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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몬스터만 죽이고 싶음-304화 (304/371)

〈 304화 〉 표리부동

* * *

"……응?"

그리고.

다시금눈을 떴을 때, 나는 무언가 알 수 없는 위화감에 시달렸다.

가장 먼저 눈에 밟힌 건 하숙집 창문 밖으로 은은하게 드리우는 달빛.

즉, 시간이었다.

"뭐여."

나도 모르게 얼빠진 반응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물론 알고 있다.

업계 양반들 사이에선 '정신과 시간의 방'이라 일컬어지는 현상.

현실과 정신 간섭 능력 사이의 시간에 괴리가 생기는 경우다.

정신 간섭 능력이 위험한 게 바로 저런 현상 때문이기도 하니.

그러나.

보통 이런 현상은 정신 간섭 속에서 보낸 시간이 상대적으로 짧은 경우가 대다수.

이번 경우로 비유하자면, 나름 긴 대화를 나누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1시간도 지나지 않았다…….

이런 경우가 대부분이다.

당연히 나 또한 정신 간섭 능력 쪽에 별다른 가공은 하지 않았고.

것보다, 그럴 만한 실력도 없다.

아니, 내가 정신 간섭 능력을 수동 조작하는 건 이번이 두어 번째고.

벌써부터 그럴 만한 실력은 안 된다.

몬스터에게 사용할 수 있을 법한 기술이라면 또 모를까.

즉, 정신을 차리고 나니 난데없이 한밤중인 지금 이 상황은 무언가 이상했다.

물론 우리가 귀가했을 땐 이미 석양이 지고 있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 정도라니?

심지어 지금은 한여름.

저번 경험을 되살려 보면, 늦어도 초저녁.

평범하게 생각하면 석양이 지기 전엔 눈을 뜰 거라고 생각했으니 더더욱 의외일 수밖에 없었다.

뭐, 그 정도라면 나도 이해할 수 있다.

여하간, 이번엔 지희의 협조도 없었고.

무언가 저번과 달라졌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하연아?"

아무리 그래도 이건 이상하지.

하숙집 한 가운데에서 팔짱을 낀 채, 나는 그런 감상을 내뱉었다.

……대답은 없다.

텅 빈 하숙집 안으로 공연한 메아리가 되돌아오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지금 내 옆엔 하연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처음 눈을 떴을 땐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아니, 바로 얼마 전만 해도 그랬으니까.

숙련자인 지희나 당사자인 하연이에 비해, 내가 비교적 늦게 눈을 뜨기도 했고.

하연이가 잠시 자리를 비웠다 생각할 만한 여지도 있었다.

그렇지만.

대략 5분이 지날 때까지, 하연이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오히려.

"응? 사부?"

"아, 서아야. 혹시 하연이 못 봤냐?"

찰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을 열고 들어온 제자 쪽이 눈에 밟혔을 뿐.

신서아.

같은 하숙집에서 살고 있는 직장 후배 겸 제자는, 내 말에 캔맥주를 까며 고개를 갸웃였다.

"방금 전에 나가던데?"

"뭐?"

나갔다고?

뜬금없이?

아니, 왜?

이런 말은 조금 그렇지만, 하연이는 현재 농담으로도 행동이 자유로운 편은 아니다.

여하간, 매일같이 신세계 질서 측에서 목숨을 노리고 있으니까.

그리고 하연이는 그 나이에도 불구하고 매일 충실하게 그 말을 따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물론 이해할 수는 있다.

속이 답답해졌다거나.

뭐, 그런 일이 있다면 잠깐 산책에 나갈 수도 있겠지.

다만.

'하필이면 이런 타이밍에?'

게다가, 내게는 말도 없이.

어딜 어떻게 봐도 평범한 산책이라 생각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왜? 혹시 몰라서 봐두긴 했는데, 가 보려고?"

"아, 그랬으면 다행이고."

한 가지 다행인 점이 있다면, 서아가 미리 하연이 쪽을 봐두었다는 점이다.

서아의 능력은 천리안.

게다가, 요 최근엔 꾸준히 능력을 연마한 결과 투시 비슷한 능력까지 손에 넣었으니.

하연이가 가는 방향을 미리 살펴두었다고 하면, 뒤를 밟는 건 어렵지 않다.

서아에게 하연이의 호위를 맡긴 적도 몇 번 있었기 때문일까.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감시하고 있었던 거겠지.

감사 인사를 건네며, 다시금 옷가지를 걸친다.

동시에.

무언가 알 수 없는 불안함이 목덜미를 간질거리기 시작했다.

생각 이상으로 지연된 시간.

여기에, 갑자기 돌발 행동을 보이는 하연이.

이 모든 게 단순한 우연일까?

그럴 리는 없겠지.

불길한 일이 연달아 일어났다고 마냥 헛소리를 떠들어도 곤란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심하다.

허면?

도대체 하연이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나로서는 그런 불안감을 감출 수 없었다.

*

'씨이발, 좆됐다…….'

그리고 그 시각.

자하연은 평소와는 달리 걸걸한 말투로 그리 뇌까리고 있었다.

물론 당연한 이야기였다.

왜냐하면 지금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건 평소 자하연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

지금 이 자리에서 자하연의 몸을 이끌고 때 아닌 도주극을 펼치고 있는 건 자하연 본인이 아니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평소의 자하연이라고는 할 수 없다.

무의식 속 자하연.

즉, 방금 전까지만 해도 박우찬과 무의식 속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그녀였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적어도 작금의 상황을 보고 누구나 한 눈에 생각할 수 있듯이, 그녀의 몸을 차지하고자 본색을 드러냈다…….

그런 경우는 아니었으니까.

가장 큰 문제는, 바로 박우찬의 행동 때문이었다.

최근 자하연이 주변 상황 때문에 묘한 초조함을 품고 있다.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박우찬에게 그런 고민을 드러내고 싶어하지 않으면서도, 내심 알아줬으면 하는.

자하연에게는 그런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박우찬은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생각했다.

아, 역시.

하연이도 그런 식으로 마음 고생을 하고 있었구나.

'그러니까 확실하게 선을 그어야겠다, 라니.'

미친 건가?

조금 미안한 이야기지만,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그녀가 그리 생각했다는 건, 달리 말해 자하연 또한 그 말을 들었으면 비슷한 속내를 품었으리라는 뜻이다.

겉으로야 어쨌든, 적어도 속으로는.

아니, 그야 당연하지.

여태까지 자하연이 격변하는 연애 사업 속에서도 중심을 잡을 수 있었던 이유는 단 하나.

적어도 자신은 박우찬에겐 차인 적 없다는 점 때문이었다.

그조차 다른 학생들이 실연의 아픔을 극복한 지금은 별다른 메리트가 못 되는 탓에 초조한 기분을 품었건만.

이 상황에서 고백하기도 전에 곧바로 차버리겠다고?

애매한 마음에 갈팡질팡하느니 확실하게 선을 그어주겠다는 뜻으로?

……물론 애매하게 마음고생 시키는 쪽보다야 확실하게 말해주는 게 낫긴 하겠지.

그렇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가망이 없을 때 이리저리 간을 보는 대신 확실하게 말해달라는 이야기.

적어도 자신에겐 아직 희망이 있다 생각하고 있는 입장으로선 감당하기 힘든 말이기도 하다.

때문에.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연결을 끊으려는 박우찬을 제지했다.

그리고.

평범하게 박우찬을 정신 밖으로 내쫓는 대신, 억지로 박우찬과의 연결을 끊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정신 간섭 능력이 담긴 마력 결정과의 연결을 끊었다고 해야 하겠지만.

덕분에 박우찬은 능력의 반동 탓에 기절.

마력 결정을 사용한 접근이었으니 그리 큰 문제는 생기지 않겠지만, 대략 1분 가까운 시간동안 의식을 잃었다.

자하연 또한 마찬가지였다.

무의식 하에서 일어난 격렬한 감정 활동.

거기에, 비정상적인 능력 단절.

덕분에.

자하연의 의식이 가라앉은 상황에서, 무의식 속의 그녀가 표면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녀가 선택한 건, 곧바로 도망치는 일이었다.

무엇으로부터?

박우찬에게서.

혹은, 박우찬의 대답으로부터.

그렇게 결정되자, 그녀는 허겁지겁 몸을 일으켜 하숙집으로부터 뛰쳐나오고 말았다.

뒤에서 따라붙는 신서아의 시선 따위, 신경을 쓸 여지도 없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경솔한 행동이었다.

적어도 평소의 자하연이라면 이런 행동 따위는 하지 않겠지.

오빠에게 민폐는 끼치고 싶지 않다.

무엇보다, 현 상황도 좋지 않다.

만에 하나 이러다가 신세계 질서의 손에 붙잡히기라도 하면?

자신의 칠칠맞음 때문에 오빠가 피해를 입는 꼴이 되고 만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지나치게 어른스러운 판단이라는 박우찬의 말도 사실이다.

문제는, 자하연의 행동은 본심에서 우러나온 게 아니라는 점.

말 그대로 어른스러운 판단일 뿐이라는 점이다.

즉, 자하연에게도 불만이 없는 건 아니다.

민폐고 뭐고, 그렇게 생각하는 박우찬이 얄밉다.

신세계 질서도 짜증나지만, 갑갑한 건 사실이다.

무엇보다, 오빠도 자신의 마음을 알아줬으면 한다.

평소라면 오빠에게 자신의 마음을 강요할 수 없다던가, 이 이상 민폐를 끼칠 수는 없다던가.

그런 식으로 억누르고 있는 감정이 그녀에게도 없지는 않았으니까.

그리고.

지금 그녀의 몸을 움직이고 있는 건, 어른스러운 판단이 가능한 평소의 자하연이 아니다.

그런 감정.

박우찬에 대한 억하심정. 신세계 질서에 대한 짜증.

말하자면, 충동적인 면을 뱃속 깊이 가라앉힌 결과 감정이 고여 만들어진 무의식.

지금 그녀의 몸을 움직이고 있는 건, 바로 그런 감정이었다.

때문에.

반대다.

평소의 자하연이라면 이런 일은 하지 않을 텐데, 가 아니다.

평소의 자하연이라면 하지 않을 일이기에.

오로지 개인적인 감정 뿐인 어리석은 선택이기에.

누구나 보통은 고르지 않을 길이기 때문에.

의식이 바닥으로 가라앉고, 무의식이 표면으로 솟구친 지금의 자하연으로서는 그리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

하필이면 도망을 선택한 이유 또한 마찬가지였다.

박우찬으로부터, 박우찬의 대답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마음.

다른 친구들은 이미 극복한 실연의 아픔 따위를 무심코 기피하는 마음.

그런 그녀의 속내가 드러난 행동이라 할 수 있으리라.

물론 박우찬은 늦어도 10분이면 그녀의 뒤를 밟겠지.

여하간, 평소부터 이 도시 전역에 걸쳐 그녀를 상시 보호하고 있는 박우찬이다.

고작해야 몇 분 빨리 도망쳤다 해서 정말로 그 감지 능력을 피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때문에.

그녀 또한 박우찬 밑에서 모습을 감추고 싶다는, 그런 바보같은 생각을 한 건 아니다.

단지.

이 잠깐 사이, 무언가 박우찬에게서 다른 대답을 이끌어내고 싶다.

적어도 생각할 시간을 갖고 싶다.

아니, 어쩌면 대답을 발견하지 못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좋다.

일단 시간을 뒤로 미루고 싶다는, 그런 바보같은 충동이 앞섰기 때문이었다.

박우찬과 자하연의 무의식이, 그녀의 속내가 아닌 현실에서 대면하기 10분 전.

자하연의 몸을 움직여 도망친 그녀의 입장을 정리하자면, 대략 이런 느낌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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