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잃어버린 기록1 >
1
모든 것이 명백해진 순간이었다.
가르시아와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던 존재의 얼굴에 씌워져 있던 가면은 모두 벗겨졌고, 배후는 모습을 드러냈다.
‘단단한 요새는 외부에서 두드리는 것보다 안에서 무너뜨리는 게 더 쉬운 법이지.’
제라드는 그 이치를 알았다.
그래서 투항하였고 바로 지금 이 상황을 꾸몄다.
모든 사람을 한 자리에 끌어모으고, 그 자리에서 마법진을 파괴해서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그들이 모시는 아덴바움 백작이 거짓된 존재임을 밝히는 것.
그리고 이 계획을 시행하던 도중에 생각지도 못한 대어를 낚게 되었으니. 그게 바로 지금 제라드의 눈앞에 있는 타브라스였다.
‘그저 단순한 배후가 아니라, 성유물까지 보유하고 있다는 건가.’
제라드가 저벅저벅 앞으로 걸어나갔다.
“혹시나 해서 말해두는데, 발뺌할 생각 같은 건 하지 않는 게 좋아.”
제라드는 그렇게 말하더니, 땅을 쿵 쳤다.
파지지지직!
스파크가 맹렬하게 튀면서 푸른색 선이 바닥을 내달리며 마법진의 형상을 생생하게 드러냈다.
제라드가 마법진에 접촉하여 마나를 쏟아낸 까닭에 과부하되어 제 기능을 상실하였지만, 그 연결망은 타브라스에게 고스란히 이어져 있었다.
지켜보던 마법사들이 경악했다.
“이, 이럴 수가······.”
마법의 역추적 흔적이 타브라스에게 닿았다는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단 하나였다. 바로 이 마법진을 타브라스가 설치했다는 얘기다.
“워, 원로 마법사님이······ 어째서 이런······.”
잠깐의 무거운 침묵이 이어지는 가운데.
타브라스의 눈빛이 별안간 변했다.
“······만반의 준비 해왔다고 생각했는데, 그 모든 것이 이렇게 한 번에 무너질 줄이야. 내가 방심했구나. 네놈이 바로 ‘그놈’인 줄도 모르고 말이야.”
쿵.
발로 땅을 쿵 내리찍는 타브라스.
그 순간, 발로 내리찍은 곳부터 균열이 발생하였다.
균열은 단숨에 제라드가 있는 곳까지 다다라 솟구쳤다.
콰앙!
그러나 제라드는 그 공격을 섀도우 마법으로 피하더니, 옆으로 빙글 돌아서 달리기 시작했다.
“안 놓친다.”
콰콰쾅!
타브라스는 전력으로 마법을 전개해왔다.
테라 마탑의 마법사들은 어찌할 줄 몰랐다. 그들로서는 지금 눈앞의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알 수가 없었다. 존경받는 원로 마법사 타브라스가 어째서 이런 일을 벌였는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는 사이, 요리조리 피하는 제라드에게 돌덩어리 파편이 날아들었다.
딱.
퍼퍽! 퍼퍼퍽!
제라드의 손끝에서 뇌전의 섬광이 솟구치며 날아드는 돌덩어리들을 부쉈지만, 그런 식으로는 끝이 없었다.
“엄청나다.”
놀라운 일이었다. 제라드의 마법 실력은 타브라스에 비해 전혀 밀리지 않았다. 섀도우 마법의 시전 속도도 그랬고, 틈틈이 날리는 뇌전구 요격은 포착하는 것조차도 어려울 지경이다.
그러나 문제는.
“상성이 너무 좋지 않아.”
마법사들은 모두 그렇게 생각했다.
지계 마법과 뇌전계 마법의 상성 우위는 지계 마법 쪽이 압도적으로 유리하다.
파직!
재차 날아드는 뇌전의 섬광이 거리를 단숨에 좁히며 타브라스의 몸에 날아들었다. 하지만 그러기가 무섭게 타브라스의 몸을 휘감은 돌덩어리가 섬광을 걷어 내버렸다.
‘놈과 나의 상성 우위는 명확하다. 다만, 마법의 연산 속도는 저쪽이 압도적이다.’
감지하는 것도 힘들 정도로 빠른 속도로 날아드는 뇌전의 섬광은 그 위력이 무시무시하였다. 맞으면 일반적인 타격 수준으로는 끝나지 않는다.
“이 정도의 뇌전계 마법이라면······ 사세르란의 벼락인가.”
타브라스가 그렇게 판단하는 가운데, 줄곧 일정 거리를 유지하면서 빙글빙글 돌던 제라드가 별안간 거리를 좁혀왔다.
원거리에서의 싸움이 불리하다고 판단, 근접에서 한 번에 싸움을 끝내려는 모양이었다.
‘좋다, 바라던 바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달려오는 제라드의 온몸에 불이 솟구치는 게 보였다.
화르륵!
“홍염까지······? 정말 대단한 놈이로군.”
케이틀란의 마법을 익혔을 뿐만 아니라, 블레이즈의 마법까지 익혔다는 얘기다. 각각 정상의 마법이라고 해도 좋은 마법을 말이다.
세상엔 이런 천재가 종종 태어나곤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긴 세월 속에서 다져진 실력은 단순한 천재성만으로는 한 번에 따라잡을 정도로 만만한 게 아니었다.
“흡!”
거리가 가까워졌을 때, 타브라스는 호흡을 깊이 들이마셨다.
쿠우웅!
그를 중심축으로 사방에 발생하는 균열!
그것은 곧 모든 것을 집어삼킬 것처럼 무시무시하였다.
구구구궁.
대지가 파도치듯 요동쳤고, 빠르게 달려오던 제라드의 몸이 휘청거리는 게 보였다.
‘좋아, 잡았다.’
타브라스는 그렇게 확신하며 양손을 앞으로 폈다가 깍지를 꼈다.
그 순간, 제라드의 바닥에서 요동치던 땅바닥이 바닥에서 솟구치는 상어의 입처럼 튀어나와서 단숨에 제라드의 온몸을 집어삼켰다.
콰직!
2
어스 샤크.
타브라스가 조금 전에 쓴 고유술식의 이름이었다.
어스퀘이크 마법에서 아주 약간의 틀을 바꾼 마법.
단순히 마법 술식만으도 놓고 보자면 이 마법의 가치는 그렇게 빼어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타브라스는 이 마법에 평생을 바쳐 연마해왔고, 그 노력은 보상받았다. 이 마법의 위력은 상상을 초월하였다.
“하늘 위에 하늘이 있음을 알아라!”
어스 샤크는 마침내 커다란 구체의 형태가 되었다.
타브라스는 왼손을 펴서 주먹을 꽉 쥔 채로, 오른손을 천천히 하늘 위로 들어 올렸다.
후두두둑!
바르르 떨리는 손끝에 돌의 파편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이윽고 그것은 거대한 돌의 창이 되었다.
이제 피할 곳은 없었다.
타브라스는 크게 손을 휘둘렀다.
돌의 창은 무시무시한 기세로 날아들어, 구체를 관통하였다.
꽝!
후두두둑.
돌의 파편과 흙먼지가 자욱하게 퍼지며 흩어져갔다.
끝났다.
타브라스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문제는 지금부터였다. 지금 이곳에 있는 마법사들이 전부 그의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일을 그르쳤다. 모두 죽이거나 이 자리에서 물러나거나. 남은 건 둘 중 하나다.’
타브라스가 이후의 일을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벌써 끝을 자신하다니, 오만하군.”
오싹.
타브라스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손을 크게 휘저었다.
콰르르!
바닥에 부서진 돌의 파편이 무섭게 솟구쳤다.
대지의 파도.
제라드가 아무리 빠르다고 해도 휩쓸릴 게 분명하였다.
그런데 바로 그 찰나의 순간, 제라드의 몸이 어둠속으로 스르르 사라지는 게 보였다.
드드드드.
대지의 파도는 허공을 스쳤으니.
타브라스의 안색은 어느새 창백하게 변해 있었다.
저편에서 다시 스르르 나타나는 제라드의 모습. 그것은 섀도우 마법처럼 보였지만, 그것과는 전혀 다른 마법이 틀림없었다.
“그, 그 마법은 설마······ 아니, 그럴 리가 없어. 그럴 리가 없다.”
타브라스는 그렇게 몇 번이고 중얼거리며 거리를 쟀다.
어스 샤크는 일정한 거리 안쪽에 있는 적을 상대할 때 가장 강력한 위력을 자랑하는 마법이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았다.
미처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는데, 발치에 물이 흥건하였다.
‘어째서 물이······.’
바로 그때였다. 별안간 바닥의 물이 하늘 위로 솟구쳤다.
촤아아악!
순식간에 온몸이 물에 젖은 타브라스.
‘이럴 수가. 놈이 수계 속성의 마법까지 다룬단 말인가? 어떻게 이렇게 많은 속성을 다루는 게 가능하지?’
그나마 다행인 것은 수계 속성은 앞서 사용하였던 마법들에 비하면 그 수준이 그리 높지는 않은 듯했다.
순간적인 안심.
그러나 타브라스는 그 순간 경악했다.
“아차!”
딱.
저 멀리서 나직하게 손가락을 튕기는 소리와 함께 섬광이 번쩍 터졌다.
3
파지지지직!
“크어억!”
타브라스는 비명을 내지르며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섀도우 마법을 사용하려고 하였으나, 그 노력은 헛되었다. 그의 반응속도보다 제라드의 마법 시전이 더 빠르기도 하였고, 그 찰나에 그의 발을 묶은 물의 손아귀가 타브라스가 물러나는 것을 용서하지 않았다.
수계 마법과 뇌전계 마법의 하모니.
한 가지 속성의 불리함을 완벽하게 뒤엎는 속성 연계였다.
“커흑······.”
타브라스는 피를 토했다.
어깻죽지에 생겨난 구멍과 몸 안으로 스며든 뇌전의 기운 때문에 몸을 까딱할 수가 없었다.
‘두 가지 속성의 마법을 동시에 사용하다니······.’
불신.
무기력한 패배감 속에서 타브라스는 조금 전에 일어난 일을 도무지 믿기 어렵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제라드는 타브라스에게 걸어왔다.
속성을 덧씌운다는 제라드의 전략은 완벽하게 들어맞았다. 굳건한 방어를 자랑하던 타브라스의 마법은 아주 간단히 꿰뚫리고 말았으니까.
“······한 가지만 묻자. 네놈이 나의 마법을 피할 때 사용하였던 그 마법······ 그건 잃어버린 마법이 맞더냐?”
그 질문에 제라드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당신, 여덟 번째 속성을 알고 있는 건가?”
꿈틀.
타브라스의 눈가가 꿈틀거렸다.
여덟 번째 속성.
조금 전 제라드가 했던 그 말이 모든 것을 대답을 대신하였다. 눈앞의 이 젊은 마법사는 세상이 잃어버린 기록을 더듬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흐흐흐. 네가 알고자 하는 것은······ 이 시대가 잊어버린 추악한 이면을 드러낼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걸 증명할 테냐?”
“이상한 걸 묻는군. 마법사는 증명하는 존재야. 그 앞에는 선악도 미추도 없어. 오로지 명확한 사실과 진리만 존재할 뿐이다.”
가슴이 뻥 뚫릴 정도로 명쾌한 대답이었다.
타브라스 역시 그렇게 생각해왔기에 그 길을 걸어왔다.
그러나 마법사의 앞길을 비추는 것이 그처럼 명쾌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는 절망하였다.
“재미있군. 네가 이 길에서 나와 다른 답을 찾을 수 있을지, 그게 궁금해졌다. 내게서 기록을 가져갈 수 있겠느냐?”
타브라스가 말하는 기록이 성유물을 뜻하는 것임은 명백하였다.
바로 그 순간.
촤라락.
베리타스가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 펼쳐졌다.
타브라스는 저항할 수도 없는 상태였지만, 이제 아무런 미련이 없는 듯한 모습이었다.
주저앉은 타브라스의 몸 안쪽에서 광채가 흘러나왔다.
‘세계수의 안에서 흘러나왔던 그 빛과 똑같다.’
제라드가 그렇게 생각했을 때, 그 빛은 베리타스의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탁.
빛을 모두 흡수한 베리타스는 닫혔다.
“네가 내놓을 답이······ 기대되는구나.”
타브라스는 그렇게 힘겹게 중얼거리더니 이내 눈을 까뒤집으며 바닥에 고꾸라졌다.
수계 속성 마법에 뇌전의 저항력이 떨어진 상태에서 맞이한 뇌전의 섬광. 비록 직격타를 피했다고 해도 지금껏 정신을 유지하고 있었던 게 기적적일 수준이었다.
‘어떻게 된 거지. 그는 끝까지 흑마법을 쓰지 않았다. 게다가 순순히 정보를 넘겼어. 그는 내가 지금껏 본 다른 흑마법사와는 달라.’
제라드가 그렇게 의아해하는 사이.
[새로운 성유물 조각 획득. 기록 경신. 정보 획득에 따라 닫혀있던 비문이 열리게 됨. <1종 비문:8인의 후계자> 개방.]
베리타스가 새로운 비문이 열렸음을 전해왔다.
< 잃어버린 기록1 > 끝
ⓒ 양승훈
=======================================
< 잃어버린 기록2 >
4
아덴바움 후작가의 사태는 일단락되었다.
테라 마탑의 마법사들은 눈앞에서 벌어진 상황을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제라드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단 한 번에 모든 것을 증명했다.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아덴바움 후작가에 일어난 일련의 사태에는 타브라스가 배후에 있었던 것이다. 현재 그는 응급 치료를 마치고 엄중하게 구금된 상황이었다.
“모든 게 제라드 공 덕분입니다.”
“백작님의 결단이 없었다면 진행하기 어려웠을 일입니다.”
“그 무슨 겸손의 말씀이십니까? 모든 이들의 앞에서 보란 듯이 해내셨는데 말입니다.”
가르시아의 눈빛이 반짝거렸다.
제라드는 연회장에서 그의 목숨을 구해주고, 후작령에서는 후작가를 구하였다. 지금 가르시아의 눈빛이 이러한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영주님께서 지금 깨어계셨더라면 분명히 저와 똑같이 행동하셨을 테지요.”
두 사람의 시선이 병석에 누워 있는 아덴바움 후작에게 닿았다. 가르시아가 공작령으로 떠난 직후에 암살미수사건이 발생하면서 병석에 눕게 된 후작은 아직도 의식이 없었다.
“후작가의 은인이신 제라드 공께 어떻게 은혜를 갚아야 할는지······.”
“은혜라니요. 괜찮습니다. 공작가의 의뢰를 따라서 움직인 것뿐입니다. 그러니 그렇게까지 깊이 신경 써 주실 필요는······.”
“아니요. 후작가의 명예를 걸고 그럴 수는 없습니다. 어떻게 신경 쓰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절대로 있어선 안 될 일이지요. 어떤 식으로든 제라드 공께 도움을 드릴 것입니다.”
가르시아의 눈빛이 너무나도 뜨거워서 제라드는 괜찮다고 말을 끝까지 이을 수가 없었다.
“저······ 그러면 백작님, 한 가지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무엇인지요! 후작가의 힘을 전부 다 사용해서라도 제라드 공의 부탁을 들어드리겠습니다. 반드시 말입니다!”
뜨겁게 소리치는 가르시아에게 미안하지만, 제라드가 그에게 부탁할 건 그렇게 대단한 게 아니었다.
“음, 이 정도면 딱 좋군.”
고성의 높은 성탑의 작은 방.
방 안의 모습은 매우 살풍경하였다. 아마도 오랜 시간 쓰이지 않은 공간인 듯했다.
그러나 제라드는 이곳이 딱 좋았다.
이곳에 들어올 수 있는 길목은 딱 하나뿐이었으므로, 공방을 만들기에는 가장 적합하다고 할 수 있었다.
제라드는 몇 가지 마법진을 설치한 후에 방 안에 들어왔다.
‘대충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타브라스, 그 사람은 엄중하게 감금되어 있으니, 혹 깨어난다고 해도 아무것도 하지 못할 테고, 이미 이 성내에 나의 마법진이 곳곳에 설치해두었으니, 지금 당장 해둘 건 모두 해두었다.’
테라 마탑에 이 사실을 전달해야 했으니, 앞으로 사흘 정도는 시간이 남아 있었다. 그동안 제라드는 미뤄왔던 일을 정리할 때가 되었다.
“1종 비문:8인의 후계자······. 이 세상에 7인의 후계자라는 말은 여러 번 쓰였지만, 단 한 번도 8인의 후계자라는 말은 없었다. 이 안에는 대체 어떤 기록이 담겨 있는 걸까.”
제라드는 방 한가운데에 앉았다.
바로 그 순간, 베리타스가 제라드의 마음을 읽었는지, 벌컥 열렸다.
촤라락.
책장이 넘어가는 소리와 함께 마침내 열린 책장 안쪽에서 빛이 흘러나왔다.
8인의 후계자.
그 진실을 확인할 시간이었다.
제라드는 베리타스에게 다가갔다.
두 눈으로 빛을 가만히 들여다본 순간, 몸이 붕 떠오르는 듯한 부유감과 함께 제라드의 의식은 기록의 저편으로 쏟아졌다.
5
폐허.
그 속에 한 사람이 서 있었다.
그는 잿빛의 로브를 걸치고 있었으며, 긴 수염은 불어오는 바람에 흩날렸다.
그는 최초의 마법사라고 불렸던 존재.
엘레멘탈 마스터였다.
마법이 유실된 시대.
그 흔적을 더듬어 다듬게 된 영역의 끝.
이 길에는 끝이 없으나, 그는 주어진 정보는 부족하였고, 그 이상의 길은 찾기 어려웠다.
바로 그때, 그의 뒤로 여럿의 사람들이 다가와서 한쪽 무릎을 꿇고 예를 다 하였다.
각양각색의 로브를 걸친 마법사들.
그들이야말로 최초의 마법사가 남긴 모든 비의를 짊어진 존재들이었다.
‘여덟 명. 틀림없이 여덟 명이다!’
8인의 후계자.
그것은 역시 최초의 마법사가 남긴 마법의 유산을 이어받은 마법사들을 일컫는 말이었다.
저마다 다른 색의 로브들이 형형색색 펼쳐져 있었다.
그런데 그중, 한 명.
제라드가 알지 못하는 색의 로브를 걸친 사람이 있었다.
칠흑과 가장 닮아있는 색.
흑색의 로브를 걸친 마법사였다.
제라드의 눈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지금껏 나타났던 흑마법사들은 늘 저런 검은 로브를 걸치고 있었다. 제라드는 그게 단순한 우연이라고 생각지 않았다.
제라드는 그 칠흑색 로브를 걸친 마법사의 이름을 어렵지 않게 짐작하였다.
‘녹스.’
제라드는 이미 이전에 열었던 1종 비문에서 그의 존재를 보았다. 바로 그가 잃어버린 마법의 계승자가 틀림없으리라.
바로 그때였다.
8인의 앞에 선 최초의 마법사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제라드의 기록 속에 광기에 잠겨있던 초췌한 모습과는 달리 이 황량한 대지 위에 서 있는 그의 낯빛은 훨씬 좋아 보였다.
“너희는 나의 모든 마법을 다 익혔다. 하지만 너희 중 누구도 내가 다다른 길, 그 이상의 길을 보지도 짐작하지도 못하는구나.”
그 말에 여덟 명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였다.
최초의 마법사가 그들에게 원했던 것은 단 하나였다. 그들이 자신이 다다르지 못한 마법의 기원에 다다르길 바랐던 것. 하지만 그들은 스승의 뒤를 따르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내가 이제 말할 것은 하나다. 너희는 모두 내가 가는 길에 있다. 현재에 안주하지 마라. 구도를 멈추지 마라. 여기는 시작이다. 너희와 나는 똑같은 위치에 서 있다. 우리는 고작 이 세상이 잃어버린 것의 끝자락에 다다랐을 뿐이다.”
‘여기는 시작이다.’
제라드가 그 말을 곱씹고 있을 때였다.
별안간 황량한 폐허의 풍경은 사라졌고, 그 대신에 사방이 벽으로 둘러싸인 익숙한 공간이 펼쳐졌다.
‘앗! 여긴 그곳이다.’
제라드는 깜짝 놀랐다.
엘레멘탈 마스터의 기록 속에서 수도 없이 봐왔던 그때 그곳의 공간이 지금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그런데 지금 이곳에 있는 건 엘레멘탈 마스터만이 아니었다. 엘레멘탈 마스터의 앞에 한 사람이 고개를 깊이 숙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칠흑과 닮은 로브를 걸친 마법사.
‘녹스. 녹스다!’
제라드가 그의 정체를 꿰뚫었을 때였다.
“내가 너를 부른 이유를 아느냐?”
“모르겠습니다.”
“여덟 명 중에서 네가 나와 가장 많이 닮아있기 때문이다.”
“당치 않은 말씀입니다. 제가 어떻게 감히 스승님과······.”
“바로 그 점이다. 너는 너를 표출하는 법이 없다. 자신의 부족함을 알아. 지금 자신이 서 있는 이 길이 얼마나 위태로운 것인가, 얼마나 부족한 것인가를 알고 있다. 바로 그 점이다. 나는 너의 그 점이 가장 나와 닮았다고 말하는 것이다.”
“감히 감당하지 못할 말씀입니다.”
“그렇지 않다. 너는 능히 감당하리라. 나는 저물어가는 자. 저무는 것은 끝이요, 끝은 곧 시작을 암시한다. 시작은 태어나는 것이니, 저물어가는 자와 태어나는 자가 지금 한 자리에 있다.”
“스승님,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요. 저는 가장 마지막에 스승님을 따른 자입니다. 가장 마지막을 걷는 자가 어찌 가장 앞으로 가겠나이까!”
“무지한 소리로구나. 나는 일찍이 말했을 터. 너희와 나는 똑같은 길에 있다. 그리고 너는 그 말의 뜻을 알아들었다. 너 자신을 속이느냐?”
엘레멘탈 마스터의 눈빛은 투명하였다.
녹스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모든 것을 꿰뚫고 있었다.
그 앞에선 거짓도 기만도 숨김도 없었으니.
“우리의 길 위엔 앞과 뒤가 없다. 오직 위와 아래만이 있을 뿐. 옆으로 나란히 늘어선 것 중 어느 것이 앞이고, 어느 것이 뒤더냐?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한 길 위에 있다. 그중 너는, 나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있으니 네가 나를 이을 것이요, 너는 이 길 위에서 궁구하는 것을 멈추지 않으리라. 세상이 잃어버린 것을. 진리를. 그리고 진정한 마법을.”
녹스는 그 선언과도 같은 말에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동자는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떨리고 있었다.
그 말이 어떤 의미인가는 분명했다.
최초의 마법사는 나머지 7명이 아닌, 마지막 8번째 제자인 녹스가 자신의 진정한 후계자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 광경을 지켜보는 제라드도 놀라고 있었다.
‘엘레멘탈 마스터의 진정한 후계자는 잃어버린 여덟 번째 마법의 계승자인 녹스였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지? 진정한 후계자가 세상에서 잊히다니!’
도대체 이 이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바로 그 순간이었다.
별안간 등줄기로 오싹하고 소름이 스쳤다.
‘누군가가 있다!’
제라드가 고개를 홱 돌렸다.
그러자 이 폐쇄된 공간의 저편.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의 저편에 한 쌍의 눈동자가 보였다.
그 눈동자 깊숙한 곳에는 시기와 질투, 분노, 증오가 한데 뒤섞여 있었으니.
제라드는 어둠 속으로 걸어갔다.
이 광경을 목도한 것은 누구일까.
그 어둠에 다다를 그 찰나.
곧 발이 붕 떠오르는 부유감이 제라드를 덮쳐왔다.
그 순간, 주변의 풍경이 무너지면서 뒤섞이기 시작하였다.
기록이 끝난 것이다.
저편에서 몸을 잡아당기는 듯한 느낌과 함께 제라드의 의식은 성탑으로 돌아왔다.
그의 이마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누군가가······ 누군가가 그 광경을 봤다.”
제라드가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쥔 순간, 탁 소리를 내며 베리타스는 닫혔다. 베리타스의 눈동자는 여느 때와 같이 무미건조하게 그저 제라드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6
아덴바움 후작가에서 일어난 사태는 사상초유의 사태임이 분명했다.
후작과 그 후계자가 각각 암살미수사건에 휘말렸을뿐더러, 전혀 다른 존재가 그 자리를 대신하였다는 것.
마지막으로 이 일에 테라 마탑이 직접 관련되어 있다는 것은 세상을 발칵 뒤집을 일이었다. 정확한 검증과 사실 파악은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제라드가 성탑에 틀어박힌 뒤로, 불과 사흘이 지나기도 전에 테라 마탑의 마법사들은 후작령에 당도하였다.
그그그긍.
성문이 열리면서 황색 로브의 마법사들 이십여 명이 들어왔다. 그들의 선두에는 땅딸막한 키에 고집스러운 인상의 노마법사가 있었다. 그가 바로 테라 마탑의 탑주인 파르고 그레딕이었다.
테라 마탑의 원로 마법사 때문에 가문이 위험할 뻔하였으니, 그를 맞이하는 가르시아의 얼굴은 당연히 밝지 않았다. 테라 마탑의 마법사들 역시 그건 마찬가지였다.
“아덴바움 백작님, 일의 전후를 파악하고 싶습니다만, 그리 하여도 괜찮겠습니까?”
“예, 물론입니다. 먼저 사실 확인이 우선이겠지요.”
가르시아는 약 이틀 전에 있었던 상황을 모두 설명하기 시작하였고 타브라스의 곁을 보좌하면서 모든 일의 흐름을 지켜보았던 마법사들의 증언이 뒤따랐다.
파르고는 줄곧 침묵으로 일관하다가 이윽고 마지막에 모든 것이 밝혀진 장소에 다다라서 싸움의 흔적을 훑었다.
“······.”
균열이 일어난 땅과 이리저리 튄 땅의 파편은 싸움의 양상을 대신 말해주고 있었다.
‘틀림없군. 이건 타브라스의 마법이야.’
파르고는 믿기 어렵다는 표정을 지었다. 타브라스가 이런 일을 벌이다니······. 수십 년 동안 그를 옆에서 봐왔기에 그 배신감과 충격은 더욱 컸다.
그러나 지금 그 이상으로 놀라운 건.
“그래서 크루드 마탑의 그 마법사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한번 만나보고 싶은데.”
타브라스와의 마법전을 벌였던 크루드 마탑의 젊은 마법사. 파르고가 지금 가장 궁금한 건 바로 제라드라고 하는 존재였다.
한편, 제라드는 성탑에서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1종 비문:8인의 후계자에서 본 어떤 불길한 징후들을 잠깐 뒤로 젖혀두고, 제라드는 지금 최초의 마법사가 했던 말들에서 어떤 영감을 받았다.
그것은 타브라스와의 마법전과 맞물려서 새로운 마법의 가능성을 제라드에게 제시하였다.
‘두 가지의 속성을 동시에······.’
제라드의 착안점은 바로 거기에 있었다.
타브라스와의 마법전에서 제라드는 머리로 충분히 알고 있었던 것을 현실로 마주하게 되었다. 속성별 우위성에 따른 결과가 바로 그것이다.
‘스승님의 마법은 뇌전계 마법 중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뇌전의 성질을 극대화한 파괴력과 속도······. 하지만 그 엄청난 위력도 지계 마법의 단단한 방어 앞에서는 통하지 않았다.’
그래서 미리 판을 준비해두었다.
테라 마탑이 개입된 상황이었으니, 지계 속성 마법을 익힌 테라 마탑의 마법사와 마법전을 벌일 가능성이 높다는 걸 알았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마법전은 일방적으로 끝났지만, 제라드는 전혀 만족하지 않았다.
‘한 마법에 한 가지 속성이 아니라, 여러 가지의 속성을 동시에 사용하고 조합할 수만 있다면 그땐 미리 판을 만들거나 약점을 보완하는 일체의 과정이 불필요해진다.’
상대가 누구든, 어떤 마법을 사용하든 상관없다.
지금 제라드가 생각하는 결론에 다다르면 그것은 단순히 결함을 감추거나 지우는 그런 게 아니다. 튀어나온 부분과 들어간 부분이 완벽하게 맞물려 완전해지는 것을 의미한다.
“무결 마법.”
제라드가 그렇게 중얼거렸다.
새로운 마법의 가능성이 열린 순간이었다.
< 잃어버린 기록2 > 끝
ⓒ 양승훈
=======================================
< 잃어버린 기록3 >
7
방향성은 정해졌다.
최초의 마법사는 말했다.
같은 길. 그 길 위에서는 앞과 뒤가 없다. 오로지 위와 아래만이 있을 뿐.
제라드는 그 말을 곱씹으며 전혀 다른 점에서 접근했다. 지금까지 해왔던 방식인 보완과 강화가 아니라, 누구도 생각지 않았던 영역에서 접근하는 것이다. 그러자면 아예 기반부터 모든 것을
다시 생각해야만 했다.
제라드의 머리가 바쁘게 돌아갔다. 7게이트 증폭법을 개량하면서 제라드는 지금껏 전혀 다른 속성의 마법을 무리 없이 운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건 개량이 아니었으니. 새하얀 백지에서부터 시작해야 하는 작업이다.
‘전혀 다른 속성의 힘을 어떻게 동시에 사용할 수가 있을까? 융화되지 않는 상극의 힘은 한 곳에 같이 있을 수 없어. 그걸 억지로 하다가는 마나 코어나 패스가 부서지고 말 텐데.’
제라드는 아주 오래전에 마나 코어의 개량을 두고 고민하다가 엘레멘탈 마스터의 기록에서 새로운 방식을 찾았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실패를 겪으면서 많은 걸 알게 되었다. 그래서 무엇이 가능하고 무엇이 불가능한지는 누구보다 잘 알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답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건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할 수 없는 일을 자꾸만 하려고 하니, 답이 없는 미궁 속에서 방황하는 것과 같았다.
시간이 계속 흘렀다.
제라드는 잠자코 있다가 고개를 저었다.
‘휴. 아무리 생각해도 잘 모르겠어. 전혀 다른 속성을 각각 다른 그릇에 담을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정말로 내가 생각하는 게 가능한 일인지조차도 확신이······.’
제라드는 그렇게 생각하다가 별안간 눈을 크게 떴다.
“각각 다른 그릇이라고?”
제라드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냥 너무 답답해서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했었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그 말도 안 되는 생각이 제라드가 보지 못했던 길을 비추고 있었다.
“그래, 맞아. 그거야. 말이 안 되는 게 아니었어.”
제라드는 충격에 빠진 얼굴이었다.
미처 알지 못했던 어떤 한 가지 사실에 도달한 순간이었다.
애초에 서로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미치는 속성을 한 곳에 담으려고 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얘기였다.
“독립된 다른 그릇을 준비하고 그곳에 담을 수 있게 되면 속성의 충돌 현상은 사라진다.”
제라드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드리웠다.
그랬다.
지금까지 없었던 방식이라는 것은 다시 말하면 지금까지 존재했던 방식으로는 절대로 만들어지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제라드는 지금까지 배우고 익혀온 방식으로 생각했었다.
사고의 틀이라는 건 이렇게 무서운 것이다. 벗어나고 싶어도 알고 있는 게 많으면 많을수록, 수준이 높으면 높을수록 사고의 틀은 더욱 단단해지고 높아져 시야와 사고는 그 안에 갇히게 되는 것이다.
새로운 방향이 잡힌 순간, 온갖 생각이 제라드의 머릿속에서 떠오르고 지워지기를 반복하였다. 마법의 연구는 바로 지금 이 순간부터였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꿈틀.
제라드의 눈썹이 휘었다. 이곳 성탑으로 이어지는 복도로 사람들이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테라 마탑의 마법사들이 왔구나.’
제라드는 연구를 재개하고 싶었지만, 더는 그럴 수가 없음을 알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법의 연구를 하는 것도 좋았지만, 지금 당장 정리해야 할 문제가 눈앞에 있었다.
8
마탑주 파르고 그레딕은 땅딸막한 노인이었다. 머리가 반쯤 벗겨진 그는 고집스러운 눈매와 수염이 인상적인 인물이었는데, 제라드를 바라보는 눈빛이 매서웠다.
“어리군.”
파르고는 불쑥 그렇게 말했다. 그의 말투는 몹시 투박했다.
“후배, 서로 마법사인 마당에 불필요한 대화보다는 정확한 검증으로 모든 의혹을 떨치는 게 더 빠를 것 같은데, 어떤가? 후배가 이곳에 온 뒤로 있었던 일을 하나씩 재현해줄 수 있겠는가?”
쉽게 말해서 믿기 어려우니 증명해보라는 얘기다.
제라드는 웃었다.
“좋습니다. 저도 그게 더 편합니다.”
“얘기가 잘 통하는군. 그럼 공동으로 가볼까.”
제라드는 자리에서 일어나 타브라스와의 교전이 있었던 지하 공동으로 향하였다.
휑한 공동.
지금 이곳엔 오십 명을 가뿐히 넘는 수많은 마법사들이 한 자리에 모여 있었다.
제라드는 다 박살이 난 공동의 중심에 섰다.
그러나 지금 이 자리에는 며칠 전 제라드와 마법전을 벌였던 타브라스는 없었다. 그의 의식은 여전히 돌아오지 않은 상태였다.
“그럼 제가 타브라스 원로 마법사님의 역할을 대신······.”
“아니, 내가 직접 하겠다.”
한 마법사가 나서려고 하자, 파르고가 그를 대신하여 앞에 나섰다.
“타브라스, 그 녀석이 어떤 마법을 익혔는지, 어떻게 싸웠는지는 다 알고 있으니 후배는 그때 그 순간의 재현에만 충실하면 될 거야.”
“알겠습니다.”
딱.
손가락을 튕기기가 무섭게 날아드는 섬광에 커다란 돌덩어리가 꿰뚫리며 와르르 무너졌다.
파르고는 놀란 얼굴이었다.
“확실히······ 케이틀란의 섬전(閃電)이 틀림없군.”
그 뒤로 제라드의 몸에 이글거리는 새빨간 불꽃이 솟구쳤다. 그것은 블레이즈의 고유술식인 홍염이었다.
이 광경을 처음 보는 마법사들은 하나같이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어떤 마법사가 이 광경을 보고 침착할 수가 있으랴!
그 후에는 제라드가 손을 허공에 휘저었다. 허공에 송골송골 맺히는 물방울이 바닥에 깔렸다. 그리고.
촤악!
바닥에서 별안간 솟구치는 물기둥.
“으음. 수계 속성의 마법까지······.”
파르고가 낮게 신음하였다.
이야기를 듣는 것과 직접 보는 것에는 하늘과 땅만큼의 격차가 있었다.
‘크루드 마탑에서 괴물 마법사가 나타났군. 여태 이런 실력의 마법사가 알려지지 않았다니······.’
솟구친 물이 안개처럼 흩어지기 시작하였을 때.
제라드는 딱 손가락을 튕겼다.
번쩍하는 빛이 터지는 것과 동시에 물이 깔린 바닥에 쏟아지는 섬전!
파지지지직!
전류가 바닥에 무섭게 요동치며 흘렀다.
“이렇게 싸움은 끝났습니다.”
제라드가 그렇게 말하며 어둠 저편에 서 있었다.
“······.”
파르고는 동요를 감추지 못한 채로 마지막 섬전의 그 말도 안 되는 시전 속도를 떠올리며 바닥을 살폈다.
커다란 바닥의 구멍.
저게 만약에 그에게 날아들었더라면 그는 막을 수 있었을는지······.
“크흠!”
두 눈으로 확인한 마당에 더 의심할 여지는 없었다.
“으음, 사실 확인은 이걸로 충분한 것 같군.”
9
파르고는 초췌한 기색의 타브라스를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그는 여전히 의식이 없는 상태였다.
그만큼 마지막 순간에 날아든 섬전이 파괴적이었다는 얘기일 것이다.
“후배, 이미 짐작하고 있을 테지만, 이번 일은 여기서 덮을 수 있는 정도의 문제가 아닐세. 아마 세상이 발칵 뒤집어지겠지. 그게 어떤 사실을 의미하는지는 후배도 알 걸세.”
“예.”
제라드는 무겁게 대답하였다.
과거에도 마탑의 마법사가 문제를 일으킨 일은 있었다. 모든 마법사들이 항상 옳은 길만을 걷는 것은 아니다. 이번 일처럼 타브라스가 흑마법사는 아니었을지라도 그가 잘못된 길을 갔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리고 바로 그럴 때마다 해당 마탑은 그 책임을 졌다. 그중에서도 이번 일은 사안이 사안인 만큼, 그 책임이 무거울 것이다. 아마도 근 10년 이상, 테라 마탑은 문을 닫고 세상과 단절할 것이다.
“책임을 진다는 게 발을 빼는 것처럼 되었어. 문제는 아직 해결되지 않았는데도 말이야. 후배가 고생을 많이 하겠군. 선배로서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해서 미안하네. 그리고 고맙게 생각하네.”
“아닙니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공작가의 요청도 있던 참이었으니 말입니다.”
“음, 자네가 그렇게 말해주니 마음이 좀 가볍군. 헌데, 그거 하나는 알아두게.”
“무엇을 말입니까?”
“이번 일로 온 세상이 자네의 이름을 알게 될 걸세. 온 마탑의 마법사들이 자네를 주목할 테니, 유명해질 테지. 허나, 그 말은 후배의 존재감이 적들에게도 노출된다는 말과 같네. 아마도 지금처럼 모든 게 쉽지만은 않을 터.”
“제가 감당해야 할 일이라면 감당해야 하겠지요.”
“그래, 후배라면 능히 감당할 걸세. 그 정도의 기량은 이미 충분히 갖추고 있으니 말이야. 그럼 이제 어떻게 할 참인가?”
“마탑으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이곳에서 있었던 일을 전할 생각입니다.”
“그래, 그래야겠지. 그렌자일 공에겐 안부를 전해주게.”
“알겠습니다.”
“흐으음. 헌데, 참으로 아쉽군. 타브라스가 한 일과는 별개로 그가 이룩한 마법적 성취는 독보적인 것이었다. 그 마법이 이런 식으로 끊어진다는 것이 말이야······.”
파르고는 우회적으로 타브라스의 마법을 유폐하겠다는 뜻을 밝혀온 셈이었다. 그런데 타브라스에게는 후계자가 없었다. 그 말의 뜻이 무엇인가는 너무나도 분명했다.
타브라스는 자그마치 원로급 마법사였으니. 여기서 목숨을 빼앗지 않는다면 그가 정신을 차렸을 때, 언제 어떤 식으로 아군을 향해 그 위험한 마법을 쏟아낼지는 알 수 없었다.
“아쉽군. 아쉬워.”
“······.”
제라드는 잠깐 고민하다가 이내 결단을 내렸다.
“탑주님, 한 가지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아직 뭔가 더 말할 게 남아있는가?”
파르고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렇게 물어왔다. 그리고 그 표정이 경악과 불신으로 바뀌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탑주님께서 원하신다면 이 마법을 적합한 마법사에게 전수해줄 수 있습니다.”
“······.”
파르고는 황당한 얼굴로 제라드의 표정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이내 정신을 차렸다.
“아니, 아닐세. 그건 이제 자네 마법이야. 후배의 뜻대로 하게.”
“정말로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음, 물론일세.”
제라드는 그 뒤로 여정 길에 오를 채비하였다.
가르시아는 떠나겠다는 제라드에게 몇 번이고 조금만 더 머물렀다가 가라는 말을 하였다.
그러나 제라드는 더 이곳에 있을 수 없다며 거절하였으니. 가르시아로서는 반드시 나중에 꼭 영지에 찾아와달라는 말만을 반복하며 약속을 받아낼 따름이었다.
“분명히 약조하셨습니다, 제라드 공.”
“네, 알겠습니다. 나중에 꼭 한 번 찾아뵙겠습니다.”
제라드는 그 말만 남기고 바쁘게 동쪽 길로 떠났다.
한편, 그 무렵 파르고는 성벽 위에서 멀어져가는 마차를 바라보고 있었다.
모든 속성을 다 다룰 뿐만 아니라, 그 어떤 마법도 손쉽게 이해하고 사용하는 마법사.
“천재라는 말로는 다 설명할 수가 없군.”
파르고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앞으로 아덴바움 후작가의 일이 세상에 알려지면 크루드 마탑의 저 젊은 마법사의 이름도 수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될 것이다.
그러면 아마도 수많은 별명이 생겨날 것이다.
그러나 제라드를 부르는 그 수많은 이명은 결국 단 하나로 좁혀지게 되리라.
괴물.
파르고가 보기에 제라드에겐 그것보다 더 잘 어울리는 별명은 없었다.
그 어떤 마법사가 모든 속성을 자유롭게 사용하고 이해하며 재현한단 말인가. 그건 저 위대한 7인의 마법사들도 불가능했던 일이었다.
즉, 역사상 아무도······.
‘······아니야! 한 명. 한 명이 있었다!’
그랬다.
단 한 명의 마법사가 있었다.
“최초의 마법사, 엘레멘탈 마스터······.”
파르고는 탄식하였다.
“허! 새로운 전설이 시작되기라도 하는가?”
< 잃어버린 기록3 > 끝
ⓒ 양승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