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화 (14/38)

귀환1

1

다시 어두컴컴한 공간.

제라드는 두 눈을 크게 뜬 채로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잃어버린 세계의 기록.

그것은 잃어버린 세계의 기록이었다.

‘정말이구나. 한 시대의 끝. 정말로 세계수의 죽음은 한 시대의 끝을 상징했었던 거야. 근데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어째서 베리타스와 그 남자는 세계수를······.’

바로 그때, 안쪽에서 희미한 불빛이 둥실 떠올랐다.

그것은 어둠을 비추는 반딧불이와 같았다.

겨우 한 사람이 지나갈 수 있는 공간의 끝.

그곳에 그리 크지 않은 작은 토굴이 있었다.

아나트리에는 그곳에 잠자코 서 있었다.

자신이 보았던 거라면 그녀도 이미 알고 있는 게 아닐까.

“아나트리에, 스승님의 말씀을 듣기론 당신이 수호자라고 불리는 존재라고 들었습니다.”

“네, 맞습니다. 저는 하늘봉우리 일족의 수호자예요.”

“그럼 당신은 세계수가 어떻게 몰락하였는지 알고 있겠군요. 세계수가 당신에게도······.”

“아니요. 정확히는 아무것도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모든 것이 쇠퇴한 이후에 태어난 존재들이에요. 우리는 기록을 따로 남기지 않습니다. 그러니 세계수의 죽음에 관한 진실은 알지 못해요. 그리고 세계수는 우리에게 그런 걸 보여주지도 않습니다.”

‘더더욱 뭐가 뭔지 모르겠어. 왜 그 남자와 베리타스는 함께 있었던 거지? 그리고 그 세계는 대체 어째서······.’

“세계수가 당신에게는 그걸 보여준 모양이군요. 모든 것에는 이유가 있는 법이겠죠. 세계수가 당신을 이곳에 불러들인 것도 말입니다.”

아나트리에는 그렇게 말하며 어느 한 쪽을 가리켰다.

반딧불이처럼 빛을 토하던 작은 빛의 덩어리는 빙글거리며 날다가 그녀가 가리키는 곳에 다다라 멈췄다.

그곳엔 겨우 손바닥 크기 정도의 어린나무가 존재하였다.

‘세계수.’

제라드는 그게 무엇인지 바로 알았다.

저게 바로 세계수의 싹이었다.

어린나무임에도 그 안에 깃든 충만한 생명력이 느껴졌다.

놀랍게도 이 어린나무에 깃든 힘이 알타자르 산맥 전역을 가득 휘감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그때였다.

지금까지 제라드의 옆에서 잠자코 가만히 있던 베리타스가 두둥실 움직이며 앞으로 움직였다.

‘베리타스?’

제라드의 부름에도 베리타스는 똑바로 세계수를 바라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제라드는 덜컥 불안해지는 걸 느꼈다.

잃어버린 세계수의 기록.

그 안에서 보았던 마지막 광경이 여전히 눈앞에 생에 생생하였다.

‘베리타스, 물러나.’

제라드는 그렇게 경고했다.

그러나 베리타스는 제라드의 말을 듣지 않았다.

“어서 물러나라고!”

제라드는 이제 육성으로 소리쳤다.

아나트리에가 갑작스러운 그의 고함에 의아한 기색을 할 때였다.

베리타스가 책장을 벌컥 열었다.

제라드의 얼굴이 무섭게 변한 순간이었다.

“베리타스!”

그 순간, 세계수의 안쪽에서 빛의 덩어리가 스멀스멀 피어오르더니, 베리타스의 책장 안으로 들어갔다.

‘막을 수 없었어······.’

제라드의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그는 베리타스가 세계수의 생명력을 집어삼켰다고 생각했다. 그게 아니면 세계수를 다시 파괴하거나.

그러나.

‘뭐지? 아무렇지도 않아?’

제라드가 어린 세계수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여전히 세계수의 내부에서는 강렬한 생명력이 느껴졌다. 하지만 제라드는 분명히 세계수의 안쪽에서 어떤 빛이 베리타스의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을 분명히 보았다.

‘그 빛은 대체 뭐지?’

그러고 보니, 낯이 익은 빛이었다.

‘대체 어디서······ 아!’

제라드는 그제야 떠올랐다는 표정을 지었다.

세계수의 기록이다. 조금 전에 흘러나오던 그 작은 빛은 세계수가 파멸하던 순간에 사방으로 뻗어 나가던 그 무수한 빛과 같았다.

세계수는 제라드를 이곳으로 인도하였고, 베리타스는 그런 세계수를 받아들였다.

‘그럼 조금 전의 그 빛은 설마······.’

제라드가 마침내 그 결론에 다다랐을 때.

[성유물의 조각 획득. 해당 성유물 조각은 완벽한 하나의 조각이며, 현재 가용 수용량을 초과하는 용량의 정보이므로, 2종 비문 중 일부 개방이 가능함.]

베리타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2

흑마법사를 모두 격파하면서 사실상 싸움은 모두 끝난 셈이었다.

아직 두 개의 엘프 일족이 하늘봉우리 일족을 적대하고 있었지만, 그들의 힘만으로는 이제 이곳을 넘을 수 없었다.

전투를 담당하던 엘프 전사들 대부분이 다 사로잡혔기도 했고, 지금 하늘봉우리에 있는 네 명의 마법사들의 전투력이 상상을 초월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엘프들은 원래 호전적인 종족이 아니었으므로, 전투 능력은 많이 떨어지는 편이었는데, 쇠퇴를 거듭하면서 그 힘은 더욱 약해져서 당대에 이르러, 전투에 들어가면 도저히 마법사들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하늘봉우리의 수호자인 아나트리에는 즉시 푸른기슭 일족과 검은바위 일족에게 전령을 보내어, 평화를 제안하였다.

그리하여 하늘봉우리에는 이튿날, 각각 두 개 일족을 대표하는 엘프 수호자 두 사람이 찾아왔다.

그들은 원망과 분노가 가득한 얼굴로 아나트리에를 노려보았다.

“하늘봉우리의 수호자여, 그대의 잘못된 선택이 우리 종족의 운명을 망치게 되었습니다.”

“아니요. 그 말씀은 틀렸습니다, 푸른기슭의 수호자여. 이제 미망에서 그만 헤어나세요. 해방자가 보여준 번영의 길은 더는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 아닙니다.”

“하늘봉우리의 수호자여, 그대는 세계수를 다시 위대하게 만드는 것이 곧 이 세상을 위하는 것임을 알지 못합니까?”

“세계수를 다시 위대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바로 두 분의 아집이라는 것입니다. 세계수의 의지는 해방자를 향하지 않았습니다. 그 말은 그것이 정당한 길이 아니라는 얘깁니다. 두 분께서는 그걸 아셔야 합니다. 세계수는 해방자와 여러분의 뜻을 막을 분을 제게 일러주었습니다. 실제로 저분께서는 그렇게 하셨지요.”

그 순간, 두 엘프 수호자의 시선은 아나트리에가 가리키는 제라드를 향해 꽂혔다.

두 엘프만이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 이곳에 둥글게 모인 백 명이 넘는 엘프들이 하나같이 제라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의 눈빛이 기묘하게 변하였다.

엘프들의 처음 제라드에게 다가왔을 때와 똑같았다.

“신기하군요. 어떻게 그에게서 우리에게서 나는 정령의 향이······.”

쏟아지는 시선 속에서 제라드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정령의 향.

그것은 정령과 교감할 수 있는 특별한 존재에게서 느껴지는 일종의 감각이었다. 엘프들은 모두 타고나는 것이었지만, 엘프 이외에 다른 생명이 정령과 교감하는 건 지금까지 없었던 일이었다.

알타자르의 아랫자락에 살아가는 푸른 마녀들도 정령과의 교감은 불가능했다. 그들은 특수한 문신과 언어로 정령의 힘을 빌려 사용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세계수의 의지와 선택.

그 말의 의미를 곱씹는 침묵이 흐르는 와중에.

“그뿐만이 아닙니다. 세계수는 오직 그에게만 우리가 보지 못했던 기록을 보여주었습니다. 세계수의 의지는 분명합니다. 이미 사라져버린 과거의 영광은 우리의 길이 아닙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그것은 모두 교만이고, 아집이며, 욕심입니다.”

아나트리에는 그렇게 말을 끝맺었다.

두 명의 수호자는 입을 다물었다.

엘프는 본래 말을 많이 하는 종족이 아니었다. 조금 전의 대화만 해도 엘프끼리는 아주 드물게도 격렬한 논쟁을 벌인 셈이었다.

그런데 별안간 두 수호자의 눈빛에 가득했던 원망과 분노는 어느새 깨끗이 사라지고 없었다.

두 엘프는 아나트리에의 말과 지금 눈앞에 있는 사실을 온전히 받아들인 것이다.

‘······엘프는 정말 신기한 종족이야. 인간과 닮았지만, 그 생각이나 행동의 패턴은 정말로 너무나도 다르구나. 서로 죽고 죽이는 싸움까지 치달았던 이 싸움을 몇 가지 사실확인을 통해서 모두 털어낼 수가 있다니 말이야.’

인간의 관점에서 그것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엘프들은 잘못된 길을 가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 다른 길을 향해 나아가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들의 감정은 인간과 같지 않아서 절대로 감정에 휘둘리는 일이 없었고, 늘 이성적으로 사고하고 판단했다.

제라드가 그런 그들의 모습을 보며 신기해하는 사이에, 세 일족의 수호자들은 서로 손을 맞잡았다.

그것은 알타자르의 엘프들이 다시 결속하였음을 상징하는 행동이었다.

그러자 머잖아서 모든 엘프들이 서로 손을 잡고 원을 그리며 퍼졌다. 그때, 별안간 귀를 부드럽게 간질이는 듯한 목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졌다.

엘프의 노래였다.

“내 평생에 엘프의 노래를 들어볼 수 있게 될 줄이야.”

블레이즈와 그의 제자들이 경이로움에 잠긴 얼굴로 눈을 감았다.

제라드도 마찬가지였다.

그 노래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는 언어로는 도무지 표현할 수가 없었다.

화해, 용서, 슬픔, 진혼······.

인간의 목소리로는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아름답고 구슬픈 곡조가 바람을 타고 땅으로, 하늘로, 마침내 이 알타자르 산맥 전체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3

해가 뉘엿뉘엿 저물기 시작했다.

이제 이곳에서 볼 일은 모두 끝났다.

흑마법사들은 해방자라고 불렸던 존재가 사라지자, 바로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하여 산맥 전체에서 완전히 모습을 감추었고, 엘프들은 손에 손을 잡고 대화합을 이루었다.

이곳은 엘프의 영역. 떠날 사람들은 떠나야 할 때가 된 것이다.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괜찮습니다. 길은 다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안내해드리고 싶습니다. 일족과 종족을 대표해서.”

아나트리에는 그렇게 말했다.

그녀는 감사의 인사가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녀석아, 너무 빼지 마라. 늘 빼기만 하는 것도 좋은 건 아니야.”

“예, 알겠습니다.”

블레이즈까지 나서서 그렇게 말하자, 제라드도 더 마다하지 않았다.

그렇게 곧 해는 완전히 저물었고, 온 세상은 어둠에 물들었다. 밤하늘엔 은하수가 가득하였고, 알타자르 산맥에는 온화한 기운이 감돌았다.

네 사람은 아나트리에의 안내를 받으며 하늘봉우리를 벗어나 중턱에 다다랐다.

‘바로 그저께 이곳을 오를 때만 해도 공기가 이러지 않았었는데 신기하구나.’

제라드는 앞을 거듭 막는 적을 헤치며 나아갔다.

그러던 중 제라드는 한 가지 물어볼 게 있음을 떠올렸다.

“아나트리에,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물어봐도 되나요?”

“네, 무엇이든지요.”

“하늘길. 당신은 감시자의 요새에서 날아오르듯이 하늘봉우리로 향했어요. 저도 그 방법을 어설프게나마 응용해서 하늘봉우리까지 빨리 오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사용했던 것과 당신이 사용했던 건 차이가 있었어요. 뭔가 다른 건가요?”

“조금 다른 편이죠. 하나는 종족의 차이점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길이 준비되어 있었느냐의 차이겠죠.”

“종족의 차이점이라는 게 뭔가요? 교감 능력의 차이인가요?”

“아뇨, 그런 게 아니에요. 엘프의 몸무게는 인간의 절반도 되지 않아요. 상당히 가벼운 편이죠.”

“아!”

제라드는 탄성을 토했다.

그러고 보니 확실히 엘프에 관한 옛이야기 중에 엘프의 몸무게가 사람의 그것과는 큰 차이가 있다고 하던 걸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길이라는 건 다른 게 아니에요. 알타자르 산맥의 곳곳에는 늘 바람이 굽이치는 길이 만들어진답니다. 저는 그 굽이치는 길을 놓치지 않고 올라탔기에 하늘에 오를 수 있었죠. 당신도 만약 바람이 굽이치는 길을 탔다면 하늘길에 오를 수 있었을 겁니다.”

제라드는 그제야 의문이 풀렸다는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두 사람은 그 뒤로도 정령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고, 뒤따르던 세 사람은 바보가 되어버린 것처럼 아무런 말도 알아듣지 못하였다.

“스승님께서는 저게 무슨 소리인지 아십니까?”

“그걸 왜 나한테 묻는 거냐?”

“그, 그야 스승님께서는 저 마법사님의 스승님이기도 하시니까······.”

“모른다. 애초에 엘프들이 말하지 않더냐. 인간은 정령과 교감하는 게 불가능하다고 말이야.”

“그럼 대체······.”

“드래곤이야. 그렇게 마음 편하게 생각해라.”

블레이즈는 농담이 아니라, 진담을 하는 것처럼 그렇게 말했다.

그러는 사이, 어느새 저 멀리 협곡이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그 언저리에 수백 명의 푸른 마녀들이 모여 있는 모습이 보였다.

“에잉, 저것들은 흑마법사들이 다 사라진 마당에도 끝까지 귀찮게 하는군.”

블레이즈가 혀를 차면서 전투 의지를 불태울 때였다.

“직접 나서실 것 없습니다. 제가 나서서 그들을 물러나게 한다면 굳이 싸울 일은 없겠지요.”

푸른 마녀들은 엘프들이 얼마나 특별한 존재인지 본능적으로 느끼는 족속들이었다. 아나트리에가 나서면 그들은 자연히 물러날 게 뻔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푸른 마녀들이 좌우로 물러나더니, 이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리는 것이 아닌가.

“플라마 렉스 인 테네브리스······.”

“플라마 렉스······.”

그들은 모두 그와 비슷한 말을 반복했다.

“하하핫. 저 야만스러운 놈들이 저렇게 순순히 구는 걸 보니, 역시 엘프가 참으로 고귀한 존재라는 걸 알겠습니다.”

블레이즈가 껄껄 웃으며 혀를 내두르는 가운데, 아나트리에는 그저 부드럽게 미소 지을 따름이었다.

“그럼 전 여기서 돌아가겠습니다. 고마웠습니다. 우리는 절대로 당신들을 잊지 않겠습니다.”

아나트리에는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제라드를 제외한 세 사람이 깜짝 놀란 얼굴이었다.

엘프가 인간들의 방식으로 인사를 해왔기 때문이다. 그들은 절대로 저런 식으로 인사하지 않는다. 머리를 굽히는 것에 너무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우리는 또 만나게 될 것 같군요.”

제라드는 언젠가 아나트리에가 했던 말을 돌려주며 고개를 마주 숙이면서 협곡을 향해 걸어갔다.

아나트리에는 그들 네 사람의 모습이 어둠 속으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도 그 자리에 가만히 있었다.

“어둠 속에서 타오르는 불의 왕.”

그녀는 그렇게 속삭였다.

푸른 마녀들이 했던 말과 행동.

그것은 아나트리에를 향한 말이 아니었다.

귀환2

4

감시자의 요새 북쪽 성벽.

감시병들은 삼엄한 눈빛으로 북쪽의 협곡을 눈에 담고 있었다. 바로 얼마 전에 야만족들과 흑마법사들에게 뚫리지 않았던가. 다시는 그런 일이 있어선 안 됐다.

무거운 침묵 속에서 시간이 흐르는 와중이었다.

“음?”

감시병 중 하나가 눈살을 찌푸렸다.

발소리.

협곡 저 안쪽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이, 이봐! 발소리가 들린다. 이 안에서 발소리가 들려!”

“뭐라고?”

성벽 위의 병사들은 몹시 긴장한 얼굴로 바로 이 사실을 전달하기 시작하였고, 머잖아 종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뎅뎅뎅!

연이어 세 번 울려 퍼지는 종소리에 우르르 병사들이 뛰쳐나오고, 마법사들도 성벽 위에 올랐다.

마법사들의 선두에는 에이슬란이 있었다.

“적들의 공세가 시작되면 바로 마법을 전개하여 대응한다. 모두 침착해라. 우린 준비가 되어 있다. 안 그런가?”

에이슬란의 침착한 목소리에 마법사들의 분위기도 자연스럽게 그에 젖어들었다.

각 조에 따라서 대열이 갖춰진 후, 에이슬란은 가만히 손을 들어 올리고 공격의 때를 기다렸다.

저벅저벅.

서서히 접근해오는 발걸음 소리.

‘3명에서 4명 남짓인가. 그렇게 많지는 않구나.’

에이슬란은 그렇게 판단했다.

긴장감이 일대에 가득한 가운데, 들려오던 발걸음이 느려졌다.

“스승님, 이제 요새가 코앞인데, 이러다가 적으로 오인하는 거 아닙니까? 안 그래도 어두워서 피아식별도 잘 안 될 텐데요. 제가 불을 켜고 앞으로 가겠습니다.”

“음, 그래, 잘 생각했다.”

또렷한 대화와 함께 어둠 가득한 저편에서 별안간 붉은색 불꽃이 나타났다.

“저 불꽃은······.”

에이슬란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사이, 불꽃은 이제 요새의 성벽에서도 훤히 보이는 위치에 다다랐다.

총 네 사람.

그들은 모두 로브를 걸치고 있었다.

“하하핫! 모두 여기 모여 있었나? 마중하는 것치곤 사람이 많군그래!”

블레이즈가 성벽 위에 빼곡하게 늘어선 병사들과 마법사들을 보며 손을 크게 드는 가운데, 머잖아 쪽문이 벌컥 열리면서 한 사람이 뛰쳐나왔다.

“스승니이이이임!”

그 사람은 바로 케이시였다.

“어이쿠!”

블레이즈는 자신의 품에 엄청난 기세로 안겨든 케이시의 모습에 호통을 쳤다.

“어허! 케이시, 이 녀석아! 사람들도 많이 보는 데에서 이게 무슨 짓이냐!”

그러나 그 눈빛엔 부드러움이 감돌았으니.

케이시의 어깨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녀석, 많이 걱정한 모양이로구나.”

블레이즈는 케이시의 작은 몸을 부드럽게 토닥일 따름이었다.

5

완만하게 이어지는 경사.

그곳에 홀로 고고하게 뻗은 탑.

그것은 세상의 모든 마법적 지식이 모여 있는 장소이자, 가장 신비로운 힘을 소유한 자들이 기거하는 별천지였다.

마탑.

7개의 탑 중에서 푸른색과 함께 전해지는 이곳 마탑의 이름은 크루드였다.

고층의 안쪽 공방.

이곳은 크루드 마탑의 원로 마법사이자, 사세르란의 벼락이라고 불리는 케이틀란 리덴드의 공방이었다.

이 공방의 주인은 하나밖에 없는 제자가 공방을 떠난 뒤로 두문불출하며 마법에 매진하였다.

오로지 한 마법사의 스승으로서 충실했던 6년.

그동안 케이틀란도 많은 것을 보았고 익혔다. 이제 지금부터는 그 모든 것을 하나로 집대성하고 연구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케이틀란은 시간이 지나가는 줄 몰랐다.

수많은 가설을 세우고 검증하는 과정에 선 그는 이제 오롯이 단 한 명의 마법사였다.

‘제라드는 가능성을 열었다. 이 앞이 막혀있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그렇다면 나 역시도 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얘기일 터.’

진정한 구도자는 타인에게 길을 묻지 않는 법이었다.

앞길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았으니, 그다음은 그 길을 나아가는 자의 몫이다. 지금의 케이틀란이 제라드가 나아갔던 길을 향해서 발을 내디디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시간이 하염없이 흐르고 있을 때였다.

우뚝.

케이틀란은 펜을 멈추었다.

지금 그의 공방에 누군가가 다가왔기 때문이다.

케이틀란은 수북하게 쌓인 양피지 더미를 밟고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끼익.

문을 열자, 그곳에 젊은 마법사 한 명이 서 있었다.

그동안 공방에서 나오지도 않고 자신의 마법에만 집중한 케이틀란의 모습은 몹시 피폐하게 보였다. 두 눈은 퀭하였고 그늘이 깊게 드리웠으며 수염은 길게 자란 모습이다.

“무슨 일이냐.”

“탑주님께서 원로 마법사님과 뵙기를 희망하십니다.”

마법사는 그 말을 끝으로 고개를 조아리며 물러갔다.

케이틀란은 의아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탑주가 기다리는 최상층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탑주님께서 이런 식으로 날 부르는 일은 드문 일이로구나. 특별한 일이 아니면 나를 찾지 말라달라고 말씀을 드렸을 터인데······.’

쿵쿵.

최상층에 올라온 케이틀란은 문을 두드렸다.

그러자 안쪽에서 들어오게, 그렌자일의 대답이 들려왔다.

끼익.

“탑주님께서 절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미안하네. 내가 방해되었겠지.”

“아닙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분명히 급한 일이었기에 그러신 것이겠지요. 말씀하십시오. 경청하겠습니다.”

“그렇게 생각해주니 고맙네. 그럼 일단, 이야기를 하기 전에 한 사람을 소개하겠네. 자네도 어쩌면 이미 아는 사람일는지도 모르겠군.”

그렌자일은 그렇게 말하며 안쪽에 있는 접견실로 갔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그윽한 차향이 방에 가득했다.

자리에 가만히 앉아있던 중년인은 문이 열리자마자 일어나더니 고개를 숙여왔다.

“이렇게 다시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케이틀란 공.”

“죄송하지만, 우리가 어디서 뵈었던 적이 있었는지요.”

“하하. 공께서는 절 기억하지 못하실 수도 있습니다. 저와 케이틀란 공과는 뚜렷한 접점이 없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저는 똑똑히 공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저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군요. 우리가 어디에서 만났었는지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저는 그라우드 공작가에서 왔습니다. 케이틀란 공과는 6년 전, 관저에서 몇 번인가 뵈었었지요.”

그라우드.

그 이름이 나온 순간 케이틀란은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고개를 주억거렸다.

‘마침내 이때가 왔는가.’

“영주님께서는 크루드 마탑과 케이틀란 공을 다시 만나서 꼭 인사를 전하고 싶어하십니다.”

“정확하게는 저를 만나고 싶어하시는 것이 아니라, 제라드에 관한 이야기가 하고 싶으신 것이겠지요. 안 그렇습니까?”

케이틀란이 말을 돌리지 말라는 듯, 딱 잘라서 그렇게 말하자, 바라드 자작은 겸연쩍게 웃었다.

“그렇게 말씀하시니, 저도 더는 돌려서 말하지 않겠습니다. 영주님께서는 제라드 공자님과 정식적으로 만나 뵙기를 희망하십니다.”

“그렇다면 유감입니다만, 제라드는 지금 마탑에 없습니다.”

“마탑에 없다는 게 무슨 말씀인지요?”

“제라드는 지금 산도르 마탑에서 다른 스승의 아래에서 마법을 배우고 있습니다.”

“예에? 산도르 마탑이라니······.”

바라드 자작은 이 예상치 못한 상황에 난색을 보였다.

이곳에 오면 바로 만날 수 있을 줄 알았던 모양이었다.

“으음, 그렇군요. 그럼 공자님께선 언제 돌아오실는지 혹시 알 수가 있을는지요?”

“그건 정확히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제라드는 이미 한 사람의 마법사. 자기 일은 자기가 결정하는 법이지요. 제라드가 많은 것을 보고 배운다고 한다면 그 시간은 수년이 넘을 수도 있을 겁니다.”

“허어······. 그건 곤란하군요. 영주님께서는 공자님과 꼭 만나 뵙고 싶어 하십니다. 은사님께서 어떻게 도와주실 수는 없는지요?”

그 순간, 케이틀란의 미간에 골이 파였다.

“가만히 듣고 있으니 몹시 거슬리는군요. 지난 6년 동안 한 번을 찾지 않았으면서 이렇게 지나서 뻔뻔하게 찾아와서 당연하게 만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까? 제라드를 버린 것은 공작가입니다. 내 말이 틀렸습니까?”

“으음······.”

바라드 자작은 케이틀란의 목소리에 노기가 어리는 것을 알고 헛기침을 하였다. 하지만 케이틀란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대체 어디서 무슨 소리를 듣고 찾아왔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갑자기 찾아와서 제라드를 일컬어 공자를 운운하는 것도 거슬리는군요. 제라드는 이미 그라우드 가와는 인연이 끊어진 존재가 아니었습니까?”

“그건······ 헛흠! 공작님께서는 그 일을 몹시 유감스럽게 생각하고 계십니다. 하지만 그라우드 가문의 위신과 내부의 반발을 생각하자면 그것은 어쩔 수 없었던······.”

바라드 자작은 차마 끝까지 말을 잇지 못했다.

지금 이 순간, 이 방의 공기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케이틀란이 분노를 참지 못하면서, 그의 마나가 은연중에 흘러나오며 이 방을 가득 메우고 있는 것이다.

“케이틀란, 진정하게.”

그렌자일이 케이틀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답지 않게 너무 흥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케이틀란의 이글거리는 시선은 바라드 자작에게 꽂혀서 떨어질 줄 몰랐으니.

“······어쩔 수 없다는 말. 제라드의 앞에서는 하지 말아야 할 겁니다. 성에 차지 않으니 버리고, 유능해졌기에 다시 받아들이려고 하는 것이 자작님께서 말씀하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는 것은 아닐 겁니다.”

“제가 말실수를 했습니다. 이렇게 사죄드리겠습니다.”

바라드 자작은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그는 이내 간절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케이틀란 공, 이거 하나만 알아주십시오. 영주님께서는 공자님을 진정으로 만나고 싶어하십니다. 케이틀란 공께서 공자님의 둘도 없는 은사님이라면 더더욱 그 뜻을 헤아려주십시오. 그리고 무엇보다 공자님께서 어엿한 한 사람의 마법사가 되었다고 하셨으니······ 영주님을 만날지, 만나지 않을지 선택하는 것 또한 공자님의 몫이 아닐는지요?”

“······.”

케이틀란은 입을 다물었다.

여전히 그의 마음속은 부글거렸다.

그러나 자작의 말은 옳았다.

이건 케이틀란이 선택할 일이 아니다.

선택은 제라드의 몫이었다.

‘그래, 차라리 잘 된 일일는지도 모르지. 당신들이 버린 자식이 지금 얼마나 훌륭한 마법사로 자라났는지 똑똑히 봐라.’

6

북부 감시자의 요새 깊숙한 회의실.

그곳 안에서는 시그너스 기사단의 로갈과 요새의 총사령관인 토레스 남작. 그리고 조사단의 에이슬란. 마지막으로 협곡의 너머에서 돌아온 블레이즈가 있었다.

네 사람이 협곡 너머에서 돌아온 이후로 벌써 사흘이었다.

그 시간 동안, 제라드는 단단히 화가 난 케이시 때문에 곤욕을 치르고 있었다.

‘큰일인걸.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네.’

말을 걸어도 무시하고 냉담한 눈빛으로 한 번씩 흘겨보는 케이시의 태도에 제라드는 머리를 긁적일 따름이었다.

‘내가 혼자 안에 들어간 게 그렇게 화가 날 일인가? 난 아무렇지도 않은 모습을 돌아왔고, 블레이즈 스승님도 멀쩡하게 돌아왔는데 말이야. 끙! 에이, 나도 모르겠다!’

제라드는 케이시가 언젠가는 화를 풀겠지, 생각하며 방에 틀어박혔다.

회의가 앞으로 얼마나 더 될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제라드도 지금 생각해봐야 할 일이 한둘이 아니었다.

“왜 그 사내와 베리타스는 세계수를 파괴한 걸까. 그리고 어째서 세계수는 나에게 성유물의 조각을 넘긴 거지?”

아무리 생각해도 일의 앞뒤가 맞지 않았다.

세계수가 죽게 된 이유는 그 사내와 베리타스 때문이다.

그렇다면 세계수는 오히려 베리타스를 적대시해야 하는 게 맞았다.

“그런데 세계수는 오히려 자신의 안에 깃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었어. 어째서일까.”

턱을 괸 제라드는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 두 가지 사실의 사이엔 아직 모이지 않은 퍼즐이 있는 게 분명했다.

‘2종 비문의 안에 그 정보가 있을지도. 하지만 그건 지금 이런 곳에서 열 수는 없어. 1종 비문만 해도 내가 그 여파를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걸 열어보기 위해서는 나만의 안전한 공간과 시간이 필요해. 공방이 말이야.’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제라드.

당장 해야 할 게 무엇인지 정했다.

“지금은 가장 쉽고 빠르게 알아볼 수 있는 것부터다.”

제라드는 먼저 크룩스의 탈을 쓰고 나타났던 흑마법사가 사용하였던 그 정체불명의 마법을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아나트리에와 만나면서 연구를 도중에 멈추긴 하였지만, 제라드의 머릿속에는 그때, 그 순간에 멈춰두었던 연구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흑마법의 요소부터 완전히 지워내자.’

생명력을 흡수하여 위력을 증폭하는 체계 자체를 지우고, 부족한 부분을 앞뒤의 술식의 맥락을 유추하면서 대입하는 방식.

보편적인 마법사들은 그 답을 유추해나가는 과정만으로도 엄청난 시간이 소요될 터였지만, 제라드에게 그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엘레멘탈 마스터의 비문을 열면서 접하게 된 그 방대한 술식 체계는 제라드의 머릿속에 고스란히 존재하였기 때문이다.

제라드의 집중력은 놀라웠다. 그의 내부에 존재하는 온갖 마법술식이 조합되었다가 흩어지기를 반복하며 각 부분에 끼워졌다.

그리하여 해가 지기 시작할 무렵에 시작되었던 연구는 밤이 꼬박 지나고 새벽이 찾아올 무렵에 끝났다.

“다 됐다.”

제라드는 수십 장의 양피지에 빼곡하게 적힌 마법 술식을 처음부터 끝까지 훑었다. 비로소 정리가 끝났다.

“확인해보자.”

제라드는 밖으로 나왔다.

어스름이 드리우기 시작한 하늘의 저편.

제라드는 연무장으로 향하였다.

늦은 새벽, 이른 아침의 사이였으므로, 당연하게도 그곳에 사람은 없었다.

제라드는 연무장 중심에 서서 정립한 이론 그대로 마법을 사용하였다. 게이트로 에너지를 증폭시키지 않고, 순환하는 마나는 술식의 흐름에 따라 완성되었다.

마법은 순식간에 완성되었고, 제라드의 주변에 마나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리고.

제라드의 그림자에서 불쑥 시꺼먼 창이 튀어나왔다.

쉬악!

그건 제라드의 의지대로 휘둘러지기도 했고, 동시에 겹쳐지면서 방패가 되기도 하였다.

“음, 역시 이건 애초에 흑마법이 아니었어. 이게 원형인지는 모르겠지만, 이건 상당히 완성도가 높은 마법이야. 하지만 도대체 이 속성은······.”

제라드가 그렇게 생각에 깊이 빠져 중얼거리고 있을 때였다. 별안간 저편에서 느껴지는 기척에 고개를 돌린 제라드.

“그게······ 뭐야?”

“어라, 케이시?”

제라드가 의아한 얼굴을 하는 가운데, 케이시의 시선은 제라드의 그림자에서 솟구친 어둠의 창에 꽂혀 있었다.

“제라드, 네가 어째서 그 흑마법을 사용하는 거야?”

케이시의 안색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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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환3 -유료 연재 시작 >

불과 이틀 전의 일이다. 

케이시는 제라드가 사라졌다는 것을 알았다. 

협곡 안으로 홀로 사라진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그때 느꼈던 감정은 배신감이었다. 

그녀에게 한마디 말도 없이 적의 소굴을 향해 뛰어들다니. 

그런 배신감 후에는 걱정이 앞섰다. 

제라드가 아무리 대단한 마법사라고 해도 위험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렇게 하루가 흐르고 이틀이 지났다. 

그녀는 속은 까맣게 타들어 갔다. 

에이슬란은 이틀이 지나도록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이렇게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어. 나 혼자라도 들어가고 말겠어.’ 

케이시가 그런 결단을 내린 날의 밤. 

어둠 속에서 제라드와 블레이즈, 마라칸, 로퍼스는 모두 무사히 돌아왔다. 

케이시는 그제야 겨우 지옥에서 헤어나올 수 있었다. 하지만 기쁨도 잠깐이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다가오는 제라드를 본 순간, 그녀는 왈칵 화가 치밀었다. 

결과적으로 제라드는 돌아왔고, 모든 게 좋은 방향으로 끝났다. 네 사람은 상처 없이 멀쩡하였다. 거기다가 블레이즈는 조사단 마법사들 앞에서 당당히 공언했다. 

-이제 돌아가자! 모든 문제는 다 끝났다! 

그랬다. 

모든 게 다 잘 풀렸다. 

그런데······. 

‘그런데 난 왜 아직도 화가 나는 거지?’ 

제라드가 미안한 표정을 짓는 모습을 보니, 이상하게 더 화가 났다. 

그의 결단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제라드는 강한 마법사였다. 

어느 정도인지 정확히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로 말이다. 그러니 혼자 움직이는 것도 어느 정도 이해가 갔다. 

하지만······. 

‘그래도 나한테만은 말해주길 바랐는데······.’ 

그러나 제라드가 모두 사실대로 말했더라면 케이시는 절대로 그를 혼자 가게 놔두지 않았을 것이다. 

케이시의 마음은 자기 자신도 알기 어려울 정도로 복잡했다. 제라드와 관련된 일은 늘 이랬다. 계속 자기 자신도 모르는 자신과 대면하게 된다. 

자신의 못난 모습과 말이다. 

“하아······.” 

한숨을 푹 쉰 케이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계속 이런 식으로는 있을 수 없어. 고맙다고 인사하는 거야. 제라드가 아니었으면 스승님과 다시 만나게 될 일도 없었을 테니까······.’ 

제라드가 시기적절하게 나타나지 않았다면 위험했을 거란 얘기를 들은 케이시였다. 

그러니 지금은 이렇게 화를 낼 때가 아니라, 감사의 인사를 전할 때였다. 

그래서 케이시는 기다렸다. 

제라드가 방에서 나오면 우연처럼 만나서 고맙다는 인사를 전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방에 들어간 제라드는 도무지 나오지 않았다. 

‘또 마법 연구인가?’ 

먼저 방문을 두드리고 찾아갈 용기는 없었던 케이시는 계속 제라드의 방에서 흘러나오는 빛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제라드를 보면 어떤 말을 할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그러면서 시간은 금방 갔다. 

어떤 말에 어떤 말을 할 건지도 다 생각해두었다. 

모든 게 만전의 상태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어느덧 새벽의 어둠이 사방에 자욱하게 드리웠을 때, 그녀는 별안간 제라드의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었다. 

‘이 시간에 또 어딜 가는 거지?’ 

잠깐 망설이던 케이시는 방문을 열고 나왔다. 어느새 저 멀리 어둠 속으로 흩어져가는 제라드의 뒷모습이 보였다. 

‘연무장 방향이야. 새롭게 뭔가를 알아낸 건가?’ 

제라드가 바로 얼마 전, 흑마법사와의 싸움 직후에 스펠 가드라는 마법을 결과물로 내놓았던 것을 생각해보자면 그런 생각을 하는 것도 그리 이상하진 않았다. 

그런데 제라드의 발걸음이 엄청나게 빨랐다. 

꼭 바람에 날아가는 것처럼 한 번에 날아오르는 모습이다. 

‘대체 뭐지? 섀도우 마법을 쓰는 것도 아닌데······.’ 

케이시가 그렇게 멀어져가는 제라드를 뛰어서 쫓을 때였다. 

머잖아 연무장 중심에 선 제라드의 모습이 보였다. 

동쪽에서 어스름이 밝아오면서 그림자가 서서히 지기 시작할 즈음, 그녀는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보았다. 

별안간 제라드의 발아래에서 그림자가 튀어나온 것이다. 

‘저 마법은······ 그 흑마법사가 썼던 마법이야. 똑같아. 그 형태도 발동 방식도······ 대체 왜? 대체 왜 제라드가······.’ 

그때, 제라드도 케이시를 발견했다. 

“케이시, 너 지금 오해했구나.” 

“오해? 내가 정말로 오해하는 거야? 그 마법······ 그 마법은 흑마법이잖아. 세상에 어떤 마법도 그런 식으로 발동하지는 않아. 더 무슨 변명을 더 한다는 거야?” 

“······.” 

제라드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반박할 여지가 없었다. 모두 케이시의 말대로였기 때문이다. 

최초의 마법사 엘레멘탈 마스터가 마법을 정립한 이후로, 모든 마법은 7가지의 속성을 따르게 되었다. 

그러나 지금 제라드의 마법은 그 7가지 속성 중 어느 것에도 속하지 않았다. 

저런 어둠을 머금은 마법은 단 하나뿐이다. 

흑마법. 

그러나 흑마법의 정의는 해당 마법이 바로 생명력을 사용하는가, 하지 않는가에 있었다. 

이 마법은 생명력을 소모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마법의 지금 속성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걸 설명하기 전에 일단 케이시의 오해부터 풀어야겠어.’ 

“일단 정확하게 짚고 넘어가자면 이 마법은 절대로 흑마법이 아니야.” 

“흑마법이 아니라고?” 

“그래, 흑마법의 가장 핵심이 되는 요소가 무엇인지는 너도 잘 알잖아.” 

“생명력.” 

“그래, 맞아. 근데 이 마법의 술식 구조에는 생명력 소모가 존재하지 않아.” 

제라드의 말에 케이시의 미간에 골이 파였다. 

점점 더 이해가 안 됐다. 

“그럼 그 마법은 뭐야? 7가지의 속성에도 포함되지 않으면서 저런······ 어둠을 다룰 수 있는 마법은 없어.” 

“나도 그게 의아하던 참이야. 이 마법은 흑마법의 토대이자 핵심인 생명력의 소모를 떼어내고도 술식의 기본 토대가 무너지지 않아. 오히려 그러기는커녕 흑마법으로 변하면서 더 불안정해진 마법이야.” 

“······.” 

믿기 어려운 얼굴이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제라드도 사실 지금 이해가 안 가는 건 마찬가지였다. 

‘최초의 마법사가 정립한 마법 술식에 속하지 않는 마법. 그런데 그런 상태에서도 한없이 엘레멘탈 마스터의 마법과 유사한 술식 구조를 이루고 있어. 어쩌면······ 최초의 마법사가 남긴 유산은 7가지가 아닐는지도 몰라. 누구도 알지 못하는 나머지 하나의 속성이 더 존재할지도 모른다.’ 

그것은 흑마법과는 다른 마법이다. 

속성으로 구분해서 말하자면 어둠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좋아, 네가 그 마법을 연구하고 있다고 치자. 하지만 아직도 설명되지 않는 문제가 있다는 걸 모르겠어? 마법을 익히지 않았다면 애초에 연구할 수도 없는 거잖아. 넌 지금 흑마법을 익혔다고 말한 셈이야. 알아?” 

케이시의 말대로였다. 

마법을 배우지 않으면 그게 흑마법인지 아닌지도 알 수 없는 법이었다. 

“어서 대답해. 내가 오해하고 있는 거라면 날 이해시켜 줘, 제라드.” 

케이시는 불안한 얼굴이었다. 지금 자신이 생각하는 게 모두 틀렸기를 바라는 모습. 

‘케이시에겐 더 숨길 필요도 없겠지. 애초에 내 능력을 알려주지 않으면 설명할 수도 없고 말이야.’ 

제라드의 능력은 보통 사람은 이해할 만한 게 아니었다. 그런 시선을 받는 게 썩 달가운 게 아니었기에 지금까진 케이시에게 굳이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감추는 건 여기까지인 것 같았다. 

“케이시, 나는 웬만한 마법은 한 번 보면 그 마법의 술식 구조를 꿰뚫어볼 수 있어. 블레이즈 스승님의 마법도 그런 식으로 배운 거야.” 

“뭐?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케이시가 터무니 없다는 표정을 짓다가 이내 지금까지 제라드가 보여주었던 특이한 점들. 그리고 제라드의 홍염 마법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제라드가 사용하던 홍염 마법의 제어식은 모두 내가 사용했던 것뿐이었어. 서, 설마 정말로 한 번 보면 그런 게 가능하다고? 하지만 그런 게 가능하단 말이야? 그런 건 말도 안 되잖아.’ 

그러는 사이, 제라드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에이슬란 원로 마법사님의 고유술식은 너도 알고 있겠지. 폭발 마법을 말이야. 난 그걸 본 적이 있어. 너도 봤잖아. 그렇지?” 

“설마······.” 

“그래, 사용할 수 있어. 보여줄게.” 

제라드는 그렇게 말하며 손을 하늘 위로 뻗었다. 

고오오. 

제라드의 손바닥 위의 공간이 마구 이지러지는 게 보였다. 

그러다가 별안간 중심에서 불꽃의 구체가 나타났다. 

“세, 세상에······.” 

케이시는 1급 마법사. 그녀는 지금 제라드의 손바닥 안에서 이글이글 타오르는 마법이 그냥 일반 화염계 마법이 아니라는 것쯤은 바로 알아보았다. 

저건 에이슬란의 고유술식인 폭발구가 틀림없었다. 

케이시가 충격에 빠진 얼굴로 어버버하는 사이, 제라드는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폭발 마법과 홍염 마법은 꽤 상성이 좋아. 술식을 잘 조합하면 이런 것도 가능해.” 

제라드는 오른손으로는 폭발구를 유지하면서 왼손은 손바닥을 펼치며 홍염 마법을 전개했다. 

화르륵. 

이내 불꽃에 잠기는 제라드의 모습. 

두 가지의 마법이 동시에 시전된 순간이다. 

그런데 이변은 바로 그때 일어났다. 

제라드의 온몸에 잠긴 불꽃이 무시무시한 기세로 폭발구를 향해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두 개의 마법이······.’ 

폭발구의 불꽃은 중심부에서 조용히 타오르는 특징이 있었다. 바로 조금 전 제라드가 보여준 것도 정확히 그랬다. 

그런데 지금 저 폭발구는 달랐다. 

홍염 마법의 이글거리는 불꽃이 폭발구를 얇게 감싸 안고 있는 것 같았다. 

“케이시, 너도 알고 있겠지만, 나는 에이슬란 원로 마법사님을 스승님으로 모신 적이 없어.” 

“······.” 

케이시는 제라드의 말에도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머리가 하얗게 변했다. 

그녀는 전에 언젠가 정말 터무니 없는 상상을 해본 적이 있었다. 제라드의 재능이라면 마법을 보는 것만으로도 익힐 수 있다고 말이다. 

상식적으로 말도 안 되는 이야기. 

그런데 지금 이 순간, 케이시의 상식은 완벽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지금 그녀의 눈앞에 그런 터무니 없는 게 가능한 마법사가 있었다. 

어느새 불꽃은 사라졌다. 

제라드는 케이시의 놀란 얼굴을 보며 머릴 긁적였다. 

“조금 전의 마법도 흑마법사가 쓰는 마법을 보고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재정립 중이었어. 이제 내가 흑마법사 같은 게 아니라는 걸 알겠어?” 

“······제라드, 차라리 네가 흑마법사였다는 게 더 현실적일 거야.” 

“뭐? 하하하. 이제야 기분이 풀렸구나, 그런 농담도 하고.” 

제라드는 웃긴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 웃었다. 

그러나 케이시는 웃지 않았다. 

농담? 

케이시는 지금 농담을 할 기분이 아니었다. 

지금 제라드의 말이 사실이라면 지금 그따위 흑마법 따위가 문제가 아니었다. 

최초의 마법사와 7인의 마법사 이후로, 새로운 전설의 마법사가 지금 그녀의 눈앞에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회의실의 문이 열리고 마침내 네 사람이 걸어 나왔다. 

그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다 초췌한 모습이었다. 

사흘의 긴 논의 끝에 마침내 결과가 나온 것이다. 

에이슬란과 블레이즈는 모여 있는 마법사들에게 돌아와 짧은 말을 전하였다. 

“모두 떠날 채비를 해라. 우리는 이 길로 산도르 마탑으로 돌아간다.” 

“협곡의 내부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마법사들이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있었는가를 묻기 시작하였다. 

에이슬란으로서도 예상하지 못한 질문이 아니었다. 

다만, 이걸 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해야 할는지 그게 난감하였다. 

‘엘프에 세계수······ 그리고 흑마법사가 연관된 사실까지. 지금 이 사실은 무턱대고 공표할 게 아니라, 탑주님과 먼저 상의하는 게 먼저다. 하지만 설명은 해야 할 텐데. 어쩐다.’ 

에이슬란이 그렇게 잠깐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무엇이 그리들 궁금한가? 간단한 걸세. 흑마법사가 알타자르 산맥에서 야만족들을 데리고 수상쩍은 짓을 하기에 잡으러 들어가서 흑마법사 우두머리만 잡고 나온 걸세. 별로 어려울 것도 없는 이야기지. 그리고 나머지 자세한 이야기는 마탑에 가면 탑주님이 들려주실 게야. 자자, 일단은 돌아가세나. 설명은 나중에 해도 늦지 않아. 지금은 집에 돌아가자고. 난 여기가 아주 질려버렸으니 말이야.” 

블레이즈가 나서서 상황을 종료해버렸다. 

‘블레이즈의 방식은 나로서는 흉내도 못 낼 방식이다.’ 

말을 어떻게 할까 생각하던 에이슬란은 황당하다는 얼굴로 이내 고개를 젓다가 저편에 서 있는 제라드를 눈에 담았다. 

‘제라드 란스터. 크루드 마탑의 1급 마법사······.’ 

에이슬란은 블레이즈에게 대략적인 이야기를 모두 들었다. 

‘나의 폭발 마법을 사용했다고? 단지 보는 것만으로도 다른 사람의 마법을 그대로 터득할 수 있는 마법사인가. 그런 말도 안 되는 게······.’ 

에이슬란은 복잡했다. 

제라드는 자신의 제자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폭발 마법을 터득하였고 사용하고 있었다. 

‘이건 확실히 그냥 잠자코 넘어갈 문제는 아니로군.’ 

그그그긍. 

해가 뉘엿뉘엿 저물기 시작할 즈음, 감시자의 요새 남쪽 성문이 열렸다. 

조사단 마법사 오십여 명이 요새를 떠날 때가 된 것이다. 

켄터스 백작가의 병사들과 시그너스 기사단은 그들을 배웅하고 있었다. 

“고마웠습니다.” 

“별말씀을요. 다음에 뵐 수 있겠죠. 그땐 크룩스 경도 함께였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그러길 바랍니다.” 

오리온과 제라드는 그렇게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시그너스 기사단과 백작가의 병사들은 다음 명령이 떨어지기 전까지 요새에서 머무르기로 하였으니, 오늘 이곳을 떠나는 건 산도르 마탑의 조사단 마법사들뿐이었다. 

“요새에 새로 주둔하게 될 마법사에 관한 일은 이후, 마탑에서 구체적인 조율이 있을 겁니다.” 

“예, 알겠습니다. 신경 써주셔서 고맙습니다.” 

“별말씀을.” 

에이슬란과 로갈, 그리고 토레스 남작의 마지막 인사를 끝으로, 조사단의 마법사들은 모두 말 위에 올라 남쪽의 큰길을 향해 나섰다. 

“이럇!” 

히히히힝. 

다그닥. 다그닥. 

오십여 기의 말이 일정한 대열을 이루어 남쪽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하였다. 

어둠을 헤치며 달려나가는 조사단 대열. 

이런 와중에 케이시는 오늘 이후로 줄곧 제라드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으니. 

‘얼굴이 뚫어지겠는걸.’ 

제라드는 그녀의 시선을 피해서 저 멀리 남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어느새 세상은 어둠에 물들었고, 하늘엔 별이 가득하였다. 이런 속도라면 아무리 늦어도 사흘 안에 마탑에 당도할 것이다. 

‘마탑에 돌아가면 차분하게 찾아보자. 아니, 다시 한 번 엘레멘탈 마스터의 기록에 접속해보는 것부터 시작해보는 거야. 내가 혹시라도 놓친 게 있을지도 몰라. 이 시대가 기억하지 못하는 여덟 번째 속성이 말이야.’ 

불, 물, 얼음, 벼락, 땅, 빛, 바람. 

그리고······ 어둠. 

제라드는 어쩌면 흑마법의 기원이 거기에서 출발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다다랐다. 

생각에 잠긴 제라드. 그리고 그런 제라드의 옆에서 둥실 떠있는 베리타스의 눈동자는 제라드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 귀환3 -유료 연재 시작 > 끝

ⓒ 양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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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환4 >

조사단의 이동속도는 아주 빨랐다. 

켄터스 백작군과 합류한 이후로 꼬박 이틀을 지나왔던 길은 밤이 다 가기도 전에 지나쳤다. 

그렇게 꼬박 이틀하고 반나절이 채 지나기도 전에 그들은 평야의 끝자락에 다다랐다. 

강행군이나 다름없었으므로 말들은 몹시 지쳐 있었고, 마법사들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물론, 그렇지 않은 이들도 있었다. 

블레이즈의 제자들과 제라드가 그러했다. 

블레이즈는 마법사들도 어느 정도의 격투술과 체력은 익히고 있어야 한다는 지론이 있었으므로, 그의 제자들은 다 체력이나 몸이 아주 좋은 편이었다. 그리고 제라드 역시 어렸을 때부터 육체의 그릇을 단련해오는 작업을 꾸준히 해왔기에 체력이 아주 좋은 편이었다. 

“에잉. 쯧쯧. 죄다 약골뿐이군. 이래서 요즘 마법사들이 안 되는 거야. 제자들아, 이제 알겠느냐, 이 스승의 참뜻을!” 

블레이즈는 지친 기색이 역력한 마법사들에게 모두 들으라는 듯 그렇게 큰소리를 치다가 저 뒤쪽에서 말없이 생각에 잠긴 얼굴로 쫓아오는 제라드를 보면서 혀를 내둘렀다. 

‘허! 저 괴물 같은 녀석을 보았나. 마법에 정령까지 사용하면서 체력도 좋고 말까지 저리 잘 타다니······.’ 

“저 마법사님은 정말 못하는 게 없는 것 같습니다. 스승님께선 대체 저런 제자를 언제 들이셨습니까? 저희에겐 말씀도 없으셨잖습니까.” 

“다 말하지 않았더냐. 6년 전에 말이야.” 

“6년 전이라면······ 크루드 마탑에 가셨던 그때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하지만 그땐 정말 얼마 안 되는 시간이지 않았습니까.” 

“그 얼마 안 되는 시간 만에 배운 마법을 저렇게 쓰고 있는 거다.” 

“허억······.” 

“로퍼스, 내 분명히 전에도 말했을 테지만, 저 녀석에 한해서는 의문을 갖지 마. 그냥 드래곤이라고 생각해. 날개가 있으니 나는 거고, 이빨이 있으니 물어뜯는 거겠지. 그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편할 게야. 난 그렇게 생각한다.” 

“······.” 

블레이즈의 말을 들으며 마라칸과 로퍼스는 점점 더 제라드가 무서워졌다. 그건 바로 그의 뒤를 따르는 케이시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블레이즈의 태도를 보아하니, 그는 제라드가 얼마나 비상식적인 존재인지 이미 잘 알고 있는 듯했다. 

‘스승님의 말씀처럼 정말로 드래곤일지도.’ 

케이시도 이내 진지하게 그렇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렇지 않으면 머릿속이 터질지도 모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는 사이, 머잖아 구릉지대가 나타났다. 

드디어 드넓은 평야를 빠져나온 것이다. 

머잖아 해가 그들의 머리 위를 지나쳐가기 시작하였고, 몇 개의 언덕을 넘었을 때, 조사단은 마침내 구릉지 너머에 우뚝 솟은 탑을 발견했다. 

드디어 산도르 마탑에 당도한 것이다. 

“워워!” 

히히힝! 

말들이 마탑의 입구에 멈춰서자. 

그그그긍. 

마탑의 입구는 그들이 누구인지 안다는 것처럼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어서오게.” 

산도르 마탑의 탑주, 다일론이 그들을 맞이하였다. 

10 

“······엄청난 일이 있었군.” 

원로급 마법사 두 사람에게 보고를 받으며 다일론은 심각한 얼굴로 말을 잇지 못했다. 

“탑주님, 이 일은 그냥 넘길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다른 마법사와 마탑에도 이 사실을 전하여, 대규모 수색대를 조직해야 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엘프가 지키는 세계수에 흑마법사들의 움직임이 관측된 상황. 그들이 지금은 잠깐 물러났다고 해도 또 언제 나타날지는 아무도 모를 일입니다.” 

에이슬란은 감시자의 요새의 회의 때부터 생각해왔던 것을 모두 쏟아내며 자기 의견을 강력하게 주장해왔다. 

“흑마법사들의 준동은 지금껏 각지에서 산발적으로 그리고 대개는 조용히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이번 일은 다릅니다. 그들은 어떤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움직였고, 그 움직임은 계획적이고 치밀했습니다. 이 일이 심상치 않은 어떤 일의 전조가 아닐는지요. 탑주님, 결단을 내려주십시오.” 

그 강경한 발언에 다일론은 침묵을 지키다가 블레이즈를 향해 힐끗 고개를 돌렸다. 

“블레이즈, 자네는 직접 그 현장에 있었네. 그리고 가장 처음 이 상황에 개입하였지. 자네 생각은 어떤가?” 

“음, 글쎄요. 에이슬란의 말은 일리가 있습니다. 확실히 그의 말처럼 이번 흑마법사들의 준동은 심상치 않습니다. 하지만 제 생각은 에이슬란과는 다릅니다. 아마도 알타자르 산맥에 흑마법사들이 모이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거 흥미로운 의견이군.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나?” 

“그들은 이번 일에 상당한 전력을 투입하고도 실패했습니다. 그곳에 있었던 흑마법사들의 수는 아주 많았습니다. 50명을 가뿐이 넘겼어요. 거기다가 세 개로 나뉘어 있는 엘프 일족 중 두 개의 일족들을 자기편으로 만든 상태였습니다. 그런데도 실패했습니다. 가장 핵심이 되는 실패 요인은 이미 말씀드렸다시피 제라드 란스터 때문입니다.” 

“으음, 자네 말처럼 그의 역량은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야. 그가 이번 일을 해결할 것 같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그게 이렇게 분명한 결과로 나올 줄은······.” 

다일론의 말에 블레이즈나 에이슬란 두 사람 다 아무도 말을 잇지 못했다. 그들 세 사람 모두 제라드의 능력 일부를 직접 보거나 느낀 사람들이었다. 

“어쨌든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지. 제라드가 이 일에 개입되어 있다는 것과 저들이 다시 알타자르 산맥에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에 어떤 연관이 있다고 보는가?” 

“제가 이야기를 나누었던 엘프 하늘봉우리의 수호자는 세계수가 그를 이곳에 인도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모든 상황이 정리된 후에 제라드가 세계수와 접촉하게 되는 건 당연한 수순일 겁니다. 그리고 여기서부턴 순전히 제 추측과 상상의 영역입니다만, 아마도 제라드는 흑마법사들이 눈독 들였던 무엇인가를 손에 넣었을 것 같습니다.” 

“무엇인가? 자넨 그게 성유물일지도 모른다고 말하고 싶은 것인가?” 

“성유물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아마도 그런 비슷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흠, 점점 더 이야기가 흥미로워지는군. 자네가 그렇게 생각하는 데에는 어떤 명확한 이유가 있겠지. 왜 그렇게 생각하나?” 

두 사람의 시선이 쏟아지는 가운데, 블레이즈는 잠깐 답을 미루었다. 이걸 이야기하는 게 좋을지 어쩔지 판단이 잘 안 섰기 때문이다. 하지만 딱히 숨길 이유도 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탑주님께서는 정령술을 쓰는 인간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보셨습니까?” 

“정령술?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인가? 정령술을 인간이 사용한다는 건 말이 안 돼. 그건 인간에게 허락된 힘이 아닐세. 푸른 마녀들조차도 그 힘과 정확히 교감하는 게 아님은 그대도 알 텐데?” 

“예, 맞습니다. 그들은 그렇죠.” 

블레이즈가 그렇게 말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자 다일론과 에이슬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제라드가 정령술을 사용할 수가 있단 말인가?” 

11 

 그 무렵, 제라드와 케이시는 고층의 마법시험장에서 서 있었다. 지금 이곳엔 오직 두 사람뿐이었다. 

“······지금부터 내가 사용할 마법은 아무도 알지 못하는 마법이야. 아직 마법이 안정화가 되지 않아서, 실전에 사용할 수준은 아니라고 생각하거든. 내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는 알겠지?” 

“응. 그걸 똑같이 재현해보라는 거지?” 

“그래, 맞아. 할 수 있겠어?” 

“물론이지. 할 수 있어.” 

제라드는 망설임 없이 그렇게 대답했다. 

케이시는 그날 이후로, 제라드에게 수도 없이 마법에 관한 걸 물어왔다. 마치, 봇물이 터진 것처럼 말이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좋아, 그럼 간다.” 

그 순간, 케이시가 마나를 개방했다. 

그녀의 몸에 불꽃이 휘감겼다. 

불꽃은 점차 기세를 더하였고, 양손에 그 기운의 태반이 모여들었다. 

제라드가 두 눈을 똑바로 뜨고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마침내 그녀는 호흡을 크게 들이마시더니 왼팔을 앞으로 쫙 펼치고 오른손은 무엇인가를 꽉 쥐고 잡아당기는 듯한 모습을 취하였다. 

그 모습은 흡사 활시위를 당기는 것처럼 보였다. 

그건 단순히 자세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왼손엔 불꽃의 활이 들려 있었고, 오른손에는 불꽃의 화살이 있었다. 

고오오. 

팽팽하게 당겨진 힘이 점차 강해지기 시작하였다. 

“대단한걸.” 

제라드가 그 마법을 보면서 그렇게 평가했다. 

케이시가 지금 보여준 새로운 홍염 마법의 제어식은 지금까지의 사용법과는 완전히 궤를 달리하는 방식이었다. 

홍염 마법은 애초에 전투를 위해 만들어진 마법임에도 원거리 교전에서는 유난히 취약한 편이었다. 

그런데 지금 케이시는 그 약점을 극복하는 새로운 제어식을 만들어낸 셈이었다. 

홍염의 화살. 

‘하지만 조금 술식이 불안정한걸.’ 

“윽.” 

케이시가 눈살을 찌푸렸다. 

정점에 다다르기 직전 홍염의 활의 형태가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한 번 발생한 흔들림은 이내 마법 전체의 균열이 되었다. 

케이시의 이마에 굵은 땀방울이 흘러내리기 시작하였다. 

마법이 실패한 것이다. 

그녀는 차분히 마법을 거두기 시작하였고, 이내 마법의 기운은 서서히 사그라지면서 모습을 감추었다. 

“후우우.”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 케이시의 얼굴. 

“미안. 잠깐만 기다려줘. 곧 다시 할게. 마법의 안정화가 아직 되지 않아서 그런 거야. 한 번만 더 하면 분명히 제대로 할 수 있을 거야.” 

그녀가 그렇게 말하며 정신을 집중하고 있을 때였다. 

별안간 눈앞에서 불꽃이 화륵 치솟았다. 

제라드의 불꽃이었다. 

“잠깐만, 조금 전은······.” 

“괜찮아, 네가 도움이 필요했던 부분. 내가 도와줄 수 있을 것 같아.” 

제라드는 그렇게 말하며 마나를 개방했다. 

쿠웅. 

케이시는 깜짝 놀란 얼굴을 했다. 

제라드의 마나 코어에 잠들어 있는 마나가 거대하다는 것쯤은 진작 알았지만, 당장 눈앞에서 그 마나를 실감하는 것은 멀리서 감지하는 것과는 또 느낌이 달랐다. 

‘이건 거의 스승님의 마나를 눈앞에서 느끼는 것과 비슷한걸.’ 

그렇게 생각했을 때였다. 

제라드는 케이시가 했던 것처럼 보이지 않는 활을 손에 쥔 것처럼 하늘을 향해 손을 뻗었다가 오른손으로 시위를 잡아당기며 자세를 잡았다. 

어느새 그의 손에는 홍염의 활과 화살이 존재하고 있었다. 

“세, 세상에······.” 

케이시의 동공에 지진이 나는 와중에 홍염의 화살은 점점 더 그 기세를 더해가기 시작하였다. 

고오오오오. 

온몸에 휘감긴 불꽃이 점차 화살에 빨려 들어가면서 에너지가 압축에 압축을 거듭한다. 

케이시는 마른침을 삼켰다. 

저것이다. 

바로 저것이 그녀가 상상해왔던 이 마법의 이상적인 형태였다. 

그 마법의 결과에 정신없이 취해있던 케이시. 

머잖아 홍염의 활과 화살은 흩어지기 시작하였고, 이내 불꽃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아······.” 

케이시는 작게 탄식하였고, 제라드는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술식 구조에 조금 불안정한 부분이 있어서 수정해봤는데, 어때?” 

“······완벽했어. 내가 지금까지 구상하고 상상해왔던 그 이상적인 형태의 마법이었어.” 

“잘됐다. 그럼 내가 도와줄 수 있을 것 같은데. 괜찮아?” 

제라드가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도와줘도 괜찮겠느냐는 상냥한 물음. 

케이시는 그 모습에 피식 웃고 말았다. 

제라드는 여전히 똑같았다. 

“응, 도와줘.” 

“그래, 알았어.” 

제라드는 기쁘게 웃었다. 

케이시는 자신이 몇 년을 자그마치 4년이 넘는 시간 동안 연구해왔던 마법이 단 한 번에 눈앞에서 완성되는 것을 보고도 이상하게 분하다는 생각이 안 들었다. 

‘신기한 사람.’ 

“제라드, 혹시 말이야. 나한테 더 말하지 않은 게 있는 거 아니야?” 

케이시가 그렇게 말하며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하였다. 

“솔직히 말해봐. 드래곤, 뭐 그런 거 아니야? 옛날에 드래곤은 마법으로 사람으로 둔갑하고 그랬다던데. 혹시 꼬리를 숨기는 거 아니야?” 

“뭐?” 

제라드가 웃기 시작하자, 케이시도 킥킥 웃었다. 

 12 

제라드는 공식적으로 공방 하나를 받게 되었다. 

조사단이 도착한 뒤로 불과 하루도 채 지나기 전의 일이었다. 제라드는 자신을 위한 공방 따위는 정말로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실제로 제라드에게 필요한 건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작은 방이면 충분했다. 

이를테면 케이시의 공방 안에 있는 작은 창고 같은 곳 말이다. 하지만 블레이즈는 그럴 수는 없다고 딱 잘라 말하였고, 다일론도 공방 하나를 내주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 덕분에 제라드는 지금 휑한 공방의 한가운데에 홀로 서 있었다. 

“휴. 난감한걸.” 

블레이즈는 정말로 제라드가 산도르 마탑에서 오래오래 있기를 바라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제라드는 이곳에서 오래 있을 이유가 없었다. 블레이즈의 마법도 다 배웠고(정확히 가르침을 받은 적은 없지만), 그는 산도르 마탑의 마법사도 아니질 않은가. 

“정말 블레이즈 스승님은 엉뚱한 분이시라니까.” 

제라드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어쨌든 자신만의 공간이 필요했던 것은 사실이었으니, 당분간은 이곳에서 하나씩 정리를 해나가야 할 것 같았다. 

“일단 1종 비문부터 싹 훑어보자. 그리고 그다음은 마법과 정령. 그 두 가지를 접목할 어떤 방법이 없는지도 연구를 계속해나가는 거야.” 

할 일은 한둘이 아녔다. 

제라드의 눈동자는 열의로 반짝거리며 빛났으니. 

공방에서 두문불출하며 제라드는 엄청난 집중력으로 마법에 빠져들었다. 

휑하였던 공방에는 양피지 더미로 수북하게 쌓였고, 제라드는 그런 상태로도 집중력을 거의 잃지 않고서 미친 듯이 머릿속에 바로바로 정립되거나 떠오르는 것들을 써내려갔다. 

“베리타스, 다음 정보. 나열해봐.” 

제라드의 말과 함께 베리타스는 책장을 열고 한 번에 열 권이 넘는 서적들을 펼쳤다. 

한 번에 동시다발적으로 떠오르는 정보를 수용하고 그걸 압축하여 정리해나가는 과정. 

제라드의 머리는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는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도 알지 못했다. 

그렇게 얼마나 긴 시간이 흘렀을까. 

똑똑. 

별안간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우뚝. 

펜을 멈춘 제라드는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퀭한 눈빛에 초췌한 얼굴이었지만, 그 눈빛은 처음과 똑같이 빛나고 있었다. 

‘누구지?’ 

제라드는 눈살을 찌푸렸다. 

공방의 문을 꾹 닫아놓고 있는데, 굳이 문을 두들기다니. 

이건 비상식적인 일이었다. 

제라드가 드물게 투덜거리며 공방의 문을 열었을 때였다. 

“어?” 

“이런. 아주 엉망인 얼굴을 하고 있구나, 제라드.” 

“스, 스승님!” 

제라드가 깜짝 놀란 얼굴을 했다. 

케이틀란이 문 앞에서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 귀환4 > 끝

ⓒ 양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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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환5 >

13 

“스, 스승님께서 대체 여기에 왜······.” 

“자세한 이야기는 안에서 하자꾸나. 설마, 여기에서 이야기를 듣고 싶은 건 아니겠지?” 

“아, 어서 안으로 들어오세요. 좀 어지러운······ 정도가 아니네요······.” 

제라드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공방 안으로 케이틀란을 안내하다가 엉망진창이 되어 있는 공방의 모습을 보고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케이틀란은 껄껄 기분 좋게 웃을 따름이었다. 

“허허. 대단하구나, 제라드. 이 휑한 공간에 이 수북한 양피지에 적힌 빼곡한 마법술식을 보니, 네가 어엿한 한 명의 마법사라는 걸 알겠구나. 부끄러워하지 말거라. 마법사의 공방이란 늘 이런 법이야.” 

“한참 마법을 연구하던 중이라서, 많이 지저분하네요. 스승님이 오시는 줄 알았으면 미리 정리해두었을 텐데······.” 

“됐다, 됐어. 그런 건 신경 쓰지 마라. 너와 내가 그런 거나 신경 쓸 사이는 아니니 말이야. 그보단 그동안의 네 이야기가 좀 듣고 싶구나.” 

“네, 전부 다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제라드는 케이틀란에게 그동안의 이야기를 모두 하였다. 

크루드 마탑을 벗어나 란스터 백작가에 갔던 일. 마탑에 나타났던 푸른 마녀들과 스펠 브레이커. 그리고 북부에서의 일까지. 

그 긴 이야기가 끝나는 동안, 케이틀란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모든 이야기를 다 듣고만 있었다. 

“······그동안 정말로 많은 일이 있었구나. 크루드 마탑을 나온 뒤로 그렇게 많은 시간이 지나지도 않았는데. 흐음, 그래서 그 많은 일을 겪으면서 힘들지는 않았더냐?” 

“전혀 힘들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죠. 어려운 일도 있었고 화가 나는 일도 있었지만, 대부분 잘 해결되었고, 아직 풀리지 않은 문제는 앞으로 하나씩 해결해나가면 됩니다.” 

자신감 넘치는 대답이었다. 

제라드의 마법에 관한 재능은 더 말할 것도 없었지만, 여느 부모들이 그러하듯, 케이틀란은 마음속 한편으로는 늘 제라드를 걱정해왔다. 그렇기에 걱정이 안 됐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모든 게 기우였구나! 제라드는 이미 자신의 길을 잘 걸어나가고 있다.’ 

그 어리던 제자가 어느새 이토록 잘 성장하였는지. 

케이틀란은 그저 뿌듯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어 웃을 따름이었다. 

“제라드, 그래서 애초에 이곳에 온 목적은 어찌 되었느냐? 네 또 다른 스승의 마법은 좀 익혔느냐?” 

“예, 어느 정도는요.” 

“어느 정도라, 모호한 표현을 쓰는구나. 후후후.” 

케이틀란은 제라드가 블레이즈를 배려하기 위해 그와 같은 표현을 썼음을 바로 눈치챘다. 

‘역시 1년도 걸리지 않았군. 아니, 1년이 다 뭐란 말인가?’ 

지금 제라드의 반응을 보자면 이미 블레이즈의 마법은 전부 다 제라드의 것으로 흡수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터였다. 

‘블레이즈의 안색이 아주 창백해졌을 게 눈에 훤하구나. 그 표정을 보지 못한 게 아쉬울 지경이야.’ 

“그런데 스승님께선 여기에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혹시 또 흑마법사와 관련한 어떤 문제가 생긴 겁니까?” 

“아니다. 그런 게 아니니 걱정할 것 없다. 내가 산도르 마탑을 찾아온 건 지극히 개인적인 일 때문이다.” 

“개인적인 일이요?” 

“음.” 

케이틀란은 잠깐 뜸을 들이다가 이내 크루드 마탑에 찾아왔던 바라드 자작에 관한 이야기부터 시작하였다. 감정을 배제하고 최대한 객관적으로 말이다. 

제라드의 얼굴은 이야기가 시작된 후부터 바로 굳더니, 이내 타이온이 제라드를 만나고 싶어한다는 대목에서는 살짝 눈살을 찌푸릴 정도였다. 

“아무래도 차분히 생각할 시간이 좀 필요할 게다. 그동안 나는 블레이즈를 만나고 오마. 길게 생각해보고 그의 공방으로 오너라. 그곳에서 답을 기다리고 있으마.” 

케이틀란이 그렇게 말하며 공방을 나섰다. 

공방에 홀로 남은 제라드의 미간엔 골이 파여 있었다. 

‘아버지께서 나를 찾는다고?’ 

6년. 

공작가를 떠난 뒤로 지금까지 자그마치 6년이었다. 

그동안 공작가에서는 제라드를 단 한 번도 찾지 않았다. 

제라드 그라우드의 존재는 세상에서 완전히 지워진 것이다. 

그러나 제라드는 그걸 섭섭해하거나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제라드에겐 케이틀란과 마법이 있었기 때문이다. 

공작가가 제라드를 떠나보낸 것처럼 제라드 역시 그라우드 공작가를 떠나보냈다. 

그런데 장장 6년이라는 시간이 지나서, 지금 공작가에서······ 아니, 정확히는 아버지가 그를 찾고 있었다. 

‘내가 마법사가 되었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겠지. 그렇지 않으면 아버지께서 나를 찾을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내가 바보가 아니라, 쓸만한 인간이 되었기 때문에 나를 찾는 거야.’ 

제라드는 주먹을 꽉 쥐었다. 

제라드를 바보라고 무시했던 사람들의 면면이 지금 이 순간에도 두 눈에 훤하였다. 

‘스승님께서 굳이 이곳에 직접 찾아오신 것도, 내 마음을 헤아려서겠지. 지금의 나를 누구보다 가장 잘 아시는 분은 바로 스승님이니까. 그리고······ 선택은 나의 몫이라는 거다.’ 

케이틀란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담담하게 사실을 전하였고, 그 선택은 제라드에게 맡겼다. 

“나는······.” 

제라드는 한참 침묵을 지켰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제라드는 천천히 고개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휘이이잉. 

별안간 공방의 내부에 바람이 불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마법의 바람이 아니다. 

밖에서 들어오는 바람이 이 공방 안을 휘감았다.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양피지가 하늘 높이 날아올랐고, 머잖아 손바닥에 잘 정리되어 쥐어졌다. 

이 양피지에 적힌 것은 모두 여덟 번째 속성에 관한 마법이었다. 폐기된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 

그러나 이걸 굳이 남겨둘 필요는 없으리라. 

왜냐하면, 그 내용에 관한 것들은 이미 모두 그의 머릿속에 있으니까. 

화르륵! 

양피지가 불꽃에 휩싸여 흩날렸다 

여덟 번째 마법을 증명하기 전에 하고 싶은 일이 생겼다. 

제라드는 방을 나섰다. 

그가 지금 향하는 곳은 블레이즈의 공방이었다. 

14 

“그래, 결단은 선 모양이로구나.” 

“네.” 

흔들림 없는 눈동자. 

케이틀란은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지만, 저 옆에 있는 블레이즈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녀석아, 그래서 어쩔 셈이냐? 네, 라고 대답하기만 하면 뭘 어찌하겠다는 것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지 않으냐. 그 뒤에 어떻게 하겠다, 이런 말을 해야지.” 

“저, 공작가에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잘 생각했다.” 

케이틀란은 긴말은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제 그의 제자는 품에 들여놓고 하나하나 가르쳐야 하는 애가 아니기 때문이다. 

‘마탑에서 나온 후로 제라드가 겪은 수많은 일들은 다른 마법사들도 다 겪기 어려운 경험들이다. 그 모든 것을 혼자 잘 생각하고 판단하고 결정해온 제라드다. 이젠 그 어떤 일도 홀로 잘 감당할 것이다.’ 

그리고 케이틀란 개인적으로도 제라드가 공작가에 다녀오길 바라는 마음이 컸다. 

그러나 블레이즈는 케이틀란처럼 순순히 제라드의 뜻에 호응하지 않았으니. 

“뭐야, 산도르 마탑을 떠나겠다는 거냐? 공방까지 기껏 만들어놨는데 벌써 가는 건 말도 안 되지! 그리고 아직 크흠! 마법도 다 안 가르쳤는데 말이야. 가긴 어딜 가겠다는 거야?” 

“블레이즈, 억지 부리지 말게.” 

“억지라니? 이 블레이즈의 마법을 뭐, 대충 눈대중으로 다 익힐 수 있을 줄 알았나? 어림도 없지. 녀석아, 너 아직 다 배운 거 아니다. 그게 아니면 설마, 대충 배우고 이 블레이즈의 마법을 전부 다 익혔노라고 말하고 다닐 건 아니겠지?” 

블레이즈가 눈을 가늘게 뜨고 무섭게 노려보자, 제라드는 이내 킥킥 웃었다. 

험악한 블레이즈가 언성을 높이고 인상을 팍팍 쓰면 보통 사람들은 대부분 움츠러들기 마련이었는데, 제라드는 오히려 웃었다. 

“뭐, 뭐냐! 뭐가 웃긴 거냐, 이 녀석아!” 

“음, 알겠습니다. 그럼 나머지는 나중에 익히면 어떨까요? 그때까진 제가 쓰는 홍염 마법은······ 그냥 적당히 제라드식 불꽃 마법이라고 부를게요.” 

“뭐, 뭐라? 이 녀석! 그건 내 마법이야! 네놈이 쓰는 그건 내 홍염 마법이라고! 누가 멋대로 네 녀석의 이름을 갖다 붙여!” 

“하지만 전 홍염 마법을 다 익힌 게 아닌데, 어떻게 스승님의 이름을 더럽힐 수가 있겠습니까.” 

“이, 이 녀석이······. 꼬맹이 때는 이렇게 능글맞지 않았던 것 같은데, 애를 왜 이렇게 만든 거냐?” 

“허허. 왜 나한테 그러나? 자네가 이상한 억지를 부리니, 저 아이도 딴에는 반격을 한 셈인데.” 

“스승에게 반격 같은 걸 하는 게 문제라는 거다!” 

블레이즈가 씩씩대는 걸 보면서 제라드는 계속 웃었고, 케이틀란도 마찬가지였다. 

“웃는 얼굴에 대고 화내고 있을 수도 없고······. 에잇! 너 괴물 녀석아, 날 따라와라. 내가 그래도 네 녀석한테 스승이라고 불리는데 뭐 하나라도 알려주고 보내야 속이 편하지 않겠느냐.” 

15 

시험장에는 블레이즈와 그의 제자들이 모두 나와 있었다. 

화륵. 

블레이즈의 몸이 불꽃에 휘감겼다. 

“내가 지금 알려주려고 하는 제어식은 사실 자체만 두고 보자면 썩 대단한 건 아니다. 하지만······.” 

슥. 

섀도우 마법을 펼쳐서 단숨에 제라드의 코앞까지 당도한 블레이즈. 

“이 정도의 거리에서 몇 가지 복합적인 동작과 함께 펼쳐지면 얘기가 다르지. 상대를 반드시 파괴하는 아주 치명적인 마법이 된다. 뭐, 저 녀석은 이 마법이 몹시 못마땅한 모양이지만 말이야.” 

블레이즈가 힐끗 가리킨 곳에 서 있는 케이틀란은 아주 노골적으로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스승님께서는 마법사가 전투에 나설 때에는 무조건 거리를 벌려야 한다는 게 기본적인 생각이시니까 이 부분은 상충할 수밖에 없겠지.’ 

그러나 제라드는 마법의 효율과 비효율을 떠나서 새로운 형태의 마법을 보는 것만으로도 몹시 기대되었다. 

“제대로 볼 수 있을까요?” 

“흥! 보는 걸로 충분하다는 거냐.” 

“네.” 

“좋다, 딱 한 번 정확하게 보여주마.” 

블레이즈는 그렇게 말하더니, 느릿한 자세로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그 순간, 그의 몸에 휘감긴 불꽃이 주먹으로 모여드는 게 보였다. 

‘음, 홍염 마법을 유지한 상태에서 불꽃을 주먹 한 곳으로 모으는 술식이구나.’ 

몸 전체에 균일하게 퍼져있는 홍염은 오른손과 어깨 언저리로 모여들었다. 

주먹은 모여든 에너지가 폭발하는 핵이 되고, 어깨에서 분사하는 불꽃은 추진력으로 작용하게 되는 것이다. 

“합!” 

블레이즈가 섀도우 마법과 함께 어깨 뒤쪽에서 분사되는 불꽃의 추진력으로 엄청나게 가속하더니, 순식간에 목적지점에 다다라 주먹을 휘둘렀다. 

열풍이 사방으로 매섭게 쏟아지는 와중에 블레이즈는 오른손 주먹을 폈다. 

투화아아악! 

불꽃이 뿜어져 나오듯이 앞으로 터져 나왔다. 

일순 쏟아지는 불꽃의 폭발력은 에이슬란의 폭발 마법에 비해도 전혀 부족함이 없을 지경이었다. 

제라드를 제외한 세 명의 제자들도 이 새로운 마법에 놀라워하는 가운데, 케이틀란은 아주 질렸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마스터 엑셀란님의 기술에 마법을 붙이다니······. 블레이즈는 정말 괴짜 중의 괴짜로구나. 저건 이미 마법사가 아니라, 격투의 영역이다.’ 

“자, 어떠냐. 이건 너도 따라 하기 좀 힘들 거다.” 

블레이즈는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그 말대로다. 

제라드는 그가 보여준 기술이 지금껏 배워왔던 마법과는 또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이건 오히려 기사들의 움직임에 가까운걸. 동작을 완벽하게 구분 짓되, 끊어지면 안 돼. 안 그러면 자세가 모두 무너지게 될 거야.’ 

“확실히 이 마법은 연습이 필요할 것 같아요. 엄청난 마법이라는 건 확실히 알 것 같습니다, 블레이즈 스승님.” 

“그, 그러냐? 크하핫! 음, 암 그렇지. 내가 말하지 않았더냐! 네가 아직 모든 걸 배운 건 아니라고 말이야. 그러면 아직 조금 더 여기에서 머물면서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 거야. 안 그러냐?” 

“네, 하지만 이다음은 공작가에 다녀온 후에 배우겠습니다. 그래도 될까요?” 

“흐음.” 

블레이즈는 제라드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무슨 말을 해도 물러날 것 같지가 않은 얼굴이었다. 

‘그라우드 공작가와 이 녀석이 도대체 무슨 연관이 있다고 이러는 건지.’ 

블레이즈는 제라드와 그라우드 공작가가 어떤 연관이 있는지 잘 알지 못했다. 하지만 제라드의 눈빛을 보고 알았다. 

이미 그가 결단을 내렸다는 걸 말이다. 

“그래, 알았다. 다녀와라. 대신에 꼭 다시 오는 거야. 네 녀석은 아직 나한테 배울 게 많아!” 

“네, 알겠습니다. 약속하겠습니다.” 

“뭐? 약속은 뭔 약속. 그냥 오면 오는 거지. 뭔 약속까지 한단 말이냐. 그럴 것까진 없어. 그냥 뭐, 마법을 더 익히고 싶으면 오라, 이거지.” 

팔짱을 끼면서 헛기침하는 블레이즈. 

케이시나 블레이즈나 솔직하지 못한 건 비슷한 것 같았다. 

제라드는 힐끗 저편의 케이시를 보았다. 

그녀는 몹시 복잡한 얼굴이었다. 

이야기의 맥락을 가만히 들어보니, 제라드가 마탑을 떠나기로 한 모양이었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좀 나누고 오겠느냐?” 

“네.” 

“알겠다. 최상층에 가 있으마. 이야기를 끝내고 오너라.” 

케이틀란은 눈치껏 시험장을 나섰고, 블레이즈는 마라칸과 로퍼스에게 조금 전의 마법이 어떤 것인지 장황하게 설명해주기 바빴다. 

그사이, 케이시는 우물쭈물 대면서 다가왔다. 

“······이렇게 나한테 말도 없이 갑자기 떠나는 거야?” 

“갑자기 정해진 일이라서 알릴 새도 없었어. 그라우드 공작가에 볼 일이 생겼거든.” 

그 말을 듣는 순간, 케이시는 제라드를 따라나설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도 어렴풋이 제라드의 출생에 관한 이야기를 이전에 들었기 때문이다. 

“알겠어. 그럼, 언제 오는데?” 

“글쎄. 솔직히 말하면 잘 모르겠어.” 

그 대답에 케이시가 몹시 시무룩한 얼굴을 했다. 기약이 없다는 얘기다. 

침묵의 시간이 흐르는 가운데, 제라드는 케이시가 보기 드물게 울적한 얼굴로 처져있는 모습을 보면서 조세핀과 헤어지던 때를 떠올렸다. 

‘조세핀 때처럼 뽀뽀라도 해줬다가는 큰일 나겠지.’ 

제라드가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 있을 때였다. 별안간 케이시가 한 걸음 앞으로 불쑥 다가왔다. 

“그거 혹시 알아? 처녀의 입술 일종의 맹약과 같은 거래.” 

“뭐?” 

그 순간, 케이시가 제라드의 로브 앞섶을 불쑥 당겼다. 

제라드는 거칠게 달라붙는 케이시의 입술을 느끼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 뒤에서 이 광경을 무심결에 본 로퍼스가 경악하며 벌벌 떨고 있는 사이, 블레이즈와 마라칸도 제라드와 케이시를 보더니 깜짝 놀랐다. 

“저, 저런······.” 

그러는 사이, 케이시는 서서히 떨어졌다. 

“네가 어디에 있든 날 잊지 마. 그리고 돌아와.” 

케이시는 그렇게 말하더니, 벌게진 얼굴로 시험장을 나갔다. 멍청한 얼굴로 서 있는 제라드에게 씩씩거리며 다가오는 블레이즈가 보였다. 

“너, 너 이 녀석! 내 마법에 이어서 이젠 케이시까지! 으, 응? 뭐, 뭐냐······. 너 입술에서 피 난다.” 

블레이즈가 눈살을 찌푸리며 그렇게 말하자, 제라드는 자신의 입술을 닦았다. 

정말이다. 입술에서 피가 묻어났다. 

어쩐지, 케이시가 너무 세게 뽀뽀한다 싶었다. 그녀의 앞니가 제라드의 입술과 부딪치면서 살짝 찢어진 모양이었다. 

제라드가 킥킥 웃었다. 

‘뽀뽀를 너무 세게 했잖아, 케이시.’ 

한편, 복도를 달리는 케이시의 얼굴도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아으으으. 피나게 해버렸어!” 

그녀는 창문으로 뛰어내리고 싶다는 심정이 어떤 것인지 비로소 이해하게 되었다.

< 귀환5 > 끝

ⓒ 양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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