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화 (11/38)

비문 개방

1

“너무 무모하잖아!”

“그랬나?”

“그럼, 물론이지! 저분은 산도르 마탑을 대표하는 탑주님이셔. 네가 아무리 크루드 마탑의 1급 마법사라고 해도 엄연히 계급의 차이가 있다는 얘기야. 그런 도발적인 태도를 좋게 보실 리가 없잖아.”

“케이시, 넌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어?”

“그건······.”

케이시는 말을 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솔직하게 말해서 그녀는 제라드가 말을 꺼내기까지 그게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굳이 체스로 따지고 보자면 나이트 대신에 폰을 희생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탑주가 말했던 대로 이건 합리성에 따른 판단이었다.

그러나 제라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마법사도 사람이야. 단순히 효율로 목숨의 경중을 나눠서 판단한다면 그건 흑마법사와 하나도 다를 게 없는 거잖아. 도대체 그 기준은 누가 정하는 거지? 그들의 희생을 강요하기 전에 힘이 있는 사람이 마땅히 나서야 할 자리였어.”

“······.”

케이시는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힘이 있는 자가 나설 자리.

그녀는 제라드의 말에 머리를 거칠게 얻어맞은 듯했다.

처음으로 지금까지 생각해왔던 마법사들의 당연한 사고방식. 합리성에 의심을 품게 된 순간이었다.

효율.

지극히 냉정하고 계산적이며 효율적인 마법사들의 사고는 그 하나의 주제 아래 대부분 정립된다.

그러나 제라드는 다른 마법사들과는 달랐다.

마법사들의 관점이 아니라, 사람의 관점에서 보았다.

‘제라드의 말이 옳아.’

효율과 합리성. 오직 그것으로만 사람의 목숨에 잣대를 들이댄다면 그들 마법사도 옳지 못한 길을 가게 될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제라드는 계속 내게 뭔가를 알려주는구나.’

케이시는 그렇게 생각하며 자신의 공방으로 제라드를 안내하였다. 그녀의 공방은 9층에 있었다.

“여기가 내 공방이야.”

“뭐? 벌써 네 개인 공방도 있어?”

“벌써가 아니야. 너나 나나 1급 마법사야. 1급 마법사가 자기 공방도 가지지 않는 게 특이한 거라고.”

“아, 그렇구나. 난 내 공방에 관해서는 별로 생각을 안 해봤어.”

사실 마법사에게 공방처럼 중요한 공간은 없었다.

마법사의 공방은 그 마법사의 세계 그 자체. 모든 지식의 정수가 존재하는 공간인 셈이다. 하지만 제라드는 보통의 마법사와는 조금 달랐다.

왜냐하면, 그가 익히고 배운 모든 마법의 정수가 고스란히 베리타스의 안에 기록되어 있었고, 또 존재하였기 때문이었다. 제라드의 공방은 굳이 말하자면 베리타스인 셈이었다.

‘걸어 다니는 공방이 되는 셈인가.’

“그러면 나도 여기서 지내도 되는 거지?”

“뭐, 뭐?”

“난 블레이즈 스승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 산도르 마탑에 온 거잖아. 지금 그 스승님께서 돌아오지 않으셨으니, 내가 당분간 지낼 곳은 여기 아니야?”

“아, 아니 잠깐만······.”

케이시가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제라드는 케이시를 지나쳐 공방 안쪽을 살펴보기 시작하였다.

“자, 잠깐만! 아직 나는 아무 말도 안 했단 말이야.”

“와! 케이시의 공방은 엄청나게 넓네. 이쪽에 방도 몇 개 있는데? 난 여기 작은 방에서 지낼게. 몇 가지 생각해볼 게 있었는데, 마침 잘 됐다. 케이시, 너도 해야 할 일이 있었지?”

“응, 아, 아니! 잠깐! 내 말 좀 들으란 말이야.”

케이시가 다급하게 말했지만, 제라드는 이미 그동안 창고로 쓰던 방 안에 들어가버린 이후였다.

“가만 보면 정말 제멋대로라니까!”

케이시는 씩씩 화를 냈다.

그러다가 갑자기 풋 웃었다.

그녀가 도대체 언제 이렇게 다른 사람에게 휘둘려보았을까!

마탑의 사람들은 모두 케이시를 어렵게 생각했다.

누구도 다가오려고 하지 않았고, 그런 적도 없었다.

그런데 제라드는 그런 게 전혀 없었다. 거리낌 없이 불쑥불쑥 케이시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킥킥 웃고 있다가 이내 고개를 휘저었다.

‘내가 대체 왜 이러지? 정신 차리자. 너답지 않아, 케이시! 적에게 꼼짝없이 당해놓고 뭐가 좋다고 이렇게 바보처럼 웃고 있는 거야? 넌 아직도 한참 미흡해!’

케이시가 지금부터 해야 할 일은 한둘이 아녔다.

마법파괴가 무엇인지 알아내는 것.

란스터 백작령의 사건을 보고서로 정리하는 것.

마지막으로 알타자르 산맥으로 향하게 될 조사단에 들어가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케이시의 입가에 감돌던 미소는 블레이즈를 떠올린 그 순간 지워졌다.

‘스승님, 괜찮으신 거죠?’

2

제라드는 줄곧 이렇게 폐쇄된 공간에 혼자 있고 싶었다.

이 방은 다소 비좁고 너무 잡다한 물건들이 많았지만, 별 상관없었다.

지금 제라드에게 필요한 것은 혼자만의 시간이었다.

크루드 마탑을 나온 뒤로 그리 긴 시간이 지난 것도 아니건만, 벌써 수많은 일이 있었다.

영혼석, 성유물, 감시자의 요새, 푸른 마녀, 블레이즈.

모두 흑마법사와 연관된 문제들이었다.

“베리타스, 영혼석에 관한 건 여전히 알 수 없는 거야?”

[······.]

이번에도 베리타스는 침묵했다.

접근할 수 없다는 말이나 정보가 부족하다는 어떤 설명도 없이 그저 침묵을 고수할 뿐,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좋아, 그건 넘어가자고. 지금 당장은 어떻게 해도 알 수 없는 문제일 테니까. 하지만 열린 것도 분명히 있어. 그렇지, 베리타스?”

바로 그 순간이었다.

베리타스의 책장이 별안간 촤라락 열리면서 펼쳐졌다.

책장의 중간 즈음에 멈춘 책장에서는 강렬한 빛이 소용돌이치기 시작하였다.

제라드에겐 익숙한 빛이었다.

‘똑같아. 엘레멘탈 마스터의 기록을 보여줄 때와.’

제라드는 천천히 베리타스의 앞에 섰다. 그리고 내부 깊숙한 곳에서 일렁이는 빛을 가만히 들여다보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정신이 아득하게 멀어지는 감각과 함께 몸이 중력의 법칙을 벗어나서 둥 떠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어느 순간에 다다랐을까, 거침없이 바닥에 내던져지는 느낌이 들었다.

베리타스의 정보의 바다 깊숙한 곳으로 또다시 여행을 시작한 순간이었다.

시간의 흐름이 아주 느리게 흘러가는 느낌.

그 느낌은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의식이 아주 먼 곳에 있다가 별안간 돌아오는 느낌이 들었다. 그 순간, 다시금 중력과 땅바닥의 느낌이 돌아오면서 모든 감각이 제자리를 잡았다.

구역질 나는 감각이 한동안 이어지다가, 이내 주변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여긴 도대체 어디지?’

제라드는 주변을 보았다.

이곳은 온통 새까만 공간이었다.

그런데 이 시꺼먼 공간의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아주 오래되어 거의 다 무너지다시피 한 신전 하나가 보였다.

제라드가 막 그곳으로 발걸음을 옮기려고 할 때였다.

‘어? 몸이 내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아. 목소리도 나오지 않는다. 내 몸이, 내 몸이 아닌 건가?’

그 순간, 제라드는 이번 비문의 기록이 다른 누군가의 시점에서 보고 듣고 겪은 것을 그대로 목도하는 관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엘레멘탈 마스터를 옆에서 지켜보는 것과는 달리 몹시 부자유스러운 관점에서 모든 상황을 지켜봐야만 했지만, 단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느껴져. 지금 내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사람이 느끼는 생각이나 감정 따위가 그대로 전달되고 있어.’

그것은 정확히 형언하기 어려운 몹시 신비로운 느낌이었다. 다른 사람의 몸에 들어와서 그 사람이 느끼고 보는 것을 그대로 본다니.

마법으로도 쉬이 재현할 수 없는 경이로운 신비였다.

이 기록의 주인인 사내의 시선은 아까부터 한 곳에 꽂혀 있었다.

바로 저편에 있는 신전이었다.

‘아무래도 보통 신전은 아닌 듯한데.’

제라드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 사내는 무거운 발걸음을 겨우 떼고 그 신전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한 치 앞도 알 수 없었지만, 저편의 신전만큼은 또렷하게 보였다. 마치, 빛을 뿜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어둠 가득한 허공에 불길이 내달리더니 글자가 나타났다.

-그대는 타오르는 불길을 짓밟고 나아갈 수 있는가?

그 순간, 눈앞에 불바다가 펼쳐졌다.

신전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이 불바다를 넘어야만 했다.

사내는 주저하지 않았다.

세차게 타오르는 불꽃은 그 어떤 마법으로도 막을 수 없었고, 온몸의 살은 익고 타들어 갔다.

“으으으으.”

사내가 얼마나 신음을 내뱉었을까, 불바다는 어느 순간 사라졌고, 그 대신에 눈앞에 물이 가득 펼쳐졌다.

-그대는 생명을 앗아가는 세계에 뛰어들 수 있는가?

이번에도 사내는 멈추지 않았다.

치이이익.

열기가 식으며 거친 소리를 내는 가운데, 사내는 물속으로 걸어갔다. 다리가 닿지 않는 바닥. 그 물 속을 나아가는 사내는 머잖아 숨이 턱턱 막히는 것을 느꼈다. 공기가 모두 빠지고, 폐부로 물이 차오르기 시작할 때, 거짓말처럼 모든 것이 사라졌다.

“허억! 허억!”

사내는 숨을 몰아쉬면서도 멈추지 않았다.

문제는 지금 이 사내가 겪는 고통을 제라드도 똑같이 겪고 있다는 것이었다.

살이 타들어 가는 고통과 숨을 쉴 수 없는 고통을 모두 고스란히 느끼고 있었다.

‘저곳에 무엇이 있는데, 계속 이런 시련이 이어지는 걸까?’

제라드가 의문을 갖는 사이, 시련은 계속 이어졌다.

불, 물, 얼음, 벼락, 땅, 빛, 바람······.

순서대로 눈앞에 나타나는 시련들은 하나같이 사내의 목숨을 위협하였고, 생명을 깎아내고 있었다.

그러나 사내는 멈추지 않았다.

마침내 모든 시련을 넘었다.

이제 바로 눈앞에 폐허가 된 신전이 있었다.

기쁨과 희열이 사내를 가득 채웠다.

“해냈다! 내가 해냈어!”

그러나 그 기쁨은 그리 길지 않았으니.

곧 눈앞에 보이는 신전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며 모습을 감추었다. 모든 것이 허상처럼 지워지면서 없어졌다.

“안 돼, 안 돼! 이럴 수는 없다! 나를 이렇게 농락할 수는 없다!”

사내는 광분한 듯, 고함을 질러댔다.

“크아아아아! 나는 진리를 얻기 위해서 이곳에 왔다. 이곳이 벼랑 끝이다! 나더러 더 어디로 가란 말이더냐! 진리여, 진리여! 버림받고 잊힌 존재를 위한 오직 나만의 진리여, 길을 다오. 나에게 길을 다오!”

깊고 깊은 절망이 사내의 마음속에서 피어났다.

제라드는 그와 같은 끔찍한 절망은 처음 느껴보았다.

극심한 공포와 분노, 동시에 죽음을 재촉하는 듯한 절망이 시시각각 그를 덮쳐왔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이 남자는 도대체 무엇 때문에 여기에 있는 거고, 이곳에서 찾으려고 하는 진리란 도대체 뭘까?’

바로 그때였다.

모든 것이 사라져버린 어둠 속에서 별안간 단 하나의 길이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어둠보다 더 큰 심연을 품은 자여. 이곳에 남아있는 진리 중 그대에게 걸맞은 것은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그대의 생명을 앗아가고, 모든 것을 빼앗아가리라.

“나에게 걸맞은 진리라고!”

절망에 잠겨있던 사내는 희미한 길을 따라 허겁지겁 달려나갔다. 그 길의 끝에는 신전이 아니라, 단 한 권의 서적만이 존재하고 있을 뿐이었다.

시꺼먼 서적은 아주 오래된 것처럼 보였다.

사내는 벌벌 떨면서 그것을 향해 조심히 손을 내뻗었다.

그렇게 마침내 사내의 손가락이 서적에 닿는 순간.

고서의 책장에서 붉은색 눈동자가 나타났다.

[반갑다. 나의 두 번째 주인이여.]

3

사내는 몸을 떨었다.

진리.

모든 것이 사라져버린 2시대의 유산.

잃어버린 시대의 궁극적인 진리가 바로 지금 이 순간, 그의 손아귀에 들어온 순간이었다.

“드디어 닿았다. 모든 마법사의 비원. 이 세계가 잃어버린 지식의 파편이 드디어 나의 손에 닿았노라!”

지금껏 누구도 해내지 못했던 것을 그가 해냈다. 궁극적인 진리가 지금 그의 눈앞에 존재하고 있었다.

[나의 주인이 되기를 희망하는 자여, 이름을 말하고 나의 주인이 되어라. 그리고 그대가 원하는 것을 오롯이 이룩하도록 하라.]

“내 이름은 녹스다. 내가 바로 너의 주인이다. 세상이, 시대가 나의 이름을 똑똑히 기억하리라!”

[그대의 이름을 새겼다. 나의 주인 녹스여, 그대가 원하는 것은 나의 안에 있다. 똑똑히 보고 느껴라. 여덟 개의 법을 무너뜨릴 진리의 격류 앞에 네 몸과 마음, 그리고 영혼을 맡기도록 하라.]

검은 책은 요란하게 떨리더니, 이내 활짝 펼쳐졌다.

구구구구궁!

어둠이 가득한 공간이 별안간 요동치기 시작하였다.

책에서부터 나온 시꺼먼 손아귀 따위가 줄기줄기 촉수처럼 뻗어 나와서 사내의 몸을 휘감기 시작하였다. 단순히 몸을 휘감는 게 아니다. 몸 안으로 점차 스며들고 있다.

“끄아아아아악!”

사내는 별안간 고통에 몸부림쳤다. 도무지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 그를 엄습하기 시작했다.

그 고통은 녹스의 안에 빙의 되어 있는 제라드 역시 마찬가지로 느끼고 있었다.

‘으으윽! 몸이 갈기갈기 찢기는 것 같아.’

몸이 조각조각으로 찢기는 듯한 느낌이었다.

지금 이 순간, 녹스의 육신을 구성하던 모든 것이 파괴되고 새롭게 만들어지는 듯했다. 그리고 이 과정은 육체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마침내 머릿속까지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였다.

‘으으으윽!’

제라드는 고통에 몸부림쳤다.

머릿속으로 어떤 마법의 구절과 구성이 나열되어 흘러들어오기 시작했다. 문제는 그것이 단순한 마법적 지식만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마도서에 깃든 의지가 제라드의 의식을 좀먹고 있었다.

‘위험하다. 조금 전의 모든 걸 맡기라는 건 이런 의미였나!’

아찔했다. 이대로라면 저 마도서에 잠식되는 것은 녹스가 아니라, 제라드가 될지도 몰랐다. 제아무리 기록이라고 해도 이곳에 존재하는 제라드의 의식은 진짜였기 때문이다.

‘이, 이 기록을 어서 끝내야······!’

바로 그 순간이었다.

제라드는 의식이 저 멀리 튕겨 날아가는 느낌을 받았다.

기록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때의 그 감각이었다!

‘조, 조금만 더 빨리!’

제라드는 이를 악물었다.

-모든 마법을 파괴하라!

명령과도 같은 무시무시한 증오가 제라드의 내부로 침전해오고 있었다.

영원과도 같은 긴 시간 속에서 제라드가 이를 악물고 있을 때였다. 마침내, 발이 하늘에 붕 떠오르는 느낌과 함께 하늘과 땅이 뒤집어지면서 저편으로 날아가는 아찔한 감각이 제라드를 지배하였다.

머릿속을 가득 메우던 목소리는 점차 멀어지기 시작했다.

기록이 마침내 끝나는 순간이었다.

“허어어억!”

제라드는 눈을 번쩍 뜨면서 깨어났다.

숨을 거칠게 몰아쉬는 제라드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몸을 일으키다가 이내 헛구역질을 해댔다.

“웩!”

머리가 터질 것처럼 지끈댔고, 온몸이 식은땀 범벅으로 욱신거리고 있었다.

한참 그렇게 바닥에 쓰러져 있던 제라드는 거의 땅을 기듯이 벽에 몸을 기댔다.

엘레멘탈 마스터의 기록을 처음으로 열람했을 때보다 상태가 훨씬 더 좋지 않았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야. 이건 엄청나게 위험했어. 자칫하다가는 내가 먹힐 뻔했어.’

이건 그냥 기록물을 열람하는 정도가 아니다.

베리타스에 기록된 어느 시간대에 있었던 사건 중심의 인물 안으로 들어가서 그 인물과 완전히 동화되어 있었다.

그 인물의 감정과 고통을 그대로 겪었고, 마지막에는 전혀 다른 존재가 되어가는 순간조차도 경험했을 정도였다.

제라드는 그 순간을 떠올리자, 간담이 서늘하였다.

조금만 그곳에서 빠져나오는 게 늦었더라면 지금쯤 제라드의 자아 역시 그것에 삼켜지지 않았을까.

제라드는 시선을 돌렸다.

베리타스는 여전히 열려 있었다.

바로 그 순간, 흘러나오던 빛을 흡수하더니, 탁 소리를 내며 닫혔다.

‘그 책은 베리타스와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어.’

오래된 고서와 시꺼먼 책장.

제라드가 그걸 착각할 리가 없다.

“베리타스.”

제라드는 베리타스를 불렀다.

그러나 대답은 없었다.

기묘하게도 베리타스의 눈은 완전히 감겨 있었다.

“내 말이 들리지 않는 거야?”

그러나 베리타스는 여전히 눈을 뜨지 않은 채로, 그저 제라드의 곁에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정보량이 너무 큰 나머지 베리타스도 잠이 든 건가? 아직 물어볼 것도, 알고 싶은 것도 너무 많은데······. 베리타스가 깨어나는 건 대체 언제지······.’

제라드는 그렇게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이내 기절하듯 잠들어버렸다.

4

산도르 마탑의 남쪽 길을 따라가면 란스터 백작령이 나온다. 그리고 이 란스터 백작령의 서쪽에 놓인 대로를 따라서 쭉 나아가다 보면 크라우드 공작령이 나왔다.

지금 이 공작령으로 마차 한 대가 들어서고 있었다.

마차는 무엇이 그리도 바쁜지, 곧장 공작가의 관저로 향하였고, 경비병을 지나서 집사에게 한통의 서신을 전달하였다.

집사는 그 서신이 란스터 백작이 직접 보낸 것이며, 타이온의 앞으로 온 것임을 알고 공작이 머물고 있는 집무실을 찾아갔다.

똑똑.

“들어오게.”

타이온의 목소리를 들으며 방 안으로 들어간 집사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무슨 일인가.”

“란스터 백작께서 영주님 앞으로 서신을 한 통 보냈습니다.”

“란스터 백작이? 드문 일이군. 이리 주게.”

타이온은 란스터 백작이 자신에게 서신을 보낼 이유가 대체 뭘까, 생각하면서 서신을 읽어내려갔다.

백작의 서신에는 백작가에 최근 있었던 흑마법사 사건에 관한 이야기가 쓰여 있었다.

타이온의 눈빛이 어둡게 변했다.

‘흑마법사인가.’

그들의 태동에 관한 이야기는 크루드 마탑주 그렌자일의 서신으로 이미 이야기를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의 영향력이 란스터 백작가 안쪽까지 드리우게 될 줄이야.

‘심상치 않은 일이로군.’

그렇게 생각하면서 서신의 내용을 더 읽어내려갈 때였다.

한창 백작가에서 일어난 사건에 관해 이야기하던 백작이 별안간 제라드의 이야기를 꺼냈다.

‘제라드.’

벌써 6년이었다. 그동안 바보 공자의 존재는 그동안 크라우드 가문에서 완벽하게 잊혔다.

크라우드 가문의 완벽한 핏줄에서 그런 바보가 나타났다는 것은 오명이었고, 절대로 알려져서는 안 될 일이었다. 그렇기에 제라드에 관한 이야기는 불문에 부쳐졌고, 이젠 누구도 그의 이름을 꺼내는 이가 없었다.

그 이름을 다시 보게 되는 게 대체 얼마 만일까.

타이온은 제라드의 마지막 모습을 오랜만에 떠올리다가 다시 서신의 내용을 읽어내려갔다.

그러다가 별안간 눈을 부릅뜨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영주님?”

“······.”

타이온의 손이 덜덜 떨렸다.

그는 몇 번이고 서신의 내용을 다시 읽어보았다.

“케이틀란······. 그자가 기어이 해낸 모양이야.”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집사, 지금 당장 크루드 마탑에 제라드 란스터라는 마법사가 있는지 파악해보게.”

그러자 집사도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알겠습니다.”

타이온은 혼자 남아서, 당황한 표정을 좀처럼 감추지 못하였다. 자그마치 6년이나 지난 상황이었다! 이미 모든 것이 결정 났고, 더는 바뀔 것도 달라질 것도 없는 일이다.

그런데 어째서 그의 마음은 이렇게 요동치는 것일까!

“제라드, 네가 마법사가 되었단 말이냐?”

그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단 한 가지였다.

제라드가 더는 바보가 아니라는 것이다.

5

산도르 마탑의 9층 케이시의 공방.

지금 이 공방 안쪽의 작은 창고에서는 한 사람이 죽은 것처럼 누워 있었다.

제라드였다.

벌써 꼬박 하루가 지난 후였다.

케이시는 밖에 나간 후였으므로, 지금 이 공방에는 제라드 한 사람만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별안간 제라드가 몸을 뒤척이다가 눈을 뜨면서 깨어났다.

“끄응······.”

낮은 신음을 토하며 일어난 제라드는 몸을 이리저리 꺾으며 뭉친 근육을 풀었다.

“후우. 이제야 좀 살겠네.”

기절하듯 잠들기 전까지만 해도 온 세상이 핑핑 도는 것 같았고 온몸은 당장 무너질 것처럼 욱신거렸는데, 지금은 그 모든 증상이 씻은 듯 사라져 있었다.

제라드는 베리타스로 시선을 돌렸다.

베리타스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잠들어 있었다.

“엘레멘탈 마스터의 기록을 처음 열람했을 때에도 거의 반년이었지. 지금은 눈이 완전히 감겼는데, 또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모르겠는걸······.”

스펠 브레이커.

제라드가 알고 싶었던 건 흑마법사가 썼던 그 마법뿐이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하게 전혀 엉뚱한 기록들을 보게 되었다.

“녹스.”

그 이름을 거듭 중얼거렸지만, 아무것도 떠오르는 게 없었다. 지금껏 읽었던 역사서나 어떤 책에서도 그와 같은 이름은 없었다.

물론, 지금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아니었다.

제라드는 베리타스를 물끄러미 보았다.

녹스의 기록을 열람하면서 그는 분명히 검은 고서를 보았다. 생긴 건 똑같았다. 하지만 분위기는 전혀 달랐다.

‘녹스의 기록에서 나왔던 고서의 목소리는 꼭······ 사람 같았어. 베리타스랑은 전혀 다른 존재처럼 말이야.’

고서가 녹스에게 접촉했던 그 순간, 제라드는 분명하게 느꼈다. 분노와 증오가 깃든 의지를 말이다. 그것은 녹스의 의지와는 전혀 무관하였다.

‘베리타스와는 느낌이 너무나도 달라. 그렇단 얘기는 역시 베리타스와 같은 고서의 존재가 여러 개라고 보는 게 타당하겠지. 그리고 흑마법사들은 마도서를 성유물이라고 부르는 거야.’

그렇게 생각하니 앞뒤가 딱딱 맞아떨어졌다.

‘모든 마도서에는 비문이 존재하고, 조금 전 내가 열람했던 건 베리타스의 비문이 아니라, 다른 마도서에 존재하는 1종 비문일지도 모르겠어.’

정보 수집.

베리타스는 분명히 그렇게 말했었다.

제라드는 생각을 정리하였다.

일단 지금 알 수 있는 것은 그것뿐이었다.

“그럼 이제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만 남은 건가.”

제라드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눈을 감았다.

스펠 브레이커의 기록 열람의 끝자락에서 제라드는 스펠 브레이커의 술식구조를 열람했다.

정확하게는 열람이 아니라, 강제적으로 주입되었다고 해야 하겠지만 말이다.

제라드의 머리가 핑핑 돌아갔다.

어둠 속에서 스펠 브레이커의 술식이 펼쳐졌다.

눈꺼풀 안쪽에 있는 제라드의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였다.

시간이 흐르는 가운데, 제라드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6

‘이게 정말 마법인가?’

제라드는 스펠 브레이커의 술식 구조를 모두 확인한 후에 그렇게 생각했다.

단언컨대, 이 마법은 엘레멘탈 마스터가 남겼던 그 어떤 마법 술식보다도 훨씬 더 난해하였고, 동시에 무척이나 괴이쩍고 특이했다.

무엇이 괴이쩍으냐고 하면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모든 게 다 다르다. 이 정도로 기본 베이스가 다르다면 마법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인지, 그런 의문이 들 정도였다.

제라드는 품속에서 영혼석 파편을 꺼냈다.

마법 술식을 정확하게 열람한 후에야 정확하게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자신의 목숨과 영혼석을 동시에 소모하면서 마법을 사용했어. 하지만 그들이 썼던 건 제대로 된 스펠 브레이커가 아니야. 불완전한 마법이었어. 스펠 브레이커는 그것보다 훨씬 더 강력하고 위력적인 마법이야.’

오직 마법을 파괴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마법.

스펠 브레이커의 기록에서 마도서의 의지에 깃든 분노와 증오 따위와 같은 악의가 소용돌이치던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 마법은 처음부터 그 목적이 일반적인 마법과는 달랐으니까.

“베리타스, 이건 네 속에서 나온 게 아닌 거지?”

제라드는 베리타스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많았지만, 여전히 대답은 없었다.

그때, 제라드는 손에 들고 있는 영혼석 파편을 떠올렸다.

‘그래, 그러고 보니 베리타스는 영혼석에 민감하게 반응했었지.’

처음부터 의아했다.

베리타스는 영혼석에 한해서만큼은 이상할 정도로 민감하게 반응했다.

‘베리타스에게 이걸 주는 게 어쩌면 새로운 열쇠가 되는 걸지도 몰라. 왜 이걸 이제 생각한 거지?’

제라드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영혼석의 파편을 베리타스의 몸에 가져다 댔다.

바로 그 순간.

쩌엉!

꽝!

별안간 베리타스에서 강력한 충격파가 발생했다.

제라드는 매서운 기세로 튕겨나가 문을 박살 내고 케이시의 공방 바닥 한가운데를 나뒹굴었다. 미처 대응할 새도 없이 일어난 일이었다.

“끄응······.”

제라드는 낮게 신음하면서 몸을 일으키다가 창고에서 맹렬한 빛이 쏟아져나오는 것을 발견했다.

“베, 베리타스?”

창고에서 천천히 나오는 베리타스의 모습.

눈동자를 부릅뜬 채로 새하얀 빛에 휘감겨 있는 모습은 심상치가 않았다.

그때, 머릿속에서 베리타스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잘못된 접근. 해당 정보는 3종 비문의 내용. 접근 권한, 정보, 성유물 조각 완성도 일정 수치 미달. 경고. 재시도시 폭주할 가능성이 매우 높음.]

크게 뜬 눈동자는 정확히 제라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제라드가 당황한 얼굴을 하고 있을 때, 베리타스는 이내 서서히 눈을 감았다.

“3종 비문이라고······?”

제라드는 엉망이 된 공방 한가운데서 베리타스를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흐음, 3종 비문이란 말이지······.”

처음 1종 비문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혹 다른 비문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생각은 지난 6년간 바뀌었다.

엘레멘탈 마스터의 유산의 내용은 너무나 방대하였다.

당대에 존재하는 공용 마법 하나하나에 깃든 정보량이 약 100이라고 가정해볼 때, 엘레멘탈 마스터가 남긴 유산의 마법은 고작 한 부분에만 족히 2,000을 넘는 정보량이 존재하였다.

‘지금으로서는 3종 비문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보통 내용은 아니라는 건 틀림없어. 베리타스가 폭주를 말했을 정도면 보통 위험한 게 아니겠지.’

여전히 풀리지 않은 것들은 많았다.

그러나 수많은 길은 결국 하나로 모인다.

“흑마법사.”

제라드는 굳은 얼굴로 그렇게 중얼거리다가 그제야 엉망이 되어버린 공방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케이시가 화내겠는걸.”

제라드가 난감한 얼굴로 정리를 막 시작했을 때였다.

그 말을 꺼내기가 무섭게 공방에 케이시가 돌아왔다.

그녀는 엉망이 된 공방의 모습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그게 말이야······. 좀 실수가 있었어.”

“실수라고?”

케이시가 의아한 얼굴로 창고를 살폈다.

꽤 강렬한 폭발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창고 안은 엉망진창이라는 말로는 다 표현이 안 될 정도였다.

“어디 다친 데는 없는 거야?”

“응, 나는 괜찮아. 정말이야.”

제라드는 케이시가 화를 내는 게 아니라, 걱정 가득한 얼굴을 하자 부드럽게 웃었다.

“미안해. 공방 어지럽혀서. 창고 문도 부서졌어.”

“그런 건 괜찮아. 다시 정리하면 되는 거니까 신경 쓸 것 없어. 그보다는 대체 뭘 하다가 실패한 거야? 네가 실패도 해?”

“하하. 당연하지. 나도 실패도 하고 실수도 해.”

그 대답에 케이시는 미심쩍다는 얼굴을 했다.

‘실패? 못하는 게 없는 것처럼 보이는 제라드가 실패한다는 건 도무지 상상이 안 되는데······.’

“무슨 마법을 연구하는 중이었는데?”

“아직 제대로 시작한 게 아니야. 연구는 지금부터 해야지.”

제라드는 그렇게 말하며 눈을 빛냈다.

스펠 브레이커는 위험했다. 그런 위험한 마법을 쓰는 적들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준비가 필요했다.

‘진짜 스펠 브레이커라면 몰라도 불완전한 스펠 브레이커를 막는 방법은 생각보다 쉽게 만들 수 있을 것 같아.’

제라드의 머리는 이미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7

산도르 마탑은 매우 부산하게 돌아갔다.

외부로는 마탑을 중심으로 약 100미터 안팎으로 존재하는 기이한 이상기후를 다시 원래대로 되돌리는 작업이 한창 진행되었고, 내부로는 조사단을 파견하는 마법사 인력을 하나씩 모으는 과정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케이시 역시 요즘 그 일로 하루에 한 번씩 다일론과 독대하고 있었다.

“몇 번을 말하지만 안 되는 일이야.”

“부탁드립니다.”

“케이시, 자네는 고집이 너무 세군. 안 된다고 분명히 말하지 않았나.”

“탑주님, 블레이즈 델파인은 제 스승님이세요.”

“알고 있네. 하지만 자넨 마법사야. 감정적으로 생각하지 말고 냉정해지게, 케이시 그린우드. 자네는 블레이즈의 마법을 잇는 후계자로서의 입지를 까맣게 잊어버렸는가?”

“······.”

냉엄한 다일론의 말에 케이시는 말문이 턱 막혔다.

블레이즈는 북부행에 케이시를 제외한 두 명의 제자를 함께 데려갔다. 그리고 그들은 함께 행방이 묘연해지고 말았다.

만약······ 정말로 만에 하나의 이야기였지만, 블레이즈와 두 제자가 모두 세상을 등지게 되었다면 지금 이 세상에 블레이즈의 고유술식 홍염 마법을 익힌 후계자는 오직 케이시뿐이었다.

위대한 마법의 절전은 마법계에 엄청난 손해였다.

다일론은 그것을 경고하는 것이다.

“제라드, 그 역시도 홍염 마법을 배웠다는 이야기는 들었네만, 그가 배운 것이 자네보다 더 깊진 않다는 것은 누가 봐도 명확한 일이 아니겠나? 산도르 마탑과 진리를 탐구하는 마법사로서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냉철하게 생각하면 답은 쉽게 나올 것이야.”

다일론은 단호하였다.

케이시도 그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마법사로서 냉정하게 생각해보자면 그의 말은 틀린 게 하나 없었다. 만약에 블레이즈가 지금 옆에 있었다고 해도 다일론의 말에 동의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케이시의 눈은 고집스럽게 빛났다.

‘스승님의 행방을 알 수 없는 지금, 이렇게 가만히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어.’

다일론도 그런 케이시의 눈동자를 보고 바로 눈치챘다.

“쯧쯧. 그 눈빛을 보니, 허락하지 않으면 명을 어기고서라도 북부로 갈 참이로군. 아무리 내가 탑주라고 해도, 1급 마법사의 결단을 막을 수는 없는 법일진대, 난감한 일이로군······.”

다일론이 그렇게 중얼거리며 턱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그녀를 조사단에 참여시키면서 조사단의 안전까지 장담할 방법. 그건 오직 하나뿐이었다.

‘제3의 선택지라고 했던가.’

“케이시, 제라드와 함께 다시 내 방에 찾아오겠는가? 그때 이 이야기는 다시 하기로 하지.”

케이시는 공방으로 돌아왔다.

안쪽 창고에는 제라드가 있었다.

문이 부서져서 밖에서도 안이 훤히 보였다.

제라드는 그새 말끔하게 정리된 창고 안쪽에서 눈을 감고 가만히 앉아있었다. 연구한다던 마법에 심취해있는 모습이었다.

케이시는 조용히 문가에 앉아서 제라드의 옆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렇게 보면 참 다른 사람 같아. 웃을 때와 그렇지 않을 때, 그리고 지금처럼 저렇게 진지할 때······.’

눈, 코, 입······.

케이시는 제라드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어느새 정신없이 빠져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 얼굴을 붉혔다.

‘내가 대체 왜 이러지?’

쿵. 쿵.

지금 이 순간, 심장이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빠르게 뛰었다. 꼭 병이라도 난 것처럼 말이다.

란스터 백작령 이후로 조금씩 뭔가 이상해졌다. 제라드를 생각하면 가슴 한구석이 이상하게 울렁거렸고, 머리에 열이 확 오르는 느낌이었다.

케이시는 바보가 아니었으므로, 지금 자신이 겪는 이 열병과 같은 증상이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혹시 내가 제라드를 좋아하게 된 건가?’

케이시는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심장은 여전히 무섭게 뛰고 있었다.

가슴은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8

제라드는 천천히 눈을 떴다.

‘역시 내가 생각하던 것처럼 쉽게 풀렸어.’

스펠 브레이커는 난해하고 괴이한 마법이었다.

그렇기에 제라드도 이제 이 마법이 어떤 식으로 발동하는지 겨우 그 뼈대만 파악했을 따름이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스펠 브레이커를 어떻게 하면 막을 수 있을지 그 답을 찾을 수 있었다.

지금 이 순간, 제라드의 머릿속엔 하나로 정립된 마법 술식 하나가 존재하였다.

‘이거라면 완성형 스펠 브레이커는 막기 어렵겠지만, 미완성 스펠 브레이커라면 충분히 막을 수 있을 거야.’

제라드는 스펠 브레이커의 몇 가지 술식 중 몇 가지를 떼어내서 스펠 브레이커가 마법에 침투하는 그 경로 자체를 완전히 틀어막는 방법을 만들 수 있었다.

‘마법진으로 만들어서 로브나 장신구에 새기는 방식이면 따로 마법을 익히지 않아도 충분할 거야. 좋아, 어서 탑주님에게 가자.’

제라드는 자리에서 일어나다가 우뚝 멈추었다. 저 옆에 케이시가 벽에 기댄 채로 눈을 감고 잠들어 있는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케이시가 왜 여기서 자는 거지?’

제라드가 고개를 갸웃하면서 그녀에게 다가갔다.

케이시는 제라드가 바로 앞까지 다가왔음에도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었다.

제라드는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는 걸 느꼈다. 입을 살짝 벌리고 새근새근 자는 케이시가 귀엽게 보인 까닭이다.

“케이시.”

“으응······.”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케이시가 부스스한 얼굴로 깨어나다가 바로 앞에 있는 제라드의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란 표정을 했다.

“어, 어······.”

“왜 여기서 자고 있어?”

“아, 아니······ 그, 그게 할 말이, 할 말이 있어서······.”

케이시가 깜짝 놀란 얼굴로 말을 더듬거리자, 제라드가 크게 웃었다. 그러자 그녀의 얼굴은 더욱 벌겋게 달아올랐다.

“우, 웃지 마! 나, 나는 중요한 이야기를 하려고 기다렸던 거란 말이야! 오래 기다리다 보니까, 어, 어제는 잠을 못 잤고······.”

“하하. 알았어. 그만 웃을게. 근데 중요한 이야기라는 게 대체 뭐야?”

“그게······.”

케이시는 머뭇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그녀가 지금 입을 열지 못하는 것은 제라드와 대놓고 비교되었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상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이건 위험한 일이야. 이 앞엔 푸른 마녀, 그리고 흑마법사와의 전투도 있어. 그런데 내가 가고 싶어서, 제라드에게 함께 가달라고 하는 건 너무 이기적인 생각이 아닐까······.’

케이시는 자신의 자존심이 상하는 것보다 자기 때문에 제라드를 위험한 곳으로 끌고 가게 되는 것을 우려하고 있었다.

“케이시.”

제라드가 그녀의 이름을 다시금 부드럽게 불렀다.

케이시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제라드가 웃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

케이시는 처음에 저 웃음이 엄청나게 바보 같다고 느꼈다.

마법사가 저렇게 헤프게 자기감정을 드러내다니. 그건 자기 약점을 보여주는 일과 같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진정으로 강인한 사람은 타인에게 가혹하지 않은 법이었다. 케이시가 생각하기에 제라드는 강인한 사람이었다. 저 부드러움에는 흔들림 없는 강인함과 포용력이 존재했다.

“사실은······.”

케이시는 그동안 공방을 계속 들락날락하면서 무엇을 하고 다녔는지 모두 말했다. 그리고 다일론과의 대화도 말이다.

그렇게 케이시의 얘기가 모두 끝나자, 제라드는 언제 웃고 있었느냐는 듯 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케이시, 전부터 느낀 건데 너 어떤 면에선 참 바보 같아.”

“뭐? 나, 나는 그저 네가······.”

케이시가 울컥한 얼굴로 따지려고 하자, 제라드가 불쑥 그녀의 머리에 손을 얹고 쓰다듬었다.

“무슨······ 무슨 짓이야······.”

케이시는 반항하듯 중얼거렸지만, 그 목소리엔 힘이 없었다. 벌게진 얼굴로 고개를 숙인 채로 두 눈만 이리저리 굴리는 그녀는 몹시 얌전했다.

“케이시, 네 스승님은 이제 내 스승님이기도 해. 아니, 애초에 그런 관계가 아니었다고 해도, 네가 도와달라고 했으면 난 널 도왔을 거야.”

“······왜 돕는데?”

“그야 우린 친구잖아. 내가 널 돕는데 그거 말고 다른 이유가 필요해?”

제라드가 단호한 목소리로 말하자, 케이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블레이즈 말고 케이시의 머리를 쓰다듬는 건 제라드가 처음이었다. 제라드는 그녀보다 나이도 어리건만, 이상하게 그 손길이 싫지도 기분 나쁘지도 않았다.

오히려 지금 그것보다 더 신경 쓰이는 건.

‘친구······.’

제라드의 그 표현이었다.

9

제라드와 케이시는 최상층에 올라와서 다일론과 마주했다.

“좋아, 그럼 그렇게 하기로 하지. 케이시를 그렇게 보내는 것보다는 자네가 함께 해주는 게 훨씬 더 안전할 거야. 케이시와 제라드, 그대의 이름을 조사단 명부에 올리도록 하겠네.”

“감사합니다, 탑주님.”

케이시는 고개를 깊이 숙였다.

“구체적인 일정은 곧 잡힐걸세. 그리 여유로운 기간은 아니니 준비할 건 미리 해두도록.”

“알겠습니다.”

케이시는 그렇게 말하며 방을 나서려고 하였다. 하지만 제라드는 그 자리에서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케이시, 먼저 가 있을래? 나는 탑주님과 단둘이 이야기를 좀 나눈 이후에 돌아갈게.”

그 말에 케이시가 머뭇거렸다. 바로 얼마 전에 제라드가 어떤 식으로 다일론과 대립했었는지, 두 눈으로 직접 보지 않았던가.

“괜찮아. 정말이야.”

“······.”

“케이시, 그의 말대로 하게. 나도 그가 할 이야기가 어떤 것인지 몹시 궁금하군.”

다일론까지 그렇게 말하자, 케이시도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럼, 먼저 물러가 보겠습니다.”

케이시가 나간 뒤에 이제 방 안엔 다일론과 제라드만 남았다. 그는 몹시 흥미롭다는 얼굴로 미소 지었다.

“제라드, 오늘은 그대가 어떤 말로 나를 호통칠지 기대되는군. 자, 이제 케이시도 나갔으니 가감 없이 말해보겠나?”

“탑주님께서는 제3의 답안을 찾으신 것 같습니다.”

제라드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앞뒤가 없는 말이었지만, 다일론은 알아들었다.

이전에 했던 이야기의 연속이었다.

“하하하. 그래, 찾았지. 바로 자네라는 제3의 답안을 말이야. 자네가 말하지 않았던가. 자네라면 존재하지 않는 답을 선택한다고 말이야. 나로서는 답을 내기 어려우니, 답을 아는 자네를 택할 수밖에.”

“탑주님께서 저를 택하셨으니, 저도 제가 찾은 답을 공유하려고 합니다. 그 답을 모두가 안다면 굳이 단 하나의 선택지에 목을 맬 이유도 없겠죠.”

“그게 무슨 말인가? 답을 공유한다니.”

그 물음에 제라드는 품속에서 양피지를 꺼내 들었다. 돌돌 말린 양피지를 펼치자, 그 안에 내용이 빼곡하였다. 그것은 얼핏 보기에도 어떤 마법 술식이 틀림없었다.

“제가 구상한 미완성 스펠 브레이커를 막을 방법입니다. 아직 제대로 된 명칭은 없고, 그냥 스펠 가드 정도로 부르면 될 것 같습니다.”

“스펠 가드? 내가 좀 봐도 되겠나?”

“네, 보세요. 아직 술식을 압축하진 못해서 내용이 좀 많긴 하지만, 이거라면 스펠 브레이커를 막을 수 있을 겁니다. 물론, 완성형 스펠 브레이커는 그걸로도 막을 수 없을 겁니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는 것보단 훨씬 나을 거예요.”

하지만 다일론은 지금 제라드의 말을 들을 정신이 아니었다. 불과 수일 남짓이었다!

‘그런데 그 얼마 안 되는 시간 만에 그 괴이쩍은 마법을 막을 방법을 만들어냈단 말인가?’

양피지를 가득 채운 술식을 훑는 다일론의 얼굴은 시시각각 굳어가고 있었다.

“보시면 알겠지만, 이 방어법은 스펠 브레이커가 마법을 파괴하기에 앞서 침투하는 경로 자체를 틀어막는 방법입니다. 완성형 스펠 브레이커는 훨씬 더 입체적인 침투를 해올 겁니다. 그 정도의 마법을 방어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해요. 하지만 당장 이 방어법이라면 바로 얼마 전의 흑마법사 정도의 수준은······.”

“잠깐, 잠깐······ 말을 끊어서 미안하네만······.”

다일론이 갑자기 제라드의 말을 끊었다.

지금 그의 얼굴은 불신으로 얼룩져있었다.

제라드가 의아한 얼굴을 하는 가운데.

“······나는 이 마법 술식이 대체 뭘 말하는 것인지조차도 아예 모르겠네. 아니, 애초에 이게 마법 술식인지조차도 모르겠어. 이게 진정 마법이란 말인가?”

10

일순 침묵이 흘렀다.

제라드의 표정이 이상하게 변했다.

이게 갑자기 무슨 뜬금없는 말인가.

“기존의 마법과는 확실히 전혀 다르긴 하지만, 잘 보세요. 술식의 구조를 잘 살펴보면 맥락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

다일론은 다시금 제라드가 내미는 양피지의 빼곡한 내용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이게 도대체 무슨 마법 술식인지, 그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미안하지만 아무리 봐도 모르겠군. 분명히 이 양피지에 있는 건 마법 술식처럼 보이네. 하지만 그 내용은 아무렇게나 써놓은 것처럼 엉망진창일세. 기본적인 마법의 법칙 순서조차 보이질 않아.”

“그럴 수밖에요. 애초에 스펠 브레이커가 일으키는 마법파괴 현상은 기존의 마법이론으로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전혀 다른 관점에서 접근해야 해요. 다시 잘 보세요. 이쪽의 술식과 이쪽의 술식의 유기적 배열구조가 어떤 흐름을 나타내고 있는지만 파악하면 이 마법이 뭘 위한 마법인지, 그리고 스펠 브레이커가 어떤 원리인지 알 수 있을 거예요.”

제라드는 설명은 계속되었다. 하지만 아무리 이야기를 들어도 다일론으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이건 고유술식을 새로 만든다는 그런 차원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마법의 토대를 완전히 갈아엎고 모든 것을 새로운 관점에서 보고 판단해야 한다.

“······설명은 고맙네. 하지만 그런 이야기를 듣는다고 해도 지금 당장 이해하고 받아들이긴 어려울 것 같군. 내겐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 헌데, 대체 이걸 어떻게 알았지? 자넨 분명히 완성형과 미완성을 언급했어. 그말인즉슨 무엇이 완성형인지 알았다는 말과 같지 않나.”

“음, 흑마법사들이 사용하는 마법을 보고 알게 되었습니다. 말씀드렸던 것처럼 그들의 마법을 역으로 훑어나가다 보니, 듬성듬성 뭔가 구멍이 있는 것 같더군요.”

“······.”

다일론은 미간을 찡그렸다.

한눈에 스펠 브레이커의 술식 구조를 간파하였다는 것조차 믿기 어려운데, 그걸 바탕으로 방어법을 만들었다는 얘기다. 이건 그냥 비상식적인 수준의 이야기라고 할 정도가 아니었다.

“그걸 고작 며칠 만에 다 해냈다는 것보다는 자네가 처음부터 그 흑마법을 알고 있었다고 보는 게 훨씬 더 상식적인 이야기 같다는 생각이 드는군.”

다일론의 반응을 보면서 제라드도 난감한 표정을 했다.

스펠 브레이커를 막기 위한 스펠 가드는 분명히 기존의 마법의 관점에서는 도저히 설명이 안 됐다.

그러나 제라드가 보기에 스펠 가드는 스펠 브레이커에 비하면 그야말로 아주 간단한 마법이었다. 더군다나 눈앞에 있는 마법사는 마탑의 정점에 있는 마법사가 아닌가.

‘어째서지? 그냥 조금만 다른 시점에서 보면 간단한데.’

그러나 제라드는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 이건 고작 관점의 변화로 설명할 수 있는 수준의 마법이 아니었다.

이를테면 농부들에게 아무리 마나의 유동과 흐름을 설명해도 알지 못하는 것과 같았다. 마법사는 마나의 흐름을 손에 잡을 것처럼 쉽게 느끼지만, 농부에게는 그저 다른 차원의 알 수 없는 이야기인 것이다.

지금 다일론이 느끼는 게 바로 그러하였다.

기존의 방식에서 완벽하게 벗어난 전혀 다른 차원의 술식을 가져와서 그게 마법이라고 하는데, 다일론이 보기엔 그냥 술식을 아무렇게나 대입하고 배치한 것처럼 보였다.

다일론은 한참 양피지의 술식을 두 눈에 담고 있다가 물었다.

“제라드, 하나만 더 묻지. 이건 그 자체로 이미 마법인가?”

“예, 마법진으로 형태를 짜놓았습니다. 이미 그 술식만으로도 마나에 반응해서 발동합니다. 장신구에 새겨넣는 게 가장 좋겠지만, 아직 술식을 압축하지 못했으니 그건 어려울 거예요. 그러니 손쉽게 로브에 새겨넣는 게 좋을 겁니다.”

“으음, 잘 알겠네. 일단은 혼자 조금 이 마법을 알아보고 싶은데, 내게 시간을 조금만 주겠나?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야.”

“알겠습니다.”

제라드는 그렇게 말하며 물러갔다.

그 표정이 참으로 가관이었다.

다일론이 제라드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제라드 역시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던 까닭이다.

다일론은 제라드가 나간 뒤, 곧바로 방을 벗어나서 안쪽으로 걸어갔다. 방 안쪽에는 아래로 이어지는 또 다른 석판이 있었다.

다일론은 그 석판에 올랐고, 석판은 아래로 향하였다.

그렇게 얼마나 내려갔을까.

석판이 멈추고, 다일론은 내렸다.

그곳은 어둠에 휩싸인 복도였다.

저벅저벅 침묵에 잠긴 복도에는 그의 발걸음 소리만 들리는 가운데, 그가 발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마법의 빛이 들어왔다.

그 삭막한 풍경을 지나서 얼마나 나아갔을까.

별안간 넓은 공간과 철창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곳에 갇혀있는 이들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 철창의 안에는 흑마법사들과 푸른 마녀들이 있었다.

다일론은 그들 중 비교적 상태가 괜찮은 흑마법사의 앞에 섰다.

“똑똑히 들어라. 지금부터 네게 기회를 줄 것이다. 이곳에는 지금 오직 나뿐이다. 그리고 나는 지금부터 너를 풀어줄 것이야. 나의 마법을 파괴한다면 너는 자유가 될 수 있다.”

흑마법사는 그 말에 눈을 날카롭게 치켜뜰 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다일론은 벽면에 손을 얹었다.

바로 그 순간, 마나를 구속하는 철창이 그그그긍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열렸다.

흑마법사는 이 느닷없는 상황에 눈을 크게 뜨더니, 벼락같이 양손을 다일론을 향해 펼쳤다. 눈앞에 기회가 있었으니, 붙잡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팟!

스펠 브레이커가 발동했다.

대번에 얼굴이 창백해지는 흑마법사.

그는 숨을 헉헉댔지만, 이내 바로 다른 마법을 준비하였다. 다일론이 마법을 잃었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콰앙!

흑마법사는 자신이 죽는지도 모르고 사지육신이 터져서 바닥에 나뒹굴었다.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가운데, 다일론은 품속에서 제라드가 준 양피지를 꺼내 들었다.

“정말이로군. 이건 정말로 스펠 브레이커를 방어할 수 있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마법을 꿰뚫어본단 말인가?”

다일론은 푸른 마녀들의 음울한 외침을 뒤로 하고서 그곳에서 벗어났다.

이곳에서 볼일은 끝난 것이다.

긴 복도의 빛이 꺼지면서 그의 뒤로 어둠이 드리웠다.

‘이거라면 정말로 제3의 선택지······ 아니지, 제4의 선택지라고 봐야겠어.’

11

“이게······ 뭐야? 마법 술식 같긴 한데, 뭔가 이상한데? 앞뒤가 전혀 맞지가 않아. 이게 마법이야?”

케이시의 반응도 다일론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정말로 모르겠어?”

“모르는 게 문제가 아니고······ 이건 엉망진창이잖아. 마법의 기본도 갖춰지지 않은 술식이야. 마법진의 형태를 갖추고 있긴 하지만 말이야.”

케이시는 그렇게 단언하였다.

다일론에 이어서 케이시까지 제라드가 만든 스펠 가드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비문의 내용에 접촉했기 때문인가? 그게 아니면 보통 사람들의 관점에서는 그게 당연한 건가?’

“대체 이게 뭔데?”

케이시가 궁금한 듯 물어오자, 제라드는 모든 걸 사실대로 말해주었고, 그녀는 충격과 공포에 빠진 얼굴이었다.

“요 며칠 사이에 연구한다던 그 마법이······ 벌써 완성되었고, 이게 그 스펠 브레이커를 막을 방법이라는 거지?”

“그래, 맞아.”

제라드의 말에 케이시는 다시금 양피지를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그녀는 이게 무슨 내용인지 당최 알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더 놀랄 일은 없지 않을까 했는데, 그건 내 오만이었구나. 넌 매번 내 상상을 초월하는 사람이야. 아니, 사람인지조차도 의심스러운걸. 드래곤 아니야?”

“뭐라고? 하하하.”

제라드는 재미있는 농담이라고 생각한 듯 웃었다.

그러나 케이시는 그냥 농담으로 하는 소리가 아니었다. 그녀는 진심으로 제라드의 능력을 알 수 없다고 생각했다.

조사단의 출정은 나흘 뒤로 결정되었고, 규모는 총 오십 명으로 결정되었다.

조사단의 책임자는 원로 마법사 중 한 사람인 에이슬란이 맡게 되었고, 1급 마법사의 수만 열두 명이나 되었다. 마탑 전체의 1급 마법사의 수가 40명 남짓임을 생각해보자면 실로 파격적인 결단이었다.

물론, 이런 결단이 있기까지는 제라드의 스펠 가드의 영향력이 지대하였다. 마탑의 전력이 안전하다는 판단이 들자, 확실한 전력을 대거 투입한 것이다.

‘생각이 훤히 보이잖아.’

제라드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굳이 입 밖으로 그 말을 하지는 않았다. 굳이 꺼낼 것 없는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어쨌든 제라드의 의도대로 되었다. 다일론은 제라드의 스펠 가드를 받아들였고, 조사단의 마법사들의 로브 안에 모두 새겨넣었다.

이렇게 출정일이 가까워지면서 구체적인 이동수단이 언급되기 시작했다. 1급 내지는 2급 마법사가 외부로 파견될 때면 보편적으로 마차를 탄다. 하지만 이번에는 전체 인원이 적지 않았기에, 이동수단은 말로 결정되었다.

제라드는 그 이야기를 듣고 머리를 긁적였다.

“큰일인걸. 나는 말 타는 법 모르는데.”

“뭐?”

케이시가 황당하다는 얼굴을 했다.

말은 이 시대의 주요 이동수단이었다.

물론, 1급 마법사 정도가 되면 마차를 타고 다니긴 하지만, 그렇다고 마법사들이 말을 타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어떻게 말을 못 탈 수가 있어?”

“타본 적이 없어. 아무도 방법을 알려주지 않았거든.”

“으음, 이건 예상 밖의 일인데, 어떻게 한다······.”

케이시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제라드 한 사람 때문에 마차를 따로 운용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보다 지위가 더 높은 마법사가 아주 많았을뿐더러 제라드는 외부인사였다.

“걱정할 게 뭐가 있어. 배우면 되잖아.”

“······제라드, 당장 내일이 출발이야. 고작 하루 만에 배우겠다고?”

“고작이 아니야. 하루나 남은 거잖아.”

누군가에겐 고작 하루였다.

아니, 이건 분명히 누구에게나 고작 하루일 것이다.

그러나 지금 케이시의 눈앞에 있는 이 괴물에게는 이 하루가 전혀 다른 의미로 적용하는 모양이었다.

“······그래, 너라면 금방 배울지도 모르지. 일단은 해보자. 그리고 정 안 된다면 내 말에 같이 타면 될 거야. 좀 불편하긴 해도 충분하겠지.”

그러나 케이시의 말처럼 두 사람이 한 말에 둘이 같이 타고 가는 일은 없었다.

히히힝!

“오! 생각보다 쉬운걸. 하하. 착하지.”

“······.”

처음 말에 오를 때만 해도 어색하게만 보였던 제라드는 지금 이 순간, 말의 고삐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마치 말과 하나가 된 것처럼 움직여 다니고 있었다.

승마 후, 고작 두 시간여만의 일이었다.

케이시는 새삼 놀랍지도 않다는 얼굴이었다.

“어쩌면 처음 보는 마법도 보기만 하면 익힐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어······.”

그녀는 그렇게 중얼거리다가 이내 헛소리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저었다.

“에이. 아무리 그래도 그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얘기지. 상식적으로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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