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5화 〉 호기심
* * *
적당히 거리를 두고 선 채, 태시영은 슬쩍 주변을 훑었다.
널찍한 연무장 너머.
관중석 근처에서 안절부절하고 있는 여자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뭐, 그야 그렇겠지.
애시당초 박우찬에겐 이 싸움을 받아들일 만한 이유가 없다.
수적 우위를 살리면 그만이니까.
제자들의 목숨을 잡고 협박하긴 했지만, 설마 수락할 줄이야.
태시영은 내심 혀를 내둘렀다.
아니, 애초에 박우찬이라면 모를까 다른 여자들이 따라올 줄은 몰랐지만.
어느 쪽이든, 마법적인 계약서까지 체결한 지금.
그녀들이 태시영을 공격하거나, 그 반대 되는 일이 일어날 가능성은 더 이상 없었다.
때문에.
다음 순간, 태시영은 전방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연무가 시작된 건 바로 그 다음이었다.
사전에 맞춰둔 신호. 시작을 알리는 소리.
어느 쪽이든, 두 명은 시시한 규칙에 맞춰 움직이는 대신 승기를 붙잡기 위해 손을 뻗었다.
그러므로.
박우찬과 태시영은 거의 동시에 움직이기 시작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태시영은 대인전에 특화된 S랭크 헌터.
그리고 박우찬은 사냥에 특화된 S랭크 헌터였으니까.
일반적으로, 선수를 쥐는 건 태시영이 되었을 테지.
실제로도 그랬다.
허나.
'흠?'
이전과는 달랐다.
지금 이 순간, 태시영이 선공을 취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단 하나.
무기의 차이 때문이다.
박우찬은 대검. 태시영은 권총.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상황에선 태시영이 앞지를 수밖에 없다.
반대로 말하자면, 무기의 차이가 없었을 시 우선권을 쥐는 건 과연 어느 쪽이었을까.
태시영은 확신할 수 없었다.
그야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만.
현역 시절 이상으로 연마된 경험.
마법으로 인해 넓어진 선택지.
어느 정도 체득한 검술.
마지막으로, 성능 좋은 장비 덕에 감소한 부담까지.
적의 목을 베기 위해 온 힘을 다할 필요가 없으니 평소보다 힘을 아낄 수 있고, 평소보다 몸에 걸리는 일도 없다.
덕분에 지금 박우찬은 설령 몬스터를 상대하는 게 아니더라도 S랭크에 가까운 실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태시영이 상정했던 수준보다 압도적으로 뛰어난 움직임.
문자 그대로 대등한 실력의 상대를 향해, 태시영은 망설임 없이 총구를 겨누었다.
비록 당황하긴 했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는다.
시그니처, 일사필중.
태시영의 기술은 바로 그런 물건이었으니까.
그 정체는 실로 간단하다.
대상의 반사 신경을 역으로 이용하는 기술이라고 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까.
시선 처리. 어깨의 움직임. 팔의 각도. 보폭과 그 넓이.
이런 신호를 통해 상대방의 육체에 서로 상반되는 명령을 내린다.
결과적으로, 상대는 변변찮은 행동 하나 취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하고 만다.
애초에 방어나 회피 자체를 시도할 수 없으니 필살.
말 그대로 필살기인 셈이다.
대처하는 방법은 단 하나.
몸의 반응을 강제로 억누르는 정도일까.
물론 쉬운 일은 아니겠지.
예를 들어, 움직임을 멈출 수 없는 상황.
온 몸의 무게를 실어 대검을 휘두르는 중이라면 반사적으로 멈출 수도 없을 터.
그러나 그런 식으로 몸에 제동을 걸 경우, 결과적으로 더 큰 빈틈이 생기게 된다.
무엇보다.
태시영의 시그니처는 화력을 앞세우는 기술도 아니다.
저항이 불가능한 탓에 유달리 위력도 강하게 느껴질 뿐, 실제로는 대규모 술식이 담긴 건 아니니.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즉, 태시영의 시그니처는 처음부터 연발을 전제로 한 공격이었다.
거기에 태시영의 능력인 사물 강화.
자신이 소지한 도구의 성능을 끌어올리는 능력까지 더해질 경우.
안 그래도 개조나 강화 등에 의해 범상찮은 위력을 자랑하는 권총은, 숫제 미사일 가까운 공세를 퍼부을 수 있다.
체감되는 위력은 그 이상이겠지만.
결과적으로, 태시영이 선수를 쥐었을 경우.
첫 발 이후로 무자비하게 쏟아지는 연사 속에서 반격의 기회를 잡기는 힘들다.
설령 동격의 사냥꾼이 상대라 하더라도 일방적으로 공격을 허용하다 죽음을 맞이할 뿐이겠지.
이론 상 무적.
태시영의 시그니처 또한 그런 철칙을 지독할 정도로 뒤따르고 있는 물건이었다.
심지어 지금 태시영의 상대인 건 박우찬.
마신들 두 마리를 희생하면서까지 그 패턴을 관찰한 상대다.
당연히 태시영에게는 이토록 쉬운 봉도 없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박우찬이 취한 행동은 태시영에게도 실로 예상 밖이었다.
촤르륵!!
대검 손잡이에 휘감긴 사슬을 내던지며, 박우찬이 앞으로 걸음을 내딛는다.
카운터.
서로 공멸을 노리는 건가?
완전히 회피나 방어를 도외시한 그 공격에, 태시영은 내심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
우두둑!!
태시영의 다리가 쇠사슬에 휘감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우찬에게는 잔상처 하나 나지 않았다.
'……뭐?'
한 순간, 태시영의 사고가 아연해진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박우찬에게 태시영의 시그니처를 분석할 여력은 없었다.
애시당초 그럴 만한 시간도 없었고, 그 원리를 분석하기엔 기술도 부족하다.
때문에.
박우찬이 취한 행동은 단 하나 뿐이었다.
애초에, 신도시 탈환 작전 당시 박우찬이 가장 염려했던 상황은 하나.
이 쪽의 진입이 조기에 발각당하고, 일방적으로 저격당하는 상황이다.
당연히 박우찬의 창고엔 그런 상황을 대비한 부적이 빼곡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화살이나 총알을 피하는 부적 따위, 드문 물건도 아니고.
비록 두 번째 마왕을 상대하기 위해 접근하던 시점에서 다른 도구에게 자리를 내줄 수밖에 없었지만.
덕분에 그 날 사용하지 않은 부적은 지금도 박우찬의 창고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태시영의 시그니처가 무슨 기술인지는 역시 모르겠다.
그렇지만.
대처할 수는 있다.
당시 놈이 사용했던 기술은 권총을 이용한 사격.
허면, 적당히 거리를 벌리고 선 시점에서 십중팔구 총기를 꺼내들겠지.
여기까지 유도할 수 있다면, 그 뒤는 실로 간단하다.
부적에 뒤를 맡기고 방어를 도외시하면 그만.
아무리 그래도, 별다른 데미지 하나 주지 못한 상황에서 시그니처를 연타할 여유가 있을 리도 없으니.
그 사실에 태시영은 혀를 찼다.
'억울하다고 생각하지는 않겠지?!'
여태까지 박우찬이 지긋지긋할 정도로 당했던 시그니처 대책.
이번에 박우찬이 사용한 부적은, 거기에 비하면 정말로 일부에 지나지 않을 정도였다.
때문에.
박우찬 또한 망설임 없이 사슬을 당기며 달려들었다.
물론 태시영도 섣불리 끌려갈 생각은 없었다.
단지.
퍼석!!
"큭!!"
지형 파괴.
박우찬이 익힌 소마법 중 한 가지가, 태시영의 발을 그 자리에서 미끄러뜨린다.
결과적으로, 태시영은 고작해야 권총 한 발 쏜 직후 박우찬과 접근전을 벌이게 되었다.
그 사실에 이를 악물며 자세를 수습하는 태시영.
'일단 거리를 벌린다……!!'
이번 공격을 받아내고 거리를 벌린다.
태시영의 두뇌가 재빨리 상황을 판단했다.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박우찬은 그렇게 승부를 지지부진하게 끌고 갈 생각이 없었다는 점이다.
허리춤에서 스치듯 뽑아낸 단검이, 태시영의 옆구리를 노린다.
그리고.
"커, 헉……?!"
너무나도 허무하게, 태시영의 옆구리를 단검이 후벼팠다.
물론 태시영으로서도 예상 밖이었을 테지.
애초에 태시영은 방검복을 입고 있었고, 능력의 보조도 있었다.
고작해야 보조 무기 수준에 지나지 않는 단검이라면 충분히 막아낼 수 있다고 생각했으리라.
다만.
공교롭게도, 박우찬이 휘두른 건 단순한 보조 무기 따위가 아니었다.
일찍이 게이트를 넘기 전, 박우찬이 쾌운철에게 맡겼던 애병의 잔해.
밑동밖에 남지 않은 대검을 가공해 만들어낸 단검이다.
당연히 그 무기에 사용된 소재는 현직 S랭크 헌터에게도 부족함 하나 없는 물건.
고작해야 태시영의 방어구 따위가 막아낼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당연한 일이다.
태시영은 군인.
그조차 여태까지 아카데미 측과 정면으로 싸우는 일 한 번 없었던 헌터다.
설령 신세계 질서라 해도 태시영에게 전용 장비 따위를 갖춰줄 여유는 없었겠지.
고랭크 헌터의 장비는 설령 여타 대기업이라 해도 손쉽게 부담할 수 있는 가격이 아니니까.
하물며 몬스터 전원에게 분배하기 위한 부적을 만들어야 하는 상황이었다면 더더욱.
즉, 장비의 질은 박우찬이 앞서는 지금 이 상황.
박우찬은 초반부터 승부수를 던지기로 했다.
여하간, 박우찬이 과연 여기까지 찾아올지 반신반의하던 태시영과 달리 그는 태시영을 쓰러뜨릴 방법을 계속해서 궁리하고 있었으니까.
무엇보다.
태시영이 박우찬에 비해 우위에 있는 건 군인으로서의 기술이다.
허면?
지금 이 상황에서 태시영이 취할 수 있는 최선의 수는 무엇이었을까?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들을 들이지 않고 요새를 낀 채 마왕이 합류할 때까지 버티는 일이었으리라.
그런 이점. 군인으로서의 판단.
모든 우위를 스스로 포기하고, 1대 1 승부에 집착한 지금.
태시영이 박우찬을 상대로 우위에 선 부분은 단 하나도 없었다.
주르륵!!
뒤늦게 태시영의 전신에서 검은 마력이 일어난다.
농밀하기 짝이 없는 저주.
검디 검은 마력은, 여태까지 태시영의 능력과 지나칠 정도로 상이한 기척이었다.
필시 마왕의 가호를 받은 거겠지.
일찍이 이예은을 상대로 마신이 그랬던 것처럼.
그렇지만.
"뭐, 뭐야……?!"
쑤셔넣은 단검 근처로 향하던 마력이, 허망하게 무산된다.
마왕이 내린 마력이, 별다른 힘을 쓰지 못하고 흩어진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태시영이 마왕의 은총을 받을 가능성은 결코 낮은 게 아니었다.
때문에.
박우찬은 이 단검을 만들 때 따로 예전과 같은 부탁을 덧붙인 바가 있었다.
즉, 이 단검은 성스러운 불꽃과 참마의 즙으로 단조된 물건.
마왕 본인도 아니고, 계시를 통해 내려받은 저주의 마력 따위로는 붙잡을 수 없었다.
허면, 그 뒤의 일은 실로 간단하다.
"잠, 깐……!!"
"시끄러, 인마."
마력이 작동한다.
단검에 새겨진 술식이 기동한다.
현직 S랭크 헌터가 사용하기에도 부족함 없는 무기를, 한층 더 적절하게 사용하기 위하여 박우찬이 부탁한 마지막 세공.
요컨대, 폭발의 주문이었다.
어차피 이런 단검 따위, 용의 거체엔 박혀도 별다른 잔상처 하나 남지 않으리라.
허면, 처음부터 태시영을 상대하기 위한 용도로 조정하는 게 훨씬 합리적이다.
이윽고.
무어라 말하려던 태시영에 앞서, 다시 한 번 소마법이 작동했다.
즉석 연금술.
단검에 새겨진 술식 덕에 간단한 소마법으로도 간섭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단검이, 순식간에 백열한다.
그리고.
태시영.
인류를 배신하고 몬스터에게 붙은 배신자.
신세계 질서 최후의 헌터 안으로, 강철이 휘몰아쳤다.
퍼어엉!!
비록 방아쇠가 된 건 단순한 소마법이라 한들, 폭발한 강철은 틀림없는 최고급 소재다.
어쩌면 그 덕분일까?
작렬한 충격은, 태시영의 내부를 맴돌던 마력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그 전신을 헤집었다.
한 가지 다행인 건, 그것만으로도 힘이 다해 피부가 박살나고 온 몸이 찢겨지는 흉측한 몰골이 되지 않았다는 점이겠지.
그리고.
풀썩.
인류를 배신하면서까지 무언가를 바랐을 누군가는, 제대로 된 단말마 하나 남기지 못한 채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그가 무엇을 바라고 이런 행동을 했는가 하는 사실은 앞으로 영원히 어둠 속이겠지.
상관 없는 일이었다.
애초에 박우찬은 그런 사정 따위에 별다른 관심도 없었으니까.
휘릭, 하고 손잡이만 남은 단검을 내버린다.
승부가 나는 데에 2초.
채 1분도 걸리지 않은 시점의 이야기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