접근
1
출정의 날이 밝았다.
날은 무척 좋았다.
듬성듬성 하얀 구름만이 몇 개 보였다.
그동안 마탑 일대에 펼쳐져 있던 이상기후는 말끔하게 해결이 된 상태였으므로, 주변 풍경은 다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에이슬란, 잘 부탁하겠네.”
“예, 염려치 마십시오, 탑주님.”
에이슬란은 당당하게 대답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는 오십 대의 원로 마법사로서, 산도르 마탑의 전투 마법의 정점에 다다른 블레이즈와 함께 언급되는 마법사 중 한 사람이었다.
“이럇.”
에이슬란은 조사단의 선두에서 길을 향해 나아가자, 그 뒤로 마법사들이 뒤따랐다. 제라드와 케이시 역시 그들 사이에 있었다.
다일론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제라드의 뒷모습을 좇았다.
“성유물, 성유물인가.”
“탑주님, 혹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요?”
“아니, 아닐세. 그만 들어가지.”
북부로 이어지는 길로 나아가기 시작한 뒤로, 머잖아 산도르 마탑이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케이시는 힐끗 제라드를 보았다.
흑마에 오른 제라드는 몹시 안정적이었고, 말도 아주 오랜 시간 제라드를 따른 것처럼 보였다.
“제라드, 날 속인 거지?”
“속이다니? 내가 뭘 속였다는 거야?”
“어제 말 처음 탔다고 속인 거 아니냔 말이야.”
“실없게 그런 걸 속여서 뭐해. 안 그래?”
“그건 그렇지만······.”
분명히 그 말대로였다. 하지만 저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애초에 다른 마법사들은 제라드와 케이시가 풍기는 그 특유의 다른 이들과는 다른 분위기 때문에 감히 말도 못 걸긴 했지만 말이다.
‘흐음, 몸을 단련하면 운동신경도 올라가는 건가?’
그러는 사이, 대열은 어느새 구릉지를 빠져나와서 탁 트인 대평야에 들어섰다.
여기서부터는 계속 이런 비슷한 풍경이 펼쳐질 터였다.
물론, 케이시도 대평야에 나오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북쪽으로는 거의 올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 제라드가 두 손을 고삐에서 놓고 허리를 펴더니 몸을 크게 벌려 숨을 깊이 마셨다. 바람이 기분 좋게 그의 온몸에 쏟아졌다.
케이시는 그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가 이내 침착한 표정을 지었다. 두 손을 놓은 와중에도 자세에 흐트러짐이 없다니······.
‘아무리 봐도 속는 것 같은 기분이야.’
그렇게 하늘 높이 떠있던 해가 서서히 서쪽으로 지기 시작했을 때, 선두의 에이슬란은 서서히 나타나는 별자리의 위치를 보면서 대열을 멈춰 세웠다. 해가 완전히 지기 전에 야영을 준비하는 것이다.
말들을 한쪽에 묶고, 마법사들은 바쁘게 이곳저곳을 움직이면서 여러 마법진들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한편, 제라드는 자신이 머무를 곳 근처에 다양한 마법진 여러 개를 설치하고서 하늘이 잘 보이는 언덕 한 곳에 누워서 육포를 뜯고 있었다.
붉게 물들었던 하늘은 어느새 검게 물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 하늘엔 별이 가득하였으니, 그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은하수가 아름답게 펼쳐져 있었다.
“어쩐지 옛날 생각이 나는걸.”
누구도 찾지 않는 별관의 정원. 제라드는 그곳에서 종종 이렇게 홀로 밤하늘을 우러러보았던 기억이 났다.
‘6년이면 조세핀도 많이 바뀌었을까.’
공작가에 그리운 것은 몇 가지 되지 않았지만, 그중 가장 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그건 오직 조세핀뿐이었다.
6년 전, 어렸을 적 다시 돌아온다고 했던 제라드와의 약속을, 그녀는 기억하고 있을까?
“다시 보고 싶긴 하다.”
제라드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앞으로 나흘.
감시자의 요새까지 남은 시간이었다.
2
북부로의 여정은 지루하게 이어졌다.
이튿날 아침이 되자마자 천천히 출발하기 시작한 대열은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도 계속 일정한 속도로 나아갔다.
그렇게 해가 거의 다 지기 시작할 즈음이었다.
제라드는 저 멀리 풍경을 눈에 담고 있다가, 이내 저 멀리 수많은 사람이 모여 있는 걸 발견했다.
“와, 사람이 엄청나게 많은걸. 어림잡아도 몇백 명은 족히 되는 것 같아.”
“켄터스 백작의 군대일 거야. 어제 이야기를 들었는데, 오늘 즈음에 합류할 거란 얘기를 들었거든.”
거리가 가까워지면서 그들이 든 깃발이 보이기 시작했다. 사자가 검을 든 문양의 깃발. 켄터스 백작가의 상징이었다.
머잖아 백작군과 합류한 산도르 마탑의 조사단은 몇 가지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야영지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오늘은 이곳에서 머무는 모양이었다.
제라드는 야영 준비를 끝내고 적당한 곳에 누워서 하늘을 우러러보고 있었다.
“또 하늘 보는 거야? 밤하늘 정말 좋아하네.”
“멋지잖아. 꼭 밤하늘에 수 놓인 별자리가 어떤 암호 같아서 이렇게 저렇게 짜맞춰 보면서 헤아리는 건 꽤 재미있어. 시간도 잘 가고 말이야.”
“풋. 제라드답네. 밤하늘의 별을 보면서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마법사 중에서도 많지 않을 거야.”
케이시는 그렇게 말하며 제라드의 옆에 누웠다.
여전히 저편에서 사람들이 부산하게 움직이고 떠드는 소리가 들렸지만, 지금 두 사람은 그런 주변의 상황들과 무관한 것처럼 보였다.
그때, 갑자기 케이시가 불쑥 물었다.
“제라드, 전에 말했었지. 란스터 가문의 양자라고 말이야.”
“그랬었지.”
“양자라는 게 무슨 말인지 나한테 얘기해줄 수 있어?”
“별로 재밌는 이야기는 아니야.”
“그래도 듣고 싶어.”
제라드가 힐끗 고개를 돌리자, 케이시가 그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빛은 올곧았고 투명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마치, 밤하늘의 별처럼 말이다.
다른 누군가가 자신을 이렇게 알고 싶어 하는 것은 케이틀란 이후로 처음 있는 일이었다.
“난 크라우드 가문에서 태어났어.”
제라드가 그렇게 말문을 뗐다.
기억이 시작되었던 어렸을 때부터 케이틀란을 만나기까지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케이시는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그녀는 제라드의 이야기에 깊이 몰입하고 있었다.
“······스승님께서는 내게 이 밖에 넓은 창공이 있다고 하셨고, 나는 그제야 내가 정해놓은 울타리 밖으로 나올 수 있었지. 비로소 자유가 된 거야.”
거기까지 이야기를 했을 때, 케이시는 눈시울이 붉어져서 눈가가 촉촉하였다. 제라드가 얘기하다가 그걸 알아채고 하하 웃었다.
“뭐야, 왜 울고 그래?”
“우, 울긴 누가 울어. 잘못 본 거겠지!”
케이시는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돌려 눈가를 훔쳤다.
제라드가 킥킥대다가 별안간 무엇을 보았는지, 갑자기 몸을 벌떡 일으켰다.
“제라드, 갑자기 왜 그래?”
“······.”
케이시의 물음에도 제라드는 대꾸하지 않았다.
지금 그의 시선은 어느 한 곳에 꽂혀 있었다.
케이시도 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그곳엔 아무것도 없었다.
‘제라드가 대체 뭘 보는 거지?’
케이시가 제라드가 뭘 보는 것인지 알지 못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가 지금 보고 있는 건 베리타스였기 때문이다.
‘베리타스가 깨어났어.’
그동안 깊이 잠든 것처럼 깨어나지 않았던 베리타스는 지금 이 순간, 어떻게 된 일인지 눈을 살짝 뜨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시선은 저편을 향해 꽂혀 있었다.
제라드가 베리타스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별안간 베리타스의 목소리가 제라드의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성유물의 조각 감지. 거리 약 1킬로미터 안팎.]
‘성유물이라고?’
제라드가 깜짝 놀란 얼굴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달리기 시작했다.
“제라드, 어디 가는 거야!”
케이시가 제라드를 불렀지만, 제라드는 그녀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였는지, 백작군의 야영지를 향해 거침없이 달려나갔다.
‘성유물의 조각.’
그게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명확했다.
베리타스와 같은 마도서가 지금 불과 코앞에 있다는 얘기였다.
‘어디지? 대체 어디에······.’
[성유물의 조각. 거리 약 500미터 안팎.]
또다시 베리타스가 그렇게 말했고, 제라드는 무서운 얼굴로 주변을 훑어나갔다.
야영준비 때문에 부산하게 움직여 다니는 병사들은 무서운 얼굴로 주변을 살피는 제라드를 이상하다는 듯이 쳐다보았지만, 제라드는 아랑곳하지 않고 베리타스의 시선에만 집중하였다.
바로 그때였다. 제라드의 시선 끝자락에 한 사람이 잡혔다.
평범한 병사처럼 보이는 삼십 대의 사내였다.
그는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마치, 뭔가에 홀려있는 것처럼 말이다.
‘찾은 건가?’
제라드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드디어 만나게 됐군.”
제라드의 바로 뒤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3
느닷없이 들려온 목소리에 제라드는 거의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몸을 앞으로 튕기면서 거리를 벌리고 바로 마법을 전개한다.
파직!
스파크와 함께 생성된 뇌전구가 목소리가 들린 곳을 향해 쏟아질 때였다.
“반응이 아주 좋은걸. 잘 단련되어 있다는 걸 알겠어.”
우뚝.
허공을 가로지르던 뇌전구는 바로 그 순간 멈췄다.
제라드의 바로 뒤쪽에는 병사 한 명이 서 있었다.
그는 초점이 없는 흐리멍덩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적의 본체가 아니야.’
제라드가 눈을 가늘게 떴다.
“패밀리어 마법…… 이 아니군.”
“눈치 빠르군. 그걸 바로 알아채다니 말이야. 그렇다면 내가 지금 이 병사의 목숨을 사로잡고 있다는 것도 알겠지?”
“…….”
제라드는 병사를 살폈다.
시전자와 종속자 사이에 존재하는 실은 보이지 않았다.
‘뭐지? 분명히 어떤 식으로든 지배력을 발산하고 있는데, 그게 정확히 뭔지 알 수가 없어. 거기다가 지금 지배를 받고 있는 건 이 병사 하나만이 아니야. 그 뒤에 있는 병사도 마찬가지다. 특별한 마법진인가?’
“너무 날을 바짝 세울 필요 없잖아. 난 그저 대화를 나누고 싶을 뿐이다.”
“대화를 나눌 생각이었으면 얼굴부터 드러냈겠지.”
제라드는 그렇게 말하며 즉시 탐색 마법을 전개하였다.
쓰스스스.
제라드의 온 감각이 열렸다.
감지 범위 안팎에서 온갖 마나의 흐름이 잡히기 시작한 순간, 제라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거듭 놀라운데. 마나의 흐름을 가지고 노는 것만큼은 꽤 자신이 있었는데, 이런 식으로 바로 까발려지게 되다니. 역시 보통 마법사가 아닌걸.”
이번에 말한 건 눈앞의 병사가 아니었다.
목소리는 왼쪽에서 들려왔고, 그곳엔 병사 다섯 명이 조금 전의 병사와 똑같이 초점이 없는 눈동자와 흐리멍덩한 얼굴을 하고 서 있었다.
제라드는 무서운 얼굴로 이 주변을 훑었다.
그를 중심으로 약 100미터 안팎.
모든 병사가 부자연스럽게 멈춰 선 채로, 제라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적의 손아귀.
제라드는 지금 적의 손아귀 안에 있는 거나 다름없었다.
놀라운 것은 이렇게 적의 수중에 떨어질 때까지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는 것이다. 헌데, 적이 사용한 방법이 참으로 기상천외하였다.
‘설마, 사람을 이용해서 마법진을 구성할 줄이야.’
지금 제라드를 중심으로 100미터 안팎에 있는 병사들은 전부 일정한 거리를 벌린 채로 각 지점에 서 있었다.
그것은 일견 아무렇게나 서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이 서 있는 자리와 각각의 거리는 모두 치밀하게 계산된 것이었다.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전부 이 커다란 마법진을 구성하는 축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그들은 전부 다 인질이나 다름없었다.
‘놈은 내가 이곳에 온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산도르 마탑에서도 정보가 새고 있다는 얘기야.’
제라드가 굳은 얼굴로 아무말도 못하고 있자, 목소리는 다시 들려왔다.
“상황 파악은 다 한 것 같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대화를 나눠보도록 하지. 병사들의 걱정은 할 것 없어. 일만 부드럽게 잘 풀리면 쓸데없이 피가 흐를 이유는 없을 테니까. 나도 겁이 많은 편이야. 너처럼 강한 마법사와 싸우는 건 나로서도 별로 반가운 일이 아니란 얘기지.”
“목적이 뭐냐.”
“제라드 란스터여, 네게 공존을 제안한다.”
“공존? 그게 무슨 뜻이지.”
“너는 성유물을 가진 존재. 즉, 이 세상을 정화해야만 하는 큰 운명을 타고났다는 얘기다. 네 운명을 거스르지 마라. 우리와 함께해라. 세상을 정화하고 모든 것을 자유롭게 만드는 거다!”
4
그 거창한 외침을 듣자마자, 제라드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었다. 교섭이라기에 무슨 얘기를 하나 싶었더니.
“내가 그 뜻에 찬동할 것 같아?”
“거절인가?”
“그래, 거절이다. 나는 그따위 헛소리에 넘어가진 않는다.”
“참으로 유감이다. 오직 우리와 공존하는 것. 그것만이 유일한 정답이었다. 어째서 너는 쓸데없는 싸움을 고집하지?”
“헛소리는 거기까지야. 나와 싸우고 싶지 않으면 지금 당장 여기서 물러나. 나도 마법으로 싸우는 걸 별로 반기는 사람이 아니니까.”
“그러고 싶지만, 사람은 늘 하고 싶은 것만 하면서 살 수는 없는 법이지. 이것은 숙명이다. 네가 우리와 함께하지 않는다면 넌 적일 뿐!”
광기.
제라드는 이 목소리의 주인에게서 어떤 광기를 느꼈다.
지금껏 만났던 흑마법사들은 하나같이 다 그러했다.
그들은 모두 이런 비틀린 광기에 자신을 내맡기고 있었다.
“똑똑히 들어라. 넌 우리와의 싸움에서 이기지 못한다. 우리는 많고 너는 하나다. 결말이 명확한 길이다. 싸움을 피해라. 정답은 아니지만, 우리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방관자가 되어라. 네가 가진 성유물만 얌전히 양도하고 물러난다면 이 자리에서 피를 흘리는 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것도 거절이다. 난 아무것도 너희에게 넘겨주지 않아.”
“어리석군. 후회하게 될 것이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퍽!
조금 전까지 목소리의 주인을 대신하여 말하던 병사의 머리가 수박 터지듯 박살 나면서 무너졌다.
눈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네놈…….”
제라드의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그 순간, 목소리는 또 다른 방향에서 들려왔다.
“네가 초래한 일이다. 나는 이미 말했을 텐데, 이 사람의 목숨은 내가 사로잡고 있다고. 피가 흐를 상황을 전혀 예기치 못했다고 할 셈은 아니겠지, 마법사.”
제라드가 이 눈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상황에 이를 갈며 침묵하고 있을 때였다.
“제라드!”
별안간 저 뒤쪽에서 케이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편에서 케이시가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오지 마! 여기 절대로 들어와선 안 돼.”
그 순간, 우뚝 멈추는 케이시. 그녀도 그제야 이 주변에 돌아가는 상황이 이상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도 이 일대가 적의 공방이나 다름없는 공간이 되었음을 바로 눈치챈 것이다.
그러는 사이, 분위기는 점차 어수선해지고 있었다.
부자연스럽게 멈춰서 있는 100여 명의 병사들. 그리고 별안간 머리가 터지벼 널브러진 병사 한 명의 모습까지.
이 예기치 못한 상황 속에 저편에서 말을 탄 기사들까지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자칫하다가는 새로운 인질만 더 늘어날 터였다.
“일정 이상 다가와서는 안 됩니다!”
제라드가 다시 큰 목소리로 경고할 때였다.
화아아악!
별안간 매서운 불꽃이 솟구쳐, 우뚝 멈춰 서 있는 병사들의 외곽 지점에 떨어졌다. 불의 벽은 단숨에 다가오던 병사들의 앞길을 막아섰다.
“아, 아니 이게 무슨 짓이오!”
기사가 걸어오다가 깜짝 놀라 뒤로 물러나며 그렇게 소리쳤다. 하마터면 불꽃에 휩쓸릴 뻔했다.
“제라드의 말을 들어요. 모두 물러나세요. 그 이상 다가가면 마법의 영향권이에요. 더 피해가 늘어날 수도 있어요!”
케이시는 바로 상황 통제에 나섰다.
그때, 뒤늦게 마나의 유동이 격렬해졌음을 포착한 조사단의 마법사들도 주변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주변 분위기가 어수선한 가운데, 제라드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낙심이라도 한 것처럼 보였다.
“구경꾼들이 많아졌군. 좋아, 뭐 크게 상관없는 일이지. 자, 그럼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자고. 마법사여, 너는 사람의 목숨을 중히 여긴다고 들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상황이 네게는 상당히 견디기 어려운 상황일 터. 죽지 않아도 될 사람이 너 때문에 죽었다.”
“…….”
“다시 요구하겠다. 이번에는 부디 현명한 대답을 하길 바란다. 네가 가진 성유물을 순순히 양도해라. 그럼 더 쓸데없는 피가 흐를 일은 없을 거야.”
그 요구에 제라드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침묵은 길지 않았다.
목소리는 제라드에게 답을 재촉했다.
“생각할 시간이 없다. 다음엔 지금 네 앞에 있는 이 병사의 머리가 펑 터질 거야. 네가 그렇게 답을 미루는 동안, 내 손에 있는 병사들은 한둘씩 죽어나가는 거다.”
“……좋아, 대답하지.”
제라드가 숙였던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의 눈동자엔 무시무시한 분노가 숨 쉬고 있었다. 마탑에 나온 뒤로 흑마법사와 얽히는 일엔 몇 번이고 화가 났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화가 나는 건 처음이었다.
“내 대답은 똑같아. 거절한다.”
“역시 그렇게 나왔나? 성유물이 아깝다고 생각한 거라면 이해는 할 수 있다. 하지만 괜찮겠나? 나에겐 아직 100명 정도의 인질이 더 남아 있다. 물론, 지금 이 사람은 곧 죽을 테니, 그중 한 명을 더 빼야겠지만 말이야.”
목소리는 그렇게 스산한 사실을 전달해왔다.
그러나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그 병사의 머리가 터지는 일은 없었다. 병사는 여전히 그 상태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그 순간, 제라드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드리웠다.
“왜, 마음대로 안 되는 모양이지?”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스스로 생각해.”
제라드는 그렇게 대답하더니, 숨을 깊게 들이마시더니 단숨에 마나를 개방하였다.
쿠우웅!
무시무시한 기세로 방출되는 마나의 회오리는 충격파처럼 요동쳤다. 그러자 바로 지척에 있던 병사들이 이내 바닥에 쓰러지기 시작하였다.
그게 시작이었다.
철컹!
‘게이트 전환술식.’
제라드의 몸 전신의 마나 회로가 터질 것처럼 요동쳤다.
마나코어의 개량을 거듭하여 오리지널로 승화시켜 쌓게 된 방대한 마나를 이토록 한 번에 다 개방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둔중하고 무거운 마나가 게이트를 지나며 두 배, 네 배, 여덟 배로 불어났다. 제라드의 몸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떨렸다.
드드드드!
땅에 발을 딛고 있는 곳이 요란하게 흔들렸다.
마법은 순식간에 완성되었다.
“하아앗!”
제라드는 오른쪽 다리를 크게 들어 올리더니, 있는 힘껏 땅을 내리찍듯 밟았다.
그 순간, 이 일대의 대지가 뒤흔들렸다.
콰아아아앙!
제라드가 내리 짓밟은 땅을 중심으로 땅이 움푹 파였고, 이 일대 지반에 균열이 발생하였다.
쩌저저저적!
“피해!”
거미줄처럼 발생하는 균열에 불꽃의 벽 밖에 모여들었던 사람들이 깜짝 놀라 물러나기 시작하였다.
그러는 사이 제라드가 대지에 일으킨 충격파는 대지에 균열을 일으키는 정도에 그치지 않고, 지층을 위아래로 뒤틀어놓았다.
쿠구구궁!
마치,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바닥에 널브러진 병사들이 그 충격에 이리저리 떠밀리기 시작하는 가운데, 곧 대지의 떨림이 가라앉기 시작하였다.
뿌옇게 치솟는 흙먼지.
제라드는 그 속에서 북쪽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흙먼지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지금 그의 시선은 눈앞이 아니라, 그 너머에 있는 것을 포착하고 있었다.
“드디어 찾았다.”
5
적은 제라드에 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그가 이곳에 온다는 것과 제라드가 가진 성유물의 존재까지. 아마도 이것저것 많은 정보가 적들의 손에 있다는 건 명확했다.
그러나 적들은 정작 가장 중요한 것은 알지 못했다.
시간.
놈은 제라드에게 너무 많은 시간을 주고 만 것이다.
적의 수중에 떨어졌음을 알아차린 순간부터 제라드는 적이 사용한 마법의 요체를 파악하는 데 집중했다. 그리고 이 일대를 가득 메운 실타래 속에서 감춰진 것을 포착했다.
땅.
바로 이 바닥에 오밀조밀하게 마법망이 펼쳐져 있던 것이다. 처음엔 너무 단조로운 마법망이라서 미처 포착하지 못했다. 하지만 바닥에 깔린 마법망과 이 일대에 가득 흩뿌려진 마나의 실타래가 합쳐지면 얘기가 달라진다.
시전자의 지시는 바닥의 마법망을 타고 신호로서 전달되고, 올올이 흩날리는 마나의 실타래는 병사의 온몸을 휘감고 있다가 흘러들어오는 신호를 받아들여 이를 이행한다.
시전자를 뇌라고 생각하면 바닥에 펼쳐진 마법은 중추신경이었고, 흩날리는 실타래는 말초신경과 같았다.
대단한 마법임을 의심할 나위가 없었으나, 제라드가 적의 마법의 실체를 꿰뚫은 순간에 이미 싸움은 끝난 것이다.
제라드는 즉시 적의 마법망에 접촉했다.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에 개입하여 통제력을 걷어냈다.
그게 시작이었다.
마나를 단숨에 개방해서 마나의 실타래 대부분을 끊어내버리고, 마지막으로 어스퀘이크 마법으로 마법망 전체를 찢어버리는 것이다.
제라드는 무너지는 마법망의 뿌리를 따라 역추적하였고 마침내 적을 포착했다.
적은 자신의 마법이 깨졌다는 것을 사실을 알고 다급히 자신의 정체를 감추고 있었지만, 한 번 포착한 적을 놓칠 만큼 제라드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놓치지 않는다.’
제라드는 바로 땅을 박찼다.
흙먼지를 뚫고서 달려나오는 제라드.
그의 눈동자는 무수한 사람 중에서 단 한 사람을 정확히 포착하고 있었다.
딱!
제라드가 손가락을 튕겼다.
파지직!
단번에 세 개의 뇌전구가 튀어나와 제라드를 중심으로 빙글빙글 돌았고, 제라드의 제어를 따라서 뇌전구는 섬광이 되어 적을 향해 거침없이 쏟아졌다.
파지지직!
눈으로 좇는 것조차도 어려울 정도로 빠른 뇌전구.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놀랍게도 이 쏜살같은 뇌전구의 흐름에 다급히 반응하는 한 사람의 움직임이 있었다.
파지지직!
첫 번째 날아든 뇌전구가 허공에서 베이며 찢겨나갔다.
두 번째로 날아든 뇌전구는 푸르스름한 빛을 토하는 검면에 미끄러지며 튕겨 나갔고, 마지막 세 번째 뇌전구는 벼락같은 찌르기에 꿰뚫려 흩어졌다.
‘칼로 막았어?’
제라드가 이 예기치 못한 상황에 깜짝 놀라서 벌리는 와중에 그곳에 짙은 갈색 머리칼의 시원시원한 인상의 기사 한 사람이 제라드를 가로막고 서 있었다.
6
“이게 무슨 짓입니까? 아군을 향해 마법을 날리다니요. 그는 시그너스 기사단의 일원입니다.”
태도는 정중했지만, 기사의 목소리에는 분노가 서려 있었다.
제라드는 그와 싸우고 싶지 않았다.
제라드의 목표는 기사의 뒤쪽에 있는 자였지, 그가 아닌 까닭이다.
“물러나야 할 건 당신입니다. 당신이 막아선 그 사람이 정말로 시그너스 기사단의 일원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그가 방금 이 일을 벌인 자라는 겁니다.”
꿈틀.
제라드의 말에 기사의 눈썹이 꿈틀하였다.
바로 그때였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자랑스러운 시그너스 기사단의 기사인 제가 어떻게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을 벌일 수가 있단 말씀이십니까? 저는 마법사도 적도 아닙니다!”
기사의 뒤에 엉거주춤하게 서 있던 기사가 황당하다는 얼굴로 소리쳤다.
난데없이 급변한 상황에 시그너스 기사단과 조사단의 마법사들이 밀물처럼 밀려들었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시그너스 기사단의 단장인 로갈은 분노를 터뜨리며 조사단의 책임자인 에이슬란을 노려보았다. 조사단의 마법사가 아군을 공격한 상황이었으니, 영문을 알 수 없는 그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에이슬란 공, 설명이 필요하다고 생각지 않으십니까?”
“······”
에이슬란은 무거운 얼굴로 힐긋 제라드를 보았다.
제라드는 일말의 흐트러짐도 없는 눈동자로 자신의 앞을 막은 기사들이 아니라, 그 뒤에 서 있는 기사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가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바로 뛰쳐나갈 것처럼 보이는 태도.
“뭔가 이유가 있었을 것 같습니다만.”
“이유라니요? 느닷없이 아군을 공격하는데 무슨 이유가 있단 말입니까?”
“일단 무슨 일인지 확인부터 해보겠습니다.”
에이슬란은 제라드에게 다가갔다.
제라드는 에이슬란이 자신을 탓할 줄 알았다.
'또 설명 같은 걸 해야 하나?'
그러나.
“확신하는가?”
에이슬란이 물은 것은 짧은 질문 하나.
“확신 없이 일을 벌이거나 하진 않습니다.”
제라드의 분명한 대답에 에이슬란은 입을 다물었다.
‘그의 제자답군. 이 많은 사람 앞에서도 흔들림이 없어.’
에이슬란은 약 10년 전, 단 한 번 크루드 마탑의 케이틀란을 멀리서나마 본 적이 있었다.
그때, 그가 보여주었던 모습은 여전히 그의 뇌리에 선명하게 각인되어 남아 있었다.
다른 누구의 도움도 없이 오직 올곧은 단 하나의 길을 향해 나아갔던 마법사의 뒷모습은 여전히 사세르란에서는 전설처럼 화자 되고 있었다.
“자네는 스승을 많이 닮았군.”
다일론은 제라드의 실력을 높이 평가하는 모양이었지만, 에이슬란은 제라드가 아니라, 그의 스승인 케이틀란의 안목을 믿었다.
에이슬란이 고개를 돌려 로갈을 바라보았다.
“방금의 일은 간단히 넘어갈 일이 아닙니다. 만약을 위해서라도 자세한 확인작업을 좀 거치고 싶은데 허락해주시겠습니까? 오해라면 제가 머리를 숙여 사과를 드리지요.”
“으음. 자세한 확인이란 게 대체 무엇입니까?”
“확인이라고 해도 별것 아닙니다. 마법사와 기사의 마나 회로에는 큰 차이가 있는 법이지요. 그 차이는 물과 기름처럼 명확합니다. 그저 손을 마주 잡거나 등에 손을 얹는 정도면 충분할 겁니다. 더구나 다른 좋지 않은 마법이 연관되어 있다면······.”
“음, 그거 정도라면야······. 좋습니다. 의혹을 깔끔하게 마무리 지으려거든 그편이 낫겠지요. 나머진 그다음에 이야기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무 일이 없다면 책임질 준비를 하라는 이야기.
“감사합니다.”
원로 마법사인 에이슬란이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는 제라드가 지목한 기사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로갈이 명을 내리려고 그 기사, 크룩스에게 고개를 돌리는 순간.
“어째서 제가 저들의 뜻에 응해야 합니까?”
뜻밖에 크룩스가 날카로운 반응을 보이며 단장의 말에 거부감을 드러냈다.
“오리온 경, 그대도 단장님께 말씀드리게! 켄터스 백작가의 기사가 마탑의 마법사에게 검사를 받다니, 말이나 되나? 이건 백작가의 위신 문제일세.”
“······.”
오리온이라고 불린 기사는 조금 전 제라드의 마법을 와해한 인물이었다. 그는 크룩스와 유년시절부터 함께해온 형제 같은 사이였으니, 그가 크룩스의 뜻에 동조하리라는 것을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런데 오리온의 반응도 평소와는 달랐다.
“크룩스 경, 오해를 푸는 게 좋겠네.”
“뭣? 그게 무슨 소린가?”
“오해를 말끔히 털어버리자는 말일세. 사과는 그다음 받기로 하지.”
오리온의 말에 크룩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오리온 경, 그대도 마탑의 마법사들이 두렵단 말인가? 마법사가 기사보다 높은 자리에 있는 거였어? 도대체 무엇이 두려워서 그들이 하란 대로 해야 한단 말인가!”
그의 태도에 잠자코 있던 마법사들의 얼굴뿐 아니라, 기사들의 얼굴까지도 하나같이 굳어갈 때였다.
“······크룩스 경, 자네는 무엇이 두려운 거지?”
굳은 표정으로 크룩스를 보고 있던 오리온이 무거운 목소리로 물었다.
“뭐?”
“무엇이 그토록 두려워, 검사를 피하려 하는가 이 말일세.”
“헛소리! 내가 뭘 두려워한다는 것인가? 나는 그저 기사의 명예가 이 이상 마법사들에게 짓밟히는 것이 못마땅할 뿐일세. 자넨 그렇지 않단······ 이게 무슨 짓이지?”
크룩스는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별안간 그를 향해 겨눠진 오리온의 칼끝.
모두가 이 느닷없는 상황에 눈을 동그랗게 뜨는 가운데, 오리온은 일그러진 얼굴로 물었다.
“네놈······ 도대체 누구냐.”
7
“그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자네, 정말로 내가 누구인지 몰라서 그걸 묻는 것인가?”
크룩스는 전혀 동요하지 않는 얼굴로 그렇게 담담히 말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오리온의 눈동자엔 경멸이 드리울 따름이었다.
“같잖은 흉내는 더는 통하지 않는다. 네놈은 실수했어. 크룩스는 실수로라도 기사의 명예나 위신 따위를 운운하지 않는다. 그는 그런 것들을 아주 경멸했다.”
다른 이들이라면 그냥 대수롭지 않게 흘렸을 말.
그러나 누구보다 크룩스를 잘 아는 오리온은 그 스치듯 지나가던 말을 놓치지 않았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을 뿐, 크룩스에 관한 의혹은 며칠 전부터 있었다. 그걸 확신할 어떤 계기가 없었을 뿐이었다.
시그너스 기사단원들도 그제야 크룩스가 기사라는 작위에 얽매이지 않는 소탈하고 자유로운 성정의 기사였음을 상기하였다. 확실히 평소의 그는 절대로 그런 말을 하지 않는다.
“나는 그저 기사단의 명예를 생각한 것뿐일세. 내가 개인적으로 그런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도, 이건 기사단 전체의 위신이 걸린 문제가 아닌가? 나는 그걸 걱정한 걸세. 그런데 고작 그걸로 나를 이토록 몰아붙인단 말인가?”
“잘도 지껄이는구나. 좋다, 그럼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묻겠다. 마스터 드라이곤 님과 우린 아주 어렸을 적에 만난 적이 있다. 그때 그분께서 우리에게 했던 말을 알고 있느냐?”
망국의 기사, 마스터 드라이곤. 전란의 시대를 누볐던 그 외팔이 기사는 거의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유명했다.
조금 전 오리온이 제라드의 뇌전구를 막아낼 수 있었던 것조차도 그가 직접 가르쳐준 검술 일부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크룩스는 오리온을 노려보며 잠깐 뜸을 들였다.
“어서 대답해라!”
“후우. 미혹에 빠진 자네에게 무슨 말을 해도 들릴지 모르겠지만, 대답하도록 하지. 드라이곤 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네. 검을 잡아라. 세상이 열릴 것이다. 그것이 우리를 이곳에 있게 해주었네. 안 그런가?”
크룩스의 대답에 의심 가득하였던 시그너스 기사단원들의 표정이 이상하게 변했다.
정답이었기 때문이다.
다시 상황이 오리무중으로 빠지는 듯하였으나, 오리온의 눈빛은 더욱 무겁게 굳어갈 따름이었다.
“그분께서 진정 그렇게 말씀하셨는가?”
“오리온 경, 대체 무슨 대답을 원하는가?”
크룩스가 그렇게 되물었을 때, 오리온은 이를 질끈 깨물었다. 상황이 이 지경이 되었지만, 그래도 마지막 순간까지 아니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 기대는 배반당했다.
“······크룩스는 어디에 있느냐.”
“오리온 경, 기어이 진실을 외면하는가! 지금 그대가 찾는 사람은 이곳에 있질 않나!”
“닥쳐라······. 더는 크룩스를 흉내 내지 말란 말이다!”
오리온은 분노를 터뜨리며 벼락같이 몸을 날렸다. 푸른빛을 머금은 칼은 당장 크룩스의 머리를 쪼갤 것처럼 매섭게 허공을 갈랐다.
카아앙!
금속과 금속이 부딪치는 듯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오리온과 크룩스의 실력은 거의 비슷한 수준이었으니, 오리온의 검을 크룩스가 막는 것은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문제는 오리온의 검을 막은 게 검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상하군. 어떻게 알았지?”
바닥에서 별안간 치솟은 칠흑의 칼날의 뒤편.
크룩스가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은 얼굴로 무미건조하게 중얼거렸다.
8
채채채챙!
시그너스 기사단은 동시에 칼을 뽑아들며 거리를 벌렸다.
“크룩스 경이······.”
모두 불신 가득한 얼굴이었다.
저 칠흑의 칼날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몰라도 그것이 마법이라는 것은 명확했다.
조사단의 마법사들이 전투 대형을 갖추는 가운데, 그들의 시선은 저도 모르게 제라드에게 꽂혀 있었다.
자칫 어둠에 가려질 뻔했던 적의 실체였다.
그런데 제라드는 적의 실체를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마음같이 되는 게 하나도 없군.”
크룩스. 아니, 크룩스를 흉내 내는 마법사는 그렇게 중얼거리더니 이내 양팔을 쫙 펼쳤다.
촤라라라락!
그의 발밑에서 사방으로 쏟아지는 칠흑의 칼날.
카카카캉!
주변을 포위하던 시그너스 기사단이 저마다의 역량으로 날아드는 칼을 막거나 튕겨내며 대응하는 가운데, 오리온은 단칼에 날아드는 칼을 베어내며 마법사와의 거리를 좁혀갔다.
“마스터 드라이곤의 검술인가······.”
드라이곤의 검술에 마법을 찢는 강력한 정령의 가호가 깃든다는 이야기는 꽤 유명했다. 일부라고 해도, 드라이곤의 검술을 이어받은 오리온이 그와 같은 능력을 갖춘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유감이지만, 더 시간을 끌어선 안 돼. 내 모습이 드러났고, 마법전이 시작된 이상, 저 괴물 놈과 나머지 마법사가 끼어들기 전에 빠져나가야 한다.’
물러날 때다. 그가 그렇게 판단한 순간이었다.
쐐액!
별안간 어둠을 가르고 쏟아지는 뇌전의 섬광.
쾅!
뇌화(雷火)가 번쩍거리며 흩어지는 가운데, 발밑에서 솟구친 칠흑의 칼날 두 개가 걸레 짝이 되어 흩어져갔다. 세 겹으로 겹쳐서 막지 않았더라면 뚫릴 뻔했다.
으드득.
마법사는 이를 갈며 저편에 시선을 던졌다.
조사단 마법사들 사이에 제라드가 서 있는 게 보였다. 그리고 그 서슬 시퍼런 눈동자가 분명하게 말하고 있었다.
절대로 도망가게 놔두지 않겠노라고 말이다.
에이슬란은 제라드의 곁에 섰다.
“적 마법사의 교전 능력이 상당해 보이는군. 함께 싸우는 게 좋겠어.”
“원로 마법사님, 저 혼자서 해도 되겠습니까?”
“안 될 것은 없지만, 굳이 혼자 싸우겠다는 이유가 무엇인가?”
“다른 이유가 아닙니다. 저는 다른 누군가와 합을 맞춰 싸운 적이 없습니다. 이번엔 정말로 아군이 휘말릴 수도 있어요. 저는 그걸 우려하고 있습니다.”
에이슬란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하였다.
제라드는 사세르란의 벼락이 키운 제자다. 제자가 스승의 전투 스타일을 빼다 박은 건 당연한 얘기일 터였다.
“무슨 말인지 알았네. 적을 발견한 건 자네다. 그러니 그 마무리도 자네의 몫이야. 뜻대로 하게. 우리는 원거리에서 그대를 보조하지.”
“부탁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금방 끝내겠습니다.”
제라드는 걸어가기 시작하였다.
“역시 그 스승에 그 제자로군.”
단 하나의 길을 향해 홀로 당당히 걸어가는 마법사.
케이틀란의 의지는 지금 이곳에 똑바로 이어져 있었다.
딱.
제라드는 손가락을 튕기며 휘둘렀다.
그 순간, 뇌전의 섬광이 또다시 허공을 가로지르며 적을 향해 쏟아졌다.
쾅.
또다시 겹겹이 일어나는 칠흑의 칼날에 막히는 뇌전구.
그러나 상관없었다.
하나로 부족하다면 두 개로. 두 개로도 부족하다면 세 발, 네 발. 계속 쏟아내면 될 일이다.
파지지직!
쾅!
콰쾅!
뇌화가 연이어 계속 터지는 가운데, 시그너스 기사단은 자연히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기사와 마법사를 비교하는 건 이상한 얘기였지만, 마법사는 마법사가 기사는 기사가 상대하는 건 이 시대의 기본 교전전술 원칙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성유물의 조각 확보 시 본 성유물의 완성도 상승.]
베리타스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울려 퍼졌다.
“그래, 나도 알고 있어. 놈을 먹어치우자, 베리타스.”
그 순간부터 제라드는 더 빠르고 위력적인 뇌전구 다발을 퍼붓기 시작했다.
파지지직!
쾅! 콰쾅!
연거푸 날아드는 뇌전과 그것을 튕겨내고 막는 칠흑의 칼날. 두 마법사가 서로가 가진 역량을 총동원하여 맞붙는 본격적인 마법전이 펼쳐졌다.
이 싸움에 기사가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방어가 너무 단단해. 적의 마법은 순간적으로 밀집도를 한점에 집중하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단순히 마법의 출력만 올리는 식으로는 뚫기가 어려워.’
제라드는 그렇게 생각하더니 지금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던 왼손가락도 튕기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쏟아내는 뇌전구와는 무관하게 허공에 뇌전구가 하나둘씩 쌓이기 시작하였고, 머잖아 제라드의 머리 위로 30개에 육박하는 뇌전구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세상에······.”
경이로운 멀티 캐스팅 능력에 지켜보던 모든 마법사가 경악하는 가운데.
“······빌어먹을.”
그 무지막지한 마법을 지켜보는 게 아니라, 맞서서 대항해야만 하는 적 마법사의 입에서는 절로 욕지거리가 흘러나왔다. 보고도 피할 수도 막을 수도 없었으니, 이건 그야말로 한없이 재앙이나 다름없었다.
제라드는 왼쪽 손가락을 한꺼번에 크게 회전시키며 움직였다. 그 순간, 하늘에 떠올라있던 뇌전구는 동시에 한 지점을 향해 쏟아졌다.
뇌전 폭격이었다.
꽈르르릉!
드드드.
하늘이 매섭게 울고, 대지는 몸을 떨었다.
솟구치는 뇌화.
방전하는 뇌전.
고오오오.
그렇게 마법의 여파가 모두 끝났을 때, 그곳에는 오직 자욱하게 드리운 흙먼지와 연소하는 마나 반응만이 가득했다.
그 순간.
화아악!
제라드는 세찬 바람을 일으켜 시야를 가리는 모든 것을 단숨에 걷어냈다.
도망갈 곳은 어디에도 없었으니, 그곳에 처참한 마법사의 몰골이 드러났다.
왼팔은 팔꿈치 아래로 찢겨나가고 없었고, 온몸은 뇌화에 타서 까맣게 탄 모습.
“흐, 흐으으······.”
죽지 않은 게 기적이라고 해도 좋을 상황 속에서 마법사는 힘겹게 숨을 몰아쉬며 몸을 떨었다.
싸움이 끝났음은 누가 봐도 명확했다.
9
“흐으으으······.”
숨을 쉬는 것조차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폐에 스며든 열기가 기관지를 짓이겨놓았고, 육신은 자생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한계구나. 이 몸은 이미 모든 힘을 다했다.’
최악의 상황임이 명백해졌으니, 이제 결단을 내려야만 하였다. 이대로 여기에서 성유물의 조각을 빼앗길 수는 없었다.
바로 그 순간, 크룩스의 얼굴 형태가 별안간 흐물거리더니 무너지기 시작했다. 변화는 얼굴에 그치지 않고 온몸에서 일어났다.
시꺼먼 액체 덩어리가 하나로 뭉쳐서 몸에서 벗어나더니 땅에 떨어져 나왔다.
그러자 조금 전까지 건장한 체구였던 크룩스의 몸이 실이 끊긴 인형처럼 바닥에 철퍼덕 쓰러져버렸다. 놀랍게도 체구는 절반으로 확 쪼그라든 것 같았다.
“크룩스!”
오리온이 고함을 지르며 달려가는 가운데, 제라드 역시 섀도우를 전개하면서 달려나갔다.
혼자가 아니었다. 좌우에 포진한 조사단의 마법사들이 일제히 날개를 펼치며 그의 뒤를 따라붙었다.
검은 그림자를 쫓는 것이다.
조금 전 몸에서 떨어져 나간 그림자가 무엇인지는 정확히 아무도 알지 못했지만, 그것이 사내의 몸에 씌워져 있었고, 그것이 본체라는 건 틀림없었다.
‘저게 성유물의 조각이란 말인가?’
제라드가 의아한 얼굴을 했을 때였다.
별안간 그 검은 그림자에 네 발 다리가 생겨나더니, 엄청난 속도로 저편으로 도망가기 시작했다.
그 순간, 베리타스의 경고성이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성유물의 조각 거리 멀어지고 있음.]
‘성유물 조각! 역시 저게 성유물의 조각이었구나.’
제라드는 곧바로 불꽃을 일으켰다.
화르르륵!
현장을 이탈하는 성유물 조각 앞에서 시뻘건 불꽃이 치솟으며 길을 틀어막았다. 네 발 달린 성유물 조각은 그 즉시 다른 방향으로 틀어서 움직였지만, 제라드는 서둘러 그 앞에서도 불꽃의 벽을 만들었다.
제라드의 불꽃이 연이어 성유물 조각의 퇴로를 틀어막는 가운데, 어느새 마법사들은 넓게 포진하여 사방을 둥글게 포위하였다. 이제 도망칠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잡았다.”
제라드가 그렇게 말하며 다가갔을 때였다.
불꽃의 벽에 사로잡힌 성유물 조각은 꿈틀대면서 형상을 바꾸더니 단숨에 새의 형상으로 변해서 하늘 높이 솟구쳤다.
“떨어뜨려!”
에이슬란의 외침과 함께 마법사들이 거의 동시에 마법을 전개하였다.
화아악!
불꽃의 화살이 어둠을 가로지르며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중 몇 개의 마법은 시꺼먼 새를 아슬아슬하게 맞추었지만, 성유물 조각은 놀랍게도 그 공격들을 견뎌내면서 빠르게 저편으로 날아갔다.
문제는 그 존재감이 어둠에 동화되면서 급격하게 흐려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대로라면 놓칠 터였다.
그때였다.
“모두 물러서라!”
쩌렁쩌렁 울리는 에이슬란의 고함과 함께 그의 오른쪽 손에서 불꽃이 매섭게 휘몰아치며 모여들었다. 로브가 펄럭이면서 방대한 마나가 요동쳤다.
고오오오.
그것은 에이슬란이 자랑하는 폭발 마법이었다.
불꽃의 덩어리는 순식간에 지름 60센티미터가 넘는 크기까지 커졌다. 그 순간, 에이슬란은 밤하늘 높은 곳을 향해 폭발구를 날렸다.
어둠을 뚫고 나아가는 폭발구가 하늘 높이 다다랐을 때, 에이슬란의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마나는 강렬해졌다. 그 무시무시한 마나는 오른손에 집중되었다.
“후우우.”
에이슬란은 호흡을 크게 들이마시며 손을 꽉 쥐었다.
그 순간.
콰아아아앙!
하늘 높은 곳에서 무시무시한 폭발이 일어났다.
강력한 폭발의 여파로 하늘이 일순 붉게 물들었고, 거센 충격파가 이 일대를 뒤흔들었다.
어둠이 일순 씻겨나가고 저편을 바쁘게 날아가는 성유물 조각의 존재감이 포착됐다.
‘잡을 수 있다.’
제라드는 감각을 집중했다.
그 잠깐 사이 수백 미터의 거리가 벌어진 상태. 이 정도의 거리에서 목표를 맞추는 것은 저격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이런 정밀 타격이 가능한 마법을 따로 익힌 적이 없었지만, 몇 가지 술식을 조합하여 대입하기만 하면 그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좋아, 완성됐다.’
불과 수초 안팎 만에 마법이 완성되었으니, 남은 건 발동만 남은 상황. 제라드가 막 마법을 준비할 찰나였다.
“아직 멀었는가, 노르만!”
“아뇨, 이제 다 됐습니다!”
에이슬란의 우렁찬 외침과 그에 대답하는 뒤쪽의 외침.
그 순간, 강렬한 마나 파동이 폭발하는 게 느껴졌다.
투화악!
제라드의 머리 위를 가로지르는 새빨간 불꽃의 화살! 그 화살은 엄청난 속도로 멀어져가는 성유물 조각을 관통했다.
꽝!
멀리서 불꽃이 번쩍 터졌고, 성유물은 날개를 잃더니 이내 바닥을 향해 추락하였다.
“옳지, 명중이다! 하핫!”
제라드가 이 놀라운 저격 솜씨에 감탄하며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 눈이 처진 마법사 한 명이 엄지를 치켜들면서 씩 웃고 있었다.
10
제라드와 조사단의 마법사들은 성유물의 조각이 추락한 지점에 도착하였다.
“어라? 이상하네. 분명히 맞췄는데?”
불꽃의 화살로 성유물의 조각을 명중시킨 마법사, 노르만은 당황한 얼굴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건 틀림없는 일이었다. 모두가 그걸 보았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마법사들은 이 일대를 샅샅이 살피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리 찾는다고 해도 그들이 성유물 조각을 발견할 수는 없을 터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성유물 조각을 볼 수 있었다면 이미 진작 찾고도 남았을 테니까.
제라드의 시선은 한 지점에 꽂혀 있었다. 그곳엔 아무렇게나 찢긴 페이지 다발 수십 장이 흩어져 있었다.
‘성유물 조각이 원래의 형태로 돌아오면서, 다른 마법사들은 아무도 보지 못하는 거야. 베리타스를 누구도 보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야.’
바로 그때, 베리타스가 널브러진 페이지 다발 위에 둥실 올라서더니 책장을 벌컥 열었다.
그러자.
파르르르.
페이지 다발이 별안간 나풀거리더니 베리타스를 중심으로 소용돌이치며 안쪽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것은 흡사 먹어치우는 것처럼 보였다.
탁.
모든 페이지를 집어삼킨 베리타스는 다시 닫혔다.
그리고.
[성유물 조각 일부 획득. 해당 성유물은 불완전한 조각이므로 정보량 온전치 못함. 그러나 본 성유물의 수용량 확장 조건의 최소요구조건 충족함. 2차 영역 확장 개시. 확장 완료까지 앞으로 50시간 남음.]
베리타스는 또렷한 목소리로 말을 모두 전하더니 이내 눈을 완전히 감아버렸다. 성유물의 조각을 감지하기 전과 같았다. 아무리 불러도 대답은 없었다.
“2차 확장이라는 건 이전에 1차 확장이 있었다는 얘긴데······. 설마, 1종 비문이 처음 열렸을 때가 1차 확장이었다는 건가?”
제라드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확장이 끝날 때까지 50시간.
이 기다림의 시간이 몹시 길게 느껴질 것 같았다.
마법사들이 다시 야영지로 돌아왔을 때, 가장 먼저 그들을 맞이한 것은 시그너스 기사단이었다.
기사단장 로갈은 에이슬란을 보더니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숙였다.
“제가 너무 안일하였습니다. 만약 에이슬란 공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끝까지 적을 품 안에 들이고 있는 줄도 몰랐을 것입니다.”
“고개를 드세요, 로갈 공. 감사의 인사를 전할 상대가 잘못된 것 같군요. 그걸 알아낸 것은 제가 아닙니다. 여기에 있는 이 젊은 마법사지요.”
에이슬란의 말에 제라드는 고개를 휘저었다.
“당치 않습니다. 저 혼자만으로는 적의 가면을 벗겨 낼 수 없었어요. 그 마법사의 가면을 벗긴 것은 바로 오리온 경입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말도 안 됩니다. 저는 마법사님께서 행동하지 않으셨다면 끝까지 확신조차하지 못했을 겁니다.”
오리온도 정색하며 손사래를 쳤다.
그렇게 서로 상대방 덕분이라고 하는 어수선한 상황을 정리한 것은 에이슬란이었다.
“그만하지요. 이러다간 끝이 없겠군요. 지금은 잘잘못이나 공치사를 할 때가 아닐 것 같습니다. 우리는 여정의 한가운데에 있습니다. 앞으로의 일을 논의가 필요할 것 같은데, 로갈 경의 생각은 어떠십니까?”
“예,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에이슬란과 로갈, 두 집단의 수장이 앞으로의 일을 두고 이야기를 나누는 가운데, 제라드와 마법사들은 성유물의 조각이 빠져나가면서 껍데기만 남아버린 사내의 유해에 다가갔다.
유해는 참으로 기묘하였다. 두어 시간 전만 해도 멀쩡하던 사람이었는데, 지금 모습을 보자면 죽은 지 한 달은 족히 되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생명력을 모두 약탈당했기 때문이리라.
“오리온 경, 그는······ 크룩스 경이었습니까?”
“아니요. 아니었습니다.”
“아니었군요. 그러면 그는 도대체 누구일까요.”
멋대로 목숨을 이용당하고 끝내는 죽은 남자.
이곳에 그의 이름을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오리온은 비참한 기분을 참지 못하고 중얼거렸다.
“그들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런 사악한 짓까지 서슴지 않는 걸까요. 어떻게 사람이 같은 사람을 이렇게 잔혹할 수가 있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무엇 때문인지는 이제부터 알아나가야겠죠. 하지만 분명한 건, 그들에게 어떤 이유가 있다고 해도 이런 짓은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겁니다.”
11
시꺼먼 구름이 가득한 하늘.
그 아래로 무수한 바위의 산이 펼쳐져 있었다.
이곳은 사람이 찾지 않는 곳이었다.
이 깊숙한 곳에 아주 오랜 시간 잠들어있던 존재가 별안간 깨어났다.
“흐어어억!”
그는 죽었다가 깨어난 것처럼 숨을 헐떡였다. 얼굴은 몹시 창백했고, 눈동자는 핏물을 쏟아낼 것처럼 시뻘겋게 물들어 있었다.
그는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이, 이럴 수가! 느껴지지가 않는다! 으아아아아아!”
그는 고함을 질렀다. 존귀한 구원자께서 그에게 하사한 성유물 조각의 연결이 끊겨버렸다.
“이노오오옴! 감히, 감히! 감히 나의 마법을!”
그는 한창 분노를 터뜨리다가 이내 왈칵 피를 토했다.
몸이 덜덜 떨려왔다.
분노 때문인가?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 그의 가슴 한구석에 분노와는 상반된 감정이 스멀스멀 피어나 자리를 잡았다.
그 감정은 다른 게 아니다.
공포.
피식자가 포식자에게 느끼는 그 본능적인 공포가 그를 휘감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