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9화 〉 협회의 가장 높은 자리
* * *
"으음, 그런 사정이 있었구나."
"뭐, 그렇지."
결국 나 또한 스키장 운운하고 있을 상황이 아니라는 사실을 시인하고 말았다.
두 번째 겨울 방학, 3주차.
태백산맥 어귀에서 받았던 초대장을 흔들며, 나는 그런 감상을 삼키고 있었다.
"그 아저씨도 바보는 아니니까, 어영부영 대답을 떠넘기고 싶지는 않겠지."
여하간, 헌터 협회장이라는 이름은 장식이 아니다.
비록 정계 입장에서 보자면 헌터 입장을 총괄하는 거수기 역할에 불과하다 해도 말이지.
실제로는 헌터들의 입장을 대변해야 하는 만큼 당연히 들어오는 정보나 세력도 만만치 않다.
염광훈 헌터장 개인을 지지하는 헌터들이라면 더더욱 두말할 필요도 없겠지.
즉, 이 초대장은 그 양반에게 있어선 일종의 선언문인 셈이다.
도망칠 생각은 하지 마라.
파티장에서 차분하게 이야기를 듣겠다…….
뭐, 그런 느낌이 아닐까.
여하간, 요 최근 신세계 질서가 벌인 소동은 아카데미 주변으로 집약되어 있다.
족히 2년 가까이 축적된 정보.
이를 늘어놓고 살필 수 있는 권한이 있다면, 그야 수상쩍은 점 정도는 눈에 띄겠지.
일단 고랭크 몬스터 출몰 횟수부터 비교가 안 되니까.
따로 자리를 잡고 설명을 듣고 싶다는 의도 또한 이해할 수 없는 건 아니다.
게다가, 우리에게도 나쁜 이야기는 아니고.
헌터 협회는 적이 아니다.
오히려 우선적으로 끌어들여야 할 세력이다.
단지, 지나치게 신세계 질서를 경계한 탓에 회유가 늦어졌을 뿐.
실각 계획을 준비했던 건 사실이지만, 현 협회장인 염광훈 아저씨를 우리 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면 좋을 일.
말하자면, 이번 기회는 일종의 브리핑이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신세계 질서의 현황도 좋지 않고.
지금 아저씨의 행동을 보면 주변 양반들이야 어쨌든 본인은 신세계 질서와 관련이 없는 모양이고.
현재 신세계 질서 쪽으로 넘어갈 메리트는 없을 테지.
굳이 꼽자면 제 3차 대침공의 공포 그 자체일까.
어느 쪽이든, 시도할 만한 가치는 있다.
그게 바로 강원도에서 돌아와 최승준 및 이준구에 대한 살의와 함께 가다듬은 계획의 전모였다.
"흐흥, 그래서 파티에 참가할 짝으로서 본인을 고른 게로구나."
"어, 그래."
"하긴, 다른 꼬마들에게는 버거운 일이겠지. 이런 일에 참가하는 건 어른의 역할이니까! 어른의 역할이니까!"
네게서 기대할 만한 어른 노릇이라고는 그 젖탱이 두 개 뿐이다.
천생 꼴깝을 떠는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그런 말이 목젖 근처에서 근질거리는 게 느껴졌다.
다만, 틀린 말도 아니었다.
하필이면 그 파티의 참가를 위해 다른 누구도 아닌 티아마트를 부른 건 여러 가지 사정이 있었으니까.
예를 들어, 아저씨의 협력을 구하는 데에 실패할 경우.
우리들의 계획에 따르면, 그 뒤를 이어 대책 마련에 힘을 써야 하는 건 바로 티아마트였기 때문이다.
즉, 이 기회를 틈타 얼굴도장을 찍어두겠다는 계획이다.
협회 상층부 중에서도 일부는 티아마트의 얼굴을 알고 있겠지만, 대다수는 그렇지 못한 게 현실이니.
이런 밑작업도 중요한 법이다.
무엇보다, 신세계 질서 쪽에서 티아마트를 보고 반응할 수도 있고.
말하자면 일종의 미끼인 셈이다.
정작 녀석을 데리고 가야 하는 내가 살짝 손끝만 닿아도 목을 돌려버리고 싶은 기분이 드는 걸 제외하면 문제는 없었다.
'염병.'
물론 나름 대책도 있었다.
티아마트가 이번에 파견한 분신은 그 힘을 최대한으로 억제한 상태.
E랭크 헌터는커녕 거의 일반인 수준이다.
덕분에 나 또한 완전히 접촉 금지 및 숨을 참는 정도로 대응할 수 있었을 정도니까.
다만, 문제는 그래도 누군가 티아마트를 떠밀어 내 몸에 닿기라도 하는 순간 반사적으로 일어날 일이다.
뭐, 죽여버리겠지.
십중팔구 무심코 꺼낸 연장으로 티아마트의 분신을 그 자리에서 사살해버리리라.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 경우 이번 계획은 완전히 나가리가 되는 셈이다.
물론 티아마트의 능력을 공개하면 협회를 들락날락거릴 필요는 없겠지.
다만, 그 경우 티아마트가 지닌 능력의 근간을 밝혀야 한다.
요컨대, 티아마트의 출신을 드러내야 한다는 뜻이다.
허면?
성좌 운운하는 이야기가 밖까지 샐 경우, 더 이상 차기 협회장 운운하고 있을 상황이 아니겠지.
즉, 이번엔 가급적 그런 일이 없도록 조치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런 사실을 알고 있는 건지 뭔지, 녀석은 해맑은 얼굴로 헤실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도대체 누구야, 이런 녀석을 차기 협회장으로 추천한 건…….
이준구였던가? 최승준이었던가?
어느 쪽이든, 나로서는 속이 탈 뿐이었다.
"어쨌든, 이거부터 받아라."
"응?"
방학 도중 부름을 받고도 별다른 말 하나 없이 나타난 티아마트에게, 나는 미리 준비하고 있던 선물을 건넸다.
그 사실에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던 티아마트는, 곧 포장 속에서 나온 물건을 보고 살짝 말문을 열었다.
"이건……."
"만에 하나라는 게 있으니까."
이번에 내가 준비한 물건은 일종의 파티 드레스였다.
저번에 티아마트가 입었던 물건을 기초로, 따로 겉옷 등을 준비한 물건.
다만, 파티 드레스가 아닌 비슷한 물건이라 한 이유도 따로 있었다.
여하간, 눈 앞에 있는 물건의 정체는 단순한 의복이 아니라 일종의 방어구였기 때문이다.
몇 번 정도 언급했듯이, 메소포타미아 신들은 스스로의 의복으로 자신의 힘을 드러낸다.
즉, 티아마트 또한 옷에 힘을 두르는 식으로 방어구처럼 사용할 수 있다는 뜻이다.
허면?
본래부터 방어구 목적으로 짠 옷 위에 신의 힘을 입힐 경우, 더 효과가 좋지 않을까?
별다른 검증 하나 없이 단순한 착상으로 준비한 물건이기는 했지만, 없는 쪽보다야 낫겠지.
저번에 연회 도중 강습한 마신 따위가 있어 준비한 물건이었다.
뭐, 놈들도 바보는 아니고.
만에 하나 공습을 건다 해도 십중팔구 다른 식으로 들이닥칠 거라 생각하는 건 사실이지만, 세상 만사 모르는 법이지.
무엇보다, 티아마트는 우리 쪽의 전력이기도 하다.
허면 당연히 방어구 정도는 이 쪽에서 준비해줘야 하겠지.
아니, 그야 이 년 꼴에 여신이고.
추종자들 중에서도 따로 무기나 방어구 따위를 헌상한 녀석은 없는 듯하니.
결국 이 쪽이 따로 준비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오히려 무기 쪽이 더 막막한데.'
이 녀석이 직접 싸우는 모습을 본 적이 있어야지.
전적으로 뒤에서 보조하는 쪽이 대부분이었고, 실제로 그 쪽이 더 효율적이니.
나중에 따로 물어봐야 하려나.
마침 당사자도 눈 앞에 있겠다, 슬쩍 운이나 띄울까?
그런 식으로 시선을 돌리자, 나는 퍽 당황스러운 모습을 눈에 담고 말았다.
"우으, 우으으……!!"
글썽글썽.
무슨 개구리 짜부라지는 소리와 함께, 짐짓 감동한 얼굴로 웅얼거리는 녀석의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기분 나빠."
"무, 무슨 소리냐! 기껏 이심전심이로구나 하고 감동하고 있었건만!!"
"이심전심?"
존나 뜬금없네.
아니, 결국 외국 출신 여신이고.
사자성어를 이런 식으로 이상하게 활용하는 일 또한 비일비재했으니, 이제는 익숙할 따름이다.
뭐, 어쨌든.
딱히 싫어하는 건 아닌 듯해서 다행이었다.
공물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던가 하는 불평이라면 차라리 다행이겠지.
그런 거라면 개빡치니까 아가리 닫으라고 하면 그만이고.
다만, 혹시 선물이 파티 드레스라는 점을 걸고 넘어지면 어떨까 싶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상대가 몬스터라는 건 변하지 않아도 선물로 파티 드레스라니 기분 나쁘다 운운했으면 마음이 꺾였을지도 모르고.
내심 안도의 한숨을 돌리고 있자니, 티아마트는 다시 한 번 내게 되물었다.
"허면, 이번엔 본인이 무엇을 하면 되겠느냐?"
"엉? 딱히?"
얼굴도장 운운하긴 했지만, 딱히 녀석이 해야 할 행동은 없다.
것보다, 솔직히 말하자면 마음대로 풀어놓는 쪽이 더 불안하다.
아카데미 생활을 통해 그럭저럭 교사 생활을 연기할 수 있다는 건 확인할 수 있었지만.
반대로, 그럴 만한 재주가 있는데도 평소엔 저런 괴상망측한 말투를 쓰는 녀석이다.
괜히 악인상만 남길지도 모르는 이상, 구태여 나설 필요도 없겠지.
무엇보다, 이번에 초대를 받은 건 나다.
즉, 정계나 재계 따위의 인맥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차례차례 돌며 물리적인 의미에서 얼굴 도장을 찍는 건 불가능하겠지.
허면?
녀석은 어떤 식으로 얼굴 도장을 찍어야 할까.
거기에 대해, 나는 한 가지 결론을 내려두었다.
'뭐, 괜찮겠지.'
딱히 아무 일도 할 필요 없다.
여하간, 녀석의 얼굴은 슬쩍 보기만 해도 쉽게 잊을 수 있는 타입이 아니니까.
말 그대로 그 자리에서 얼굴 도장만 찍고 있으면 되는 셈이다.
아니, 당사자한테 직접 이런 말을 하면 십중팔구 온갖 개지랄을 다 떨 테니까 굳이 말하지는 않겠지만.
외모가 좋으면 이래저래 편리한 법이다.
이 녀석의 외모는 권능을 통해 만든 물건이겠지만.
일종의 마법적 성형, 혹은 마력을 사용한 화장인 셈이다.
"오히려 내 쪽이 문제지."
즉, 실질적으로 문제가 되는 건 내 쪽.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아저씨를 설득하기 위한 방법이다.
여하간, 설령 아저씨가 우리 쪽에게 협력해준다 해도 실각을 피하기는 힘들다.
신세계 질서의 정체가 공표된다면, 여태까지 협회장은 뭘 했느냐는 평가를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요컨대, 아저씨 쪽에서 티아마트를 자신의 잠정적 후계자로 연출해주는 게 제일 좋은 흐름이지만…….
글쎄, 어떻게 될까.
솔직히 말하자면, 나도 엄청나게 말재주가 좋은 편은 아니니까.
아니, 툭 터놓고 말하자면 구린 편이지.
아무래도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뭐,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본인은 여신이 아니더냐. 원한다면, 행운의 여신 정도는 얼마든지 데려올 수 있느니라."
"넌 짝퉁이잖아."
"뭬라고?!"
티아마트는 그런 내 속내를 알아챈 듯, 슬쩍 거리를 두며 그렇게 말했지만.
뭐, 진즉에 망해버린 메소포타미아 신화 속 신들은 둘째로 치더라도.
불안해하기만 해선 될 일도 안 되겠지.
그런 식으로, 나도 적당히 마음을 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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