하지만 그런 모습과는 다르게 제라드에게서 마나 파동이 퍼져 나오고 있었다. 

그 기세가 범상치 않았다. 

‘이런 건방진······.’ 

라엘카의 눈빛이 섬뜩하게 빛났다. 

장내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이 느닷없는 상황에 모두 긴장한 기색이다. 

그런데 머잖아 라엘카나 다른 탑주들의 얼굴이 굳었다. 

지금 제라드가 내뿜는 마나는 보통 거대한 게 아니었다. 

‘이정도라면 5페이즈······, 6페이즈······. 아직도 마나를 더 뿜어낼 수가 있단 말인가?’ 

제라드의 마나 코어가 6페이즈 이상임이 증명된 순간이었다. 그것만이 아니다. 지금 제라드의 얼굴은 한없이 평온한 것처럼 보였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잘 모르겠군요. 라엘카 탑주님께서 적절한 증명 방법을 알려주지 않으시겠습니까? 적절한 방법이 있다면 그 방법을 따르고 싶습니다만.” 

제라드가 정중하게 물어왔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라엘카의 안색은 창백하게 질렸다. 

장내를 가득 채운 마나가 별안간 그의 온몸에 쏟아진 것이다. 

7페이즈에 상당하는 마나 프레셔. 

탑주급은 모두 7페이즈 이상의 마나 코어에 다다른 존재들이었기에 그것만으로 굴복하는 일은 있을 수 없었지만, 놀라움은 좀처럼 감출 수 없었다. 

제라드는 겨우 이십 대가 아닌가. 그런 젊은 마법사가 탑주들과 거의 비슷한 수준의 마나를 보유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격적인 일이었다. 

“크흠······. 이 정도면 충분하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그렇습니까?” 

제라드가 그렇게 되묻는 순간, 일대를 가득 메웠던 마나는 씻은 듯이 사라졌다. 

‘놀라운 제어력이로다.’ 

라엘카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그 정도로 방대한 마나를 한 번에 회수했다. 즉, 자신이 다다른 경지에 대한 이해도가 아주 빼어날 뿐만 아니라, 마나에 대한 통제력 역시 그에 상응한다는 얘기다. 

“제 능력에 의문이 없으시다면 이제 다음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그래도 될는지요.” 

제라드는 정중하게 물었고, 일곱 명은 탑주들은 이에 말없이 동의하였다. 

이걸로 이 회담의 흐름은 제라드가 완전히 잡았다. 

‘하지만 진짜 이야기는 지금부터다.’ 

제라드의 눈빛이 번뜩였다. 

10 

케이틀란은 따뜻한 시선으로 제라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제라드, 또 한 껍질을 벗었구나.’ 

2년 전, 1차 승급시험을 치르기 위해 떠났던 제라드는 돌아오지 않았다. 원로 마법사 벨자와 함께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린 두 사람은 다시는 볼 수가 없었다. 

그렇게 2년이었다. 

꼬리에 꼬리를 잇듯이 계속 나타나는 문제들 속에서 케이틀란은 크루드 마탑의 마법사로서 싸울 수밖에 없었다. 제자의 행방도 알지 못한 채로······. 

그런데 지금 그 제자는 멀쩡한 모습. 아니, 2년 전보다 훨씬 더 당당한 모습으로 세계에 존재하는 단 일곱 명의 탑주들 사이에 있었다. 

‘마스터. 네가 마스터란 말이냐······.’ 

이렇게 자랑스러운 일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케이틀란은 감동을 주체하기 어려웠다. 

그러는 사이, 제라드는 다음 이야기를 해나가고 있었다. 그들을 이곳 한 자리에 불러 모은 이유를 말이다. 

“여러분은 혹시 제8의 속성을 아십니까?” 

“제8의 속성이라니······.” 

탑주들이 의아한 얼굴로 그렇게 중얼거린 순간이었다. 

제라드는 말없이 손을 뻗었다. 

화륵. 

이내 손바닥 안에서 치솟는 불꽃. 선명하게 타오르던 불꽃은 머잖아 꺼졌고, 그 대신에 물방울이 만들어졌다. 그 후엔 물이 얼어붙으면서 얼음으로 나타났고, 스파크가 튀면서 뇌전을 뿜었으며, 흙먼지가 모여들어 빙글빙글 돌았고, 새하얀 빛이 번쩍거리다가 이내 바람이 휘돌기 시작하였다. 

7개의 속성 기초 마법이 차례대로 시전된 것이다. 

“이렇게 당대의 마법 속성은 총 7가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모두 알고 계시다시피 최초의 마법사 이래로 정립된 속성의 체계이지요. 하지만 알려지지 않은 제8의 속성이 있습니다.” 

그 순간, 제라드가 뻗은 손의 아래에 생긴 그림자가 꿈틀거리면서 일렁이더니, 제라드의 손을 휘감으며 피어올랐다. 

“흑마법?” 

좌중이 소란스러워졌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지금 제라드가 보여준 마법은 세간을 어지럽히는 흑마법 그 자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제라드를 탐탁지 않게 보고 있던 라엘카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마스터 제라드, 그대가 어째서 그 저주받은 흑마법을 익히고 있는지 제대로 설명해야 할 겁니다.” 

그러나 제라드는 담담했다. 

“이건 흑마법이 아닙니다.” 

“설마, 그 흑마법을 제8의 속성 마법이라고 할 참입니까?” 

“정확하게 보셨습니다. 바로 이 마법이 제8의 속성 마법입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성유물은 아실 테지요.” 

제라드는 라엘카의 반응에도 아랑곳없이 담담한 태도로 말을 이어나갔다. 

“성유물은 오랜 옛 시대의 기록이나 힘을 머금은 물건 그 자체를 말하지요. 흑마법사들은 모종의 이유로 그것을 모으고 있었고, 저는 그들과 싸우면서 그걸 빼앗았습니다.” 

“잠깐! 성유물은 흑마법사들의 헛소리. 그것을 손에 넣었다는 건 말도 안 되는 말입니다.” 

“아니요. 그 말씀은 틀렸습니다. 성유물은 존재합니다. 제가 말씀드린 제8의 속성 마법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것도 성유물의 기록 덕분입니다. 믿지 못하겠다면 직접 보십시오. 이젠 누구도 기억하지 못하나, 이 세상의 기록에는 분명하게 남아 있는 궤적을 말입니다.” 

제라드는 원형 탁자에 손을 얹고 마나를 흘려 넣었다. 

지이이잉. 

마나의 흐름이 격렬하게 요동치는 가운데, 탁자부터 바닥, 그리고 벽면에 이르기까지 빼곡한 마법진이 드리웠다. 

“무슨 짓을!” 

탑주들은 당황하여 마법진의 발동에 대응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 무색의 공동에 빼곡하게 채워진 마법진 술식을 간파하기엔 너무 시간이 촉박하였으니. 

마법진은 금방 발동하였다. 

탑주들은 이전 무색의 마법사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제라드가 정리한 1종 비문의 기록을 차례로 보게 되었다. 

엘레멘탈 마스터와 8인의 후계자. 진정한 후계자 발탁, 알라모윈의 몰락······ 그리고 후계자들의 결말까지. 

지이잉. 

그렇게 모든 기록의 흐름이 끝났을 때, 공동을 빼곡하게 메운 푸른빛들은 서서히 자취를 감추었다. 

장내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창백한 얼굴이었다. 

“왜 모두 충격을 받으신 얼굴입니까? 이곳에 계신 분 중 절반은 이미 알고 계셨을 텐데 말입니다.” 

제라드는 그렇게 말하면서 네 사람의 얼굴을 천천히 훑어갔다. 아쿠아, 겔론, 테라, 루스 마탑의 탑주들. 그들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 그대들은 알고 있었단 말인가?” 

라엘카가 당혹감을 금치 못하며 그렇게 물었다. 

그러나 네 명의 탑주들은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이것은 치부였다. 

절대로 알려져서는 안 될 치부. 

분위기가 묘하게 변해가는 와중에 제라드의 시선은 그들 넷에서 머물다가 불현듯 한 사람에게 꽂혔다. 

“제가 진실에 다가가는 게 많이 불편했을 겁니다. 안 그렇습니까, 그렌자일 탑주님.” 

숨이 막힐 듯한 분위기가 장내를 휘감았다. 

제라드의 눈동자는 그렌자일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 

“그렌자일 탑주님께서는 검은 대지에서 내가 돌아오지 못할 줄 아셨겠지요.” 

“나는 풀고르 님의 유지를 잇는 사람입니다. 내가 왜 그렇게 생각한단 말입니까?” 

“풀고르의 뜻을 이었다. 정말로 그러십니까? 제가 아는 바로는 당신은 크루드의 유지를 이었을 텐데요.” 

꿈틀. 

그렌자일의 눈매가 무겁게 변했다. 

풀고르와 크루드. 

둘은 같은 청색의 유지를 잇는 존재였다. 

그러나 그 실상은 전혀 달랐다. 

크루드는 유일하게 살아남은 청색의 후계자였다. 

어떻게 그만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운이 좋아서? 

아니다. 세상에 그런 써먹기 좋은 운은 없다. 

“그렌자일 탑주님께서는 크루드와 똑같은 길을 택했겠지요. 진실을 감추는 일에 협력하였고, 내가 알려져서는 안 될 진실에 다가가고 있음을 알았기에 함정에 빠뜨렸다. 그런 단순한 얘기.” 

그렌자일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이제 그의 얼굴에 늘 감돌던 인자한 표정은 온데간데없었다. 말투도 어느새 바뀌어 있었다. 

“······제8의 속성 마법이든, 과거의 비밀이든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 우리의 적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 눈앞에 있다. 제라드, 자네는 지금 쓸데없이 균열을 만들고 있는 거야.” 

“아니요. 처음부터 잘못 채운 단추는 모두 풀지 않으면 끝까지 잘못 채워지는 법이죠. 마찬가지로 기반이 어긋난 땅에 잘못 올린 탑은 머잖아 무너지는 법입니다. 이 사실은 만천하에 알려져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그러기 위해 모인 겁니다.” 

제라드가 물러설 생각이 없는 모습이었다. 

네 명의 탑주들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추악한 진실은 절대로 세상에 알려져서는 안 될 치부였다. 존경과 경외를 받던 7인의 후계자들의 전설은 이런 곳에서 더럽혀져서는 안 됐다. 

그들의 눈동자의 스산한 빛이 이윽고 살의로 변해갈 때였다. 

“어떤 식으로든 행동하는 것은 자유입니다만, 책임은 무겁게 져야 할 겁니다. 나 역시 어설픈 각오로 이곳에 있는 게 아닙니다.” 

제라드에게서 별안간 폭발적으로 터져 나오는 살기가 그들 네 사람을 휘감았다. 

그러나 그 경고만으로는 그들을 막을 수 없었다. 

“네놈에게 그럴 권리는 없다!” 

네 사람이 거의 동시에 마법을 전개하였고, 그 곁을 보좌하는 마법사들 역시 그와 동시에 마법을 사용해왔다. 그렌자일도 마찬가지였다. 그게 그의 ‘선택’이었다. 

제라드는 적과 아군을 파악하였다. 

산도르 마탑의 다일론은 한걸음 물러나 있었고, 카로사 마탑의 라엘카는 제라드의 편이 되어 함께 싸우려고 하고 있었다. 케이틀란 역시 마찬가지로 제라드의 편에 선 듯했다. 

‘스승님, 감사합니다.’ 

제라드는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다시 정신을 집중했다. 

이제 비틀린 모든 역사를 바로잡을 때가 되었다. 

어떤 색으로도 물들지 않은 무색(無色)으로 말이다.

< 무색의 마법사4 > 끝

ⓒ 양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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