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냥 몬스터만 죽이고 싶음-305화 (305/371)

〈 305화 〉 표리부동

* * *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녀도 진심으로 박우찬에게서 도망치려는 건 아니었다.

물론 자하연 또한 처음으로 자신이 헌터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에 비하면 일취월장한 게 사실이다.

박우찬의 평가에 의하면 A랭크 말석.

헌터 협회의 기준으로 셈할 시, A­랭크는 될 수 있겠지.

그리고 박우찬의 실력은 몬스터가 상대인 게 아니라면 대략 A+랭크 가량.

도저히 만회할 수 없는 차이라고 말하기는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우찬이 다른 학생들을 상대로 압도적인 차이를 보일 수 있는 건 단 하나.

실제 박우찬의 실력이 A+랭크인 게 아니기 때문이다.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박우찬은 S랭크 헌터.

여기에, 상대가 몬스터라면 S랭크 중에서도 격이 다른 최승준이나 이준구조차 넘어서는 수준이다.

반대로 상대가 인간이라면 A+랭크 수준으로 저하하는 셈이고.

그리고.

일반적으로 단순한 연습이나 특화 분야 등으로 헌터들은 최대 1랭크 가량의 차이를 만회할 수 있다.

즉, 설령 A+랭크 헌터라 해도 자신의 특화 분야에 한해선 S랭크와 대등할 수 있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황윤하가 A+랭크가 된다면 그 내구력만큼은 S랭크 신체 강화 능력자에 필적할 수 있겠지.

허면?

박우찬이 철저한 단련을 거듭할 경우, 박우찬 또한 한 단계 아랫등급.

다시 말해, A+랭크 수준의 능력은 보유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박우찬이 스스로를 평소엔 A+랭크 수준이라 평하는 데엔 바로 그런 이유가 있었다.

근력도 A+랭크 육체 강화 능력자 수준.

내구력도 A+랭크 육체 강화 능력자 수준.

심지어 순발력도 A+랭크 육체 강화 능력자 수준.

스스로의 감각과 절박함에 몸을 맡기고 한계까지 몸을 단련한 결과였다.

당연히 그가 말하는 A+랭크 수준의 전투력이 평범한 A+랭크 헌터 수준이라 생각하기는 어려울 수밖에.

때문에.

박우찬 또한 거기에 대해서 의문을 품지는 않았다.

탐색 특화인 A+랭크 헌터에 필적할 정도의 추적 능력을 하연이가 뿌리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고작해야 10분.

하연이가 모습을 감추었다 말하고 10분도 되지 않아, 박우찬은 그 모습을 포착할 수 있었다.

한 가지 의문인 건, 정작 하연이의 기척 너머에서 느껴지는 움직임 쪽이었다.

'딱히 도망칠 생각은 없는 것 같은데?'

박우찬 정도 되는 사냥꾼이라면, 대상의 행동으로 사고를 추적하는 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지금 도망치고 있는 자하연은 딱히 발등에 불이 떨어진 듯 보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적당히 박우찬을 맞이할 장소를 선별한 뒤, 거기에서 기다리고 있는 듯한 기색까지.

박우찬으로서는 도통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없었다.

갑자기 자신을 피해 도망쳤다기엔 지나칠 정도로 이상한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의문은 머지 않아 해소할 수 있었다.

"안냥, 오빠야."

우스꽝스러운 어조였다.

저번 초대형 게이트 발생 이후, 건물이 무너져 발생한 공터.

그 근처 어귀에서, 자하연은 느긋한 태도로 손을 흔들었다.

옷차림은 낮과 달라진 바 하나 없는 교복.

매끈한 커피색 스타킹 너머, 우아하게 뻗은 다리가 가볍게 팔랑거린다.

동시에, 박우찬 또한 깨달았다.

지나칠 정도로 낯선 행동.

자하연이라 생각할 수 없는 어조.

무엇보다, 다른 의미로 요 최근 눈에 밴 분위기까지.

"하연이가 아니었군."

"아니, 사람 말 좀 듣지 그래? 나도 자하연이라니까?"

거기에 짐짓 억울한 어투까지.

눈 앞에 있는 건 자하연이 아니라 바로 그 일면.

무의식 밑에 가라앉아 있던 바로 그녀였다.

그 사실을 깨달은 시점에서, 박우찬이 공격에 나서지 않은 이유는 단 하나.

눈 앞의 상황을 해결할 만한 방안이 그에겐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상황이나 이유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

이야기를 들을 필요가 있다 해도 일단 제압하고 들으면 그만.

허나.

지금 이 상황은 다르다.

적어도 그에겐 이 상황을 해결할 만한 방법이 없었다.

물론 최승준이나 이준구의 인맥을 동원하면 다른 결과가 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결과를 확신할 수 없다는 데에서 온 망설임.

혹은, 그녀를 향해 주먹을 휘둘러야 한다는 사실.

온갖 의구심이 한 순간이나마 확실하게 박우찬의 발목을 잡아챘다.

"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진 알겠지만."

그리고 그녀가 입을 연 건 바로 그 때였다.

덕분에 박우찬 또한 의문과 별개로 전의를 가라앉힐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눈 앞에 있는 여자에게선 무언가 사악한 의도가 느껴지지 않았던 탓이다.

물론 단순한 옹이구멍이라 하면 할 말도 없다.

여하간, 여태까지 그녀가 자하연의 몸을 차지할 거라고는 전혀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게 사실이니까.

이제 와서 자신의 안목 운운해도 곤란할 뿐이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그녀의 몸을 되찾을 만한 방법이 보이지 않는 이 상황.

아직 눈 앞에 있는 그녀에게는 무언가 대화를 나눌 수 있을 만한 여지가 있는 듯 느껴졌다.

허면, 일차적으로는 거기에 걸어볼 가치가 있다.

박우찬은 그렇게 판단했다.

몬스터가 상대일 때와는 달리, 퍽 침착한 상황 판단이었다.

"그러면 더 이상 길게 말할 필요는 없겠군."

"뭐, 드디어 속셈을 드러낸 거냐 하는 말을 들어도 대답할 말은 궁하고 말이지."

짐짓 축 어깨를 늘어뜨리는 동작.

여태까지와 마찬가지로 퍽 과장스러운 태도였지만, 그나마 지금 그녀의 육체에는 어울리는 행동이었다.

무의식 속에서 보았던 모습과 달리, 아직 성인이라 말하기엔 다소 부족함이 느껴지는 연령이기 때문일까.

저런 우스꽝스러운 태도가 짐짓 발돋움한 듯한 무의식 속 모습보다는 더 잘 어울렸다.

"결론만 말하자면, 딱히 이 애의 몸을 빼앗을 생각은 없어!"

"그 말을 믿으라고?"

"아하하, 힘들겠지?"

본인도 알고 있는 듯해서 다행이었다.

……당연한 이야기.

이미 한 번 이런 일이 있었다.

즉, 두 번은 없으리라 생각하기도 힘들지.

그리고.

박우찬은 언제든 자하연의 몸을 장악할 수 있는 불길한 무언가 따위, 그녀의 마음 속에 남겨둘 생각이 없었다.

별다른 일이 없는 한, 이번 일이 끝나고 저 무의식 속 존재는 정신적 죽음을 맞이하겠지.

적어도 박우찬에게는 그럴 만한 이유와 의욕이 차고도 넘쳤다.

물론 상대방 또한 그 정도는 알고 있을 터.

그러므로.

박우찬이 의혹을 품고 있는 건 바로 그 부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은 끝없이 도망치지 않았다.

죽고 싶지 않다는 의지를 불태우며 그를 공격하지도 않았다.

심지어, 아직도 대화를 나누고 있다.

그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 건지, 박우찬은 도무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아니.

애시당초 짐작이 가지 않는 건 그게 전부가 아니다.

만에 하나, 눈 앞의 그녀가 바라고 있는 게 박우찬과의 대화라고 한다면.

'왜 도망친 거지?'

이런 말은 조금 그렇지만,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들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만약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면 거기서 말해도 됐을 텐데.

박우찬으로선 그런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군."

"응?"

"네 태도 말이다. 너, 도대체 뭘 하고 싶은 거냐?"

그렇기에.

박우찬은 그리 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앙?"

당연한 이야기지만, 눈 앞의 상대에겐 어처구니없는 질문에 지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우찬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의 눈으로 보기에, 눈 앞의 존재는 이미 자하연의 마음 속에 깃든 기생충 비슷한 존재가 되었기 때문이다.

허면, 여기서 타협해선 안 된다.

뻔한 윽박 따위에 평소처럼 장난치듯 어깨를 움츠리고 있어서는 안 된다.

"솔직히 말하자면, 네 목적이 무엇인지는 상관 없어."

"뭐?"

"한 가지 확실한 건, 네가 이렇게 나온 시점에서 너와 나 사이의 오월동주는 끝났다는 점이지."

어쩌면위험하지 않을 수도 있다.

어쩌면별 거 아닌 일일 수도 있다.

더 이상 그런 말이 통용될 시점이 아니다.

"다시 한 번 말하겠지만, 네 의도가 어디에 있다 해도 이 이상 전횡을 용납할 수는 없다."

영 내키지는 않지만, 주먹을 써야 할지도 모르지.

연장까지 꺼낼 수는 없겠지만.

슬쩍 손을 쥐락펴락하며, 박우찬은 마지막으로 선전포고를 마쳤다.

"만약 네가 너희에게 폐를 끼쳤답시고 순순히 몸을 돌려줄 게 아니라면, 나로서는 행동에 나설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물론 어느 정도는 빈말이 섞여 있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여기서 순순히 몸을 돌려준다 한들 박우찬은 전혀 납득할 수 없으리라.

오히려 만약을 대비해 그녀를 하연이의 정신에서 적출하려 하겠지.

그 정도로 지금 그녀가 벌인 행동은 터무니없는 짓거리였다.

무엇보다, 갑자기 하연이의 몸을 납치하고 도망칠 만큼 절박한 사연이다.

이런 말을 듣는다 해도 순순히 몸을 내놓을 리도 없지.

때문에.

박우찬은 어느 정도 손을 써야 할 각오 또한 다지고 있었다.

"너……."

"응?"

그러므로.

박우찬의 말을 듣고 푹 고개를 숙인 그녀의 입.

자하연의 목소리라고는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로 깊은 분노 담긴 울림을 들었을 때.

박우찬은 자신도 모르게 얼빠진 목소리로 반문하고 말았다.

"너 때문이잖아, 이 씨발놈아!!!"

그리고.

몸의 주인이라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발언.

말 그대로 악령이라 칭한들 과언이 아닐 폭언 끝에, 그녀는 세상 억울한 표정으로 노성을 터트렸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