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공자가 돌아왔다1 >
1
두 사람은 산도르 마탑에서 나와서 천천히 크루드 마탑으로 향하였다. 바쁘게 가야 할 정도로 급한 길은 아니었던 까닭이다.
그동안 스승과 제자는 오랜만에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고 보니, 다일론 탑주님께서 아주 재미있는 말씀을 하시더구나.”
“무슨 말씀을요?”
“끝까지 말하지 않을 참이었더냐?”
케이틀란의 말에 제라드의 머리가 바쁘게 돌아갔다.
‘설마, 성유물에 관한 걸 스승님께서 알고 계신 건가? 그게 아니면 어둠 속성의 마법에 관해서? 하지만 케이시는 당분간 그 마법에 관해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고 그랬는데······.’
“정령. 네가 정령과 교감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말을 듣고도 솔직히 믿기가 어렵구나. 그게 사실이더냐?”
“아······. 네. 정령과 교감할 수 있게 되었어요.”
“허어. 정말로 놀랍구나! 정령이라니······. 인간이 정령과 교감할 수 있다는 것은 내 평생 들어본 적이 없다. 세계수가 네게 엄청난 축복을 내린 게야.”
‘스승님께서는 내가 정령과 교감할 수 있게 된 걸 세계수의 축복쯤으로 여기시는 구나.’
아마도 케이틀란이 들은 이 이야기의 출처는 블레이즈로부터 시작될 것이다.
제라드는 굳이 그걸 바로 잡지 않았다.
케이틀란에게 쓸데 없는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럼 지금 이 순간에도 네 눈에는 정령이 보인단 말이더냐?”
“네, 정령은 세상 곳곳에 존재하고 있어요.”
“놀랍구나. 어떻더냐. 네가 지금 보는 세상의 모습이 궁금하구나.”
케이틀란은 드물게도 몹시 흥분한 얼굴이었다.
제라드는 말없이 하늘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저 멀리서 둥실 떠돌아다니던 바람의 정령이 날아와서 제라드의 손 언저리에서 노닐었다.
부드러운 바람이 제라드와 케이틀란을 휘감았다.
“설마, 지금 이 주변에 정령이 있느냐?”
“네, 지금 제 손 주변에서 즐겁게 노닐고 있어요.”
“놀랍구나. 정말로 놀라워!”
케이틀란은 그 뒤로도 정령에 관한 것들을 계속 물어보았다. 제라드는 신기한 느낌에 휩싸였다. 지금껏 제라드가 이룩한 것들에 관해서 어떤 것도 묻지 않았던 그가 정령에 관해선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다 물어왔다.
제라드는 곧 그 이유를 짐작하였다.
‘그렇구나. 스승님께선 정령의 영역은 자신의 길이 아니라고 생각하시는 거야.’
마법의 영역 밖.
상식적으로 생각하자면 맞는 얘기다.
마법과 정령은 비슷하면서도 전혀 다르다.
정령은 이를테면 자연현상에 더 가까운 것이고, 마법은 시전자의 손에서 벌어지는 인위적인 현상인 셈이니까.
그러나 제라드는 마법에 한해서만큼은 당대의 상식이라는 게 얼마나 느슨하고 부서지기 쉬우며, 동시에 작은 틀에 갇혀있는 것인지를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었다.
‘마법과 정령이 전혀 별개의 힘일까.’
제라드는 한계를 명확히 구분 짓지 않았다.
가능성은 얼마든지 열려 있었다.
최초의 마법사 이래로 정립된 7가지의 속성의 토대 이후로, 지금 제라드가 또 다른 한 가지의 가능성을 발견한 것처럼 말이다.
2
이틀이 지나고 제라드와 케이틀란은 크루드 마탑에 도착했다.
“돌아왔다.”
제라드는 산도르 마탑과 다른 게 하나 없는 마탑의 외형을 보면서 마음이 푸근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제 이곳은 제라드에게 있어 고향이나 다름없었다.
집에 돌아온 것처럼 마음이 편안했다.
“바라드 자작님께서 널 기다리고 있을 게다. 어쩌겠느냐. 탑주님께 인사를 드리고 가겠느냐?”
케이틀란의 물음에 제라드는 잠깐 고민하였다.
그러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지금 들어가면 다시 나오고 싶지 않을 것 같아요. 아직은 돌아올 때가 아닌 것 같아요.”
“무슨 말인지 알겠다. 그럼 기다리고 있으려무나. 지금 당장 그에게 네가 밖에서 기다리고 있노라고 전할 테니 말이야.”
“네, 알겠습니다.”
케이틀란이 그렇게 마탑 안으로 들어가자, 제라드는 시작의 문 앞에 섰다.
‘여기서 시작됐지.’
6년 전.
제라드는 이 문을 열고 자신의 존재를 처음으로 세상에 드러냈다. 그때, 크루드 마탑은 제라드의 이름을 알았고, 그의 존재를 받아들였다.
시작의 문에 손을 얹는 순간, 복잡하게 느껴지는 술식의 배열들이 머릿속에 나열되며 펼쳐졌다.
6년 전에는 조금 시간이 걸렸지만, 지금은 순식간에 이 문을 열어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돌아온 것이냐?”
제라드는 별안간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 음침한 분위기의 한 마법사가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몇 번 보진 못했지만, 얼굴은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타란 원로 마법사님.”
“산도르 마탑에 다녀왔느냐?”
“벌써 그 소식이 이곳까지 전해졌는지요?”
“······제라드 란스터. 방심하지 마라. 빛이 강해질수록 어둠도 강해지는 법이야. 네가 그들의 존재를 들여다볼수록, 그들 역시 너를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을 것이다.”
타란은 그렇게 말하며 제라드의 옆을 지나쳤다.
‘예전보다 안색이 더 나빠지신 모습인걸. 흑마법의 반동 때문이겠지.’
타란은 다른 흑마법사들처럼 타인의 생명력을 착취하여 사용하지 않는다. 바로 그렇기에 그의 마법은 사용하면 할수록 자기자신의 목숨을 갉아먹을 수밖에 없었다.
‘타란 원로님께서 사용하시던 마법이 분명히 어둠침식이었지. 어둠침식이라······. 분명히 그 마법도 다시 재정립해볼 가치는 충분하단 말이지.’
제라드가 그렇게 깊은 생각에 잠겨있을 때였다.
마탑에서 한 사람이 케이틀란과 함께 나왔다.
며칠 동안 크루드 마탑에서 머물면서 제라드가 오기만을 기다리던 바라드 자작이었다.
그는 마탑 밖에서 생각에 잠겨 있는 제라드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이내 깜짝 놀란 얼굴을 했다.
“고, 공자님이십니까?”
제라드는 한참 생각에 잠겨있다가 고개를 돌렸다.
“헉! 틀림없군요. 공자님이 맞으세요. 6년간 정말로, 정말로 훌륭하게 자라셨지만, 얼굴에 그 모습이 그대로 남아계십니다. 어렸을 때부터 영주님과 많이 닮으셨다는 건 알았지만, 지금의 모습을 뵈니, 정말로 영주님이 젊으셨던 때와 똑같습니다!”
“······.”
제라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바라드 자작은 혀를 내두르며 감탄사를 연신 토하였다.
그러나 정작 제라드는 그런 반응에도 별반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타이온 그라우드.
그와 닮았다는 것이 제라드에게는 칭찬이 아니었다.
‘내가 아버지와 닮았다고.’
제라드의 눈빛이 무겁게 변해갔다.
“이럴 때가 아니군요. 공자님, 조금만 기다려주십시오. 곧 마차를 준비시키겠습니다. 갈 길이 머니, 바로 출발하고자 하는데, 공자님은 어떠십니까?”
“알겠습니다. 바로 가시죠.”
또렷한 대답에 바라드 자작은 정말로 놀랍다는 표정이었다.
그 역시 제라드가 어렸을 때부터 바로 옆에서 봤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때는 바보라고 불렸던 천덕꾸러기가 지금은 마법사가 되어 있다. 이 차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는지.
“그럼, 조금만 기다려주십시오.”
바라드 자작이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살짝 숙이고 마탑의 뒤편에 대기 중인 마차를 향해 달려갔다.
“기분이 별로 좋아 보이지 않는구나.”
“저분의 말이 썩 달갑지 않네요. 물론, 악의가 있는 말은 아니겠지만 말입니다.”
“싫다면 가지 않는 것도 방법이다.”
“아니요. 공작가에 가겠습니다. 그리고 지금의 제가 누구인지 분명하게 밝히고 오겠습니다.”
제라드의 대답에 케이틀란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믿음직하구나. 잘 알겠다. 네가 그곳에서 무엇을 할지, 또 어떻게 행동할지는 내가 왈가왈부할 일은 아니다. 다만, 스승으로서는 아끼는 제자가 엉뚱한 곳에서 무시당하거나 한다면 기분이 몹시 나쁠 것 같구나. 블레이즈도 그건 마찬가지일 게다.”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음. 좋은 대답이다.”
그러는 사이, 저 뒤쪽에서 마차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잘 다녀오너라.”
“다녀오겠습니다, 스승님.”
무슨 대화가 더 필요하겠는가.
케이틀란은 제라드를 믿고, 제라드는 스승의 믿음을 저버리지 않을 것이다.
서로의 뜻은 그렇게 이어져 있었으니, 불필요한 말은 필요가 없었다.
제라드는 마차에 올라탔다.
푸르륵.
말이 콧김을 거칠게 내뿜으면서 마차는 서서히 길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하였다.
이 길을 따라가면 곧 그라우드 공작령이었다.
6년 전, 자기 자신을 찾기 위해서 이곳을 향해 달려왔던 그라우드 가문의 바보 3공자는 지금 한 사람의 당당한 마법사로서 공작가로 돌아가고 있었다.
멀어져가는 마차를 언덕 위에서 지켜보는 케이틀란은 미소를 지었다. 보지 않아도 앞일이 보이는 것 같았다.
“깜짝 놀라게 해줘라. 그들이 누구를 버린 것인지. 그리고 지금의 네가 누구인지를 말이야.”
3
마차는 사흘을 꼬박 달렸다.
처음으로 흑마법사와 만났던 고트 마을을 지나서 푸른 평야를 지나서 한참을 나아간다.
그리고 마침내 비옥한 황금빛 들판 자락에 다다랐을 때, 제라드는 저 멀리 도심을 눈에 담았다.
‘돌아왔구나.’
높은 성벽으로 둘러싸인 성벽 너머의 도시가 눈에 보였다.
“돌아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공자님.”
바라드 자작이 그렇게 말해왔다.
그 순간, 제라드의 미간이 꿈틀하였다.
지금까지 한 가지가 못내 거슬렸다.
“자작님, 저를 공자님이라고 부르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예? 하지만 공자님을 공자님으로 부르지 않는다면 대체 어떻게 불러야 할지······.”
“저는 크루드 마탑의 1급 마법사이자, 사세르란의 벼락 케이틀란 리덴드의 후계자인 제라드 란스터입니다. 제가 바라드 자작님께 공자님이라고 불려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아, 알겠습니다.”
바라드 자작은 제라드의 서늘한 말에 입을 다물었다.
늘 바보처럼 헤헤 웃고 다니던 바보 공자. 그 모습은 지금 제라드의 얼굴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것은 공작가의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6년 전과는 이제 모든 게 달라졌다.
그들이 기억하던 제라드의 얼굴은 아무도 볼 수 없으리라.
그는 지금 그라우드 공작가가 버린 3공자로서 이곳에 돌아온 게 아니었다.
머잖아 검문소에서 마차가 잠깐 멈추었다가 공작가의 마차임을 증명하는 증명패에 통과가 끝났다.
마차는 공작가의 관저를 향해 멈추지 않고 나아갔다.
대도심의 풍경을 눈에 담는 제라드의 눈은 혹독할 정도로 차가웠고 몹시 무거웠다.
성과 같은 모습을 한 공작가 관저가 저 멀리 도심 중심에 보이기 시작하였다.
마차는 유일한 언덕길을 오르기 시작하여, 마침내 관저 입구에 다다라 멈춰 섰다.
“워워.”
마부가 말을 멈춰 세웠고, 마침내 관저의 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열렸다.
좌우로 열리는 문 너머에 병사들이 빈틈없이 서 있는 가운데, 제라드는 마차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익숙하면서도 낯익은 건물이 지금 제라드의 눈앞에 있었다.
“자, 들어가시지요. 공······ 아니, 마법사님.”
바라드 자작의 안내를 따라, 제라드는 관저의 내부로 들어갔다.
“그럼 조금만 기다려주십시오.”
바라드 자작은 접견실로 제라드를 안내하고서 고개를 살짝 숙이고 물러갔다.
본관의 접견실.
이곳은 제라드가 단 한 번도 와본 적이 없는 방이었다.
아니, 애초에 본관에서는 있었던 기억이 얼마 없었다.
제라드는 창가에 다가갔다.
밖에 정원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본관 건물이 뭐라고, 여길 오는 걸 그렇게 무서워했는지.”
제라드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피식 웃었다.
그때와 지금은 많은 것이 다르게 보였다.
키가 커졌기 때문일까.
그렇지 않으면 관점이 달라졌기 때문일까.
‘어느 쪽이든 좋다. 이젠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니까.’
제라드는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겼다.
그 순간, 공작가에 관한 것들은 이제 그의 머릿속 저편에 밀려났다. 어느새 그의 머리를 꽉 채우고 있는 건 마법이었다.
< 3공자가 돌아왔다1 > 끝
ⓒ 양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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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공자가 돌아왔다2 >
4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제라드는 상념에서 헤어나왔다.
어느새 세상이 온통 어두워져 있었다.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한두 시간이 지난 모양이었다.
문이 열리고 바라드 자작이 들어왔다.
그는 난감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지금 영주님께서 회의실에 계셔서 조금 시간이 걸릴 듯싶습니다. 꽤 중요한 안건으로 아무도 회의실 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라고 하셨기에······.”
“중요한 일이 있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죠.”
“죄송합니다. 영주님께서도 공자님······ 아니, 마법사님께서 오셨다는 것을 아셨더라면 아마 모든 일을 제쳐두고서라도 만나러 오셨을 겁니다.”
“그렇게 급한 일은 아닙니다. 회의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기로 하겠습니다.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영주님께서도 몹시 기뻐하시겠지요. 자, 제가 귀빈실로 직접 모시겠습니다.”
“아뇨. 별관으로 안내해주시겠습니까?”
“별관이요? 아, 알겠습니다. 혹시 전에 머무시던 그 방이면 괜찮으시겠습니까?”
“네, 그 방이면 됩니다.”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는 중년의 여성.
“오랜만에 뵙네요, 페이.”
“건강하신 모습으로 다시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시녀장 페이는 차분한 태도였지만, 그 표정에는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 3공자가 이렇게 늠름하게 자라서 돌아오다니······.
“귀빈이 오신다는 말씀은 들었지만, 그게 설마 공자님이실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소문이 사실이었군요.”
“저에 관한 소문이 돌았나요?”
“네, 3공자님께 마법사가 되셨다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대부분 근거 없는 소리로 치부하였지만, 오늘 공자님을 뵈니 그 이야기가 사실이었음을 알겠습니다.”
‘놀라운 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제라드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어렸을 때는 늘 무섭고 어렵게만 보였던 시녀장 페이.
그랬던 그녀가 지금은 이렇게나 몹시 작아 보였다.
“그럼, 시녀장이 마법사님을 별관으로 안내해주시오.”
“알겠습니다.”
페이는 바라드 자작의 말대로 제라드를 안내하였다.
사실 제라드에게 안내는 필요하지 않았다.
별관으로 가는 길은 두 눈을 감고도 갈 수 있을 정도로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복도를 지나쳐서 회랑으로 나오면 별관의 정원이 보이고, 그 안쪽으로 계속 걸어가면 제라드가 지냈던 그 쓸쓸한 별관의 풍경이 나타났다.
‘모든 게 똑같은데, 모든 게 전혀 다 다르게 느껴진다. 그때는 이곳의 모든 게 다 크게만 느껴졌는데, 지금은 모두 다 작게만 보여.’
그건 단순히 제라드가 컸기 때문만은 아니리라.
제라드가 인지하는 세상의 범위가 더는 이곳에 국한되지 않고, 훨씬 더 넓은 세계를 담았다는 것이다.
“정말로 별관에서 쉬셔도 괜찮으시겠습니까?”
“네, 괜찮아요. 전 여기가 가장 편할 것 같네요.”
“알겠습니다. 방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늘 청소를 해두었으니, 당장 쉬실 때 불편함을 느끼거나 하시진 않을 겁니다.”
페이는 고개를 꾸벅 숙이며 물러갔고, 제라드는 방문을 열었다.
오랜 시간 사람이 살지 않았던 것을 증명하듯 정체된 방 안의 공기가 느껴졌다.
방 안의 모습은 기억하던 그때의 모습 그대로였다.
‘근데 엄청 작게 느껴진다. 이 방이 이렇게 작았던가? 신기한 느낌이야.’
제라드는 아련한 눈빛으로 방안의 모습을 구석구석 눈에 담았다. 예전의 기억이 하나씩 떠올랐다. 하지만 곧 그 기억들은 이내 서서히 흩어져갔다. 아련하지만 썩 소중하다고는 하기 힘든 기억들이었기 때문이다.
제라드는 다시 문을 열고 나왔다.
어렸을 적 이 별관에 홀로 있을 때면 이렇게 늘 이렇게 밖으로 나와서 정원에 서곤 하였다.
밤하늘에 가득한 별이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했다.
제라드는 그 광경을 가만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별안간 회랑 쪽에서 탁탁탁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남자의 발걸음치고는 너무 가벼웠다. 이건 여자의 발소리였다. 조금은 경박하고, 조금은 애가 타는 듯한 발소리.
제라드는 발걸음 소리만 듣고도 이 사람이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공작가에서 오직 단 한 사람만이 별관을 향해서 이렇게 뛰어오곤 했다.
제라드는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 얼마나 열심히 뛰어 왔는지 숨을 몰아쉬는 시녀 한 사람이 있었다. 살짝 발그스름한 머리칼에 양 뺨에 보이는 주근깨가 귀엽게 보였다.
그 순간, 제라드의 얼굴에 처음으로 미소가 떠올랐다.
단 한 명.
공작가에서 제라드가 자신을 감추지 않고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내가 전에 분명히 약속 지킨다고 그랬었지, 조세핀.”
“고, 공자이이이임!”
조세핀은 눈물이 그렁그렁해진 얼굴로 제라드의 품에 달려들었다.
5
“그렇게 계속 보면 부담스러운데.”
“······.”
“조세핀.”
제라드는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는 조세핀의 시선에 난감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6년 동안 조세핀도 꽤 많이 바뀌어 있었다.
제라드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컸던 누나였던 조세핀은 이제 제라드보다 머리 하나는 더 작았고 체구도 몹시 여렸다. 케이시보다 조금 더 작은 것 같았다.
그녀는 예쁘다고는 하기 어려운 얼굴이었지만, 귀여운 인상에 뺨의 주근깨가 발랄한 느낌을 주었다. 거기다가 젖살이 빠지고 몸에 굴곡이 생기면서 여성스러워진 모습이다.
물론, 6년 전 그녀의 모습은 거의 그대로 남아 있었다.
“거짓말 아니에요?”
“무슨 거짓말?”
“공자님이 마법사가 되었다는 소문······. 정말로 사실인가요? 그 로브도 그렇고······ 뭔가 거짓말 같아요.”
“정말로 나 마법사가 됐어. 믿기 어려우면 보여줄까?”
제라드는 그렇게 말하며 오른손을 튕겼다.
그 순간, 파직 빛이 터지며 구체가 둥둥 떠올랐다가 사방으로 조각조각 흩어지며 아름답게 수놓았다.
“와아!”
조세핀이 어린애처럼 기뻐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더니, 이내 감격에 겨운 듯,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울음이 섞인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대단해요. 공자님이······ 공자님이 정말로 마법사가 되어서 돌아오시다니요. 정말로 그런 일이 일어날 줄은······.”
“또 우는 거야? 조세핀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똑같구나. 여전히 울보야.”
“하지만······ 하지만 기쁜걸요······.”
조세핀은 눈물과 콧물을 쏟는 못생긴 얼굴로 눈물을 쏟았다. 제라드는 그녀의 진심을 느꼈다. 조세핀이 자신을 얼마나 아껴주었는지, 그걸 모를 제라드가 아니었다.
“고마워, 조세핀.”
제라드는 눈물을 뚝뚝 흘리는 조세핀의 눈가를 닦아주었다.
“그, 그러지 마세요······. 공자님은 귀하신 분인데······. 마법사님은 엄청나게 똑똑하고 위대한 분이잖아요. 이젠 저 같은 사람한테 예전처럼 그러시면 안 된다구요······.”
“조세핀 같은 사람이 어떤 사람인데?”
제라드가 조금 전까지 웃는 기색은 온데간데없이 엄한 표정을 지었다.
“고, 공자님은······ 고귀한 혈통의 자제분이시고, 저는······ 그냥 평범한 평민 출신이에요. 그리고 시녀잖아요······. 그렇게 무서운 표정 짓지 마세요······.”
“한 가지 물어볼게. 조세핀은 내가 고귀한 혈통의 사람이라서 나한테 잘해준 거야?”
“네? 그, 그런 거 아니에요!”
조세핀이 눈살을 찌푸리며 그렇게 즉답했다.
그러자 제라드도 다시 미소 지었다.
“나도 마찬가지야. 조세핀은 나한테 소중한 사람이야.”
“······.”
조세핀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전에는 그냥 어린 동생처럼만 보였던 제라드가 지금은 이렇게 늠름하게 자라서 눈앞에 있었다.
“으휴! 그만 좀 울고. 더 못생겨질 참이야?”
제라드가 놀리는 투로 말하더니, 자신의 로브로 그녀의 콧물을 닦아주려고 했다.
“악! 그러지 마세요! 더러워져요!”
“안 더러워.”
“더, 더럽다니까요······.”
“더럽지 않다니까.”
단호한 제라드의 태도에 조세핀은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심장이 터질 것처럼 쿵쾅대는 걸 느꼈다. 지금 이 순간, 조세핀은 처음으로 제라드를 남자로 느꼈다.
‘나 미쳤나 봐······.’
“저, 저 하, 할 일이 생겼어요! 공자님, 나중에 뵈어요. 알겠죠? 말도 없이 가면 안 돼요!”
조세핀은 그렇게 말하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달려가 버렸다. 제라드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따뜻하게 미소 지었다.
“6년이 지났는데, 조세핀은 똑같구나. 다행이다.”
6
밤이 깊은 시각이었다.
모두가 잠든 때.
제라드는 별안간 눈을 번쩍 떴다.
침대에서 일어난 제라드는 말없이 로브를 걸치고 밖으로 나왔다.
저벅저벅.
회랑 저편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새벽의 야음이 깊은 이 시각.
이 회랑으로 혹 찾아올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그건 오직 한 사람뿐이었다.
드디어 그때가 된 모양이었다.
무거운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는 가운데.
마침내 회랑의 저편에 한 사내가 섰다. 무거운 눈빛을 내뿜는 삼십 대 후반의 저 남자가 바로 그라우드 공작가의 주인이자, 제라드의 친부인 타이온 그라우드였다.
두 사람은 한동안 서로 얼굴을 바라보기만 할 따름이었다.
6년 만에 부자가 만난 순간이었음에도, 그 가운데에 감도는 분위기는 서늘하기만 하다.
“네 얘기는 들었다.”
“그런 모양이군요.”
타이온이 마침내 굵직한 한 마디를 내뱉었을 때, 제라드 역시 짧게 답하였다.
그 순간, 타이온의 눈빛이 무겁게 변했다.
“나를 원망하느냐?”
“글쎄요. 이곳에 있었던 때에는 그랬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지금은 아닙니다.”
“그거 다행이구나. 그때의 네게는 자격이 없었다.”
“제게 일일이 말씀하실 필요 없습니다. 모두 지나간 일입니다. 저는 영주님께서 주신 기회를 손에 넣었고, 지금 이 자리에 있습니다.”
“모두 지나간 일인가.”
타이온은 그 말을 곱씹으며 다가왔다.
제라드는 그 자리에 가만히 있었으니.
머잖아 두 사람의 거리가 제로가 되었다.
무겁기만 하던 타이온의 얼굴에 한줄기 미소가 감돌기 시작하였다.
“만족스러운 대답이다. 네가 다시 가문에 걸맞은 사람이 되어 기쁘구나.”
타이온이 그렇게 말하며 제라드에게 손을 내밀었다.
제라드는 그 굵은 손을 보았다.
자신을 향해 내민 저 손에는 실로 무수한 의미가 담겨 있었다.
‘가문에 걸맞은 사람인가······.’
제라드는 그 말을 몇 번이고 되뇌다가 이내 미소 지었다.
6년.
타이온은 그의 지난 6년을 알지 못한다.
그런데 지금 그는 저 단 한마디 말로 지금의 제라드를 받아들이려고 하고 있었다.
“죄송하지만, 제가 영주님께서 내민 그 손을 잡을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저는 단 한 번도 그라우드 공작가에 걸맞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한 적이 없습니다. 그건 앞으로도 마찬가지겠지요.”
제라드는 타이온의 두 눈을 똑바로 보며 그렇게 말했고, 타이온의 입가에 희미하게 드리웠던 미소는 그 순간 사라졌다.
“······네가 지금 그라우드 공작가의 이름을 받지 않겠노라고 말한 것이더냐?”
“예, 그렇게 말씀드렸습니다.”
그 순간, 타이온의 눈동자가 서슬 시퍼렇게 빛났다.
그의 심기가 불편해졌음을 말하듯, 그의 전신에서 줄기줄기 피어오르는 마나의 기운이 심상치가 않았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제라드의 입가에도 짙은 미소가 드리웠으니.
“마법사가 가장 먼저 배우는 건 바로 마나를 다루는 방법입니다, 영주님.”
쿠웅!
제라드의 말은 공손했다.
그러나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제라드의 마나 코어에서 터져 나오는 방대한 마나의 기운은 타이온에게서 줄기줄기 흘러나오는 마나의 위압을 단숨에 짓눌러버렸다.
타이온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이었다. 그러자 제라드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아직도 제가 영주님의 뜻에 그저 순순히 따를 것처럼 보이시는지요?”
말투의 부드러움과는 달리 제라드의 마나는 아주 무거웠다.
타이온은 이런 기분은 난생처음 맛보았다.
바로 그때였다.
제라드의 온몸에서 쏟아져나오던 방대한 기운이 별안간 말끔하게 사라졌고, 그는 한발 뒤로 물러나서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밤이 늦었으니, 오늘은 그만 돌아가서 쉬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영주님.”
타이온은 제라드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 3공자가 돌아왔다2 > 끝
ⓒ 양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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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공자가 돌아왔다3 >
7
방에 돌아온 제라드의 얼굴은 별로 밝지 않았다.
‘어차피 한 번은 부딪쳤어야만 했어. 아버지께서는 내가 공작가에 돌아올 생각이 없다는 걸 명확히 아셔야만 한다. 이 정도로 내가 단호하게 선을 긋는다면 단념하실 수밖에 없을 거야.’
제라드는 산도르 마탑에 찾아온 케이틀란의 이야기를 듣고 줄곧 자신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그것 하나를 생각하였다.
바라드 자작의 행동, 그리고 이전 란스터 백작과의 반응을 상기해볼 때, 타이온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는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제라드가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더는 피하고 싶지도 않았다.
피하는 게 능사가 아님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라드는 이곳에 온 것이다. 자신이 더는 공작가의 사람이 아니며, 돌아올 생각이 없다는 것을 밝히기 위해서 말이다.
‘역시 너무 오래 머무는 건 좋지 않겠어. 괜히 쓸데 없는 소란이 일어날 테니 말이야.’
한편, 그 무렵 타이온도 아직 잠들지 않고 집무실의 의자에 앉아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겨 있었으니.
똑똑.
별안간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고개를 든 타이온.
문을 열고 집사가 들어왔다.
“밤이 늦었습니다, 영주님. 그만 쉬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음, 그래야지. 하지만 잠이 별로 오지 않는군.”
“3공자님과의 만남이 그토록 즐거우셨습니까?”
“왜 그렇게 생각하는가?”
“지금 몹시 즐거워 보이십니다.”
집사의 말에 타이온은 자신의 입가를 매만졌다.
몰랐다.
지금 타이온은 즐겁다는 듯이 웃고 있었다.
“후후. 정확히 보았어. 아주 즐거웠다네.”
타이온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대답했다.
아직도 바로 조금 전에 만났던 제라드의 눈빛이 눈에 선하였다. 오늘 타이온은 긴 회의가 끝나고 바라드 자작에게 제라드가 관저에 도착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타이온이 그를 부른 건 사실이다.
그러나 줄곧 긴가민가하였다.
수많은 학자들이 고개를 설레설레 젓던 그 제라드가 마법사가 되었다는 게 도무지 믿기 어려웠던 까닭이다.
그렇기에 제라드와 마주한 순간에 느꼈던 놀라움은 아주 컸다.
‘제라드가 홀로 당당히 일어섰다.’
제라드는 6년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훌쩍 큰 모습이었다. 키는 타이온과 거의 비슷하였고, 체구 역시 기사들의 그것에 비해서 거의 밀리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눈빛. 그 눈빛이 마음에 들었다.
긴 대화는 필요 없었다.
제라드는 달라졌다.
타이온은 그걸 확신했다.
그래서 말했다.
돌아오라고.
“헌데, 녀석이 단호한 태도로 거절하더군.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말이야. 재미있지 않나? 전엔 나를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움츠러들던 아이야. 그런데 그 아이가 내게 거절의 의사를 밝혀왔어.”
타이온은 흥분했다.
제라드가 놀랍기도 했고, 동시에 더 확인해보고 싶어졌다. 제라드의 안에 깃든 강함의 정체를 말이다.
그리고 그 일부를 볼 수 있었다.
자신의 마나에 즉각 대응하던 제라드에게서는 아주 익숙한 강자의 냄새가 났다.
“두 눈으로 보고도 도무지 믿기 어려운 얘기지. 안 그런가?”
“영주님께서는 진심으로 제라드 공자님을 가문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고 싶으신 모양이군요.”
“물론. 지금의 제라드에겐 그라우드의 이름을 짊어지기에 일말의 부족함이 없다.”
“지금 제라드 공자님의 반응으로는 쉬이 영주님의 그 뜻을 받아들일 것 같지는 않습니다.”
“아마도 그럴 테지. 하지만 나는 몇 번이고 녀석에게 손을 내뻗을 걸세. 그게 지난 6년, 제라드가 이룩한 것을 인정하고 나의 실수를 인정하는 유일한 일이니까.”
그랬다.
바로 이게 타이온의 방식이었다.
자신이 내린 6년 전의 결정.
그것을 지금에 이르러 뒤집어서, 제라드에게 손을 내미는 것. 타이온은 그것으로 지난날 자신과 공작가가 잘못된 선택을 하였다는 것을 인정하고, 제라드에게 간접적인 사과를 하려는 것이다.
“공자님께서 부디 그런 마음을 알아주셨으면 좋겠군요.”
8
공작가는 발칵 뒤집혔다.
“그게······ 무슨 말이야.”
이른 오전.
잠에서 깨어난 리안나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몸을 바르르 떨었다.
“제라드 공자님께서 돌아오셨다고······.”
짜악!
리안나는 대답하던 시녀의 뺨을 거칠게 후려쳤다. 고개가 홱돌아간 시녀는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익숙한 듯한 모습이다.
“죄송합니다, 부인.”
“추방된 가문의 오명을 공자라고 부르다니! 참으로 경망스러운 입이로구나. 그 바보 팔푼이는 이제 외부인이다.”
“명심하겠습니다.”
리안나는 화풀이를 하고도 화가 다 풀리지 않은 듯 아랫입술을 질겅질겅 깨물었다.
“영주님께서 기어이······.”
며칠 전부터 이상한 이야기가 돌기는 하였다. 제라드가 마법사가 되었다느니, 공작이 제라드를 다시 가문에 불러들인다느니 하는 이야기였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였다. 그런 가십거리는 끊임없이 나오는 곳이 바로 귀족가의 숙명이었으니까.
그러나 리안나는 곧 믿기 어려운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공작의 뜻을 이행하여 바라드 자작이 마탑으로 향하였다는 얘기를 들은 것이다.
‘6년이나 지난 지금 그 바보를 찾아서 뭘 어쩌겠다는 건지!’
리안나는 이 일을 두고 타이온을 찾아가 직접 따지기도 하였다. 하지만 아무리 말해도 통하지가 않았고, 타이온은 그녀와의 대화를 길게 이어가지 않았다.
‘설마, 그 녀석이 다시 돌아왔다고해서 후계자 구도를 흔들려는 건 아니겠지?’
“셀린, 지금 당장 알아봐라. 영주님께서 그 바보를 아침 식사에 불렀는지 말이야.”
“저, 그게······.”
시녀가 몹시 당황해하는 얼굴로 우물쭈물거리자 리안나의 얼굴은 하얗게 질렸다.
“설마, 영주님께서 아침 식사에 녀석을 불렀더냐?”
“네, 영주님께서 시녀장님을 직접 불러서 지시하셨습니다······.”
으드득.
리안나는 이를 갈았다.
아침 식사가 대체 어떤 자리란 말인가.
일반적으로 명망 높은 귀족 가문의 아침 식사는 상당히 중요한 정치적 상징성을 갖게 된다.
왜냐하면, 그 자리에는 가문의 핵심이라고 불리는 사람들만 참여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타이온은 그 자리에 제라드를 불렀다.
가문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겠다는 뜻이다.
“그렇게 놔둘 수는 없다······! 그 바보에게 이 일을 전달하는 시녀가 누구인지 알아내. 그리고 막앗!”
“하지만 영주님께서 지시하신 사항입니다. 이 일에 대한 책임이 부인께 전가되기라도 한다면······.”
“그건 네가 신경 쓸 일이 아니다. 일단 그 바보가 아침 식사에 오는 사태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막아야 한다. 만약 그놈이 식당에 찾아오기라도 한다면 그라우드 공작가의 사람들이 이 일을 모두 알게 될 것 아니야! 무슨 일이 있어도 막아!”
“그러면 해당 시녀는 어찌하시겠습니까?”
“문제가 생기지 않게 정리해버려.”
“알겠습니다.”
리안나의 눈은 독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이대로 흘러가는 상황을 가만히 두고 볼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 선택이 오히려 독이 되었음을 그녀가 어찌 알았을까. 그녀는 제라드가 마법사가 되어 돌아왔다는 것을 간과하고 있었다.
9
제라드는 명상에 잠겨 있었다.
‘오늘 이곳을 떠나겠노라고 말씀을 드려야겠어.’
지난밤, 타이온과의 만남 이후로 제라드는 그 결단에 다다랐다. 자신이 더는 공작가의 사람이 아니라고 밝혔으니, 이제 누구도 미련이 남지 않도록 이 영지에서 떠나는 것. 그게 지금 제라드가 해야 할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세핀이 많이 슬퍼하겠지만, 어쩔 수 없지. 여기는 내가 있을 곳이 아니니까 말이야. 아침 식사 시간이 끝난 후에 찾아뵙기로 하자.’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 때였다.
제라드의 미간이 별안간 움찔하였다.
조금 전, 그의 기감에 뭔가 거슬리는 게 포착되었기 때문이다.
눈을 뜬 제라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복도부터 회랑. 그리고 별관에 이르기까지.
제라드는 지금 자신의 발이 닿는 곳 곳곳에 자신의 마법망을 설치해둔 상황이었다.
그 말인즉슨, 자신의 영역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훤히 알 수 있다는 얘기였다.
제라드는 별관의 복도를 가로질러서 회랑의 옆길로 빠져나왔다. 그의 눈매는 어느새 무섭게 변해 있었다.
이곳은 인적이 드문 외곽으로 거의 다듬어지지 않은 나무가 우거져서 사람들이 돌아다니지 않는 길이었다.
그런데 얼마 가지 않아서 저편에서 인기척이 느껴지기 시작하였다.
제라드의 걸음은 더욱 빨라졌다.
우거진 나무를 지나쳤을 때, 제라드는 그곳에서 벌어진 상황을 두 눈으로 보게 되었다.
“지금 뭐하는 거지?”
“헉!”
느닷없이 들려온 목소리에 사내 둘은 기겁한 얼굴을 했다.
그들의 행색은 병사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틀림없는 공작가의 병사라는 얘기다. 그런데 그 둘이 하는 행동은 공작가의 병사로서 적합한 행동이 아니었다.
병사 둘은 커다란 포대 자루를 들고 옮기고 있었다.
그 안에 그 안에 사람이 들어있다는 것은 누가 봐도 명확했다. 포대가 거듭 꿈틀거리며 움직였기 때문이다. 간헐적으로 들리는 목소리는 입을 틀어막아 놓았는지, 새어나오는 것처럼 들렸다.
“······.”
두 명의 병사들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어쩔 줄 몰랐다.
분명히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서 시행한 일이었는데, 지금 이곳에 가장 봐서는 안 될 사람인 제라드가 눈앞에 있었던 것이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쿠웅.
“허으윽!”
“대답해. 지금 이게 무슨 짓이느냐고 물었다.”
제라드의 얼굴은 분노로 일그러져 있었다. 그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무시무시한 살기와 함께 무형의 마나가 두 사람을 집어삼키듯 휘감았다. 숨통을 쥐어짜는 듯한 힘 앞에 두 병사는 핏줄이 불거진 얼굴로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마나를 다루지 못하는 그들은 제라드의 힘 앞에 아무런 저항도 할 수가 없었다. 이대로라면 곧 그들은 숨이 막혀 죽고 말 터였다.
바로 그 순간, 제라드는 두 사람을 휘감고 있던 마나를 거두었다.
“허어어억!”
“켁켁!”
눈물과 콧물로 범벅된 얼굴로 숨을 몰아쉬는 병사 두 사람은 사색이 된 얼굴로 바닥에 엎드려서 빌기 시작하였다.
“제, 제발 살려주십시오, 나리······. 저, 저희는 그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입니다.”
“저 포대를 풀어라.”
제라드의 명령에 병사는 다급히 끈을 풀었다.
그러자 그 안에서 눈물과 땀에 범벅된 조세핀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녀는 겁에 질려서 발발 떨고 있었으니.
이미 짐작은 하고 있었으나, 그 모습을 실제로 본 순간 제라드는 그야말로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어 올랐다. 꽉 쥔 주먹에서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누구냐.”
“나, 나리······ 그, 그건······.”
병사가 말을 더듬거리는 순간, 제라드의 몸이 화르륵 불에 휘감겼다.
“허억!”
이 무시무시한 광경에 병사 두 사람은 뒤로 벌러덩 쓰러지고 말았다.
“누가 이런 짓을 시켰느냐고 물었다. 이게 마지막이다. 몸이 타들어 간다는 게 어떤 기분이 알고 싶으면 대답하지 않아도 좋아.”
“마, 말하겠습니다. 말하겠습니다!”
병사들에게 선택지는 없었다.
그들은 솔직하게 모든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제라드의 눈은 가늘게 변했다.
병사들이 아는 건 몇 가지 간단한 것뿐이었다. 지시한 사람과 지시사항은 있었지만, 이 일의 동기는 알 수 없었다. 그걸 알기 위해선 조세핀이 제라드를 찾아온 이유를 들어야만 했다.
“조세핀.”
제라드는 조세핀을 불렀지만, 그녀는 충격에 빠진 얼굴로 벌벌 떨고 있을 따름이었다.
두려웠을 것이다.
이런 일이 아침에 공작가에서 대놓고 일어났다는 것을 믿기 어려울 것이다.
제라드는 조세핀의 머리에 손을 얹고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괜찮아. 내가 여기에 있어.”
“고, 공자님······.”
“그래, 괜찮아. 그러니까 말해봐. 무슨 일로 이렇게 이른 아침부터 날 찾아온 거야?”
“저는······.”
조세핀은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그 대답을 듣는 순간, 제라드의 눈에 불똥이 튀었다.
이 기막힌 일을 꾸민 이가 누구인지는 너무나도 명확하였다.
“······되도록 조용히 사라져주고 싶었는데, 도저히 가만히 두지를 않는군.”
으드득.
제라드는 조세핀을 안아 들었다.
아침 식사 자리 따윈 관심도 없었다.
애초에 공작가의 일원이 되고 싶어서 돌아온 게 아니니까.
하지만 조금 전에 생각이 바뀌었다.
제라드는 지금 화가 단단히 났다.
상대가 그걸 원한다면 보여줄 수밖에.
마법사 제라드가 누구인지 말이다.
< 3공자가 돌아왔다3 > 끝
ⓒ 양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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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공자가 돌아왔다4 >
10
아침 식사의 시간.
리안나는 힐끗 타이온을 보았다.
그의 시선이 한 번씩 식당 입구로 향하는 게 보였다.
그때마다 그녀는 배알이 뒤틀렸다.
‘그깟 바보가 대체 뭐라고.’
리안나는 바보가 아니었다.
타이온이 어렸을 때부터 그녀의 자식 중에서 제라드를 유난히 아꼈다는 것쯤은 다 알고 있었다.
그놈의 천재성.
제라드가 그것을 보여준 그 순간부터 그녀의 장남 케인은 그냥 범재로 전락하고 말았다.
다행히 하늘이 도왔는지, 제라드의 천재성은 빛이 바랬다.
타이온도 더는 제라드에게 관심을 쏟진 않았지만, 리안나는 그게 표면적인 행동임을 알았다.
친모인 제인마저도 관심을 끊은 아이에게 타이온은 좀처럼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때부터 리안나는 정말로 제라드를 눈엣가시처럼 여겼다.
만약 저러다가 제라드의 천재성이 돌아오기라도 한다면······ 그때는 그녀가 악착같이 지켜왔던 모든 것이 한꺼번에 무너지고 말 게 분명했다.
‘그 녀석을 추방했을 때만 해도 모든 게 끝난 줄 알았건만! 왜 또 돌아온 거야. 어째서 또 우리의 눈앞에 나타났느냔 말이야!’
리안나의 눈이 분노와 증오로 일그러져있음은 분명했다.
타이온은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았으므로 알지 못했지만, 그 반대편에 있는 케인은 리안나의 상태를 바로 알아보았다.
‘제라드가 돌아왔다는 것 때문인가.’
지금 이 자리의 누구도 제라드에 관한 얘기를 꺼내지 않았지만,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3공자가 돌아왔다는 사실은 이미 공작가를 발칵 뒤집어 놓았기 때문이다.
케인도 자연히 생각이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십니까?’
평소의 아침 식사보다 훨씬 무거운 분위기가 이어지는 가운데, 음식 세팅이 모두 끝났다.
평소라면 타이온이 식기를 들면서 시작되었을 식사가 오늘은 계속 지연이 되고 있었다.
마침내 계속되던 침묵을 깬 것은 바로 리안나였다.
“식사는 언제 하실 참인가요?”
“기다리시오. 아직 오지 않은 사람이 있으니.”
꿈틀.
대놓고 말하는 타이온의 태도에 리안나의 눈썹이 휘었다.
“누굴 기다리는 거지요? 가문의 사람은 모두 모였습니다. 식사 시간을 더 미루는 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군요.”
“내가 누굴 기다리는지, 이 자리에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 같은데.”
타이온은 무거운 얼굴로 그렇게 말하며 좌중을 훑었다.
리안나, 케인, 테이란. 그리고 하석의 제인, 로메오까지.
그들이 타이온의 말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할 때였다.
끼이익.
별안간 식당의 문이 열렸다.
새어 들어오는 빛을 등지고 한 사람이 걸어왔다.
“제가 좀 늦었습니다.”
푸른색 로브를 걸친 180센티미터의 사내가 굵직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며 안으로 식당 내부로 저벅저벅 들어왔다.
상석의 타이온의 입가에 미소가 드리우는 가운데, 모두가 깜짝 놀란 얼굴을 하는 가운데, 리안나의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으로 파고드는 와중에도 그녀는 고통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셀린!’
리안나가 힐끗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곁에서 시중을 들던 여인의 낯빛이 창백해졌다. 하지만 그녀는 억울했다.
왜냐하면, 지시사항을 그대로 수행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째서 지금 여기에 이 녀석이 있느냔 말이야!’
그러나 그건 셀린도 알지 못하는 일이었다.
그러는 사이, 제라드는 좌중의 시선을 한몸에 받으며, 한 사람 한 사람을 눈에 담았다.
“제가 앉을 자리는 어디인지요.”
“어디에 앉고 싶더냐.”
타이온이 즐거운 듯 웃으며 물었다.
그러자 제라드의 입가에 도발적인 미소가 드리웠다.
“원하는 자리는 어디든 내어주실 수 있으십니까?”
“네가 감히······!”
리안나가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벌게진 얼굴로 제라드를 노려보았다.
“삼가지 못하겠느냐? 네 주제를 알아야 할 것이야.”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만, 내 주제는 제가 더 잘 압니다, 공작부인.”
“뭐, 뭐라고? 너 따위가······!”
“그만.”
타이온이 리안나의 말을 제지하였다.
잠깐의 소동 속에서도 그는 여전히 유쾌한 얼굴이었다.
“제라드, 아무 곳에나 앉아라. 지금은 네 자리를 논하기엔 너무 이른 것 같구나.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이지. 그리고 준비가 되었는지 검증도 필요한 일이고.”
“아니요. 제게 이곳에 앉아야 할 자리가 있다면 그건 아무 곳일 수가 없겠지요. 영주님께서도 이미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제라드는 그렇게 대답하더니,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그 순간, 바람과 함께 비어있던 자리의 의자가 하늘 위로 둥실 떠올랐다.
모두가 깜짝 놀라는 가운데, 제라드는 의자를 허공에 떠올린 채로 상석의 타이온의 옆자리에 서서 의자를 내려놓았다.
“제가 그라우드 공작가에 이름을 둬야 한다면, 있어야 할 자리는 바로 여깁니다.”
11
······.
침묵이 흘렀다.
제라드가 의자를 놓은 장소.
그곳은 타이온의 바로 옆자리였다.
그 말인즉슨.
“영주의 자리를 원한다는 것이냐?”
“그 정도의 자리도 없다면 제가 가문에 돌아올 이유가 있겠습니까?”
“하하핫!
타이온이 무서운 표정을 짓다가 이내 웃음을 크게 터뜨렸다. 그의 눈빛은 무겁게 빛나고 있었다.
“과감한 발언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구나. 정녕 겁이 없는 것이냐?”
“제가 이 가문에 돌아온다는 건 그 정도의 의미라는 겁니다. 어느 쪽이든 피가 흐르게 될 것이고, 그러면 저는 양보하지 않습니다. 피가 흘러야만 한다면 제 앞길을 막는 자들의 피만 흐르게 될 겁니다.”
오싹.
좌중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제라드의 냉기 어린 목소리에 담긴 살기. 그것은 그냥 어쭙잖게 하는 헛소리 같은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느새 타이온의 입가에서도 웃음이 사라졌다.
“진심으로 하는 소리더냐.”
“진심입니다. 영주님께서도 알고 계셨을 텐데요. 제가 돌아온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말입니다.”
“으음······.”
타이온은 낮게 신음했다.
그는 지금껏 외면해왔던 것이다.
제라드를 받아들이고, 그에게 기회를 준다는 것.
그것은 다시 말하면 공작가를 둘로 나누고, 종래에는 상잔의 비극을 초래하게 된다는 것을 말이다.
“저는 제 적에게 자비를 베풀 정도로 그리 만만한 마법사가 아닙니다. 단 하나도 남김없이 모조리 이 세상에서 없애버릴 작정입니다.”
제라드는 그렇게 말하며 리안나를 똑바로 보았다.
오싹.
리안나는 그만 몸이 굳어버리고 말았다.
제라드의 푸른 눈동자. 그 안에 깃든 분노어린 살의를 엿보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두려움.
지금 이 순간, 두려움이 그녀의 머릿속에 새겨졌다.
그녀는 미처 알지 못했던 것이다. 지금 그녀가 적대시하는 존재가 과거의 바보 3공자 제라드가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당신이 무엇을 지시했는지, 나는 다 알고 있습니다.
제라드의 눈은 흡사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제라드!”
고함을 지르며 벌떡 일어나는 케인.
6년이 지나면서 얼굴선이 굵어지면서 진중한 분위기를 풍기게 된 그는 무거운 얼굴로 제라드를 노려보고 있었다. 리안나에게 그 이상의 위협은 용납지 않겠노라고 말하는 듯한 눈빛.
그러나 제라드의 눈빛은 변함이 없었다.
그 순간, 제라드의 몸에서 불꽃이 터져 나왔다.
화르르륵.
채앵!
불꽃에 휘감기는 그의 모습에 문밖의 기사들이 칼을 뽑아드는 와중에도 제라드의 기세는 변함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그의 살기는 더욱 무섭게 좌중을 휘감았다.
오싹한 살기의 폭풍.
진심이다.
필요하다면 누구든 불태워버리겠노라고 말하는 듯한 그 기세 앞에 좌중은 숨이 턱턱 막히는 듯했다.
“그만! 거기까지다. 제라드, 식사가 만족스럽지 않다면 그만 물러가도 좋다!”
“······알겠습니다. 언제든 다시 불러 주십시오. 제가 앉게 될 자리가 생기게 되면 말입니다.”
그 순간, 불꽃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제라드는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다시 날아오른 의자는 원래 있던 자리에 다시 놓였다.
장내를 충격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제라드는 고개 한 번 돌리지 않고 식당을 빠져나갔다.
폭풍이 지나간 식당.
리안나는 파랗게 하얗게 질린 얼굴로 몸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죽음의 공포. 그녀는 정말로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느꼈다.
12
“미안해, 조세핀.”
제라드는 별관으로 돌아와서 여전히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조세핀을 보면서 그렇게 말했다.
“왜 공자님이 사과하세요. 공자님은 절 구해주셨는데······.”
“아니, 내 잘못이야. 그 잠깐 사이에 공작가와 관련된 문제로 네가 이런 식으로 위험에 빠질 줄은 정말 생각하지 못했어.”
“공자님······.”
분노로 얼룩진 제라드의 얼굴.
‘고작 그 대단치도 않은 공작가의 권력 때문에 사람을 이런 식으로 대하다니!’
부족했다.
별안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이라도 다시 그 식당에 가서 모든 걸 다 뒤엎어버리고 싶었다. 마법사 제라드의 분노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똑똑히 각인시켜놓고 싶었다.
바로 그때였다.
“그러지 마세요.”
제라드는 고개를 돌렸다.
불끈 주먹을 쥔 제라드의 손을 부드럽게 잡는 조세핀.
“그런 모습······ 공자님하곤 안 어울려요. 그러니까 그러지 마세요. 전 괜찮잖아요. 공자님, 웃어요, 네? 이렇게요. 히히.”
우스꽝스러운 조세핀의 얼굴을 보며 제라드는 그제야 겨우 살짝 미소 지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조세핀, 내가 이곳에 오래 있어봐야 좋을 게 없을 것 같아.”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완전히 돌아오신 거 아니었나요?”
“아니, 그럴 순 없어. 이곳은 내가 있을 곳이 아니야. 내가 이곳에 있으면 모든 게 무너지게 될 거야. 거기다가 나 역시 이곳에 돌아오고 싶은 생각이 없어.”
“공자님······.”
조세핀은 슬픈 표정을 지었다.
그 얘기는 또 그들이 헤어져야 한다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저, 저도 데려가시면 안 돼요?”
“뭐?”
생각지도 못한 말에 제라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조세핀은 아랑곳하지 않고 당돌한 얼굴로 말을 이어갔다.
“저도 공자님이랑 같이 가고 싶어요. 안 돼요? 제가 곁에 있으면 공자님도 더 잘 챙겨드릴 수 있어요.”
“조세핀, 그건 안 될 말이야. 나는 마법사고, 마탑은 마법사가 살아가는 곳이야. 그곳에 조세핀이 있는 건 말이 안 돼.”
“······그, 그러면 저도 마법사로 만들어주세요!”
제라드가 난감한 표정을 짓자, 조세핀도 그제야 자기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했는지 알고 몹시 허둥댔다.
“죄, 죄송해요. 저, 저 같은 게 어떻게 마법사가······. 그, 그냥 홧김에 한 소리예요! 잊어주세요.”
“······.”
제라드는 축 처진 조세핀의 모습을 보면서 머리를 쓰다듬고 밖으로 나왔다.
“마법사인가······.”
그러고 보니, 제라드도 언젠가 때가 되면 제자를 받아들이는 날이 오긴 할 터였다. 하지만 지금까진 그런 생각을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근데 내가 누군가를 인도해줄 수는 있을까?’
제라드는 남들과 다르다. 남들보다 훨씬 더 빠른 속도로 마법을 익혀왔고,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남들보다 훨씬 더 빼어나다는 것과 좋은 스승은 또 다른 얘기였다.
‘아직 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
제라드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회랑으로 노집사가 다가오는 게 보였다.
그는 제라드와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고개를 깊이 숙였다.
“접견실에서 영주님께서 뵙기를 원하십니다.”
“좋습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제라드는 아마도 이번이 타이온과의 마지막 대면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똑똑.
“들어와라.”
안에서 목소리가 들리자, 제라드는 안으로 들어갔다. 노집사는 안내를 마치고 물러갔으니, 집무실에는 타이온과 제라드만이 있었다.
“앉아라.”
제라드는 타이온이 권하는 자리에 앉았다.
곧 타이온도 그 앞에 앉았다.
“너는 강인하게 자랐구나, 제라드.”
“6년은 아이가 어른으로 성장하기에 충분한 시간입니다.”
“그래, 너의 모습을 보니 그걸 잘 알겠다.”
늘 패기 넘치던 타이온. 6년이라는 시간도 그를 바꾸진 못한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는 갑자기 몇 년은 더 늙은 것처럼 보였다.
한참의 침묵이 흐르고, 타이온이 낮은 목소리로 입술을 뗐다.
“······제라드, 나는 너를 공작가로 다시 부르는 것이 곧 널 위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게 나의 잘못이자, 공작가의 실수를 인정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타이온의 목소리는 근엄하지도 딱딱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식당에서 네 말을 듣게 된 순간, 그게 너를 위한 일이 아님을 알았다. 그건 내 욕심이었다. 변한 너를 다시 공작가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고, 나의 실수를 없는 일로 만드는 것. 그게 바로 내가 하려고 했던 일이었다. 어떻게 포장한다고 해도 그 본질은 바뀌지 않았던 것이다.”
“······.”
제라드는 속으로 적잖이 놀란 상태였다.
설마, 타이온이 이런 말을 해올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이곳에서 제라드가 타이온과 나눌 대화는 훨씬 더 험악한 것인 줄로만 알았는데······.
“제라드, 너를 공작가에 받아들이지 않겠다. 공작가에 돌아오라고 했던 권유도 거둘 참이다. 그래도 괜찮겠느냐?”
“네, 얼마든지요. 그거면 된 겁니다.”
제라드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어느새 그의 표정은 부드럽게 풀려 있었다.
“······그러면 이제 떠날 참이더냐?”
“예, 가야겠지요. 마법사 제라드가 있어야 할 곳은 이곳이 아니니까요.”
“으음······. 오후에 연회가 있을 예정이다. 아, 걱정할 것 없다. 널 위한 연회는 아니니까. 다만, 그 연회에 잠깐 얼굴을 비추고 가는 게 어떻겠느냐. 너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것은 비단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글쎄요. 저를 반길 사람이 있을는지 모르겠군요.”
우회적인 거절이었다.
타이온은 더 권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제라드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타이온은 별안간 오른손을 내밀었다.
어제는 그 손에 담긴 의미 때문에 잡을 수 없었다.
그러나 오늘은 아니었다.
제라드는 그의 손을 마주 잡았다.
“혹시라도 어떤 죄책감 같은 걸 느끼신다면 그럴 필요 없습니다. 6년 전에도 제가 택한 일이었고, 지금의 이 결과 역시 제가 택한 거니까요.”
타이온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식당에서 보여주었던 무시무시한 제라드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반쯤은 연출이었겠지만, 그렇게 된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하겠다는 진심도 느껴졌었지. 참으로 대단한 모습이었어. 나마저도 그 스산한 살기에 간담이 다 서늘했을 지경이니 말이야.’
그러던 중, 별안간 타이온의 얼굴이 굳었다.
‘잠깐······ 6년 전에 자신이 택했다고?’
타이온의 얼굴이 이상하게 변했다.
왜냐하면, 그건 말이 안 되기 때문이다.
6년 전, 제라드가 가문에서 쫓겨났던 것은 제라드의 선택이 아니었다.
그런데 제라드는 그것을 자신의 선택이라고 했다.
‘설마, 의도적으로 바보가 되었던 것인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든 순간이었다.
타이온은 6년 전, 한 번씩 제라드에게서 어떤 위화감을 느꼈던 순간들을 떠올렸다.
오싹.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바보······ 행세를 하였던 것이냐?”
타이온은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그리고 보았다.
제라드의 눈가가 꿈틀 떨리는 것을 말이다.
< 3공자가 돌아왔다4 > 끝
ⓒ 양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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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공자가 돌아왔다5 >
13
타이온의 눈매가 파르르 떨렸다.
제라드의 반응.
그것이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6년 전의 선택.
그리고 바로 오늘의 선택.
그 모든 것이 바로 제라드의 의지였다는 것이다.
“어째서냐······ 대체 어째서 자신을 숨겼느냐? 왜 그런 짓을 하였느냔 말이다. 네가 그런 짓을 하지 않았더라면 너는 모두의 인정을 받으며 공작가에 계속 남아 있었을 것이다!”
“······.”
제라드는 타이온의 반응에 이제 숨길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일부러 알릴 생각은 아니었는데, 무의식중에 말이 헛나오고 말았고, 타이온은 그 말을 놓치지 않았다.
“예, 그 말씀대로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저는 아마도 계속 이곳에 남아있었겠지요.”
“그러니까 어째서 그런 짓을 하였느냐!”
“그 답을 이미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 순간, 타이온은 말문이 턱 막히고 말았다.
6년 전과 바로 오늘.
그 해답은 늘 똑같은 곳에 있었던 것이다.
“그, 그걸······ 대체 언제부터 생각하였느냐? 네가 바보라고 불렸던 것은 불과 4살, 5살 때의 이야기다. 설마, 그때부터란 말이냐?”
“그때는 조금 더 단순했습니다. 그냥 모두가 좋은 게 좋다고 생각했던 것뿐이에요. 그때는 저 역시 어렸으니까요. 하지만 조금씩 해가 지나면서 알게 됐습니다. 제가 바보를 그만두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되는지 말입니다.”
“······.”
침묵.
타이온은 눈앞이 아찔해지는 것 같았다.
지금 이 순간, 제라드가 마법사가 되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보다 더 큰 충격이 그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나는, 나는 진정 두 눈을 뜬 장님이었단 말인가······.’
생각해보면 이상한 위화감을 느꼈던 순간은 분명히 여러 번 있었다. 그런데 단 한 번도 제라드가 바보를 연기하고 있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럴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제라드가 말하고 있었다.
‘······모든 것은 가문의 분열을 막기 위함이었단 말인가!’
타이온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천재성.
제라드의 천재성은 사람들을 모았다. 타이온 역시 그 빛에 자연스럽게 끌려갔던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 상황은 분명히 가문의 분열을 초래하게 될 분기점이었다.
타이온마저 긴 시간이 흐른 지금에 와서도 일을 바로잡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장자계승의 원칙의 앞에 가문이 두 개로 쪼개지더라도 그렇게 하고 싶다는 강렬한 충동이 들었다.
그런 상황이 지금까지 이어졌더라면 가문이 지금쯤 어떻게 되었을는지······.
그걸 알아본 제라드는 스스로 물러난 것이다.
앞으로 일어날 상황을 원하지 않았기에.
“너는 그걸로······ 그걸로 진정 괜찮은 것이더냐?”
“그런 표정을 지으실 것 없습니다. 저는 제가 희생 같은 걸 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저 다른 길을 향해 나아간 것뿐입니다. 이 길 위에서 저는 더없이 자유롭습니다.”
“자유, 자유인가······.”
타이온은 그 말을 몇 번이고 되뇌었다.
모든 사실을 알게 된 지금, 그는 마음이 너무나도 복잡하였다. 만약 제라드의 결단이 확고하지 않았더라면, 타이온은 대체 어떤 선택을 하였을지······.
“제라드, 너는 역시 공작가의 사람이다. 나는 역시 네 이름을 공작가에 올려두고 싶구나. 하지만······ 그건 네가 원하는 바가 아닐 테지. 여지를 남겨두고 싶지 않은 것일 테니까.”
제라드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결단을 딱히 누군가가 알아주길 바랐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혈육, 그것도 생부인 타이온이 자신의 마음을 헤아려준다는 것을 안 지금, 제라드는 충분한 위로를 받았다.
그거면 충분했다.
“떠나기 전에 한 가지만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무엇이든 말하거라! 내 무엇이든 들어줄 것이다.”
타이온의 대답에 제라드는 조심스럽게 아침 식사 초청과 얽힌 일을 전하였다. 조세핀이 납치를 당할 뻔하였다는 사실까지.
타이온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제라드는 누가 그랬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타이온은 누가 그런 짓을 하였는지, 손쉽게 짐작하였다.
“조세핀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줄곧 소중하게 생각해온 사람입니다. 그녀에게 만약 또 그와 같은 일이 일어나서 무슨 일이 생기기라도 한다면 그때는······.”
제라드는 말을 끝까지 잇지 않았다.
그러나 타이온은 그 눈동자에 깃드는 단호함을 읽었다.
조세핀에게 무슨 일이 생기게 된다면, 그때 공작가는 재앙을 맞이하게 되리라.
14
제라드는 별관으로 돌아와서 공작가를 떠날 채비를 하였다. 애초에 짐이랄 것도 별로 없었으므로, 준비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조세핀은 울상이었다.
“조금 더 오래 계실 줄 알았어요······. 대단하신 분이 되어서 돌아오셨으니까, 환영 연회도 하고······ 이제 다른 곳에 가실 필요도 없는데······.”
“영원히 헤어지는 건 아니잖아. 우리가 언젠가 또 만나게 되는 건 당연한 거야.”
“이번엔 또 얼마나 후에 뵈는데요? 또 그렇게 긴 시간이 지난 후에 만나는 건 아니죠?”
“······.”
제라드는 입을 다물었다.
구체적으로 언제라고 콕 집어서 말할 수는 없었다.
다만, 제라드가 공작가에 가까운 시일 내에 돌아올 일은 없다는 것은 분명하였다.
“또······ 엄청나게 오래 걸리는 거죠?”
“잘 모르겠어. 하지만 아마도 그렇지 않을까.”
“너무하세요······.”
조세핀은 금방 눈물이라도 뚝뚝 흘릴 것 같은 모습이었다.
제라드는 난감한 얼굴로 조세핀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을 뿐이었다. 이별의 순간은 매번 참 어렵기만 하다.
그때였다.
제라드는 고개를 돌렸다.
회랑으로 누군가가 다가오는 게 포착되었기 때문이다.
다른 시녀도 아니고, 타이온의 느낌도 아니었다.
‘별관에 찾아온다는 건 나를 만나기 위해 온다는 얘긴데.’
제라드는 자신을 찾아온 사람을 맞이하기 위해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회랑의 저편에서 걸어오는 한 사람의 얼굴이 보였다.
그는 케인이었다.
공작의 후계자이자, 타이온의 장남.
“이야기를 좀 나눠야겠지, 제라드.”
두 사람은 정원에 나왔다.
“이렇게 너와 함께 여기 있는 건 정말로 오랜만이로구나. 네가 이곳을 떠났을 때, 다시는 이런 식으로 함께 있을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그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은 침묵하였다. 긴 시간이 흘러서 만난 두 사람의 재회는 그리 반갑지 않은 것이었다.
“······말을 돌리는 건 여기까지 하자. 내가 널 찾아온 이유가 뭔지는 너도 잘 알 거다. 단도직입적으로 묻자. 후계자의 자리가 탐이 나는 것이냐?”
“탐이 난다. 그렇게 말하면 양보하실 참이십니까?”
“내가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보이더냐? 나는 공작가의 원칙에 따라서 후계자의 자리를 사수할 것이다. 내가 지켜야 할 것은 한둘이 아니야.”
케인의 눈매가 매섭게 변하였다.
그 눈빛은 무겁고 날카로웠다.
절대로 물러나지 않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제라드가 6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면서 단단해진 것처럼 케인 역시 단단해졌다는 게 느껴졌다.
“그렇군요. 그거면 된 거겠지요. 공작가를 잘 지켜주세요.”
제라드는 할 말은 그거뿐이라는 듯이 고개를 돌렸다.
케인은 어안이 벙벙한 얼굴을 했다.
아침 식사 때만 해도 그의 자리를 빼앗을 것처럼 굴던 제라드가 지금은 너무나도 간단히 물러나는 게 아닌가.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군.’
한편, 케인을 뒤로 하고서 회랑으로 나온 제라드의 뒤로 바로 조세핀이 따라붙었다.
그녀는 재잘재잘 많은 이야기를 떠들어댔고, 제라드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한 번씩 킥킥 웃었다.
‘오길 잘했어.’
제라드는 그런 생각을 했다.
정리하지 못했던 것들을 모두 말끔하게 정리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제 가벼운 발걸음으로 공작가를 떠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준비된 마차로 향하는 제라드.
긴 복도를 지나서 바깥 회랑으로 나오자, 머잖아 저편에 여러 대의 마차가 있는 모습들이 보였다.
‘마차가 상당히 많은걸.’
마차 겉면에 붙어 있는 가문의 상징 문양을 보아하니, 여러 유명한 가문들이 찾아와있는 모양이었다. 아마도 타이온이 말했던 그 연회 때문일 터였다.
‘더 소란스러워지기 전에 떠나자.’
제라드가 그렇게 발걸음을 옮기다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공자님, 왜 그러세요?”
조세핀이 의아한 듯 물었지만, 제라드는 답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저편에 마차에서 나와서 걸어가는 한 사람의 등에 꽂혀 있었다.
‘저게······ 대체 뭐지?’
15
해가 저물었다.
곧 연회가 시작되었다.
공작가의 친목을 다지기 위해서 주기적으로 주최되는 연회였다. 이 자리에는 공작가의 5대 봉신 가문의 주인들과 원로들이 모두 참석하였고, 외부 초청 인사도 몇 명 있었다.
친목을 다지기 위한 모임.
그러나 오늘 연회의 목적에는 단순히 그것만 있는 게 아니었다.
지금 이곳 연회장에는 공작가 내부의 친목이라고 하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인사 한 명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가르시아 아덴바움.
공작령 서쪽에 있는 아덴바움 가문의 일족인 그는 일찍이 후계자로 지목된 인물이었다.
현재, 아덴바움 후작가에서는 크고 작은 분쟁이 끊이질 않고 있었는데, 그런 시기에 후계자인 가르시아가 이곳에 있다는 것은 지극히 정치적인 이유가 다분하였다.
타이온은 가르시아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사전에 회의가 있었으므로, 오늘 그와의 얘기는 그저 확인절차에 불과하였다.
그러던 때였다.
타이온은 무심코 고개를 돌리다가 연회장 외곽에서 생각지도 못한 얼굴을 보았다.
제라드.
그곳에 정장을 차려입은 제라드가 서 있었다.
‘아니, 제라드가 여기에 왜?’
타이온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분명히 연회에 참석하지 않고 떠나겠다고 했던 제라드였다.
그런데 지금 그는 분명히 저곳에 있었다.
“공작 각하, 무슨 문제가 있는지요?”
“아, 아니오. 아무런 문제도 없소. 헌데 내가 잠깐 급한 일이 생각났는데, 자리를 좀 비워도 괜찮겠소, 아덴바움 백작?”
“물론입니다. 다녀오십시오.”
가르시아의 대답을 들으며 타이온은 인파를 빠져나왔다. 그에게 여러 사람이 다가와서 인사를 해왔다.
그러나 타이온은 사람들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면서 연회장의 외곽의 발코니로 향하였다.
제라드는 발코니에서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느새 밖은 어둑어둑하게 물들어 있었다.
“잘 생각했다. 생각을 바꾼 모양이로구나. 분명히 제인도 너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할 것이다. 네 친동생인 로메오와도 다시 한 번 정도는 이야기를 나눠야 할 터.”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닙니다. 떠나던 중에 이상한 걸 봤습니다.”
“이상한 거라니. 무엇을 보았단 말이냐.”
“조금 전에 영주님과 말씀을 나누던 분은 누구십니까?”
“조금 전의 그 사람이라면 아덴바움 백작이다. 당대 아덴바움 후작령의 후계자가 바로 그다.”
“아덴바움 후작령의 후계자······.”
제라드는 그렇게 되뇌며, 그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그는 지금 이 순간에도 다른 사람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느냐?”
“그가 혹 마법사들과 척을 지기라도 하였습니까?”
제라드의 물음에 타이온이 눈매가 꿈틀하였다.
‘역시 마법사와 어떤 관련이 있는 모양이군.’
“그렇게 생각한 연유가 무엇이냐.”
타이온의 물음에 제라드는 대답했다.
“지금 저분의 몸 안에서 마법이 느껴집니다. 주기적으로 꽤 긴 시간 동안 마법의 기운이 체내에 쌓인 것 같습니다. 이미 위험한 수준이에요. 저 정도라면 언제 어떻게 되어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정확히 어떻게 된다는 말이냐?”
“몸이 펑하고 터질 수 있다는 겁니다. 마른 장작더미 위에 불을 떨어뜨리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언제든 불을 든 자의 뜻대로 불을 일으킬 수 있다는 거지요.”
“······.”
제라드의 대답에 타이온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만약 아덴바움 후작가의 후계자인 그가 이곳에서 그런 식으로 죽기라도 하게 된다면 그 책임은 고스란히 그라우드 공작가가 뒤집어쓰게 될 게 뻔했기 때문이다.
“······확실하더냐?”
“확실합니다.”
“으으음······. 그렇다면 당장 연회를 파하고, 그를 후작가로 돌려보내야겠구나.”
“그건 별로 좋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이미 마법의 충분조건은 충분히 갖춰져 있습니다. 그렇게 섣불리 움직이면 오히려 일을 앞당기게 될 수도 있습니다.”
“······.”
타이온은 침묵했다.
외통수.
피할 수 없는 상황에 봉착했다.
앞으로도 뒤로도 나아갈 수가 없는 상황이라는 얘기다.
‘이를 어찌한단 말인가.’
타이온이 그렇게 생각에 잠겨 있을 때였다.
“이 일을 마탑에 의뢰하시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크루드 마탑은 그라우드 공작과 밀접한 관계에 있습니다. 더군다나 마법사가 정치적인 상황에 직접 개입되어 있다면 마탑에서도 바로 나설 겁니다.”
“네 말이 옳다. 하지만 지금 의뢰해도 그들이 이 상황을 타개할 수는 없다. 마탑에서 여기까지 아무리 빨리 온다고 해도 꼬박 며칠은······.”
타이온은 그렇게 대답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있었다.
한 명.
지금 이곳에 마법사 한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제라드 란스터.
크루드 마탑의 마법사가 말이다.
“의뢰하시겠습니까?”
제라드의 물음에 타이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크루드 마탑의 1급 마법사, 제라드 란스터가 그라우드 공작 각하의 의뢰를 받겠습니다.”
< 3공자가 돌아왔다5 > 끝
ⓒ 양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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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공자가 돌아왔다6 >
16
‘상당히 악의적인 마법이로군.’
제라드는 타이온에게 그저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그러나 실상은 그보다 훨씬 좋지 않았다.
제라드의 눈에는 가득 찬 기름이 찰랑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아주 작은 불꽃이라도 그의 내부에 찬 마법을 자극한다면 그 순간, 가르시아의 육신은 조각조각으로 찢기게 될 것이다.
공작가를 떠나려고 마음먹었던 제라드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건 바로 그 마법의 사악한 의도 때문이었다.
‘흑마법은 아니야. 하지만 의도가 너무 좋지 않군.’
제라드의 시선이 바쁘게 움직였다. 저 마법의 근원지를 찾아내려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도 당장 눈에 보이거나 느껴지는 마법의 흔적은 없었다.
‘갈무리가 거의 완벽해. 자신의 정체를 아주 완벽하게 감추고 있다고 봐야겠어. 어쩔 수 없지. 내가 직접 접촉하는 게 좋겠어.’
“영주님, 저를 저분께 소개해주시겠습니까?”
“소개라니?”
“제가 직접 저분과 접촉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야 적의 실체를 더 확실하게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소개하는 건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널 누구라고 소개하는가, 그것이 중요한 일이 아니겠느냐.”
“그 문제는 이미 정리한 부분이 아니었나요? 저는 제라드 란스터입니다.”
혹시나 싶었던 타이온은 그 대답에 실망한 표정을 지었으나,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무슨 말인지는 잘 알겠다.”
타이온은 발코니에서 나와서 연회장 중심으로 향하였다. 제라드 역시 그 뒤를 따랐다.
그가 다시 연회장 중심으로 나아가자, 사람들의 시선은 자연히 그에게 쏟아졌다. 그리고 그의 옆에 있는 한 젊은이에게도 함께 눈이 돌아갔다.
“저 사람은 누구지?”
“영주님을 많이 닮았는걸······.”
제라드가 돌아왔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공작가의 가신들은 타이온과 제라드의 모습을 번갈아 보면서 의아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였다.
두 사람은 부자지간이 아니라면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로 닮아있었다. 위풍당당한 발걸음과 태도도 그러하였고, 머리칼부터 이목구비까지 빼닮은 데가 많았다.
그 두 사람이 걸어오자, 한창 이야기를 나누던 가르시아와 그 주변의 귀족들도 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렸다.
케인은 타이온의 옆에서 걸어오는 제라드의 모습을 보고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말았다.
‘아버지께서 기어이 제라드를 사람들의 앞에서 소개하시려고 한단 말인가!’
케인은 사람들의 틈에서 다급히 튀어나와서 타이온의 앞을 가로막았다.
“영주님, 지금 하시고자 하는 일을 부디 재고해주십시오. 지금 이 자리에서는 그건 하셔서는 안 될 일입니다.”
“뭐라?”
케인의 이 당돌한 행동에 타이온의 눈빛에 노기가 드리우는 가운데, 좌중의 시선이 이곳에 쏠렸다.
무슨 상황인지는 몰라도 케인이 타이온에게 맞서는 행동을 보인 것이다.
이 와중에 제라드는 가르시아와 그 주변 사람들의 행동을 날카롭게 살피고 있었다.
‘불을 든 자의 목적이 가문과 가문의 사이에 정치적 분쟁을 일으키는 것에 있다면 지금까지 상황을 질질 끌 이유는 없다. 그런데도 아직 일을 벌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목적은······.’
제라드의 시선은 타이온과 케인에게 닿았다.
‘이 두 사람까지 함께 노리고 있는 거다.’
한자리에 모인 세 사람이 그대로 폭사하게 된다면 사태는 심각해진다.
아덴바움과 그라우드 사이에 정치적 분쟁이 생기는 것은 물론이요, 그라우드 가문은 수장과 후계자를 잃는 수렁에 빠지게 된다.
그러는 사이에도 케인은 절대로 물러날 수 없다는 얼굴로 타이온의 앞에 서 있었다. 아무래도 단단히 착각한 모양이었다.
‘내가 나서서 상황을 정리해야겠군.’
타이온의 화가 점점 머리끝까지 치솟을 그 찰나, 제라가 먼저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이렇게 만나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케인 그라우드 백작님. 저는 제라드 란스터라고 합니다.”
“······.”
그 말에 케인이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였다.
제라드가 자신의 이름에 란스터의 이름을 붙였기 때문이다. 그 얘기인즉슨, 지금 그는 이곳에 그라우드 공작가의 일원으로 온 게 아님을 뜻했다.
“쯔쯧.”
타이온은 실망스러운 얼굴로 혀를 찼다.
케인은 벌게진 얼굴을 하고서 헛기침을 하며 물러났다.
제라드가 그라우드 공작가에 돌아왔노라고 공표하는 게 아니었다. 모든 건 그의 착각이었던 셈이다.
대부분 사람이 조금 전의 그 긴장된 분위기가 무엇이었지 잘 알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하였다.
바로 그때, 가르시아가 이 분위기를 풀기 위해서 밝은 목소리로 타이온에게 다가왔다.
“공작 각하, 오셨군요. 급한 일은 잘 해결되었는지요.”
“물론이오. 그 일이라면 걱정하지 마시오. 그보다 내가 한 사람을 경께 소개하고 싶소. 내가 많이 아끼는 사람이오.”
“그렇습니까? 공작 각하께서 아끼는 사람이라니, 영광이로군요. 이 청년입니까? 나는 가르시아 아덴바움이오. 만나서 반갑소.”
“저는 제라드 란스터입니다. 만나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제라드는 공손한 태도로 예의를 갖추었다.
그 모습이 얼마나 완벽하였는지, 타이온이 놀랐을 정도였다. 그동안 마탑에 있으면서 귀족의 예절을 익힐 새도 없었을 터인데······.
타이온은 매번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는 제라드를 보고 있자니, 자꾸만 욕심이 샘솟는 걸 참기 어려웠다.
“음, 란스터라······. 조금 전에 내가 잘못들은 게 아니었군. 란스터 백작가는 우리 가문과도 연이 적지 않지.”
가르시아는 제라드가 란스터 가문의 사람이라는 걸 알자마자 편하게 대하며 손을 내밀었다. 란스터 가문이면 아덴바움 가문의 사람에게는 거의 가신 가문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제라드는 여전히 공손한 태도로 그의 손을 맞잡았다.
‘이제 시작해볼까.’
가르시아의 손을 맞잡은 순간, 제라드의 눈에 빛이 스쳤다.
17
“어, 어머니······ 저기 그 마법사님이에요!”
로메오가 겁먹은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그랬다.
지금 이 연회장에는 당연하게도 제인과 로메오도 있었다.
제인은 로메오가 그곳을 가리키기도 전에 제라드가 나타났던 그 순간부터 그의 뒷모습을 쫓고 있었다.
육체 단련을 거듭해오면서 검술의 달인이 된 타이온에 비해도 전혀 밀리지 않는 단단한 체구는 정장을 걸친 순간, 훤칠하게 드러났다.
타이온을 빼닮은 듯한 선명한 이목구비에 준수한 외모.
어린 시절의 모습은 많이 남아 있었지만, 이제 한 사람의 성인으로서 모자람이 없는 모습이다.
‘제라드······.’
그녀는 복잡한 얼굴이었다.
어린 시절, 제라드가 천재성을 드러냈을 때, 그녀는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욕심을 서서히 키웠다.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기대는 배신당했다.
천재는 하루아침에 바보가 되었다.
제인의 마음속에서 서서히 부풀어가던 꿈은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되었다. 그때부터였다. 리안나는 제라드가 미워졌다. 부질없는 꿈을 꾸게 한 자식이 미워진 것이다. 그래서 무시했고, 더욱 냉대하였다.
바보를 낳은 여인. 그렇게 수군거리는 이야기를 듣는 것도 치가 떨렸다. 그래서 로메오는 똑바로 제대로 키우고 말리라, 다짐했다.
그런데······.
‘그런데 왜 네가 내 앞에 그런 모습으로 나타난 거지?’
당당한 모습.
타이온의 앞에서 리안나와 케인까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게 만들던 그 당당함은 언젠가 그녀가 꿈꿨던 모든 것이었다.
‘왜 지금 그런 모습으로 나타났단 말이냐.’
제라드는 제인에게 시선 한 번 주지 않았다.
그녀가 언젠가 그러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것이 너무나도 속이 상하고 분했다. 그녀에게 한 번만 어머니라는 말을 해준다면 그녀는 자신이 잘못했노라고 사과할 수 있었다.
“어머니······.”
로메오가 겁먹은 얼굴로 제인을 보았다.
지금 그녀의 얼굴은 수많은 감정으로 얼룩져있었다.
‘마법의 수준은 별로 높지 않군.’
제라드는 악수를 풀면서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잠깐의 악수. 그 순간에 가르시아의 몸에 가득 찬 마법의 기운을 자연스럽게 흩어지도록 구멍을 만들었다.
“하하. 이 사람의 인상이 아주 좋군요. 그러고 보니 공작 각하와도 참 많은 부분이 닮은 것처럼 보입니다. 각하께서 아끼는 사람이라 그런 모양입니다.”
가르시아의 덕담에 주변 사람들이 하하 웃었다.
그 이후로는 별 쓸데 없는 이야기들이었다.
제라드는 그 말에 호응하고 웃으면서도 정작 신경은 전혀 다른 곳에 있었다.
‘언제 움직일 참이냐.’
지금 이 자리엔 타이온도 케인도 함께 있었다. 한창 이야기가 무르익었으니, 기회가 있다면 바로 지금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가르시아의 옆쪽에서 잠자코 이야기에 호응하던 한 사람이 슬쩍 뒤로 물러나는 게 보였다.
제라드는 신경 쓰지 않는 척하면서 그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그는 가까운 탁자에 놓인 와인 잔을 바꿔 잡았다.
새로운 와인을 마시려고 자리를 잠깐 비켜선 것처럼 보이는 행동.
그러나 제라드는 그가 헛기침하면서 땅을 살짝 쿵 찍는 것을 보았다.
틀림없는 마법 발동 제스쳐였다.
그 순간, 그의 발아래로 희미한 마나의 실이 엄청난 속도로 가르시아를 향해 달려왔다. 느끼기 어려울 정도로 작은 마나였지만, 제라드의 기감에서 벗어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잡았다.’
제라드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드리웠다. 그 역시 발로 땅을 살짝 쿵 쳤다. 그 순간, 파도처럼 발생한 마나가 바닥을 타고 달려오던 마나의 실을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사내는 이 생각지 못한 상황에 눈을 부릅뜨더니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살폈다. 조금 전 발생한 마나의 기파 근원지를 찾으려는 것이다.
바로 그때, 제라드와 그 사내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사내의 얼굴은 창백하게 변하였다. 제라드의 눈이 모든 것을 알고 있노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사내가 이를 갈더니, 별안간 품속에서 단검을 뽑아서 자신의 왼손바닥을 냅다 그었다.
푸확!
이 느닷없는 상황에 연회장 외곽에서 돌처럼 가만히 서서 상황을 지켜보던 기사들이 다급히 달려왔다.
“끄으으으.”
신음을 토하는 사내는 별안간 피가 흐르는 손을 가슴팍에 얹었다. 바로 그 순간, 사내의 온몸에 붉은빛의 마법진이 내달리기 시작하더니, 순식간에 혈관이 불거지고 온몸이 부풀어 올랐다.
‘자신의 몸의 마법진을 폭주시키고 있다.’
제라드가 눈살을 찌푸렸다.
이대로 놔두었다가는 연회장 전체가 날아갈 수도 있었다.
“꺄아아악!”
몸이 부풀어 오르는 그 흉측한 광경에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고 도망치기 시작하면서, 장내는 그야말로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제라드의 머리가 바쁘게 돌아갔다.
폭발 자체를 막으려면 지계 속성의 마법을 쓰는 게 가장 좋았는데, 문제는 지금 여기서 지계 마법을 잘못 썼다가는 연회장 전체가 무너지게 될 수도 있었다.
그다음 밀도가 높은 마법으로는 수계 마법이 있었지만, 정점에 다다른 폭발을 막기에는 촉매가 부족할 것 같았다.
‘더 적합한 마법. 이 상황에 적합한 마법이 있을 거야.’
아비규환을 방불케 하는 상황 속에서 제라드는 홀로 냉정하였다. 그렇게 제라드가 배운 수많은 마법의 목록과 예상되는 결과가 머리를 스칠 때였다.
촤라락!
옆에 있던 베리타스가 별안간 벌컥 열리더니, 몇 가지 서적을 토해냈다. 그것들은 거의 동시에 펼쳐졌다.
“오랜만에 통했는데. 나도 마침 그 마법을 쓸까 하던 참이었어.”
제라드는 피식 웃으며 손을 하늘로 들어 올렸다.
바로 그 순간, 연회장의 모든 창가가 벌컥 열리면서 맹렬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였다.
제라드가 내뿜는 마나를 흡수한 바람의 정령들이 신이 나서 이 일대를 휘젓고 다녔다.
휘오오오!
그 바람이 어찌나 강하였는지, 연회장의 샹들리에를 비롯한 모든 불이 다 꺼져버렸다.
세상은 순식간에 어둠에 휩싸였다.
‘이걸로 촉매는 충분해졌다.’
철컹.
게이트 전환.
이론은 정립되어 있다.
패스를 타고 방대한 마나가 쏟아져나왔다.
첫 번째, 두 번째······. 그렇게 마침내 일곱 번째 게이트를 지났을 때, 처음과는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거대해진 마나는 제라드의 바닥 아래로 무겁게 가라앉았다.
스오오오오.
그릇된 방식으로 망가졌던 마법이 지금 이 순간, 제라드의 손에 의해서 본 모습을 드러냈다.
금방 터질 것처럼 부풀어 오르던 사내의 몸 주변의 어둠이 별안간 여러 겹으로 겹쳐졌다.
세 겹, 네 겹······.
그렇게 멈추지 않고 수십 겹으로 겹쳐진 어둠의 손아귀는 순식간에 사내의 온몸을 휘감았다.
시꺼먼 어둠 속에서 이제 사내의 모습은 보이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제라드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손을 휘저어 꽉 쥐었다. 연회장의 어둠을 한 번에 긁어모아서 수십 겹으로 휘감은 어둠의 손아귀를 한 번 더 덧씌운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쿠우웅!
어둠의 손아귀 내부에서 작게 울려 퍼지는 굉음과 함께 연회장 전체가 가볍게 진동하였다.
그게 전부였다.
제라드는 손을 휘저었고, 어둠의 손아귀는 모습을 감추었다. 사라져버린 어둠의 손아귀 안에는 한 때 사람이었던 존재의 살점 조각과 뼛조각이 뒤섞여 있었다.
‘끝났다.’
제라드가 착잡한 얼굴로 그 광경을 눈에 담고 있는 가운데, 어느새 어둠을 뚫고 다가온 기사들은 제라드를 향해 칼을 겨누었다.
“물러서라. 제라드는 적이 아니다!”
공작의 외침에 제라드를 에워싸던 기사들이 주춤주춤 물러났다. 제라드는 주변을 훑었다. 여전히 장내는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어둠을 싫어하는 건 모든 사람이 똑같군. 그래서 어둠 속성의 마법은 흑마법으로 불리게 되었는지도······.’
바로 그 순간, 제라드의 몸에서 불꽃이 화륵 치솟았다.
어둠 속을 방황하던 사람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에게 꽂혔다.
“마, 마법사다······.”
그들이 이 신비로운 광경에 그렇게 중얼거릴 때, 제라드는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그의 손에서 뿜어져 나온 불꽃이 연회장 곳곳을 휘감았다.
그 광경에 사람들이 넋을 잃고 바라보는 가운데, 꺼졌던 불들이 다시 들어왔다. 연회장을 가득 메우고 있던 어둠이 물러갔다.
그러나 사람들의 시선은 여전히 연회장의 중심.
제라드에게 꽂혀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트, 틀림없다. 3공자님, 3공자님이시다!”
연회장의 봉신 가문 출신의 귀족 한 사람이 제라드의 얼굴을 알아보았다.
그 순간, 침묵이 드리웠던 장내는 다시금 소란스럽게 변했다.
< 3공자가 돌아왔다6 > 끝
ⓒ 양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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