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6화 〉 표리부동
* * *
'어처구니없는 누명이군…….'
절절하기 짝이 없는 절규가 귓가를 울린 직후.
박우찬은 자신도 모르게 속으로 그리 투덜거리고 말았다.
진심이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맞은편에 있는 그녀로선 속이 타들어갈 지경이었다.
여하간 박우찬은 연기엔 소질이 없었으니까.
다시 말해, 도대체 무슨 뜬구름 잡는 소리냐며 반문할 듯한 그 심정이 고스란히 얼굴 위로 드러난 탓이었다.
"농담이라고 생각해?"
"아, 아닌데?"
"정말로? 진심으로 그렇게 말할 수 있어?!"
"……조, 조금은?"
다만, 득달같이 달려드는 얼굴 앞에서 대놓고 무어라 성토할 배짱까진 없었으니.
결국 처음 시시콜콜한 말장난 따위에 어울려줄 생각 따위는 없다 단단히 각오했던 게 무색할 정도였다.
슬쩍 한 걸음 뒤로 물러서듯 양보하는 박우찬.
허나, 지금으로서는 그렇게 현명한 행동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눈 앞에 있는 건 자하연이되 자하연이 아니었으니까.
평소처럼 그녀의 존경하는 '오빠'가 당황하는 모습을 보고 살짝 거리 벌릴 상대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정 반대.
그런 식으로 하루하루 넘어가며 마음 속에 쌓아두었던 불만이 집적된 존재가 바로 그녀였다.
"조금? 조금?!"
"아니, 그렇게 말해도……."
막말로, 자신이 뭘 어쨌다는 말인가.
박우찬으로선 억울할 따름이었다.
실제로도 그랬다.
박우찬 입장에서 보자면 어느 날 갑자기 하연이가 훼까닥 돌아버린 상황이었으니까.
때문에.
그녀 또한 천천히 숨을 토하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리고 시인했다.
상황이 여기까지 온 이상, 말을 뱅뱅 돌리면서 상황이 해결되길 기대하는 건 어려운 일이리라.
그러므로.
여태까지 자신 또한 자하연이라고 말했던 바와는 달리, 하연이와 자신을 끈질기게 구분하던 그녀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 애의 마음 정도는 당신도 알고 있잖아?"
대답은 없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대답이 필요할 만한 질문도 아니었다.
그렇기에 뒤이어 말을 잇는 그녀의 태도 또한 거침이 없었다.
"물론 당신에게도 나름 이유가 있다는 건 알고 있어."
실제로, 당장 자하연이 그녀의 마음을 고백했어도 대답은 달라지지 않았으리라.
당장 당사자인 박우찬부터 그런 식으로 명언하며 다니고 있지 않던가.
결과는 십중팔구 거절이었을 테지.
자하연 또한 그 정도는 알고 있었고, 그렇기에 다른 학생들과 달리 섣부르게 행동에 나서지 않은 스스로를 대견하게 여기기도 했다.
이후 다른 학생들이 나름 마음을 다잡았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문제는 역시 그 마음을 숨길 때마다 느껴지는 불안감이었다.
단순히 객관적인 사실만 따지자면, 딱히 거절당한 적 없는 그녀가 주변 학생들에 비하면 앞서고 있는 게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족히 1년 이상 그 마음을 품은 채 안절부절하고 있는 건, 그런 이론 상의 이야기와는 달리 지나칠 정도로 힘든 일이었다.
나름 마음을 정리하고 박우찬의 그런 태도에 대해 결론을 내린 다른 친구들과 달리.
말하자면, 자하연은 계속해서 불안해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어쩌면 그녀가 이토록 적극적으로 나설 수 있게 된 이유 또한 거기에 있을지도 모르지.
일찍이 신세계 질서가 남긴 의식의 흔적.
말 그대로 찌꺼기나 다름없던 무의식 속 존재.
그 총체라 할 수 있는 그녀가 이렇게 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이냐 묻는다면, 적어도 관계가 없지는 않으리라.
요 최근 급격히 몸집을 불리기 시작한 불안감을 먹이로 삼아 그녀의 무의식은 한층 확고하게 자리를 잡은 셈이다.
말하자면, 박우찬의 의심과 다르게 그녀가 자하연의 몸을 빼앗는다거나 하는 알기 쉬운 행동 원리를 가지지 않은 이유 또한 바로 그 때문이었다.
당연한 이야기.
요컨대, 그녀는 박우찬에게 거절당하지는 않을까 불안감과 두려움을 품은 자하연의 무의식.
그 총체에 지나지 않는다.
어쩌다 보니, 신세계 질서가 개입해서.
혹은, 마력이라는 현상 때문에.
마치 영화 속 또 다른 인격처럼 스스로를 확립하긴 했지만, 결국 그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달리 특이할 일도 없었다.
사람은 누구나 겉으로 내비치는 모습과 달리, 내면에 나름의 고민을 쌓아두고 있는 법이니까.
말마따나 그녀는 자하연이되 평소 그들이 알고 있던 자하연은 아니었다.
자하연이 내심 쌓아두고 있는 고뇌.
말 그대로 표리라고 해야 할까.
당장 그녀가 행동에 나선 이유 또한 마찬가지였다.
안 그래도 그런 불안감이 형상화된 그녀다.
헌데, 그 앞에서 대뜸 확실하게 선을 긋겠다고 나서던 박우찬.
이래서야, 행동에 나서지 않기도 힘들다.
옛말로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칠 리 없듯이.
말 그대로 본능적인 행동이었다고 해야 할까.
그러므로.
그녀가 해야 할 일 또한 뻔했다.
자하연의 몸을 빼앗고 인질로 삼아 무언가 다른 의도를 펼친다…….
박우찬이 의심하듯, 그럴 이유나 필요도 없다.
적어도 박우찬이 그렇게 막무가내로 행동하지 않도록 못박아두기만 해도 충분하다.
그게 바로 이 10분 사이 그녀가 도출한 결론이었고, 그렇기에 그녀는 숫제 협상이라도 나서듯 이렇게 나온 셈이었다.
"그렇지만, 결국 당신이 계속 애매한 태도를 취하니까 이러는 거 아니야."
"아니, 그래서……."
"이런 씹."
이 상황에서도 그러니까 확실히 선을 그으려 했다 운운하는 박우찬을 보며 그녀는 씁 하고 혀를 찼다.
물론 박우찬의 말 또한 틀린 건 아닐지도 모른다.
어디까지나 이론상으로는.
속내에 불안함을 품고 있다면, 그야 확실하게 선을 그으면 되는 일 아니겠는가?
문제는 세상 사람 중 어느 누구도 이런 문제를 그런 식으로 해결하려 들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게다가.
박우찬의 행동은 결국 미봉책에 지나지 않았다.
만약 박우찬이 자하연에게 선을 긋는다면?
자하연 또한 다른 학생들처럼 마음을 다잡고 박우찬에게 자신의 각오를 부딪힐지도 모르지.
그리고 그 경우, 자하연은 다른 학생들보다 확연히 뒤늦게 행동에 나선 굼뜨기 짝이 없는 입장을 취하게 된다.
당연히 또 다른 불안감이 샘솟을 수밖에 없겠지.
때문에.
"선을 긋겠다느니, 뭐라느니. 그런 소리만 안 하면 되잖아?"
굳이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가 무엇 있겠느냐.
말하자면 눈 앞의 그녀가 제안하려는 건 딱 그 정도 이야기였다.
여태까지와 마찬가지로 행동하면 되지 않느냐.
구태여 선을 그어 이 계집애한테 상처를 줄 필요가 있겠느냐.
말이야 틀린 말은 아니었다.
박우찬의 선 긋기와 마찬가지로 미봉책에 지나지 않긴 했지만, 적어도 박우찬처럼 막무가내인 해결법은 아니다.
오히려 박우찬 또한 짐짓 모르는 척 시간을 보내는 데에는 이골이 다 나지 않았던가.
썩 나쁘지 않은 제안이리라.
……당사자인 박우찬이 완전히 비상식적인 태도로 나섰기 때문일까?
마음 있는 소녀가 한 명, 마음은 그럭저럭 있지만 딱히 받아줄 생각은 없는 남자 한 명.
거기에 연애 문제라 말하기에는 퍽 정신 나간 발언들이 교차하고 있는 게 인상적인 광경이었다.
'돌겠네.'
심지어 정작 그 원인이라 할 수 있는 박우찬은 이런 생각이나 하고 있었으니, 세상 꼴이 요 모양 요지경이었다.
물론 박우찬의 마음 또한 이해할 수 없는 바라고는 할 수 없었다.
당연한 이야기다.
제 딴에는 나름 이유가 있어서 거절했던 학생들의 마음이다.
애초에 자신이 평범한 가정을 꾸릴 수 있으리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것보다, 애시당초 교사 된 입장으로 학생들의 마음을 받아들이기도 섣부르다.
다른 사람 찾아보는 게 좋지 않겠느냐.
박우찬으로서는 딱 그 정도 마음이었던 탓이다.
헌데, 정작 그렇게 거절당한 제자들이 하나같이 그래도 괜찮다는 둥 마음을 다잡더니 졸지에 이런 꼴이 나다니.
그나마 자신의 마음을 잘 이해해주고 있다 생각한 하연이가 스트레스 쌓인 끝에 훼까닥 돌아버려 가출했다 평해야 할 지금 이 상황.
박우찬으로서도 머리가 아플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연애 경험 한 번 없는 박우찬이 감당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참으로 여인천하 복잡기괴하다 자평하면서도 행동할 수밖에.
그리고.
덕분이라고 해야 할까?
박우찬 또한 실감하고 말았다.
여태까지는 제자들의 마음을 거절하면 그만.
나아가서는, 거절당한 제자들이 나름대로 마음을 다잡고 그에게 선전포고하는 걸 바라보고 있으면 그만.
그렇게 생각했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결국 그 탓에 이런 변고가 있었다면, 박우찬 또한 더 이상 가만히 남일처럼 구경할 수는 없다는 이야기겠지.
때문에.
박우찬 또한 결론을 내렸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남일처럼 보고 있었을 뿐 처음부터 남일은 아니었으니.
어쩌면 진즉부터 내렸어야 할 결론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결론은 눈 앞에서 불평을 터트리고 있는 그녀가 아닌, 제정신인 자하연.
다시 말해, 꼭지가 돌아버린 상태인 자하연이 아닌 조금 침착함을 되찾은 상태에서 그녀에게 들려줘야 할 말이었다.
그렇기에.
"알겠다."
"뭐?"
"네 말도 알겠다고."
박우찬은 처음으로 행동에 나섰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갑자기 알겠다고 말하는 박우찬의 모습을 보고 그녀는 눈매를 찌푸릴 뿐이었다.
이런 말은 조금 그렇지만, 박우찬이 이런 말을 할 때 정상적인 결론이 나오는 경우가 실로 드물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녀로서는 갑자기 눈 앞의 박우찬이 자신에게 달려들지는 않을까 하는 의혹조차 삼키며 그를 살피는 가운데.
마침내 박우찬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그런데, 하연아."
"응?"
"오빠 몬스터 코스프레 안 좋아한다. 오히려 싫어해. 솔직히 말하자면 역겹고."
그리고.
난데없는 취향 고백.
혹은, 제자들 사이에서 암암리에 공유되고 있던 박우찬의 몬스터 혐오증에 대한 토로.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는 말이 들린 다음 순간.
"아니, 잠깐……."
핑 하고 그녀의 눈 앞이 멀어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당연한 이야기였다.
그녀는 자하연의 무의식 속에 잠재된 심층 의식.
말하자면, 자하연이 꾹꾹 눌러담은 불안감의 총체다.
자하연이 은근슬쩍 의식하던 다른 학생들의 모습.
어쩌면 박우찬이 저런 모습을 좋아하는 걸까 싶은 외견들을 보유하고 있던 이유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박우찬의 저런 말이 들린 순간.
지희와 마찬가지로 악마와 같은 날개가.
혹은, 티아마트와 같이 뿔과 꼬리가 돋은 모습을 상상해 만들어진 그녀의 무의식은 힘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이 씹──."
고작해야 한 마디 말.
방금 전, 스스로도 해법이 없다 말했던 상황을 고작해야 한 마디로 해결한 박우찬.
흐릿해지는 시선 너머로 비치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의식을 잃은 그녀의 몸이 풀썩 하고 쓰러졌다.
"이게 먹히네, 진짜."
그리고 그 몸을 제 때에 맞춰 받아든 박우찬은, 문득 그런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추이를 살피면 먹힐 만한 상황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정말 이런 말 한 마디로 상황이 움직일 줄이야.
심지어 그렇다는 건 여태까지 그녀가 떠들던 사실도 거짓이 아니라는 뜻.
정말로 자신의 태도 때문에 스트레스가 쌓이다 못해 폭발해버렸다는 소녀의 기절한 얼굴을 내려다보며, 박우찬은 추욱 어깨를 늘어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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