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9화 〉 자하연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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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에피소드는 363편 '후일담에 대해서' 이후 곧바로 이어지는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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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해요."
"엇."
아카데미, 정문.
이준구와의 대화를 통해 어느 정도 마음을 정리한 박우찬은, 대뜸 날아온 말에 얼뜬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잽이라기엔 강렬하고, 훅이라기엔 직접적이며, 스트레이트라기엔 기습적인.
전성기인 무하마드 알리도 감탄할 정도로 완벽한 콤비네이션이었다.
아니, 뭔데.
박우찬은 자신도 모르게 그리 뇌까리고 말았다.
설마 이런 상황에서 선수치기를 당할 줄이야.
완전히 예상 밖이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처음 만났을 때부터……."
"잠깐, 잠깐!"
"뭔가요?"
자연스레 시작되려 하는 과거 회상을 억지로 가로막자, 자하연은 뾰루퉁한 어조로 그리 답했다.
언제나 다소 맹한 얼굴로 상황과 거리를 둔 듯 보이던 그녀가 그렇게 답하는 모습은 퍽 낯설게 느껴졌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그녀의 평소 모습을 모르는 이들이라 해도 당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긴 했다.
지나칠 정도로 적극적인 태도인 게 사실이었으니까.
오히려 이상하다 싶을 만큼 공격적인 어필이었다.
물론 그녀의 사정 또한 이해하지 못할 건 아니었다.
자그마치 반 년.
박우찬이 그녀를 구하기 위해 세계를 넘은 이후, 무려 반 년이라는 시간이 흘렀기 때문이다.
그야 다른 학생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상한 일은 아니었겠지.
마왕을 쓰러뜨린 이후로도 이 나라엔 온갖 악재가 닥쳤으니까.
오히려 반 년 사이에 어찌저찌 사태를 진정시킨 게 대단할 정도였다.
허나, 자하연의 입장에선 도저히 그렇게 생각할 수 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자하연은 자신이 박우찬의 마음을 완전히 붙잡았다고 생각했다.
단순히 우스꽝스러운 착각이었노라 단언하긴 어려운 면도 없잖아 있었다.
여하간, 박우찬은 그녀를 구하기 위해 세상을 넘어 그토록 강대한 마왕을 적대하기까지 했으니까.
오히려 지나칠 정도로 당연한 판단이었다는 평이 보다 정확할지도 모른다.
당사자인 자하연 또한 내심 그렇게 생각했다.
여하간, 그녀는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스로의 죽음조차 받아들인 감옥 너머로, 박우찬이 갑작스레 모습을 드러냈을 때의 충격.
그 뒤를 따른 기쁨과 곤혹.
여기에 이후 마왕과의 교전을 끝마치고 다시금 찾아온 박우찬을 보았을 때, 자하연은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터트리고 말았다.
다행스럽게도, 그 품 안에 뛰쳐드는 만행을 벌이지는 않았다.
어마어마한 인내심 덕분이 아니라, 단순히 자신의 몸에서 냄새가 나지는 않을까 하는 염려 때문이었지만.
마왕의 앞마당에서도 그런 고민을 할 정도였으니, 자하연이 소녀심에 들뜬 생각을 품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그 뒤의 국제 정세였다.
결과적으로 말해, 박우찬은 대한민국으로 귀환한 이후 거의 반 년 가까운 시간 동안 여유를 내지 못했다.
당연히 자하연으로서는 곤혹스러울 따름이었다.
이미 박우찬의 여인 경쟁에서 승리했노라 지레짐작하고 있던 그녀다.
이런 식으로 여유 시간이 주어지는 건 그녀에겐 도저히 유리한 전황이 아니었다.
어쩌면 그 반 년 사이 박우찬의 변심 내지 다른 여자들의 유혹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니까.
물론 자하연은 알고 있었다.
자신을 구하러 온 건 박우찬 뿐만이 아니었다.
실제로 그녀는 친구들과 교생들의 도움에도 충분한 감사의 마음을 품고 있었다.
단지.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
자하연은 고작해야 그런 이유로 박우찬의 옆자리를 누군가에게 양보할 생각이 없었다.
허면?
자그마치 반 년이라는 시간.
그 사이 숙성된 불안감.
나아가서는, 감옥 안에서도 끊임없이 그녀에게 말을 걸던 내심의 미혹까지.
이러한 사정이 결합된 지금, 자하연은 차라리 저돌적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적극적이었다.
방금 전 발언만 해도 마찬가지였다.
만에 하나, 박우찬이 그녀를 부른 게 이별을 통고하기 위해서라면?
다른 학생들과 달리, 그녀는 아직도 박우찬과 같은 하숙집에서 머무르고 있었다.
그러나.
신세계 질서는 이미 무너졌다.
그 종주인 마왕 또한 쓰러졌다.
이런 상황 속에서, 더 이상 자하연은 박우찬과 함께 있을 만한 명분이 없었다.
당연히 객관적으로는 좋은 일이겠지.
박우찬이 위험에 처할 일도 없다는 건 그녀로서도 반길 만한 이야기였다.
단지, 여심이란 꼭 그렇지도 않은 법이라.
반대로 말하자면, 그건 이 연애 전선에서 본디 그녀가 지니고 있던 무기를 포기한다는 소리나 진배없었다.
자연스레 자하연도 다급해질 수밖에 없었다.
막말로, 지금 박우찬이 그녀를 부른 데에 다른 이유가 있다면?
신세계 질서는 무너졌다.
그러니 더 이상 너랑 같은 지붕 아래에서 사는 건 어려울 듯싶다.
애초에 선생님도 슬슬 가정을 꾸려야 하지 않겠냐.
만약 그런 말이 박우찬의 입에서 나온다면.
혹여 자신을 부른 게 그런 말을 전하기 위해서라면, 자하연은 자신이 어떻게 반응할지 도저히 알지 못했다.
말하자면, 방금 전부터 쉴새없이 쏟아낸 공세는 그런 의혹을 덮어씌우기 위한 과정.
어쩌면 마음 속으로 다른 사람을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박우찬을 붙잡기 위한 행동이었던 셈이다.
물론 당사자인 박우찬으로선 곤란할 뿐이었다.
아니, 자하연의 예상처럼 정말로 다른 생각을 품고 있었다면 또 모를까.
이런저런 말을 준비했던 박우찬에겐 오히려 자하연이 선수를 친 셈이었으니까.
다만.
피식, 하고 치밀어오르는 헛웃음까지 참을 수는 없었다.
'귀엽네.'
어쩔 수 없었다.
여하간, 박우찬도 바보는 아니다.
어째서 자하연이 이런 행동을 벌이고 있는 건지, 눈치채지 못하기도 힘들 정도였으니까.
말마따나, 이해할 수는 있었다.
하연이는 본래부터 저런 성격이었으니까.
자신이 박우찬을 좋아하는 점과 별개로, 그 역은 생각하지 못한다.
아니, 박우찬이 자신을 좋아할 이유가 있을지 그조차 확신할 수 없다.
묘한 달관함 속에 섞인 체념.
한 걸음 세상과 거리를 두고 있는 듯한 태도는, 바야흐로 자하연의 전매특허라 할 법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박우찬으로선 어이가 없었던 게 사실이지만.
아니, 정말로 내가 마음 하나 없는 애 한 명 구하려고 마왕의 영지까지 침공할 놈으로 보이나?
좋아할 만한 이유가 없기는커녕, 자하연의 외모만 보고도 두근거린 적이 있다 자부하는 박우찬으로선 헛웃음이 나올 따름이었다.
문제는, 자하연이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녀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자신이 알고 있는 박우찬이라면, 정말로 별다른 연 하나 없는 학생 한 명을 위해 마왕을 적대할 만한 사람이라고.
도대체 자신의 어딜 보고 그런 생각을 하는 건진 모르겠지만, 박우찬으로선 떨떠름할 뿐이다.
뭐, 설령 얼굴 하나 모르는 학생이라 해도 쉽게 포기하지는 않겠지.
어쩌면 마왕에게 칼을 겨눌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건 박우찬이 그녀가 생각하는 만큼 대단한 인물이어서가 아니다.
만에 하나 자신이 손을 털었다가 누군가 그대로 죽어버린다면 아무래도 뒷맛이 찝찝할 테니까.
하는 김에 몬스터도 죽일 수 있으면 바랄 나위 없을 테니까.
만약 박우찬이 비슷한 상황에서 나서게 된다면, 십중팔구 그런 이유 때문이겠지.
박우찬은 종교화 속에 등장하는 성인 따위가 아니다.
오히려 그 본심은 소시민에 가까운 소심함 쪽에 있으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하연은 박우찬이 그런 사람이라고 확신했다.
자신이 특별한 게 아니라, 박우찬이라면 누구에게나 그럴 거라고 믿었다.
첫 만남 때의 외상이 들이닥친 탓일까.
사실대로 말하자면, 박우찬이 그녀를 거둔 건 어디까지나 원활하게 몬스터를 공급받기 위해서.
제 2차 대침공이 종식된 이후, 처음으로 사냥한 몬스터들의 피륙이 달콤하게 느껴졌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토록 적나라한 이야기를 면전에서 늘어놓을 수도 없으니.
자하연을 거둘 당시, 박우찬은 그런 사연에 대해선 농담처럼 얼버무리고는 했다.
어쩌면 자하연이 박우찬에게 환상을 가진 건 그 탓일지도 모르지.
누군가는 맹신에 가깝다고 평할지도 모르는 자하연의 믿음은, 바로 거기에서부터 시작되었으리라.
그리고.
처음엔 단순히 귀찮아서 둘러댔을 뿐인 관계.
어디까지나 몬스터를 끌어들이기 위한 미끼.
거기에서부터 시작된 거짓말은, 어느덧 박우찬 본인에게도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자신의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도, 한 점의 흐림 없이 박우찬을 믿던 소녀.
만약 자신이 구해달라고 말을 꺼내면, 스스로의 몸도 돌보지 않고 달려들어 종래엔 파멸할지도 모른다는 믿음.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까지 숨기지는 못했던 기쁨까지.
마왕은 박우찬에게 일종의 평화 협정을 제안했지만, 박우찬은 그 제안을 망설임 없이 거절했다.
조건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거나 하는 이유 이전에, 자신을 향한 그 믿음을 저버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박우찬은 바보가 아니었다.
자신이 품은 그 마음이, 단순한 부담감이나 책무감에서 왔다고 착각할 정도로 얼간이도 아니다.
아니, 오히려 지나칠 정도로 어리숙한 면이 있다는 걸 그는 인정해야만 했다.
왜냐하면 그 당시 박우찬이 마왕의 제안을 거절한 이유는 단 하나.
상대가 몬스터라는 점을 포함해도,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었으니까.
남자란 몇 살이 되어도 자신이 마음에 둔 여자 앞에선 허세를 부리고 싶은 법이었다.
말하자면, 마지막 싸움에 있어 박우찬이 그렇게 행동할 수 있었던 건 전적으로 그녀 덕분이었다.
만에 하나, 그녀가 자신을 구해달라 부탁했더라면.
박우찬은 짧은 투덜거림 끝에 그녀를 구하고자 움직였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까지 자하연은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다.
때문에.
당사자로부터 부탁을 받았다는 알기 쉬운 명분 대신, 박우찬은 스스로의 마음을 시인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러므로.
박우찬은 자하연의 그런 태도가 정말로 귀엽다 생각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건 아니라고 알 수 있었다.
여하간, 그녀의 연심은 박우찬의 뻔뻔한 거짓말 위에 만들어진 물건이었기 때문이다.
언젠가 그런 거짓말을 낱낱이 드러내야 할 때가 오리라.
언제나 거짓말을 할 순 없다는 실리적인 이유 외에도.
그게 서로에 대한 예의였다.
박우찬이 헛웃음을 터트린 이유 또한 바로 거기에 있었다.
만약 그렇게 되면 자하연은 어떻게 나올까.
환멸할까? 싫어할까?
어느 쪽이든, 지금처럼 환상 속에 사는 쪽보다야 반응이 시들할지도 모른다.
요컨대, 박우찬이 이렇게 따로 자리를 잡은 건 자하연과 비슷한 이유였다.
저 마음이 언제 시들지 모르니까.
저 마음이 나를 향하고 있는 건지 확신할 수 없으니까.
그래서, 확신을 원했다.
박우찬이 자하연을 원하는 만큼, 자하연도 박우찬을 원한다는 확신을.
만들어진 박우찬의 이미지가 아닌, 그라는 개인을 원하고 있다는 믿음을.
그의 거짓말에서 시작된 이 관계 끝에서도, 박우찬은 무언가 결실을 맺는 게 있다 믿고 싶었다.
"그래. 그럼 앞으로 한 번만 말할 테니까, 잘 듣고 생각해."
……당연한 이야기지만, 자하연이 생각하기엔 터무니없는 말일 뿐이었다.
애시당초 박우찬이 자하연에게 그런 감정을 품은 건 어째서였던가.
처음엔 단순히 몬스터들을 끌어들이는 미끼일 뿐이라 생각했던 소녀에게, 박우찬은 마음을 두었다.
그녀와 함께 보낸 시간 속에서 자연스럽게 싹튼 그 감정은, 딱히 특별한 게 아니었다.
허면?
자하연이라고 해서 다를 리가 있을까.
더 이상 그녀는 무언가 이유가 있어서 박우찬을 좋아하는 게 아니었다.
물론 처음 자세한 설명을 들으면 맥빠진 웃음을 흘릴지도 모르지.
그렇지만.
이유가 있어서 누군가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 박우찬을 좋아하기에 그의 행동 또한 좋아할 수 있는 지금.
만약 박우찬이 자신의 불안감을 털어놓았다면, 자하연은 반대로 망설임 없이 단언했으리라.
박우찬이 자하연에게 그러했듯, 그녀 또한 박우찬을 받아들일 수 있으리라고.
아니, 그 뿐이랴.
만에 하나 그로 인해 그녀와 박우찬 사이에 있던 모든 관계가 사라진다 하더라도.
신세계 질서가 무너져, 더 이상 박우찬이 그녀를 보호할 필요가 없고.
졸업식을 앞두어, 더 이상 자하연이 그의 제자가 아니게 되었듯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하연은 박우찬에게 다시 한 번 반할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사람이란 퍽 합리적인 생물이 아니라, 설령 그렇다 한들 확답을 듣고 싶어 하는 법이라.
무언가 맥빠지는 기분으로 작금의 상황을 직면한 박우찬은, 멋쩍은 기분과 함께 슬쩍 시선을 하늘로 던졌다.
……조로아스터 교에 따르면, 마왕은 곧 세상에 끝을 내리는 존재.
때문에, 마왕이 부활하면 세상은 겨울에 잠긴다.
그리고 그 마왕이 봉인된 날을, 조로아스터 교는 춘절로써 기리니.
바야흐로 마왕이 쓰러진 입춘에 서서, 박우찬은 입을 열기로 했다.
앞으로 다가오는 봄.
겨울을 넘어, 그녀가 자신과 함께하리라는 확신을 얻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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