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화 (10/38)

새로운 열쇠

1

고요한 밤이 지나가고 아침이 밝아올 즈음이 되어서도 마차는 여전히 나아가고 있었다.

탁 트인 평야는 수 시간 전의 풍경과 똑같은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 평야가 끝나고 험한 구릉지가 나타나기 시작하면 산도르 마탑은 코앞까지 온 거나 다름없었다.

이때에도 제라드는 긴 생각에 잠겨 있었다.

‘흑마법사들이 노리는 건 뭘까. 그 성유물이라는 걸 찾고 있는 걸까?

성유물.

그렌자일과 케이틀란의 대화에서 처음 듣게 되었던 말이었고, 여전히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는 무엇인가를 지칭하는 단어였다.

‘베리타스, 성유물에 관해서는 여전히 모르는 거지?’

[접근 불가능.]

대답은 똑같았다.

영혼석에 관한 정보는 아예 대답하지 않았고, 성유물에 관해 물으면 접근할 수 없다는 말만 할 따름이었다.

‘이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열쇠는 대체 뭘까.’

제라드는 그렇게 한참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베리타스가 계속 앞만 보고 있잖아?’

제라드도 베리타스의 시선이 닿는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언제까지 계속될 것 같았던 평야가 끝나고 구릉지대가 시작되는 부근부터 하늘이 흐린 게 눈에 들어왔다. 구릉지대 안쪽으로 먹구름이 드리워있다는 게 보였다.

‘뭔가 이상한데.’

먹구름은 절대로 저런 식으로 분명한 경계를 두고 나타나는 법이 없었다.

“케이시.”

“응, 저 앞에 뭔가 이상하다는 걸 말하려는 거지?”

케이시도 눈치챈 모양이었다.

지루할 정도로 느슨했던 분위기는 어느새 팽팽하게 바뀌어 있었다.

“거참. 날이 변덕스럽네.”

마부는 저 앞에 보이는 먹구름을 보며 그렇게 중얼거릴 따름이었다.

그러나 날씨는 단순히 변덕스러운 수준이 아니었다.

구릉지대에 들어선 순간부터 기온은 뚝뚝 떨어지기 시작하였고, 머잖아 하늘에서 싸라기눈이 내리기 시작하였다.

선선한 가을 날씨는 어느새 초겨울의 그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머잖아 입김이 나오기 시작하였고, 서서히 바람이 세지기 시작하였다.

“마법인가.”

제라드가 그렇게 중얼거렸을 땐, 이미 눈발도 굵기가 훨씬 굵어져서 옆으로 흩날리고 있었다.

휘오오오.

불어오는 바람의 소리는 매서웠다.

“이,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마부가 입김을 토하며 난감한 듯 중얼거렸다. 뒤따르던 기사들도 변덕스럽다는 수준으로는 설명이 안 되는 상황의 변화에 놀라고 있었다.

눈앞엔 이제 굵은 눈발이 쌓여서 길을 찾아볼 수가 없을 지경이 되어 있었다.

“더, 더는 나아갈 수가 어, 없습니다!”

마부가 떨어진 기온에 벌벌 떨면서 그렇게 소리쳤다.

매서운 눈보라 너머로 하늘 높이 뻗은 마탑의 그림자가 보였다. 불과 수백 미터 안팎의 거리였다.

“여기서부턴 알아서 갈 테니까, 그만 백작령으로 돌아가세요.”

“그, 그럴 수는 없습니다······!”

마부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소리쳤다.

게일의 무거운 경고가 아직도 귀에 선하였다.

“마, 마법사님들! 나, 날씨가 조, 조금 풀린 후에······ 다, 다시 오는 게 어, 어떻겠습니까!”

“아무리 기다려도 날씨가 풀릴 일은 없을 겁니다. 이건 단순히 변덕스러운 날씨 때문이 아니니까요.”

제라드는 그렇게 말하며 마차의 문을 열고 나왔다.

무섭게 몸을 덮쳐오는 눈발과 바람이 거셌다.

‘대규모 마법진? 아니야. 한 번에 이런 엄청난 규모의 마법진을 만들 수는 없을 테니까, 여러 개의 마법진을 나눠서 연동시켜야 할 텐데······ 그 연동 마법진의 위치가 특정이 안 돼.’

지금 당장 확실한 건 이 눈보라가 자연적으로 일어난 게 아니라는 건 분명하다는 사실이다.

“여러분 모두 백작령으로 돌아가세요. 이 앞은 마법사들의 영역이에요. 백작 각하께는 잘 도착했다고 전해주시면 됩니다.”

“아, 안 되는데······.”

마부가 당황하여 어쩔 줄 모르고 있을 때였다.

기사가 마부에게 다가와 뭔가를 지시하였다. 마부는 그제야 밝아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마차를 돌렸다.

그러나 세 명의 기사는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킬 따름이었다.

“여러분은 가시지 않는 건가요?”

“저희는 란스터 가문의 기사. 영주님께서 지시하신 명령은 목숨을 잃는다고 해도 지켜야만 합니다. 저희가 마법사님들을 마탑까지 안전하게 모시겠습니다.”

단호한 대답에 제라드는 머리를 긁적였다.

‘무슨 말을 해도 안 통하겠는걸.’

2

“내가 앞장설게.”

케이시는 그렇게 말하면서 앞에 나섰다.

주먹을 꽉 쥐었다가 편 순간, 그녀의 온몸이 불꽃에 휩싸였다.

화아악!

“헉!”

지켜보던 기사들이 깜짝 놀란 얼굴을 했다.

그들이 보기엔 케이시가 불에 휘감겨 위험한 상태로만 보였기 때문이다.

“마법사님을 구해라!”

세 기사 중 리더인 알폰소가 그렇게 소리치자, 제라드가 다급하게 그들을 말렸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저게 케이시의 마법이에요.”

“저, 저게 마법이란 말입니까? 아무리 마법이라지만, 몸이 불꽃에 잠겨있질 않습니까?”

“네, 맞아요. 하지만 자기 자신에겐 전혀 해를 끼치지 않는 불꽃이에요. 바로 그게 저 마법의 대단한 점이죠.”

제라드는 기사들에게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케이시는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은 듯, 힐끗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내 뒤로 바짝 따라붙으면 될 거야.”

“알았어, 케이시. 너만 믿을게.”

“으, 응.”

케이시는 어색하게 대답하며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케이시가 선두에 섰고, 그 뒤로 제라드가 뒤따랐으며 양 옆과 뒤를 기사들이 맡았다.

그들은 여전히 케이시를 힐긋거리며 놀랍다는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로, 주변을 경계하고 있었다. 하지만 제라드도 그들이 신기한 건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여러분은 춥지 않으신가요? 저는 마법으로 체온을 유지하고 있는 건데, 여러분은 그게 아니잖아요.”

“아, 그 점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마법사님들과는 좀 다르긴 하지만, 저희도 마나를 운용해서 체온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호오. 그게 어떤 방식인지 궁금하네요.”

“알려드리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만······ 아무래도 지금 같은 상황에서 느긋하게 그걸 설명하는 건 좀 이상할 것 같군요.”

알폰소는 그렇게 대답하면서 주변의 풍경을 눈에 담았다.

분명히 바로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이었는데, 지금은 온 세상이 한겨울의 북부처럼 사나운 눈보라에 휘감겨 있었다.

“제가 마법에 관해서는 아는 게 거의 없긴 하지만, 지금 이 상황이 자연적으로 일어난 상황이 아니라는 것은 알겠습니다. 맞습니까?”

“예, 맞아요. 제가 이 앞이 마법사의 영역이라고 했던 것도 그런 이유입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산도르 마탑이 이런 과격한 마법으로 사람을 쫓아내는 것인지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알폰소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제라드가 아니라, 케이시가 하였다.

“산도르 마탑의 소행이 아니에요. 이건 북부의 마녀들이 쓰는 정령술이라고 보는 게 더 타당해요. 지금으로서는 어디까지나 짐작일 뿐이지만 말이에요······.”

‘정령술?’

제라드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마법과는 또 다른 영역의 대척점에 있는 신비.

그것은 마법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서 존재하는 힘이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휘오오오오!

불어닥치던 눈보라가 별안간 기세를 더해갔다.

그들이 모두 몸을 움츠리고 앞으로 힘겹게 한걸음씩 옮겨갈 때였다.

“어?”

제라드가 깜짝 놀란 얼굴을 했다.

한동안 정말 매섭게 불어닥치던 눈보라가 갑자기 그쳐 버렸기 때문이었다.

눈보라가 그친 세상은 몹시 고요하였다.

먹장구름은 여전하였으나, 마치 세상을 둘로 나눠놓은 것처럼 안팎이 달랐다.

“이게 어떤 원리인 거지······.”

제라드가 신기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고 있을 때였다.

콰자자작!

저편의 언덕 너머에서 하늘 높이 거대한 빙벽이 솟구치는 게 보였다.

그리고.

꽝!

불꽃이 터지면서 얼음이 기화되어 새하얀 연기가 솟구치는 게 보였다.

‘싸움.’

제라드의 눈빛이 번뜩였다.

산도르 마탑의 앞마당이나 다름없는 이곳에서 지금 마법전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둘 중 어느 한 쪽이 산도르 마탑의 마법사들이라는 건 너무나 분명한 사실이었다.

제라드와 케이시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물렸다.

그 순간,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섀도우를 전개하면서 언덕을 단숨에 오르기 시작하였다.

“마법사님들을 따라라!”

알폰소가 뒤늦게 소리쳤다.

3

제라드와 케이시는 언덕 위에 올라서서 그 아래로 펼쳐진 광경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양쪽으로 나뉜 두 개의 진영.

한쪽은 산도르 마탑의 붉은 로브를 걸친 마법사. 그리고 그 반대편에 있는 적들은 하나같이 얼굴에 이상한 무늬와 파란색 분칠을 한 야만적인 인상의 여인들이었다.

양쪽의 수는 거의 엇비슷한 수준으로 모두 200여 명 정도가 대치하고 있었다.

‘저게 바로 푸른 마녀, 혹은 북부의 마녀구나! 딱 봐도 알겠어. 하지만 이상한걸? 대체 저들이 어떻게 여기에 있는 거지?’

그 의문에 도달한 것은 제라드만이 아니었다.

케이시도 그런 의문을 토하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뭔가 이상해. 저렇게 많은 푸른 마녀들이 순순히 오는 걸 감시자들이 그냥 뒀을 리가 없을 텐데······.”

푸른 마녀.

그들은 산도르 마탑의 북부로 펼쳐진 대평야를 지나서 존재하는 거인의 협곡과 알타자르 산맥의 주인이었다.

알타자르 산맥과 거인의 협곡은 문명을 거부하는 야만족의 땅. 그곳에 살아가는 푸른 마녀들은 모두 문명 밖의 존재들이었고, 정복되지 않은 미개척의 땅이었다. 천혜의 요새와 같은 자연 속에서 얼음의 정령과 함께 싸우는 그들은 정복을 거부하였다.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더 많은 땅.

그리하여 거인의 협곡 앞에는 요새가 세워졌다.

푸른 마녀를 감시하기 위한 요새.

일명 감시자의 요새였다.

푸른 마녀들은 외부로 나오지 않았고, 혹 그럴 의도가 있다고 해도 감시자의 요새가 그것을 허락지 않았으니, 이런 내륙지까지 그들이 모습을 드러낸 전례가 없었다.

‘그렇다면 북부에 있는 감시자의 요새가 뚫렸다는 건가?’

제라드가 자연스럽게 그 결론에 다다랐을 때였다.

“가세하겠어.”

케이시가 전장을 향해 달려나가고 있었다.

쐐애액!

날아드는 얼음 결정 다발.

“큭.”

산도르 마탑의 마법사들이 바로 불꽃 다발을 만들며 이에 대항했다.

콰콰콰쾅!

얼음 결정 대부분이 허공에서 깨지면서 상쇄되었다. 하지만 그 속을 뚫고 나타나는 얼음 결정들이 있었으니.

퍼퍽!

“컥!”

웬만한 성인 장정의 손만 한 크기의 얼음 결정이 어깨에 틀어박히자, 산도르 마탑의 마법사는 비명을 내지르며 뒤로 나뒹굴었다.

“제길. 마녀 따위에게······.”

신음하는 마법사는 산도르 마탑 2급 마법사였다. 2급의 계급이면 마탑에서는 최고 전력이라고 할 수 있는 엘리트는 아니더라도, 숙련된 마법사인 베테랑으로 분류된다.

그런데 지금 그런 마법사가 맞대응에서 밀린 것이다.

그게 처음은 아니었다. 지금 이곳엔 그런 상황이 계속 벌어지고 있었다.

“피해라!”

퍼퍼퍼퍽!

한 곳에 밀집되어 쏟아지는 얼음의 창.

바닥에 꽂힌 얼음창은 일반적인 사이즈가 아니었다.

거의 두 배에서 세 배는 족히 될 정도의 크기다.

“마녀들 사이사이에 엄청난 실력자가 있다. 모두 산개해서 대응해!”

각 마법사 조장들은 푸른 마녀들의 전투력에 무리해서 대응하지 말 것을 지시하였다.

2급 마법사들이 이 정도였으니.

이미 3급 이하의 마법사들은 이미 뒤로 물러나서 원거리에서 그들을 보조하고 있을 정도였다.

참 기이한 광경이었다.

산도르 마탑의 2급 마법사들이 푸른 마녀에게 밀리다니 말이다. 푸른 마녀들의 정령이 강하다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전문적으로 마법을 익히고 전투법을 익히는 마탑의 마법사와 비교할 수는 없었다.

거기다 더 묘한 것은 이렇게 밀리는 상황에도 산도르 마탑의 1급 마법사들이 상황에 전혀 개입하지 않고 있다는 거였다. 가랑비에 옷이 젖듯 조금씩 피해는 늘어나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콰아앙!

별안간 남쪽 대열에서 거대한 폭발과 함께 이글거리는 불꽃이 솟구쳤다. 무시무시한 위력의 마법이었다.

“누구지?”

좌중의 시선이 그곳에 쏠리는 가운데.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한 명의 마법사가 붉은색 로브를 휘날리며 모습을 드러냈다. 온몸에 이글거리는 불꽃을 휘감은 마법사였다.

“자, 작열의 마법사다!”

누군가가 그렇게 소리쳤다.

작열(灼熱).

그 마법사는 그렇게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온몸에 불꽃을 휘감는 특유의 마법은 산도르 마탑에서 단 세 사람밖에 사용하지 못하는 비전 마법의 증거였다.

그리고 그 마법사 중 여자는 단 한 명뿐이다.

작열의 마법사, 케이시.

푸른 마녀들은 적의를 드러냈다.

“크르륵! 코랏, 카나로무사!”

마녀 중 한 명이 그렇게 소리치자, 그들은 저마다 큰 몸짓을 보이기 시작했다. 정령술을 쓰는 것이다.

정령술은 대개 저런 식이었다.

마법과는 다르게 정령술에는 어떤 복잡한 술식도 연산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정령사와 정령의 교감이 일정한 단계에 다다르면 마나가 소모되면서 정령술이 신비로써 구현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발동속도는 훨씬 빠르고, 연산이 없으므로 구현되는 신비의 개체도 터무니없이 많다.

곧 푸른 마녀들의 머리 위로 수십 다발의 얼음 결정이 생성되었다. 그것들은 하나같이 새롭게 나타난 강력한 마법사를 향해 있었으니.

“키캇!”

푸른 마녀들의 외침과 함께 쏟아지는 얼음의 창! 팽팽하게 당겨진 시위에서 튕겨 날아가는 화살과 같은 기세다.

그러나 그 사나운 살의 앞에서도 케이시는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그저 크게 손을 휘저었다.

그 순간.

화아아아악!

손끝에서 뻗어나온 매서운 불꽃 세례가 단숨에 수십 발의 얼음창을 단숨에 허공에서 지워버렸다.

쉬이이익!

기화되어 사라지는 얼음창 속에서 맹렬히 타오르는 불꽃.

그 속에서 케이시는 그 뜨거운 불꽃과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서늘한 눈빛으로 경고했다.

“타고 싶지 않으면 물러서. 처음이자 마지막 경고야.”

4

“툴라핫!”

푸른 마녀들은 더욱 큰소리로 격렬한 몸짓으로 대항해왔다.

누군가는 활을 쏘는 흉내를 냈고, 누군가는 주먹을 크게 휘두르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쩌저적!

그때마다 허공에서 얼음 결정이 모여들었고, 단숨에 케이시를 향해 내리 떨어졌다.

그러나 케이시의 불꽃은 그들이 지금껏 상대하던 마법사들의 불꽃과는 궤를 달리할 정도로 뜨겁고 격렬하였으니. 거듭 쏟아지는 공격들은 모조리 무위로 돌아갈 따름이었다.

그 뒤로 케이시의 본격적인 반격이 시작되었다.

화르륵!

손을 거침없이 휘저을 때마다 땅에서 매서운 불길이 땅바닥과 허공에 솟구치며 푸른 마녀들의 진형을 휩쓸었다.

“크랏! 캬우우!”

푸른 마녀들이 기겁하여 얼음의 방패를 만들며 물러났지만, 정령술에 의해 만들어지는 얼음 방패로는 뜨겁게 작열하는 불꽃 앞에 무용지물이었다.

“키햐아아아악!”

불길에 휘말린 푸른 마녀가 온몸을 불태우는 불꽃에 휩싸여 비명을 지르며 죽어가자, 나머지 푸른 마녀들도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케이시가 나선 순간부터 상황은 일방적이었다.

1급 마법사의 존재감이란 이런 것이다.

바로 그때였다.

“케이시, 조심해!”

누군가가 케이시를 향해 소리쳤다.

산도르 마탑의 진영에서 나온 경고였다.

‘갈란?’

케이시와 함께 1급 시험을 치렀던 동기 마법사 중 한 사람이었다. 재능은 그렇게까지 특별하진 않아도, 냉철하고 판단력이 좋은 마법사라고 기억하고 있었다.

그가 저 뒤편에서 하얗게 질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대체 뭘 조심하라는 거지?’

케이시가 의아한 표정을 지을 때였다.

주춤주춤 물러나는 푸른 마녀들 사이에서 시꺼먼 로브를 걸친 존재가 앞으로 걸어나오는 것이 보였다.

‘남자들? 마녀가 아니야. 게다가 로브를 걸치고 있어. 마법사가 배후에 있다는 건가?’

케이시가 경계하며 불꽃의 출력을 더욱 높이고 있을 때였다.

앞에 나선 칠흑색 로브의 마법사가 양손을 뻗더니, 케이시를 향해 겨누었다. 마법을 쓰려는 모양이었지만, 이미 마법이 반쯤 완성되어 있는 케이시에게 대항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케이시가 막 불꽃을 쏟아내려는 순간이었다.

팟.

케이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의 몸을 휘감던 불꽃이 별안간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이게 어떻게······.”

바로 그 순간, 도망치듯 물러났던 푸른 마녀들이 태세를 전환하여 다시 공격해왔다.

쩌저적!

정령술 특유의 빠른 발동 속도에 벌써 얼음의 결정이 허공에 생성되고 있었다.

“큭!”

케이시는 다시 마법을 썼다.

그러나 어떻게 된 일인지, 마나를 결집하고 술식으로 바꾸는 과정에서 불순물 따위가 얽혀든 것처럼 마법의 완성을 방해하고 있었다.

‘마법을, 마법을 사용할 수 없어!’

늦었다.

대응할 수가 없었다.

케이시는 일단 피해야 한다는 생각에 섀도우를 펼치려고 하였으나, 그마저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케이시가 눈을 질끈 감은 순간이었다.

퍼퍼퍼펑!

케이시를 향해 날아들던 얼음창이 기화하며 새하얀 연기가 되어 뿌옇게 흩날렸다.

케이시가 눈을 천천히 떴다.

그녀의 바로 앞에 타오르는 불꽃의 벽이 우뚝 솟아 있었다.

불꽃 방벽.

그렇게 대단한 마법은 아니었다.

많이 알려진 화염계 마법이다. 하지만 이 불꽃 방벽에서 느껴지는 고고하고 장엄하여 한 치 흔들림도 없는 마나 파동은 케이시에겐 익숙한 것이었다.

고개를 돌리자, 아니나다를까. 그곳에서 청색 로브의 마법사가 서 있었다.

제라드였다.

“괜찮아?”

“고마워. 네 덕분에 살았어, 제라드.”

케이시는 순순하게 대답하였다.

이미 고집을 내세울 것도 없었다.

제라드는 그녀보다 빼어난 마법사였다.

“흐음, 특이하네. 마법을 부수고 원천 차단한다니 말이야. 케이시, 지금도 마법을 쓸 수 없는 거야?”

“뭔가 이상해. 마나는 움직이는데, 술식화 단계에서 뭔가가 방해하고 있어. 조심해. 저 검은 로브의 마법사들이 이상한 마법을 쓰고 있어.”

“알았어.”

제라드는 그렇게 말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지금 이 순간, 그의 눈동자가 호기심으로 빛나고 있었다.

자칫 잘못 하다간 마법을 차단당하여 당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장 그 두려움보단 이 괴상한 마법에 그는 더 큰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베리타스, 네가 줄곧 찾고 있던 게 저 마법인 거지?”

[사용자 제라드가 해당 정보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정보 필요함. 해당 정보는 1종 비문에 속함.]

제라드의 입가에 미소가 드리웠다.

‘찾았다. 새로운 열쇠 조각.’

5

제라드가 보기엔 이 싸움은 처음부터 어딘가 기묘했다.

푸른 마녀들이 사용하는 정령술은 마법과는 달랐다.

위력과 구성력에서는 마법과 비교하기 어려웠지만, 개체수나 발동속도에서는 마법보다 훨씬 빨랐다.

물론, 마법사들끼리 실력 차이가 나는 것처럼, 저들의 정령술이라는 것도 당연히 실력 차이가 있을 테니, 산도르 마탑의 마법사들 몇 명이 밀리는 것도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싸움에서 밀린다는 건 말이 안 됐다. 이 전장엔 산도르 마탑의 진영에서는 핵심 전력이라고 할 수 있는 고위 마법사가 전혀 활약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1급 마법사와 2급 마법사의 차이는 상상을 초월한다. 1급에 다다른 엘리트 마법사는 인외의 경지에 다다른 초인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한 사람이 능히 수백의 군대 이상의 전투력을 보유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전투에 특화되어 있지 않다고 해도 말이다.

‘왜 이런 쓸데없는 소모전을 하는 거지?’

케이시는 바로 이런 상황에 나섰다.

그녀의 불꽃 아래, 전황은 급격하게 바뀌기 시작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케이시의 불꽃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마법의 해제 같은 게 아니었다.

마법 파괴.

이건 그렇게 불러야 옳았다.

“1종 비문의 열쇠란 말이지······.”

제라드의 시선은 푸른 마녀들의 뒤로 물러난 검은 로브의 마법사들에게 꽂혀 있었다.

정보를 취하는 방법이라는 건 뻔했다.

‘마법을 경험하는 것.’

그러나 제라드가 앞으로 나선 순간, 나선 것은 검은 로브의 마법사들이 아니라, 푸른 마녀들이었다.

쩌저저적!

또다시 얼음의 정령이 벼려내는 얼음창이 허공에 결정화되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어떤 마법 술식도 없이 저런 게 만들어진다는 게 제라드로선 그저 신기하게 느껴질 따름이었다.

‘정령이라는 건 또 어떤 건지 궁금한걸.’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정령술 영역 확장 불가능. 해당 영역 확장에는 슬롯이 필요함.]

베리타스가 새롭게 말해주는 정보에 제라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영역 확장? 슬롯이란 건 또 뭐지? 조건이 충족되면 정령술까지 배울 수 있다는 건가.’

그러는 사이 푸른 마녀들의 얼음창은 이제 다 완성되어 날아들기 직전에 다다라있었다.

더는 여유를 부릴 때가 아니었다.

딱.

제라드가 손가락을 튕겼다.

파지지직!

손가락 끝에서 스파크가 발생하면서 공중에 나타나는 작은 구슬 크기의 뇌전구. 그 숫자는 10개나 되었다.

그 뇌전구가 라이트닝 볼 따위가 아님을 알아본 후방의 마법사 중 몇 명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설마, 사세르란의 벼락?”

그 순간, 제라드는 손가락을 까닥거렸고, 뇌전구는 섬광이 되어 푸른 마녀들을 향해 쏟아졌다. 그들이 얼음창을 발사하기도 전에 말이다.

“캬후낫!”

마녀 중 하나가 고함을 질렀다. 그러자 마녀들은 다급하게 날아드는 섬광을 막기 위해 얼음의 방패를 만들었다.

그러나.

퍼퍼퍽!

방패가 만들어지기가 무섭게 열 명의 푸른 마녀들이 비명을 내지르며 바닥을 나뒹굴었다.

“카아악!”

마녀 열 명이 손이 찢겨나간 채로 비명을 질렀다.

뇌전의 섬광이 얼음 방패를 부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국소 부위를 통째로 날려버린 까닭이다.

눈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상황.

케이시처럼 화려하진 않았지만, 그 파괴력은 절대적이었다. 그리고 그처럼 파괴적인 뇌전 마법을 쓰는 청색 로브의 마법사는 오직 단 한 명뿐이다.

“사, 사세르란의 벼락!”

마법사들의 의혹이 확신으로 변한 순간이었다.

6

푸른 마녀들의 틈에 숨어 있는 칠흑색 로브의 마법사들은 제라드의 마법을 확인하고 시선을 교환하였다.

“틀림없군. 청색 로브는 크루드 마탑의 상징.”

“사세르란의 벼락이 쓰는 뇌전 마법을 사용하는 마법사. 정보는 정확히 일치한다.”

“백작령에서 브라스의 정기연락이 사라진 이유는 바로 놈 때문이었어.”

한마디씩 주고받는 마법사들의 눈빛이 섬뜩하게 빛났다.

“이건 예정에 없던 일이지만, 피할 수도 없는 일이야. 지금부터 우리는 놈을 잡는다.”

“그래, 우리라면 충분히 할 수 있다.”

그들의 자신감은 절대로 자만 따위가 아니었다. 그들에겐 그 정도의 힘이 있었던 것이다.

칠흑색 로브의 마법사들이 앞으로 나서자, 푸른 마녀들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옆으로 비켜섰다.

약속된 공식이었다. 강력한 마법사가 나타나면 그들이 날개를 꺾었고, 그 후엔 푸른 마녀들이 땅에 떨어진 마법사를 사냥했다.

상황을 지켜보던 케이시도 그들이 다시 앞으로 나섰음을 보더니 제라드에게 경고했다.

“제라드, 조심해. 올 거야.”

“응, 알고 있어.”

제라드는 그렇게 대답하며 적 마법사들을 눈에 담았다.

케이시의 마법이 파괴되는 것은 확실히 보았다. 하지만 그 과정은 워낙 찰나에 이루어졌기에, 단순히 보는 것만으로는 정확히 파악하는 게 어려웠다.

‘자, 한 번 보여줘 봐.’

제라드는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금 손가락을 튕겼다.

파지직!

스파크와 함께 발생한 케이틀란식 라이트닝 볼트.

푸른 마녀 열 명을 순식간에 전투불능으로 만들어버렸던 무시무시한 마법이 재차 발현된 순간이었다.

다섯 개의 뇌전구는 도발하는 것처럼 허공에 떠있었다.

제라드는 발동과 제어를 굳이 나눌 필요가 없는 마법사였다. 그런데도 굳이 그 번거로운 방법을 쓰는 건 다른 이유가 아니다. 적이 마법을 사용하는 그 순간을 기다리는 것이다.

그리고 적들은 그런 제라드의 미끼를 물었다.

“지금이다!”

다섯 명의 마법사 중 한 명이 양손을 뻗었다.

‘온다.’

제라드는 눈을 똑바로 뜨고 지금부터 일어나는 현상을 두 눈으로 똑똑히 담았다.

‘눈? 저건 눈인가?’

양손을 뻗는 마법사의 손바닥 안쪽에 눈이 있었다.

시꺼멓게 눈을 치켜뜬 눈동자가 말이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파스스스.

제라드는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선명한 형태를 유지하던 뇌전구가 별안간 갈기갈기 찢기더니 허공으로 사라져가는 것이 아닌가.

‘역시 마법해제 같은 게 아니야.’

딱.

바로 다시 마법을 전개하는 제라드였지만, 케이시와 상황은 똑같았다. 마법은 발동하지 않았다. 불순물이 끼어든 것처럼 술식구조의 사이에 껴서 방해하고 있다.

‘확실히 엄청나게 강력한 마법이다. 단번에 이렇게 무력화할 수가 있다니.’

그때였다.

“토바하! 나리무치아!”

푸른 마녀들이 다시 앞으로 나서서 정령술을 사용해왔다.

쩌쩌적!

얼음 결정이 허공에 모여들었다. 마법을 사용할 수 없게 된 제라드는 그 공격에 대항할 방법이 없었다.

“마법사님, 물러나십시오!”

알폰소가 소리치며 앞으로 나섰다.

기사들도 상황을 지켜보다가 지금 상황이 대충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모두 다 파악한 상태였다.

케이시도 제라드도 무기력해진 상황. 그들은 마법사들을 지키라는 명령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전 괜찮으니까, 물러나도록 하세요.”

“마법사님,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알폰소 경, 제가 말씀드렸을 겁니다. 이 앞은 마법사의 영역이라고 말이에요.”

“······.”

제라드는 상황이 이 지경이 되었음에도 여전히 웃고 있었다. 그 눈동자에서는 불꽃이 번뜩이고 있었다.

‘아직 뭔가 더 할 수 있다는 건가?’

알폰소가 머뭇거리는 와중에 제라드는 앞으로 걸어나갔다.

쩌저적!

결정화된 얼음창이 완성되어 제라드를 향해 날아들었다.

쐐애애애액!

“제라드!”

케이시가 다급하게 소리친 순간이었다.

제라드는 자신만만하게 웃으며 손가락을 튕겼다.

딱!

아직이다.

아직 제라드의 마법은 끝나지 않았다.

화아아아악!

시뻘건 불꽃이 허공을 가르며 쏟아져나왔다.

벼락에 이은 불꽃.

“이럴 수가······.”

그 광경을 지켜보는 마법사들의 얼굴에 경악이 드리웠다. 케이시 역시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마법이 되살아났다는 것도 충격적이었지만,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제라드가 일으킨 불꽃 때문이었다.

그것은 일반적인 화염계 불꽃이 아니었다.

“홍염······.”

블레이즈의 불꽃이, 제라드의 몸을 휘감은 채로 전방을 가득 휩쓸고 있었다.

7

제라드가 일으킨 시뻘건 불꽃은 얼음의 창을 지워버리는 것에 그치지 않고, 푸른 마녀 세 명을 휩쓸었다.

“캬아아아아아!”

“아아아악!”

비명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바로 옆에 있던 다른 마녀가 고통에 겨워하는 그들의 목을 거침없이 베어버렸다.

“타나무하! 아루타라케!”

마녀가 칠흑의 마법사들에게 뭐라고 따지는 모습.

아마도 이게 어떻게 된 일이느냐는 얘기일 터였다.

그러나 놀란 것은 칠흑색 로브의 마법사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제라드를 보며 경악을 금치 못한 얼굴이었고, 제라드 역시 그들의 모습을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흑마법이라는 건 확실히 알겠어.’

마법을 사용하기 전과 후과 다르다. 핏기를 잃은 입술과 퀭한 눈. 조금 전의 마법의 여파가 틀림없을 터였다.

지금 이 순간, 모두가 제라드가 마법파괴에 영향을 받지 않았음에 놀라고 있었으나, 실상은 그와 조금 달랐다.

제라드는 마법파괴에 영향을 받지 않은 게 아니었다.

그저 다른 마법사에 비해서 쓸 수 있는 수단이 몇 개 더 있을 뿐이었다.

게이트 전환 술식.

케이틀란이 기초를 만들었고, 엘레멘탈 마스터의 지식으로 완성한 제라드의 술식은 게이트 전환에 따라서 마법의 속성이 완벽하게 달라진다.

‘베리타스, 아직도 정보가 부족한 거야?’

[1종 비문의 해당 마법에 관한 정보를 열람하기 위해서는 정보를 더 수집해야 함.]

‘구체적으로 얼마나 더 필요한 거야. 수치나 알기 쉽게 말해줄 수 있겠어?’

[조금 전과 완전히 동일한 정보량을 기준으로 세 번의 추가 정보가 필요함.]

“세 번이라······. 그거 다행이네. 밑천이 다 털리기 전에 열쇠가 완성된다는 얘기잖아.”

제라드는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스펠 브레이커가 통하지 않는다니······.”

칠흑색 로브의 마법사들은 모두 당황스러운 기색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 푸른 마녀들을 이끄는 수장도 따지기 시작한 상황.

“모두 정신 똑바로 차려! 이미 우리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어. 만약 여기서 물러나게 된다면 우리는 초기 목적조차도 이행하지 못하게 되는 거야. 여기에서 모두 죽든, 그게 아니면 놈을 잡든 둘 중 하나뿐이다!”

그들 다섯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새삼 새롭게 새길 각오랄 것도 없었다. 지금 이곳에 목숨을 내놓지 않고 서 있는 자들은 없었다.

“압제자들에게 파멸을.”

음울한 중얼거림과 함께 한 명의 마법사가 나섰다.

그는 제라드의 뇌전 마법을 파괴하였던 그 마법사였다.

퀭한 눈빛에 창백한 안색.

‘또 그 마법을 쓰면 어떻게 될지 알고 있을 텐데. 대체 뭘 위해서 그렇게 하는 거지?’

제라드가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마법사는 손바닥을 제라드에게 겨누었다. 그게 마법파괴의 최소한의 자세라는 건 분명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제라드의 눈빛에 이채가 드리웠다.

‘손바닥의 눈이 감겼어.’

양쪽 손바닥에서 희번덕대던 검은 눈동자 중 하나가 감겨 있었다. 남은 눈은 하나뿐이었다.

‘역시 계속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이 아니야. 그리고 그냥 단순한 흑마법도 아니다. 목숨을 소모하는 것과 별개로 횟수 자체도 정해져 있는 거야. 정확히 알려면 역시 베리타스를 통해 확인하는 것밖에 없겠어. 보는 것만으로는 알 수 없다.’

제라드는 그렇게 생각하며, 손을 크게 휘저었다.

화아아악!

손에서 뻗어나온 불꽃이 너울거리며 흑마법사에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날아들던 불꽃은 갈기갈기 찢기면서 또다시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제라드의 몸에 휘감겼던 불꽃도 마찬가지로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역시 또 눈이 감겼어.’

제라드는 이번엔 분명히 보았다. 마법파괴와 동시에 손바닥의 눈이 스르르 감겼다.

딱. 딱.

손가락을 거듭 튕겨보지만, 역시나 마법은 발동하지 않았다. 뇌전에 이어서 불꽃을 잃은 것이다.

그러자.

[새로운 1종 비문이 열리기까지 두 개의 파편이 더 필요함.]

기다렸다는 듯이 베리타스가 말했다.

“끄으으······.”

마법파괴를 시전한 마법사는 몸을 부르르 떨다가 바닥에 널브러졌다. 목숨을 쥐어짠 마법의 반동으로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남은 흑마법사는 이제 넷.

그들은 동료의 죽음에도 별반 아랑곳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토바하! 나리무치아!”

또다시 푸른 마녀들이 제라드를 향해 집중 공격을 펼치려고 할 때였다.

“산도르 마탑의 마법을 무시하지 마라!”

콰아앙!

저편에서 날아든 불꽃 덩어리가 땅에 작렬하면서 요란한 폭발을 일으켰다.

크루드 마탑의 마법사인 제라드가 나서는 모습에 자극을 받은 마탑의 고위 마법사들이 전면에 나서기 시작한 것이다.

그 모습에 제라드는 조바심을 느끼기 시작했다.

‘난감한걸. 앞으로 두 번 남았는데. 이러다가 열쇠를 만들지 못하겠어.’

철컹.

제라드의 내부에서 게이트가 전환되었다. 뇌전과 불꽃을 잃었지만, 제라드는 엘레멘탈 마스터가 3시대에 남긴 마법의 정수를 고스란히 이어받았다.

그 절대적인 마법은 그의 내부에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제라드의 마나 코어에서 마나가 요동치며 움직였다. 게이트를 지나며 증폭된 마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묵직하였다.

“토바사하! 노랏드! 아로마이야!”

적 마법사들이 다급하게 외쳤다.

푸른 마녀들에게 제라드를 먼저 노리라고 말하는 것이다.

제라드로서는 바라던 바였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체바카!”

쩌렁쩌렁 울리는 마녀의 목소리와 함께 조금 전과는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거대한 마나가 포착되었다.

쩌저적!

하늘에서 엉겨붙으며 거대해지는 얼음 결정. 그것은 단숨에 지름 5미터를 넘는 거대한 바위가 되었다. 방대한 마나의 집약이었다!

‘정령술이라는 건 단순한 마나의 차이만으로도 이렇게 큰 폭으로 변화하는 건가?’

놀라움은 잠깐이었다.

제라드는 정신을 차렸다. 지금은 정령술에 신비로움을 느끼고 있을 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제라드는 호흡을 깊이 들이마시더니, 발을 번쩍 들어 올렸다가 땅을 냅다 굴렀다.

구우우웅.

땅 깊숙한 곳까지 울려 퍼지는 진동. 그리고 머잖아 푸른 마녀들의 진형 정중앙에서 지반이 요란하게 떨리며 균열이 발생하였다.

구구구궁!

푸른 마녀들이 비명을 지르면서 여기저기 나뒹구는 가운데, 힘겹게 만든 얼음 결정은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쾅!

요란한 상황이 벌어지는 가운데, 그 지진의 여파를 피한 푸른 마녀들은 제라드를 향해 얼음창을 날려왔다.

쐐애애액!

그러나 그 공격이 제라드에게 닿는 일은 없었다.

카가가각!

어느새 제라드의 주변을 맴도는 작은 돌멩이들은 얼음창의 궤도를 틀어내면서 모든 공격을 튕겨내고 있었던 까닭이다.

“놈!”

피를 토하는 외침이 울려 퍼지기가 무섭게 또다시 스펠 브레이커를 발동하는 흑마법사.

후두둑.

제라드의 주변으로 빙글빙글 돌던 돌멩이가 별안간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가운데, 미처 튕겨내지 못한 얼음창이 제라드의 얼굴 옆을 아슬아슬하게 스쳤다.

뺨에 생긴 얕은 생채기에서 핏물이 흘러내리는 가운데, 제라드는 그저 씩 웃을 따름이었다.

“자, 앞으로 한 번 남았다.”

8

뇌전, 불꽃, 대지를 차례로 상실하였다.

제라드가 다음에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바람의 마법이었다.

헌데, 놀랍게도 그 위력이 하나같이 다 무시무시하였다.

그럴 수밖에!

개량에 개량을 거치며 완성된 제라드식 마나 코어에는 방대한 마나가 잠들어 있었고, 7게이트는 완성되어 있었다.

그 거대한 마나가 7게이트를 모두 지나면서 수십, 수백 배로 증폭되어 발현되고 있었으니, 고유술식이 아니라고 해도 그 마법이 평범할 리가 없었다.

휘오오오오!

제라드는 매섭게 휘몰아치는 바람을 일으켰다.

푸른 마녀들은 진형 깊숙이 들어온 그를 포위하기 위해서 움직이고 있었지만, 날아드는 바람에 튕겨서 바닥을 나뒹굴 따름이었다. 단 한 명의 마법사가 전장의 흐름을 뒤바꾸고 있었다.

으드득!

“누가 남을지, 끝까지 해보자!”

이제 셋밖에 남지 않는 마법사들은 이를 갈며 또다시 마법파괴를 시전했다. 손바닥에 깃든 검은 눈동자가 또다시 감겼고, 이 일대에 불어닥치던 매서운 바람도 흩어졌다.

“헉헉! 노, 놈이 계, 계속 다른 마법을 사용하는 것을 보니, 놈도 타격이 없다는 얘기는 아니다······. 이, 이 싸움을 계속 한다면 우리가 이길 수밖에 없다.”

전혀 근거가 없는 판단은 아니었다. 제라드는 지금까지 계속 다른 속성으로 마법을 바꾸면서 싸웠다.

그러니 그렇게 하나씩 다 파괴되다 보면 결국엔 아무것도 사용할 수 없는 순간이 오게 될 터였다.

그러나 그들이 어찌 알았으랴?

조금 전의 마법파괴로 이미 모든 열쇠 조각이 모였다는 것을 말이다.

[접근 허가. 새로운 1종 비문을 열 수 있음.]

제라드의 입가에 미소가 드리웠다.

‘열쇠가 완성됐다.’

이 전장에서 찾고자 하였던 것은 다 찾았다.

그렇다면 이제 이 싸움을 더 끌어야 할 이유는 없었다.

철컹.

제라드의 안에서 게이트 술식이 전환되었다.

전투를 이어가면서 제라드는 저들의 마법파괴에 중대한 약점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1종 비문을 열기도 전에 알아챈 사실이었다.

물론,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이 싸움을 이길 방법은 많았다.

적의 싸움이 어떤 방식인지 알았고, 마법파괴가 어느 정도의 발동속도로 치러지는지 파악했으며, 유효 거리가 어느 정도나 되는지도 알았다.

즉, 애초에 이 싸움은 이렇게 길게 이어나갈 싸움이 아니었다는 얘기다. 오직 열쇠를 완성하는 데 필요한 싸움이었을 뿐이다.

“자, 이제 끝내자.”

제라드가 끝을 예고하며 손가락을 튕겼다.

딱.

그 순간, 섬광이 번쩍 터졌다.

그리고.

퍼퍼퍽!

“크아아악!”

저편에 서서 상황을 지켜보던 마법사들이 고통에 몸부림치며 몸을 벌벌 떨었다.

미처 대응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른 발동속도에 투사체의 속도도 차원이 달랐다.

“이, 이럴······ 이럴 수가······.”

적들이 그렇게 중얼거리는 가운데, 제라드는 손가락을 휘두르며 튕겼다.

그가 그렇게 손가락을 한 번씩 튕길 때마다,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던 푸른 마녀들의 다리가 터져나갔다.

그때부터 상황을 일방적이었다. 손가락을 튕기고 손가락을 흔들 때마다 푸른 마녀들은 바닥에 엎어지기 바빴다.

“고, 공격!”

산도르 마탑의 마법사들도 그 화려한 싸움에 넋을 놓고 있다가 뒤늦게 공격 태세에 나섰다.

“트, 트라고! 트라고!”

싸움이 안 된다고 판단한 푸른 마녀들은 도망치기 시작했다. 머잖아 도망가는 적들과 그들을 뒤쫓는 마법사들의 산발적인 싸움이 일어나는 가운데, 제라드는 푸른 마녀들을 쫓지 않았다.

싸움이 끝난 새하얀 설원의 풍경 속에서 제라드는 홀로 존재하는 것 같았다.

케이시는 아무런 말도 잇지 못하고 넋을 놓고 있었다.

그녀만이 아니었다. 이 자리에 있는 무수한 붉은 로브의 마법사들이 그러했다.

한 명의 마법사가 싸움을 끝냈다는 게 놀라운 게 아니었다.

그런 전례는 지금껏 몇 번이고 있었으니까.

지금 그들이 경악하는 것은 그들의 이해와 상식의 범주를 넘어선 마법 때문이었다.

9

뒤처리는 산도르 마탑의 마법사들의 일이었다.

“그럼 저희는 그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예, 고마웠습니다.”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그런 말씀을 마법사님께 들으니, 낯이 뜨겁군요.”

“한 게 없다니요. 고마웠습니다, 알폰소 경.”

“다음에 또 인연이 된다면 뵙겠습니다.”

알폰소와 두 명의 기사는 싸움의 뒤처리가 한창인 전장을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숙이며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여전히 눈보라의 경계는 존재하였지만, 기사들의 발걸음을 막을 수는 없었다.

‘자, 그럼 이제 나도 좀 확인을 해볼까.’

제라드는 제압된 흑마법사들에게 다가갔다.

그들은 코앞까지 다가온 제라드를 보며 눈을 날카롭게 치켜떴다.

스펠 브레이커가 통하지 않는 불가사의한 마법사.

제라드는 무미건조한 얼굴로 물었다.

“그 마법, 누가 알려준 건지 물어봐도 대답하지 않겠지?”

세 명의 흑마법사들은 입을 꾹 다물고 있을 뿐이었다.

스펠 브레이커가 통하지 않게 되었을 때, 그들은 모든 무기를 잃은 셈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눈빛만큼은 여전히 굴복하지 않고 있었으니.

“성유물을 잘 지키고 있어라. 그것은 언젠가 적합한 자격을 갖춘 분의 손에 들어갈 것이다. 그리고 그분께서 온 성유물을 다 손에 넣으시는 날, 이 세상은 모든 압제해서 해방되어, 진정으로 자유로워질 것이다!”

흑마법사는 그렇게 광기에 찬 얼굴로 말을 끝마치더니, 자신의 혀를 콰득 짓깨물었다.

“이런, 미치광이를 보았나!”

핏물이 줄줄 흐르자, 산도르 마탑의 마법사들이 그들을 다급히 구속하였다.

그 모습에 제라드도 질렸다는 얼굴이었다.

자기 자신의 목숨을 불태우고, 자신을 상처입히면서까지 그들이 말하는 압제와 자유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거기다가.

‘성유물이라는 말이 또 나왔어. 설마, 저들이 말하는 성유물이라는 게 베리타스를 말하는 걸까? 어떤 특별한 힘이나 사물을 가리키는 거라면······ 그렇게 생각하는 게 가장 타당한데.’

제라드는 베리타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베리타스는 격렬한 싸움이 벌어졌던 현장의 한복판에서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혹 뭔가를 발견하기라도 한듯한 모습이었다.

“설마?”

제라드는 베리타스가 빙글빙글 맴도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치열한 싸움이 벌어졌던 현장의 한복판. 베리타스의 시선은 그곳 중 어느 한 곳에 꽂혀 있었다.

제라드는 베리타스의 시선을 따라 무릎을 꿇고 흙더미가 마구 뒤집힌 땅 언저리를 살폈다. 그곳에 시꺼먼 돌멩이가 보였다.

제라드는 그것이 무엇인지 바로 알아보았다.

“영혼석······.”

산도르 마탑은 크루드 마탑의 내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1층 로비에 존재하는 중앙 석판의 주변엔 여러 마법사가 서 있었다. 그들의 시선은 하나같이 제라드에게 꽂혀 있었다.

“젊은 마법사잖아.”

“뭔가 이상한데. 사세르란의 벼락이라는 마법사는 나이가 많다고 들었는데······.”

속삭이는 소리를 들으며 제라드는 머리를 긁적였다. 케이틀란을 보지 못한 마법사들은 제라드를 보고 케이틀란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이 오해를 어떻게 풀어야 하지?’

사람들의 시선을 지나쳐 중앙 석판에 오른 제라드와 케이시. 머잖아 부우웅 떠오르는 석판은 탑의 최상층을 향해 거침없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케이시는 제라드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너무나도 많았다. 하지만 대체 무엇부터 물어봐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제라드의 마법 실력이 그녀가 생각하던 것 이상이라는 건 란스터 백작가에서 이미 알았다. 하지만 푸른 마녀나 흑마법사들을 상대할 때 보여주었던 제라드의 전투 능력은 그런 수준으로 설명할 게 아니었다.

‘차원이 달랐어. 그리고 무엇보다도······.’

케이시는 한참 생각을 정리하다가 겨우 입술을 뗐다.

“제라드, 솔직하게 말하자면 네게 물어보고 싶은 게 많아. 하지만 지금은 딱 하나만 물어볼게. 어떻게 네가 스승님의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거야?”

“그건······.”

제라드는 머리를 긁적였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사실대로 말해야 하나? 그냥 보고 따라 한 건데······.’

제라드는 과거 블레이즈의 마법을 보았고, 그것의 구조와 방식을 꿰뚫어 보았다. 그래서 그것이 어떤 식으로 발동되는지 알고 있었다.

즉, 발동 방법만큼은 이미 6년 전부터 알고 있었단 얘기다. 그리고 바로 오늘, 케이시가 쓰는 마법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제어법을 익혔다.

발동법과 제어법을 알았으니, 사용한 것뿐이었다.

5의 마나로 5의 효율성을 내는 마법과 5의 마나로 15의 효율성을 내는 마법. 둘 중에 무슨 마법을 사용하는가는 너무나도 당연한 얘기였다.

‘처음에는 감출 생각이었는데, 상황이 너무 급하게 흘러가다 보니, 미처 그런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어.’

제라드는 잠깐 고민하다가 그냥 적당히 둘러대기로 했다.

“배웠어.”

“······배웠다고? 대체 스승님께 언제 배운 거야? 네가 익힌 홍염 마법은 절대로 그 성취가 낮지 않았어.”

예리하게 파고드는 질문.

케이시가 그렇게 의문을 갖는 것도 당연하다.

블레이즈가 제라드와 만났던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다.

기껏해야 수일 남짓이다.

‘에라, 모르겠다.’

“미안하지만, 비밀이야. 두 스승님께서 내게 누구에게도 말해서는 안 된다고 하셨어. 그래서 지금은 네게도 말해줄 수가 없어.”

“······.”

제라드의 말에 케이시는 더 묻지 않았다.

무슨 이유가 있는 건 분명한 것 같았다. 하지만 제라드가 말한 스승님들 사이의 비밀이라는 건 아마도 십중팔구는 거짓말일 것이다.

‘정말 거짓말을 너무 못하잖아.’

제라드는 평소에 사람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말했다. 그런데 이번엔 눈을 피할뿐더러 눈꺼풀의 깜빡거림도 많았다.

즉, 거짓말이라는 얘기다.

‘제라드가 대답해주지 않는다면 스승님께 따로 물어보는 수밖에. 스승님께서는 다 알고 계시겠지.’

그러는 사이, 석판은 최상층에 다다라있었다.

10

끼이익.

산도르 마탑주의 방은 크루드 마탑주의 방과는 또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잘 정돈된 서적과 고풍스러운 양식의 인테리어. 그 잘 정돈된 공방의 중심에는 산도르 마탑주 다일론이 앉아 있었다.

다일론은 그렌자일과 비슷한 연배의 마법사였다. 하지만 그렌자일과는 사뭇 다른 인상의 소유자였다.

다일론은 부드러운 인상의 그렌자일과는 달리 몹시 날카로운 인상으로 절로 위압감을 심어주었다.

“그대가 제라드 란스터군이로군. 이야기는 조금 전에 모두 들었네. 그대가 산도르 마탑의 제자들을 대신하여 푸른 마녀들을 모두 쫓아버렸다더군. 아주 고마운 일을 해주었어.”

“다 끝나가는 상황에 그저 한 손 거들었을 뿐입니다.”

“겸손한 젊은이로군. 블레이즈에게 들었던 것과는 조금 다른 느낌인데······.”

다일론은 제라드를 뜯어보는 것처럼 쳐다보았다.

그 위압적인 시선을 마주할 때면 대부분의 젊은 마법사들은 모두 얼어붙었다. 하지만 제라드는 부드럽게 웃는 낯으로 표정 하나 까딱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과연.”

평가는 그걸로 충분했다. 이야기는 들을 만큼 들었고, 자신의 눈으로 직접 어떤 인물인가 확인도 했다.

“사세르란의 벼락에 이어서 홍염의 마법사에게 마법을 전수받는 전대미문의 마법사라······. 장래가 아주 기대되는군. 이미 블레이즈의 마법 일부는 익히고 있는 듯하지만 말이야. 뭐, 인사는 이쯤 하기로 하고······. 케이시, 자네에겐 따로 임무가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 당장 보고할 중요한 특이사항은 있었는가?”

“예, 있었습니다. 란스터 백작령에 있었던 일입니다.”

케이시는 굳은 얼굴로 란스터 백작령에서 있었던 일을 모두 말했다. 흑마법사의 존재와 란스터 백작가의 사람들이 모두 그의 수중에서 놀아나고 있었다는 것까지도 말이다.

“그 정도면 보통 일이 아니었군. 그렇게 깊숙한 곳까지 흑마법사의 마수가 드리워있었단 말인가······.”

다일론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양피지에 무엇인가를 빠르게 적어 내려갔다. 그 펜이 멈출 때까지 잠자코 기다리던 케이시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탑주님, 마탑에 돌아온 뒤로 스승님을 뵙지 못했습니다. 스승님은 지금 어디에 계신지요?”

케이시는 사실 처음부터 그게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블레이즈의 평소 성정이라면 마탑 바로 앞에서 싸움이 났다고 한다면 다른 누구보다도 바로 앞장서서 싸움에 나섰을 터였다.

그런데 싸움이 일어나는 현장엔 블레이즈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크라운급 마법사나 원로급 마법사들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자네는 아직 듣지 못한 모양이로군. 블레이즈는 감시자의 요새에서 돌아오지 않았다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가요?”

“말 그대로의 의미일세. 자네도 알다시피 그는 푸른 마녀들의 공세를 막기 위해서 감시자의 요새로 향하였네. 그런 그 이후로 행방이 묘연해져 버렸어.”

“······.”

다일론의 담담한 대답에 케이시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푸른 마녀들이 이곳까지 당도했다는 것은 감시자의 요새가 뚫렸음을 의미했다. 그런데 블레이즈는 감시자의 요새에서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케이시의 손이 바들바들 떨리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제라드가 케이시의 손을 꽉 잡았다. 제라드의 큰 손에 잡힌 순간, 케이시는 불안했던 마음이 조금 가라앉는 걸 느꼈다.

제라드의 표정은 담담했다.

“케이시, 네 스승님은 강해. 난 네 스승님처럼 대단한 마법을 쓰는 사람을 몇 명 보지 못했어. 그분은 우리 스승님에 견줄 만큼 대단한 분이셔.”

“하지만······.”

마법파괴.

그 현상을 경험한 케이시가 아닌가.

순간적으로 마법을 쓰지 못하게 된다면 제아무리 블레이즈라고 해도 안전을 장담할 수는 없었다.

케이시의 얼굴이 다시 어두워지기 시작했을 때였다.

“케이시, 스승님을 믿어. 그분은 대단한 마법사야. 나도 그들과의 싸움에서 별 문제가 없었어. 하물며, 그분은 산도르 마탑을 대표한다고 해도 좋은 마법사야. 안 그래?”

“응······.”

케이시는 그제야 조금 안심한 얼굴을 하였다.

그러자 다일론도 그녀를 위로했다.

“그의 말이 옳아. 블레이즈의 일이라면 너무 걱정하지 말게. 곧 대대적으로 감시자의 요새에 조사단이 파견될 걸세. 정확한 상황을 파악해볼 수 있을 테지. 물론, 블레이즈라면 그때가 되기 전에 돌아올 거야.”

“감사합니다, 탑주님.”

“자네가 내게 감사할 것까지야 있겠나. 블레이즈 역시 산도르 마탑의 마법사. 그를 염려하는 건 자네만이 아니야. 너무 걱정하지 말고 그만 물러가서 쉬게나. 그리고 백작령에서 있었던 일은 따로 보고서를 작성해서 보내주면 고맙겠군.”

“알겠습니다.”

케이시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 문으로 향하였다.

그런데 제라드가 그 자리에 서서 꿈쩍도 하지 않고 있었다.

“우리가 아직 나누지 못한 이야기가 있었던가?”

“탑주님께 한 가지 꼭 여쭙고 싶은 게 있습니다.”

“알겠네. 대답해주지. 무엇이 궁금한가?”

“어째서 푸른 마녀들과의 싸움에서 고위 마법사들이 뒤로 빠져있었던 것입니까? 그분들의 말씀으로는 그게 탑의 지침이자 전략이었다고 하던데, 그게 사실입니까?”

“이런. 아무런 의미가 없는 질문이로군. 질문자가 답변을 이미 알고 있어서야 무슨 이야기를 더 하겠는가?”

다일론의 담담한 대답에 제라드의 눈빛이 서늘하게 변했다.

“그럼, 제가 생각하는 대로라는 말씀이십니까?”

“제라드, 마법사는 합리적인 존재일세. 정체불명의 마법. 그것도 마법 자체를 파괴하여 일정 시간 동안 어떤 마법도 쓸 수 없게 하는 마법 앞에 1급 이상 마탑의 핵심 전력인 마법사를 무방비하게 내세우는 게 한 집단의 지도자가 해야 할 방침이라고 생각하는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역량이 모자란 마법사들을 앞에 내세워 그들의 희생을 방관하는 것보다는 다른 좋은 방법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이 듭니다.”

“나 역시 제자 중에 사상자가 생긴 것은 몹시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네. 하지만 그것은 결국 선택의 문제일세. 양자택일의 문제 중에서 더 효율적이고 합리적이라고 생각한 방향을 택한 것뿐이야. 만약 자네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그 질문에 제라드는 흔들림 없는 곧은 눈동자로 똑바로 말했다.

“저라면 둘 다 택하지 않고, 존재하지 않는 세 번째 답을 택했을 겁니다.”

제라드는 그 대답을 끝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무례한 태도에 케이시는 깜짝 놀라 제라드와 함께 방을 나섰다.

다일론은 홀로 남아 피식 웃었다.

“제3의 선택지라······.”

제라드의 태도와 그 방식으로 보자면, 그 제3의 방법이 무엇인지 짐작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오만하군. 아니, 오만하다는 한마디로 치부하기엔 그는 너무 빼어난 마법사인가.”

자신의 말을 책임질 수 있는 마법사에게 오만하다는 말은 어울리지 않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