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종 비문:엘레멘탈 마스터
1
제라드는 하루가 다르게 마탑에 적응해나갔다.
로브를 걸치고 스스로 마법사임을 자각하게 된 후부터는 행동에도 조금씩 변화가 생겼다.
어린아이만 같던 태도에 어수룩하게나마 무게가 깃들게 된 것이다.
케이틀란은 제라드가 자만할 것을 우려하며 더욱 냉엄한 태도로 제라드를 지켜보았으나, 그런 일은 없었다.
제라드는 그저 더욱 마법에 몰두하였을 따름이었다.
다만······.
‘저층의 서재에 있는 서적들은 전부 베리타스의 안에도 있는 것뿐이야. 대부분 읽은 것들.’
제라드는 실망하였다. 베리타스의 존재를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기에 그 실망감을 누군가에게 말하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내일부턴 고층 서재에 가자. 그곳에는 뭔가 재미있는 책이 있을 거야.’
고층 서재는 아무나 들어갈 수 없었지만, 마탑의 마법사 중에서 지금 제라드를 모르는 이는 없었다. 누가 그의 앞을 감히 막아설 수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막 읽던 책을 덮을 때였다.
“와! 마나 입자의 팽창성과 속성의 유기성? 아직 어린 친구 같은데, 엄청난 걸 읽네?”
힐끗.
제라드는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 붉은색 머리칼이 인상적인 십 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소녀가 서 있었다.
“네가 읽기엔 아직 좀 이른 것 같은데?”
“넌 이 책의 내용 알아?”
“물론이지.”
자신감 넘치는 얼굴의 소녀.
한 가지는 확실했다. 이 소녀는 제라드를 몰랐다.
‘귀찮아서 로브 안 입고 왔는데, 안 입어도 알던데.’
뭐 아무려면 어떤가.
제라드는 책을 놓고 소녀의 옆을 지나쳤다.
“잠깐만.”
“왜?”
제라드를 잡는 소녀.
“너 말이야. 그렇게 물어봤으면 뭔가 할 말 더 없는 거야? 몇 가지 더 물어본다든가 말이야. 혹시 네가 알고 싶어하는 걸 내가 도와줄 수도······.”
“아니, 그런 거 없어.”
“너, 너 쓸데없이 고집부리면 아무것도 못 배우는 거야!”
소녀는 벌게진 얼굴로 그렇게 말했지만, 제라드는 아랑곳하지 않고 옆을 지나쳤다.
‘이상한 애네. 근데 왜 붉은 로브를 입고 있는 거지?’
규정은 아니었지만, 크루드 마탑의 내에서는 청색 로브가 마법사의 상징이었다.
제라드는 고개를 갸웃하다가 이내 신경을 껐다.
굳이 알아볼 정도로 관심이 있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고층 서재에는 뭔가 재미있는 책이 있었으면 좋겠다.’
2
제라드는 이튿날부터 고층의 서재로 향하였다.
9층에 있는 서재는 한산했다.
일단 마탑의 고층에 공방을 차릴 수 있을 정도로 빼어난 실력의 마법사가 많지 않기도 하였고, 일단 이 정도에 다다르면 공용 서적에는 별 관심을 두지 않기도 했다.
그리고 제라드도 왜 이곳에 사람이 없는지 알게 되었다.
“정말 별것 없잖아.”
제라드의 실망감은 정말 컸다. 서재 전부를 다 훑어본 건 아니었지만, 저층 서재와 비교했을 때, 이곳의 서적이 딱히 특별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공작가에 있었을 때에도 심심할 때마다 온갖 마법 서적은 죄다 읽었던 제라드가 아니던가. 고층 서재에 있는 서적들도 한 번씩은 훑어본 것들이 많이 보였다.
그렇게 실망하여 케이틀란의 공방으로 돌아가는 길.
‘어?’
제라드는 중앙의 석판을 타고 올라가는 마법사의 무리를 보았다. 총 세 명이었는데, 그들은 전부 붉은색 로브를 걸치고 있었다.
“또 붉은색 로브.”
그들은 고층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제라드는 공방으로 돌아와서 케이틀란에게 붉은색 로브에 관해 물어보았다.
“음, 붉은색 로브라······. 그건 산도르 마탑의 상징색이다.”
“다른 마탑의 마법사요?”
제라드가 신기한 얼굴로 여러 가지를 더 물어왔다.
케이틀란은 제라드의 질문에 대답해주면서 시름에 잠겼다.
‘고트 마을의 흑마법사와 관련한 일 때문에 탑주님께서 본격적으로 다른 마탑의 협조를 이끌어내시는 모양이구나.’
탑주는 아직 이 사실을 대외적으로 말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곧 모두가 알게 될 터였다. 크라니움 종파의 흑마법은 그만한 파급력이 있었고, 절대로 숨길 이야기가 아니었으니까.
‘이상하게 자꾸만 불길한 느낌이 드는구나.’
사세르란의 전란 때도 이런 느낌을 받은 적이 있었다. 이번에도 그와 비슷한 좋지 않은 느낌이 들었다.
케이틀란은 제라드를 보았다.
10년 전엔 자신이 전란의 중심에 있었던 것처럼, 어쩐지 이후에 일어날 모든 일의 중심엔 제라드가 있을 것 같았다.
‘그때까지 시간이 충분하기를 바랄 수밖에.’
3
제라드가 마탑에 온 뒤로 벌써 한 달이 꼬박 흘렀다.
그동안 제라드는 마탑의 서적이란 서적은 한 번씩 다 훑었다. 그리고 도달하게 된 결론은 하나였다.
“스승님.”
“왜 그러느냐?”
“게이트를 확장시키고 싶어요.”
탁.
케이틀란이 책을 덮었다.
그는 엄격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안 된다. 네 몸에는 부담이 너무 커. 기다리라고 하였을 것이다. 네 몸이 성장하고 체력이 갖춰진다면 그때 허락할 것이다.”
제라드는 케이틀란의 말에 거스르지 않았다.
그러나 제라드가 지금 배우고 익히는 것들에 만족하지 못하는 것은 사실이었다.
케이틀란은 제라드에게 새로운 것을 가르쳐주기보다는 기존에 익혔던 제어법과 육체와 마법의 균형에 초점을 두었다.
제라드로서는 재미가 없었다.
케이틀란이 무엇을 걱정하는지는 알았지만, 제라드는 육체가 성장하는 속도를 기다려서 아무것도 안 하고 있기엔 너무 빨리 배웠다.
‘스승님한테 말하지 말고 나 혼자 다른 마법을 익혀보자. 고유술식이 아니라, 일반적인 마법 같은 건 충분히 나 혼자서도 배울 수 있어.’
그러나 곧 큰 문제에 봉착하게 되었다.
뇌전 마법과 관련한 다양한 마법은 구조와 술식만 알면 바로 구현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보고 따라 하는 것을 못할 이유가 없었으니까.
그러나 속성이 다른 마법으로 시선을 돌리면 얘기는 전혀 달라졌다. 7게이트 증폭법이 걸림돌이 된 것이다.
7게이트 증폭법은 엄청난 마법 시술이었다. 이 정교하고 완벽한 법칙에 따른 뇌전 에너지 증폭률은 케이틀란이 창조한 마법의 정수 그 자체라고 해도 좋았다. 그와 관련한 서적은 베리타스의 안에서도 찾을 수 없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마나에 속성이 부여된 상태에서는 다른 속성 마법을 사용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야. 어떻게 할 방법이 없을까?’
처음에는 그냥 다른 마법을 배우고 싶다는 가벼운 생각에 도전한 일이었지만, 이내 제라드는 그 문제에 점점 깊이 파고들었다.
물론, 케이틀란의 교육시간에는 교육에 집중하였고, 운동은 꾸준히 하면서 체력을 길렀다. 하지만 그 외 나머지 시간에는 계속 전혀 다른 속성 마법을 배울 방법을 찾았다.
베리타스는 제라드가 잠자는 시간만 잘 지키면 언제든지 원하는 자료를 내주었다.
제라드의 탐독은 끊임이 없었다. 좀처럼 풀리지 않는 문제를 풀기 위해서 모든 노력과 방법을 아끼지 않았다.
‘게이트를 폐쇄하지 않고서 다른 속성 마법을 배울 방법이 있을 거야. 어떤 방법이 말이야.’
시간은 빨리 흘러갔다.
마탑은 시간의 흐름을 알기 어려웠다.
그러는 사이 어느덧 반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제라드는 그동안, 베리타스를 통하여 수천 권에 달하는 온갖 마법 관련 서적을 독파하였다.
그러나 아직도 게이트를 폐쇄하지 않고서 다른 마법을 익히는 방법은 찾지 못한 상태였다.
물론, 제라드가 그저 허송세월을 낭비한 것은 아니었다.
“후우우.”
제라드가 호흡을 깊이 내뱉었다.
그 순간, 제라드의 미간에서 푸른빛의 기운이 선명하게 터져 나왔다. 그것은 통칭 <블루 크라운>이라고 부르는 마나 코어의 단계 중에서 다섯 번째에 해당하는 수준의 성취였다.
마나 코어가 확장되어 그 싹이 머리까지 길을 열게 된 것이다. 불과 1년도 채 되지 않는 시간 사이에 제라드는 지금 범재 수준의 마법사들이 평생을 모을 마나를 모은 셈이었다.
“후우우.”
제라드는 숨을 깊이 토하며 눈을 천천히 떴다.
푸른 안광이 쏟아져나오는 것처럼 눈동자가 형형한 빛을 머금고 있었다.
“코어 빌드만 몇 번 개량하는 건지······.”
제라드는 나직하게 투덜거렸다.
지난 반년, 제라드는 7게이트 증폭법을 건들지 않는 선에서 코어 빌드를 개량해서 다른 방법을 찾으려고 했었다.
그 과정은 절대로 쉽지 않았으므로 제라드조차도 실패에 실패를 거듭했다. 명확히 보이는 단 하나의 길을 놔두고 다른 길을 찾으려고 하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 실패와 개량의 과정이 계속 반복되면서 전혀 의도하지 않았던 코어 빌드의 개량화가 이루어졌다.
처음만 해도 엠버라이트식 코어 빌드에서 조금 변형된 수준이었는데, 이제는 전혀 다른 코어 빌드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젠 제라드식이라고 이름 붙여도 좋으리라.
다른 마법사들이 알았다면 기절초풍을 할 일이었지만, 정작 당사자인 제라드는 그게 만족스럽지가 않았다.
“끙. 답은 못 찾고 빙빙 돌기만 하네.”
새로운 코어 빌드로 더 많은 마나를 쌓고, 효율이 증대되었다고 해도 아직 근본적인 문제는 하나도 해결되지 않았다.
“베리타스, 뭔가 좀 다른 정보가 없을까? 지금 이 상황을 한 번에 뒤집을 수 있는 게 뭔가 다른 관점의 이론이 필요하단 말이야.”
제라드는 여느 때처럼 베리타스를 닦달했다. 그러면 베리타스는 늘 새로운 서적들을 그에게 제공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은 뭔가가 좀 달랐다.
베리타스는 좀처럼 열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베리타스, 왜 그래?”
바로 그 순간이었다.
머릿속에 베리타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사용자 제라드의 지식수준과 최소 보유 마나가 일정 수준을 뛰어넘었으므로, 더 상위의 정보를 열람할 수 있게 되었음. 환경 재설정 시작. 새로운 정보의 열람까지 앞으로 21시간······.]
“어?”
제라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
[새로운 정보의 열람까지 앞으로 4시간.]
‘좋아, 이제 4시간 남았다!’
제라드의 눈이 반짝거리며 빛났다.
21시간이 남았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얼마나 가슴이 뛰었던가!
베리타스가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물론, 가끔 ‘현재 지식수준에서 열람할 수 있는’이라는 표현을 썼던 베리타스였다. 하지만 제라드는 그걸 보면서 단 한 번도 그걸 특별하게 생각했던 적이 없었다.
왜냐하면, 지금껏 베리타스는 제라드가 이해하는 수준에서 정보를 제공해주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제라드가 성장하면서 제공하는 정보의 방식도 내용도 바뀌었지만, 지금까진 단 한 번도 이런 특이한 반응을 보인 적은 없었다.
‘대체 새로운 정보라는 게 뭘까?’
그게 어떤 것인지는 제라드로서도 짐작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그는 직감적으로 알았다. 앞으로 4시간 후부터 베리타스가 제공할 새로운 정보에는 그가 지난 반 년간 끙끙대던 문제의 해답이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렇게 4시간은 정말 느리게도 흘러갔다.
그리고······.
[환경 재설정 완료. 현재 사용자의 등급에 따라 재조정. 새로운 정보가 확장되었음.]
“기다리다 죽는 줄 알았어, 베리타스. 어떤 정보가 확장되었는지, 한 번 확인해볼까?”
제라드는 그렇게 말하며, 머릿속으로 무엇부터 찾아볼지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베리타스가 갑자기 펼쳐졌다.
“어라?”
제라드는 고개를 갸웃하였다. 베리타스가 뭔가 이상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책장은 열려있기만 하였고, 아무런 책도 꺼내지 않고 있었다.
“베리타스, 왜 그래? 어디 고장이라도 난 건 아니······.”
제라드는 열린 베리타스의 안쪽을 들여다보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 안쪽엔 아름다운 빛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것은 아주 아름다우면서도 정말로 위험하게 보이는 빛이었다.
제라드가 넋을 놓고 있을 때였다.
[검색 완료. 해당 자료는 1종 비문으로 분류되어 있음. 1종 비문 개방.]
베리타스의 목소리가 그렇게 울려 퍼졌지만, 제라드는 말의 의미를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바로 그 순간, 제라드의 의식은 시공간을 벗어나 베리타스가 인도하는 오래된 정보의 영역에 던져졌다.
“으아아아아!”
비명을 내지르던 제라드는 눈을 번쩍 떴다.
하늘에서 땅을 향해 거침없이 내던져지는 듯한 아찔한 감각에 이마에서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휘청대며 몸을 일으킨 제라드는 한결 냉정해진 얼굴로 주변을 훑었다.
‘뭐지. 여기가 대체 어디지?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제라드는 눈살을 찌푸렸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바로 조금 전까지 케이틀란의 공방에 있었던 제라드였다.
그런데 지금 이곳은 전혀 다른 곳이었다.
이곳을 얼핏 보기에 지하인 것 같았다. 아주 어두웠고 습기가 가득했다.
“베리타스!”
제라드는 큰 목소리로 베리타스를 불렀다.
그런데 늘 곁을 지키며 둥둥 떠다니는 베리타스가 지금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뭔가가 잘못됐어.’
제라드는 긴장한 얼굴로 이 주변을 천천히 살피면서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하였다.
긴장감 가득한 얼굴로 주변을 훑던 중에 제라드는 어떤 소리를 들었다.
‘소리다. 무슨 소리가 들렸어.’
제라드는 고개를 돌렸다.
다시 귀를 기울이자, 뭔가 중얼대는 듯한 소리가 또다시 들려왔다.
제라드는 언제든 마법을 사용할 태세로 천천히, 아주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얼마나 다가갔을까.
곧 어둠의 저편에서 한 사람이 나타났다.
그는 백발을 치렁치렁 바닥에 늘어뜨린 노인이었다.
멀리서 들린 중얼거림은 바로 저 노인이 내는 소리였다.
“저기요.”
제라드는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노인은 뒤에서 척 보기에도 몹시 앙상한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아주 작은 글씨로 무엇인가를 계속 쓰고 있었다.
“저기요, 내 말 안 들려요?”
제라드가 더 큰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아무것도 듣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들을 생각이 없는 것인지 계속 자기 일을 하기 바빴다.
제라드는 조심스러운 태도로 다가갔다.
치렁치렁한 백발을 늘어뜨린 사내는 척 보기에도 70살은 족히 넘은 듯한 모습이었다.
노인은 제라드가 다가왔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하던 일을 계속할 뿐이었다.
마치, 투명인간 취급하는 것처럼 말이다.
‘대체 뭘 하는 거지?’
제라드는 그가 벽에 아주 조그맣게 쓰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자세히 보니, 그것은 어떤 수식 따위였다.
제라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벽면에 보이는 어둠.
그곳에 온통 그 빼곡한 글씨가 가득하였다.
‘뭐지, 이거 전부 마법이잖아.’
4
제라드도 처음에는 그 작고 빼곡한 글씨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니, 그것들 하나하나가 마법 술식의 구조를 나타내고 있음은 분명하였다.
‘이건 대체 뭐지? 분명히 마법은 마법인데······.’
제라드는 의아한 얼굴로 점점 더 벽에 다가갔다.
백발을 바닥에 늘어뜨린 노인은 여전히 제라드를 투명인간 취급하고 있었다.
그러나 제라드도 이젠 노인에게 신경을 쓸 새가 없었다.
제라드는 어느새 벽문에 넋이 나가 있었다.
그의 눈은 지금 이 순간에도 몹시 바쁘게 움직였다.
벽 높은 곳에서부터 바닥과 맞닿아있는 곳까지 쓰여있는 술식까지 하나도 빼놓지 않고서 말이다.
그러나 제라드조차도 도중에 막혀서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읽으면 읽을수록 미간이 모여들었다.
‘뭐지 이건? 이런 이상한 마법은 처음 봤어······.’
제라드는 이 옆을 보았다. 벽이 어디까지 이어지는지 정확하게 모르는 상황이었는데, 분명한 것은 이 벽문의 술식은 단 하나도 중복되는 게 없었으며, 무엇하나 시작과 끝이 없었다.
마치, 이 전체가 하나의 마법 술식인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설마, 말도 안 돼······.’
제라드는 고개를 저으며 뒤로 몇 걸음 물러나 읽은 부분들을 이해하려고 하였다. 부분을 보고, 그 전체를 가늠하는 작업이었다.
제라드가 이해하는 마법이란 것은 이를테면 퍼즐과 같았다.
전체의 틀을 보고, 그 틀 안에 조각을 채워넣는다.
전체의 크기와 형태가 얼마나 거대한가, 또는 대단한가에 따라서 퍼즐의 조각은 많아지기도 하고 적어지기도 하였다.
‘근데 이건 그런 방식이 아니란 말이지.’
벽에 써진 마법 술식은 분명히 하나하나가 중요한 퍼즐 조각임이 분명한데, 전체적인 틀을 가늠케 하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럼 둘 중 하나로군.”
이 노인이 미쳐서 헛소리를 장황하게 계속 쓰고 있거나, 그게 아니면 이 마법이 제라드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거대하고 위험한 마법이라는 것이었다.
“베리타스가 나한테 의미없는 광경을 보여줬을 리가 없어. 더군다나 새로운 정보가 확장되었다고 했어. 그리고 이 방식은 전에 없던 방식의 전달법······. 이 정보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는 더 말할 것도 없을 거야.”
제라드는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다시금 벽의 마법을 차근차근 읽어나갔다. 노인이 써 내려가는 벽문의 일부를 다 읽고 천천히 정리하고 있을 때였다.
노인이 별안간 중얼거림을 멈추더니, 벽에서 손을 뗐다.
‘다 쓴 건가?’
제라드는 마침을 맺는 그 부분까지 술식을 읽었다. 여전히 잘 이해가 안 됐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다시 맺는 말의 부분을 살펴보는 제라드.
지금 이 순간, 무엇인가가 아주 중요한 무엇인가가 머리를 스쳐 지나가는 듯하였다. 제라드는 읽었던 저편에서 읽었던 부분으로 다시 돌아갔다.
“이, 이건······.”
제라드가 경악한 얼굴을 했을 때였다.
“흐하하하하하.”
노인의 메마른 웃음소리가 갑자기 이 지하 공간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엄청 커다란 소리였으나, 지금 그 웃음소리는 제라드의 귀에 닿지 않았다.
제라드는 지금 이 순간, 벼락을 맞은 듯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찾았다······ 찾았어!”
반년 동안 내내 찾고 있었던 해답이, 지금 이곳에 있었다.
‘이제 알겠어. 잘못 생각하고 있었던 거야. 애초에 길을 잘못 들었던 거야! 이제 알겠어. 할 수 있어. 이 마법 술식의 방법 대로라면 분명히 다른 속성의 마법도 사용할 수 있어!’
제라드는 뛸 듯이 기뻐하며 고개를 돌렸다.
저 노인이 누구인지는 몰랐지만, 엄청난 마법사라는 건 의심할 여지가 없는 듯했다.
제라드가 막 고마움을 전하기 위해 다가갔을 때였다. 노인이 갑자기 몸을 벌떡 일으켰다.
막 부딪칠 찰나, 제라드가 옆으로 반사적으로 물러났을 때였다.
“어?”
제라드는 뭔가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았다. 두 사람의 몸이 분명히 겹쳤을 터인데, 사람의 몸에 닿는 어떤 느낌도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설마······.’
제라드가 눈살을 찌푸리며 노인의 팔을 잡으려고 손을 뻗었다. 하지만 제라드의 손은 허공을 휘저을 따름이었다.
‘허상! 허상이야. 이건 대체······.’
제라드가 눈살을 찌푸릴 때였다.
“이것으로 나의 구도는 끝났다. 드디어 모든 술식의 정리가 끝났다. 세상이여 보아라! 그리고 기록하라! 여기 나의 진리가 있다! 내가 바로 엘레멘탈 마스터다!”
노인이 광기에 찬 목소리로 그렇게 소리쳤다.
그 순간, 제라드는 눈앞이 하얗게 물들면서 아찔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 지하공간에 떨어졌을 때와 똑같은 그 감각이었다.
5
번쩍.
눈을 뜬 제라드는 숨이 멎었던 사람이 깨어나는 것처럼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헉헉!”
온몸이 짓눌린 것처럼 무거웠고 머리가 열이 나는 것처럼 뜨거웠다. 온 세상이 핑핑 도는 듯했다. 전신은 온통 식은땀으로 범벅이었다.
제라드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주변을 살폈다.
‘도, 돌아왔어······.’
케이틀란의 공방.
이곳은 틀림없이 제라드가 조금 전까지 있었던 그곳이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 베리타스의 모습이 보였다. 활짝 열렸던 책장은 어느새 닫혀 있었다.
[1종 비문:엘레멘탈 마스터의 문이 다시 열리기까지 4,321시간 남았음.]
‘1종······ 비문?’
제라드는 그 말을 되묻다가 이내 지친 듯 그 자리에 다시 누워버렸다. 눈꺼풀이 자꾸만 무거워졌고, 머리는 너무나도 무거웠다.
이렇게 졸렸던 적은 처음이었다.
제라드는 기절하듯 잠들었다.
제라드가 다시 깨어난 것은 꼬박 10시간이 지난 후였다.
“하아암. 내가 얼마나 잔 거야······.”
제라드는 부스스한 모습으로 일어나더니 기지개를 켜더니 하품을 길게 내뱉었다.
그러다가 퍼뜩 마지막 순간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 습한 지하공간에서 보았던 것들과 광경, 그리고 목소리가 지금 이 순간에도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베리타스.”
제라드가 베리타스의 이름을 부르자, 둥실 옆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베리타스.
“1종 비문. 넌 1종 비문이라고 그랬어. 그게 뭐야?”
그 순간이었다.
[1종 비문, 닫힌 상태. 다시 열리기까지 4,310시간 남음.]
베리타스는 그렇게 단편적인 사실 정보만 대답해왔다.
1종 비문.
역시 제라드가 잘못 들었던 게 아니었다.
“베리타스, 내가 보았던 그게 1종 비문의 내용이면······ 혹시 다른 내용도 네 안에 기록되어 있다는 거야?”
[비문. 세계가 규정한 단계적 허가정보에 따른 체제. 일정 기준에 다다르지 못하면 접근 권한이 없음. 사용자 제라드의 기준은 최소기준치를 초과하였으므로, 1종 비문에 접근할 권한이 생김.]
베리타스의 사실만을 간단히 설명해주었다.
그러나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제라드의 머리는 팽팽 돌아가고 있었다.
‘내 생각이 맞는구나! 1종 비문:엘레멘탈 마스터라고 그랬었어. 그렇단 얘기는 베리타스가 지금처럼 보여줬던 서적처럼 다른 것도 충분히 있을 수 있다는 얘기가 아닐까?’
확인해볼 필요가 있었다.
“베리타스, 1종 비문:엘레멘탈 마스터가 막혔다면 다른 비문을 열어줘. 다른 걸 보고 싶어.”
[불가. 권한 없음. 1종 비문이 다시 열리기까지 4,310시간 남음.]
“흐음, 역시 안되나······.”
제라드는 머리를 긁적였지만, 더 욕심을 부리지 않기로 했다.
베리타스는 4,000시간이나 되는 시간이 남았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그 기간을 좁힐 방법은 없는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제라드는 지금 당장은 새로운 지식이 필요하지 않았다. 1종 비문을 통해 보았던 그 공간에서 보았던 것들 일부 조차도 아직 완전히 흡수하고 받아들인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1종 비문을 여는 건 베리타스에게도 무리인 모양이야. 베리타스의 눈이 반쯤 잠겨 있어.’
책장의 베리타스의 말똥말똥했던 눈이 반쯤 잠긴 상태였다.
제라드는 그런 베리타스의 모습도 처음 보았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애기야. 그 벽면에 있는 마법. 그건 엄청난 거였어. 지금까지 내가 봤던 그 어떤 마법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제라드는 심장이 쿵쾅대는 걸 느꼈다.
지금 당장 해야 할 게 무엇인지는 분명하였다.
“내 생각대로라면 게이트를 폐쇄하지 않고도 다른 마법을 쓸 수 있어. 아니, 그것보다 더 대단한 것까지도…….”
제라드의 입가에 미소가 드리웠다.
6
엘레멘탈 마스터.
그는 어떤 이름도 없이 그저 그렇게만 불렸다.
아주 먼 시대 전에 활약했었다고 전해지는 그는 2시대인 마법의 시대가 끝나고 3시대인 몰락의 시대에 처음으로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사라져버린 마법의 잔재 속에서 빛을 밝히며 질서가 사라진 세상을 바로잡았다. 한 손에는 벼락을 쥐었고, 다른 한 손으로는 폭풍을 일으켰으며,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았으니, 걸음걸음마다 땅과 하늘이 떨었다고 한다.
하늘 높이 닿았던 마법 문명의 잔재 속에서 오직 그만이 희망이었다.
그러나 엘레멘탈 마스터는 3시대 마법의 원류이며, 동시에 정점이었다. 그가 거둔 7인의 마법사중 누구도 엘레멘탈 마스터의 모든 정수를 이어받진 못하였다. 그들은 그저 저마다 가장 잘 다룰 수 있는 분야를 전해 받았을 뿐이다.
엘레멘탈 마스터는 몹시 실망하였고, 그 뒤로 세상을 등졌다고 한다. 기록은 그게 끝이었다.
‘역시 엄청난 마법사였구나.’
제라드는 한창 마법에 매진하다가 잠깐 쉴 겸, 엘레멘탈 마스터에 관한 정보를 읽어보면서 감탄하였다.
마법사들의 시대로 볼 때, 3시대의 위대한 마법사들이 모두 사라지고, 그 이후의 세대가 마법을 다시금 열어가는 지금 4시대에 다다라서는 엘레멘탈 마스터의 이름 옆에는 최초의 마법사라는 명칭이 붙을 정도였다. 현재 시대의 마법사를 규정하는 모든 것들을 정리한 게 바로 그였기 때문이다.
‘내가 그 최초의 마법사를 바로 앞에서 본 거구나.’
제라드의 눈빛이 빛났다. 이렇게 딴짓을 할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최초의 마법사가 남긴 유산은 내 방식으로 재현해내겠어.’
한 달이 흘렀다.
케이틀란은 제라드가 더는 게이트를 확장한다는 소리를 하지 않고 현재 배우는 것에 충실한 모습에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제라드가 드디어 참고 기다리는 법을 익힌 것 같구나.’
제라드는 최근 어떤 새로운 마법 이론에 빠진 모습이었다.
교육시간을 제외하면 자기 공간에 틀어박혀 있거나, 그게 아니면 서재만 자주 오가는 모습을 보면 다 알 수 있었다.
‘마법에 관해서는 호기심도 많고, 역량은 더 말할 것도 없을 정도이니, 곧 어떤 결과물을 낼 것 같구나. 그게 어떤 것일지 기대할 만하겠어.’
“스승님, 서재에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다녀오너라.”
제라드는 꾸벅 고개를 숙이고 고층으로 향하였다.
1종 비문을 열고 한 달.
시간은 정말 빨랐다.
그리고 바로 오늘······.
‘드디어 완성했다!’
제라드의 심장은 쿵쾅거리고 있었다. 꼬박 한 달간 그는 엘레멘탈 마스터의 벽문에 새겨진 마법 술식 일부를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데에 집중했다.
이제 그 결과가 이론으로 성립되었으니, 이젠 남은 것은 이론을 현실화하여 확인하는 일뿐이었다.
제라드의 걸음은 바빴다.
케이틀란에게는 서재로 간다고 하였지만, 사실은 서재가 아니라 10층의 마법 시험장으로 가고 있었다.
10층의 마법 시험장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고층에 공방을 차릴 수 있는 최소 기준인 2급 마법사의 기준을 충족해야만 했다.
제라드는 그 요건을 충족하지 않았기에 사용할 수 없었으나, 그의 마법 실력이 공공연하게 2급 이상임을 모르는 이가 없을 지경이다. 즉, 시험장을 사용할 권리는 충족된 것이나 다름없다는 얘기다.
그그그긍.
10층 시험장의 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넓은 시험장의 공간 내부에는 저 멀리 한 명의 마법사밖에 보이지 않았다. 케이틀란과 비슷한 연배로 보이는 마법사는 붉은색 로브를 걸친 채, 생각에 깊이 잠겨 있는 얼굴이었다.
‘산도르 마탑의 마법사.’
산도르 마탑의 마법사는 마탑 곳곳에서 꽤 보였다.
그러나 그 마법사에 관한 관심은 잠깐이었다. 지금 제라드가 다른 마법사를 신경 쓸 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머릿속은 온통 완성한 마법으로 가득했다.
구석의 한쪽에 앉은 제라드는 눈을 감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제라드가 지금부터 하려고 하는 것은 그동안 감히 건들 생각을 하지 않았던 7게이트 증폭법에 접근하는 일이었다.
‘지금까지 연구해왔던 방식은 당연히 실패할 수밖에 없는 방법이었어. 두 개로 나뉘었다고 해도 길은 결국 하나로 만나게 되어 있어. 그러니 당연히 충돌할 수밖에! 내가 집중해야 할 것은 처음부터 7게이트였다.’
이미 그 방법과 이론은 머릿속에 있었다.
남은 건 직접 실행해서 확인하는 것뿐.
제라드는 천천히 마나 코어에서 마나를 돌리기 시작하였다.
흐르기 시작한 마나가 게이트를 지나며 거센 흐름으로 바뀌기 시작했을 때, 제라드는 게이트에 새로운 마법 술식을 짜 넣기 시작하였다.
과정은 순조로웠다.
제라드의 입가에 미소가 드리웠다.
7
제라드는 눈을 떴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바로 조금 전에 모든 마법 시술이 끝났다.
“후우.”
제라드는 정립한 이론대로 만들어진 두 개의 게이트에 마법 술식을 모두 새겨넣는 데 성공하였다.
“이제 결과를 확인해볼 차례다.”
제라드는 바로 양쪽 손바닥을 마주쳤다. 케이틀란의 그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마법 시전 동작이었다.
고오오오.
마나 코어에서 흘러나오는 마나가 만들어진 길을 따라 흐르기 시작하였다.
빛이 들어오지 않았던 몸 안쪽의 길에 서서히 빛이 들어오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런 가운데, 마나는 이윽고 게이트를 지나쳤다. 하지만 증폭현상은 없었다.
‘좋아.’
제라드가 미소 짓는 가운데, 제라드는 마침내 패스를 지나서 온몸을 휘도는 부드러운 마나의 기운을 느꼈다.
그 마나는 길을 따라 움직였다. 단 한곳의 출구를 향해서.
머잖아 양손에 시원하고 청량한 바람이 휘도는 것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제라드가 두 손바닥을 뗀 순간, 그 안에서 두 눈에 보이지 않는 바람이 모여들면서 빙글빙글 요동쳤다.
성공이었다.
“좋아, 해냈어. 이제 다른 속성의 마법을 사용할 수 있어.”
마나를 끊자, 머잖아 손에서 휘돌던 기운들이 모두 흩어지며 사라졌다.
바람 속성 마법은 겨우 그 시작이었다.
제라드는 그 뒤로 전혀 다른 속성의 마법들을 하나씩 다 쓰기 시작했다. 하나같이 속성별 기본 마법에 불과하였지만, 어떤 속성도 실패하지 않고 성공했다는 것이 중요했다.
“엘레멘탈 마스터, 그 할아버지가 아니었으면 얼마나 오래 걸렸을까. 베리타스, 네가 날 그 할아버지의 곁에 보내준 덕분이야!”
제라드의 말에 베리타스도 기쁜 것처럼 몸을 좌우로 떨어댔다.
“좋아, 이제 그다음 마법을 확인할 차례야.”
제라드는 아직 정립한 모든 걸 다 시험해본 게 아니었다.
지금까지 사용한 마법은 중심 뼈대에서 뻗어나간 한 가지 굵직한 갈래에 불과했다. 그리고 바로 지금 이 순간부터가 엘레멘탈 마스터가 보여준 마법을 체현하는 과정이 될 것이다.
“할아버지의 마법. 빌려 쓸게요.”
제라드는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마나 코어에 집중하였다.
의지를 따라 움직이는 마나.
패스로 밀려드는 기운은 세차게 흐르는 물과 같다.
쏴아아.
코어에서 쏟아져 나온 마나는 이번에도 게이트 구간을 지나서도 발동하지 않았다.
여전히 게이트가 꺼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이트가 작동하지 않았으므로, 뇌전 속성의 증폭이 일어나지 않았고 그 덕에 다른 속성 마법을 사용할 수 있었다.
제라드가 지난 한 달간 했던 이론 정립 중 하나는 바로 이것이었다. 게이트에 스위치를 만들어 켜고 끄는 걸 마음대로 하는 것.
그러나 이건 이를테면 부산물에 불과했다.
제라드가 지난 한 달간 정립한 것은 바로 지금부터가 진짜였다.
‘게이트 접촉······.’
제라드는 게이트에 의식을 집중했다.
‘게이트 술식 제어.’
게이트의 증폭 술식의 배열을 변경한다. 지금부터 쓰고자 하는 마법의 속성에 걸맞은 방식으로.
철컹.
제라드는 머릿속에서 그런 소리가 울리는 것을 들었다.
되었다.
제라드는 그렇게 느꼈다.
몸 안쪽의 깊숙한 곳의 패스에 설치된 모든 게이트가 전환되는 게 느껴졌다.
‘게이트 온.’
그 순간, 빛을 잃었던 게이트가 빛을 토하였다.
바로 그때부터였다. 마나의 흐름이 바뀌었다. 게이트를 넘는 순간, 속성이 부여되었고, 절대적인 에너지량이 증폭되기 시작한 것이다.
휘오오오오.
바람이 제라드를 휘감고 있었다.
펄럭대는 로브와 머리칼.
아직 마법이 완전히 완성된 게 아님에도 기세는 보통이 아니었다. 제라드는 기분 좋게 웃으며 양 손바닥을 부딪쳤다.
짝.
“불어라, 바람아.”
제라드가 마주쳤던 손을 뗀 순간이었다.
고오오오!
제라드의 주변으로 휘몰아치는 바람은 이제 거세게 요동치며 회오리치기 시작하였다. 그 바람은 처음에 사용했던 마법과는 그야말로 격이 달랐다.
게이트 증폭법을 다른 속성에 대입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8
제라드는 마나를 거두었다. 그러자 매섭게 요동치던 바람은 그 순간 사그라졌다.
‘재밌네. 바람 속성의 사용하는 데에는 마나가 별로 들지 않지만, 유지하는 건 마나 소모가 상당해. 속성별로 마나 반응의 차이는 꽤 큰 편이야. 마법이 크면 클수록 그런 차이는 두드러진다.’
제라드는 속성에 따른 마나의 특이한 성질을 체감하며 바로 다음 마법을 준비했다.
다음으로 써볼 마법은 불꽃 마법이었다. 뇌전 속성만큼이나 파괴적인 불꽃 속성의 마법을 증폭시켜서 사용한다면 또 얼마나 대단할까.
그렇게 생각했을 때였다.
“어흠!”
지척에서 들려온 헛기침 소리에 제라드가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 먼저 시험장에 와 있던 중년의 마법사가 어느새 바로 지척까지 다가와 서 있었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그는 근엄한 얼굴로 제라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흐음, 자네 이름이 뭔가?”
“제라드라고 하는데요.”
“흐음, 멀리서 지켜보고 있자니 나이가 어린데도 실력이 제법이로구나. 보유한 마나도 많은 것 같고, 벌써 속성별로 마법을 다 사용하는 걸 보니 머리도 상당히 좋은 것 같단 말이지.”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제라드는 그렇게 대답하며,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다른 마탑의 마법사가 제라드를 이렇게 평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블레이즈 델파인이라고 한다.”
“그렇군요.”
제라드가 어정쩡하게 대답하자, 블레이즈가 조금 당황한 얼굴을 했다.
“블레이즈 델파인이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느냐?”
“네, 유명한 분이신가요?”
“헛흠! 뭐, 꼭 그런 건 아니다만······ 세상 물정에 어두운 소년이로구나. 뭐, 좋다. 난 돌려 이야기하는 거 안 좋아한다. 나는 꽤 유명하고 실력이 매우 출중한 마법사다. 너를 제자로 받아들이고 싶구나.”
“제자요?”
“그래. 나는 재능이 출중한 마법사에게는 기회를 준다. 제아무리 재능이 출중하다고 해도 훌륭한 스승을 만나지 못한다면 높은 마법적 진리에 다다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해도 단언해도 좋은 법. 고로 내 제자가 되는 것이 어떠냐.”
“말씀은 고맙지만, 전 이미 스승님이 계신 걸요.”
“그건 걱정할 것 없다. 네 스승과 만나서 내가 직접 담판을 지으면 되는 일이니까.”
“아뇨. 제 말은 전 이미 스승님이 계시기 때문에 다른 스승님은 필요 없다는 뜻이었어요. 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
제라드는 그렇게 말하며 급히 시험장을 벗어났다. 블레이즈의 태도를 보니, 어쩐지 몹시 집요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든 까닭이다.
홀로 남은 블레이즈는 황망한 얼굴로 웃었다.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로군. 블레이즈의 제자 되기를 마다하는 녀석이 있다니 말이야.”
9
이튿날, 시험장을 찾은 제라드.
어제 다 확인하지 못한 속성별 증폭 마법을 오늘은 반드시 확인해볼 참이었다.
그런데.
‘윽······ 또 있어.’
마치, 제라드가 오기만을 기다렸다는 것처럼 블레이즈가 제라드를 발견하더니 다가왔다.
“소년, 또 보게 되는군!”
제라드는 노골적으로 귀찮다는 표정을 지었다.
“전 마법사님의 제자 안 될 거예요.”
“어허. 선배 마법사가 호의로 제안하는데, 어떻게 그렇게 생각도 안 해보고 그렇게 딱 자르기만 하나?”
블레이즈는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아, 귀찮아!’
제라드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마법을 마음껏 쓰면서 시험할 곳은 10층 시험장이 적격이었다. 저층 시험장에는 워낙 많은 마법사들이 있어서 아무 마법이나 사용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근데 이 마법사가 계속 제라드를 귀찮게 했다.
“이보게, 소년. 한순간의 선택으로 평생이 좌우된다는 말을 들어봤나?”
“제라드라고 그랬었지? 사승의 연이라는 건 원래 쉽게 결정할 일이 아니지. 다시 생각해봐라.”
“아니, 그 정도 재능으로 그렇게 평범한 마법만 쓴다는 건 너무 아까운 일이라니까?”
블레이즈는 제라드가 처음에 느꼈던 그대로 정말로 집요한 성격이었다.
“몇 번을 말씀드렸잖아요. 전 스승님이 있어요. 다른 스승님은 필요 없다고 말씀드렸잖아요.”
“거참. 넌 무슨 어린애가 그렇게 고집이 세단 말이냐? 내가 대체 얼마나 대단한 마법사인지는 알고 하는 소리냐?”
“몰라요. 관심 없어요.”
“허, 이놈이 정말······.”
블레이즈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가 이곳에서 머물 시간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그래서 더 조바심이 났다.
‘저 녀석의 재능은 보통이 아니다. 누가 녀석의 스승인지는 모르겠지만, 장담컨대 나보다 더 그 재능을 꽃피우게 할 수는 없을 거야.’
블레이즈는 저 세상 물정도 모르고, 자신에게 건방진 태도를 고수하는 제라드에게 일단 자신의 마법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이름값은 통하지 않아도, 마법은 알아보겠지. 깜짝 놀라게 해주마.’
블레이즈는 어쩌면 이게 가장 빠른 방법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마법을 전개하였다.
블레이즈 델파인이라는 이름과 함께 하는 홍염 마법이 전개된 순간이었다.
화아아아아악!
순식간에 블레이즈의 몸에서 세찬 불꽃이 일렁이며 피어올랐다.
블레이즈에게서 떨어져서 계속 걸어가던 제라드는 별안간 뒤에서 느껴지는 엄청난 마나를 느꼈다.
‘거대한 마나!’
제라드는 뒤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 시뻘건 불꽃에 휘감긴 블레이즈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불꽃 속에서도 조금도 뜨겁지 않은 듯, 자신만만하게 웃고 있었다.
“어떠냐. 이제 나의 마법에 조금 관심이 생겼느냐?”
“엄청난 마법······.”
제라드는 순수하게 그렇게 감탄했다. 그러자 불꽃 속에서 블레이즈가 크게 웃었다.
“크하하. 이제야 안 모양이로구나. 네 스승이 누구인지는 모르겠다만, 나 정도로 고등한 마법을 익히진 못했을 것이다. 아직 늦지 않았으니, 내 제자가······.”
“그렇지 않아요!”
제라드는 단호하게 아니라고 소리치자, 블레이즈의 눈썹이 꿈틀하였다.
“뭐야? 네 스승이 대체 누구인데, 이 블레이즈의 마법을 눈앞에 두고도 부족하지 않다는 소리를 하는 것이냐! 네 스승의 이름을 어디 한번 말해봐라!”
“케이틀란 리덴드!”
그 대답에 블레이즈의 얼굴이 형편없이 일그러졌다.
“설마, 사세르란의 벼락을 말하는 것이냐?”
“네, 맞아요! 그분이에요.”
“빌어먹을. 네가 그 녀석의 제자였단 말이냐? 요 몇 년간 그 재수 없는 놈이 제자를 들였다는 얘기는 들은 적이 없는데······?”
“스승님을 함부로 말씀하지 마세요.”
제라드가 미간을 찌푸리자, 블레이즈는 입맛이 쓴 얼굴로 혀를 쯧쯧 찼다.
“선택은 자유다만! 케이틀란은 제자를 키운 적이 없어서 제대로 된 비법이 없을 거다. 하지만! 나는 셋이나 되는 제자를 키워냈고, 하나같이 모두 상당한 실력자들이다. 날 따른다면 남들보다 훨씬 빼어난 마법사가 될 수 있다.”
“말씀은 고맙습니다. 하지만 역시 괜찮아요. 전 스승님한테 배울래요.”
“······.”
장황한 연설이 끝나자마자 제라드는 그렇게 말하더니 꾸벅 고개를 숙이고 가버렸다.
지금까지 계속 보여주었던 귀찮다는 듯한 모습이 아니라, 이번에는 제법 예의를 갖춘 모습이었다.
“젠장. 아무리 생각해도 아까운데, 저 녀석의 재능······.”
블레이즈는 입맛을 다셨다.
설마, 크루드 마탑에서 자신의 마음에 쏙 드는 재능을 발견하게 될 줄 누가 알았으랴.
그때, 저 멀리 걸어가던 제라드가 갑자기 고개를 돌리더니, 큰 목소리로 말했다.
“마법 정말로 대단했어요. 그렇게 좋은 마법은 스승님의 마법 이후로 처음 봐요!”
“······.”
제라드 딴에는 제대로 말은 하는 게 예의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말이 블레이즈의 어떤 결심을 자극하였다.
저 어린 마법사가 마법의 가치를 그렇게 평가했다는 것이 기특하였고, 동시에 너무나도 아깝다는 생각이 그를 지배한 것이다.
“으아! 안 되겠다. 저 녀석의 재능은 포기하기 아까워! 케이틀란, 그 재수 없는 녀석한테 아쉬운 소리 하는 건 엄청나게 열 받는 일이지만······ 담판을 지어야겠다!”
블레이즈는 그렇게 생각하며 다급히 제라드의 뒤를 따라갔다.
10
“······.”
대화는 없었다.
불편한 침묵이 계속 이어졌다.
애초에 두 사람은 그런 관계였다.
나이도 거의 비슷하였고, 활동했던 시기도 비슷하다.
그렇기에 두 사람의 명성은 세간에는 거의 비슷하게 알려졌을 정도였다.
블레이즈는 직관적인 성격이었고, 케이틀란에게 늘 라이벌 의식을 불태웠다. 10년이 지나면서 조금은 바뀌었다지만, 사람이 아예 바뀌는 건 아니다.
“경험 없는 너보다 내쪽이 훨씬 더 나을 거다.”
“블레이즈, 자네는 이게 얼마나 경우가 없는 행동인지는 알고 있나? 이미 스승이 있는 마법사에게 제자가 되지 않겠느냐고 권유하다니. 같은 마탑 내부에서도 그냥 넘어가기 어려운 일을, 다른 마탑의 마법사가 권유한다는 게 말이나 되나? 이 일이 알려지게 되면 어떤 파문을 일으킬 것 같은가?”
“그래서 이렇게 부탁하러 찾아오지 않았나?”
“내 대답은 분명하네. 거절하지.”
블레이즈도 그 반응을 이미 짐작하고 있었던 듯했다.
“거듭 부탁해도 안 되겠나? 내 마법사로서의 기량을 모두 걸고 저 녀석을 제대로 키워 볼 참이다. 혹 내게 어떤 유감이 있었다고 해도, 그와는 무관하게 그저 한 마법사의 미래만을 보고 판단해주길 바란다.”
블레이즈는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숙여왔다.
케이틀란은 놀랐다.
그가 이런 식으로 고개를 숙이는 것을 난생처음 보았기 때문이다. 조금 전까지 블레이즈의 무례함으로 불쾌감을 지우지 못하고 있던 케이틀란도 한결 냉정해졌다.
“고개를 들게, 블레이즈. 나도 그대의 마음은 이해하네. 제라드가 여럿의 스승을 두고, 많은 마법을 익힌다면 그것만큼 좋은 일은 없겠지. 그만한 기량이 있는 아이니까. 하지만 제라드는 이미 나의 고유술식을 익혔다. 자세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내 마법은 코어 빌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그게 무슨 말인진 그대도 알고 있겠지.”
그 순간, 블레이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 말인즉슨 마나의 속성 자체가 하나의 속성에 적합하도록 바뀌었다는 얘기였기 때문이다.
블레이즈도 별수 없음을 알고 막 단념할 찰나였다.
‘잠깐만? 시험장에서 저 녀석이 다른 속성 마법을 잘만 사용하던 걸 내 눈으로 똑똑히 보았는데, 이게 무슨 소리지?’
블레이즈의 미간이 자연히 모여들었다.
“케이틀란, 싫으면 그냥 싫다고 하면 되는 거지, 그렇게 구차한 거짓말까지 늘어놓을 필요가 있나?”
“뭐라? 내가 거짓말을 한다고?”
케이틀란의 얼굴도 무섭게 일그러졌다.
일촉즉발의 분위기로 치달아가는 케이틀란과 블레이즈.
그때까지 바로 옆에서 잠자코 있던 제라드는 가만히 있는 게 능사가 아님을 알았다.
“스승님, 저 스승님께 말씀드리지 않은 게 있어요. 원래는 따로 말씀드려야겠지만, 지금 두 분 사이에 오해가 있는 것 같아서 지금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요.”
“오해라고? 그게 무엇이더냐. 말해봐라.”
제라드는 조심스러운 태도로 숨기고 있던 걸 말했다.
“저······ 다른 속성 마법 사용할 수 있어요.”
“뭐라고? 지금 뭐라고 하였느냐?”
“죄송해요. 게이트 확장도 안 된다고 하시고, 책도 재밌는 게 없는 것 같아서······ 계속 다른 속성 마법을 사용할 방법을 찾고 있었어요.”
“자, 잠깐······. 잠깐만! 제라드, 지금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넌 지금 다른 속성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고 그랬다. 정말로 그게 가능하단 말이더냐?”
케이틀란은 보기 드물게 당황하고 있었다.
당황할 수밖에!
왜냐하면, 그건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11
‘이거 지금 뭔 상황이야?’
블레이즈 갑자기 상황이 묘하게 돌아간다고 생각했다. 케이틀란이 저토록 당황하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라, 정말로 고유술식 때문에 다른 속성 마법을 쓰는 건 불가능한 일인 듯한데······.’
하지만 만약 그렇다면 이야기가 정말로 이상해진다. 스승인 케이틀란이 하지 못한 걸, 제자인 제라드가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아니, 어떻게 그런 게 가능하지?’
블레이즈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는 일단 팔짱을 낀 채, 이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그게 좀 오랜 시간 동안 고민하다가 얼마 전에 방법을 겨우 찾았어요.”
제라드의 대답에 케이틀란은 도무지 믿을 수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제라드의 재능에 놀란 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놀란 건 처음이었다.
‘최근에 제라드가 요즘 뭔가에 빠져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설마 다른 속성 마법을 사용하는 방법이었을 줄이야······.’
“보, 보여줄 수 있겠느냐?”
“네, 보여드릴게요.”
제라드는 그렇게 말하며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게이트 제어 술식은 쓰지 않는 게 좋겠어. 엘레멘탈 마스터의 마법은 일반적인 마법은 아니야.’
제라드는 엘레멘탈 마스터의 마법이라는 것이 베리타스처럼 누군가에게 말한다고 해도 이해받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님을 직감적으로 알았다.
그 뒤로 제라드는 게이트를 발동하지 않은 상태에서 속성별 마법을 하나씩 차례대로 사용했다. 바람, 불꽃, 얼음, 물······. 순서대로 나타나는 마법들.
케이틀란은 불가능하다고 단정 지었던 것들.
그것이 지금 제라드의 손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제, 제라드······ 내 고유술식은 여전히 사용할 수 있느냐?”
“네, 할 수 있어요.”
제라드는 그렇게 말하며 조금 전과는 다른 자세를 취했다. 오른쪽 손을 들고 중지와 검지를 맞댄 그 자세는 케이틀란의 그것과 아주 똑같았다.
‘제어 술식 변경. 게이트 온.’
철컹.
게이트가 변경되는 소리가 머릿속에서 울려 퍼졌다. 그리고 마나 코어 안쪽에서 쏟아져나오는 마나가 게이트를 지나 뇌전의 속성으로 증폭되었다.
딱.
손가락을 튕기는 소리와 함께 주먹 크기의 뇌전 구체가 나타났다. 그것은 틀림없는 케이틀란의 고유술식 라이트닝 볼트였다.
“이, 이럴 수가······.”
케이틀란은 충격에 빠진 얼굴을 했다.
케이틀란은 충격에 빠진 얼굴로 생각에 잠긴 듯, 저편에 앉아있었고, 제라드는 죄를 진 것처럼 기가 죽은 모습이었다.
‘제길. 이게 대체 뭔 상황이야?’
블레이즈는 한발 물러나서 상황을 지켜보다가 이 상황을 더는 참지 못하고 제라드에게 다가갔다.
“이봐, 너는 왜 아까부터 왜 죽을상이냐?”
“······스승님께서 실망하신 것 같아서요.”
“실망이 아니라, 충격을 받은 거겠지. 자기가 못하는 걸 네가 해낸 거니까.”
“제 잘못이에요······.”
제라드가 더욱 낙담한 얼굴로 그렇게 중얼거리자, 블레이즈의 미간이 모였다.
“제라드, 잘 들어라. 조금 전 네가 한 말은 네 스승한테 엄청나게 모욕적인 말이었다. 마법사는 더 대단한 마법적 진리를 탐구하고 추구하는 자들이다. 그런데 스승 때문에 길을 보고도 보지 않은 척하는 게 마법사겠느냐? 그냥 머저리지.”
“······.”
그 이야기는 케이틀란에게도 들었던 말이었다.
그러나 제라드는 블레이즈의 말이 별로 위로가 되지 않았다. 케이틀란이 저토록 충격을 받은 모습을 처음 보았기 때문이다.
블레이즈도 제라드에게 아무리 말해봐야 소용없음을 알고 케이틀란에게 다가갔다.
“이봐, 케이틀란. 그게 그렇게 충격적인 일인가?”
“······적어도 나는 포기한 일이었다. 불가능하다고 생각해온 일이야.”
“그러면 저 녀석이 괴물이라는 얘기군.”
“제라드는 늘 그랬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나도 충격적이군. 마법을 배운지 아직 1년도 채 되지 않은 제라드가 이젠 내가 일찍이 포기했던 영역에 다다르게 되었다는 것이 말이야.”
“뭐라고? 1년? 마법을 배운지 1년도 안 됐다는 얘기냐?”
블레이즈도 이번엔 깜짝 놀라 일그러진 얼굴을 하였다. 그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저편에 기죽은 모습으로 앉아있는 제라드에게 닿았다.
“······그게 사실이라면 저 녀석은 괴물 정도가 아니군. 전설 속의 드래곤이라도 되는 모양인데.”
“하하하.”
케이틀란이 그제야 웃음을 터뜨렸다. 블레이즈 덕에 조금 전의 충격이 조금은 가셨다.
“내 눈으로 보았으니, 부정도 할 수 없는 셈이로군. 제라드의 그릇은 고작 나 한 사람으로 채울 수 없다는 거야.”
“뭐야, 저 녀석을 내게 넘길 마음이 들었나?”
블레이즈의 물음에 케이틀란은 고개를 저었다.
“난 저 아이를 포기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그대가 제라드의 또 다른 스승이 된다면 그걸 말리지는 않겠다. 제라드는 나와 자네의 마법을 모두 배울 기량을 갖추었어.”
“흥, 오만하군. 내 마법이 다른 마법을 익히면서 배울 정도로 간단하게 보였나?”
“그럼 어디 한 번 확인해보겠나? 자네의 마법이 제라드에게 쉬운지, 쉽지 않은지 말이야. 아마도 당장 확인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케이틀란은 웃는 낯으로 도발하듯 물었다.
블레이즈는 피하지 않았다. 여느 때처럼 말이다.
“좋아, 확인해보자고. 누구의 마법이 더 어려운지 말이야!”
“잘 됐군. 그럼 시험장으로 가세나.”
“뭐? 시험장?
케이틀란은 일어나서 앞장섰다. 저편에 풀죽은 제라드의 모습이 보였다.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었다. 제자의 놀라운 성장을 축하하고 기특해하지는 못할망정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다니 말이다.
‘스승으로서는 거듭 부족한 모습만 보이는구나.’
“제라드.”
“스승님······.”
“하하. 그 무슨 바보 같은 표정이란 말이냐.”
“죄송해요······.”
“무슨 소리! 너는 잘못하지 않았다. 쓸데없는 생각은 그만두고 가자꾸나. 네게 새로운 마법을 보여주마.”
“새로운 마법이요?”
제라드가 호기심 어린 얼굴을 하자, 케이틀란은 무엇이 즐거운지 웃을 따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