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3화 〉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 * *
속보, 하연이가 너무 쉬움.
나도 모르게 그런 감상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지금으로부터 며칠 전.
다시 한 번 자신의 속내를 확인해 보겠냐던 하연이의 제안을 애매하게 받아넘긴 이후.
결국 나 또한 별다른 대안을 찾아내지 못했다.
내가 다시금 하연이에게 시간을 내줄 수 있겠느냐 물었던 건 바로 그 때문이었다.
그리고 하연이는 내 부탁을 별다른 망설임 하나 없이 수락했다.
……이런 말은 조금 그렇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하연이가 곧바로 수락할 줄은 몰랐다.
처음엔 괜찮다고 했지만, 나중엔 역시 한 번 더 네 속내를 살펴도 되냐는 건 곧 네가 요 며칠 사이 의심스럽다는 소리나 진배없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연이는 별다른 내색 하나 없이 내 말에 따라 시간을 냈다.
마력 결정을 구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저번에 하연이의 마음을 엿본 이후, 마지막 점검을 위해 필요하다고 이유를 들이밀면 그만이었으니까.
최승준 이름 앞으로 달아둔 메세지 덕분에, 마력 결정 또한 동아리 경비로 충당할 수 있었으니.
사실상 준비는 끝난 셈이었다.
……내 명예를 위해 미리 말해두겠지만, 딱히 돈이 없어서 저런 짓을 한 건 아니다.
아무리 그래도 최승준 이상으로 빠르게 물건을 구하기가 힘들어서 그랬을 뿐.
아니, 조금 골탕먹이고 싶은 기분도 없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내가 걱정했던 점이 무색하게도, 하연이의 정신에 잠입하는 일은 별다른 문제 하나 없었다.
갑자기 자신을 의심하는 나에 대한 불만. 의혹. 짜증.
어느 쪽이든, 상당히 발목을 잡힐 거라고 생각했는데.
하연아, 너 너무 쉬운 성격 아니니?
선생님은 걱정된다.
"걔가 뭐라고 대답할지 알고 있으면서 또 그러네."
그런 나를 바라보며, 눈 앞의 여자는 다시 한 번 핀잔을 주었다.
의식으로 이루어진 지층 밑.
무의식의 맨틀 위에서, 그 여자는 다시 한 번 나를 맞이했다.
저번과 마찬가지로, 성장한 하연이 비슷한 외모.
거기에 온갖 분위기가 독특하게 버무려진 건 틀림 없었지만…….
"어째 인상이 흐릿하다, 야."
"당신 때문이거든요?"
"엉? 내가 왜?"
"당신이 걔 앞에서 괜히 내 옷차림을 지적했으니까 이러는 거 아니야."
"아하."
옷차림이라고 말하긴 조금 이상하지만, 비슷한 말을 하긴 했지.
혹시 다른 애들을 부러워하고 있는 거냐고.
그 이후, 하연이가 그런 점을 부쩍 의식하게 된 모양이다.
그리고 그런 점을 내색하지 않으려 한 탓에, 저 여자의 인상이 흐릿해졌다는 건가.
그런 점을 보면, 역시 눈 앞의 여자는 기생충이라기보단 신체 조직의 일부.
하연이에게 귀속된 느낌이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물론 내가 홀로 그렇게 단언할 수는 없었다.
여하간, 내가 여기까지 들어온 이유도 있었으니까.
일전, 내가 하연이의 무의식에 발을 들였을 적.
마지막으로 보았던 풍경에서 정지되어 있는 배경을 앞두고, 나는 시선을 던졌다.
"내가 왜 다시 여기까지 온 건지, 짐작하고 있겠지?"
"응? 글쎄? 혹시 날 보고 싶어서?"
"농담하지 마라."
"농담 아닌데……."
노골적으로 축 늘어지는 어깨가 퍽 귀여웠다.
아니, 이게 아니라.
"요 최근, 하연이가 보이는 태도가 이상해."
"그냥 들뜬 거 아니야?"
그렇지?
나도 모르게 그런 말을 꺼낼 뻔했다.
뭐, 틀린 말도 아니었으니까.
이런 말은 조금 그렇지만, 하연이가 보이고 있는 증세는 결국 평소에 비하면 다소 들뜬 정도다.
어지간히 극성을 부리는 집안이라 해도, 고작해야 이런 일에 목소리를 높이지는 않겠지.
실제로 내가 이렇게 행동에 나선 이유 또한 마찬가지.
하연이가 갑자기 들뜬 모습을 보이는 게 일전 하연이의 마음을 들쑤신 이후부터였으니까.
무언가 부작용이라도 생긴 건가 하는 불안함을 차마 지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니, 너무 과민 반응이잖아."
"그, 그런가?"
내 눈 앞의 여자는, 그런 내 말을 시원하게 잘라 부정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조금 찔리는 게 있어서 부정하기도 힘들었다.
"막말로, 다른 애들이 저랬으면 걱정이나 했겠어?"
그렇게 말하면 내가 할 말도 없었다.
몇 번이나 말했듯이, 평소보다 더 활기찬 건 좋으면 좋을 일이지 나쁜 일은 아니니까.
무언가 실수를 할 정도도 아니라면, 오히려 흐뭇하게 바라봐야 할 일이다.
다른 애들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거나, 걱정이 덜 된다거나.
그런 문제가 아니라, 단순한 과민 반응.
자하연이라는 계집애한테 얽힌 사정이 사정이라 지나치게 사태를 비약시켜서 보고 있을 뿐.
그녀는 그렇게 단언했다.
"것보다, 이런 일로 나를 찾아와도 곤란한데. 평소보다 조금 들뜬 것 같아서 찾아왔다고 해도, 뭐라고 대답해야 하는 거야?"
"으, 으음."
뭐, 그렇지…….
나 또한 알고 있던 점이었다.
다만, 여기서 그렇구나 하고 넘어갈 수 없는 건 당연히 눈 앞의 이 존재 때문이고.
그런 내 속내를 알아챈 것일까.
분홍색 눈동자가 생글 하고 휘었다.
"뭐, 그렇지만 세상 만사 뭐든지 이유는 있는 법. 그렇지?"
요컨대, 활기찬 건 좋다.
허나, 그렇다면 어째서 갑자기 그 날을 기점으로 활기차게 변한 건가?
결국 내게 있어 중요한 건 바로 그 부분이었다.
막말로, 내가 능력을 잘못 사용해서 하연이의 전두엽을 건드려버린 결과라고 나오면 웃을 수도 없으니까.
나로서는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는 일이다.
다행스럽게도, 눈 앞의 여자 또한 거기에 대해선 별로 군말을 토하지 않았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협력하려는 태도를 보였을 정도니.
아니, 반대로 방해하려 든 적이 있냐 물으면 나도 대답이 애매한 게 사실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작정 신뢰할 수는 없다.
하연이가 성장하면 이러할까 싶은 얼굴 탓에 매 순간 녹아내리는 긴장을 억지로 다잡으며 귀를 기울인다.
"뭐, 영향이 없지는 않겠지."
"젠장."
"아니, 너무 당황하지 마. 예를 들면, 이를 닦고 나면 시원한 기분이 들잖아?"
그런 거야, 눈 앞의 여자는 짧게 평했다.
요컨대, 정신을 들쑤신 영향이 없는 건 아니다.
그러나.
요 며칠 쌓여있던 고민.
혹은, 무의식 탐사를 위해 억지로 의식을 가라앉힌 덕분에 다소 시원해졌을 뿐.
말하자면 머리가 복잡할 때 머리를 감는 일과 같은 원리다.
문제가 무엇 하나 해결되지는 않았지만, 무언가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 정도는 들 테니까.
말하자면 딱 그 정도 사안이라는 뜻이다.
"그럼, 네가 끼친 영향 같은 건 아니라는 건가?"
"뭐, 내 영향도 없지는 않겠지.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당사자의 기분이 바뀌는데 무의식의 영향이 없을 리도 없잖아?"
"하긴."
무의식으로는 전혀 기쁘지 않은데 의식적으로 즐거운 기분을 환기한다…….
그건 단순히 조울증이다.
게다가, 무의식을 들쑤신 탓에 표층 의식까지 뒤흔들렸다고 하면 더더욱.
'응?'
거기까지 말하다가, 나는 한 가지 묘한 점을 깨달았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 날 하연이는 무의식 속에서 있었던 대화를 전혀 인식하지 못했다.
즉, 하연이의 기분이 변할 만한 요소가 없었다는 뜻이다.
허면?
방금 전 말을 고려할 때, 혹시 지금 하연이의 기분이 즐겁다 못해 방방 뛰고 있는 이유는…….
"아, 아닌데?!"
딱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건만, 눈 앞의 여자는 돌연 그런 목소리를 높였다.
어떻게 잡아떼는 표정도 저렇게 똑같은 건지.
묻지도 못했지만, 물을 필요도 없을 듯했다.
그 모습을 보며, 그녀는 부르르 턱끝을 떨었다.
제 딴엔 숨기려 한 모양이지만, 붉게 달아오른 목덜미가 눈에 밟혔다.
"뭐, 뭐야. 악질적인 질문이네."
투덜거리는 어조에 불만이 섞였다.
물론 나로서는 억울할 따름이었다.
아니, 나 아무 말도 안 했잖아?
"아무 말도 안 해서 문제야."
"뭐?"
"알고 있잖아? 애초에, 걔가 갑자기 기분이 좋아질 이유가 뭐겠어."
정말로 몰라?
그런 시선을 담아 나를 바라보는 분홍빛 시선.
뭐, 그렇게 묻는다면야…….
그야 모르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렇게 자기 주장을 하는데 모르기도 힘들지.
다만.
하연이도 알고 있으리라.
지금 내가 하연이에게 들려줄 수 있는 대답은 하나 뿐이리라고.
하연이 또한 그걸 알고 있을 테고, 그래서 여태까지 침묵을 견지했을 터.
"그거야 당연히 알고 있지. 그렇지만, 사람 마음이라는 게 그렇게 칼로 자르듯 딱 나뉘는 건 아니잖아?"
"뭐, 그거야."
……그렇지만.
눈 앞의 여자는 그렇게 첨언했다.
설령 머릿속으로는 알고 있다 해도 마찬가지.
그건 결국 자신의 대답과 마음을 억누르고 있었을 뿐이다.
그러므로.
"너무 무슨 이상 사태라도 있냐는 것처럼 들쑤시고 다니지 마. 걔는, 정말 그냥 기쁜 것 뿐이야."
"기쁘다고?"
"당신한테 도움이 될 수 있었으니까."
"뭐?"
"몰랐어? 아니, 모른다고 말할 수는 없을걸?"
하연이가 가진 불안감.
자신의 마음을 억누르고 있어야 한다는 상황.
동시에, 그런 관계가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망망대해와 같은 지금.
다른 학생들과 달리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은 적 없고 거절당한 적 없다는 건, 반대로 그런 뜻이기도 했다.
때문에.
하연이는 요즘 상황에 묘한 초조함을 품고 있었다.
그걸 해소할 기회가 온 덕택에, 한층 더 가볍게 마음을 먹을 수 있었을 뿐.
그 뿐이라면, 그야 내가 할 말은 더 없었다.
"그렇게 들으니 뭔가 미안하네."
"미안하다고 할 거라면, 내가 아니라 본인 앞에서 직접 해 줘. 무의식은 결국 무의식일 뿐이니까."
그렇게 말하며 너스레를 떠는 그녀.
역시 전적으로 그녀를 신뢰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이번엔 도움을 받은 게 사실이다.
덕분에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다만.
'하연이는 그런 고민을 하고 있었나.'
솔직히 말하자면, 몰랐다.
아니, 하연이의 속내 자체는 알고 있었지만.
내가 연애 경험이 많으면 뭐 얼마나 많다고.
그런 기분이었나.
단지, 그렇다고 해도 내가 돌려줄 수 있는 대답은 변하지 않는다.
상황도 변하지 않았고, 설령 상황이 변한다 하더라도 마찬가지였으니까.
때문에.
"좋아."
"……응?"
"네 말이 조금 도움이 됐다."
"어, 잠깐."
그 말들을 듣고, 나 또한 결심을 다졌다.
확실히.
하연이의 마음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 지나치게 거리를 벌리고 있었던 건 사실이다.
다른 학생들과 달리, 하연이에게선 내가 멀어질 수도 없으니까.
짐짓 모르는 척 잡아떼고 있는 게 사실이지.
그렇지만.
그런 내 태도가 하연이에게 이런저런 고민을 품게 하고 있었을 뿐이라면.
"아니, 잠깐. 이 미친 놈아?!"
뒤로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와 함께, 내 의식이 얼마 전과 같이 부상하기 시작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