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괴물의 이름1 >
1
“괜찮습니까?”
“예, 조금 스친 정도입니다.”
베가스가 그렇게 말하며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제라드는 그의 말을 듣지 않고 스친 상처 부위를 살폈다.
“정말로 스친 정도에 불과합니다.”
“아니요. 정확하게 느껴보세요.”
제라드의 말에 베가스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상처 부근을 살폈다. 그제야 느껴지는 위화감. 어둠의 창이 스친 부위를 보자, 살짝 베인 상처 부근으로 시꺼먼 그림자 따위가 스멀스멀 피어오른 모습이다.
“이게 대체······.”
“망령이 내뿜는 독기를 마법에 담은 것 같습니다. 적들이 사용하는 흑마법도 점점 더 악랄하게 변해가고 있다는 거겠죠.”
제라드는 그렇게 말하면서 베가스의 상처 부위에 손을 얹었다. 새하얀 광채가 흘러나오는 빛과 함께 상처 부위에 드리운 그림자가 말끔히 사라졌다.
“가, 감사합니다. 전혀 몰랐습니다. 그대로 놔두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베가스가 거듭 감사의 인사를 전하다가 이내 궁금했던 사실을 한 가지 물었다.
“저······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예, 말씀하세요.”
“어째서 놈을 그렇게 보냈습니까? 이렇게 하면 놈들에게 제라드 님의 존재만 더 알리는 게 되지 않겠습니까. 적들이 대비할 겁니다.”
“글쎄요. 알리지 않는다고 해도 달라질 건 없습니다. 어설프게 숨기는 것보다는 대놓고 드러내는 게 더 낫습니다. 제가 칼을 뽑았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나의 적은 어떤 식으로든 반응해올 테지요. 피아를 구분하는 데에는 그게 더 쉽습니다.”
“······.”
그 대답에 베가스는 입을 다물었다.
그는 제라드의 방식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범재가 할 수 있는 것과 천재가 할 수 있는 건 애초에 전혀 다르니까.
‘어떤 적이 나타나더라도 해치울 수 있다는 자신감이라는 거겠지.’
베가스는 제라드의 저 당당함이 부러웠고, 동시에 든든하였다. 수도로 향하는 길에 어떤 난관이 닥친다고 해도, 제라드는 능히 그 난관을 뚫을 수 있을 테니까.
2
사흘이 흘렀다.
수도로 향하는 길은 그날 이후로 조용하였다.
흑마법사들의 공격은 더는 없었다.
제라드의 존재가 적들에게 알려졌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시시각각 수도는 가까워졌고, 마침내 아르메스의 수도 아리만의 드높은 성벽이 나타났다.
“멈추시오. 잠시 검문 좀 하겠소.”
병사가 다가와서 신분을 파악하고 짐 마차의 내부를 살폈다. 크루드 마탑의 마법사가 둘. 예전 같았더라면 그것만으로도 즉시 검문은 통과였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이 바뀌었다.
병사들의 눈빛에 의심이 깃들었다.
크루드 마탑의 상징인 푸른 로브는 더는 이전처럼 신분의 상징이 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마탑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마탑에 소속되어 있는 마법사들이 모두 건재하다고 하더라도, 마탑은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역사를 상징하는 셈. 크루드 마탑은 무너졌고, 크루드 마탑의 마법사들은 신뢰를 잃은 것이다.
“어디에서 오는 길인지요.”
맥스가 막 나서서 대신 설명하려고 할 때였다.
아나리엘이 대신 나서서 투구를 젖혔다.
말은 필요하지 않았다. 그녀의 이마에 존재하는 드래고닉 패턴이 모든 것을 설명하니까.
“헉!”
병사가 깜짝 놀란 얼굴로 눈을 크게 떴다.
그게 무엇인지는 병사도 알았기 때문이다.
“자, 잠시만······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병사는 다급히 달려가서 기사에게 이 사실을 전하였다.
기사 역시 깜짝 놀란 얼굴로 마차에 다가와서 아나리엘을 보더니, 이내 무릎을 바로 꿇었다.
“조, 존귀하신 분을 뵙습니다!”
“일어나세요. 소란이 일어나는 건 바라는 바가 아니니, 성으로 안내해주세요.”
“아, 알겠습니다!”
아나리엘의 태도는 자연스러웠고, 기사는 감히 고개를 들지 못하였다.
아르메스의 중심부에 있는 제국의 심장인 수도 아리만.
이곳은 이 나라에 존재하는 그 어떤 도시보다도 크고 번영한 곳이었다. 최초의 마법사가 모든 것을 새롭게 가꾸었다고 전해지는 시작의 도시. 이곳에서 마법은 그 뿌리를 내렸으며, 세상의 중심이 되었다.
히히힝.
마차가 아리만의 중심부에 존재하는 오래된 고성의 앞에 멈춰 섰다.
“그래그래, 그동안 수고했다.”
베가스가 말의 목을 쓰다듬어주면서 격려하였다.
어느새 마차 주변에는 기사들이 가득했다.
마차에 타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았으니, 성내는 지금쯤 몹시 부산하게 돌아가고 있으리라.
마차에서 제라드가 먼저 내렸다.
제라드는 절그럭대며 걸어나오는 아나리엘에게 손을 뻗었다. 그녀는 잠깐 머뭇거리다가 이내 제라드의 에스코트를 피하지 않고 손을 잡더니 바닥에 섰다.
필립과 맥스가 그 뒤를 따라서 머뭇거리며 내렸다.
아직 어린 필립은 웅장한 고성과 주변에 가득한 기사들의 모습에 하얗게 질려서 몸을 바들바들 떨어댔다. 절로 위축될만한 일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제라드가 필립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괜찮아.’
필립은 제라드의 표정을 보았다.
언제나처럼 부드럽고 당당한 얼굴이었다.
그 얼굴을 본 순간, 필립은 몸에서 떨림이 사라지는 걸 느꼈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나도 마법사님처럼 되고 싶어.’
필립은 처음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강한 사람, 흔들리더라도 금세 자신을 되찾는 사람, 어떤 상황 속에서도 굳건하게 돌파해나가는 사람.
필립에게는 그 모든 것들을 하나로 집대성한 이미지가 바로 제라드 그 자체였다.
바로 그때였다.
빼곡하게 서 있던 기사들이 좌우로 일사불란하게 비켜섰다.
그 가운데로 찬란한 은색 갑주를 걸친 사십 대의 사내가 성큼성큼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아나리엘의 앞에서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드라셀 친위 기사단의 토드란 파이어스톤이 위대한 핏줄의 후손을 뵙습니다. 당신의 신하께 부디 고귀한 그 이름을 알게 하는 영광을 내려주소서.”
“동쪽 파수꾼 베너하임의 후계자인 아나리엘 베너하임입니다. 일어나도록 하세요, 토드란 경.”
토드란이라고 자신을 밝힌 기사는 흐트러짐 없는 태도로 일어나 고개를 조아렸다.
“이름은 몇 번이고 들었나이다. 다만, 제게는 진실을 판별하는 눈이 없으니, 부디 황가의 증명을 부탁드리겠나이다.”
황가의 증명.
그건 다른 말이 아니다.
드래고닉 패턴을 보고 싶다는 얘기다.
철컥.
아나리엘은 말없이 투구를 열었다.
그녀의 이마에 새겨진 드래고닉 패턴이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증명은 그걸로 충분했다.
“감사합니다. 자,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폐하께서 황가의 일원이 찾아왔다는 말에 몹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아나리엘은 토드란의 에스코트를 따라 고성의 안으로 들어갔다. 베가스와 맥스도 막 그 뒤를 따라갔다. 그러다가.
“제라드 님, 왜 그러십니까?”
“······.”
제라드가 기묘한 얼굴로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혹시 이곳에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아니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제라드는 이내 주변을 훑던 시선을 거두고 아나리엘의 뒤를 따랐다.
아무것도 아니다.
그는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역시 그런가.’
그랬다.
상황은 제라드가 예상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3
제라드 일행은 성대한 대우를 받았다.
당연했다.
드래고닉 패턴을 보유한 존재는 황가의 직결이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고 성스러운 핏줄의 후예.
그들을 지켰다는 것만으로도 대대손손 큰 상을 받기엔 부족함이 없었다.
사람 수백 명이 한 번에 들어와도 꽉 차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거대한 대전.
지금 이곳에는 무수한 사람들이 서 있었고, 가운데에 존재하는 붉은 제단 위에는 푸른색 로브를 걸친 마법사 세 사람이 서 있었다.
셋은 제라드와 베가스, 맥스였다.
“······이상의 공로를 치하하는바, 크루드 마탑이 제국에 기여하는 부분을 높이 사서, 현재 나라 안팎의 환난이 끝나면 마탑을 재건하는 일을 우선 시행할 것을 약조한다.”
황제의 뜻을 대신하여 전달하는 재상의 말이 끝나자마자, 세 사람은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끝났구나. 이 임무를 끝까지 완수하였다.’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베가스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이 나라 최고의 권좌에 있는 황제를 면전에 두고 공을 치하받는 순간, 드디어 그것을 실감하였다.
임무가 끝났노라고 말이다.
많은 생각이 머리를 스칠 때였다.
“참으로 훌륭한 일을 해냈군.”
그들의 앞으로 나서서 말을 걸어오는 인물이 있었다.
그는 잿빛 로브를 걸치고 있었는데, 그 색은 아주 오래전 최초의 마법사가 걸치고 있었던 그 색과 같았다.
일곱 마탑 중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는 무색의 마법사로서 오직 황가를 위해서만 일하는 궁중 마법사 중 한 사람이 바로 그였다.
“크루드 마탑의 기상이 간악한 자들 때문에 땅에 떨어지기는 하였으나, 오늘날 그대들이 크루드 님의 위상을 다시 세우고, 마법사들의 이름을 높이 알렸네. 이 공적은 후대에 알려져 존경을 받기엔 부족함이 없을 걸세.”
“하,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베가스가 가슴이 벅차오르는 걸 겨우 억누르며 그렇게 말했다. 무색의 마법사들이라고 불리는 궁중 마법사들은 모든 마탑보다 우위에 있는 존재라고 했다.
더군다나 눈앞에 있는 존재는 마법사 중 유일하게 마스터라고 불리는 존재가 아니던가.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한 가지. 황제 폐하께 감히 윤허 받고 싶은 것이 있나이다.”
제라드가 느닷없이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그렇게 외쳤다.
황제가 자리에서 일어서고, 재상과 귀족들이 막 대전을 벗어나려고 할 찰나였다.
공을 치하하였으니, 이제 남은 건 궁중 마법사들이 잘 마무리를 짓는 게 관례였다.
그런데 지금 저 젊은 마법사가 황제의 발걸음을 잡았다.
황제는 별스러운 일이라는 듯 묘한 표정을 지었다.
“자네, 이게 무슨 짓인가.”
잿빛 로브의 마법사, 카이번이 무서운 얼굴로 제라드를 노려보았다.
“용무가 있다면 나를 거쳤어야지. 이게 무슨 결례인가?”
“죄송합니다만, 저는 궁중의 법도 같은 건 모릅니다. 폐하께서 지금 이곳에 계시니, 여쭙는 것일 뿐입니다.”
“뭐라······.”
카이번의 표정이 더욱 무섭게 일그러졌다.
국가공인 마법사이자, 궁중 마법사로서 일곱 마탑의 탑주조차도 그의 앞에서는 공손하였다.
‘제깟 놈이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카이번은 제라드를 잘 몰랐다.
아니, 정확하게는 관심이 없었다.
공국에서 여기까지 오는 과정이 험악했다고 해봐야 얼마나 험했겠는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삼십 대의 중후한 인상의 황제는 흥미롭다는 얼굴로 제라드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좋다. 짐에게 무엇을 허가받고 싶은가. 크루드 마탑의 젊은 마법사여.”
“성 곳곳에 존재하는 마법진 중 몇 가지를 확인하고 파괴하고 싶습니다.”
“마법진을 파괴하고 싶다고?”
과격한 발언에 황제가 미간을 모으며 그렇게 되물었다.
웅성웅성.
대전의 귀족들과 잿빛 로브의 궁중 마법사들이 하나같이 난감한 표정을 하였다.
“자네, 미치기라도 하였는가?”
아주 조용한 목소리로 그렇게 묻는 카이번.
제라드의 뒤에 서 있는 베가스와 맥스는 어찌할 줄 모르고 있었다. 그들은 대체 제라드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몰랐다.
“그렇게 하겠다는 이유가 무엇인가, 크루드 마탑의 마법사여. 궁중 마법사들이 수없이 많은 시간 동안 차근차근 쌓아올린 마법진은 황가를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일진대.”
“아뢰기는 송구스럽습니다만, 대부분 마법진은 폐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만, 개중 몇 가지는 그렇지 않은 게 있는 듯합니다.”
“그렇지 않은 게 있다? 좋다, 그럼 그게 어떠한 것인지, 말할 수 있겠는가?”
“아직은 무엇이라고 단언할 수 없습니다. 그저 지금은 미심쩍다는 말 외에는 드릴 말씀이 없나이다.”
제라드의 말에 다시금 대전이 소란스러워졌다. 무엇도 확신할 수 없으면서 황제에게 그와 같은 말을 했다는 얘기가 아닌가.
그러나 황제의 눈가엔 이채가 어렸다.
황족에게 존재하는 드래고닉 패턴. 그것은 황제에게도 존재했고, 그 말인즉슨 그에게도 사람의 표면 심리를 읽을 수 있는 싸이콜로지 사이트가 있다는 얘기였기 때문이다.
제라드의 표면 심리에 떠오른 강렬한 의사는 말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황제에게 전해지고 있었다.
잠깐의 소란이 그쳤음에도 여전히 황제가 침묵을 지키고 있자, 카이번이 상황을 정리하려고 하였다.
“폐하, 소신이 이 일을 나서서······.”
“아니다. 짐은 크루드 마탑의 저 젊은 마법사의 간청을 받아들이겠다. 아직은 무엇이라고 단언할 수 없다고 하였으니, 마법진의 파괴는 허가할 수 없다. 허나, 그것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밝혀질 수 있도록 조사권을 부여하겠노라.”
“감사합니다, 폐하.”
“그래서 그 기한은 얼마나 걸릴 것 같은가?”
“아침을 넘기지 않을 것입니다.”
“좋다. 그럼 내일 이 대전에서 그대가 무엇을 찾았는지, 이야기를 듣도록 하겠다.”
제라드가 고개를 숙이는 가운데, 황제는 대전을 벗어나기 전에 그를 힐끗 눈에 담고 돌아갔다. 귀족들이 못마땅한 얼굴로 제라드를 한번씩 보면서 대전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제라드도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싸이콜로지 사이트.
편리한 능력이었다.
제라드는 조금 전 황제만이 들을 수 있는 말로 이렇게 말했다.
‘적이 내부에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황제는 그런 제라드의 뜻을 받아들였다. 아마도 황제 역시 어느 정도 생각해온 바는 있었던 모양이었다.
“······이게 대체 무슨 짓이지?”
제라드의 시선이 돌아갔다.
바로 지척에 있는 노쇠한 마법사 카이번이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얼굴을 하고서 제라드를 노려보고 있었다.
< 괴물의 이름1 > 끝
ⓒ 양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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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괴물의 이름2 >
4
“내가 우습게 보였는가? 그런 게 아니고서야 대체 이게 무슨 짓이지? 내가 아니면 황실이 우습게 보이기라도 하였다는 얘기인가?”
“오해이십니다. 제게 그런 의도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왜 그리하였는가. 자신의 행동이 무엇을 뜻하는지도 모를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을 텐데 말이야.”
카이번은 서릿발 같은 분노를 드러내며 조금 전, 그의 행동이 몹시 못마땅하다는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그러나 정작 제라드의 얼굴은 담담하기만 했다. 카이번의 이글대는 눈빛을 피할 생각이 없는 듯한 모습. 그 덕분에 애가 타는 건 베가스와 맥스였다.
카이번은 궁중 마법사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마법사 중에서는 유일하게 마스터라고 불리는 사람과 이런 식으로 대적하는 게 앞으로의 일을 생각해볼 때 좋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제 행동이 많이 불쾌하신 모양입니다만, 제게 다른 의도는 없었습니다. 폐하께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미심쩍다. 저는 그렇게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니까 그 말 자체가 나와 궁중 마법사들을 바보로 만드는 소리가 아니냐는 걸세! 내가 두 눈을 뜨고 지켜보는 이곳에 미심쩍은 게 보인다니? 내가 발견하지 못한 것을 자네가 발견하기라도 했단 말인가?”
“그럴 가능성 역시 충분히 있지 않겠습니까?”
“가, 감히······!”
제라드의 말에는 어떤 감정도 깃들어있지 않았다. 그저 아주 맑은 물처럼 투명하였으니, 그 안에 비치는 것은 카이번의 분노뿐이었다.
‘뭐, 이런 건방진 놈이 다 있단 말인가······.’
카이번이 황당무계하다는 얼굴을 하고 있을 때였다.
“하하. 거침없으신 분이로군요.”
별안간 끼어드는 목소리에 제라드와 카이번의 시선이 그곳에 쏠렸다. 전부 다 물러간 줄 알았는데, 아직 이 대전에 남아있던 사람이 있는 모양이었다.
붉은빛이 감도는 갈색 머리칼이 인상적인 삼십 대 후반의 마법사가 이곳으로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카이번이 노한 기색을 감추지 않고 말했다.
“베네론, 아직 그와 나의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어.”
“이제 그만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이미 폐하께서는 그의 청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한 사람의 마법사로서 그가 발견한 게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흥! 난 관심 없네. 그저 황실을 가벼이 여기고 천지분간도 못 하는 치기 어린 마법사에게 계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할 뿐이야.”
그 순간, 제라드의 입가에 웃음이 스쳤다.
카이번은 그걸 놓치지 않았다.
“감히 웃어? 내 말이 우습나?”
“쓸데없는 논쟁은 여기서 그만두지요. 할 일이 많습니다.”
제라드가 몸을 돌리자, 카이번이 벼락같이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건방지구나. 그만둘지 말지는 그대가 정하는 게 아니야. 바로 내가 정하는 일이다!”
고오오.
카이번의 손을 타고 무거운 마나가 제라드의 몸 안으로 흘러들어왔다. 일반적인 마법사라면 바로 안색이 바뀔 정도로 위협적인 마나였다.
그러나 지금 카이번의 앞에 있는 마법사는 일반적인 마법사가 아니었으니.
제라드는 처음과 같은 얼굴로 카이번을 가만히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꿈틀.
카이번의 미간이 모였다.
‘마나 프레셔를 견뎌내는가?’
겁만 좀 줄 참이었는데, 생각이 바뀌었다.
고오오오오.
카이번의 잿빛 로브가 펄럭였다.
“마스터 카이번, 그쯤이면 충분하지 않습니까. 까마득한 후배에게 이 무슨 부끄러운 행동이란 말입니까.”
베네론이 그렇게 말리고 나섰다. 후배를 계도하는 것치곤 너무 과도하다.
그런데 흘러가는 상황이 묘했다.
카이번의 로브가 펄럭거릴 정도로 마나가 요동치는 와중인데, 제라드의 표정은 처음과 똑같았고 정작 그의 로브는 꿈쩍하지 않고 있었다.
“이대로 계속하실 참이십니까?”
“감히 언제까지 그 건방진 소리를 늘어놓을 수 있는지 볼 것이야.”
카이번이 그렇게 말하며 기세를 더 끌어올린 순간, 제라드의 눈이 가늘게 변했다.
잠자코 흘려내기에는 이제 쏟아져 들어오는 마나의 양이 너무 컸다.
‘쉽게 가자면 고개 한 번만 숙이면 될 일이다.’
제라드도 그처럼 쉬운 길을 모르는 게 아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왜냐하면, 카이번은 마법사답지 않은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뼛속 깊이 마법사였더라면 나의 행동으로 궁중 마법사의 위신을 염려하기보다는 내가 어떤 점을 미심쩍게 여겼는지를 더 궁금하게 여겼어야 했다.’
마법사가 마법사인 이유는 가장 큰 가치를 무엇에 두느냐에 있었다. 하지만 카이번은 마법보다 위신과 권위에 더 집중했다.
거기서 그는 마법사가 아니라, 황제의 신하이자 귀족이 되기로 한 것이었으니.
제라드는 마나를 운용했다.
고오오오.
무섭게 그의 몸 안으로 흘러들어오는 마나를 거대한 그물망에 모은다. 그리고 일정 이상의 마나가 모였을 때, 그것을 단 한 번에 밀어 올렸다.
쩌엉!
제라드와 카이번 사이에서 일순 돌풍이 일어났다.
마나가 압축되었다가 터진 것이다.
카이번은 뒤로 두 걸음 정도 주춤주춤 물러났다.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단 한 순간에 상황은 끝났다.
“이쯤이면 충분하겠지요. 저는 폐하의 윤허를 따라 조속히 마법진을 조사하도록 하겠습니다.”
제라드는 처음과 똑같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렇게 말하며 대전을 벗어났다. 잠시 머뭇거리던 베가스와 맥스도 그 뒤를 따르는 가운데, 카이번은 여전히 멍한 얼굴이었다.
베네론이 그의 안색을 살폈다.
“마스터 카이번, 괜찮으십니까?”
“······크흠. 난 아무렇지도 않네. 그보다 대체 저자는 누구인가? 크루드 마탑의 1급 마법사라고 들었는데, 조금 전의 수준은 1급 마법사의 수준이 아니었어. 아니, 웬만한 원로 이상인 듯하군.”
“그럴 수밖에요. 테라 마탑의 봉문을 기억하십니까?”
“그걸 모를 리가 있겠나. 원로 마법사 타브라스가 일을 벌였었지. 그런데 갑자기 왜 그 이야기를······.”
카이번은 그렇게 중얼거리다가 이내 눈을 크게 떴다.
지금으로부터 2년 전에 있었던 아덴바움 후작가의 대사건. 분명히 그 모든 일을 수습했던 것은 크루드 마탑의 1급 마법사였다.
“그, 그럼 설마, 그 1급 마법사가 저자란 말인가?”
“예, 맞습니다.”
“믿을 수가 없군. 저토록 어린 마법사가 타브라스를······.”
카이번은 제라드의 어깨에 얹었던 자신의 왼손을 눈에 담았다.
손이 미세하게나마 떨리고 있었다.
조금 전 그의 손아귀를 튕겨내던 반발력이 제라드의 실력을 짐작게 하였다.
“······베네론, 자네가 저 마법사의 곁에서 그가 무엇을 찾는지 좀 봐주게. 그가 미심쩍다고 한 것이 무엇인지 나도 궁금해진 참이야.”
“예, 그렇지 않아도 그러려던 참이었습니다.”
5
제라드는 그 뒤로 성 곳곳을 바쁘게 돌아다녔다.
베가스와 맥스는 걱정 가득한 얼굴이었다.
“제라드 님, 왜 그러셨습니까?”
“무엇을 말입니까?”
“궁중 마법사······ 그것도 마스터 카이번 님이라면 고명한 마법사입니다. 그런 분과 그런 식으로 척을 지는 건······.”
“그게 무슨 문제라도 되나요?”
“다, 당연한 말씀을 하시는군요. 이제 앞으로 이곳에 있는 동안, 그들이 얼마나 비협조적으로 나오겠습니까?”
“저는 그런 쓸데없는 건 일일이 신경 쓰지 않습니다. 마법사가 생각해야 할 건 마법사로서의 마음가짐뿐입니다.”
“······.”
제라드는 그렇게 대답하면서 멈춰 서더니 벽에 손을 얹었다. 그 순간, 벽에서 푸른빛이 흘러나왔고, 머잖아 마법진의 형상이 벽 전체에 드리웠다.
우우웅.
마법진을 한 번에 찾아낸 것이다.
‘역시 우리와는 차원이 다른 분이시구나······. 마법진이 발동하지도 않았는데, 저토록 쉽게 찾아내다니.’
두 사람이 그렇게 생각하는 가운데, 제라드는 잠깐 눈을 감고 있다가 이내 다시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예상하던 것보다 더 최악인가.’
제라드의 생각이 점점 더 깊어지는 가운데, 그런 상황은 계속 이어졌다. 마법진을 찾고 확인하는 과정. 시간이 점차 흘러가는 가운데.
“잘 되어 가고 있습니까?”
별안간 복도 저편에서 나타난 잿빛 로브의 마법사.
그는 대전에서 보았던 베네론이라는 마법사였다.
제라드는 벽에서 손을 떼고 그에게 시선을 돌렸다.
“예, 거의 다 끝나갑니다.”
“이거 굉장하군요. 이 고성에 존재하는 마법진 대부분은 최초의 마법사님께서 남기셨지요. 마법의 해석 자체가 힘들다고 정평이 나 있는데 그 마법진을 불과 반나절 만에······.”
“마법의 시초라고 해서 반드시 대단한 건 아닙니다. 오히려 파생되기 전의 원형이기에 존재하는 규칙과 틀이 명확하기도 한 법이죠.”
“하하하. 이거 마법계에 새로운 바람이 불어오는 모양입니다. 제가 후배님께 하나 배웁니다.”
베네론은 멋쩍게 웃으며 길을 안내하였다.
“자, 그럼 제가 도울 수 있는 만큼 돕겠습니다. 성 내부의 일은 궁중 마법사가 가장 잘 아는 법이지요.”
카이번과는 달리 베네론은 사람이 좋았다. 제라드와 카이번이 그렇게 대립했음에도 그는 무슨 일이라도 있었느냐는 듯 예절을 지켰다.
그렇게 몇 가지 이야기를 나누면서 몇 가지 이야기를 주고받았을 때였다.
“헌데 제라드 공께서는 그간 어디에 있었습니까? 말을 들어보니 크루드 마탑이 무너졌다는 것도 모르셨던 것 같은데요.”
“일이 있어서 검은 대지에 갔었습니다. 그곳에서 고대 마법에 휩쓸리는 바람에 헤어나오기가 좀 어려웠죠. 시간이 오래 걸렸습니다.”
“고대 마법이요? 이거 참······. 검은 대지에 아직도 무엇인가가 남아 있다는 게 놀랍군요.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라도 꼭 듣고 싶군요.”
베네론이 그렇게 말했을 때였다.
갑자기 제라드가 걸음을 멈추었다.
“응?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조사는 다 끝난 것 같습니다.”
“아니, 벌써 다 마법진의 판별이 끝난 겁니까?”
“예, 그런 것 같습니다.”
모호한 답변.
베네론은 궁금하다는 표정을 했다.
수 시간 동안 제라드의 곁에서 친절하게 안내했던 그였으니, 당연히 결과를 궁금해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그러나.
“조금 정리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제라드는 그렇게 대답하며 고개를 숙일 따름이었다.
베네론은 아쉽지만, 별수 없다는 표정을 했다.
6
이튿날 오전, 대전에는 다시 사람들이 모였다.
지금 이 자리에 모인 사람만 해도 100명이 넘는 듯하였다.
그리고 이 대전의 끝.
아르메스의 가장 드높은 권좌에는 한 인물이 앉아 있었다.
“······그래서 답은 찾았는가, 크루드 마탑의 마법사여.”
“예, 찾았습니다.”
짧은 대답에 황제의 눈에 이채가 드리웠다.
“좋다, 그래서 답은 무엇인가.”
좌중의 시선이 제라드에게 꽂혔다.
카이번과 베네론 역시 이 자리에 함께 있었다.
잠깐의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폐하, 현재 아르메스 각지에서 일을 벌이는 흑마법사들의 목적은 실로 단순 명쾌합니다. 힘을 손에 넣어서 이 세상의 질서를 뒤집는 일이지요. 그리고 지금 그들이 원하는 것은 드래고닉 패턴입니다.”
“엉뚱한 답이로군. 다만, 그 대답이 짐의 물음과 연관이 있다는 것으로 들리는구나. 그 흑마법사의 무리가 짐의 영역에도 마찬가지로 이 성의 마법진에도 수작을 부렸다는 말인가?”
“폐하, 저 마법사의 말만 듣고 어찌 그리 속단할 수 있겠나이까! 소신은 긴 시간 폐하를 위해 충성을 다하며, 성내를 두루 살폈나이다!”
별안간 나서는 카이번. 그는 더 듣고 있을 수 없다는 얼굴로 황제에게 고개를 깊이 조아렸다. 다른 궁중 마법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성내의 모든 마법은 궁중 마법사의 담당이다.
즉, 만약 이 일이 제라드가 말한 것처럼 흑마법사와 어떤 연관이 있다면 가장 먼저 의심을 받게 되는 건 그들이었다.
웅성거림이 점차 커질 때였다.
“물러가지 못하겠는가? 짐이 지금 대답을 듣고자 하는 상대는 그대들이 아니다.”
황제의 나직한 말에 웅성거림이 한 번에 잦아들었고, 카이번을 비롯한 궁중 마법사들이 깜짝 놀라 옆으로 물러났다.
대전이 다시 무거운 침묵에 잠기는 가운데.
“자, 대답해보라. 그대가 그 말을 꺼낸 연유를 말이다. 짐의 충신 중에서 적이 있노라고 말한 것이 맞는가?”
“그건 모릅니다.”
“모른다?”
“예, 모릅니다.”
제라드가 당당하게 말하였다.
참으로 황당무계한 말이 아닐 수 없었다.
황제의 미간에 골이 파이기 시작할 때였다.
제라드는 다시 말을 이었다.
“폐하, 저는 마법사입니다. 마법사가 할 수 있는 것은 이 안에 적이 누구인지 밝혀내는 일이 아닙니다. 이곳에 있는 마법이 무엇인지, 제가 밝혀낼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뿐입니다.”
“당치 않은 궤변이로구나! 하지만 무슨 말인지 알겠다. 그렇다면 그대가 증명할 수 있는 게 무엇인지, 어디 한 번 보여다오. 판단은 짐이 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제라드는 그렇게 대답하면서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손을 그었다.
푸른빛 입자가 모여들더니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맺히며 선을 이어나갔다.
“성 내부······ 성 내부의 모습이로군.”
기사 중 누군가가 그렇게 말했다.
“맞습니다. 제가 지금 그리는 건 성의 모습입니다.”
제라드는 그 말에 동의하며 성 내부 곳곳에 점을 찍으며 그것이 무엇인지 설명하였다.
“이건 모두 성내의 마법진입니다. 지금 이곳에 존재하는 마법진은 궁중 마법사분들이라면 누구든 알고 있는 것이지요. 이 마법진 중에서 제가 이상하게 여긴 부분은 바로 이곳입니다.”
제라드는 그렇게 말하며 마법진 중 몇 부위를 한곳씩 짚었다.
“제가 찍은 각 부분의 모서리에 있는 마법진에는 술식이 하나씩 숨겨져 있습니다. 그리고 이 숨겨진 술식이 각기 다른 방식으로 발동하게 되면······.”
“엇!”
궁중 마법사들이 깜짝 놀란 얼굴을 하였다.
세 개의 모서리 부분에 존재하던 마법진의 술식이 모양을 바꾼 순간, 성안의 마법진 전체의 흐름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이, 이럴 수가! 성 안의 마법망은 분명히 16개로 나누어서 저마다 개별적인 독립 마법진일 텐데······.”
단 세 가지 술식 변환. 고작 그것만으로 성 내부의 모든 술식이 전부 다 뒤바뀌었다.
이건 궁중 마법사 중 누구도 알지 못한 것이었다.
“이렇게 하나가 된 마법망에는 최우선 권한 술식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이 술식은 16개 중에서도 상위 술식인 3개의 술식을 담당하는 한 마법사의 손에 모두 통제됩니다.”
“3개의 상위 술식······.”
궁중 마법사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성 내부 단면도에 만들어진 마법진.
그 마법진이 하나로 이어져 중심에 다다르자, 모든 게 명확해졌기 때문이다.
제라드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돌아갔다.
좌중의 시선도 그를 따라 움직였다.
제라드의 시선이 닿는 곳. 그곳에 한 사람의 마법사가 있었으니.
“폐하, 마법의 증명은 끝났습니다. 제가 증명한 마법은 지금 이 순간, 단 하나의 진실에 닿아있나이다.”
제라드가 그렇게 단언하였다.
< 괴물의 이름2 > 끝
ⓒ 양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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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괴물의 이름3 >
7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한순간 이 대전의 시간이 멈춘 듯했다. 그렇게 누구도 말을 잇지 못하는 가운데.
“이, 이놈!”
카이번이 호통을 쳤다.
“입으로 내뱉으면 다 말인 줄 아는구나! 지금 그대가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는 아는가!”
모두가 아연한 얼굴이었다.
왜냐하면, 제라드가 지금 똑바로 바라보는 이가 바로 마스터 카이번의 오른팔이자, 2인자인 베네론 마이스터였기 때문이다. 베네론도 썩 난감한 듯 웃었다.
“제라드 공, 무엇인가 잘못된 게 아닐는지요.”
“안 됐지만, 잘못된 건 없습니다. 제가 이 마법망의 비밀을 꿰뚫었다는 것은 다시 말하면 제 말을 증명할 수 있다는 말과 같습니다.”
“제라드 공의 말이 다 맞는다고 하더라도, 그게 모함이거나 어떤 함정일 가능성도 충분합니다. 적들이 우리의 결속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말입니다.”
웅성웅성.
장내가 소란스럽게 바뀌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믿고 싶은 것을 믿는다.
외부에서 찾아온 제라드와 오랜 시간 황족을 지켜온 궁중 마법사 베네론과 마탑을 잃은 외부에서 온 마법사.
그 사이에 방황은 없었다.
카이번은 당연히 베네론을 철석같이 믿는 듯하였고, 황제는 그저 무거운 얼굴을 하고서 이 상황을 지켜볼 따름이었다.
그 말인즉슨 이 자리에서 바로 증명해야 한다는 얘기다. 더 시간을 끌 것도 없이 명확하고 분명하게 말이다.
“······흑마법사 중에는 영혼석이라는 물건을 가지고 다니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 물건은 흑마법의 요소 중 하나인 생명력을 대신 소모하지요. 당연히 정상적인 방법으로 만들어질 리가 없는 이 물건은 특이하게도 서로 잡아당기며 반응합니다. 특히, 질량이 큰 영혼석이 작은 쪽을 잡아당기죠.”
“영혼석이라니. 그런 물건이 있단 말인가?”
제라드가 뜬금없이 그런 말을 꺼내자, 궁중 마법사들이 미간을 모았다.
그들도 그런 얘기는 처음 들었기 때문이다.
그게 당연하다.
영혼석의 존재는 알려지지 않았으니까.
제라드는 품속에서 작은 주머니를 꺼냈다. 그리고 그 밀봉을 푼 순간, 마법사들을 비롯한 기사들의 눈빛이 무섭게 변했다.
스아아아.
그것은 일견 시꺼먼 돌처럼 보였다.
지금 이 자리의 누구도 그게 무엇인지는 몰랐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사악한 물건인지는 너무나도 분명해보였다. 아지랑이처럼 일렁이는 기운은 그저 보고 있는 것만으로 속이 메스꺼워질 지경이었고, 기분을 불쾌하게 만든다.
바로 그때, 제라드가 영혼석을 땅에 떨어뜨렸다.
바닥에 떨어진 영혼석은 달그락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꼭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헉!”
궁중 마법사들이 모두 옆으로 물러나는 가운데, 영혼석의 조각은 베네론의 발치에 다다라 허공에 둥실 떠올랐다.
“이, 이게 무슨······.”
궁중 마법사들이 난색을 금치 못하는 가운데, 베네론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제라드 란스터······. 곤란한 분이군요. 마스터 카이번께서 왜 그토록 그를 경계하였는지 알 것 같습니다. 당신이 설마, 영혼석의 성질을 이해하고 있을뿐더러, 영혼석의 기운까지 감지할 수 있을 줄이야······.
“베네론, 자네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이미 다 알고 계시면서 현실을 부정하는 건 나쁜 버릇입니다. 아무래도 이게 제가 드릴 수 있는 마지막 충고가 되겠군요, 마스터 카이번.”
“베네로오오온!”
카이번이 일그러진 얼굴로 고함을 내질렀다. 그의 전신에서 무서운 마나가 줄기줄기 피어오른 그 순간이었다.
퍼억!
그의 가슴팍에서 왈칵 피가 터져 나왔다.
“커으윽!”
카이번의 노쇠한 몸이 바닥으로 무너지는 가운데, 기사들이 일제히 칼을 뽑았다.
채채챙!
이런 와중에 카이번의 피로 얼굴이 피범벅이 된 베네론은 여전히 웃는 낯을 하고 있었다.
“쯧쯧. 항상 호기심과 욕심이 말썽이야. 깔끔하게 끝낼 수 있었던 일이 엉망진창이 되어버렸으니 말이야.”
그는 그렇게 말하며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그 순간, 카이번의 가슴팍에서 핏물과 함께 터져 나온 살점 덩어리 따위가 둥실 그의 주변으로 날아올랐다. 살점에 엉겨붙은 모습으로 보랏빛을 줄기줄기 내뿜는 그 물건이 무엇인가는 분명했다.
영혼석.
그것은 바로 영혼석이었다.
“열매는 다 익으면 제때제때 수확해야 하는 법이지.”
8
좌중은 경악했다.
마스터 카이번이 눈 깜짝할 사이에 당했다.
가슴팍이 헤집어진 상태로 왈칵 피를 토하는 그는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눈앞의 베네론을 노려보고 있었다.
“네······ 네놈 어, 언제부터······.”
“오, 역시 대단하시군요, 마스터 카이번. 그 지경이 되었는데도 의식이 아직 남으셨다니. 생명이 사그라지는 와중에 고작 그런 게 궁금하십니까?”
“가, 감히 이, 이런······ 쿨럭!”
피를 토하는 카이번의 얼굴은 잠깐 사이에 수십 년은 더 늙은 모습이었다. 그는 죽어가고 있었다.
“늘 자신만만하셨던 분이 그러고 계시니 마음이 안 좋군요. 마지막이니까 대답해드리겠습니다. 처음부터입니다. 저는 처음부터 당신의 적이었습니다.”
베네론이 그렇게 장난스러운 말투로 속삭인 순간.
“베네로오오온!”
“네노오오옴!”
궁중 마법사들이 일제히 마법을 전개해왔다.
무색 마탑의 마법사라고 불리는 궁중 마법사들은 각 마탑의 비전이라고 할 수 있는 속성계 마법을 익히고 있었으므로, 순식간에 전개된 마법들은 저마다 속성이 달랐다.
그러나 그 마법이 끝까지 완성되는 일은 없었으니.
퍼퍼퍽!
거의 동시에 터지는 가슴팍의 핏물과 함께 마법사들이 피를 토하며 땅을 나뒹굴었다.
카이번이 당했을 때와 똑같았다.
뭔가를 하기도 전에 일이 벌어졌다. 그들의 가슴팍에서 터져 나온 똑같은 검은 돌조각. 그것은 꼭 기생하고 있었던 것처럼 베네론의 몸 주변을 빙글빙글 돌았다.
“서두르지 말라고, 후배들. 그래도 오랜 시간을 함께 해왔는데, 한 명씩 인사는 하고 싶단 말이야. 그게 인정이라는······.”
퍼엉!
베네론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그의 머리 바로 지척에서 터진 뇌화가 빛을 내뿜으며 사방으로 뿜어져 나왔다가 흩어졌다.
찰나간에 제라드가 날린 섬전. 하지만 곧 흩어지는 스파크 속에서 베네론의 모습이 멀쩡하게 나타났다.
“이런이런. 조금 더 기다려주는 거 아니었나?”
“누가 그런다고 했지?”
제라드는 무서운 얼굴로 말하면서, 섬전을 쏟아내기 시작하였다.
파지지직!
뇌화가 연이어 터졌다.
그러나 제라드는 자신의 마법이 통하지 않음을 알았다.
‘역시 스펠 브레이커인가······.’
제라드의 눈빛이 침전하였다.
그가 날린 마법이 베네론에게 닿기 직전에 온데간데없이 흩어지고 있었다. 그 말인즉슨 마법이 무위로 돌아가고 있다는 얘기다.
“이봐, 거기까지 해둬. 영혼석이 부족해지면 또다시 채우면 그만이야. 이곳에 사람은 아직 많다는 걸 잊은 모양인데, 다 죽어도 상관없다는 건가?”
베네론이 싸늘한 목소리로 경고를 해오자, 제라드가 손가락을 튕기던 것을 멈추었다. 손가락 끝에서 일렁이던 뇌전이 흩어지기 시작하였다.
“흐음, 말귀는 잘 알아듣는군. 분명하게 말하는데, 네게 승산은 없어. 네가 정도를 지키는 마법사라면 더더욱 말이야. 내가 아무런 준비도 없이 이 자리에 섰을 리가 없잖아.”
베네론은 그렇게 말하더니 이내 손을 휘저었다.
쿠쿠쿠쿵!
밖으로 이어지는 모든 출구가 닫히기 시작하였다.
“폐, 폐하를 지켜라!”
“타합!
기사들이 황급히 황제의 곁을 겹겹이 에워싸며 지키는 가운데, 세 명의 기사가 눈을 날카롭게 치켜뜨고 쇄도하였다. 그 무모한 공격에 제라드가 다급히 소리쳤다.
“그만둬!”
그러나.
“늦었어, 머저리들.”
베네론은 싸늘하게 중얼거렸고, 세 기사의 가슴팍에서 퍽! 소리와 함께 핏물이 터져 나왔다.
“크억!”
“컥!”
가슴팍을 헤집고 핏물이 쏟아져나오는 와중에 기사들이 왈칵 피를 토하면서도 멈추지 않고 칼을 휘둘러왔다.
쉬아악!
허공을 가르며 쏟아지는 칼.
베네론은 칼을 향해 손을 휘젓더니 돌풍을 만들어 그들의 몸을 벽으로 날려버렸다.
“커흑!”
“그따위 공격이 통하리라 여겼······. 무슨 짓이냐.”
베네론이 말을 하다 말고 제라드를 노려보았다.
“······제라드 란스터, 말귀를 못 알아들었나? 그렇다면 분명하게 말해주지. 아무것도 말이다. 난 너와 마법망의 주도권 싸움 따위를 할 생각이 없어.”
“······.”
제라드의 얼굴이 굳었다.
그 잠깐의 순간, 마법망의 접촉을 바로 읽혔다.
“정말 듣던 것 이상으로 위험한 마법사로군. 잠깐도 틈을 주지 않아. 그 잠깐 사이에 마법망을 뚫다니 말이야······. 아직도 저항의지가 충분히 남아있는 것 같은데, 그럼 조금 더 확실하게 하자고.”
딱.
베네론이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닫혔던 문 한쪽이 열리며 멍한 얼굴을 한 거구의 시종이 작은 아이 하나를 안고서 이상한 걸음으로 걸어 들어왔다.
“놔줘요! 놔달라고요!”
시종의 억센 팔에 감겨서 바동거리는 아이가 누구인지 알아보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필립······.”
제라드의 얼굴에 낭패의 빛이 어리는 가운데, 베네론의 입가에 미소가 드리웠다.
“후후. 네게 승산은 없다. 분명히 그렇게 말했었지?”
9
“······.”
제라드가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거구의 시종은 어느새 베네론의 바로 코앞까지 왔다.
베네론은 부드럽게 웃는 얼굴로 필립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겁먹지 마라. 난 널 해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그러기 위해서는 저기 네가 존경하는 마법사님께서 내 말을 잘 들어야 할 것 같구나.”
“마, 마법사님······.”
벌벌 떠는 필립.
그러나 필립은 지금 돌아가는 상황을 금방 파악한 듯, 입술을 질끈 깨물고 소리쳤다.
“저, 저는······ 전 괜찮아요. 마법사님, 저 때문에 나쁜 놈에게 굴복하지 마세요! 저, 절대로 그러시면 안 돼요!”
“하하하. 용감한 아이로구나. 그래, 세상엔 이런 용감하고 희생정신이 투철한 사람이 많아야 하는 법이지. 올바른 세상이란 바로 그런 데에서부터 시작되는 법이야. 그럼 우리 마법사님이 이 정의로운 소년의 말을 기꺼이 들을지, 듣지 않을지, 어디 한 번 확인해볼까?”
베네론은 그렇게 말하더니, 이내 제라드를 향해 손을 뻗었다.
휘이이잉.
바람이 그의 손에서 휘몰아치기 시작하였다. 점점 더 강한 속도로 회전하며 무서운 소리를 내는 바람.
바람의 칼날이다.
씨익 웃는 베네론.
그 순간, 그의 손에서 마법이 쏟아졌다.
목표는 제라드. 그리고 제라드의 몸에 다다를 즈음에.
펑!
꿈틀.
베네론의 미간이 모여들었다. 제라드가 순간적으로 마법을 사용하여 그의 마법을 상쇄시켰기 때문이다.
“뭐야, 사태 파악이 안 됐나?”
베네론은 그렇게 중얼거리더니, 필립의 팔에 손을 가져다 댔다.
“악!”
필립이 외마디 비명을 내질렀다.
예리하게 베인 팔뚝의 상처에서 붉은 선혈이 줄줄 흘러내리기 시작하였다.
제라드의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네놈!”
“오오, 무서운 표정이로군. 금방 달려들기라도 하겠어. 금방 죽을 것 같은데. 이거 하나만 알아둬. 나 혼잔 절대로 안 죽어.”
베네론은 그렇게 어깨를 으쓱하더니, 필립의 목 언저리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필립의 머리는 아주 간단히 제 위치를 벗어나고 말 것이다.
으드득.
제라드가 이를 갈아대며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럼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확인해볼까?”
베네론은 다시 손을 뻗었다.
휘이이잉!
또다시 모여드는 바람이 무서운 소리를 내기 시작하다가 제라드를 향해 날아들었다.
스팟!
허벅지를 스치는 바람의 칼날에 제라드가 비틀거리며 무너졌다. 허벅지에서 콸콸 쏟아지는 핏물에 푸른색 로브가 젖었다.
씨익.
베네론의 입가에 잔인한 미소가 드리웠다.
“마, 마법사님! 그러지 마세요! 제발 그러지 마세요! 저 때문에 그러시면 안 돼요!”
필립이 엉엉 울면서 눈물을 쏟아냈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베네론은 제라드를 물끄러미 바라볼 따름이다.
“자, 그럼 일어나서 이곳으로 천천히 와주겠어?”
선택의 여지가 없는 상황.
대전의 모두가 숨죽인 가운데, 제라드는 무거운 분노를 눈에 담은 채로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절뚝대며 걸어오는 그 모습을 바라보던 베네론은 다시금 바람의 칼날을 날렸다. 이번엔 팔뚝을 스치며 오른팔에서 피가 튀었다.
푸확!
“마법사님, 안 돼요!”
필립이 펑펑 울었다.
베네론은 웃는 낯으로 천천히 다가오는 제라드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마침내 거리는 불과 2미터 남짓까지 가까워졌다. 상처가 얕지 않은 듯, 피를 줄줄 흘리는 제라드의 안색은 창백해져 있었다.
“음, 그래도 마지막이니 권유 정도는 하지. 혹시나 해서 묻는데, 우리와 함께할 생각이 있나? 이 거짓된 세상의 질서를 바로잡는 작업에는 많은 일꾼이 필요하거든.”
“······그거 어디선가 많이 듣던 얘기로군.””
“그래서 대답은?”
“매번 했던 대답과 같다.”
“그런가? 뭐, 예상한 답변이지만, 그래도 유감이군.”
베네론이 그렇게 말하며 손을 뻗었다.
그 순간, 그의 주변을 빙글거리며 날던 영혼석들이 그의 팔로 모여들었다.
“후후. 검은 사도 중 누구도 하지 못했던 일을 내가 끝마치게 되는군. 영광이로소이다.”
베네론이 제라드를 향해 손을 뻗었다.
바로 그 순간, 제라드가 멀쩡한 왼손으로 베네론의 오른쪽 손목을 틀어쥐었다.
“최후의 발악이라는 건가? 괴물 같은 놈에게 꽤 인간다운 면도 있었군.”
베네론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러다가 제라드의 얼굴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뭔가 이상했다.
제라드는 바로 조금 전까지 가눌 길이 없는 분노를 억누르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런데 바로 지금 이 순간, 제라드의 얼굴에 미소가 드리워 있었다. 등줄기가 오싹 거릴 정도로 무시무시한 미소가 말이다.
“네게 승산은 없다······. 분명히 그렇게 말했었던가?”
제라드는 그렇게 말했다.
지척의 거리.
제라드가 줄곧 기다리고 기다렸던 순간이 지금 이 순간 도래하였다.
< 괴물의 이름3 > 끝
ⓒ 양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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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괴물의 이름4 >
10
오싹.
베네론은 등줄기를 타고 스치는 감각에 미간을 찌푸렸다.
‘뭐지?’
별안간 등줄기에 오한이 스쳤다. 하지만 그건 이상한 일이었다. 팔은 잡힌 것 따위가 뭐 어쨌단 말인가. 이곳은 베네론이 한없이 신에 가까워질 수 있는 공간, 즉 공방이었다.
제라드에게 승산이 없다. 그건 방심도 허세도 아니다. 그저 사실, 그 자체다.
그렇게 확신하는 이유는 베네론의 마법실력이 제라드보다 훨씬 더 빼어나기 때문이 아니다. 그의 마법실력은 단순하게 따지자면 카이번과 비슷하거나 그보다 조금 더 우위에 있는 수준이니까.
다만, 그가 절대적인 존재로 군림할 수 있는 몇 가지 요소가 있었다.
하나는 성내의 모든 존재들의 몸에는 아주 오랜 기간 숙성된 영혼석이라는 열매가 이미 끝까지 자라났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긴 시간 동안 당사자들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천천히 자라나 있었으니, 숙주가 되는 당사자들의 생명력을 한데로 끌어모은 생명의 열매, 그 자체였다.
카이번, 궁중 마법사, 친위대 기사.
그들이 간단히 쓰러진 것은 베네론의 강함과는 무관하다. 그저 오랜 시간의 준비가 결과를 만들어낸 것뿐.
제라드를 제외한 이 공간의 거의 모든 존재의 몸에 그 생명의 열매가 숙성되어 오직 ‘수확’의 때를 기다리고만 있었으니, 그들 모두가 인질이며, 베네론의 강력한 힘의 근간이라고 해도 좋았다.
‘허세인가.’
베네론은 그 결론에 다다랐다.
“놔라.”
베네론이 스산한 목소리로 지시했다. 하지만 제라드는 베네론의 팔을 놓지 않았다.
베네론이 살기를 풍기며 필립의 목에 손을 가져다 댔다. 때로는 말보다 행동이 더 확실한 자극이 될 때도 있는 법이었다.
‘번거롭게 하는군. 성유물만 아니었어도 그냥 한 번에 끝냈을 텐데······.’
베네론이 굳이 이런 상황을 이끌어낸 것은 방심도 호기심 때문도 아니다. 그보다는 훨씬 더 실리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성유물.
베네론은 제라드에게 성유물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몇 개의 조각이 바로 그의 소유가 되어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건 모두 회수해야만 했다. 반드시 말이다.
그런데 별안간 베네론의 미간이 모였다.
뭔가 이상했다.
마법이 발동하지 않았다.
‘마나는 움직인다. 그런데 왜 술식화에 이은 고정화 단계에서 뭔가 불순물 같은 게 자꾸 끼어드는 것 같은 느낌이······.’
몇 번이고 마법을 사용해도 똑같았다.
그런데 이 느낌, 어딘지 모르게 익숙하였다.
······꼭 스펠 브레이커에 노출된 때와 같다.
‘설마?’
베네론이 다시 제라드의 얼굴을 보았다.
저 기분 나쁜 미소가 다르게 보이기 시작하였다.
그 순간.
“마법을 사용할 수가 없는 모양이지?”
“뭣이? 서, 설마 네놈······ 네놈이?”
베네론이 그렇게 되물었을 때였다.
뚜두둑!
“크윽!”
베네론의 팔뚝을 쥔 제라드의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면서 그의 손목이 비틀렸다. 악력이 대단하였다.
‘말도 안 돼! 놈이 스펠 브레이커를 사용했을 리가 없어. 놈이 어떻게 그 마법을 알고 있단 말이냐. 그런 건 불가능하다. 그건 오직 선택받은 자만이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이야!’
베네론은 필립을 향해 다시 마법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마법은 발동하지 않았다.
“어째서······. 어째서냐!”
베네론은 이성을 잃은 모습으로 손을 뻗어서 필립의 목을 틀어쥐었다.
“켁! 케흑!”
우악스러운 손아귀의 힘에 필립이 숨이 막히는 얼굴로 켁켁 댄 순간이었다.
서걱!
별안간 매서운 바람이 베네론과 필립의 사이를 스쳤다.
바람의 칼날이다.
베네론은 자신의 팔이 의지를 벗어나는 것을 느꼈다.
흡사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듯한 착각. 머잖아 핏물이 솟구치는 것과 동시에 떨어져 나간 팔의 단면이 눈에 들어왔다.
“크아아아악!”
툭. 후두두둑!
팔이 떨어지고, 뒤이어 핏물이 바닥을 적셨다.
바람의 칼날이 그의 팔을 베고 지나갔다. 아주 깔끔하게 잘려나간 단면에서 피가 콸콸 쏟아져나왔다.
“끄으으으. 크아악!”
벌게진 얼굴로 비명을 내지르는 베네론.
팔 하나가 잘려나가는 이 고통을 도대체 어떻게 표현할 수가 있을까! 몸이 벌벌 떨려왔고,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딱딱 이가 절로 부딪쳤다.
출혈을 멈추기 위해 마나를 움직였다.
그 순간, 베네론은 정신이 번적 들었다.
‘스펠 브레이커, 스펠 브레이커는 사용할 수 있다. 아직,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당한다.
그렇게 바로 고개를 쳐들었을 때였다.
베네론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바로 그의 오른팔에 휘감겨 있어야 할 영혼석들이 지금 이 순간, 제라드를 중심으로 빙글거리며 허공에서 돌고 있었다.
빼앗겼다.
영혼석의 주도권을······ 빼앗긴 것이다!
그 말인즉슨 제라드가 스펠 브레이커의 동력이 무엇인지도 알고 있다는 얘기다.
이건, 이건 뭔가가······ 뭔가가 잘못되었다.
그런 생각이 들었을 때였다.
“윽!”
베네론은 팔을 잡아당기는 우악스러운 힘에 끌려갔다. 바로 그 순간, 제라드가 무릎으로 그의 복부를 올려쳤다.
퍼억!
“컥! 커헉!”
침을 질질 흘리며 정신을 못 차리는 베네론.
이런 고통은 난생처음이었다. 단련되지 않은 베네론의 육체는 이런 고통을 견디기 어려웠다.
“이해할 필요 없다. 느껴라. 네 몸으로 말이야.”
제라드는 그렇게 싸늘하게 말하며, 손가락을 튕겼다.
파직!
스파크가 튀는 순간, 섬전이 날아들었다.
베네론은 다급히 손을 뻗었다.
이 마법은 맞으면 위험하다. 조금 전에 숨이 턱턱 막히는 그런 고통에 비할 게 아니었다. 머리에 맞으면 머리가 으깨져 버릴 것이고, 몸에 맞게 되면 맞은 부위가 처참하게 사라질 것이다.
‘막아야 해. 막아야 한다!’
베네론이 스펠 브레이커를 발동했다. 그가 내뻗은 손아귀 중심에서 별안간 눈동자가 드리웠다.
팟!
날아들던 섬전이 분자 단위로 쪼개지면서 온데간데없이 흩어졌다.
베네론은 생명력이 급속도로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몸이 부서지는 듯한 고통과 함께 뇌가 눈앞이 핑 돌았다. 하지만 그는 눈을 부릅떴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영혼석은 빼앗겼지만, 나는 아직 스펠 브레이커를 사용할 수 있다. 나의 목숨을 불살라 네놈을 해치워주마!’
스펠 브레이커는 통상적인 마법이 아니었으므로, 스펠 브레이커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거리는 지척.
조금 전 스펠 브레이커가 마나의 잔향을 타고 제라드의 몸 안에 들어가면 좋겠지만, 그 가능성만 믿을 수는 없었다. 확실하게 해야만 했다.
‘한 번 더!’
베네론은 연이어 스펠 브레이커를 발동했다.
팟!
되었다.
스펠 브레이커가 완벽하게 발동했다.
베네론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막 드리웠다.
그러나.
딱.
손가락을 튕기는 소리와 함께 번갯불이 눈앞에서 번쩍 터졌고.
퍼억!
허벅지에서 핏물이 튀었다.
고통.
또다시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 등줄기를 스쳤다.
“크아아아아악!”
11
“흐아아악!”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나뒹구는 베네론.
‘어째서냐. 어째서냐. 어째서냐! 도대체 어째서 스펠 브레이커가 통하지 않았단 말이냐. 대체 어째서 그럴 수가 있단 말이야!’
이해할 수 없는 게 한둘이 아녔다.
영혼석의 존재를 알고 있다는 건 이상하긴 해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제라드는 여태 수도 없이 그들과 부딪쳐왔으니까.
그러나 스펠 브레이커는 이상하다.
조금 전에 스펠 브레이커가 먹히지 않은 것도 이상하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고통에 온몸이 벌벌 떨렸고 식은땀이 뻘뻘 났다.
‘조금 전까지 모든 게 나의 손아귀 위에 있었다. 상황은 명확히 통제되었고, 나는 의심할 나위 없이 놈을 압도하고 있었다. 그런데 왜지? 어째서 이렇게 되어 버린 거지?’
알 수가 없다.
알 수가 없는 것투성이다.
베네론은 자신의 오른쪽 허벅지를 보았다. 조금 전 날아든 섬전에 허벅지가 엉망진창이 되어 핏물이 콸콸 쏟아지고 있었다. 힘이 들어가지 않았고 감각이 없었다.
“끄으으으······. 나는, 나는 검은 사도다······. 세상을 정화하고, 거짓된 질서를, 바로잡을 신성한 임무가 있단 말이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네놈은 이래서는 안 돼······. 이래선 안 된단 말이다······.”
베네론은 제정신이 아닌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며 벌벌 떨리는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마법의 발동 제스처. 하지만 몇 번을 반복해도 그의 손끝에 바람이 모이는 일은 없었다. 바람의 법칙은 더는 그의 의지를 따르지 않는다.
딱.
제라드는 냉혹한 얼굴로 손가락을 튕겼다.
또다시 번갯불이 터졌다.
퍼억!
이번엔 베네론의 오른손이 갈기갈기 터져버렸다.
“흐아아아······.”
신음인지 비명인지, 그도 아니면 절망인지 알 수 없는 울음을 토하는 베네론. 그는 그 무기력함 속에서 바닥에 널브러졌다.
이미 싸움은 끝난 듯하였다. 하지만 제라드의 눈동자에서는 여전히 서늘한 분노가 이글거리고 있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베네론은 알아야 했다.
고통이 무엇인지. 절망이 무엇인지. 그리고 자신이 발아래로 하찮게 여긴 생명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를 실감해야만 했다.
딱. 딱. 딱.
제라드은 계속 손가락을 튕겼다.
겨우 손톱 크기의 뇌전구를 계속 날린다. 한 번에 목숨을 빼앗지 않고 일부러 몸의 끝 부분부터 파괴해나가는 것이다.
베네론은 고통에 몸부림치며 바닥을 뒹굴었다.
“으아아아악! 그······ 그만······! 그만 해······.”
베네론은 바닥에 늘어진 모습으로 그렇게 사정해왔다. 이제 그는 온전히 움직일 수도 없는 모습이었다.
“네놈에게 죽음은 사치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절망과 고통을 느껴라.”
제라드가 베네론의 명치 조금 위에 손을 얹었다. 핏물이 얽혀든 손에서 스파크가 매섭게 튀었다. 지금부터 그는 베네론의 마나 코어를 부숴버릴 참이었다.
파지직!
“그, 그만······. 아, 안 돼. 제발, 제발 그만두란 말이다! 크아아악!”
베네론은 발악했다.
그러나 소용없는 일이었다.
팔뚝에서부터 요동치던 뇌전은 곧 손바닥에 모이기 시작하였고, 마침내는 베네론의 마나 코어로 쏟아졌다.
파지지지직!
무시무시한 기세로 휘몰아치는 뇌전의 기운은 마나 코어와 함께 패스까지 모조리 찢어발기기 시작하였다.
“꺼어어어어······.”
베네론은 입을 쩍 벌리고 눈을 까뒤집었다.
평생을 연마해온 마나 코어가 갈기갈기 찢기는 고통은 마법사의 수준이 빼어나면 빼어날수록 더욱 커지는 법이었다.
파직! 파지직.
스파크가 서서히 사그라졌다.
베네론의 마나 코어는 모두 파괴되었다.
피범벅이 된 베네론의 몸에서 쉬이익 연기가 피어올랐다.
마침내, 베네론에게 죽음이 찾아든 순간이었다.
정적.
무거운 정적이 대전을 휘감고 있었다.
누구도 감히 입을 열지 못하는 가운데, 제라드의 시선은 영혼석에 꽂혀 있었다. 저 주먹보다 작은 영혼석 하나에 한 사람의 목숨이 담겨 있었다.
‘세상에 이런 지독한 마법이 또 어디에 있을까!’
베네론은 저걸 열매라고 하였다.
제라드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저 마법의 원리가 어떤 것인지 파악하였다.
사람의 몸 안에서 키우고, 필요한 순간에 뽑아 쓴다.
그것은 실력과는 전혀 무관하다.
바로 곁에서 누구보다 믿었던 동료가 사실은 그들의 몸에 독을 주입하고 있었던 상황이다. 방비는 불가능하다고 해도 좋았다.
‘구역질이 나는군.’
처참하게 죽은 베네론을 보면서 제라드의 눈에 다시금 분노가 치밀어올랐다.
그때, 필립이 창백한 얼굴로 다가왔다.
“마, 마법사님, 괜찮으세요?”
“난 아무렇지도 않다. 그런데 필립, 넌 어때. 괜찮은 거야?”
“헤헤. 저는 괜찮아요. 아무렇지도 않아요!”
필립이 웃으며 씩씩하게 소리쳤다. 하지만 제라드는 필립의 몸이 가늘게 떨리고 있음을 알았다. 괜찮을 리가 없다.
“고맙다, 필립. 정말로 잘했어. 완벽한 연기였다. 네 덕분에 모든 게 계획대로 됐다.”
“제, 제가 마법사님께 도움을 드릴 수 있어서 오히려 영광이에요······.”
필립은 잔뜩 상기된 얼굴로 기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필립의 목에 드리운 붉은 손아귀의 자국을 보는 제라드의 얼굴은 어둡기만 했다.
‘더 좋은 방법을 생각할 수는 없었을까.’
제라드는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저었다.
‘어제로 돌아간다고 해도 나는 똑같은 선택을 했을 거야. 그게 그 순간의 최선의 수였다.’
좌중은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제라드가 베네론을 쓰러뜨린 것도 놀라운데, 조금 전 필립과 나눈 이야기 중 나온 한 표현.
연기, 계획.
혹 뭔가 잘못들은 게 아닐까?
그러나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이 똑같은 말을 잘못 들었을 리가 없었다.
그랬다.
이 모든 건 수 싸움이었다. 누가 더 많은 패를 가지고 있었는가. 누구의 포석이 더 날카로웠는가를 가리는 첨예한 수 싸움.
< 괴물의 이름4 > 끝
ⓒ 양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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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괴물의 이름5 >
12
카이번의 얼굴은 검게 죽어가고 있었다.
이미 생명력이 다 하여 죽음은 피할 수 없건만, 그는 끝까지 버티고 있었다.
그를 둘러싼 궁중 마법사들이 좌우로 비켜섰을 때였다.
카이번의 빛을 잃은 눈동자가 느리게 움직여 제라드에게 닿았다.
“이, 이제 왔······ 는가······.”
“예, 다 끝났습니다.”
카이번이 지금 이 순간까지 버틴 것은 제라드에게 한마디 말을 전하고 싶어서였다.
“내, 내 눈이······ 멀어 있었군······. 미, 미안하네······.”
“이해합니다. 누구보다 믿었던 동료를 의심하는 건 누구에게나 어려운 일입니다. 제아무리 현명한 마법사라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아, 앞으로의 일을······ 부탁하겠네······.”
고맙네. 고마워.
카이번의 끝말은 거의 들리지 않았다. 그는 숨을 길게 쏟아내며 침묵하였다.
“마스터!”
열 명도 되지 않는 궁중 마법사들이 카이번의 죽음에 오열하는 가운데, 제라드는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움찔.
황제를 지키는 기사들이 몸을 떨며 칼을 치켜드는 가운데.
“모두 물러나라.”
사람의 벽 저편에서 황제가 그렇게 명령하였다.
“폐, 폐하!”
“물러나라고 하지 않았더냐.”
두 번의 명령과 함께 친위대가 좌우로 비켜섰다.
황제의 모습이 다시 드러났다.
바로 그때였다. 조금 전까지 돌처럼 딱딱하던 그의 입가에 별안간 미소가 드리웠다.
“참으로 발칙한 마법사로다. 짐의 앞으로 오라.”
제라드는 절뚝거리며 황제의 앞에 서서 멈췄다. 그러자.
“더 가까이 오라.”
황제가 다시 그렇게 소리쳤다.
제라드는 더욱 앞으로 다가갔다.
이제 거리는 불과 수 미터 남짓이었다.
곁을 지키는 기사들은 몹시 긴장한 모습이었다.
베네론이 손을 휘저을 때마다 장내의 실력자들이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친위 기사단부터 궁중 마법사나 마스터인 카이번도 그러했다.
그런데 그런 무시무시한 마법사가 제라드의 손에 어찌 되었단 말인가.
꿀꺽.
긴장감이 만연하는 가운데.
“짐의 앞으로 더욱 가까이 오라.”
“폐, 폐하.”
황제를 보필하는 신하들이 다급한 목소리로 황제를 만류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그는 아랑곳없이 손을 들어 그들을 제지하였다.
모두가 난감한 얼굴로 입을 다무는 가운데, 제라드는 멈추지 않고 다가갔다.
마침내 코앞까지 당도한 제라드.
황제는 자리에서 일어나 제라드에게 다가갔다.
제라드가 마침내 멈추어 서서 고개를 조아리는 가운데.
“고개를 들어라. 짐은 그대의 얼굴을 보고 싶으니.”
황제의 말에 제라드가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싸이콜로지 사이트를 잘도 이용하더군. 짐에게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지시를 하다니 말이야. 참으로 발칙한 작자로다.”
“송구스럽습니다.”
그랬다.
제라드는 오늘 이 대전에 섰을 때, 황제에게 싸이콜로지 사이트로 어떤 경우에도 상황에 끼어들지 말라고 전하였다.
“베네론 라인포스가 이 일을 꾸몄다는 게 믿기지가 않는군. 그대는 대체 언제부터 알고 있었는가?”
“처음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뭐라? 그러면서도 잠자코 있었다는 말이렷다. 이유가 무엇이냐. 어째서 일이 이렇게 되기 전에 움직이지 않았느냐.”
“선수를 쳤다가 낭패를 보는 일도 있습니다. 이곳은 적의 아가리라고 해도 좋은 곳입니다. 제가 섣불리 먼저 패를 다 보여주는 것은 위험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설명은 간단했으나, 제라드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있었다.
“허면, 그 상처를 입는 것도, 저 아이가 적의 손에 떨어지는 것조차도 그대의 계획 중 일부였다는 것인가?”
“예, 그렇습니다.”
좌중이 웅성거렸다.
그 말인즉슨 처음부터 끝까지 치밀한 작전 하에 구상된 수 싸움이었다는 얘기였기 때문이다.
“허어······.”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지는 가운데.
“발칙하기만 한 게 아니라, 용의주도하기까지 하구나. 그렇다면 오늘 흐를 피까지도 이미 예상했다는 말이렷다?”
“어느 정도는 예상했습니다. 다만,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그 방식이 훨씬 더 악독하고 잔혹했습니다.”
“흐음······.”
황제가 제라드의 표정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좋다, 그 계획과 과정은 마법사가 아닌 이상, 들어도 이해할 수 있는 게 아닐 터.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묻겠다. 이제 짐을 위협하는 적은 모두 사라졌는가?”
“당면한 위협은 없을 것입니다.”
단호한 대답이었으나, 모든 게 끝났다는 말은 아니었다.
“그렇군. 잘 알겠다. 크루드 마탑의 젊은 마법사여, 그대의 이름을 똑똑히 듣고 싶구나.”
“제 이름은 제라드 란스터입니다.”
“제라드 란스터. 잘 알겠다. 짐은 그대의 이름을 기억할 것이다. 당장은 어수선하고, 정리해야 할 일이 적지 않을 터. 사흘 뒤, 짐이 그대를 다시 이 자리에 부르겠노라. 짐이 직접, 그대의 공을 치하할 것이다.”
“영광이로소이다.”
황제는 고개를 숙이는 제라드의 곁을 지나가면서 낮게 웃었다.
“짐은 그 말을 그대처럼 무미건조하게 내뱉는 이를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거듭 발칙하기 이를 데 없는 자로다.”
13
지이이잉.
벽에서 흘러나오던 빛은 서서히 사그라졌다.
제라드는 감고 있던 눈을 천천히 떴다.
‘드디어 끝났다. 성내 마법망의 모든 통제권을 손에 넣었다. 이로써 성내의 어떤 상황이 일어난다고 해도 대응할 수 있게 되었다.’
이미 시각은 한참 늦었다.
제라드는 머물던 방으로 돌아왔다.
저편의 침대에 잠든 필립의 얼굴이 보였다.
목과 팔에 붕대를 감은 모습. 하지만 대신관이 직접 치료하였으니, 상처는 이미 흔적도 남아있지 않을 터였다.
-필립, 날 도와줄 수 있겠니?
제라드는 어제 바로 이 방에서 필립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최선의 수인가······.’
이틀 전, 제라드는 이 성에 들어온 직후에 위화감을 느꼈다. 그리고 그 위화감은 베네론을 만난 순간, 확신으로 변하였다.
적.
베네론은 적이었다.
제라드는 바로 그걸 알았다.
베네론이 나타나는 것과 동시에 그의 품 안의 영혼석은 반응하였다.
그뿐만이 아니다.
베리타스는 예전부터 영혼석에 몹시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것은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베네론이 나타나기가 무섭게 베리타스는 눈동자를 희번덕거렸다.
그 후에 제라드는 황제의 허가를 받고 성내 마법진을 조사하며 정보를 취합하였다. 베네론이 이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고, 무엇을 준비하였는지 말이다.
‘······예상했던 게 반. 예상하지 못한 게 반이었다.’
스펠 브레이커까진 충분히 예상했다. 영혼석과 스펠 브레이커는 떼고 생각하기 어려웠으니까. 하지만 영혼석의 정제에 관해서는 상상하지도 못했다.
‘아마도 그들은 자신들의 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조차도 몰랐겠지. 아주 느리게 차근차근 긴 시간 동안 준비해온 일이다.’
더 큰 피해가 발생하기 전에 움직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었다. 하지만 만약 베네론 이외에 다른 적이 있을 때에는 일이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게 될 터였다.
그래서 먼저 나서는 게 아니라, 적이 스스로 자신을 다 드러낼 수 있도록 유도했다. 모든 것이 베네론의 손아귀에 있다고 느끼도록 말이다.
‘······로브 안쪽에 새긴 스펠 가드는 연이어 발동하는 스펠 브레이커를 기껏해야 연속으로 두 번 정도 막는 게 전부다. 함부로 사용할 수는 없었어.’
무수한 영혼석을 연료로 삼아 스펠 브레이커를 난사하는 베네론은 이 공간에 한해서 가히 신이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었으니.
제라드는 버텼다. 실로 아슬아슬한 순간까지 말이다. 그리고 이 기다림은 마지막의 순간에 빛을 발하였다.
베네론이 제 목숨을 불살라 발동한 스펠 브레이커는 마지막 순간에 스펠 가드에 가로막혔다.
결과만 두고 보자면 제라드의 압승이다.
그러나 그 결과에 다다르기까지의 포석은 그리 순탄치만은 않았고, 만약 일이 틀어졌더라면 낭패를 본 것은 바로 제라드 쪽이었을 터였다.
‘해야 할 일은 지금부터다. 성내의 마법진에는 분명히 영혼석 정제법이 존재할 거야. 그 방식을 꿰뚫어야만 한다.’
14
며칠이 흘렀다.
필립은 꿈을 꾸었다.
검은 손아귀. 그 우악스러운 힘 앞에서 필립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살의와 악의로 온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바로 그때였다.
별안간 어둠 속에서 손아귀가 불쑥 날아들어 필립의 목을 틀어쥐었다. 목이 뜯길 듯하였고, 숨통이 점차 죄어왔다. 곧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바람이 불었고, 번쩍대는 번갯불이 번쩍 터졌다.
그러더니 곧 모든 게 끝났다.
“아아악!”
필립이 몸을 벌떡 일으켰다. 온몸이 식은땀으로 범벅이었다. 창밖이 몹시 어두웠다. 아직 새벽의 깊은 밤이었다.
“또, 또 그 꿈······.”
온몸이 덜덜 떨려왔다. 목의 상처는 이제 없었다. 팔의 상처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악몽은 끝나지 않았다.
저항할 수 없는 손아귀.
필립은 여전히 그 손에 잡히는 순간에 머물러 있었다. 두려움에 몸을 벌벌 떨며 다시 잠을 청하려는 그때였다. 불현듯이 뒤쪽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필립은 경기를 일으켰다.
“으아아아아!”
“진정해, 필립.”
“마, 마법사님······?”
발작하던 필립은 어둠 속에서 들려온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아보고 그제야 진정하기 시작했다.
그는 제라드였다.
“죄, 죄송해요. 악몽을 꿨어요······.”
“계속 며칠째 악몽을 꾸는 것 같은데.”
“아, 아니에요. 괜찮아요. 정말이에요.”
필립은 그렇게 말하며 목을 쓰다듬었다. 무의식적인 방어 행동이었다. 베네론과 관련된 일이 어지간히도 충격이었던 모양이었다.
제라드는 책임감을 느꼈다.
“필립, 혹시 마법을 배워 볼 생각이 있니?”
“네? 마, 마법이요? 제가요?”
“그래, 네 정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말이야. 정신무장을 갖추게 되면 다시는 그 꿈속에서 네가 보는 것들도 너를 어찌하지 못하게 될 거다.”
“제가······ 제가 그런 게 가능할까요?”
“필립, 중요한 건 네 의지야. 네가 어떻게 하고 싶은지, 그게 가장 중요한 거야. 넌 어떻게 하고 싶어?”
“저, 저는······ 저는 마법을 배우고 싶어요. 마법사님처럼······ 마법사님처럼 강한 사람이 되고 싶어요.”
강한 사람.
필립의 눈에는 제라드가 그렇게 보이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제라드는 자신이 강하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저 그렇게 되기를 희망하는 것뿐이다.
제라드는 말없이 필립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스승님께서도 이런 느낌이셨을까?’
케이틀란과 제라드. 그들의 첫 만남은 헤아려보자면 불과 6, 7년 전의 이야기였다. 그런데 어쩐지 지금은 그 모든 일이 아주 오래전의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스승님께서 내게 베푸셨던 것처럼······ 나 역시 누군가에게 내가 가진 것을 알려주는 거다.’
그때 필립이 우물쭈물 대면서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저, 저기 마법사님을······ 스, 스승님이라고······ 불러도 될까요······?”
“스승님이라고? 어쩐지 어색한 느낌인데······”
제라드는 머쓱한지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어색한 느낌은 지금 잠깐뿐일 터였다.
“스승님!”
필립이 크게 소리치며 엉거주춤하게 엎드려 절을 해왔다.
제라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웃었다.
그날, 저택에서 케이틀란을 향해 무릎을 꿇던 자신의 모습이 눈앞의 필립에게 겹쳐 보였다.
이튿날, 제라드는 대전의 앞에 섰다.
그그긍.
문이 열렸고, 대전의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제라드는 대전 중심으로 당당히 걸어나갔다.
무거운 정적으로 가득 찬 대전에는 오직 제라드의 발걸음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그렇게 황제의 앞에 다다른 제라드는 예법에 따라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폐하를 뵙나이다.”
“제라드 란스터. 짐은 그대가 크루드 마탑의 1급 마법사라는 얘기를 들었다. 짐이 아는 바가 맞는가?”
“예, 그렇습니다.”
“크루드 마탑이 큰 실수를 하였구나. 그대와 같은 자가 1급 마법사라니 말이야. 짐은 그대에게 국가공인 마법사의 자격을 내릴 것이며, 마스터의 직위를 안겨줄 것이니라.”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좌우의 잿빛 로브의 궁중 마법사들이 제라드를 향해 고개를 깊이 숙여왔다.
제라드로서는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다.
마스터의 직위를 받는다는 것. 그것은 다시 말하면 궁중 마법사들의 수장직을 맡아야 한다는 말과 같았기 때문이다.
“폐하, 저는 그처럼 무거운 직무를 다할 수 없습니다.”
“발칙하구나. 짐이 하사하는 것을 받지 못하겠다고 하다니. 허나, 짐은 이미 정한 것을 번복하지 아니할 것이다. 다만, 짐의 나라 곳곳에 좋지 않은 일들이 만연한 지금, 그대의 역량은 짐의 곁만이 아니라, 이 나라 곳곳에 두루 비추어야 함이 옳다. 고로, 그대가 원한다면 언제든 짐의 곁을 떠나서 온 나라를 돌보아도 좋다.”
‘이런······.’
제라드는 마스터라는 직위에 별 관심이 없었다. 직위와 권위, 자리에는 늘 그만큼의 책임이 따르는 법이었다. 하지만 황제가 이렇게까지 말하는 데 그것을 따르지 않겠노라고 말할 수도 없었으니.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는 것입니까.’
‘그렇다. 이제야 짐의 뜻을 헤아리겠느냐?’
황제와 제라드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그리고.
“폐하의 뜻을 따르겠나이다.”
황제의 입가에 미소가 드리웠다.
지금 이 순간, 싸이콜로지 사이트가 말하고 있었다. 제라드가 황제의 뜻을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걸 말이다. 그럼에도 황제는 즐겁다는 듯이 웃을 따름이었다.
‘제라드 란스터.’
황제는 천재의 범주를 넘어선 괴물의 이름을 몇 번이고 되뇌었다.
황제는 직감했다.
제라드가 이 모든 환란을 끝내고 새로운 시대의 주역이 될 것임을 말이다.
< 괴물의 이름5 > 끝
ⓒ 양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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