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0화 〉 성산을 향하여
* * *
"뭐, 정치 하는 양반들도 체면치레 정도는 챙겨야 하지 않겠냐."
하얀 봉고차가 사람 한 명 없는 차도를 가로지르는 사이, 형님은 지금 이 상황을 그렇게 품평했다.
애시당초 수틀리면 협회를 뜰 생각인 나야 둘째치더라도, 다른 애들까지 내게 딸려 보내준 이유는 무엇일까.
나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형님의 말도 일리는 있었다.
여하간, 대한민국 정부로서는 이번 일처럼 가능성 낮은 도박에 손을 거들고 싶지는 않겠지.
다만.
아무리 그래도 완전히 손을 뗄 수는 없다.
그야 별다른 가망도 없는 일에 국운을 걸고 싶지는 않겠지.
당연한 일이다.
허나, 만약 이번 사건이 만천하에 드러나기라도 한다면?
현실적인 사정과 달리, 납치당한 학생을 버린 정치가들이 좋은 평가를 듣긴 어려운 법이다.
대한민국 정부로서는 생색을 낼 필요도 있겠지.
말하자면, 이준구의 이번 지원은 정치가들에게 물려주기 위한 미끼인 셈이다…….
운전대를 잡은 채, 형님은 그렇게 설명했다.
물론 정말로 제 3차 대침공이 일어난다면 우리 제자들의 실력은 하나라도 아까울 지경이 되겠지만.
"그 정도는 정필연 그 친구 힘을 빌려서 어떻게든 해보겠다던데."
다행스러운 건, 내 제자들 대부분이 아직 학생 신분이라는 점이다.
안 그래도 소년병 운운하던 기사가 나온 적도 있고.
이런 말은 조금 그렇지만, 같은 등급 헌터가 동시에 몸을 감췄을 경우.
아직 학생인 쪽이 평범한 헌터보다 용서받기 쉬운 풍조가 있다.
아니, 그야 그렇겠지만.
아무래도 저번 도시 탈환 당시 정필연 그 친구가 그럭저럭 활약한 점도 있고.
정부 쪽에서는 따로 세울 얼굴마담을 확보한 모양이다.
뭐, 이런저런 준비가 되어 있다면 나로서는 다행일 따름이지.
아무리 그래도 나를 도운 탓에 이준구가 정계에서 영구 추방된다거나 하면 조금 뒷맛이 씁쓸한 일이고.
설령 그렇다 해도 멈추지는 않겠지만.
"최승준 그 친구한테도 감사해 둬라. 네가 뻗은 사이, 전적으로 자금을 지원한 건 그 친구니까."
"편리한 녀석이지."
쾌운철 형님 말대로였다.
내가 뻗어있던 3일 사이.
급전이 필요한 상황이었을 때, 내 이름으로 자금을 대납해준 게 바로 최승준 그 녀석이었던 모양이다.
비록 돈이 부족하지는 않았지만, 누워있는 사람한테 수결을 받을 수도 없고.
덕분에 형님은 내게 이런 식으로 가볍게 수다를 떨 만큼 여유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그런데, 정말 눈 안 붙여도 되겠냐?"
"됐어. 자다 깨서 잠도 안 와."
앞으로 며칠 사이, 승부가 갈린다.
때문에.
나를 재우겠다는 이유로 손수 차량을 운전하고 있던 형님은, 그대로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
지금 우리들은 단순히 드라이브 중인 게 아니었다.
얼마 전, 형님에게 내가 따로 발주를 넣었던 무기와 장비가 드디어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
차를 주차시키고 나서, 평평한 땅에 섰다.
어느덧 하늘도 어두컴컴한 밤에서 아침으로 바뀌고 있는 가운데.
봉고차 안에서 이것저것 움직이던 형님은, 곧 내게 새로운 장비를 보여주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새로운 장비라 해도 눈에 띄게 특별한 점은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만에 하나 조작감에 오차가 생길 경우를 대비하여, 본래 사용하던 물건과 비슷한 외견을 주문했으니까.
실제로, 직접 손에 쥔 장비 또한 마찬가지였다.
대검의 손잡이가 손바닥에 감기는 감촉도, 그 무게도.
완전히 다른 물건이라는 게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로 흡사했다.
그나마 다른 건 대검의 칼등 부분을 길게 가로지르는 홈이 생긴 정도였고.
"이상한 점은? 있으면 지금 말해두도록. 최종 조정해야 하니까."
"아니, 딱히 없는데. ……달라진 건 뭐 있어?"
"직접 써 보면 알겠지만, 크게 두 가지."
그렇게 말하며, 형님은 손가락을 두개 펼쳐 내게 향했다.
하나는 물론 나도 보자마자 알 수 있었던 칼등의 홈 쪽이다.
"거기에 마력을 흘리고 휘두르면 알 수 있을 거다."
"아하."
설명을 듣자 나도 그 용도를 이해할 수 있었다.
칼등의 홈 부분에 마력을 흘리고, 대검을 휘두르며 흘려보낸다.
마치 액체를 분사한 칼날처럼, 그렇게 쏘아진 마력은 칼날이 되어 적을 양단하겠지.
말하자면, 내게 부족한 원거리 겸 다수를 상대하기 위한 기능이었다.
한 번 휘둘러 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곧 관두기로 했다.
지나칠 정도로 요란한 위력이 튀어나오리라는 예감 혹은 확신 때문이었다.
알고 있었지만, 현직 S랭크.
아니, 그 이상의 소재를 남김없이 융통해 만들어낸 물건은 도저히 평소에도 사용할 만한 게 아니었다.
절레절레 고개를 젓는다.
"그럼, 다른 건?"
"그거, 한 손으로 들어봐."
"엥?"
한 손?
그야 헌터의 근력이 있으면 불가능할 건 아니겠지.
다만, 무기에는 무게 중심이라는 게 있다.
양 손으로 다루는 대검을 한 손으로 다룰 만한 힘이 있다고 해서 누구나 우악스러운 무기를 들고 다니지 않는 이유와 마찬가지.
무기에는 적절한 사용법이 있고, 동등한 수준의 적이 상대라면 그로 인한 빈틈을 꿰뚫려 당할 수도 있는 법이니까.
하지만.
그런 점에 있어선 나 이상으로 자세할 형님의 말에 따라, 나는 슬쩍 대검을 한 손으로 들어보였다.
그리고.
번쩍 하고 치솟는 칼날에 놀라며, 손목을 조정하길 잠깐.
"엥?"
무심코 그런 반응이 흘러나왔다.
왜냐하면, 방금 전 내가 투덜거렸던 점과 달리 한 손으로 든 대검의 사용감이 전혀 변하지 않았던 탓이었다.
"무기 자체에 여러 마법을 새겼거든."
형님은 그렇게 설명했다.
무기 자체에 바람이나 중력 등, 온갖 기능을 아낌없이 새긴 지금.
"네가 대검을 드는 손이나 압력에 따라, 네게 느껴지는 무게가 달라질 거다."
말 그대로 장인의 기술이었다.
단순히 대검의 무게를 가볍게 하는 게 아니라, 내 손아귀 힘에 맞춰 술식이 작동하게 한다.
달리 말하자면, 내가 대검을 잡는 방법을 일종의 수식화해 새겨넣은 셈이다.
이런 술식들의 동력원이 되는 건 내게서 자연스레 흘러나오는 마력.
즉, 손잡이와 접촉하고 있는 손아귀에서 흘러나가는 마력이겠지.
고작해야 그 정도 마력만으로도 이런 효율을 낼 수 있는 소재도, 그런 걸 가능케 한 기술도.
어느 쪽이든, 나로서는 상상도 가지 않을 정도다.
무엇보다, 대검 자체의 무게가 바뀌지 않은 게 좋다.
말하자면 내 체감 무게만 바뀐 셈이니까.
위력 자체는 조금도 떨어지지 않았다는 뜻이다.
'거기에, 전체적인 품질도 좋군.'
대검의 날. 톱날의 각도. 못의 크기와 무게중심.
어느 쪽이든, 이전에 있던 무기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힘이 들어간 게 느껴졌다.
심지어.
"엉? 뭐야, 이거?"
따로 걸친 정장 또한 마찬가지였다.
아니, 분명히 소재도 부족하다 하지 않았나?
저번에 마왕을 쓰러뜨린 소재를 따로 환전한 걸까.
아니면, 신도시 탈환에 성공해 누군가 꼭꼭 숨겨두고 있던 물량이 시장에 나돌기 시작한 걸까.
슬쩍 걸친 외투는, 솔직히 말하자면 무기 이상으로 어마어마한 힘이 감돌고 있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뭐, 그런 게 있다."
정작 당사자인 형님은 대답을 피하며 슬쩍 봉고차 쪽으로 시선을 돌릴 뿐이었지만.
부끄러워하는 건지, 아니면 뭔지.
아니, 나로서는 감사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였지만.
"그래서? 조금 어색한 부분같은 건 없냐? 조금 시간이 지났으니까."
"아, 정장 쪽 수선부터. 이번에 근육 좀 붙여서. 가능하면 신발 밑창도. 아마도 산행이 될 거라서."
"알겠다. 그리고?"
"혹시 가능하면 이 쪽도 어떻게 쓸 수 있을까?"
그렇게 말하며 내가 내민 건 뿌리밖에 안 남은 대검 밑동이었다.
물론 그 사이즈를 생각하면 잘 해도 단검 수준이나 되겠지만…….
"이걸?"
"뭐, 힘들면 됐고."
"……반나절 기다려라. 어차피 쟤들 깨야 할 거 생각하면 그 정도는 필요하지?"
"그래."
따로 말을 하진 않았지만, 형님도 대충 내 의도를 눈치챈 모양이었다.
여하간, 이번에 싸울 적은 비단 규격 외 등급 몬스터만 있는 게 아니다.
태시영.
하연이를 따로 납치한 그 헌터 자식과 싸울 필요도 있을 테니까.
무지막지하게 큰 애병 대신, 보조 무기가 필요할 타이밍도 있다.
때문에, 형님도 별다른 말을 하지 않은 거겠지.
다만.
"그래서, 승산은 있냐?"
"솔직히 빡세."
"아, 그러냐."
지나가듯 그렇게 물었을 뿐.
솔직히 말하자면, 승산이 어느 정도일지는 모르겠다.
나도 본체를 직접 본 건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짐작할 수 있는 건 있다.
순수한 힘겨루기로 따질 때, 나는 두 번째 마왕을 상대로 근소하게 앞서고 있었다.
그리고.
첫 번째 마왕.
조로아스터 교의 악룡은, 두 번째 마왕인 쿠쉬보다 명백하게 강하다.
단순한 전력만 따져도 내 열세가 되겠지.
학생들의 조력을 받는다 해도, 과연 어디까지 만회할 수 있을지.
그런 걱정을 구태여 입에 담는 대신, 나는 어깨를 좁혔다.
동시에.
슬쩍, 다시 한 번 시선을 돌렸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런 내 눈에 들어온 건 태시영 형님의 가게가 아니었다.
애초에 형님의 가게는 차로 저녁 내내 달려야 할 만큼 멀리 떨어지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다닥다닥 붙어있는 장인 거리에선 이처럼 적당히 널찍한 시착용 장소…….
헌터 훈련소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엇, 박우찬 헌터님 아니십니까?!"
내 시선이 닿은 건, 이제 막 문을 열고 있는 건물.
신도시 한 가운데에 존재하는 협회 본사와 지독히도 닮은 장소.
내게도 연이 없다고는 말 못할, 대한민국 헌터 협회 남해 지부 쪽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