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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몬스터만 죽이고 싶음-308화 (308/371)

〈 308화 〉 배수진

* * *

그리고.

다시 한 번 무의식 속 밑바닥에 쳐박힌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돌아가는 두 명의 모습 덕분이었다.

이 정도면 당분간 걱정은 없겠지.

자하연은 이번 일로 어느 정도 스트레스를 배출할 수 있었고.

박우찬 또한 이번엔 말을 돌리지 않고 나름 확고하게 결심을 세운 모양이다.

물론 그 결심이 얼마나 가겠느냐 싶은 걱정도 있었지만…….

그건 그 때 가서 걱정할 일이어다.

동시에,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마치 보모처럼 이렇게 안절부절하고 있는 스스로의 모습에 어쩐지 웃음이 나온 탓이었다.

"에휴, 누굴 탓하겠냐."

실로 그 말대로였다.

말이야 그렇게 했지만, 그녀는 누군가를 탓할 입장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어디까지나 자하연 본인의 무의식이었기 때문이다.

탄생에 신세계 질서의 술식 따위가 개입하긴 했지만, 딱 거기까지.

그 본질은 어디까지나 자하연의 무의식이 자아를 얻은 쪽에 가깝다.

다른 인격이라고 말할 정도도 아니고, 굳이 따지자면 보다 솔직한 자하연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 만큼, 여기서 무어라 말하든 실제로는 누워서 침 뱉기일 따름.

본인 또한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투덜투덜 늘어놓는 불평엔 별다른 진심이 없었다.

한 가지 다행이라 한다면, 이번 일 덕분에 박우찬이 그녀에 대한 의심을 풀었다는 점일까.

적어도 당분간 무의식 속에서 적출당할 걱정은 없겠지.

그 사실에 감사해야 할지, 아니면 그런 점을 걱정해야 하는 본인의 처량함에 한숨을 쉬어야 할지.

스스로도 알 수 없는 사실에 번민하는 대신, 그녀는 슬쩍 시선을 돌렸다.

널찍이 펼쳐진 무의식의 호수 너머.

하늘의 모습이 비쳐야 할 장소엔 일전과 같은 풍경이 흐르고 있었다.

박우찬과 자하연이 처음으로 만났을 당시.

스산한 뒷골목 근처에서, 그녀와 박우찬은 처음으로 만났다.

……그래.

일찍이 박우찬이 예상했듯이, 신세계 질서의 손아귀 안에서 도망친 건 자하연이 아니라 그녀.

다시 말해, 신세계 질서의 술수를 통해 각성한 자하연의 무의식 쪽이었다.

물론 별다른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니지만.

자하연, 당시 16세.

누군가 갑자기 자신을 임신시킬 생각으로 납치해 개조하고 있다 들으면 기겁할 수밖에 없는 나이다.

아니, 남녀노소 기겁할 내용이었지만.

어쨌든, 그녀는 그런 이유로 도망을 결심했다.

다행스럽게도, 그럴 만한 힘도 있었고.

덕분에 그녀는 별다른 망설임 없이 신세계 질서를 뒤로하고 도주할 수 있었다.

문제는 그 다음.

다시 말해, 신세계 질서의 마법진에 의해 그녀가 획득한 힘이 사라진 이후였다.

당연히 그녀는 궁지에 몰리고 말았다.

자신의 뒤를 밟던 용.

돌연히 그 앞에 나타난 사냥꾼.

번뜩이는 강철.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녀의 목을 옥죄던 온갖 고민은, 갑자기 나타난 사냥꾼에 의해 순식간에 도륙당하고 말았다.

어쩌면 그 탓일까?

어두컴컴한 골목 너머로 빼꼼 고개를 내민 달빛.

그 너머로부터, 용의 피 한 방울 묻지 않은 모습으로 그녀를 돌아보던 사냥꾼.

그 날 보았던 풍경은, 아직도 그녀의 마음 속 가장 깊은 곳에 남아 있었다.

푸흐, 하고 그 사실에 그녀는 헛웃음을 지었다.

물론 박우찬은 이런 사실이라고는 전혀 짐작하지 못하겠지.

여하간, 당연한 일이다.

뒤를 쫓던 용의 압박이 사라지고, 신세계 질서의 마법진과 연결도 끊긴 직후.

방금 전까지만 해도 쓰러져 있던 자하연의 의식이 순식간에 부상했으니까.

당연히 그녀는 박우찬과 직접 이야기를 나눌 시간도 없었다.

자하연 입장에서도 마찬가지.

자하연의 기억이 희미했다 운운하던 이유 또한 마찬가지겠지.

용이 내뿜는 압박감. 신세계 질서가 준비한 마법에 의한 변이.

아마도 자하연 입장에서 보자면 기억이 나는 건 마법진의 영향이 끊긴 이후의 일…….

다시 말해,자신이 용에게 쫓기고 있었다는 사실만 어슴푸레하게 기억이 날 뿐.

그조차 확실하지는 않으리라.

때문에.

처음 박우찬과 이야기를 나눈 이후로도, 자하연은 박우찬을 경계했다.

자신을 구해주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무언가 실감이 나지 않았던 탓이다.

아니, 애시당초 자신이 처한 상황을 파악하기에도 어려움이 있었을 테지.

말하자면 꿈 속을 헤엄치는 듯한 기분이었으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위해 이리저리 움직이는 박우찬의 모습을 보며, 그녀의 경계하는 마음도 점차 풀리기 시작했다.

처음엔 단순히 마음을 열었을 뿐.

다음으로는 살면서 처음으로 느껴보는 가족 비슷한 온기에 느슨한 기분을 품었고.

어쩌면 다른 학생들과 나누던 이야기 속에서, 어쩌면 신서아와의 만남 등을 통해서.

자하연은 천천히 자신의 마음을 자각했으리라.

그녀 또한 알고 있었다.

무의식 속에서.

혹은, 몇 번이나 말했듯이 그녀 또한 자하연이었기에.

이 1년 반의 시간동안, 그 감정에 얼마나 애를 태우고 기쁨을 느꼈던가.

그 끝에 이런 식으로 어느 정도 결론이 났으니, 실로 다행이라 할 법했다.

자하연은 꾹꾹 눌러담고 있던 내심을 토로하는 데에 성공했다.

박우찬은 나름 각오를 다지고 머잖아 확실한 대답을 주겠노라 대답했다.

다른 사람도 아닌 그 박우찬에게 이만한 대답을 끌어낸 시점에서 충분히 훌륭하다 할 성과였다.

그 정도는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째서인지, 그녀는 그 사실에 탐탁치 않은 기분을 느꼈다.

……알고 있다.

그녀 또한 자하연이라는 말에, 거짓은 없다.

신세계 질서의 끄나풀이라 자신을 의심하던 박우찬의 시선 또한, 틀림없이 합당한 이유가 있었다.

오히려 그런 오해가 풀렸으니 잘 되었다고 할 법했다…….

그렇지만.

박우찬은 알고 있을까?

요 최근 자하연이 이상할 정도로 들뜬 듯 보였던 이유가 다름 아닌 그녀 때문이라는 사실을?

정말로 오랜만에, 어쩌면 처음으로 박우찬과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는 사실이 기뻐서.

무의식 속에서 일어난 변화가 자하연의 표층 의식에도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박우찬이 자하연의 고충을 듣고, 확실하게 선을 긋겠다고 결심했을 때.

무작정 도망친 건 단순히 자하연을 위한 행동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슬쩍, 풍경이 흐른다.

흔들리는 밤.

여태까지 자하연의 기억이 아닌 무의식 속에 남은 풍경이었기 때문일까.

한껏 흐릿하기 그지없던 기억 속 풍경들이, 그러나 유난히 선명하게 다가온다.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 이 장면.

밤의 어둠이 깔린 그림자 속에서 자신을 돌아보는 박우찬의 모습만큼은, 조금도 흐릿해질 여지가 없었으니까.

자하연은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그녀는 다르다.

만에 하나,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던가.

예를 들어 자하연의 무의식 속에서 적출당한다거나, 혹은 그녀의 자아 자체가 흐릿해진다거나.

만약 그런 일이 있어도 지금 눈 앞에 있는 이 광경만큼은 흐려지지 않으리라.

그녀에게 있어, 그 날 박우찬과 마주친 그 한 순간은 그만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물론 박우찬은 그런 사실 따위는 전혀 눈치채지 못하겠지만.

어째서 자하연의 기분이 갑자기 들뜬 건지.

하필이면 어째서 자신이 자하연 대신 행동에 나선 건지.

하다못해, 신세계 질서의 끄나풀도 아닌 자신이 어째서 박우찬이나 자하연에게 굳이 이 장면을 감추었던 건지.

박우찬은 십중팔구 전혀 눈치채지 못하리라.

그렇기에.

"……내가 먼저 좋아했는데."

소녀의 한탄은 막연하게 울려퍼질 뿐이다.

무의식의 호수, 그 가장 깊은 장소 속.

조금도 흐려지지 않은 풍경을 어루만지며, 그녀는 그 사실에 안타까움을 느꼈다.

자신 또한 자하연이라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딱히 신세계 질서의 끄나풀이나 소설 속 이야기처럼 몸을 빼앗고 싶지도 않다.

본인 혹은 본체라 할 수 있는 자하연이 잘 되면 자신에게도 좋을 일이라는 건 알고 있다.

애초에 어쩌다 보니 자아를 갖추고 있을 뿐, 그녀는 결국 자하연의 욕망이나 다름없는 존재였으니까.

그렇기에.

그녀는 망설임 없이, 홀로 머무르고 있는 이 장소에서 그런 불평을 터트렸다.

만약 자신이 의식의 표면에 있고, 반대로 자하연이 지금 이 장소…….

무의식 한 가운데에 있다 한들, 서로의 반응은 마찬가지이리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만일 그런 상황이 닥쳤다면, 자하연은 쓸쓸함을 느꼈겠지.

자신은 자하연 대신 박우찬과 이야기를 나누며 웃음을 터트렸으리라.

그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야말로, 그녀는 아쉬움을 느꼈다.

자신의 무고함을 증명하는 데엔 성공했다.

이제 박우찬도 자신을 두 번 다시 의심하지는 않으리라.

때문에.

아마도 더 이상 박우찬이 여기까지 내려올 일도 없다.

자신이 박우찬과 대화를 나눌 이유도 없을 테지.

그게 당연한 일이라는 사실도 안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언가 쓸쓸한 기분이 든다는 사실을 그녀는 참을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마치 사진첩 속에 고이 간직한 사진을 꺼내 바라보듯이.

그녀는 자신과 박우찬이 처음으로 만났던 그 날의 풍경을 바라보며 탄식 어린 한숨을 내쉬는 것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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