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화 (13/38)

마법과 정령

1

이튿날, 대열은 예정대로 북부로의 여정에 올랐다.

피해는 거의 없다고 해도 좋을 정도의 수준이었고, 마법사들이 보여준 전투력은 오히려 사기 진작에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어제 싸움의 주역이었던 제라드는 이제 모르는 이가 없을 지경이었고, 특히 마법사들의 관심을 독차지하였다.

“언제 적의 존재를 알아차리셨습니까?”

“그게 무슨 마법이었습니까?”

“한 번에 도대체 몇 개의 마법을 동시에 사용할 수 있는지요?”

질문과 관심은 끊이질 않았다.

이전까진 그저 눈치만 보면서 쉽게 다가오지 못하던 마법사들이 어제 일로 이성이 마비되었는지, 하나같이 흥분하여 계속 말을 계속 걸어왔다.

마법사들이 관심을 보이는 건 당연했다.

적을 찾아낸 것도, 짓밟아놓은 것도 모두 제라드가 아니던가!

제라드는 그들의 질문에 하나하나 답해주었다. 질문들은 하나같이 마법에 관한 것들이었기에 그도 즐거웠던 까닭이다.

“이제 그만들 하시죠. 이대로 감시자의 요새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 사람을 들들 볶으면서 괴롭힐 참인가요?”

“흠흠······.”

잠자코 있던 케이시가 싸늘한 태도로 마법사들에게 눈치를 주었다. 그때까지 흥분한 얼굴로 질문을 쏟아내던 마법사들은 헛기침하며 뒤로 물러났다.

“제라드 맞춰주지 마. 그건 저들을 위한 게 아니야. 스스로 답을 찾기 위해서 끊임없이 고민해야 하는 게 마법사잖아.”

제라드는 그 말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케이시의 말은 엄격했지만, 맞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케이시는 단 한 번도 제라드에게 마법에 관해서 구체적으로 물어보는 법이 없었다.

지루하게 이어지는 여정 속에서 제라드는 말없이 나아가는 오리온의 곁으로 슬쩍 다가갔다. 어제부터 줄곧 궁금한 게 한 가지 있었다.

“마법사님, 어젠 경황이 없어서 제대로 감사하다는 인사조차도 제대로······.”

“아, 아뇨! 인사는 그만두세요. 어제 원로 마법사님께서 그러지 말라고 말씀하셨잖아요. 그건 우리가 함께해낸 일이에요. 그보다는 어제 일로 한 가지 여쭤보고 싶은 게 있는데, 괜찮을까요?”

“예, 괜찮습니다. 무엇이든 제가 아는 거라면 대답해드리겠습니다.”

“경의 마지막 질문에 그 마법사는 검을 잡아라. 세상이 열릴 것이다. 그는 그렇게 대답했죠.”

“예, 그랬었지요.”

“그 대답은 정답이 아니었나요?”

“예, 아니었습니다. 저는 다시 물었었지요. 모두가 아는 그 답이 아니라, 우리끼리만 아는 진짜 답을 말입니다.”

“진짜 답이요?”

“원래 드라이곤 님께서 저희에게 하신 말씀은 훨씬 더 투박하고 멋없는 말이었습니다.”

-딱 보니 너희 두 놈은 세상에 나가서 칼밥 먹고 살게 생겼구나. 검 한번 잡아봐라!

“그렇게 말씀하셨다고요? 전혀 다른 말 아닌가요?

“하하. 그렇죠. 크룩스는 그런 이상한 건 참 열심히 하던 녀석이라······.”

오리온은 그 뒤로 크룩스와 관련한 일화를 하나씩 말해주었고, 두 사람은 킥킥대며 웃었다.

그렇게 얼마나 크룩스에 관한 이야기를 했을까, 오리온은 별안간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 크룩스는 지금 곁에 없었다.

“감시자의 요새까지 가려면 아직 이틀은 꼬박 남은 것 같은데, 풍경이 벌써 지겨워서 큰일입니다. 마법사님은 안 그러십니까?”

오리온은 애써 밝은 표정을 지으며 화제를 돌렸다.

오리온이 말한 대로였다.

대열은 그로부터 꼬박 이틀을 더 나아가서야 겨우 감시자의 요새의 앞까지 다다랐다.

광활한 평야의 저편.

하늘 끝까지 닿은 커다란 산맥과 그 앞을 지키는 수문장처럼 보이는 협곡.

드디어 문명의 접근을 허락지 않는 땅에 다다른 것이다.

제라드는 그 장엄한 광경에 넋을 놓고 지켜보고 있었다.

하늘에 닿은 산맥은 구름에 휘감겨서 흡사 하늘과 땅을 잇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제라드는 별안간 등줄기를 스치는 오싹한 감각을 느꼈다.

그리고.

[2차 확장 완료.]

베리타스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50시간이 모두 지난 것이다.

2

‘드디어 깨어났구나.’

제라드는 이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막 베리타스에게 궁금한 걸 물어보려고 할 때였다.

지끈.

별안간 머리에 찌이잉 울리는 두통이 느껴졌다.

[성유물의 수용량 및 인지 영역의 확장에 따른 결과물 적용과정. 소요 시간 약 1분 미만.]

‘적용과정이라고? 윽······.’

두통은 점차 심해졌고, 제라드의 미간에 골이 깊게 파였다. 이제 찌이잉 울리는 소리가 귓가에 가득해졌고, 머잖아 눈두덩까지 뜨겁게 달아오르는 듯했다.

그러나 그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으니.

[적용 완료.]

베리타스의 짧은 목소리와 함께 제라드는 조금 전까지의 두통이 말끔히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그렇게 질끈 감았던 눈을 서서히 뜨고 고개를 들었을 때였다. 제라드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건······.”

지난 며칠간 지겹도록 보았던 정경. 눈앞에 보이는 거인의 협곡과 알타자르 산맥을 제외하면 이제 특별할 것도 없는 평야였다.

그러나 지금 제라드에겐 모든 것이 전혀 새롭게 보였다.

그도 그럴 수밖에.

지금 이 순간, 제라드의 눈엔 전에 없던 것들이 보였다.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초록빛의 작은 요정들이 날아다녔고, 땅바닥엔 갈색의 진흙더미 같은 요정들이 느리게 움직여 다녔다.

생명체가 아님에도 한없이 생명체와 같은 존재.

제라드는 그게 무엇인지 직감했다.

“정령.”

‘베리타스가 말했던 인지 영역의 확장이라는 건 말 그대로의 의미였구나. 나는 정령을 볼 수 있게 된 거야.’

제라드는 경이에 가득 찬 얼굴로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그러자 하늘을 자유롭게 날던 초록빛 요정이 제라드의 부름에 응하듯이 다가와서 손 언저리에서 노닐었다.

그들의 존재감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만약 여기에 마나를 움직이면 어떻게 되는 거지?’

제라드는 손끝에 마나를 흘렸다.

그 순간, 노닐던 바람의 정령이 꺄르르 웃으며 더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하였고, 이내 몸집을 크게 키우기 시작했다.

휘오오오.

제라드의 주변으로 점차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신기하였다. 그저 마나를 주입하는 것만으로도 바람의 정령들은 제라드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는 것처럼 그대로 구현하고 있었다.

‘놀라운걸. 이건 어떤 의미에서는 마법의 상위에 있는 법칙 같아. 만약 정령의 힘과 마법을 하나로 섞으면 어떻게 되는 거지? 정령이 마법의 힘을 더욱 강력하게 만들지 않을까?’

새롭게 세운 가설에 머리가 핑핑 돌아갔다. 만약 마법과 정령이 하나로 합쳐질 수 있다면 그것은 최초의 마법사조차도 감히 다다르지 못한 영역이 틀림없을 터였다.

‘좋아, 조금 더 확인해보자.’

제라드는 오른손에 바람의 마법을 일으켰다.

그러자 조금 전까지 기분 좋게 노닐던 정령들이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였다. 마나가 자유롭지 않고 마법이라는 일정한 틀에 형성된 순간부터였다.

부드럽게 일어나던 바람은 그쳤고, 마법의 바람이 그 자리를 대신하였다.

‘흐음, 양립할 수 없다는 건가? 아니, 아니야. 아직 그렇게 단정 짓는 건 너무 일러. 마법의 틀이 너무 작아서 그럴지도 몰라. 마법의 틀 자체가 커지게 되면 조금 달라질지도 모르지.’

제라드는 자신의 세계에 깊이 빠져들었다.

무수한 가설이 동시에 머리를 스치고 그것을 교차 검증하는 과정이 이루어지면서 가설이 폐기되고 다시 새로운 가설이 그 뒤를 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새로운 영역을 엿보는가?”

별안간 들려오는 에이슬란의 또렷한 목소리에 제라드가 고개를 들었다.

휘오오오오!

그를 중심으로 무시무시한 바람이 회오리치고 있었다. 바람의 기세가 몹시 강렬했던 나머지 제라드는 이미 폭풍의 눈이 된 상태였다.

대열은 붕괴 되어 있었고, 뒤따르던 병사 중 여럿은 이미 떠밀려나가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헉!”

제라드는 깜짝 놀라서 다급히 바로 마나를 거두었고, 휘몰아치던 바람은 그 순간 멈추었다.

‘이런 실수가! 새로운 영역에 몰두한 나머지 주변 상황을 살피지 못했구나. 여기가 내 공방도 아니건만!’

“너무 자책하지 말게. 마법사 중 그런 경험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는가? 이는 오히려 축하할 일이고, 부러워할 일이야. 그러니 나도 웬만하면 끼어들고 싶지는 않았네만······ 마법의 규모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기에 하는 수 없이 개입하였네. 부디 이해해주겠는가?”

“이해하고 말 것도 없습니다! 여기가 공방도 아닌데, 제가 생각이 짧았던 거지요. 예전부터 정신을 집중하면 늘 주변이 잘 눈에 들어오지 않아서 이런 터무니 없는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닐세. 그러지 말게. 새로운 영역을 엿보는 그 무아지경의 경험은 여러 번 가질 수 있는 게 아니지. 내가 그 일에 끼어들었으니, 그저 면목이 없을 따름이야.”

“그러지 마십시오. 그런 대단한 게 아니었습니다. 그저 생각에 잠겨 있었던 것뿐입니다.”

에이슬란은 거듭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였고, 제라드는 감당하기 어렵다는 얼굴로 손사래를 쳤을 따름이었다.

그렇게 엉망진창이 된 대열을 수습하는 가운데, 에이슬란은 선두로 돌아갔다.

아무에게도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지금 속이 몹시 어지러웠다.

‘그 말은 다시 말하면 공방에 제약을 크게 받지 않는다는 말이로구나. 케이틀란, 그는 대체 어디에서 저런 터무니 없는 괴물을 데리고 왔단 말인가? 각종 속성의 마법을 저토록 터무니없는 수준으로 사용할 수 있는 마법사라니······.’

에이슬란은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는 게 힘들었다.

지금껏 누군가에게 이토록 강렬한 질투와 시기를 느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그는 저 어린 마법사의 무시무시한 재능 앞에 초라한 기분을 느꼈다.

사람이라면······ 아니, 마법사라면 누구든 그러할 터였지만, 마음이 복잡한 건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대열은 머잖아 감시자의 요새에 다다랐다. 그들이 우려했던 것과는 달리 감시자의 요새는 무너지지 않은 듯했다. 성벽엔 초췌한 기색의 병사들이 보였다.

그그그긍.

성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열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드디어 감시자의 요새에 도착한 것이다.

3

해가 저물기 시작했다.

감시자 요새의 총사령관인 토레스 남작과 시그너스 기사단의 로갈, 그리고 조사단의 에이슬란 세 사람은 회의실에서 벌써 세 시간째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이튿날 듣게 될 것 같았다.

밤은 금세 찾아왔다.

기사들이나 마법사들은 오랜만에 맞이한 휴식에 금세 잠들었다. 모두 짧지 않은 여정에 지쳐있던 까닭이다.

그러나 제라드는 늦은 시각까지 잠들지 않았다. 오랜만에 깨어난 베리타스에게 물어볼 게 많았기 때문이다.

다만, 질문에 대답은 썩 만족스럽지 않았다.

“그러니까 성유물 조각이 완전하지 못해서 그 마법이 뭔지 알 수 없다는 거야?”

[해당 정보는 관련 성유물 조각이 모두 모여야 알 수 있는 정보. 현재 조각 1/3. 아직 두 개의 조각이 더 필요함.]

‘다른 사람의 탈을 쓰는 그 마법은 보통 성가신 게 아닌데. 하필 그 마법을 알 수가 없는 상황이라니.’

제라드는 불만스러운 얼굴이었다.

그가 아직 어렸을 때만 해도 세상에 모르는 건 모두 대답해주던 베리타스였는데, 최근엔 모르는 것투성이였다.

그런 제라드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베리타스는 별안간 책장을 벌컥 열더니, 한 권의 책을 토해냈다.

“이게 뭐야?”

[마법.]

어쩐지 퉁명스럽게 들리는 대답이었다.

제라드는 더 묻지 않고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그러자 책이 활짝 펼쳐졌다. 그 이름 없는 책에는 마법 술식이 펼쳐져 있었다.

“이거 그 마법이구나.”

제라드의 불만 가득했던 표정이 조금 풀렸다. 이 책에 있는 마법의 내용은 적 마법사의 발밑에서 솟구치던 칠흑의 칼날에 관한 것이었다.

물론, 이 마법은 이미 꿰뚫어 본 마법이었으므로 그렇게 신기할 것까진 없었다. 그런데 술식을 천천히 훑다가 좀 이상한 점을 찾았다.

‘어라, 이거 흑마법적인 요소만 술식에서 지워내면 전혀 다른 마법이 되잖아. 게다가 술식의 구조가 굉장히 익숙해. 마치, 엘레멘탈 마스터의 정립 방식 같은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불, 물, 얼음, 벼락, 땅, 빛, 바람.

모든 마법은 이 일곱 가지 토대에서 시작된다.

그런데 지금 이 마법은 그 일곱 가지 중에서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전혀 다른 속성을 베이스로 두고 있었다.

‘흐음, 이건 내가 정립해서 사용해보지 않는 한 알 수 없겠는 걸.’

제라드가 그렇게 생각하며 양피지에 펜을 가져다 댈 때였다.

똑똑.

별안간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제라드가 눈살을 찌푸리며 일어났다.

이미 자정이 넘은 시간이었다. 이 시간에 대체 누가 찾아온 걸까.

“누구세요.”

“밤늦게 죄송합니다. 담당 시녀입니다.”

‘시녀가 이 시간에 왜?’

제라드가 그렇게 생각하며 문을 열었다.

문밖에는 제라드와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평범한 외관의 시녀가 쟁반에 물주전자와 컵을 들고 서 있었다. 특별한 점은 없었다.

아니, 없는 것 같았다.

담담하였던 제라드의 눈동자가 별안간 커졌다.

왜냐하면, 지금 제라드의 눈에는 눈앞에 있는 평범한 시녀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어둠 속에서 반짝거리는 은발과 영롱한 에메랄드빛을 머금은 듯한 눈동자. 머리칼 사이로 뾰족하게 뻗은 귀.

“엘프······?”

4

제라드는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눈앞의 존재는 이야기로 수없이 들었던 그 신비로운 종족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평범한 시녀의 모습은 특수한 힘으로 빛이 굴절되어 나타나는 거짓된 모습이었다.

그런데 엘프는 자신의 정체가 간파당했음에도 오히려 안도하는 모습이었다.

“제 모습을 한눈에 간파하시는군요. 지금껏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는데······. 역시 세계수의 말이 옳았어요. 당신이 우리 종족을 구원할 분이셨군요.”

“세계수라고요?”

제라드가 엘프의 말에 눈을 크게 뜨고 되물었다.

먼 옛날이야기에 전해지는 이야기다.

세계수는 하늘과 땅을 나누어 대지에 뿌리를 내리고 가지로 하늘을 떠받든다고 하였다. 하지만 그 세계수는 사라졌다.

제라드의 반응에 엘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파멸의 날, 모든 것이 사라졌죠. 하지만 세계수의 새로운 싹은 여전히 이 세상에 이어지고 있답니다.”

제라드는 그녀의 목소리가 꼭 어떤 악기 같다고 생각했다.

‘글로 봤던 엘프에 관한 얘기는 모두 거짓말이었어. 그런 말들로는 지금 이 분위기를 반의반도 다 설명하지 못할 거야.’

바로 그때였다.

엘프가 무서운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북쪽, 아주 먼 곳을 의식하는 듯한 태도였다.

휘이이이이.

머잖아 저 멀리서 바람을 타고 들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알타자르 산맥의 아주 높은 곳에서부터 들려오는 소리였다.

“그들이 제가 움직이는 걸 포착한 것 같군요. 시간이 없다는 건 알았지만, 제가 땅에서 벗어나자마자 바로 움직일 줄이야······.”

그녀는 착잡한 얼굴로 창가로 걸어갔다.

“조금이라도 길게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있었으면 했는데, 차마 그럴 시간이 없을 것 같군요.”

“그들이 누구죠?”

“해방자의 의지를 따르는 우리 종족이에요.”

“해방자.”

제라드는 그 말을 곱씹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그게 누구를 지칭하는 것인지 알았다.

‘흑마법사.’

“우리 일족은 최후의 보루예요. 이미 셋 중 두 개의 의지가 해방자의 뜻을 따르고 있습니다. 시간이 없어요. 우리 종족의 의지가 하나가 되는 순간, 걷잡을 수 없는 재앙이 시작될 겁니다.”

“······그 재앙이라는 걸 막기 위해선 제 도움이 필요하다는 거군요. 세계수가 그걸 예견했다는 거고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엘프가 흑마법사들의 위협을 받는 상황이라는 건 알겠어. 하지만 이야기가 너무 두루뭉술해. 이 정도 설명만을 듣고 움직일 수는 없어.’

그러는 사이 그녀는 창문을 활짝 열었다.

그 순간, 바람이 방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하여 그녀의 몸을 서서히 휘감았다. 그녀가 이곳을 떠나려고 하고 있었다.

“잠깐만요. 당신이 이대로 가버리면 우리는 움직일 수 없어요. 더 많은 설명이 필요하단 말입니다.”

“미안해요. 저도 그러고 싶어요. 인간에겐 많은 설명이 필요하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지금은 그럴 시간이 없어요. 지금 돌아간다고 해도 시간을 맞출 수 있을지······. 나머지는 당신의 의지가 따르는 곳으로 가세요. 블레이즈라고 불렸던 인간 마법사가 자신의 의지로 우리를 찾아왔던 것처럼, 당신도 마음을 따르세요.”

그 순간, 제라드의 눈이 크게 떠졌다.

블레이즈.

그 이름이 여기에서 왜 나온단 말인가?

제라드는 바람의 정령과 함께 금방 사라질 것 같았던 엘프를 다급히 붙잡았다.

“설마, 그분께서도 당신들과 함께 있는 겁니까?”

“예, 우리와 함께 싸우고 있습니다.”

제라드는 고고한 빛을 머금은 그녀의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엘프는 거짓말을 못하는 종족. 맑고 투명한 그녀의 눈동자는 고결하고 순수한 영혼을 투영하고 있었다.

“우리는 곧 다시 만나게 되겠군요.”

그녀는 정말로 다행이라는 얼굴로 그렇게 말하며 창가로 뛰어내렸다.

이곳은 2층이었으니, 그녀가 중력의 법칙을 따라 떨어지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그녀의 몸은 둥실 떠올랐다. 그녀는 지금 바람을 타고 있었다.

“당신의 이름이 뭡니까?”

“아나트리에. 걱정하지 마세요. 당신의 의지가 분명하다면 그 뒤론 정령이 당신을 인도할 겁니다. 당신도 이 하늘길에 오를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건 불가능한 일이겠죠······.”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점차 멀어져갔다. 그러더니 이내 어둠 속에 잠겨 들었다. 그 신비로운 힘은 마법 같기도 했고, 정령술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아나트리에라고 자신을 밝힌 엘프는 마침내 제라드의 눈앞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방 안엔 바람이 머물다가 흩어진 흔적만이 남아있을 따름이었다.

5

엘프들의 위기.

재앙.

세계수의 인도.

제라드에게 그런 건 솔직히 전혀 와 닿는 얘기가 아니었다.

그러나 블레이즈 델파인의 이름은 달랐다.

산도르 마탑의 크라운급 마법사이자, 케이시의 스승이며, 제라드의 스승이기도 한 홍염의 마법사가 지금 저곳에서 그 엘프의 적들과 싸우고 있다고 그랬다.

“어쩌면 이 모든 게 교묘한 함정일 가능성도 있겠지. 안 그래, 베리타스?”

제라드의 물음에 베리타스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건 질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의 의지가 따르는 곳으로 가라고 그랬었지.”

의지가 분명해진 순간, 결단은 빨랐다.

어쩌면 제라드는 오히려 이런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새벽이 깊은 시각.

에이슬란의 방에는 때늦은 손님이 찾아와있었다.

작은 불빛이 일렁이는 가운데, 에이슬란의 미간의 골은 깊이 파여 있었다.

“홀로 협곡 너머로 가겠다니. 그게 얼마나 터무니없는 소리인지, 그건 알고 있는가?”

“예, 잘 알고 있습니다.”

“게다가 갑자기 이러는 이유도 설명할 수가 없다니. 정말로 이 일에 허가를 구하기 위해 찾아온 게 맞는가?”

“죄송합니다. 하지만 설명을 시작하면 끝이 없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다 설명한다고 해도 믿기 어려우실 겁니다.”

“휴. 자넨 매번 나를 고민하게 하는군. 자네 실력이 출중하다는 건 알고 있지만, 저곳은 미지의 영역이야. 보통 위험한 게 아니란 말일세.”

“······.”

“웬만한 일이라면 나도 자네의 말을 들어주고 싶지만, 이건 안 될 일이야. 사지로 자네 홀로 보내는 걸 어찌 허가할 수 있겠나? 내일 발표할 이야기였지만, 협곡 내부를 조사하는 것은 차근차근 안전 지역을 확보하면서 진행하기로 하였네. 혹시 블레이즈에 관한 것 때문이라면 그렇게 서두른다고 해도······.”

“허가하지 않으신다면 저는 조사단의 일원이 아니라, 크루드 마탑의 1급 마법사로서 움직이겠습니다. 그거라면 원로 마법사님께서도 막을 방법은 없습니다.”

“으음, 어떻게 해도 홀로 움직이겠다는 얘긴가.”

“예, 항상 다수가 더 안전한 건 아닙니다. 오히려 지금 같은 상황이라면 저 혼자 움직이는 편이 더 나을 겁니다.”

제라드는 그렇게 말하면서 오른손을 내밀었다.

에이슬란이 의아한 표정을 지은 순간이었다.

고오오오.

별안간 제라드의 손바닥 안에 마나가 모여들기 시작하더니. 불꽃이 휘몰아치기 시작하였다. 일반적인 화염계 마법 중 하나인 화염구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 마법은 절대로 화염구 따위가 아니었다.

“자, 자네가 어떻게 내 마법을······.”

에이슬란의 얼굴은 일그러져 있었다.

그랬다.

지금 제라드가 보여준 마법은 틀림없는 폭발 마법이었다. 에이슬란이 그걸 잘못 보았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도무지 이해가 안 됐다. 그는 제라드에게 단 한 번도 마법을 가르친 적이 없었다.

“그때 본 걸 따라 한 겁니다.”

‘그때? 설마, 어둠을 걷어내기 위해 사용했던 그때를 말하는 것인가?’

제라드가 에이슬란의 마법을 본 건 단 한 번뿐······.

아니, 이건 그런 횟수의 문제가 아니었다. 마법이라는 건 몇 번을 본다고 사용할 수 있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자, 자네는 대체······.”

“그래서 설명을 시작하면 끝이 없다고 말씀드렸던 겁니다.”

“허어······. 어, 어떻게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에이슬란은 터무니없다는 얼굴로 탄식할 따름이었다.

지금 그가 생각하는 게 맞는다면 이건 재능이나 기질 같은 걸로 설명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괴물.

에이슬란이 보기에 지금 제라드는 그랬다.

“······자네 뜻대로 하게. 이건 내가 허락하고 말 것도 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드는군.”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케이시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어쩐지 그녀가 얌전히 있을 것 같지 않군요.”

“그건 걱정하지 말고 반드시 돌아오도록 하게. 자네와는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나도 많으니 말이야.”

“알겠습니다.”

6

끼이이익.

북쪽의 협로로 이어지는 쪽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무사히 돌아오십시오.”

“고맙습니다.”

기사의 말을 끝으로 쪽문은 닫혔다.

돌아서서 보니 이 거대한 성문에는 무수히 많은 전투의 상흔이 존재하였다. 푸른 마녀들을 막기 위해 세워진 요새. 이곳에서 얼마나 치열한 싸움이 있었는가는 그저 짐작만 할 뿐이었다.

제라드는 고개를 돌려 협곡을 보았다.

알타자르 산맥을 지키는 수문장처럼 보였던 협곡은 이렇게 바로 가까이에서 보니 그 위엄이 남달랐다.

“정령의 인도인가.”

제라드는 아나트리에가 했던 말을 중얼거리며 반사적으로 하늘을 높이 우러렀다. 그러자 협곡의 좁은 하늘 너머의 어둠에 초록빛 독수리가 날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음, 알기 쉽네.”

제라드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어둠을 향해 나아갔다. 그런 그의 뒷모습을 성벽 위에서 지켜보는 병사들은 무거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얼마 전에 가셨던 마법사 세 분도 돌아오지 못하셨는데, 왜 굳이 또 저곳엘 들어가려고 하는 것인지······.”

오랜 시간, 이 요새에서 근무해온 그들이 보기에 이 협곡 안쪽은 살아서는 돌아올 수 없는 죽음의 문턱으로만 보였다.

휘오오오오.

협곡에 들이치는 바람만이 스산하게 울리고 있었다.

협곡은 안으로 들어갈수록 조금씩 넓어졌다.

사방엔 어둠이 자욱하였지만, 어둠에 눈이 익은 상태였고, 저 하늘 위에서는 바람의 정령이 길을 인도하고 있었다.

‘점점 빨라지고 있어.’

정령이 날아가는 속도는 점점 빨라졌고, 제라드도 이젠 섀도우를 전개하며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완만한 경사는 계속 이어졌고, 점차 양쪽 협곡 지대가 낮아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나 나아가고 있었을까.

휘이이익!

별안간 휘파람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것은 그냥 들으면 협곡 사이로 들이치는 바람 소리와 거의 비슷했지만, 제라드는 그 차이를 명확히 구분하였다.

‘신호다.’

제라드가 그렇게 판단했을 때였다.

협곡 위쪽에서 마나가 부풀어 오르는 게 감지됐다.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 싯푸른 얼음의 정령이 커다랗게 부풀어 오른 모습이 제라드의 눈에 들어왔다. 얼음 정령 바로 옆에 사람의 모습이 보였고, 이내 하늘에 냉기결정이 맺히기 시작하였다.

‘푸른 마녀인가. 유리한 고지를 잡고 있구나.’

어느새 하늘에 완성된 얼음창 다발. 그 수는 어림잡아도 수십 개는 족히 넘는 듯했다.

움직임이 한정된 이 협곡에서 하늘을 가득 메운 저 공격은 피할 수 없는 공격이었다. 지리적 요건을 잘 살린 공격이다.

그러나 그 지리적 요건 따위는 무시할 정도로 전력에 큰 차이가 난다고 한다면 애초에 그런 조건들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법이었다.

“싸움을 걸어온다면 부수고 나아갈 뿐.”

제라드가 손을 꽉 쥐었다가 폈다.

그 순간, 제라드의 몸이 시뻘건 불꽃에 휘감겼다.

화르륵!

“차르하!”

협곡에 쩌렁쩌렁 울려 퍼지는 외침과 함께 내리 떨어지는 얼음창은 불꽃에 휘감긴 제라드의 몸을 찢어발기기 위해 날아들었다.

그러나 제라드가 일궈낸 불꽃은 이 정도 수준의 얼음창으로는 뚫을 수 없는 불꽃이었다.

“사라져라.”

투화아아아악!

밤하늘을 꿰뚫고 새빨간 불꽃의 기둥이 하늘 높이 치솟았다. 고열의 홍염 앞에 하늘을 가득 메우며 쏟아지던 얼음창은 그야말로 흔적도 없이 모두 없어졌다.

서늘했던 이 일대의 공기는 이제 뜨겁게 변해있었다.

“타, 타마르사. 놀랏디아!”

협곡의 위에 있는 푸른 마녀들이 아연실색하여 무슨 말인지 모를 말들을 주고받을 때, 제라드는 말없이 하늘을 향해 손을 뻗었다.

“이제 내 차례다.”

고오오오.

제라드를 중심으로 공기가 요동치는 가운데, 주변의 경관이 이지러지기 시작하였다. 이 일대의 기온이 올라가고 있었다.

로브의 거침없이 펄럭이면서 제라드의 오른손 앞에 커다란 불꽃 덩어리가 나타났다. 그것은 제라드의 몸을 휘감은 불꽃을 빨아들이며 맹렬하게 크기를 키웠으니, 순식간에 60센티미터가 넘는 크기의 덩어리가 되었다.

제라드는 그 순간, 불꽃을 하늘을 향해 날렸다.

불꽃 덩어리는 다소 둔중한 속도로 하늘에 올랐고 마침내 협곡 지대의 위에 다다랐다.

“토바하!”

푸른 마녀들이 다급히 사방으로 흩어지기 시작하였다.

그 순간, 제라드는 활짝 펴고 있던 손을 꽉 말아쥐었다.

이 마법의 진수는 지금부터였다.

콰콰쾅!

천지가 진동하는 것 같은 요란한 폭발과 함께 맹렬한 불꽃이 협곡 위를 한 번에 휩쓸었다.

구구구궁.

협곡 전체가 흔들렸고, 하늘이 붉은빛으로 여러 번 물들기를 반복했다.

에이슬란의 폭발 마법의 순간 화력은 블레이즈의 홍염 마법을 가볍게 압도했다.

협곡 안으로 뜨거운 열풍이 몰아치는 가운데, 제라드는 서늘한 얼굴로 다시 경사를 오르기 시작했다.

“내 앞을 막지 마.”

제라드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그 안엔 힘이 담겨 있었다.

적진 한복판에서 지지부진한 싸움을 치를 생각은 없었다.

지금 이곳에 제라드는 혼자였다.

지금부턴 신경 쓸 눈도, 책임져야 할 상황도 없었다.

그 말인즉슨 이젠 거칠 게 없다는 말과 같았다.

괴물의 리미트가 풀린 순간이었다.

7

제라드의 세계는 아주 작았다.

그 속에서 제라드는 베리타스라는 창을 통해 세상을 보았다. 하지만 그건 실감이 없는 세상, 오직 글로만 존재하는 세상이었다.

그런 제라드에게 더 넓은 세상이 있노라고 가르쳐준 사람이 있었다. 바로 케이틀란이었다.

작은 세계 안으로 들어온 케이틀란은 마법이라는 문을 제공해주었고, 제라드는 비로소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마법이 제라드에게 있어 곧 세상이 된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 세상 아래, 제라드는 오롯이 자유로웠다.

바로 지금 이 순간처럼 말이다.

화아아아악!

불꽃이 소용돌이치며 제라드의 몸에서 솟구쳤다.

양손에 휘감긴 불꽃이 사방으로 흩뿌려질 때마다 날아들던 얼음창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협곡을 빠져나와 산세를 따라 오르는 제라드는 어둠 속에서 푸른 마녀들과 계속 만났다.

그 수는 수십 명을 가볍게 웃돌았지만, 그들은 감히 제라드를 막을 수 없었다.

불꽃이 휩쓸면 푸른 마녀들은 얼음창이 사라지는 것뿐만이 아니라, 자신들의 몸을 태우는 불꽃을 마주해야만 했다.

“캬아아악!”

“죽고 싶지 않으면 그만 물러나!”

제라드는 더욱 위협적으로 마나를 개방했다.

고오오오오.

7게이트 증폭법에 따라 한껏 활성화된 홍염 마법의 불꽃은 어둠을 짓이기고, 이 일대를 불바다로 만들었다.

그 불바다 속에서 제라드는 아무렇지도 않게 걷고 있었다.

푸른 마녀들은 불의 왕이 만들어내는 권속 앞에 벌벌 떨었다. 이 불꽃에 닿으면 모든 것이 타들어가는데, 눈앞의 존재는 그 안에서도 아무렇지도 않았다.

“몬스트룸······. 몬스트룸!”

푸른 마녀들이 일제히 그렇게 소리치며 주춤주춤 물러났다.

압도적인 힘 앞에서 마음이 꺾인 것이다.

“그래, 그거면 되는 거야.”

한낱 미물조차 두려움을 알았다. 푸른 마녀들이 야만족이라고 해도 그들은 사람이다. 그들이 제라드에게 두려움을 느끼는 건 너무나도 당연했다.

타오르는 불꽃에 죽어가던 불나방과 같았던 푸른 마녀들이 도망가기 급급하자, 비로소 길이 뚫렸다.

‘이제야 스승님이 이해가 돼.’

제라드는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그렇게 생각했다.

케이틀란은 늘 홀로 다녔다고 들었다.

어떤 위험한 임무도 그러하였고, 동란 속에서도 그랬다고 한다.

그 이유가 뭘까 생각했다.

주변을 휩쓸어버리는 마법의 특성 때문에?

그게 아니었다.

제라드는 그 이유를 이제 알았다.

케이틀란이 혼자 싸웠던 것은 훨씬 단순한 이유 때문이었다. 바로 그편이 훨씬 더 자유롭기 때문이다.

혼자라면 거칠 게 없었고, 다른 걸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오직 자신의 마법 하나에 의지한 채로 눈앞에 있는 길을 향해 나아가면 되는 것이다.

바로 지금의 제라드처럼 말이다.

‘케이시나 다른 마법사, 그리고 여러 사람들과 어울리는 건 즐거운 일이야. 하지만 그렇기에 그만큼 신경 써야 할 게 많아지고 간단한 일이 복잡해져.’

제라드가 그걸 느낀 건 바로 얼마 전 흑마법사와 싸울 때였다. 적은 명확하고 일은 간단했는데, 쓸데없는 것들이 얽히면서 일이 복잡해졌다.

그러니 어렵게 변한 걸 다시 쉽게 돌리는 것이다.

모든 것이 자유로워지는 순간으로 말이다.

제라드는 홀로 흔들림 없이 산길을 따라 올랐다.

초록빛 독수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하늘 높은 곳에서 길을 비추고 있었다.

8

푸른 마녀들을 뚫은 순간부터 제라드의 앞길을 막을 존재는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머잖아 그의 주변으로 자욱한 안개가 드리웠으니. 그것은 자연적으로 발생한 안개가 아니었다.

‘마법의 안개다.’

제라드는 이 마법의 실체를 꿰뚫었다.

정령의 힘을 사용하는 푸른 마녀들이 아니라, 마법을 사용하는 흑마법사가 제라드의 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 순간, 안개 저편에서 싯푸른 빛이 일렁이는 게 보였다. 끼릭거리는 소리와 함께 나타나는 스켈레톤의 무리.

제라드의 미간에 골이 파였다.

뼈다귀에 푸른빛이 얽혀있는 그 모습은 6년 전, 크루드 마탑으로 향하던 그때 보았던 그 영혼의 빛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죽은 자들의 존엄을 짓밟는 사자 생환의 마법이었다.

“다시는 그 마법을 쓸 수 없게 만들어 주마.”

제라드의 눈에 불똥이 튀었고, 몸에서 불꽃이 회오리쳤다.

화아아아악!

이 일대의 시야를 가득 메우던 마법의 안개가 갈기갈기 찢겨나가면서 느릿하게 걸어오는 스켈레톤의 무리가 일목요연하게 나타났다. 그 수는 어림잡아도 30명이 넘었다.

제라드는 바로 탐색 마법을 전개하면서 이 일대에 펼쳐진 마법망에 접촉하였다. 그다음은 간단했다. 적의 위치를 파악하고 통제권을 통째로 빼앗아 부쉈다.

“커헉!”

저편의 어둠에 몸을 숨기고 있던 마법사는 고통에 몸부림치면서 몸을 떨었다. 마나회로 일부가 통째로 뜯겨나가는 고통이었으니, 오죽했으랴!

다가오던 스켈레톤의 무리가 실이 끊긴 인형처럼 무너졌고, 그 가운데 흑마법사는 홀로 남겨져 있었다.

“쿨럭! 이, 이 괴, 괴물 같은 놈이······.”

제라드는 저주를 토하는 흑마법사의 앞에 섰다.

“너희야말로 괴물 아닌가? 사람의 목숨을 짓밟고 그토록 가벼이 여기는 너희야말로 괴물이 아니냔 말이다.”

제라드는 그렇게 말하며 마법사의 가슴팍을 틀어쥐었다.

“크으으윽!”

흑마법사는 발악하며 제라드의 손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쳤다. 하지만 제라드의 손아귀의 힘은 너무나도 억셌다.

그 순간, 제라드의 손을 타고 뇌전의 마나가 코어에 쏟아졌다.

지지직!

“무, 무슨 짓······ 끄아아아악!”

콰콰콰!

흑마법사는 눈을 까뒤집고 비명을 내지르다가 이내 게거품을 물고 기절하였다.

마나 코어가 갈기갈기 찢기는 고통은 맨정신으로는 견딜 게 아니었다.

제라드는 흑마법사의 마나 코어를 완전히 찢어놓고 한발 물러났다. 그는 이제 다시는 마법을 사용할 수도 익힐 수도 없다. 제라드는 그에게 죽음보다 더 끔찍한 형벌을 내린 것이다.

제라드가 그를 뒤로 한 채,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갈 길이 멀었고, 초록빛 독수리는 갈길을 재촉하고 있었다.

그러나 바로 불과 몇 걸음을 나아간 순간, 또다시 주변에서 스멀스멀 피어나는 마법의 안개.

“어리석은······.”

제라드는 짧게 평가했다.

마법의 안개에 숨어 스켈레톤을 푸는 것.

그런 전투방식은 제라드에게 통하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제라드를 상대로 마법망을 펼치면서 싸우는 1차원적인 마법전은 맨몸으로 칼을 향해 똑바로 달려드는 것과 똑같은 이야기였다.

압도적인 연산력으로 적의 마법망을 통째로 제압하는 제라드를 대체 무슨 수로 이긴단 말인가?

“끄아악!”

“크아아악!”

연이어 나타나는 흑마법사들의 마나 코어를 부수는 제라드.

그러나 흑마법사들은 계속 나타났다.

‘벌써 세 명째야. 이상한걸. 왜 이런 식으로 싸우는 거지? 한 사람이 상대가 안 된다는 걸 알았으면, 처음부터 모두 힘을 합쳐서 싸우는 게 통상적인 교전 상식일 텐데······.’

그 순간, 제라드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그렇구나. 애초에 이 자들의 목적은 나를 쓰러뜨리는 게 아니라, 시간을 끌려고 하는 거다. 내가 목적지에 다다르지 못하게 말이야.’

제라드가 고개를 들어 산길을 눈에 담았다.

갈 길이 멀었다.

섀도우를 계속 사용하는 건 무리한 이야기였다.

왜냐하면 섀도우 마법은 기본적으로 회피 마법이었기 때문이다. 육체와 마나를 폭발시키는 전력질주를 계속 사용할 수는 없었다.

‘이동속도를 끌어올릴 방법······. 어라, 잠깐만. 그 엘프가 사용하던 걸 나는 사용할 수는 없는 건가?’

제라드는 별안간 그런 생각을 했다.

엘프 아나트리에는 허공을 노닐 듯 바람을 타고 모습을 감추지 않았던가.

하늘길.

그녀는 그걸 그렇게 얘기했다.

‘지금은 나도 정령을 다룰 수 있다. 그렇단 얘기는 비슷하게나마 따라 할 수 있다는 거 아닐까?’

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몰랐다.

그러나 왠지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오너라······.”

제라드는 그렇게 말하며 하늘 위로 손을 뻗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저 하늘 높은 곳에서 빙빙 날던 초록빛 독수리가 별안간 제라드의 이끌림에 반응하듯이 엄청난 속도로 다가오더니, 초록빛의 잔상으로 흩어지며 제라드의 몸에 휘감겼다.

휘이이잉!

온몸에 바람이 스며드는 감각.

제라드의 입가에 미소가 드리웠다.

‘그래, 분명히 온몸을 휘감는 느낌이었지. 바람에 자신을 내맡기는 듯한······.’

머잖아 몸이 가벼워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발이 허공으로 떠오르는 듯한 느낌은 받을 수 없었다.

‘뭔가가 조금 다른 건가?’

그러는 사이, 어느새 마법의 안개는 그의 발밑까지 다가왔다. 이 마법의 안개에 휘말리게 되면 하는 수 없이 교전을 치러야만 했다.

‘이거면 충분해.’

제라드는 몸을 움츠렸다가 땅을 박찼다.

쑤우우욱!

주변으로 회오리치는 바람을 타고 펄쩍 뛰어오른 제라드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탄성이 터져 나왔다.

“와!”

그 순간, 제라드의 뒤에서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제라드는 새가 활강하는 것처럼 빠르게 경사를 따라 올랐다.

돛을 단 배가 바람에 떠밀리는 것과 같은 모습이었다.

9

정령의 형상을 몸이 걸친 이후로, 제라드의 이동속도는 경이로울 정도로 빨라졌다.

그런 그의 이동속도는 적들의 예상을 한참 벗어났던 것임이 분명했다.

제라드의 동선에 맞춰서 대기하고 있던 흑마법사들은 아무것도 못 한 채로, 지나가는 제라드의 뒷모습을 그저 손 놓고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지나가면서 대충 보이는 흑마법사들의 수만 세어 봐도 얼추 20명이 넘겠어. 한 곳에 이렇게 많은 흑마법사들이 모이다니. 도대체 이 위에 무엇이 있는 거지?’

제라드의 그 의문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화아아악!

하늘에서부터 지상으로 얽혀드는 듯한 새하얀 구름과 같은 장벽을 막 넘어섰을 때, 제라드는 깜짝 놀라서 탄성을 내질렀다.

“이럴 수가······.”

새하얀 장벽을 뛰어넘자마자 눈에 들어온 것은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거대한 나무였다.

세계수.

그것은 틀림없이 세계수였다.

“세계수가······ 알타자르 산맥에 존재하고 있었구나!”

제라드는 넋을 놓고 중얼거렸다.

세계수가 하늘을 떠받친다는 기록은 정말 말 그대로의 의미였다. 하늘 높은 곳까지 얽혀든 세계수의 가지들을 보자면 하늘이 전부 다 세계수의 잎사귀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 경이로움도 잠깐이었다. 세계수는 다 죽은 것처럼 검게 물들어 있었고, 나무의 몸통엔 무엇이 쏟아진 것인지 알기 어려운 흉측한 상처가 보였다.

저건 세계수가 죽고 남은 흔적이었던 것이다.

“대체 먼 옛날,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거지?”

제라드는 조금 더 세계수를 가까이에서 보고 싶었다.

이 세계에 남아있는 기원의 신비를 조금 더 가까이에서 목도하고 싶다는 것은 마법사로서는 너무나도 당연한 욕구였다.

그러나 일정한 영역까지 다가갔을 때, 제라드는 별안간 눈앞에 어떤 보이지 않는 벽이 있음을 알았다.

‘세계수를 중심으로 결계가 펼쳐져 있구나. 외부세계와 내부세계를 격리해놓은 거야. 마법? 정령? 이 결계의 정체가 뭐지?’

제라드는 손을 뻗었다. 그냥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는 정확히 읽어내기가 어려웠기에 직접 결계에 접촉해보려는 것이다. 술식을 읽기만 하면 곧 이 결계가 어떤 부류의 마법인지 명확해질 터였다.

그런데.

쩌엉!

“윽!”

제라드의 몸이 거침없이 뒤로 튕겨 나갔다.

순간적으로 밀어내는 힘이 얼마나 강렬하였는지, 손목이 다 얼얼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이 술식의 구조 일부를 읽었기 때문이다. 제라드가 결계의 구조를 한 번에 꿰뚫지 못했던 건 다 이유가 있었다.

‘당대의 마법과는 역시 전혀 다른 방식이다. 스펠 브레이커랑 비슷한 느낌이야. 기존의 마법과는 전혀 다른 패턴······.’

제라드는 그게 의미하는 바를 가만히 헤아리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결계에 접촉했을 때, 바로 알았다. 지금 이 결계는 어느 한 곳이 파괴되어 구멍이 난 상태였다.

“가자. 그곳으로.”

제라드는 땅을 박차며 날아올랐다. 등을 떠미는 바람은 자연스럽게 그를 인도하였으니.

머잖아.

고오오.

결계 내부에서부터 밖으로 흘러나오는 막대한 마나가 포착되었다. 시시각각 구멍이 뚫린 곳이 가까워졌다.

그리고 얼마나 가까워졌을까.

제라드가 눈을 크게 떴다.

결계의 구멍이 생긴 곳에서 한창 싸움이 이어지고 있는 게 보였다.

엘프와 엘프가 칼을 겨누고 맞붙었으며, 칠흑색 로브의 마법사들 이십여 명과 세 명의 붉은 로브의 마법사들이 대립하고 잇는 광경이 보였다.

특히 그들 중 붉은 로브를 걸친 마법사 한 명은 아주 익숙한 얼굴이었다.

블레이즈 델파인.

그가 저곳에 있었다.

“정말로 여기에 계셨군요.”

제라드가 반가운 마음에 미소 지었다.

늦지 않은 것이다.

그 순간, 제라드의 몸이 이글거리는 홍염에 휘감겼다.

10

마라칸과 로퍼스의 이마에 굵은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빌어먹을······. 놈들이 천천히 좁혀오고 있구나. 최악이다.’

그들의 얼굴에 서서히 절망감이 드리웠다.

계속된 교전 속에 그들의 마나는 이미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앞으로 얼마나 더 싸울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 두 마법사의 스승인 블레이즈의 얼굴도 어두운 건 마찬가지였다.

이 싸움은 시간을 끌수록 그들에게 불리했다. 적들은 결계 안쪽으로 이미 들어온 상황이었고, 블레이즈를 위시한 마법사 셋은 점차 포위당하는 형국이었다.

‘우리 중 하나만이라도 마법을 사용할 수 없게 된다면 이 대치 상황은 순식간에 무너지게 될 것이다. 거기다가 상황이 나쁜 건 우리만이 아니다.’

하늘봉우리 일족과 나머지 두 엘프 일족의 전사들은 치열한 교전을 벌이고 있었지만, 수적 열세는 명확했다.

그렇게 상황을 파악하고 있을 때였다.

또다시 저편에서 쏟아지는 불꽃의 화살.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블레이즈의 첫 번째 제자 마라칸이 홍염의 방벽을 세웠다.

콰콰쾅!

적들이 쏟아낸 불꽃의 화살은 땅에서 솟구친 불꽃 방벽에 가로막혀 모두 폭발하였다.

바로 그때였다.

“마라칸, 뒤로 물러나라!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지는 블레이즈의 고함!

그게 어떤 의미인지 알아차린 마라칸은 다급히 마나를 끊고서 마법을 거두었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홍염의 방벽이 중앙부터 찢기듯 사라지기 시작하였고, 그 여파는 마나의 흐름을 타고 들어와 마라칸의 내부까지 그 영향을 미쳤다.

팟!

스펠 브레이커에 마법이 파괴된 순간이었다.

“크윽!”

“마라칸, 어서 물러나라!”

블레이즈가 급하게 마라칸의 앞을 막아섰다.

그의 등장에 다시 거리를 벌리는 흑마법사들.

그들 하나하나를 두고 보자면 역량의 차이는 압도적이다. 하지만 문제는 저 스펠 브레이커다.

“눈앞의 마법 말고도 뒤에서 움직이는 흑마법사들의 움직임에 주의해라, 로퍼스.”

“알겠습니다.”

브레이즈와 로퍼스는 경계하며 뒤로 천천히 물러났다.

스펠 브레이커를 상대할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이미 그들과는 두어 차례 정도 교전을 치르면서 몇 가지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마법파괴에는 약점이 분명히 있다. 연이어 사용할 수도 없고, 그 횟수에도 제한이 있다. 그러니 어떻게든 원거리전을 유도하여 마법파괴를 사용하게 해야 하는데······.’

그러나 흑마법사들은 조금도 조급해하지 않았다.

그럴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블레이즈의 마법은 강력하다.

그러나 그런 그에게도 약점은 있었으니.

바로 원거리 전투였다.

블레이즈의 홍염 마법은 거리가 멀어질수록 그 위력이 떨어지게 된다. 정보는 충분했고, 대응책은 충분히 마련되어 있었다.

‘숨이 죄어오는 걸 알면서도 당할 수밖에 없단 말인가.’

블레이즈가 그렇게 생각하며 이를 갈고 있을 때였다.

“으응?”

그가 별안간 눈살을 찌푸렸다.

하늘의 저편. 불꽃에 휩싸인 무엇인가가 보였다.

“저건, 설마······.”

블레이즈가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렇게 중얼거렸다.

저 불꽃을 블레이즈가 모를 리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바로 블레이즈의 모든 마법의 집대성인 홍염 마법이었기 때문이다.

하늘의 저편.

홍염 마법에 휘감긴 제라드는 적진을 향해 오른손을 겨누고 마법을 발동했다.

에이슬란의 고유술식 폭발구였다.

고오오오.

폭발구는 제라드의 몸을 휘감은 홍염 마법의 불꽃을 흡수하며 순식간에 부풀어 올랐다.

하늘 위에서 기습은 적들에게도 전혀 예상치 못한 피해를 안겨주게 될 터였다.

마침내 마법은 한계치에 다다랐고, 적들의 머리를 향해 쏟아졌다.

“허! 저, 저게 뭐야!”

뒤늦게 무시무시한 마나 파동을 느끼며 고개를 돌리는 흑마법사들. 머리 위에서 쏟아지는 시뻘건 불꽃 덩어리를 확인한 그들은 다급히 스펠 브레이커를 사용하려고 하였으나, 이미 때는 한참 늦었다.

‘바로 지금이다!’

폭발구가 지상에 그대로 충돌할 찰나, 제라드는 활짝 펴고 있던 손을 꽉 쥐었다.

그 순간, 폭발구가 압축하며 주변의 공간을 확 잡아당겼다가 이내 사방에 강력한 화염 에너지를 방출했다.

콰콰콰쾅!

천지가 뒤흔들리는 요란한 굉음 속에서 사방으로 솟구치는 불꽃이 이 일대를 불지옥으로 만들어놓았다.

11

흑마법사들의 진형은 완전히 붕괴 되었다.

조금 전까지 흑마법사들이 서 있던 곳에는 거대한 크레이터가 존재했고, 이 일대는 그야말로 온통 불지옥이었다.

제라드는 그 위에 섰다.

활활 치솟는 불길 속에서도 그는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았다. 이 일대의 불바다가 모두 홍염 마법의 불꽃이었기 때문이다.

‘역시 이 두 개의 마법이 하나가 되면 그 위력은 상상을 초월하는구나.’

두 가지 마법 중 하나는 블레이즈의 홍염 마법이었고, 다른 하나는 에이슬란의 폭발 마법이었다.

각각 화염계 마법이라는 점을 제외하면 전혀 다른 고유술식이었다.

그러나 제라드는 이 두 가지 마법의 술식이 하나로 어우러지게 될 때, 상상을 초월하는 시너지를 발휘하게 된다는 점을 알았다.

지금 눈앞의 광경이 바로 그 결과였다.

홍염 마법만으로는 이런 엄청난 위력을 폭발을 일으킬 수 없었고, 폭발 마법만으로는 이토록 빠른 발동 시간과 이 일대를 불바다로 만드는 게 불가능했다.

그때였다.

진형 외곽 쪽에서 폭발에 직접 휘말리지 않는 흑마법사 중 한 명이 낮게 신음하며 깨어났다.

“으으으······.”

그는 폭발과 함께 발생한 열기에 얼굴이 짓뭉개진 모습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폭발과 함께 사방으로 불어닥치는 열풍이 기관지를 파괴해놓았다. 죽음은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었다.

“쿨럭!”

피를 토한 흑마법사는 고개를 돌렸다가 이내 자신의 두 눈을 의심했다.

이글거리는 시뻘건 불꽃이 모든 것을 불태우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 오직 단 한 사람만이 담담하게 서 있었던 까닭이다.

적.

틀림없었다.

블레이즈의 몸에 휘감긴 불꽃과 똑같은 저 불꽃이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흑마법사는 힘겹게 손을 뻗었다.

‘나는 곧 죽을 것이다. 그러나 하다못해 내가 이곳에 있었노라고, 세상을 향해 소리쳤다는 것만 증명만 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족하다······!’

흑마법사는 마지막으로 사력을 다해 정신을 집중했다.

그 순간, 그의 손바닥에서 붉은 눈동자가 희번덕대며 나타났다.

스펠 브레이커가 발동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마법의 결과조차도 보지 못하고 절명하였다.

어쩌면 그게 나을지도 몰랐다.

왜냐하면, 그가 목숨을 불태워 쏟아낸 스펠 브레이커는 제라드의 로브 안쪽에 깃든 스펠 가드에 허무할 정도로 간단히 막혀버렸기 때문이다.

우우웅.

로브 안쪽에 새겨진 마법 술식이 은은한 빛을 머금다가 이내 잠잠해졌다.

‘좋아, 틀림없이 발동한다.’

제라드는 저편의 흑마법사가 스펠 브레이커를 사용한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손을 쓰지 않았던 건 스펠 가드가 제대로 작동하는지 그걸 확인해보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그 확인 작업은 모두 끝났다.

‘남은 건 이 자리의 모든 흑마법사들을 일소하는 것뿐.’

화아아아악!

일대를 불태우는 지옥불이 제라드의 마나에 반응하며 다시 기세를 더해갈 때였다.

팟!

별안간 모든 불꽃이 일거에 지워졌고.

우우우웅.

로브 안쪽의 스펠 가드가 무서운 소리를 내며 울었다. 술식이 곧 타들어 갈 것처럼 뜨거운 열기를 내뿜고 있었다. 연이어 스펠 브레이커를 막았기 때문이리라.

제라드는 조금 전 자신을 향해 날아든 스펠 브레이커의 근원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 지금 이 불지옥에서 유일하게 멀쩡한 모습을 한 흑마법사가 보였다.

“도무지 반갑지 않은 조우로군. 세계수의 의지, 엘프들의 수작질인가. 여기서 네놈과 만나게 되다니 말이야.”

제라드의 눈동자도 가늘게 변했다.

‘이 자, 뭔가 다르다.’

외견은 다른 흑마법사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그의 분위기는 지금까지 만났던 흑마법사들과는 또 다른 위험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당신이 해방자인가?”

흑마법사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제라드도 더 묻지 않았다.

팽팽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서로가 적이라는 것은 확인한 지금, 대화는 그 이상 필요하지 않았다. 눈앞의 적을 쓰러뜨린다. 오직 그것만이 전부였다.

거의 동시에 영창에 들어간 두 마법사.

그러나 마법사로서의 역량 차이는 곧바로 명확하게 드러났다.

서로 마법을 발동한 순간, 제라드의 바닥에 깔린 불꽃이 엄청난 기세로 쏟아져나와서 흑마법사의 몸을 휩쓸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제라드의 표정은 여전히 날카로웠다.

화아아악!

머잖아 화염 폭풍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그 속에서 시꺼먼 방패가 나타났다.

그것은 어둠침식으로 만들어낸 방패였다.

‘스펠 브레이커와 마법을 동시에 발동했어. 확실히 지금까지 스펠 브레이커를 사용할 수 있었던 마법사들과는 다르게 다른 마법을 연계할 수 있다는 점은 대단해. 하지만 내게 스펠 브레이커는 통하지 않는다.’

조금 전의 격돌로 모든 것이 분명해졌다.

마법전으로 흑마법사는 제라드를 넘어설 수 없었다.

제라드는 거듭 홍염 마법을 쏟아냈다.

주변을 짓이기는 압도적인 불꽃 앞에서 적은 그저 방어만 할 따름이었다.

더 견디기 어려워질 때마다 주변의 불꽃이 단번에 사라졌지만, 그때뿐이었다. 제라드는 그때마다 불꽃을 다시금 일으켜 적을 천천히 태웠다.

“시간 문제야. 투항해라.”

제라드가 불꽃 속에서 경고했다.

누가 봐도 명백한 싸움의 결과를 이어가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또다시 모조리 사라지는 불꽃과 함께 흑마법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제라드의 눈이 가늘게 변했다.

흑마법사가 손에 시꺼먼 돌 따위를 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혼석?’

“우리는 가장 낮은 곳 어디에나 있고, 차별받는 자들의 틈에 있으며, 대부분이 기회 한 번 제대로 손에 넣지 못한 자들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너희가 쌓아올린 불합리한 세계를 거부한다. 하나는 전체가, 전체는 하나가 될 것이다. 우리는 그 초석이 되기를 두렵지 아니할지니!”

흑마법사는 장엄한 목소리로 소리치더니, 갑자기 오른손에 쥐고 있던 영혼석을 자신의 가슴팍 정중앙에 쑤셔 박았다.

퍽!

살점을 찢고 흉골을 부순 영혼석.

“쿨럭.”

사내는 피를 왈칵 토하였지만, 광기 어린 미소를 입가에 그렸다.

두근.

영혼석이 맥동했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영혼석에 담긴 강력한 에너지원은 그의 마나 코어 가장 깊숙한 곳에 닿았다. 그리고 단숨에 걷잡을 수 없는 거대한 격류가 되어서 닫혀있던 센터 패스의 길을 뚫고 치솟았다.

쿠구구궁.

머잖아 흑마법사의 두 눈에서 음울한 빛이 흘러나오더니 머리 위로 시꺼먼 빛이 흘러나왔다. 일반적으로 마나 코어 7페이즈로 규정되는 오버 라이트와 흡사한 광경이 흑마법사에게서 일어난 것이다.

“······버닝 엠버 링크 어둠침식!”

그 순간, 흑마법사의 눈동자는 붉게 물들었고 흰자는 검게 변하였다.

촤아아악!

마나 코어에 박힌 영혼석에서부터 흘러넘치듯이 솟구친 어둠은 단숨에 그의 몸을 뒤덮었다.

어둠침식.

일반적으로 알려진 흑마법 중 하나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흑마법사에게 일어나는 어둠침식은 일반적인 그것의 수준이 아니었다.

드드드득!

흑마법사의 몸이 수 배로 부풀어 오르기 시작하였다. 신장은 2미터를 훌쩍 넘겼고, 체구 역시 두 배 가까이 불어난 모습이었다.

크루드 마탑의 원로 마법사인 타란도 어둠침식으로 전신을 휘감는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지금처럼 거대한 어둠을 몸에 휘감지는 못하였다.

“크흐으으으······.”

흑마법사가 짐승과 같은 신음을 토했다.

강력한 힘은 평상시에는 감히 상상할 수조차도 없는 거대한 힘을 그에게 선사했다.

그러나 뇌에까지 영향을 끼치는 영혼석의 사나운 기운은 본래 그의 것이 아니었을뿐더러, 인간이 다루는 게 불가능한 힘이었다. 부작용은 있을 수밖에 없었다.

비참했던 그의 인생의 궤적.

힘겹게 잡게 된 기회 속에서 익히게 된 마법.

마지막으로 자기 자신을 규정하는 마이어 그렌. 그의 이름까지.

모든 것이 서서히 그의 속에서 사라져갔다.

이제 이 자리에 남은 것은 오직 살육과 파괴밖에 모르는 단순한 괴물이었다.

“크르르르.”

괴물은 낮게 울며 제라드를 눈에 담았다.

-죽여라.

단순한 파괴욕이 한때, 마이어라고 불렸던 마법사의 눈동자에 가득 차올랐다. 그 속에는 조금 전까지 흔들림 없이 타오르던 신념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비참하군. 그것이 자신을 불살라서 다다른 결말이란 말이냐.”

제라드는 차갑게 경멸할 따름이었다.

철컹.

게이트가 전환되는 소리가 머릿속에 울려 퍼지는 가운데.

딱.

손가가락을 튕기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불꽃은 서서히 사그라지고 그 대신에 이곳 일대에 뇌전의 기운이 가득해졌다.

파직! 파지지직!

뇌화가 사방에서 무섭게 터지는 가운데, 제라드는 하늘을 향해 손을 뻗었다. 사방에 가득 찬 뇌전 에너지가 제라드를 중심으로 소용돌이치며 모여들었다.

꽈르르르릉! 꽈릉!

벼락이 울부짖었고 대기가 요동쳤다.

케이틀란의 고유술식의 끝.

그의 이름과 함께 전해지는 벼락이 지금 이곳에 제라드의 손에 다시금 강림한 순간이었다.

“크아아아앙!”

흑마법사는 어둠을 올올이 곤두세운 채로 달려왔다.

그러나 제라드는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벼락을 손에 움켜쥐고 팔을 뒤로 젖혀 투창 준비를 마쳤다.

“그 비참한 모습에서 해방해주마.”

울부짖는 벼락의 굉음과 함께 빛이 번쩍 터졌고, 새벽녘의 어둠을 꿰뚫는 단 한 줄기의 벼락이 이 밤에 종지부를 찍었다.

12

하늘이 울부짖는 소리가 세상에 가득했다.

“저 마법사는 대체······.”

로퍼스가 신음을 토하며 중얼거렸다.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그의 몸에서 솟구치던 불꽃.

그것은 틀림없는 블레이즈의 홍염이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의 불꽃은 블레이즈와 비교해도 조금도 부족하지 않았다.

아니, 거의 오히려 처음에 적진의 일대를 헤집어 놓은 폭발력은 블레이즈의 마법을 아득하게 뛰어넘고 있었다.

그런데 놀라운 건 그것만이 아니었다.

“마법파괴가 통하지 않아?”

그랬다.

블레이즈와 로퍼스, 그리고 마라칸이 저 흑마법사들에게 꼼짝도 하지 못했던 이유.

그 이유가 저 마법사에게는 전혀 통용되지 않았다.

푸른색 로브의 마법사.

그들은 저 로브의 색이 어느 마탑을 상징하는지 알고 있다.

저 색은 크루드 마탑의 상징이다.

“스승님, 설마 그가······.”

“으음······. 틀림없다.”

블레이즈도 경악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을 때였다. 불꽃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방전하는 뇌전이 대신하였다.

“사세르란의 벼락, 그 녀석의 창이야······.”

블레이즈가 눈을 가늘게 뜨고서 그렇게 중얼거렸다.

이 새벽의 끝자락.

어둠을 짓이기는 저 푸른 벼락의 창을 어찌 그가 알아보지 못하겠는가?

“저런 괴물 같은 녀석을 봤나.”

블레이즈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린 소리는 곧 이 일대를 가득 메우는 굉음에 지워졌다.

부풀어 오르는 적의 어둠 앞에서도 담담하였던 단 한 명의 마법사는 그들 세 사람이 감히 어쩌지 못했던 적들을 일소했다.

삐이이.

귓가를 울리는 적막의 세계가 끝날 때까지도 그들은 감히 움직일 생각을 하지 못했다.

한편, 제라드는 몸 안이 허해지는 감각을 느끼고 있었다.

마나가 급격하게 소모되면서 느끼는 감각.

이런 느낌은 아주 오랜만이었다.

바로 코앞까지 당도한 적을 휩쓸어버린 벼락의 기운은 아직도 이 일대에 가득 퍼져 있었다.

제라드는 마나를 거두었다.

이제 적은 없었던 까닭이다. 상대는 강한 마법사였고 위험한 광기에 사로잡혀있었지만, 그게 전부였다.

‘마법사는 자기 자신을 증명하는 존재다. 그런 존재가 마지막에 다다라서 자기 자신을 잃게 된다면 그건 이미 마법사라고도 할 수 없는 존재다.’

강함을 택하였지만, 그것이 오히려 더 약해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제라드는 그 비참한 말로를 바로 코앞에서 보았다.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더욱이 신경 쓰이는 게 한 가지.

‘이게 끝이라는 건 좀 이상해.’

제라드의 의문은 바로 그것이었다.

적 흑마법사의 수준은 확실히 대단했다. 지금까지 스펠 브레이커를 사용했던 흑마법사들은 그 외에 마법을 거의 사용하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그런데 그는 달랐다.

스펠 브레이커를 몇 번씩이나 자유자재로 사용하였고, 거기에 어둠침식까지도 동시에 사용하였다.

즉, 다른 흑마법사들과는 달리 능력 자체가 훨씬 더 대단했었다는 얘기다.

‘하지만 베리타스는 반응하지 않았다.’

그랬다.

베리타스는 그와의 싸움에 별반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영혼석을 통하여 적 마법사가 폭주하는 것을 보며 적의를 드러내기는 했지만, 그게 전부였다.

이전 크룩스가 품고 있었던 성유물 조각에 반응하던 것과는 대조적인 태도였다.

“해방자가 적들의 수장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그에겐 성유물의 조각이 없었다는 얘기다.”

제라드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하늘은 푸른빛으로 물들어 있었고, 싸움은 끝나가고 있었다.

엘프들은 저편에서 여전히 싸움을 이어가고 있었지만, 그들의 전투력은 썩 대단치 않았으니 곧 모든 상황이 종료될 터였다.

그때, 해를 등진 세 명의 마법사 중 한 사람이 제라드를 향해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이 녀석아, 오랜만이구나!”

“6년 만에 뵙습니다.”

블레이즈와 제라드가 마주 섰다.

13

“많이 컸구나.”

“6년이라는 시간이 짧지만은 않은 시간이니까요.”

“그래, 그 건방진 꼬맹이 녀석이 이렇게 어엿하게 자라서 내 앞에 나타나다니 말이야. 새삼 시간이 흘렀다는 게 느껴지는구나.”

블레이즈의 입가에는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자, 그럼 인사는 이제 다 한 것 같군. 내 이야기를 하기 전에 먼저 네 이야기나 좀 해봐라. 뭐가 어떻게 된 거냐. 네가 왜 여기에 있는 것이냐?”

제라드는 차분한 태도로 자신이 어떻게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 크루드 마탑을 나설 때부터 간략하게나마 전부 다 설명하였다.

블레이즈는 모든 이야기를 듣고 생각에 잠긴 얼굴이었다.

“흐음, 상황이 어떻게 된 건진 잘 알겠다. 그런데 수호자님께서 널 직접 찾아왔단 말이냐?”

“수호자님이요? 아나트리에라는 그 엘프의 직책인가요?”

“그래, 그분이 이 결계의 관리자이며, 동시에 하늘봉우리 일족의 수장이다.”

제라드는 놀란 얼굴을 했다. 엘프들은 인간을 기준으로 볼 때, 하나같이 다 2, 30대로 보였던 까닭이다.

“흐음, 세계수가 너를 구원자로 점지했다······. 심상치 않은 일이로구나.”

블레이즈는 생각에 잠긴 얼굴이었다.

제라드도 이제야 세계수의 존재를 다시금 상기했다.

‘세계수의 기저에 있는 건 어쩌면 성유물일지도 모르지. 그러면 모든 이야기가 앞뒤가 맞아. 베리타스, 내가 도달한 답이 맞는 거야?’

제라드는 베리타스에게 그렇게 물었다.

그런데 베리타스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베리타스?’

제라드가 베리타스를 보았다.

그런데 베리타스가 결계의 안쪽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 눈빛이 뭔가 묘하였다.

지금까지 베리타스가 무엇인가에 그렇게 집중하는 듯한 모습은 처음이었다.

‘저곳에 뭔가가 있다는 건가?’

제라드가 그렇게 생각에 잠겨 있을 때였다.

별안간 블레이즈가 커다란 팔로 제라드의 머리를 꽉 휘감았다.

“녀석아, 남의 마법을 제 것처럼 사용하고 다니면서 고맙다는 말 한 번을 하지 않는 거냐? 몸은 컸는데, 여전히 건방진 녀석이구나!”

“하하. 고맙다는 인사가 필요한 줄은 몰랐는데요. 스승님의 마법을 제자가 사용하는 거잖습니까.”

그 말에 블레이즈가 황당한 얼굴로 크게 웃었다.

“크하핫! 그래, 맞다. 스승과 제자라면 그런 인사가 다 필요없는 법이지. 이 녀석이 몸만 큰 줄 알았는데, 아주 입에 발린 소리까지 잘하게 됐어. 좋다! 얼마든지 써라. 그리고 네가 바로 이 블레이즈의 제자라는 걸 알리고 다녀라. 기왕이면 케이틀란 녀석의 마법보다 더 많이 쓰란 말이야. 조금 전처럼 말이지.”

블레이즈는 기분이 좋은지 껄껄 웃으며 제라드의 등을 거칠게 치면서 웃었다.

14

어느새 해는 뉘엿뉘엿 저물고 있었다.

하늘과 가장 가까운 땅.

제라드는 세계수의 무덤 앞에 서 있었다.

세계수의 장엄한 모습은 여전히 그대로였지만, 이 세계수 깊은 곳 어디에서도 생명력은 느껴지지 않았다.

“한 시대의 끝.”

제라드는 조용한 목소리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세계의 중심이 되었던 세계수가 죽을 정도의 사건이라면 한 시대의 끝을 말하기에 부족함이 없을 터였다.

그럼에도 세계수를 중심으로 펼쳐진 이 땅에는 결계가 펼쳐져 있었다.

“무엇을 지키기 위해서······.”

“그 안에 깃든 것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었을는지요.”

제라드는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 익숙한 얼굴의 한 엘프의 얼굴이 보였다.

그녀는 불과 한나절 만에 몹시 핼쑥해진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안색이 좋지 않군요. 결계 때문입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저는 그저 제 사명을 다한 것뿐입니다. 그보다는 지금 당장 궁금한 게 많으실 테지요. 제가 해드릴 수 있는 모든 답은 세계수가 해줄 겁니다. 저를 따라오세요.”

아나트리에는 그렇게 말하며 걷기 시작했고, 제라드도 그녀의 뒤를 따랐다.

그녀는 세계수에서 떨어져 동쪽 길을 향해 내려가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봉우리에서 내려가는 듯하였던 아나트리에가 별안간 눈앞에서 감쪽같이 모습을 감추었다.

‘아니, 사라진 게 아니야. 영역과 영역의 사이에 존재하는 공간이 있는 거야.’

제라드의 눈에 희미한 빛이 어른거리기 시작했다.

바로 그 순간, 조금 전까지 보이던 풍경이 전혀 다르게 변하였다.

평평하게만 보였던 길 앞에 돌 바위가 겹쳐서 푹 꺼진 곳이 눈앞에 드리웠다. 그곳에 사람 한 명이 겨우 들어갈 정도의 틈이 있었다.

“이곳입니다.”

아나트리에는 그 안으로 사뿐사뿐 발걸음을 옮겼다.

제라드는 말없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

통로는 아주 좁았고, 어둠이 자욱하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오직 어둠만이 가득한 눈앞의 세상을 향해 얼마나 나아가고 있었을까.

별안간 온몸을 휘감는 시원한 바람이 느껴졌다.

‘그 느낌이다. 정령에 휘감긴 느낌이야.’

바람에 온몸이 두둥실 떠오르는 느낌.

그런데 이내 바람만 느껴지는 게 아니었다.

그보다 더 많은 것들이 느껴진다.

하늘. 바람. 땅. 물. 약동하는 생명······.

세계수를 중심으로 한 알타자르 산맥 전체가 지금 이 순간, 제라드와 이어지는 듯했다.

제라드가 다시 눈을 떴을 때, 눈앞에 새까맣던 어둠은 사라지고 새하얀 공간이 펼쳐져 있었다.

‘세계수의 공간인가?’

바로 그때였다.

저편에 새하얀 빛에 잠긴 한 존재가 나타났다.

그것은 사람의 형상 같기도 했고, 두루뭉술한 덩어리처럼 보이기도 하였다. 신비로운 빛을 머금은 그 존재는 제라드를 부르는 것처럼 보였다.

“당신이 나를 이곳으로 인도했습니까?”

대답은 없었다.

그러나 그것이 자신을 부르고 있음은 명백했다.

제라드가 막 다가가서 손을 뻗은 순간이었다.

눈앞이 아찔해지면서 새하얀 세상이 바뀌었다.

15

꽈르르릉!

하늘이 무너질 것처럼 요동쳤다.

제라드는 그 요란한 소리에 눈을 떴다.

드드드드.

땅이 무섭게 요동치고 쩌저적 균열이 생기더니 별안간 지층이 뒤틀려 꺼지고 치솟는 단층이 생겨났다.

제라드는 경악에 잠긴 얼굴로 주변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하늘은 붉은빛으로 물들어 있었고, 하늘에는 검은달이 떠 있었다. 그런데 그 크기가 족히 태양을 가리고도 남을 정도로 거대한 모습이었다.

만약 이 세상의 최후의 날이 있다고 한다면 바로 오늘이 그날인 듯했다.

‘이게 뭐지? 세계수가 자신의 기록을 보여주고 있는 건가?’

제라드가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콰르르릉!

붉은 벼락이 땅에 떨어지는 가운데, 제라드는 그 벼락의 너머에 있는 세계수의 모습을 보았다.

‘세계수. 세계수가 멀쩡하다.’

세계수는 검게 죽은 모습이 아니라, 충만한 생명력을 가득 머금고 있는 모습이었다.

즉, 제라드가 보는 이 세계의 모습은 정확히 언제인지조차도 알 수 없을 정도로 먼 옛날이라는 얘기였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어째서 세상이 이런 모습으로······.”

제라드가 그런 의문을 품었을 때였다.

별안간 주변의 풍경이 미끄러지는 것처럼 옮겨졌고, 제라드는 어느새 세계수의 앞에 섰다.

그런데 지금 세계수 앞에는 그 혼자만 있는 게 아니었다.

한 명의 남자가 피투성이가 된 모습으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의 뒤로는 시체가 산처럼 쌓여 있었고, 피가 강이 되어 흐르고 있었다.

그가 누구인지는 아직 알 수 없었으나, 이 지옥을 만든 존재라는 건 분명하였다.

그때였다.

사아아아아.

세계수의 가지에 드리운 푸른 잎사귀들이 요란하게 떨었다.

“나를 반기는 거냐. 고맙군. 그나마 마지막은 나를 반겨주는 곳에서 끝나게 될 테니 말이야······.”

그 사내는 몹시 지친 얼굴로 세계수에 손을 얹었다.

“자, 지금부터 이 세계의 모든 마법을 끝낸다. 그걸로 된 거겠지, 베리타스.”

그는 그렇게 말하며 숨을 크게 쉬었다.

곧 그의 몸에 빛이 소용돌이치며 모여들었다.

그 힘은 점점 더 강력해지기 시작하였고, 이내 이 세계의 기저에서부터 용솟음친 모든 법칙과 사내의 몸으로 모여들었다. 그는 빛으로 물들었고, 머잖아 세계수에 균열은 시작되었다.

쩌저저저적!

찬란한 빛에 물들어있던 세계수가 요동치며 떨렸다.

균열은 점차 커졌다.

세계수의 강렬한 생명력은 점차 사그라지며 흩어져갔다.

세계수는 죽어가고 있었다.

‘이 사람이 세계수를 죽이려고 하고 있어.’

제라드는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어째서 세계수를 죽이는가.

어째서 이 자는 베리타스의 이름을 입에 담았는가.

바로 그때, 세계수의 균열 안에서 빛이 흘러나왔으니, 그것은 하늘 높이 치솟아 잘게 찢기며 흩어졌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사내의 몸을 가득 채웠던 빛이 별안간 흩어지기 시작하였다. 모든 일을 끝마치기 전에 사내의 생명이 먼저 다하고 만 것이다.

그러나 멸망의 카운트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사내를 잃고 혼자가 되어버린 그의 마도서는 홀로 의식에 착수하였다.

[적합한 정화의식 실행 불가. 법칙 재구축. 재구축. 재구축. 세계수 에너지원을 이용한 불완전 정화의식 사용 가능. 대체 정화의식 시행.]

바로 그 순간이었다.

파멸의 카운트 다운은 멈추었다.

세계에 가득하였던 에너지는 세계수로 모여들었으니, 빛으로 만들어진 균열의 틈으로 스며들었다.

한 시대의 종막을 맞이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번쩍.

제라드는 눈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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