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5화 〉 이예은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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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에피소드는 363편 '후일담에 대해서' 이후 곧바로 이어지는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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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예은이 박우찬을 처음으로 보았을 때, 실망스럽지 않았다고 하면 단순히 조악한 거짓말이 되리라.
당연한 이야기였다.
애시당초 박우찬은 여러모로 사랑받을 만한 성격도 아니었으니까.
게다가, 이예은에겐 더더욱 그랬다.
당시 그녀는 말도 안 되는 아집에 빠져 있었으니까.
하물며, 자세한 사정을 모르던 다른 교사들과 달리 박우찬은 그녀의 오빠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
즉, 인류 최강의 전법을 눈 앞에서 부정한 일개 교사처럼 보일 수밖에 없는 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무작정 날을 세우는 그녀를 상대해야 했던 박우찬은 도대체 어떤 기분이었을까.
이예은으로서는 짐작조차 하기 힘들었다.
단지.
한 가지 확실한 점이 있다면, 박우찬이 그녀를 저버리지는 않았단 점이었다.
볼썽사나운 태도라거나, 아니면 귀찮았기 때문이라거나.
어느 쪽이든, 박우찬은 적당한 핑계를 대고 이예은을 내버리는 대신 그녀의 눈높이에 맞춰 이야기를 건넸다.
……그래.
말하자면, 당시 박우찬이 그녀를 바라보던 시선엔 노골적인 걱정이 담겨 있었다.
인류 최강인 이준구에게 줄을 대보려 하거나, 그녀라는 재능에 눈독을 들이거나.
그런 속물적인 감정이 아니라, 순수하게 그녀가 걱정되었기 때문에.
박우찬은 이토록 귀찮은 학생을 상대로도 굳이 내색하지 않고 이리저리 손을 써 주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허울 좋은 명성에 눈이 가려 허우적대던 그녀가 각종 현실을 직시하게 된 건 바로 그 때문이었다.
자신이 헌터가 되고 싶은 게 아니라, 무작정 오빠를 추종하고 있을 뿐이라는 사실이 눈 앞에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을 다잡자니, 눈 앞에는 헌터들이 직면해야 할 현실이 있었다.
처음으로 맞닥뜨린 고랭크 몬스터.
단순히 시험만 잘 보면 그만이라 말할 수 없는 커리큘럼.
뒷세계에서 꿈틀거리던 음모.
남해 지부에서 있었던 일.
그리고.
설령 자신이 최선을 다한다 해도, 이미 지나버린 일은 어떻게 할 수 없다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까지.
이예은은 박우찬에게 단순한 지식 뿐만이 아닌, 그 이상의 가르침을 받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처음에는 불만도 있었다.
어째서 내게 이런 사실을 보여주는 걸까.
다른 학생들처럼 그저 막연하게, 헌터라는 직업에 대한 동경만 가지고 살 수는 없었던 걸까…….
적반하장이었지만, 처음으로 눈에 담았던 남해 지부의 참사는 무심코 그런 생각을 떠올리게 하기 충분했다.
물론 알고 있었다.
그녀는 이준구의 여동생이었고, 그 이상으로 재능 있는 사냥꾼이었으니까.
단순한 기선 제압이나 업계의 현실이라는 이름으로 괴롭히려는 건 그야 아니었을 테지.
오히려 그녀의 오라비에게 막연히 가지고 있던 동경이 흔들리던 상황 속.
차라리 내키지 않으면 관두라던 말대로, 박우찬은 그녀에게 선택지를 주었을 뿐이리라.
업계의 현실. 영웅의 여동생이라는 이름값 너머에 감추어져 있던 실상.
무작정 오빠의 뒤를 좇던 그녀가, 정말로 사냥꾼이 될 수 있을지.
말하자면 그녀는 스스로에게 자문할 기회를 얻은 셈이었다.
……뭐, 박우찬에겐 그리 특별한 일도 아니었겠지만.
애시당초 처음부터 그녀의 오빠인 이준구와 알던 사이인 박우찬이다.
이제 와서 그녀에게 잘 보이려 할 필요도 없었을 테고.
무엇보다, 오빠인 이준구에게도 막말을 일삼는 사람이니.
박우찬이 이예은을 상대로 이래저래 손을 쓴 이유도 단 하나.
마침 자신의 반에 그녀가 있었기 때문이리라.
어쩌면 이준구의 여동생이라는 사실 덕분에 비교적 먼저 눈에 띄었을지는 모르겠지만.
반대로 말하자면, 딱 거기까지겠지.
이예은이 순수하게 박우찬을 존경할 수 있었던 이유 또한 바로 그런 사정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켜켜이 쌓인 감정이 단순한 존경을 넘어서게 된 건 과연 언제였던가.
신세계 질서가 자신을 납치했을 때?
아니면, 스스로의 한계를 깨달았을 때?
어느 쪽이든, 박우찬을 향한 그녀의 감정은 짙어지면 짙어졌지 약해지지는 않았다.
때문에.
박우찬의 연락을 받고 교실까지 불려온 지금.
이예은은 내심 각오를 다지고 있었다.
졸업식 당일, 갑자기 그녀를 따로 불러낸 박우찬.
언뜻 보면 퍽 로맨틱한 장면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정 반대일 수도 있었다.
예를 들어, 그녀를 비롯한 다른 학생들에게 먼저 거절을 통보할 생각이라거나.
담임이 내심 그녀들의 마음을 부담스럽게 여긴다는 점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예은은 내심 동요하는 마음을 내색하지 않고자 부던히 애를 썼다.
박우찬은 단순히 그녀에게 가장 먼저 사의를 표하고자 불러냈을 뿐일지도 모른다.
아니, 그럴 가능성이 높다.
혹여라도 상처받는 일 없도록, 박우찬이 그녀에게 부담감을 가지는 일 없도록.
이예은은 스스로에게 연신 그런 말을 되내었고, 덕분에 교실 문을 열 때 즈음엔 새침한 얼굴을 유지할 수 있었다.
물론 실제로는 단순한 착각이었다.
박우찬이 보기에, 이예은의 표정은 간신히 멀쩡한 척 행세하고 있을 뿐이었으니까.
교실이었다.
꼬박 1년.
아카데미가 문을 닫은 사이, 이예은을 비롯한 일행들은 제대로 된 학창 생활을 보내지 못했다.
때문에.
박우찬이 교실에서 보자는 메세지를 보냈을 때, 이예은의 발걸음이 향한 건 자연스레 이 곳.
재작년에 시간을 보냈던 2학년 교실이었다.
"부르셨어요?"
"빨리 왔네."
짐짓 태연하게, 박우찬은 그녀를 향해 인사를 건넸다.
솔직히 말하자면, 태연하지는 않았다.
함께 시간을 보냈던 2학년 교실.
분명히 그렇게 말했고, 그 또한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녀와 함께 여기에 있으면, 재작년에 교실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지 않기도 힘들었다.
자신도 모르게 입가로 향하려던 손을 조심스레 억누르는 박우찬.
그런 그를 향해, 이예은은 팔짱을 낀 채 여전히 새침한 시선을 보냈다.
"무슨 일이신가요?"
짐짓 자신은 바쁘다고 젠체하는 듯한 어조였다.
물론 실제로는 단순한 허세일 뿐이었다.
졸업식 일정에 맞추어 모든 학생들이 강당으로 걸음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하필이면 박우찬이 그녀를 여기까지 호출한 이유 또한 바로 거기에 있었다.
적어도 여기서라면 방해받을 일은 없을 테니까.
……대답은 이미 정해졌다.
그러나.
눈 앞에서 저러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박우찬은 무심코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초조하게 손톱을 씹는 이예은의 모습 자체가 그에게는 낯설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박우찬이 알고 있는 이예은은 언제나 자신만만하고 당찬, 그리고 그런 사실이 지극히 자연스러운 아가씨였으니까.
윤하처럼 쾌활한 건 아니다.
하연이처럼 언제나 사건에서 한 걸음 거리를 두고 있는 느낌도 아니다.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이 넘치고, 그런 사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는.
박우찬이 알고 있는 이예은은 바로 그런 학생이었다.
그러므로.
지금 저렇게 여과 없이 감정을 드러내고 있는 모습은, 박우찬이 보기에도 신선할 수밖에.
무엇보다.
오히려 그렇기에 더더욱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점도 있다.
불안한 걸까. 당황스러운 걸까.
저 아가씨도, 이런 일 앞에선 스스로를 과신할 수 없는 걸까.
허면?
마치 평범한 여고생처럼 스스로를 애태우고 있는 그 모습에,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친구 한 명만 있어도 목숨을 걸기엔 충분한 일인데, 좋아하는 사람에게 인생을 배팅하는 게 이상한 일인가요?"
그 날.
별다른 이유나 제대로 된 승산도 없이, 마왕의 뒤를 쫓으려던 박우찬에게 그녀는 그리 말했다.
……자신이 선택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머잖아 남남이 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감정을 위해 스스로의 목숨을 배팅할 수 있는 그 태도.
혹자는 무모하다고, 지나치게 감정적인 면모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
허나.
이런 상황을 앞두고도 자신이 베푼 은혜를 거론조차 하지 않는 그 모습을 눈에 담는다.
어쩌면 자신이 은혜를 입혔다고 생각조차 하지 않는 듯한 그 모습을 바라본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자신이 불편하지 않도록, 매달리거나 애원하는 말 한 마디 없는 그녀의 태도에 박우찬은 내심 고개를 저었다.
차라리 존경스러울 정도로 완고한 태도.
적어도 자신은 저렇게 살 수 없으리라 확신이 드는 그 모습은, 오히려 고결하다 표현해야 할지도 모른다.
때문에.
박우찬 또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여태까지 상대가 이준구의 여동생이라는 점 탓에 애써 외면했던 사실.
그런 점을 좋아한다.
결국 아는 사이라서, 어쩐지 눈에 밟혀서.
고작해야 그런 이유로 나선 자신과 달리, 목숨을 걸 가치가 충분하다고 말하던 그 모습을.
자신으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그 삶의 자세가 눈부시다고 생각했다.
일찍이 이예은이 박우찬을 보고 그리 생각했듯이.
자신의 오빠가 아닌 박우찬의 뒤를 쫓기로 결심했던 이예은처럼, 박우찬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본인처럼 되먹지 못한 사냥꾼 대신, 저런 계집애가 보답받을 수 있는 세상을 바라는 건 이상한 일일까.
모르겠다.
단지.
한 가지 확실한 점이 있다면, 설령 이상한 일이라 해도 더 이상 이 마음은 멈출 수 없다는 거겠지.
……분명히 말하건대, 이예은은 그럭저럭 재능이 있는 편이다.
틀림없이 이 시대에서도 별다른 문제 없이 보통 사람 이상으로 아늑한 삶을 누릴 수 있을 터.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나칠 정도로 드높은 이상은, 언젠가 벽이 되어 그녀의 앞을 가로막게 되리라.
무릎이 꺾일 정도로 가혹한 시련 또한 드물지 않겠지.
때문에.
박우찬은 그 옆에서 그녀를 지탱해주고 싶었다.
그 마음에 보답이 있기를 바랐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그녀의 그런 삶의 태도에 도움이 되고 싶었다.
뭐, 요컨대.
"선생님?"
"예은아."
"네?"
"좋아한다."
"……네?"
박우찬이 이예은을 좋아한다는 소리다.
언젠가 이예은이 말했듯이, 이번에는 자신 쪽에서 먼저.
사냥꾼과 제자는, 한 마디 말을 사이에 두고 그렇게 서로를 마주보며 서 있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화아악 하고 이예은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설마, 라고 생각한 적은 있었겠지.
혹시나, 하고 기대하는 마음 또한 있었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너무 엄격하게 예은이를 대했던 걸까.
박우찬은 자신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했다.
짐짓 괜찮다고, 기대하지 않는다고.
스스로에게 그리 다독이던 감정의 둑이, 펑 하고 터져버린 듯한 모습이었다.
우는 듯 웃는 듯, 시시각각 표정이 변한다.
하늘을 닮은 눈동자가 불현듯 물기를 머금는다.
조르륵 하고 흐르는 눈물의 투명함만큼, 박우찬은 당황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윽고 이예은은 천천히 웃음을 터트렸다.
물론 박우찬의 당혹감은 점점 더 짙어질 뿐이었다.
당연한 이야기였다.
방금 전, 앞으로 그녀의 옆에서 함께하며 계속 돕고 싶다 말하기도 잠깐.
고작해야 그 잠깐 사이에, 저토록 행복한 표정을 지을 줄이야.
마치 무언가 보상이라도 받은 듯한 그 낯빛에, 박우찬은 자신도 모르게 헛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동시에.
문득 아무래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놀랍지만, 그건 박우찬에게도 퍽 낯선 감각이었다.
평소라면 맥빠지는 녀석이라며 코웃음을 쳤겠지.
어쩌면 몇 마디 비아냥을 던졌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달랐다.
자신의 생각과는 사뭇 다른 그 모습을 보면서도, 괜찮다 생각하는 스스로가 있다.
스스로가 무어라 입을 열기도 전, 마냥 행복한 듯 미소짓는 그녀의 모습이 나쁘지 않다 생각하는 자신이 있다.
박우찬이라는 개인과 별개로, 그녀가 기뻐한다는 사실에 즐거움을 느끼는 본인이 있다──.
낯설고도 흐뭇한 감각.
거기에 몸을 맡기며, 박우찬은 슬쩍 운을 띄웠다.
"그래서, 대답은?"
"앗, 네……!!"
잔뜩 물기가 스며든 목소리.
만약 지금이라면, 설령 그녀가 자신을 거부하더라도 만면에 미소를 지을 수 있겠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순수한 마음으로 그녀의 행복을 기원할 수 있으리라.
박우찬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물론 실제로는 어떨지 모르는 법이다.
아직 그녀의 말을 듣지 못한 지금도, 대답을 알아채는 건 어렵지 않았으니까.
덕분에 박우찬 또한 느긋한 마음으로 대답을 기다릴 수 있었다.
그리고.
"저도……."
누구 하나 찾아오는 일 없을 교실 속.
이예은의 대답이 둘 사이의 거리감을 온화하게 어루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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