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2화 〉 그냥 몬스터만 죽이고 싶음
* * *
찰칵, 하는 소리와 함께 자하연의 손발을 묶고 있던 구속구가 떨어져나갔다.
천 개의 마법으로 보강된 사슬이라 한들,지금의 자하연이라면 충분한 시간을 들여 벗어날 수 있었다.
첫 번째 마왕을 만나며 다시 한 번 상승한 마력 덕분이다.
사악한 용과 한 쌍을 이루는, 추악한 용들의 어머니.
자하연의 마력은 이미 그 영역에 도달한 상태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다.
막말로, 그녀가 사슬을 벗어던진다 한들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홀로 게이트를 넘어 돌아갈 수도 없다.
또한, 마왕의 감시를 피해 도망칠 수도 없으리라.
때문에.
자하연은 스스로의 죽음을 받아들였다.
당연히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다른 선택지가 있지도 않았다.
그렇기에.
사실 지금 이렇게 사슬을 풀어낸 데에도 별다른 이유가 있지는 않았다.
단지.
마음엔 변화가 생겼다.
박우찬 덕분이었다.
접어두었던 기대. 혹시나 하는 속내.
어느 쪽이든, 박우찬의 모습을 보고서 얼어붙었던 심정이 녹아내리기라도 한 걸까.
슬쩍 바라본 바깥의 풍경은, 알지 못할 땅울림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지금쯤 박우찬은 마왕과 싸우고 있겠지.
거기에 발을 들일 수 없다는 사실이 분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위해 싸우는 그 모습에 걱정이 앞선다.
동시에, 어쩔 수 없이 뛰는 마음까지.
그러므로, 자하연은 손을 멈추지 않았다.
이기는 건 박우찬이다.
때문에.
만일 그가 마왕을 쓰러뜨리고 여기까지 자신을 데리러 온다면.
방금 전과 달리, 곧바로 그 품에 안길 수 있도록.
자하연은 부지런히 구속구와 비슷한 마법이 걸린 쇠창살 쪽을 향해 손을 움직였다.
*
한 호흡.
고작해야 한 호흡이지만, 치명적인 한 호흡.
이 전장에서 처음으로, 두 개의 머리가 온전히 박우찬을 겨누었다.
저주에 맞아 튕겨져나간 학생들이 다시금 달려들 시간 따위는 없었다.
용의 숨결이란 말 그대로 날숨.
말 그대로 용의 심장, 드래곤 하트에서 분출되는 마력을 담아 토해내는 호흡이다.
고작해야 한 호흡밖에 필요하지 않은 동작을 앞두고, 박우찬의 제자들이 마왕을 앞지를 수 있을 리 없었다.
아니, 설령 그렇지 않다 해도 마찬가지였다.
마왕은 철두철미했다.
호흡을 토하기 위해 숨을 들이쉬며, 거룡은 다시 한 번 마법진을 전개했다.
두말할 필요조차 없는 대마법.
천지가 떨리고, 마력의 흐름이 미쳐 날뛴다.
쏟아진 마력광이 다시 한 번 대지를 뒤엎었다.
만에 하나 그 자리에 산맥이 있었다면 그대로 사라지지는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단순히 산맥을 주저앉힐 만한 위력이었다는 소리가 아니다.
말 그대로, 산맥이 있는 대지를 들어 그대로 뒤집어엎을 정도로 막대하면서도 섬세한 파괴 행위.
절묘하기 짝이 없는 폭격은, 전장에 명확한 선을 그었다.
"꺄아악!!"
아득하게 들려오는 비명도, 마치 먼 나라에서 들리는 자장가처럼 느껴지는 가운데.
박우찬은 어느덧 자신 또한 방금 전의 폭격에 휘말려 하늘을 날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게 바로 마왕이 선택한 필살의 수.
박우찬을 죽여버리기 위해 조성한 상황이었다.
동시에.
대기가 준동한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격렬하게 준동하던 대기가, 그 속에 깃든 마력이 한 순간에 정지했다.
용의 심장이 병행된 들숨이란 그토록 격렬한 물건이었다.
주변 일대의 마력을 장악하고, 한 순간에 빨아들인다.
축지의 원리는 대기에 섞여 흐르는 마력을 밟아, 그 흐름에 올라타는 기술.
이런 상황이라면 축지를 사용할 수도 없었다.
때문에.
마왕 또한 필살이라 자부하고 이 상황을 연출한 거겠지.
이윽고, 쩌억 하는 소리와 함께 용들의 아가리가 열렸다.
마치 포문처럼 박우찬을 겨누는 목울대 너머로, 넘실거리는 마력이 맺혀있는 게 보였다.
그리고.
'뒈졌다.'
철컥, 쇳소리와 함께 박우찬 또한 칼을 휘어잡았다.
한 손으로 대검의 손아귀를 거머쥐자, 거기에 맞추어 작용한 마법이 대검의 무게를 알맞게 조정했다.
덕분에 한 손이 자유롭게 풀린 박우찬은, 그대로 얼굴에 쓴 방독면을 벗어던졌다.
물론 바보같은 행동이었다.
주변의 독기를 한 차례 걸러내던 방독면이 사라진 이상, 머잖아 독기가 그 몸을 침식할 테지.
상관 없다.
지금 이 상황이 갖추어진 이상, 승부는 단기 결전.
독기 따위를 염려할 시간 따위는 없을 테니까.
조건은 나쁘지 않았다.
설령 시그니처를 가한다 해도, 마왕이라면 그 점을 역으로 이용해 스스로를 회복할 수 있다.
초대형 게이트 발생 당시 겪었던 사태를 떠올리며, 박우찬은 넓게 시선을 두었다.
허면?
지금 이 자리에서 마왕의 방비를 돌파할 수 있는 건?
마왕이 회복한 직후, 곧바로 마왕을 추격할 수 있는 건 이 전장에서도 단 둘.
박우찬과 마왕 본인 뿐이었다.
때문에.
'노리는 건, 지금!!'
서걱!!
박우찬의 칼끝이 화려하게 허공을 그었다.
초승달처럼 휘어진 칼날이, 하늘에 붓을 덧칠한다.
그리고.
그렇게 작렬한 궤적은, 마왕의 목을 세로로 양단했다.
그 내부에 있는 주머니.
숨결의 핵이 되는, 마력을 기폭시키는 발화체까지.
당연히 다음 순간 일어난 건 막대한 양의 폭발이었다.
퍼어어어엉!!
본디 용의 숨결이라는 격류가 되어 쏟아졌어야 할 마력이, 발화체와 만나 그대로 유폭한다.
확실히 마왕은 강하다.
그 비늘은 신들의 대장장이가 단조한 방패와 같고, 그 마력은 대해와 같아 끝을 모르겠지.
바야흐로 전설 속 용과 같다.
허나.
반대로 말하자면, 마왕 또한 생물.
용이라는 생물이 지닌 강점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면, 약점 또한 마찬가지다.
때문에.
시그니처에 의한 전신 양단.
나아가서는, 내부에서 그 용의 숨결이 유폭한 지금.
박우찬은 감히 승리를 확신할 수 있었다.
마왕이 내뱉는 용의 숨결은, 한 번으로 밤하늘의 1/3을 지워 없앨 수 있다 일컬어지는 물건.
그만한 위력을 스스로의 몸으로 감내했다면, 당연히 쓰러뜨릴 수 있으리라고…….
"애미."
그리고.
다음 순간, 박우찬은 자신을 향해 들끓는 화염의 포화를 눈 앞에서 확인했다.
*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박우찬의 두뇌조차 그 해답을 순식간에 찾아낼 수는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박우찬이 예상한 건 그야말로 예전과 같이, 시그니처의 상처를 곧바로 회복하기 위해 준비된 특제 마법진 따위였다.
그러므로.
그렇게 회복한 마왕을 뒤이어 쓰러뜨리기 위해, 용의 숨결 자체를 유폭.
이후 스스로의 숨결에 당한 마왕에게 마무리를 꽂을 생각이었으니까.
하지만.
마왕 또한 그 정도는 알고 있었다.
일찍이 마왕은 초대형 게이트를 통해 박우찬의 시그니처에 대처하는 방법을 선보인 적 있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다시 말해, 마왕은 박우찬의 시그니처를 대처하기 위한 두 번째 방법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렇다 해도, 그만한 물건이 상대라면 뚝딱 손쉽게 해결책을 내놓을 수는 없다.
그러나.
예상하는 건 가능하다.
저번에 그런 수를 보여주었던 만큼, 박우찬이라는 사냥꾼도 알고 있을 테지.
고작해야 일격으로 마왕을 쓰러뜨릴 수는 없다.
허면?
지금 이 전장에서 마왕을 일격에 쓰러뜨릴 수 있을 만한 공격력이 존재하는 건 단 두 명.
박우찬과 마왕 그 자신 뿐이다.
여기에 마왕 자신이 준비하고 있던 수를 고려하면, 경계해야 할 건 단 하나.
용의 숨결이 역으로 자신에게 해가 되는 상황이리라.
거기까지 예상할 수 있다면, 준비해야 할 술식 또한 손쉬운 이야기였다.
……애시당초 박우찬이 마왕을 상대로 장기전을 포기한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학생들이 마왕의 공세를 버틸 수 있는 시간 상의 한계도 있다.
그렇지만, 근본적으로는 마왕이 장기전으로 상대할 수 없는 상대였던 탓이다.
그래.
마왕을 포함한 페르시아 신화의 용들은, 독을 자신의 힘으로 삼는다.
그리고.
마왕의 숨결은, 하늘의 별을 지워 없애고 대지를 메마르게 하는 독소 그 자체.
세상을 좀먹는 역병이었다.
즉, 마왕은 박우찬의 시그니처에서 회복한 직후 유폭에 휩쓸린 게 아니다.
시그니처에 당해 죽음을 맞이하기 직전,유폭된 독소를 통해 회복했다고 해야 하겠지.
좌우의 머리로 박우찬의 제자들을 견제하고, 마지막 머리로 마법을 부려 내부에서 유폭되던 독소를 갈무리한다.
결과적으로, 시그니처에 당한 직후.
마찬가지로 시그니처에 휩쓸린 마법진을 재조합해 독소를 빨아들인 마왕은 순식간에 부활했다.
허면, 그 뒤에 취해야 할 행동 또한 간단했다.
시그니처를 사용한 직후.
그 반동인지 무엇 때문인지, 아직도 무방비하게 놓인 박우찬을 향해 용들의 머리는 다시 한 번 숨결을 내뱉은 것이다.
퍼부어지는 마력의 격류는, 차라리 폭포수를 닮았다.
도저히 항거할 수 없는 절대적인 폭력이, 박우찬이 있던 자리를 덮쳤다.
마지막으로 단말마 비슷하게 박우찬이 내뱉던 욕설조차, 그대로 파묻혀 사라진다.
그 사실을 확인하고서, 마왕은 절그럭거리며 비늘을 울렸다.
세상조차 불사르는 마왕이 울리는 승전보.
세상에 절망과 사악을 퍼트리는 존재로서 지닌 본능과도 같은 행위가, 전장을 울렸다.
한 순간.
고작해야 한 순간에 갈린 승부를 두고서, 마왕은 무엇을 생각하였는가.
승리의 여운인가?
아니면, 패자들을 조롱하기 위한 요설인가?
……아니.
그 순간, 마왕이 느낀 건 모종의 위화감이었다.
대지가 뒤집히며 피어오른 흙먼지 너머.
설령 맹인이라 해도 알아챌 수 있을 격렬한 마력의 파동에도 불구하고, 그 너머에선 어떠한 절망도 묻어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단순한 맹신, 자신들의 스승이라면 괜찮을 거라는 맹목적인 믿음인가?
아니, 그런 게 아니었다.
적어도 한 명.
방금 전까지 마왕 자신을 견제하던 여자들의 중심.
가끔은 다른 이들을 회복시키고, 가끔은 다른 이들을 보조하던 붉은 머리의 여자.
이름 모를 여신은, 명백한 확신을 품고 있었다.
때문에.
한 순간, 마왕은 주저했다.
도대체 방금 전 자신이 무엇을 놓쳤는지.
어째서 저 여자는 저토록 짙은 확신을 품고 있는 건지.
사냥꾼인 박우찬조차 죽음을 직감할 수밖에 없던 상황에서, 판을 뒤집을 변수는 무엇이 있는지──.
당연히, 해답 따위는 나오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애시당초 그녀, 티아마트가 품은 자신감의 근거 따위는 일행들 중 어느 누구도 들은 적이 없었으니까.
심지어 당사자인 박우찬 또한 마찬가지였다.
거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예를 들면, 당시 박우찬에게 이런 선물을 가지고 생색내기 부끄럽다 생각했던 티아마트 본인의 소녀심.
혹은, 박우찬이 어쩌면 자신의 선물이라는 이유로무작정 외면하지는 않을까 싶었던 걱정.
무엇보다.
마지막으로, 상대방은 홀로 세상을 멸망시킬 수 있다는 규격 외 등급의 몬스터.
사람을 해하기 위해 천 가지 기술을 개발했다는 마왕이다.
때문에.
만에 하나 박우찬이 이를 눈치채고 전략에 짜넣을 경우, 그조차 예측하지 않을까 하는 염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답이었다.
한 순간.
마왕의 사고에 지연이 생긴 틈을 타, 폭풍이 휘몰아쳤다.
아니, 폭풍이 아니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주변에 들끓던 대기, 용의 숨결이 남긴 잔재를 밟고 튀어오르는 그림자.
두말할 필요도 없이, 거기에 있는 건 박우찬이었다.
물론 멀쩡하지는 않았다.
용의 숨결이 내포한 독소가 그 몸을 쑤시는 게 느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디 제대로 된 뼛가루 하나 남기지 못하고 증발할 일격 속에서, 박우찬은 아직 그 형체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 사실에 의문을 품는다.
그렇지만.
박우찬은 망설이지 않았다.
사고. 생각.
온갖 수단과 기술을 동원해, 적을 말살하는 마신.
거기에 비해, 박우찬이 마지막에 믿는 건 단 하나.
스스로의 직감 뿐이다.
그러므로.
예상 외의 사태를 앞두고, 박우찬은 먼저 움직이기로 했다.
자신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형님이 장치해 둔 무언가라도 되는 건지.
그런 염려를 할 필요는 없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지금이 틀림없는 기회라는 것.
다음 순간, 살을 에는 듯한 쇳소리가 하늘에 울렸다.
그리고 여기에서, 마지막까지 신세계 질서가 눈치채지 못한 사실이 마왕의 발목을 잡았다.
신세계 질서는 추론했다.
박우찬의 시그니처에는 반동이 있다고.
틀림없이 연속 사용은 불가능할 거라고.
틀린 말은 아니다.
실제로 그들은 그런 전제 하에 박우찬의 시그니처를 공략하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그 근간이 되는 건 시그니처 자체의 문제가 아니다.
박우찬의 감각.
더욱 강한 몬스터를 앞둘 수록 기이할 정도로 부풀어오르는 감각 탓이라는 걸, 그들은 끝까지 몰랐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한 순간.
하늘을 올려다 본 마왕과 박우찬의 시선이 교차한다.
그리고.
덜컥, 마왕의 몸이 한 순간 멈칫한 가운데.
두 번째.
마왕.
페르시아 신화의 절대악.
조로아스터 교의 마왕이며, 세상을 불사를 사룡.
두말할 필요도 없는 최고 규모의 몬스터를 앞두고, 박우찬의 감각은 그 어느 때보다도 예리하게 날이 서 있었다.
바야흐로, 지금 이런 행동이 가능할 정도로.
신세계 질서의 보고를 들었던 마왕조차, 시그니처를 사용한 직후인 지금이라면 충분히 받아낼 수 있다 생각했을 찰나.
박우찬의 손에 들린 강철이, 다시 한 번 호선을 그렸다.
시그니처, 예쁘게 베기.
살아생전 단 한 번도 시도한 적 없는, 절초의 연속 사용.
신세계 질서의 예측으로도, 마왕 본인의 두뇌로도 예상할 수 없는 상황이 궁창같은 밤하늘 아래를 수놓았다.
그리고.
설령 이만한 수준의 싸움이라 해도, 그 근본은 마찬가지였다.
아니, 어쩌면 수준 높은 싸움이기에 더더욱 그럴 지도 모르는 법이었다.
예상 외의 상황.
빈틈을 찌르고 들어간, 최고 위력의 일격은 언제나 승부를 결정짓기에 충분한 요소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