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승급 시험1 >
1
제라드는 석판 위에 섰다.
우우웅.
석판이 둥실 떠오르며 최상층을 향해 올라갔다.
‘생각보다 일찍 도착했는걸.’
제라드는 불과 8일만에 아덴바움 후작령에서 마탑까지 당도하였다. 거리를 생각해보자면 계속 달려왔다는 얘기였다.
석판은 금세 최상층까지 다다랐다.
똑똑.
“들어오게.”
탑주의 방 안에서 그렌자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라드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허어. 자네가 벌써 왔는가?”
그렌자일은 놀란 얼굴이었다.
공작가에서 정식 의뢰요청서가 당도한 뒤로 불과 며칠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덴바움 후작령과 이곳의 거리를 생각해볼 때, 불과 며칠 되지 않는 시간 사이의 일이었다.
“일은 잘 끝내고 왔는가? 공작가에서 일어난 일이 작은 일이 아니던데 말이야.”
“보고 드리겠습니다.”
제라드는 아덴바움 후작령에서 있었던 일을 전달하였다. 처음에는 담담하게 이야기를 듣던 그렌자일의 얼굴은 점차 일그러지기 시작하였다.
“······.”
이야기가 끝난 후에 그렌자일의 표정은 아주 어두웠다.
“폭풍이 오는군······.”
그렌자일은 제라드의 말을 듣자마자 원로 마법사들을 모두 소집하였다.
마탑의 중요 안건을 논의하는 자리인 원로 회의였다. 이 자리는 원로급 마법사와 크라운급 마법사만이 참석할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 이 자리에는 1급 마법사 한 명이 껴 있었다.
바로 제라드였다.
회의실에 들어온 케이틀란은 제라드를 보고 다소 놀란 얼굴이었다. 하지만 이 자리는 스승과 제자의 회포를 풀기엔 적합하지 않았기에 그는 크루드 마탑의 원로 마법사로서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원로 마법사들이 한둘씩 들어왔고, 크라운급 마법사들도 자리에 찾아왔다. 총 열 명이었다.
“자, 그럼 회의를 시작하겠네.”
그렌자일은 지난날, 공작가에서 정식 요청이 있었던 사실을 전달하면서 말문을 열었다. 그리고 이로 말미암아 아덴바움 후작령까지 사건이 연결된 일까지 말이다.
후작가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하는 동안 좌중은 술렁였다.
“테라 마탑의 타브라스면 암악(巖握)의 칭호가 있는 마법사가 아니던가.”
“원로급 마법사······.”
테라 마탑의 원로급 마법사가 그런 짓을 했다는 것도 충격적이었지만, 제라드가 그 원로급 마법사를 쓰러뜨렸다는 것도 충격적인 일이었다. 공평한 마법전을 벌였고, 이를 제압하였다는 것은 다시 말하면 제라드의 실력이 이미 원로급이라는 얘기였기 때문이다.
바로 그때였다.
팔짱을 끼고 있던 짧은 머리칼의 삼십 대 초반의 여인이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손을 살짝 들고 끼어들었다.
“한 가지 짚고 넘어가고 싶습니다. 탑주님께서는 저 젊은 마법사가 1급 마법사라고 하였습니다. 1급 마법사는 마탑의 정예라고 할 수 있는 마법사입니다만, 1급 마법사와 크라운급 마법사 사이에는 큰 격차가 존재합니다. 더군다나 저렇게 어린 마법사가 타브라스 메리카처럼 저명한 마법사를 쓰러뜨렸다는 건 곧이 곧대로 믿기 어려운 사실입니다.”
상식적인 지적이었다.
1급 마법사와 2급 마법사에 차이가 있듯, 1급 마법사와 크라운급 마법사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으니까.
다만, 그건 보편적인 시각이었다.
제라드는 그런 일반적인 시각에서 다소 동떨어져 있는 존재였다. 이곳에 있는 원로 마법사 중에서 적어도 세 사람은 잘 알고 있었다.
케이틀란은 제라드의 스승이었으니, 더 말할 것도 없는 일이었고, 나머지 둘은 제라드의 승급 시험에 참여했던 타란과 카서스였다. 그들은 제라드의 실력을 잘 알았다.
“보편적으로 따지자면 벨자, 자네의 말대로일세. 하지만 제라드 란스터는 그런 일반적인 시각에서 볼 수는 없네. 그의 실력은 일찍이 증명되었어.”
증명.
벨자라고 불린 여인의 눈에 호기심이 가득해졌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마법사들 중 누구도 이견을 내지 않는다.
즉, 탑주의 말에 동의한다는 얘기다.
“흥미롭네요. 제가 마탑에 없는 지난 몇 년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요?”
벨자의 시선은 제라드에게 꽂혔다.
그러나 그렌자일은 다시 논점을 돌렸다.
“지금은 제라드의 실력을 논의할 때가 아니니, 그 이야기는 그쯤 해두기로 하지. 중요한 건 이번 일로 말미암아 벌어지게 될 이후의 일일세.”
“네, 알겠습니다.”
벨자는 그렇게 말하며 다시 팔짱을 꼈다.
그러나 그녀의 시선은 회의가 끝나는 그 순간까지도 제라드에게 꽂혀 있을 따름이었다.
2
“그분은 처음 뵙는 것 같습니다.”
“벨자를 말하는 것이냐.”
“예.”
“흐음, 그래. 네가 그녀를 모르는 것도 당연하지. 그녀는 줄곧 북부 국경지대에 있었다. 마탑에 돌아온 것도 근 7년 만이지.”
7년이면 제라드가 마탑에 들어오기 전이었다.
즉, 둘이 서로 모르는 건 당연하다는 얘기다.
“그건 그렇고 이제 공작가에 갔었던 이야기를 좀 들어보자꾸나. 탑주님께서 한 이야기는 워낙 단편적이었다. 제라드, 네가 보고 듣고 느낀 것에 관해 얘기해보려무나.”
“네, 스승님.”
제라드는 공작가에서 있었던 일과 그곳에서 후작가까지 가게 된 경위를 모두 말했다. 그리고 그와 그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제라드는 이제야 비로소 집에 돌아왔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 잠깐 사이에 정말로 많은 일이 있었구나. 고생이 많았구나. 큰일을 해냈다.”
“감사합니다, 스승님.”
제라드는 겸연쩍게 웃었다. 케이틀란에게 인정을 받는 것만큼 기쁜 일은 없었다.
“헌데, 참 세상 일은 모를 일이구나. 나 역시 그분을 몇 번이고 뵈었다. 그런데 그분이 그런 짓을 벌이다니 믿기지가 않는구나. 흑마법을 익힌 것도 아닐진대, 도대체 왜······.”
흑마법.
그 말에 제라드의 표정이 굳었다.
1종 비문에서 보았던 내용이 떠올랐다.
8인의 후계자와 잃어버린 속성 마법. 이 시대가 잃어버린 마법과 기록의 내용······.
‘스승님이라면 편견 없이 있는 그대로 봐주실 거야.’
마탑으로 돌아오는 며칠 동안 이 순간을 생각했지만, 그래도 긴장이 되는 건 어쩔 수가 없는 일이었다.
“스승님, 보여드리고 싶은 마법이 있습니다.”
“마법이라고? 이거 기대되는구나. 네 마법은 늘 나를 놀라게 했지. 하지만 웬만한 마법으로는 나도 놀라지 않을 게다. 네 마법에는 이미 충분히 놀랐으니 말이야.”
케이틀란은 그렇게 우스갯소리를 하였다. 하지만 제라드는 좀처럼 웃을 수가 없었다. 지금부터 제라드가 보여주는 마법을 본 순간, 케이틀란의 얼굴에 있는 미소는 바로 사라지게 될 테니까.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하하. 뭘 그렇게 뜸을 들이느냐. 자, 어서 보여다오.”
제라드는 손에 땀이 나는 걸 느끼며 서서히 마나를 개방하였다. 중후한 마나가 그의 온몸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하였고, 머잖아 그 기운은 마법의 모든 단계를 거쳐서 발동하였다.
바로 그때였다.
조금 전까지 흐뭇한 얼굴로 제라드를 바라보던 케이틀란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마법이 발동한 순간, 제라드의 발아래로 자욱한 그림자가 얽히는 게 보였기 때문이다.
시꺼먼 어둠.
이런 식으로 발동하는 마법은 세상에 오직 단 하나밖에 없었다.
바로 흑마법이다.
케이틀란의 눈동자가 떨렸다.
그는 자신의 제자를 믿었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발동하는 이 마법은 어딜 어떻게 봐도 분명한 흑마법이 틀림없었다.
‘일반적인 흑마법과는 그 형태가 좀 다르지만, 어딜 어떻게 봐도 틀림없구나. 7가지의 어떤 속성에도 속하지 않으면서 이런 시꺼먼 어둠을 품은 마법은 흑마법뿐이야.’
케이틀란은 무거운 눈으로 제라드를 바라보았다.
제라드는 잔뜩 긴장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제라드, 내게 보여주고 싶다고 한 것이 이것이더냐?”
“예, 이 마법입니다.”
“내게는 이 마법이 흑마법으로밖에 보이지 않는구나. 네 능력이라면 지금껏 싸웠던 흑마법사들의 마법을 그대로 흉내 내는 것은 썩 어려운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흑마법이 어떤 것을 소모하는지, 그리고 사용자에게 어떤 부작용을 초래하는지는 너도 잘 알고 있을 터.”
역시 케이틀란의 눈에도 이게 흑마법으로 보이는 모양이었다. 당연히 그럴 것이다. 누구든 이 마법을 본다면 그렇게 생각하는 게 당연하다.
그러나.
“스승님, 이건 흑마법이 아닙니다.”
“뭐라? 흑마법이 아니라고?”
“네, 이 마법은 8번째 속성 마법입니다.”
“8번째 속성이라니? 제라드, 그게 대체 무슨 말이더냐?”
케이틀란이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가운데, 제라드는 말없이 양피지를 펼치고 거침없이 펜을 휘갈기며 자신이 연구한 마법을 써내려갔다.
3
“······.”
제라드가 빼곡하게 채운 양피지.
케이틀란은 그 내용을 읽고 또 읽기를 반복했다.
지금 그는 경악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이럴 수가······.”
믿기 어려웠다.
그러나 지금 눈앞에 있는 이 양피지의 내용이 모든 것을 다 설명하고 있었다.
“스승님께서도 보셔서 알겠지만, 이 마법은 생명력을 소모하지 않습니다.”
“대, 대체 어떻게 이런 마법을 알게 된 것이냐. 혹시 흑마법사들이 이런 마법을 사용한 것이더냐?”
“아니요. 흑마법사들이 사용하던 건 흑마법이었어요. 처음에 이 마법의 원형도 그러했고요. 하지만 연구하던 중에 알게 되었어요. 원래 이 마법의 원형은 바로 지금 이 마법이라는 걸 말이에요.”
꿀꺽.
케이틀란이 마른 침을 삼켰다.
“제라드, 이건······ 이건 정말 엄청난 발견이다! 너는 지금 마법계를 뒤집을 엄청난 대발견을 한 셈이야.”
“······.”
그러나 제라드의 표정은 어두웠다.
‘스승님은 모르신다. 이 마법이 이 시대에 이어지지 않은 이유를 말이야. 나도 정확히 아는 건 아니지만······.’
제라드는 8인의 후계자의 기록을 보았다.
엘레멘탈 마스터와 녹스의 대화. 그리고 그런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듣는 한 존재를 말이다.
‘그가 다른 7인의 마법사 중 한 사람일 가능성이 높아. 그렇다면 이 사실은 칭송받아왔던 그들에 의해서 감춰졌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제라드가 우려하는 건 바로 그것이었다.
타브라스가 후작가에서 어째서 그런 짓을 벌였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제라드는 어렴풋하게나마 그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그동안 마법사들이 쌓아올린 구도의 역사는······ 어쩌면 처음부터 잘못된 방향에서 시작된 것일지도 몰라. 타브라스, 그 마법사는 그것에 큰 회의감을 느낀 거겠지.’
“스승님, 저는 이 마법을 마법계에 널리 알리고 싶습니다.”
“쉽지 않은 일일 게다. 이 마법이 흑마법과는 무관하다고 해도, 흑마법의 기원이 되는 마법이라고 한다면 그것만으로도 반발하는 이가 적지 않을 것이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마법사는 진리를 탐구하고 증명하는 자입니다. 쉽지 않은 일 따위는 아무런 장애 요소도 되지 않습니다.”
제라드가 그처럼 단호하게 대답하자, 케이틀란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뿌듯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내가 네게 배우는구나. 네 뜻대로 해라. 네가 생각하는 그 길이 맞는다고 여긴다면 우직하게 나아가거라.”
“감사합니다.”
제라드는 고개를 깊이 숙이고 케이틀란의 공방을 벗어났다. 케이틀란은 한참 제라드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이내 그가 남기고 간 양피지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복잡하게 나열된 마법.
옛 마법의 그것처럼 복잡하고 어지럽게 얽혀있는 술식. 하지만 확실한 건 이 마법이 정통 마법이라는 것이다. 상식밖의 일이었다. 7가지의 속성 이외에 또 다른······ 그것도 흑마법이라고 생각해왔던 마법이 8번째 속성으로 존재한다니 말이다.
“이 마법이 흑마법으로 변질하기까지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케이틀란도 7인의 마법사와 관련된 비화를 떠올리며 서재로 향하였다.
4
쿵쿵.
제라드는 최상층의 바로 아래인 12층의 복도 끝에 있는 공방 앞에 서 있었다. 이곳은 빛 한 점 드리우지 않는 곳이었으니.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끼익.
머잖아 문이 열렸고, 공방 안쪽에서 초췌한 얼굴을 한 마법사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무슨 일로 찾아왔나······.”
“타란 원로 마법사님께 보여드리고 싶은 마법이 있습니다.”
타란 운트. 크루드 마탑에서 흑마법을 익힌 유일한 원로 마법사. 제라드는 지금 그의 공방을 찾아왔다.
타란은 자신을 찾아온 제라드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내 공방의 문을 열어주었다.
그의 공방은 복도처럼 빛이 한 점 존재하지 않았다.
“내게 마법을 보여주고 싶다고 했나. 어떤 마법이지?”
“지금 보여드리겠습니다.”
제라드는 마나를 개방하였다.
케이틀란의 격려가 제라드에게 큰 힘이 되었음은 분명하였다. 지금 이 순간, 그는 어둠의 마법을 사용하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다.
쓰스스.
꿈틀.
타란의 눈매가 무섭게 일그러졌다.
“타락하였는가······?”
타란의 온몸에서 마나가 줄기줄기 솟구치기 시작했다. 그는 흑마법을 익힌 흑마법사였지만, 동시에 흑마법을 누구보다도 증오하는 마법사였다.
그러나 제라드는 당황하지도 동요하지도 않았다.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알겠습니다만, 이건 흑마법이 아닙니다.”
“헛소리!”
“제가 지금 하는 소리가 헛소리인지 아닌지는 원로 마법사님이 가장 잘 아실 겁니다.”
제라드는 그렇게 말하더니 성큼성큼 그를 향해 다가갔다. 타란은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났지만, 제라드는 멈추지 않았다.
“이 마법에 흑마법이라고 정의할 요소가 있는지 느껴보십시오. 그리고 이게 흑마법이라면 저를 지금 당장 죽여도 좋습니다.”
“······.”
타란이 동요했다. 이 마법은 누가 봐도 명백한 흑마법이었다. 그런데 제라드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저 눈······. 제라드의 눈은 흑마법을 익혔다고 하기엔 너무 맑다.’
흑마법은 생명을 불태우는 마법. 자신의 것이든 타인의 것이든 간에 생명을 불태우는 이상, 영혼은 메말라 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지금 제라드의 눈빛은 그렇지가 않았다. 처음 봤을 때와 똑같이 투명하고 맑았다.
“좋다, 네가 그토록 자신한다면 확인해보겠다.”
타란은 손을 뻗어서 제라드의 가슴 한가운데에 손을 얹었다. 그는 흑마법사다. 그렇기에 흑마법이 발동될 때 어떤 반응이 일어나는지 알고 있었다.
마나와는 전혀 다른 에너지. 생명력의 맥동을, 그는 누구보다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타란이 눈을 부릅떴다.
느껴지지 않는다! 흑마법을 사용할 때의 그 감각이 전혀 느껴지질 않았다.
“이, 이게 대체······.”
타란이 경악하는 사이, 제라드가 다시 말을 이었다.
“원로 마법사님께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원로 회의에서 이 8번째 속성 마법의 증인이 되어주십시오. 제가 연구한 이 마법을 다른 분들의 앞에서 발표하겠습니다.”
< 승급 시험1 > 끝
ⓒ 양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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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승급 시험2 >
5
넓은 회의실에는 그렌자일과 케이틀란이 먼저 와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타란.
그런데 그 뒤로 한 사람이 더 따라 들어오고 있었다.
“음? 제라드, 이번에 자네는 부른 적이 없는데, 왜 이곳에 참석하였는가?”
그렌자일의 물음에 케이틀란도 의아한 표정이었다.
이전에는 제라드가 모든 일의 중심에 있었으므로, 회의에 특별히 참석했다지만, 이번에는 누구도 그를 부르지 않았다.
“제가 그를 데리고 왔습니다.”
“타란, 자네가?”
그렌자일이 의아한 얼굴로 되묻는 가운데, 카서스와 다른 크라운급 마법사들이 한둘씩 들어왔다. 그러면서 금세 회의실의 좌석이 다 찼다.
좌중의 시선은 타란에게 꽂혔다.
원로 회의를 요청한 것은 바로 그였기 때문이다.
그렌자일은 의아한 얼굴로 타란에게 물었다.
“타란, 무슨 일로 이 자리를 만들었으며 제라드는 왜 데리고 왔는지 먼저 설명해주겠나?”
“여러분께 건의하고 싶은 게 있기 때문입니다.”
“그게 무엇인가?”
“마탑의 규율에 따르자면 1급 마법사 중에서 마탑의 위명을 드높이는 공적을 세우고, 마법적 진리나 업적을 세운 이는 원로 회의의 표결을 통하여 승급 시험을 치를 수 있습니다.”
“으응?”
이 생각지도 못한 발언에 그렌자일과 케이틀란이 깜짝 놀랐다. 왜냐하면, 지금 그가 말하는 승급시험이 누구를 이야기하는 것인지는 너무나도 명확했기 때문이다.
“저 타란 운트는 크루드 마탑의 원로 마법사로서 원로 회의에 제라드 란스터의 승급 시험 안건을 두고 표결을 제시하는 바입니다.”
침묵이 흘렀다.
“허허. 정말로 느닷없는 일이로군.”
케이틀란도 그렌자일의 말에 동의하면서 힐끗 제라드의 모습을 보았다. 그런데 그 표정에 동요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제라드가 이 일을 꾸몄군. 타란을 자신의 증인으로 삼은 거야. 흑마법에 관해서는 이 자리에서 그보다 더 잘 아는 이가 없을 테니까.’
즉, 승급 시험이라는 건 구실인 셈이다.
제라드의 공적은 이미 충분하였다.
남은 것은 마법적 진리나 업적을 증명하는 일뿐이었다.
제라드는 빼어난 마법사였지만, 아직 어떤 마법적 가치를 보여준 적은 없었다.
‘원로 회의에서 그 마법의 존재를 증명할 생각을 하다니. 참으로 대담한 선택을 하였구나.’
실로 제라드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그때였다.
“이 안건을 표결에 부치기 전에 자격을 갖추었는지 합당한 증명이 필요하겠는데요.”
벨자의 말대로였다.
제라드는 자신을 증명해야만 했다.
쏟아지는 이목 속에서 제라드는 기다렸다는 듯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바로 얼마 전에 새로운 마법을 정의할 수 있었습니다.”
“새로운 마법을 정의하였다······.”
그렌자일이 그 말을 곱씹었다. 그 말에 실린 무게가 보통 무거운 게 아님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럼, 이 자리에서 그 마법을 보여줄 수 있겠나?”
“알겠습니다.”
제라드는 호흡을 가다듬더니, 오른손을 앞으로 뻗었다.
손바닥을 땅으로 향하게 하는 기묘한 발동식이었다. 머잖아 제라드의 몸에서 중후한 마나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그리고.
스스스.
바닥에 무겁게 내려앉는 마나가 어떤 뚜렷한 형상을 이루었다.
그 순간, 좌중의 얼굴이 무섭게 찌푸려졌다.
제라드의 발아래에 깔리는 어둠.
그것의 정체가 흑마법이라는 것은 더 두고 볼 것도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가장 실망한 표정을 짓는 건 바로 벨자였다.
그녀는 실망스럽다 못해 짜증이 난다는 얼굴이었다.
“겨우 흑마법 따위를 두고 새로운 마법의 정의라느니, 그런 소리를 한 건가? 한심해서 더 들어주기가 어렵군. 이 자리에 그게 흑마법이 아니라는 걸 모르는 이가 있을 것 같아? 그게 아니면 새로운 흑마법을 연구했다고 밝힐 참이야?”
“벨자 원로님의 말대로일세! 제라드, 자네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흑마법을 익혔는가? 타란 원로님도 뭐라고 말 좀 해주십시오. 타란 원로님은 이 자리에서 흑마법에 관해서는 누구보다 잘 아시는 분이 아닙니까.”
좌중의 서늘한 시선은 이제 제라드에게서 타란으로 옮겨갔다. 그의 얼굴에는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지금 여러분들께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겠습니다만, 이건 흑마법이 아닙니다. 그의 마법에는 흑마법이라고 정의할 요소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흑마법이라고 정의할 요소가 없다니. 저 마법이 생명력을 소모하지 않는다는 말입니까?”
“예, 소모하지 않습니다.”
웅성웅성.
좌중이 술렁였다.
마법은 총 7가지의 속성을 통해 발현된다.
불, 물, 얼음, 벼락, 땅, 빛, 바람.
그 외에 정신계통의 마법이 존재하지만, 그것은 형태가 갖춰지지 않는 조작 마법이기에 형태가 없었다.
그런데 지금 제라드가 사용한 마법은 그것 중 어느 것에도 속하지 않았다. 흑마법이 아니라면 대체 무엇으로 그의 마법을 설명한단 말인가.
“좋아요, 타란 원로님이 그렇게 증언하고 나섰으니, 제가 직접 확인해보겠습니다.”
벨자가 큰소리치며 벌떡 일어나 제라드의 어깨를 잡았다. 마법의 공정을 읽으려는 것이다.
그런데 제라드의 어깨에 손을 얹은 벨자의 얼굴이 이상하게 바뀌었다.
‘느껴지지 않는다.’
“벨자 원로, 대답해주시지요.”
타란이 벨자에게 답을 촉구했다.
벨자는 아연실색한 얼굴을 했다.
“믿기 어렵지만······ 흑마법이 아닙니다. 그의 내부에서는 어떤 흑마법의 증상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벨자의 말에 모두가 말을 잇지 못했다.
좌중의 시선은 제라드의 바닥에 깔린 어둠에 꽂혀 있었다. 흑마법이 아니라고 한다면 대체 저 어둠은 무엇으로 설명한단 말인가.
그때, 제라드가 다물고 있던 입을 열었다.
“이건 흑마법이 아니라, 그 기원이라고 볼 수 있는 제8의 속성 마법입니다.”
6
회의는 길게 이어졌다.
제라드가 보여준 마법.
그것이 흑마법인가, 그렇지 않으면 정말로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제8의 마법인가를 두고, 수많은 이야기가 오갔다.
그렇게 길게 이어지던 회의의 흐름을 한 번에 바꾼 것은 바로 제라드가 케이틀란에게 보여주었던 마법 술식 양피지가 나온 이후였다.
“하! 이 정도라면 뭐 더 얘기할 필요가 없겠네요.”
벨자가 맥이 빠질 정도로 통쾌하게 웃었다.
다른 이들도 그에 동의하였다.
“논의는 이미 충분한 것 같은데. 안 그런가?”
그렌자일이 좌중을 훑었다.
모두 이견이 없는 모습.
“그럼 투표를 시작하지.”
투표는 바로 진행되었고, 결과 역시 바로 나왔다.
만장일치의 가결이었다.
대외적 공적과 마법적 업적까지.
제라드는 어렸지만, 그 모든 자격을 갖추었다.
“그럼 이제 남은 건 승급 시험뿐이로군. 승급 시험은 딱 두 가지로 치러질 걸세. 일단 하나는 벼락의 제단에서 자신을 걸고 맹세하는 것. 둘째는 마탑에 돌아오면 그때 준비가 끝나있을 걸세. 이의 있는가?”
“없습니다.”
제라드는 담담하게 대답하였다.
만약 이번 시험을 통과하게 된다면 제라드는 역대 최연소 크라운급 마법사가 되는 셈이었다.
그런데도 제라드는 달리 기뻐하는 기색이 없었다. 공식적으로 제라드가 얼마나 대단한 마법사인지, 인정을 받는 자리였지만, 정작 당사자인 제라드에겐 사실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제라드가 타란에게 이 자리를 부탁한 건 크라운급 마법사가 되고 싶어서가 아니라, 제8의 마법을 세상에 알리기 위함이었다.
‘이건 고작 한 걸음일 뿐이다. 지금은 크루드 마탑 하나뿐이지만, 종래에는 나머지 6개의 마탑에도 이 사실을 다 알려야만 한다.’
그때, 그렌자일이 말을 이어왔다.
“제라드, 벼락의 제단이 어디에 있는지는 알고 있는가?”
“알라모윈의 정상에 있다고 들었습니다.”
“음, 잘 알고 있군. 벼락의 제단이야말로 크루드 마탑의 기원일세. 최초의 마법사께서 남긴 비의를 잇는 7인의 마법사 중 한 분이신 풀고르 님의 기상은 그곳에 남아 있지. 그리고 지금부터 하는 말은 그저 내 짐작이네만······, 어쩌면 그곳에서 자네가 발견한 그 제8의 속성에 관한 실마리를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군.”
그렌자일의 말에 제라드의 눈매가 바뀌었다.
‘7인의 마법사 벼락의 풀고르······.’
제라드는 이른 아침, 출발 준비를 모두 끝마쳤다.
“알라모윈에서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으면 좋겠구나.”
“예, 그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아마 쉽지는 않을 것이다. 풀고르 님의 기록은 거의 남은 게 없다. 탑주님께서 어째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는 모르겠다만, 나 역시 그곳에 다녀왔기에 알고 있다. 그곳에 남은 건 오직 허무뿐이야.”
“저도 많은 기대를 하는 건 아닙니다. 그저 아주 작은 실마리라도 얻을 수 있으면 그걸로 충분합니다. 작은 퍼즐을 하나씩 모아가다 보면 언젠가 큰 그림을 볼 수 있게 되는 거니까요.”
“퍼즐을 모아간다······. 그래, 그 말대로다. 1차 시험은 의례에 가까우니, 마탑의 기원을 보고 온다고 생각하거라. 하지만 2차 시험은 그리 만만하지 않을 게다. 준비를 하고 오너라.”
“네, 알겠습니다.”
제라드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 문을 향해 나아갔다.
그그그긍.
요란스럽게 열리는 문을 뒤로하고서 밖으로 나온 제라드는 말 위에 올랐다.
푸르륵!
흑마가 반갑다며 투레질을 하는 가운데, 제라드는 지도를 펼쳤다. 알라모윈은 북부의 황야 너머에 있었다.
“갈 길이 멀겠어. 이럇!”
제라드는 고삐를 튕기며 북쪽을 향해 나아갔다.
경쾌하게 나아가는 제자의 모습을 지켜보던 케이틀란.
그때, 그의 눈에 이상한 게 들어왔다.
“으응?”
케이틀란이 눈살을 찌푸렸다.
제라드가 달려나가고서 얼마 지나지 않아서, 한 사람이 그 뒤를 따라서 뛰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런데 그 뒷모습이 아주 눈에 익었다.
“벨자 노러스?”
크루드 마탑 최연소 원로 마법사.
후드와 로브로 자신의 모습을 감추고 있었지만, 그 모습은 좀처럼 감추기가 어려웠다.
케이틀란은 눈살을 찌푸리며 다급히 벨자의 공방으로 향하였다. 하지만 그곳에 그녀는 없었다.
“후. 역시 벨자였나. 대체 제라드를 따라가서 뭘 어쩌겠다는 건지······.”
7
제라드는 열심히 달려나갔다.
푸른 초원을 지나고, 마침내 황야에 다다랐을 때, 제라드는 로브를 여미고 후드로 얼굴을 최대한 가렸다.
불어오는 북풍에 흩날리는 먼지바람이 거셌다.
해가 질 무렵이 다 되었을 땐, 황야가 끝나고 거친 암석이 사방에 즐비한 지대가 나타났다.
‘여기서 좀 쉬고 가야겠어.’
고삐를 당기자, 이내 멈춰서는 흑마.
제라드는 주변에 간단한 마법진을 설치하면서 야영 준비를 하였다. 미리 가져온 건초 더미와 물을 말에 먹게 하고 그 자신은 말린 육포를 씹었다.
위이이잉.
암석과 암석 사이로 부는 바람이 요란한 소리를 냈다.
‘이 속도라면 앞으로 닷새는 더 꼬박 가야겠군.’
이 앞에는 아무 마을도 없기에 여정이 많이 피곤하리라는 건 불 보듯 뻔하였다.
“뭐,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제라드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커다란 돌에 등을 기댔다. 어차피 생각을 좀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었다.
“베리타스, 비문의 종류를 열람하고 싶은데.”
제라드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베리타스가 촤락 펼쳐지더니, 비문의 목차가 나타났다.
-1종 비문:엘레멘탈 마스터
-1종 비문:8인의 후계자
-1종 비문:녹스
-2종 비문:???
그동안 흑마법사와의 접전 속에서 제라드가 손에 넣게 된 총 네 가지의 열쇠. 그중에서 1종 비문은 총 3개였다.
‘2종 비문은 최초의 마법사 이전 시대의 이야기다. 그 끝은 지금 당장 중요하지 않다. 제8의 마법이 정립된 건 최초의 마법사 이후야.’
물론, 그 점에 관해서도 약간의 의문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엘레멘탈 마스터의 기록에서는 8번째 속성에 관한 정립이 없었다.
‘엘레멘탈 마스터의 기록은 지금껏 수도 없이 확인해왔다. 그러니 그 점에 관해서 내가 착각할 일은 없어. 혹시 8번째 속성은 그 이후에 정립된 건가? 그래서 녹스도 가장 마지막 제자일 수밖에 없었던 거고······.’
제라드는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리다가 갑자기 탄성을 터뜨렸다. 베리타스가 보여주는 목차를 살피다가 조금 전에 어떤 사실 하나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순서······. 순서가 있구나!”
그랬다.
지금 비문의 목차에는 순서가 존재하였다. 그것은 비문을 개방했던 순서와는 무관했다.
왜냐하면, 타브라스에게서 손에 넣은 비문은 제라드가 가장 늦게 얻은 비문일 텐데, 목차의 두 번째에 있었던 것이다.
“그렇단 얘기는······ <8인의 후계자>의 기록은 <엘레멘탈 마스터>의 기록 다음에 벌어진 사건이고, <녹스>의 기록보다는 이전 사건인 셈이야.”
드디어 사건 순서가 명료해진 셈이었다.
제라드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그렇다면 <8인의 후계자> 이후에 어떤 사건이 존재하였고, 그 결과, <녹스>의 기록에서 보여준 일이 발생한 게 틀림없었다.
“중간. 그 중간을 잇는 퍼즐이 비어있다. 거기다가 녹스의 기록 이후에는 또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제라드는 한참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겨 있었다.
여러 생각이 머리를 스쳤지만, 결국 결론은 하나였다.
“비문을 다시 확인해볼 수밖에.”
바로 그때였다.
히히힝!
바로 조금 전까지 얌전하던 말이 잔뜩 흥분한 듯 이리저리 움직여 다녔다.
제라드의 눈매도 날카롭게 바뀌었다.
주변에 설치해둔 마법진의 영역 안팎에서 무엇인가가 들어왔다가 나갔다가를 반복하는 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별안간 저 멀리서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코를 찌르는 노린내가 나는 게 느껴졌다.
제라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야음을 타고 불청객이 찾아온 모양이었다.
“몬스터인가?”
인간의 영역에서 멀리 떨어진 곳.
지금도 그런 곳에는 몬스터의 무리가 근근이 명맥을 이어온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이곳 황야는 인간이 살지 않는 땅. 당연히 몬스터가 존재해도 이상하지는 않았다.
크르륵.
낮은 으르렁거림이 울려 퍼짐과 동시에 제라드의 몸에서 불꽃이 피어올랐다.
“베리타스, 몬스터의 고기 먹을 수 있는 거지?”
그 물음이 끝나기가 무섭게 베리타스는 오랜만에 무수히 많은 책들을 쏟아냈다. 어두컴컴한 암석지대 일대를 가득 메우는 서적들.
[검색 결과, 총 2,321건이 나옴. 검색 조건을 조금 더 명확하게 할 시, 더 정확한 검색 결과 도출 가능.]
“뭐, 간단히 말해서 먹을 수는 있다는 거네.”
제라드의 입가에 미소가 드리웠다.
그렇잖아도 육포만으로는 좀 부족한 참이었다.
< 승급 시험2 > 끝
ⓒ 양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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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승급 시험3 >
8
제라드를 공격해온 것은 놀이었다.
놀이란 몬스터는 사람보다 조금 더 큰 개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사전에서 읽었던 그대로의 모습. 특이점이랄 건 사람처럼 두 발로 걷는다는 것과 무기류를 사용한다는 점이었다.
무기라고 해봐야 언제 쓰던 무기인지 녹이 다 슬었거나 그게 아니면 나무 막대를 날카롭게 갈아서 만든 것이었지만 말이다.
놀 다섯 마리는 제라드에게 공격을 시작하자마자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바로 알았다. 제라드의 몸에 불꽃이 치솟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화염 내성이 좀 있었던 놀은 바로 물러나지 않았으니, 불꽃에 몸이 타들어가는 와중에도 용맹하게 무기를 휘둘러왔다.
물론, 그 일격이 전부였지만.
“캥!”
놀들은 이내 바닥을 나뒹굴었다.
폐부로 스미는 불꽃에 몸을 바르르 떠는 녀석들은 이내 견디지 못하고 축 늘어졌다.
제라드는 바로 불꽃을 거두었다.
“놀을 잘 익혀 먹는 방법 좀 찾아봐.”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베리타스가 검색 결과를 쏟아냈다. 자그마치 천 권이 넘던 책들 대부분이 사라지고 이제 몇십 권으로 압축된 책들.
그러나 제라드가 찾던 아주 간단한 기초 요리에 관한 책은 그중 몇 가지 되지 않았다. 지금 그에게 필요한 건 아주 기초적인 요리방법이었다.
제라드는 먼저 그을린 가죽을 벗겨 내기 시작하였다. 바람의 마법을 사용하면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가죽과 살을 함께 벗겨 냈지만, 손에 익기 시작하면서는 막힘이 없었다.
마치, 수십 년간 그 일만 반복해온 사람 같은 솜씨였다.
그렇게 가죽을 잘 벗겨내고 내장과 고기 부분을 잘 구분한 뒤에 불에 익히기 시작하였다.
모두 책에 나온 내용대로 진행하는 제라드.
향신료도 없었기에 뭔가 더 할 방법도 없었으므로, 잡내를 제거하는 건 어려웠다.
“생각보다 나쁘진 않네.”
제라드는 잘 익은 고기를 씹어먹으면서 그렇게 중얼거렸다. 노린내가 좀 심한 거 빼면 식감도 생각보다 부드럽고 괜찮았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또다시 마법진에 뭔가가 들어온 느낌이 포착되었다.
‘이건 몬스터가 아니야. 자신을 숨길 생각이 없다.’
제라드가 기척이 느껴진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머잖아 어둠 저편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나타났으니.
“와! 놀을 먹는 거야? 대단한데.”
“······벨자 원로 마법사님?”
“안녕!”
그녀는 장난꾸러기 아이처럼 씩 웃으며 말에서 내리더니, 제라드의 옆에 다가와 앉더니, 소금을 꺼내 들었다.
“짠! 이래서 문명권에서 벗어날 때는 향신료가 있어야 한다니까. 잡내 좀 잡고, 향신료 좀 뿌리자. 그거 그대로 먹으면 노린내가 너무 심해서 구역질 날 정도잖아.”
“아, 잘 먹었다!”
벨자가 만족했다는 얼굴로 기분 좋게 웃었다.
“헌데, 원로님께서 여기까진 무슨 일이십니까?”
“궁금해서 따라왔지.”
“궁금하다니. 그게 무슨 말씀인가요?”
“말 그대로야. 너한테 흥미가 생겼거든. 크루드 마탑의 여섯 번째로 문을 연 자. 케이틀란 원로의 하나밖에 없는 제자. 온갖 마법을 두루 익힐 정도로 빼어난 재능을 보유하고 있는 마법사 제라드 란스터. 네가 궁금해졌어.”
제가 궁금하다는 이유 때문에 여기까지 절 따라왔다는 건가요? 저는 지금 승급 시험을 치르는 중입니다.“
“알고 있어. 근데 그게 무슨 상관이야? 난 그냥 옆에서 지켜보기만 할 거야. 네가 알라모윈에 도착하고 돌아오기까지 무슨 일이 일어나도 난 아무것도 하지 않을 건데?”
“······.”
벨자는 히히 웃으며 바닥에 벌러덩 누웠다.
“신경 쓰지 말라고. 난 그냥 구경꾼이야. 가는 동안 그냥 말동무가 하나 생겼다고 생각해.”
제라드는 직감했다. 벨자가 블레이즈와 비슷한 부류의 사람이라는 걸 말이다. 이 사람은 어디로 튈지 모른다.
“하하하. 조금 전에 나 괴짜라고 생각했지! 표정만 봐도 다 알아. 하지만 부정하지 않겠어. 괴짜가 뭐 어때서.”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키득거렸다.
‘알라모윈까지 조용히 생각할 시간을 갖는 건 어렵겠는데······.’
제라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9
벨자는 정말로 궁금한 게 많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아주 천진난만한 사람이었다.
“와! 그럼 산도르 마탑에 있는 홍염의 마법사에게서 마법을 전수받은 거구나! 대단한데? 그런 게 가능한 건가?”
“세상에! 흑마법을 상대하다가 제8의 속성을 알게 됐다고? 너 정말 천재구나.”
벨자는 궁금한 게 생기면 바로 그 자리에서 물어봤다.
대답에 대한 리액션도 엄청나게 풍부한 사람이었다.
‘이 사람 대체 몇 살이지?’
제라드도 처음으로 벨자에게 궁금한 게 생겼다.
그녀는 딱 보면 이십 대 중후반으로 보였는데, 행동은 그보다 훨씬 더 어린 것 같았다. 그런 그녀가 7년 전에 이미 원로 마법사였다고 하니, 대체 몇 살 때 원로 마법사가 된 건지 짐작이 안 될 지경이었다.
‘원로 마법사는 크라운급 마법사가 최소 충족 요건인데. 그럼 크라운급에 오르게 된 건 또 몇 살일지. 내가 정말 최연소가 맞긴 한 걸까?’
“원로님은 나이가 혹시 어떻게 되십니까?”
“서른하나!”
“엄청나게 젊으시네요.”
“딱 봐도 젊어 보이잖아. 아니면 혹시 나 늙어 보여?”
벨자가 제발 아니라고 말해줘, 라고 말하는 얼굴로 제라드를 바라보았다. 제라드는 그 우스꽝스러운 얼굴에 저도 모르게 킥 웃었다. 그러자 벨자도 배시시 웃었다.
“처음으로 웃었네. 히히. 너 말이야. 너무 무겁다고. 나이도 어린 녀석이 말이야. 좀 웃고 살고 그래. 이건 마법사가 아니라, 인생 선배로서 하는 말이야. 알았지?”
“네, 고맙습니다.”
처음에는 벨자가 엄청나게 불편했던 제라드였다.
그러나 이틀이 지나고, 계속 함께하면서 점점 그런 불편함은 사라졌다. 벨자는 거리낌 없이 사람의 마음에 들어올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 덕에 여정은 줄곧 떠들썩하였다.
벨자와 함께 움직이면서 여정의 속도가 줄어든 건 아니었다. 그녀는 이동 속도에 영향을 끼치는 행동은 삼갔으니, 알라모윈까지 제라드가 예상했던 이동시간은 거의 정확히 지켜졌다.
머잖아 계속 펼쳐졌던 삭막한 풍경의 황야가 서서히 끝을 보이기 시작하였고, 그 너머로 검은 대지가 나타났다.
그곳은 말 그대로, 바닥이 시꺼멓게 물든 땅이었다.
그 땅의 안쪽으로 나아가자, 이상하게도 공기가 정체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 땅에서 유난히 마나가 느리게 움직이는걸. 거기다가 마나가 다른 곳에 비해 훨씬 희소해. 어째서지?’
제라드가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였다.
“알라모윈에 관한 이야기는 알고 있어?”
“네, 관련된 이야기는 모두 읽어보았습니다. 아주 먼 옛날에 이곳은 대도시였다고 하더군요.”
“맞아. 하지만 어떤 순간을 기점으로 대도시는 한순간에 다 사라졌지. 청색 마탑의 기원이 되는 풀고르 마탑도 말이야.”
벨자는 며칠간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던 진지한 얼굴로 크루드 마탑의 기원에 관해서 말해왔다.
엘레멘탈 마스터의 마법을 이은 7인의 마법사. 그중 한 사람이었던 풀고르는 청색의 의지와 함께 벼락의 마법에 정통하였다. 그리고 최초의 마법사가 남긴 유산을 후세에 전달하기 위해서 지식의 탑을 세웠으니, 그것이 곧 최초의 시대 때 창립되었던 일곱 개의 마탑 중 하나였다.
풀고르 마탑.
마탑을 중심으로 도시가 생겨났고, 도시는 크게 번성했다.
영원할 것 같았던 마법의 도시, 알라모윈의 탄생이었다.
그러나 그 전성기는 어느 기점을 중심으로 끊어졌다.
그 이후의 기록은 없었다.
그저 풀고르는 세상에서 사라졌다는 사실과 그의 유지를 잇는 백 명의 제자 중에서 남은 것은 오직 크루드뿐이라는 것이다.
즉, 벼락의 마법은 오직 크루드 한 사람의 힘으로 지금까지 이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곳은 이 세계에 존재하는 7가지······ 아니, 이젠 8가지겠구나. 그중 한 가지 힘의 기원의 장소라고 할 수 있겠지.”
“······.”
경건하기까지 한 벨자의 목소리.
그녀가 괴짜라는 것은 틀림없었으나, 그녀도 마법사였다. 한때 영원에 가장 가까웠으나, 지금은 아무것도 남지 않은 이 폐허에선 벨자도 진지했다.
두 사람의 말은 알라모윈의 중심부를 향해 나아갔다.
아주 희미하게 남은 건물들의 흔적들을 지나, 중심에 다다르자 그곳에 마탑의 그것으로 보이는 흔적이 나타났다.
“이곳이 벼락의 제단······.”
“그래, 이 땅에 남은 유일한 마법의 흔적이야.”
제라드는 제단에 다가갔다.
중심부에 다다르자, 주변에 흐르는 모든 마나가 완전히 정지해버린 것 같았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고, 아무것도 흐르지 않는다.
시간이 동결된 세계.
‘이곳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제라드는 검은 대지 위에서 일어난 일을 짐작해보았지만, 이곳에서 일어난 일을 알기에는 당장 주어진 퍼즐이 아예 존재하질 않았다.
바로 그때, 그렌자일의 말이 떠올랐다.
실마리.
그렌자일은 그렇게 말했다.
‘탑주님도 제8의 속성이 최초의 마법사가 있었던 그 시대와 어떤 식으로든 연결되어있다고 생각하신 거겠지.’
제라드가 마탑의 흔적, 그 중심에 서서 손을 뻗었다.
“그 마법 사용할 셈이구나?”
“예, 확인해보고자 합니다. 제8의 마법은 필연적으로 최초의 마법사님과 연결되어 있어요. 그게 아니라고 해도 그 시대의 어떤 것이든 분명히 말입니다.”
“좋아, 네 뜻대로 해. 나는 구경꾼이야. 네가 이곳에서 무얼 한다고 해도 난 관여할 생각이 없어.”
벨자는 흥미진진하다는 얼굴이었다. 그리고 제라드는 그런 그녀의 표정을 보고 알았다.
‘벨자 원로님도 탑주님의 말씀이 궁금했던 거다. 이 검은 대지 위에서 제8의 속성 마법이 어떤 반응을 일으키는지 말이야.’
물론, 그 일은 이제 아무래도 좋았다.
제라드의 마법은 순식간에 완성되었다.
손바닥 아래로 흘러나온 마나가 바닥에 깔리기 시작하여 온 바닥이 어둠에 물들었다.
바닥에 짙은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하였을 때, 저 멀리 핏빛을 머금은 석양도 제 모습을 감추었다. 그렇게 온 세상이 어둠에 물들었을 때, 하늘과 대지의 경계가 모호해졌다.
모든 것이 침묵하는 시간.
제라드는 기감을 곤두세웠다.
그러나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변화는 없었다.
제라드의 미간에 골이 파였다.
‘탑주님께서 잘못 짚으셨단 말인가?’
팔짱을 끼고 상황을 지켜보던 벨자도 실망스러운 기색이 역력한 얼굴이었다.
“진리라는 게 역시 그렇게 쉽게 모습을 드러낼 리가 없나.”
벨자가 어깨를 으쓱했다.
이미 상당한 시간이 흘렀다.
세상에 가장 마나의 기운이 풍부해지는 딱 두 번의 시간 중 두 번째 시간이 끝나가는 지금. 이곳에서 더 시간을 보내는 게 별 의미가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별안간 제라드의 표정이 심상치 않게 변했다.
“제라드, 뭘 보는 거야?”
벨자가 그렇게 물었다.
그러나 제라드는 대답하지 않았다.
지금 그의 신경은 온통 한 곳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베리타스.
지금 제라드의 온 신경은 베리타스에 꽂혀 있었다.
10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니, 그런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바로 조금 전 베리타스가 반응했다.
은은한 빛을 토하는 것과 동시에 책 중앙의 눈동자가 바쁘게 움직이며 무엇인가를 찾기 시작했다.
‘베리타스, 뭘 찾은 거야. 성유물의 조각이 여기 어딘가에 있는 거야?’
그러나 베리타스는 제라드의 물음에도 명확한 대답을 하지 않고 이곳저곳으로 계속 눈을 움직여댔다.
그러다가 별안간 우뚝 멈췄다.
꿀꺽.
제라드가 가만히 베리타스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베리타스의 눈동자가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그 시선이 바닥 아래로 꽂혔을 때였다.
어둠에 잠긴 하늘에서 별안간 암운이 모여들었다.
고오오오.
정체되어 있던 검은 대지의 마나가 엄청난 속도로 하늘을 향해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꾸르릉.
하늘에서 벼락이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하는 가운데, 베리타스는 더 바쁘게 움직이며 땅을 빙글빙글 맴돌았다.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지?”
제라드가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알고 그렇게 중얼거렸을 때였다.
키이이이잉.
별안간 균형감각이 무너지고, 하늘과 땅이 뒤집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모든 감각이 뒤틀리고 있었다.
“큭!”
제라드는 이를 악물고 눈을 부릅떴다.
지금 이 일대에 그가 미처 파악하지 못한 어떤 정신계 마법이 작용하고 있는 거라면 정신을 집중하는 것으로 어긋난 걸 모두 바로 잡는 게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뭐, 뭐지? 정신계통이 아니야. 그것과는 전혀 무관하다.’
제라드는 곧 지금 자신이 느끼는 이 감각이 조작계 마법이 아님을 알았다.
이건 현상이었다. 8가지의 속성과는 또 전혀 다른 어떤 현상의 법칙이 눈앞에 발생하고 있었다.
“이, 이게 대체······.”
쩌어어어억.
별안간 멀쩡했던 바닥이 크게 쪼개지면서 양쪽으로 나뉘었다. 이 검은 대지에 전체가 커다란 입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땅의 마법? 아니다. 이건 그것과는 전혀 달라. 마치······ 스펠 브레이커와 같은 그런 이질적인······.’
제라드가 지금 이 현상을 분석하기 시작했을 때였다.
쿠웅.
“큭!”
제라드가 발에 힘을 줬다. 저 심연의 아가리가 별안간 제라드를 끌어당기기 시작한 것이다. 그의 이마에 핏줄이 불거졌다. 버티고 있었지만, 그 힘이 점차 강해지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빨려 들어간다!’
제라드는 그렇게 판단하고서 즉시 섀도우 마법을 사용했다.
온몸의 운동성을 일순간 폭발시키는 마법!
그러나 섀도우 마법으로도 이 장력에서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몸을 튕기며 빠져나가려고 하자 빨아들이는 힘은 더욱 거세졌다.
고오오오오!
‘섀도우로는 빠져나갈 수 없어. 바람의 정령이여!’
제라드는 바람의 정령을 불렀다.
바람의 정령으로 온몸을 휘감아서 단숨에 이곳에서 박차고 나갈 참이었다. 하지만.
‘어째서?’
바람의 정령들이 다가오다가 이내 바르르 떨더니 돌아가 버렸다. 몇 번이고 마나를 방출하여 그들을 호출해도 똑같았다. 땅의 정령, 불의 정령, 물의 정령 등 다 똑같았다.
그 어떤 정령도 지금 제라드의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장력은 몹시 강력하게 변해서 더는 거스르는 게 불가능해졌다.
“큭!”
제라드의 발 한쪽이 들리는 순간, 몸이 붕 떠올라서 그대로 심연의 아가리로 안쪽으로 빨려 들어갔다.
“아아아악!”
어둠으로 떨어지는 동안, 벨자의 비명이 들려왔다. 그녀 역시 이 주변에서 휘말린 모양이었다.
지상에서 벗어나, 하늘이 멀어져갔다.
그런 가운데 별안간 하늘이 크게 울었으니!
[녹스, 녹스으으으으······!]
콰르르르릉!
벼락 한 줄기가 닫혀가는 심연의 아가리를 사이를 꿰뚫고, 들어와 제라드에게 쏟아졌다.
< 승급 시험3 > 끝
ⓒ 양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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