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개를 펴고
1
석 달이라는 시간은 거침없이 흘러갔다.
공작가의 일상은 그동안에도 전혀 바뀐 게 없었다.
이른 아침 식사 시간.
공작가 관저의 본관의 식당에는 네 사람이 앉아 있었다.
상석에는 공작가의 주인이자, 영주인 타이온이 있었고, 그 옆에는 공작부인인 리안나와 그 아래의 자리에는 장남인 케인과 차남 테이란이 앉아 있었다.
조용한 식사 시간이 이어지는 와중에 나직하게 딸그락 대는 소리만이 울렸다. 여느 때와 같은 식사시간이었다. 리안나가 별안간 입을 열기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크루드 마탑의 고명한 마법사님께서 도착한 뒤로 벌써 석 달이나 흘렀네요. 그동안 어떤 진전은 있었나요?”
“······.”
케이틀란과 제라드에 관한 이야기였다.
타이온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식사 시간에 나눌 이야기가 아닌 까닭이다. 타이온의 심기가 불편해졌음을 안 리안나였지만, 오늘 그녀는 물러나지 않았다.
“언제까지 더 하실 생각이신가요? 지금껏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던가요? 저명한 학자부터 연금술사까지······ 많은 이들이 찾아와서 제라드를 고치려고 하였지만,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어요. 가문의 추태를 더 알릴 필요가······.”
딱.
타이온이 포크를 거칠게 탁자 위에 놓았다.
리안나는 말을 멈추고 그제야 타이온의 안색을 살폈다.
잔뜩 모인 미간이 타이온의 심기가 얼마나 불편한가를 대변하고 있었다.
“어머니, 식사 시간이니 그 이야기는 더 하지 않으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장남 케인이 조용한 목소리로 그리 말하였으나, 이미 타이온은 더는 식사할 기분이 들지 않는지 자리에서 일어났다.
쿵.
식당의 문이 닫힌 뒤에 리안나는 분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대체 네 아비는 그 바보가 뭐라고 저리 감싼단 말이냐!”
“어머니, 아버지께 제라드는 아픈 손가락입니다. 굳이 그 손가락을 쿡쿡 찌를 필요가 있겠습니까?”
“뭐라? 케인, 네 아버지가 저토록 제라드를 감싸고 도는데, 너는 그런 유약한 소리나 하고 있을 참이더냐!”
리안나는 독이 오른 표정을 지었지만, 케인은 난감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어머니는 어찌하여 아무도 없는 별관에 혼자 지내는 부족한 아이를 이렇게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실까. 측은하게 여겨도 부족한 아이일진대······.’
케인이 속이 답답한 얼굴을 하는 가운데, 그러거나 말거나 테이란은 식사에 여념이 없는 모습이었다.
“생모조차도 신경 쓰지 않는 가문의 추태를 얼마나 더 감싸고 돌는지!”
리안나는 그렇게 거듭 씩씩댈 따름이었다.
한편, 심기 불편한 얼굴로 식당을 나와서 회랑을 걷는 타이온의 곁에는 여느 때처럼 집사가 따라붙었다.
“케이틀란 공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연무장에 계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또 제라드에게 뜀박질을 시킨 모양이지?”
“예, 그렇습니다.”
“그도 포기한 모양이로구나. 내가 그에게 맡긴 것은 교육일진대, 쓸데없는 체력단련이라니 말이야. 오늘 케이틀란 공과 만나야겠으니, 자리를 잡아주게.”
“알겠습니다.”
타이온의 눈동자는 차가웠다.
케이틀란이 공작가에 온 뒤로 벌써 석 달. 그동안 제라드에 관한 이야기는 종종 들었지만, 근본적으로 무엇인가가 바뀌었다는 얘기는 지금껏 단 한 번도 듣지 못했다.
‘모두 내 잘못이다. 내 욕심이야.’
별안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제 생각을 정리할 때가 된 것이다.
타이온의 발걸음이 둘째 부인인 제인의 처소로 향하였다. 그녀는 이미 오래전에 제라드에게서 마음을 떼어놓았지만, 그래도 생모인 그녀에게는 반드시 전해야 할 이야기였다.
제라드는 땡볕을 열심히 뛰어다니고 있었다.
“헥헥.”
숨을 헐떡이고 땀을 주룩주룩 흘려대면서도 멈추지 않는 모습이었다.
‘좋아, 그동안 체력단련을 계속시켜왔던 성과가 조금씩 보이는구나.’
불과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연병장을 한 바퀴만 돌아도 헉헉대면서 옆구리를 잡았던 제라드였다. 별관의 처소와 별로 넓지 않은 복도만 돌아다니며 평생을 살았으니, 체력이 좋고 몸이 튼튼하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다.
일정한 속도로 뛰어서 돌아오는 제라드는 땀을 주룩주룩 흘리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후욱. 후욱······.”
케이틀란은 그런 제라드를 기특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아주 잘했다. 마법사들이 놓치기 쉬운 것이 바로 건강이고 체력이다. 하지만 네가 빼어난 마법사가 되길 원한다면 무엇보다 가장 먼저 챙겨야 할 것은 몸이다. 마법의 힘을 감당하는 것은 오롯이 몸이다.”
“후우우······. 말씀하신 대로 3바퀴를 쉬지 않고 뛰었어요. 이제 마법을 마저 배워도 되는 거죠?”
아직 숨이 찰 텐데도 그것부터 물어보는 제라드. 마법에 대한 열의 하나는 정말 무서울 정도였다.
“그래, 그래도 좋다. 단, 내게 마법을 배우는 시간 외에는 절대로 마법을 배워서는 안 된다. 알겠느냐?”
“네에.”
제라드는 불만스러운 얼굴이었지만, 순순히 케이틀란의 말을 따랐다.
한 달 전, 제라드가 코피를 쏟았던 것 때문에 케이틀란이 제라드를 몹시 걱정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베리타스도 내 말을 안 듣고······.’
어찌 된 일인지, 코피를 쏟으면서 비틀댄 이후로는 베리타스도 케이틀란의 교육시간 이후에는 어떤 자료도 주질 않았다.
‘뭐, 베리타스도 나를 걱정하는 거겠지.’
제라드도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기에 고집은 부리지 않았다.
“좋아, 네가 스승의 말을 잘 들으니, 대신해서 재미있는 마법 하나를 가르쳐주마.”
“정말요?”
제라드가 언제 부루퉁했었느냐는 듯, 눈을 반짝거리며 기대에 가득 찬 얼굴을 했다.
“하하. 제라드, 너는 마법에 관한 얘기만 나오면 사람이 달라지는구나.”
“스승님, 얼른 들어가요! 저 빨리 배울래요!”
“알겠다, 알겠어. 그리 재촉할 것 없다. 이건 너라면 아주 손쉽게 배울 수 있는 간단한 호신 마법이야. 물론, 숙련되기까지는 경험이 필요하겠지만 말이야.”
조금 전까지 땀을 뻘뻘 흘리던 제라드는 아직도 기운이 남아도는지 방방 뛰어다녔다.
“새로운 마법 배운다!”
케이틀란은 그런 제라드를 보면서 한참 웃다가 회랑 저편에서 이곳을 바라보는 한 시선을 느꼈다. 그곳에 중년의 집사가 서 있었다.
“제라드, 먼저 들어가서 이론 공부를 먼저 하고 있어라. 잠깐 집사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들어갈 것이다. 단, 내가 수도 없이 말했지만, 절대로······.”
“마법을 따로 익히거나 사용하면 안 된다는 거죠? 알겠어요. 스승님과의 약속 꼭 지키고 있을게요. 대신에 오래 있지 말고 빨리 오셔야 해요!”
제라드는 쾌활하게 대답하고 별관 건물로 달려갔다.
“녀석.”
케이틀란이 그 뒷모습을 부드러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을 때, 집사가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케이틀란 공.”
“예, 오랜만에 뵙는군요. 집사님께서 절 직접 찾아오는 일은 꽤 드문 일로 알고 있습니다만, 무슨 일로 오셨는지요?”
“영주님께서 케이틀란 공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하십니다.”
케이틀란은 미간을 살짝 모았다. 어쩐지 별로 좋은 이야기가 나올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2
제라드는 눈앞에 있는 책을 손으로 넘겼다.
처음에는 실제로 눈에 잡히는 책을 읽는다는 것. 그리고 책장을 자신의 손으로 넘긴다는 게 굉장히 어색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최근엔 그것도 꽤 익숙해진 모습이었다.
“베리타스, 섭섭해하면 안 된다. 알겠지? 네가 안 읽게 해주니까 너무 심심하단 말이야.”
제라드는 그렇게 말하며 베리타스를 보았다. 평소와 다름없이 그냥 눈을 도르륵 굴리는 모습이었다.
“똑같은 책 읽는 거 정말 재미없어······.”
복습이란 건 제라드에겐 정말로 재미없는 일 중 하나였다.
한 번 읽은 책을 다시 봐야 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책에 관한 내용이 전부 머릿속에 다 있는데 왜 또 읽는단 말인가?
특히 할 게 없어서 세 번이나 읽은 이 책은 이미 페이지 별로 무슨 내용이 있는지 다 기억이 날 지경이었다.
제라드는 중간쯤 읽다가 아예 다음 페이지의 내용을 줄줄이 말하기 시작했다.
“······이론 정립이 우선시된다. 이런 경우에 상기 서술한 술식을 구축하는데 어려움이 동반되나, 이 경우 트리페나 마나 배열식을 이용하면······.”
그것도 한참 반복하다가 나중에는 아무 페이지나 닥치는대로 펼쳐서 그 다음장의 내용을 줄줄이 읊었다.
“아, 재미없어······. 스승님이 너무 늦으시니까, 그냥 운동이나 더 하는 게 낫겠어.”
처음에는 운동이 정말 싫었다.
힘들고 숨차고 괴롭기만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지 않아서 그 한계 범위가 넓어지기 시작하는 걸 느낀 뒤로는 재밌어지기 시작했다.
“내 마법을 받쳐주는 건 몸!”
그렇게 끙끙대며 실내에서 할 수 있는 근력 운동을 얼마나 했을까. 제라드는 바닥에 누워있다가 살짝 졸았다.
“으음······.”
뒤척이다가 잠이 깬 제라드는 이내 몸을 벌떡 일으켜서 시간을 보더니 깜짝 놀랐다.
벌써 두 시간 가까이 지났기 때문이다.
‘이상하다. 스승님이 왜 이렇게 오래 걸리지?’
제라드는 더는 참지 못하고 밖으로 나와서 회랑을 따라 걸었다.
그동안은 이 회랑을 넘어가지 말자.
그렇게 스스로 틀을 정해놓았다. 하지만 지금 제라드는 그 틀을 스스로 깨고 나왔다. 이미 변화는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
‘집사님이 왔었으니까, 아버지랑 계시겠지?’
제라드는 몰래몰래 움직였다.
공작가의 누구도 제라드가 본관에서 돌아다니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다행히도 제라드는 공작가의 건물구조를 완벽히 꿰뚫고 있었으므로, 사람들이 그를 발견하기 전에 숨으면서 천천히 타이온의 집무실로 향하고 있었다.
‘히히. 숨바꼭질 놀이 같아. 조세핀이랑 어렸을 때 많이 했었는데.’
언제부터였을까. 조세핀이 제라드와 조금씩 거리를 두면서부터는 더는 하지 않게 되었다.
‘사람은 왜 변하는 걸까.’
별안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는 사이, 어느새 공작가의 집무실 앞까지 다다른 제라드. 아주 어렸을 적이지만, 몇 번이고 와봤던 곳이었다.
‘내 발로 여기까지 온 건 처음이네.’
제라드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문에 귀를 슬쩍 가져다 댔다.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었지만,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바로 그 순간, 타이온의 격앙된 목소리가 똑똑히 들렸다.
“······나는 제라드를 포기하겠소. 그 아이는 이제 공작가와는 전혀 무관한 곳에서 살아가게 될 것이외다. 그게 그 아이를 괴롭히지 않는 일이고, 공작가를 위하는 길이기도 하오.”
3
케이틀란이 예상했던 그대로였다.
‘어쩐지 좋은 얘기가 아닐 것 같더라니······.’
케이틀란은 진지한 얼굴로 다시 제안했다.
“하지만 공작 각하, 아직 결정을 서두르기엔 이릅니다.”
“아니, 이르지 않소. 나는 이미 결정을 내렸소. 그래도 나의 핏줄이기에 여기까지 온 것이오. 그 아이에겐 기회를 충분히 주었소. 무슨 말인지 아시겠소? 타이온 크라우드 공작이 답을 알고 있었음에도 외면한 채로 여기까지 왔다는 거요.”
“그렇게 오랜 시간을 기다려오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니 앞으로 3개월 정도만 더 기다려주시지요. 그 후에는······.”
“그만.”
타이온은 단호하게 잘랐다. 그는 이미 결심이 단호하게 선 모양이었다.
‘난감하군. 모든 것을 사실대로 말할 수도 없는데 무엇 때문에 갑자기 이러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구나.’
케이틀란의 처지에서는 이 상황이 갑작스러웠다.
그러나 타이온이 이 결단을 내리기까지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는 조금씩 그 결단을 준비해온 것뿐이다.
“케이틀란 공, 미안하고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소. 하지만 크루드 마탑에 공식적으로 요청했을 때엔 정말로 마지막이라는 결심을 하고 있었소. 그리고 이제 3개월이 지났소. 이젠 충분하오. 그간 제라드에게 많은 노력을 해주었음은 나도 잘 알고 있소. 바로 그렇기에 더는 귀공과 마탑에 폐를 끼칠 수는 없는 노릇이외다.”
“······.”
케이틀란은 속이 답답하였다. 진실을 알면 대체 얼마나 후회하려고 잠깐을 못 참는단 말인가.
‘구도자의 진리에 이름을 걸었으니, 내 입으로 사실을 말한다면 언령을 어기는 일이 된다.’
“후······. 공작 각하의 결심은 이미 확고하십니까?”
“확고하오.”
“그렇다면 제라드에겐 어떻게 말씀하실 참이십니까.”
“특별한 말이 필요가 있겠소? 그 아이는 아무것도 모를진대.”
그 말인즉슨 그냥 통보하겠다는 것이다.
케이틀란은 불쑥 화가 치밀었다.
‘제라드가 공작가를 위하여 어떤 희생을 하였는지 안다면 절대로 그리하진 못할 것입니다.’
그 말은 목구멍까지 올라왔다가 다시 내려갔다.
그런 케이틀란의 마음을 모르는 타이온은 다시금 정중하게 인사를 해왔다.
“다시금 감사의 인사를 하고 싶소. 케이틀란 공께서는 온 힘을 다해주었소. 하지만 이제 더는 그 아이를 괴롭히지 마시오. 이미 그동안 충분히 고통받은 아이이오. 나도 이젠 그만 포기하겠소.”
“알겠습니다.”
공작의 뜻이 확고하다니, 더 이야기해봐야 의미가 없는 일이었다.
케이틀란은 부글대는 속을 끌어안고 집무실에서 나왔다. 이 문제에는 그가 끼어들어서 할 수 있는 게 얼마 없었다.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별수 없구나. 제라드에게 이 상황을 잘 이야기하는 수밖에. 그 아이가 어떤 마음으로 바보를 연기해왔는지는 알지만, 그것도 여기까지다. 이런 식으로는 제라드의 마음만 다칠 뿐이야.’
케이틀란은 이 사실을 어떻게 전해야 할지, 그것을 걱정하며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별안간 그의 눈에 무엇인가가 들어왔다.
안쪽으로 이어지는 복도. 그곳에는 역대 영주들의 얼굴을 본뜬 석조상이 나열되어 있었다.
그런데 두 번째 석조상의 뒤쪽에 빼꼼 튀어나와있는 흙투성이의 작은 신발의 끄트머리가 보였다.
케이틀란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설마······?’
케이틀란은 불안한 마음을 억누르고 석조상에 다가갔다. 발걸음 소리에 튀어나온 작은 신발이 안쪽으로 쏙 들어갔다.
불안이 현실이 된 순간이었다.
케이틀란은 석조상 사이의 그늘진 구석에 움츠린 작은 소년을 찾았다.
소년은 제라드였다.
‘네가 왜 여기에······.’
그런 질문을 하려던 케이틀란이었지만, 이내 고개를 든 제라드의 얼굴을 보고 말문이 턱 막혔다.
제라드의 큰 눈망울에 방울방울 맺힌 눈물이 소리 없이 뚝뚝 흘러내리고 있었다.
‘······들었구나. 조금 전의 이야기를, 모두 들은 거야.’
케이틀란은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하고 제라드를 꼭 껴안아 주었다.
지금 이건 도대체 누구의 잘못이란 말인가······.
달래고 어르는 품에 안기면 더욱 울어야 할 아이는 어른의 품 안에서조차도 더욱 소리를 죽일 따름이었다.
4
제라드는 멍하니 정원의 풍경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리고 그런 제라드를 지켜보는 케이틀란은 마음이 참으로 뒤숭숭하였다.
‘정식적으로 받아들인 제자이기 때문일까? 그것도 아니면 내가 그 얼마 안 되는 사이에 저 아이에게 마음을 너무 많이 연 것일까. 어찌 되었든 모두 나답지 않은 일이구나.’
케이틀란은 늘 감정보다 이성이 앞서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오늘 그의 마음은 망가진 것처럼 요동쳤다.
숨어서 소리 죽여 우는 제라드의 모습이 자꾸만 눈앞에 아른거렸다.
‘가엾은 것. 공작가의 사람들이 싸우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 자신을 희생하며 바보 행세를 해왔음인데, 그 결과가 이렇게 버려지는 것이라니.’
제라드가 받은 마음의 상처는 보통 큰 게 아니리라. 하지만 그러는 한편으로는 오히려 잘 되었다는 생각도 들었다.
바보는커녕 천재 중에서도 천재. 그야말로 괴물이라고 할 수 있는 재능을 갖춘 제라드가 바보로 살아간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케이틀란은 제라드의 곁으로 다가갔다.
“제라드.”
“스승님······.”
“이제 알았느냐?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희생은 고독하고 어리석을 뿐이야. 너는 이미 충분히 했다. 지금이라도 당장 공작 각하께 찾아서 모든 사실을 밝히자꾸나.”
“아뇨. 그러고 싶지 않아요.”
“제라드.”
케이틀란이 강한 목소리로 말했지만, 제라드는 다시 힘차게 고개를 저었다.
어린아이의 치기어린 고집이라는 생각에 다그칠 작정이었던 케이틀란은 제라드가 희미하게 웃고 있음을 알았다.
“저도 알아요. 언제까지 바보로 지낼 수는 없다는 걸요. 아버지나 어머니나······ 모두가 바보를 원하지 않게 되었다는 걸 이젠 알고 있으니까요.”
“그걸 알고 있었다면 왜 밝히지 않았느냐?”
“저는 공작도 영주도 되고 싶지 않으니까요.”
“······.”
제라드는 단호한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제가 원하는 자리도 아닌데, 굳이 가족끼리 싸우고 다투고 싶지 않아요. 그렇게 다퉈서 얻은 자리가 행복할 것 같지도 않고요.”
“그러면 너는 공작 각하의 뜻을 순순히 받아들이겠다는 것이냐?”
“아니요.”
“그럼 대체 뭘 하겠다는······.”
케이틀란이 그렇게 묻다가 입을 다물었다.
제라드가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빙그레 웃었다.
“전 스승님 따라 마탑에 가서 마법사할래요.”
새는 알에서 태어나기 위해서 자신의 세계를 부순다.
케이틀란은 알았다.
제라드가 지금 자신의 세계를 부술 준비를 마쳤다는 것을.
5
늦은 밤이었다.
“그렇게 결단을 내렸다.”
“······.”
대공자 케인은 무거운 얼굴로 그 이야기를 듣고 공작의 집무실을 나왔다. 불빛 아래로 고뇌하는 공작의 얼굴은 몹시 어두웠다.
공작으로서도 어려운 결정이었으리라.
케인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머니께서 그렇게 바라시던 결과로구나. 결국은······.’
케인은 별관으로 향하였다.
타이온은 결단을 내리면 주저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아마 지금이 제라드와 만날 마지막 기회가 될는지도 몰랐다.
긴 회랑을 따라 걸을 때마다 발걸음이 몹시 무거웠다.
복도에 드리운 희미한 불빛이 별관의 어둠을 쫓아내는 가운데, 제라드의 방 앞까지 온 케인은 한참을 서성이기만 했다. 잠들었을 제라드를 깨우는 것도 못할 일이었기 때문이다.
“누구세요?”
“엇!”
뒤에서 별안간 들린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케인.
어둠 속에 제라드가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제, 제라드, 아직 자지 않고 있었구나.”
“어? 케인 형님이세요?”
“형님은 무슨! 형이면 충분하다고 말하지 않았느냐.”
“아, 맞다! 헤헤.”
“그런데 이 늦은 시간까지 자지 않고 뭘 하고 있었느냐?”
“음, 정원에서 하늘 보고 있었지요. 별이 많아요.”
“정원에서······? 하하. 그래, 별관의 정원에서 보는 하늘이 또 예뻤지. 함께 볼 테냐?”
“네!”
두 사람은 어둠에 물든 정원으로 나와서 바닥에 같이 누웠다. 늘 점잖은 대공자의 케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소탈한 모습이었다.
“제라드, 미안하구나.”
“뭐가요?”
“그냥······. 미안하다.”
“히히. 그냥 미안한 게 어딨어. 이상해요.”
해맑게 웃는 제라드의 모습에 케인은 더 죄책감에 사로잡혔다.
“제라드, 넌 착한 아이다. 아무 잘못도 없어. 그러니까 혹시 앞으로 일어날 일 때문에 누군가를 미워하고 싶으면 날 미워해라. 알겠지?”
“싫어요. 형은 좋은 사람이야. 난 아무도 미워하지 않을래요. 아무도요.”
‘아무도 말이냐.’
밤하늘을 보는 케인의 눈빛이 슬프게 변하였다.
제라드도 케인과 이렇게 밤하늘을 우러러보는 것이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이 공작가에서 머무를 시간이 불과 며칠도 남지 않았다는 것도.
‘괜찮아, 난 이제 다시는 안 울 거야. 내가 있을 곳은 내가 만들 거야. 그렇지, 베리타스?’
도르륵.
베리타스가 눈을 굴려댔다. 꼭 제라드의 말에 동의하는 것처럼 말이다.
제라드는 웃었다.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6
타이온은 공식적으로 제라드를 불렀다.
이른 아침.
제라드는 거울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물끄러미 보았다.
조금 긴장했을 줄 알았는데, 평소와 같은 얼굴이었다.
‘응, 괜찮아.’
제라드는 웃으며 밖으로 나왔다.
밖엔 조세핀이 서 있었다. 그녀는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이었다.
“고, 공자님······.”
“조세핀, 안녕!”
평소와 같은 제라드의 인사에 조세핀은 울상이 되었다.
그녀도 귀가 있었다. 오늘 회의실에서 제라드를 불렀다는 얘기는 들어서 알고 있었다.
“조세핀, 아침부터 슬픈 표정 짓지마!”
“아야야야. 공자님, 아파요······!”
볼을 쭉 잡아당기는 제라드에 조세핀은 언제 울상이었느냐는 듯 눈을 흘겼다.
“히히. 이제 평소의 조세핀이다!”
“정말, 공자님은 아무것도 모르면서······.”
조세핀이 그렇게 답답하다는 듯 말하다가 제라드의 얼굴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늘 장난스럽고 어린아이같았던 눈동자가 침착하고 어른스럽게 보였던 까닭이다.
“공자님······?”
“괜찮아.”
제라드는 그렇게 말하며 회랑으로 걸어갔다.
그 뒷모습은 이상하게 커 보였다.
회랑의 저편.
케이틀란이 제라드를 기다리고 있었다.
“스승님!”
“왔구나. 표정이 좋은데, 혹 긴장하지는 않았느냐?”
“아뇨, 괜찮아요.”
“그거 좋구나.”
대화는 이제 필요 없었다.
두 사람은 회의실의 앞에 섰다. 사람 70명은 족히 들어갈 정도로 거대한 회의실은 가문의 대소사를 결정할 때만 쓰이는 공간이었다. 제라드는 단 한 번도 이 방에 들어가본 적이 없었다.
쿵쿵.
케이틀란이 문을 두드리고 문을 열었다.
끼익.
회의실의 문이 열렸고, 그곳에 모인 이십여 명의 사람들의 시선이 제라드에게 쏟아졌다.
세상으로 이어지는 문이었다.
“······해서 제라드 그라우드는 오늘 이 시간 이후로, 더는 그라우드 가문의 성씨를 사용할 수 없으며, 그 대신에 제라드 란스터로 불리게 될 것이며, 거취는 그 성씨를 따라 란스터 영지에서 머물게 될 것이다.”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타이온은 나직하게 선고하였다.
직사각형의 긴 탁자의 앞에 앉아있는 중장년의 사내 중 누구도 반발하는 이는 없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이 자리는 이미 결정된 사항을 정리하는 자리였다.
한쪽에 앉아있는 리안나는 웃음을 참기 어려운 표정을 하고 있었고, 케인은 어두운 기색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리고 저편에 앉아있는 제라드의 생모인 제인은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모두가 저마다 이 상황을 받아들이는 태도가 달랐다.
그러나 지금 이 자리의 누구도 타이온의 뜻에 반대할 의지는 없는 것 같았다.
한 사람만 빼고 말이다.
케이틀란이 별안간 손을 들었다.
모두의 시선이 케이틀란에게 꽂히는 가운데, 타이온은 미간을 찌푸렸다.
“케이틀란 공, 무슨 할 말이 있소?”
“예, 이 자리를 빌려 공작 각하와 이 자리에 계신 그라우드 가중 여러분께 꼭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소만, 지금 이 자리에서 꺼낼 이야기가 맞소?”
“예, 지금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얘기입니다.”
“······.”
타이온의 눈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러나 케이틀란도 물러날 생각은 없었다.
“좋소. 이견이 있다면 말씀하시오.”
“감사합니다. 저는 3공자의 교육자로서 지금 이 자리에 참석하였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3공자의 교육자입니다. 저는 아직 3공자를 포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 점에 관해서는 유감이오만, 그라우드 공작가에서는 이미 제라드를 란스터 백작가의 양자로 보내기로 하였소.”
“예,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저는 아직 제라드를 포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해서, 혹 그라우드 공작 각하나 란스터 백작 각하께서 허가만 해주신다면 제라드를 마탑으로 데려가고 싶습니다.”
케이틀란의 갑작스러운 말에 장내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마탑이라니······.
“진심으로 하는 소리요? 마탑은 마법사들의 성지. 마법사가 아닌 어떤 외부인도 감히 발을 들여다 놓을 수 없는 곳일진대, 그곳에 제라드를 데리고 들어가겠다는 것이오?”
“예, 저는 진심으로 하는 소리입니다. 제라드는 마법사가 되고 싶다고 합니다. 저는 그 바람을 꼭 들어주고 싶습니다.”
케이틀란의 의지는 분명했다.
타이온도 그가 지금 어설픈 마음가짐으로 이 상황에 개입한 게 아님을 알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치열하게 부딪칠 때였다.
“잠깐!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에요. 아무리 란스터 가문에 양자로 보냈다고 해도, 제라드는 엄연히 그라우드 가문의 핏줄. 이렇게 관련 없는 사람에게 제라드를 맡겨서 마탑으로 보낸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잠자코 있던 공작부인 리안나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서 이 상황에 끼어들었다. 그때까지 잠자코 있던 가신들 몇 명이 이에 동조하고 나섰다.
‘쉽게 넘어가지는 않는군.’
케이틀란도 어느 정도 예상한 반응이었다. 다만, 그 반응이 공작이 아니라, 전혀 엉뚱한 곳에서 나왔다는 게 조금 예상 밖의 일이었지만 말이다.
“모두 정숙!”
별안간 쩌렁쩌렁 울리는 타이온의 목소리에 어수선하였던 회의실이 단번에 조용해졌다.
사람의 혼백을 휘어잡는 강렬한 기파였다.
그라우드 공작은 달인의 경지에 다다른 기사. 그런 그가 내뿜는 기백은 당연하게도 절대로 가벼울 리가 없었다.
“부인, 자리에 앉으시오. 오늘 이 자리에는 부인이 끼어들 자리가 없소.”
“하, 하지만!”
“부인.”
묵직한 경고.
리안나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지만, 이내 다시 자리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공작부인이고, 또한 아덴바움 후작가의 딸이라는 것은 이 자리에 모르는 이가 없었지만, 그러한 사실은 타이온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는 얘기였다.
“케이틀란 공, 그 말에 책임질 수 있겠소?”
“공작 각하, 저는 케이틀란 리덴드입니다.”
짧지만 무거운 대답이었다.
그제야 모두가 케이틀란의 존재감을 다시 느꼈다.
그랬다.
지금 그들의 앞에 선 케이틀란은 단순한 마법사가 아니었다. 동부에서 발발한 최악의 전란. 사세르란의 참상을 종식한 국가공인 마법사.
사세르란의 벼락!
케이틀란 리덴드. 단 한 사람의 마법사가 능히 수천 명 군대를 대신한다고 하지 않던가!
그뿐이랴, 케이틀란은 지금 가장 공신력 높은 마탑인 크루드 마탑의 11명의 원로 중 한 사람이었다.
“저는 어떤 경우에도 가벼이 말을 꺼내지 않습니다.”
7
뒤숭숭한 분위기 속에서 회의는 끝났다.
긴 침묵을 지키던 타이온이 추후에 회의 결과에 따른 통보를 해주겠다는 말만 남기고서 말이다.
아직 결과는 정해지지 않았다.
그러나 케이틀란은 확신하고 있었다.
‘공작의 그 눈빛이 모든 것을 말하고 있었다.’
별관으로 향하는 쓸쓸한 회랑에 다다랐을 때, 별안간 제라드가 속삭이며 말했다.
“스승님, 엄청나게 멋있었어요. 회의실의 그 많은 사람이 모두 아무런 말도 못하던걸요?”
“쓸데없는 소리. 세상 사람들은 쓸데없는 허명에 목을 맨다. 조금 전의 나는 그들의 수준에 맞춰서 이야기했을 뿐이야. 하지만 마법사들은 결코 그런 것들에 의미를 두지 않는다. 왜냐하면······.”
“마법사는 모두 구도자니까요.”
“그래, 정답이다. 잘 알고 있구나.”
“그래도 스승님은 멋지고 고마웠어요.”
“제라드, 고맙다는 말 같은 건 더 필요 없는 말이다. 사승 사이에 고맙다는 말을 일일이 하기 시작하면 그 끝이 없는 법이야.”
“네, 알겠어요.”
두 사람은 강의실로 돌아왔다.
언제나처럼 아무도 없는 강의실에 두 사람이 들어오자, 그제야 온기가 가득 차는 듯했다.
“다시 묻겠다만, 진정 후회는 없느냐?”
“없어요. 그냥 가슴이 두근거릴 뿐이에요.”
가슴이 두근거린다.
그건 케이틀란이 하고 싶은 말이었다.
“그래, 날개를 펼쳤으면 넓은 창공을 향해 날아야지.”
“넓은 창공······.”
제라드는 그 말을 듣는 순간, 탁 트인 하늘이 펼쳐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한없는 자유와 기분 좋은 바람이 뺨을 스치는 듯했다.
“좋아, 말이 나온 김에 네 결정을 축하하는 의미로 마법을 가르쳐주마. 연병장에서 말했던 그 마법이다. 배울 준비는 되었느냐?”
“네!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요!”
“이 마법의 이름은 섀도우라고 부른다.”
벌떡 일어난 제라드의 눈이 흥분으로 반짝거리고 있었다.
타이온은 집무실에서 가만히 눈을 감고 있었다.
케이틀란의 굳은 의지로 빛나던 눈동자가 아직도 눈앞에 아른거렸다.
‘고맙구나. 참으로 고마워.’
그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공작가의 주인으로서 모두를 위해 저버려야만 했던 아버지의 도리를 케이틀란이 대신해주려고 하고 있었다.
‘제라드가 란스터 백작가로 간다면 분명히 평안한 삶을 살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어떤 가능성도 없는 삶이 될 것이다. 그러나 제라드가 케이틀란 공을 따라간다면······.’
케이틀란은 쉬이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오늘 제라드를 포기하지 않았던 것처럼.
그가 어째서 포기하지 않는지는 모른다.
다만, 그의 눈동자는 흔들림 없이 빛나고 굳건하였다.
‘그렇다면 언젠가······ 언젠가는 제라드도 자신의 힘으로 세상을 마주 보고 살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타이온은 눈을 뜨고 고개를 들었다.
더 깊이 생각할 것도, 고민할 것도 없었다.
그는 오랜 시간 아무 내용도 적혀있지 않은 양피지에 화려한 필체로 크루드 마탑에 전하는 서신 한 장을 거침없이 적어 내려가기 시작하였다.
마탑의 탑주에게 보내는 서신이었다.
그 서신에는 제라드를 케이틀란에게 맡기겠다는 내용이 있었다.
8
“공자니이이임……. 엉엉…….”
“조세핀, 울지 마…….”
“안 돼요, 공자니이임……. 흐어엉.”
조세핀은 제라드가 공작가를 떠나기로 한 사실과 함께 구체적으로 날짜가 잡히자마자, 다른 일을 다 팽개치고 제라드의 처소로 찾아와 통곡하였다.
조세핀이 이런 모습을 보인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어떻게 해야 조세핀을 울지 않게 할까.’
바로 그 순간, 베리타스가 별안간 열리더니, 이십여 권의 책을 줄줄이 쏟아냈다.
‘베리타스, 이 바보야! 지금 당장 도움이 될 책을 뽑아서 줘야지. 이렇게 한꺼번에 주면 어떻게 하라는 거야.’
그 순간, 책들이 하나씩 사라지더니, 단 한 권만 남게 되었다.
[현 상황에 가장 적합한 정보 총 1건을 찾을 수 있었음.]
바로 펼쳐지는 책.
제라드는 빠르게 책 내용을 훑었다.
별로 어려운 내용의 책도 아닌 데다가 속독으로 읽으면 정말로 순식간에 읽을 수가 있었다.
제라드가 책을 다 읽기까지는 불과 3분이 걸리지 않았으니.
‘좋아, 실천해보자.’
제라드는 지체 없이 행동했다. 일단 엉엉 우는 조세핀의 어깨를 잡아당겨서 단숨에 꽉 안았다.
“고, 공자님……?”
“조세핀, 미안해. 울지마. 내 잘못이야.”
“흑……. 그, 그게 왜 공자님 잘못이에요.”
“쉿. 아무 말도 하지 마.”
제라드는 그렇게 조세핀의 귓가에 속삭이며, 한 손으로 조세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조세핀보다 머리 하나는 더 작은 제라드였기에 그 모양새가 꽤 이상하였지만, 효과는 탁월했다.
제라드의 품에 안긴 조세핀은 평소와는 사뭇 다른 제라드의 분위기에 눈물이 그만 뚝 멈추고 말았다.
‘베리타스, 잘했어.’
제라드는 눈을 도르륵 굴려대는 베리타스를 보면서 고개를 살짝 끄덕여주었다.
진정한 조세핀의 등을 천천히 쓸어주면서 뒤로 물러난 제라드는 당황한 얼굴을 한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눈물을 닦아주었다.
“다시 볼 수 있어!”
“고, 공자님…….”
조세핀이 다시 울 것 같은 얼굴을 하자, 제라드는 바로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잡고 이마에 쪽 키스를 해주었다.
‘다음은 입에다가 뽀뽀하는 거랬지.’
제라드가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천천히 내리고 있을 때, 조세핀이 머리를 뒤로 확 빼며 물러났다.
“뭐, 뭐, 뭐하신…… 지금 뭐하시는……. 어, 어디에서 배웠어요! 그, 그런 거 어디에서 배웠어요!”
“조세핀 갑자기 왜 그래?”
“그, 그런…… 그런 건 아무한테나 막 하고 그러면 안 돼요. 고, 공자님은 아직 어리면서!”
조세핀은 그렇게 벌게진 얼굴로 말을 더듬다가 방에서 나가버렸다. 혼자 남은 제라드는 미간을 찌푸리며 머리를 긁적였다.
“왜 저러지?”
베리타스의 옆에 둥실 떠다니는 책.
그 책의 이름은 ‘여심을 사로잡는 행동 원리!’였다.
제라드는 공작가를 떠나게 되었지만, 사실 공작가에서 그가 작별인사다운 작별인사를 나눌 상대는 조세핀 하나뿐이었다.
생모인 제인은 제라드가 바보라는 판정을 받은 이후로 눈길 한번 주지 않았고, 대공자인 케인은 사람들의 이목을 신경 쓰느라 다가오지 않았다.
그 외에 2공자인 테이란은 제라드에게 무관심했고, 4공자이자, 제라드의 친동생인 로메오는 고작 6살로 아무것도 몰랐다. 타이온은 따로 제라드를 찾아오지 않았으니, 마침내 제라드가 공작가를 떠나야 하는 날의 아침이 밝았다.
“아침이구나.”
조세핀이 찾아오기도 전에 깨어난 제라드는 창가로 쏟아지는 아침 햇살에 잠긴 방의 모습을 눈에 담고 밖으로 나왔다.
복도의 저편에 선 조세핀이 제라드의 얼굴을 보자마자 또 눈물을 왈칵 쏟았다.
“조세핀, 또 우는 거야? 뽀뽀해줄까?”
“누, 누가 울어요! 그냥, 그냥 하품해서 그런 거에요…….”
“그렇구나. 울면 뽀뽀해줄 거야. 안 울면 나중에 꼭 보러 올게.”
“……약속이죠?”
“응, 물론이지.”
제라드가 새끼손가락을 들어 올리자, 조세핀이 쿡 웃더니, 새끼손가락을 마주 걸었다.
“자, 새끼손가락 걸고 약속!”
“알았어요. 그럼 기다릴게요.”
“그럼 가볼게.”
제라드는 그렇게 말하며 손을 흔들었다. 겨우 멎었던 조세핀의 눈가에 다시 눈물이 고일 때였다.
“아, 맞다!”
제라드가 가다 말고 갑자기 달려왔다.
“왜 그러세요? 뭐 잊은 거라도 있는 거예요?”
“조세핀한테 꼭 해야 할 얘기가 있어. 귓속말로 해야 해.”
“왠지 불안한데…… 또 장난치는 거 아니죠?”
조세핀이 고개를 살짝 내린 순간, 제라드는 번개 같이 조세핀의 입에 입술을 쪽 맞추었다.
“어머나 세상에…….”
옆에서 가만히 모든 상황을 지켜보던 시녀장 페이가 화들짝 놀란 얼굴로 경악하는 와중에 조세핀은 시뻘게진 얼굴로 벌벌 떨었다.
“안녕! 다음에 봐!”
제라드는 히히 웃으며 별관으로 달려갔다.
회랑에서 기다리던 케이틀란이 제라드를 보며 웃었다.
“작별의 키스라니. 제라드, 네가 그토록 로맨티스트인 줄은 몰랐구나.”
“조세핀이 자꾸 울어서요. 저렇게 하면 안 운대요. 울지 말라고 해줬어요.”
“……뭐? 울지 말라고 말이냐?”
“네.”
“뭘 보고 그런 이상한 걸 배웠는지는 모르겠다만, 특별히 좋아하는 게 아니라면 그런 건 하지 않는 게 좋다.”
“왜요? 전 조세핀 좋아하는데.”
“음…….”
케이틀란은 난감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남녀의 정을 이해하기엔 제라드는 아직 너무 어렸다.
“나중에 설명해주마.”
9
제라드를 배웅하는 자리에 참석한 사람은 최소인원밖에 없었다. 경사스러운 자리가 아니었기에 일부러 그런 것이다.
타이온과 제인, 그리고 시종과 시녀들.
크라우드 가문의 일족을 배웅하는 자리라곤 도무지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초라한 대열이다.
“제라드 란스터, 이제 그것이 너의 이름이다.”
타이온은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무뚝뚝한 말투로 그렇게 말했다.
“제라드 란스터…….”
제라드는 그 낯선 이름을 중얼거렸다.
“너는 이제 크라우드 가문의 사람이 아니다. 네가 혹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고 해도 돌아올 곳은 여기가 아니다. 너는 이제 란스터 가문의 양자다.”
타이온은 제라드에게 할 말은 그게 끝이라는 듯, 케이틀란에게 시선을 옮겼다.
케이틀란은 공작가에 처음 오던 날의 모습 그대로였다. 청색의 로브에 금장의 배지가 눈에 띄었다.
“케이틀란 공, 잘 부탁하겠소.”
“제라드에 관한 것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곧 다시 그 이름을 들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케이틀란은 속으로 한 말은 밖으로 꺼내지 않은 채로 고개를 숙이고 마차에 올라탔다.
작별은 짧을수록 좋다.
그러나 제라드는 땅에 못이 박힌 듯, 좀처럼 발걸음을 데지 못했다.
그런 제라드에게.
“제라드 란스터, 이제 가거라.”
타이온은 다시 그렇게 말했다.
제라드는 그제야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무정한 어머니의 모습을 보았다. 그녀는 끝끝내 말 한마디 하지 않았고, 제라드를 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원망은 하지 않았다.
이건 제라드가 택한 길이었다.
‘나중에 올게요. 안녕히 계세요.’
제라드는 고개를 들어 공작가의 거대한 관저를 눈에 담았다. 그동안 이곳이 그의 세계 전부였다.
‘하지만 이제 아니야.’
제라드는 고개를 돌렸다.
케이틀란이 말했다.
이 앞엔 푸른 창공이 있노라고.
남은 건 날개를 펴고 날아오르는 일뿐이었다.
제라드는 울지도 않고 그냥 담담히 마차에 올라탔다.
그런 제라드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는 타이온이 기묘한 듯 고개를 갸웃하였다.
‘제라드가 저토록 의젓하고 점잖았던가?’
뒤늦게 다시금 제라드를 지켜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이렇게 떠나보내려니 마음이 싱숭생숭한 것이리라.
서서히 도심의 저편으로 멀어져가는 마차의 뒷모습이 더는 보이지 않을 때까지 지켜보던 타이온도 이내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공작가를 빠르게 벗어나는 마차.
베리타스는 행복한 바보를 제라드의 앞에 띄웠다.
제라드가 내색하지 않았지만, 슬프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라드는 고개를 저었다.
‘이제 그 책은 필요 없어.’
오늘 제라드는 바보 3공자 제라드 크라우드와 함께 바보 찰스도 함께 버릴 것이다.
제라드는 이제 날개를 폈다.
아직은 몹시 서툰 날갯짓이었지만, 곧 하늘을 훨훨 날아오를 것이다. 그리고 그 날갯짓에 세상은 요동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