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1화 〉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 * *
그리고 나는 눈을 떴다.
무의식의 폭포와 기억의 홍수 속에서 스스로의 의식을 건져올리는 감각이 퍽 낯설게 느껴졌다.
덕분에 정신을 차리고도 잠시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때문에.
묘하게 웅성거리는 분위기 속.
천천히 호흡을 다잡으며, 나는 마저 몸을 일으켰다.
"어?"
"선생님!"
그런 내 모습을 보고 쪼르르 다가와 안부를 묻는 예은이.
동시에, 휴우 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뱉는 윤하.
퍽 심각한 분위기로 보건대, 아무래도 줄곧 어깨에 힘을 주고 있었던 듯했다.
마저 시선을 돌린다.
동시에.
"선생님, 괜찮죠?"
"옹야."
짐짓 태연한 척, 속으로는 혹시 문제라도 생긴 게 아닐까 쩔쩔매는 기색을 삼키고 있는 지희의 모습이 보였다.
아무래도 지희는 진즉부터 정신을 차렸던 모양이다.
역시 전문가라고 해야 할까.
반대로 하연이는 아직 몽롱한 상태였고.
뭐, 그야 정신을 활짝 열어젖힌 셈이니.
막말로, 백신이 들어와도 반발하는 게 곧 인간의 몸이다.
하물며 그보다 몇 배는 섬세한 정신이라면?
두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설령 헌터라 해도 별다른 훈련을 거치지 않으면 정신면은 평범한 사람과 다를 바 없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말하자면, 하연이의 피로도 장난이 아니겠지.
만에 하나라도 거부감을 느끼는 순간 나나 지희는튕겨져나갈 수밖에 없는 상황.
비유하자면 살인마가 쏘다니는 도시에서 거부감 없이 대문을 열고 다녀야 하는 셈이다.
"결과는 어떤가요?"
천천히 입을 떼어 되묻는 하연이.
다른 학생들 또한 비슷한 반응이었다.
뭐, 그야 궁금하기는 하겠지.
신세계 질서가 설치한 함정이라니.
'위험하니까.'
만약 우리들의 추측이 사실로 밝혀진다면 단순한 호기심 운운하기 이전 문제다.
심지어 그런 반응은 지희 또한 마찬가지였다.
역시 지희도 하연이의 무의식 속에서 있었던 일을 목격하진 못했던 걸까.
아니, 그야 하연이랑 지희는 실력도 비슷하니까.
하연이의 정신을 붙들고 있어야 하는 시점에서 다른 데에 시선을 돌릴 여유도 없었던 탓이겠지.
그런 감상을 삼키며 천천히 상황을 되짚는다.
어디 보자.
"성공적이었지."
"그럼?"
"응. 별 문제 없더라."
누가 먼저라고 할 틈도 없이, 순식간에 한숨이 터져나왔다.
아무래도 다들 이래저래 긴장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하긴, 그럴 법도 했다.
뭐, 괜찮겠지.
틀린 말은 하지 않았고.
일단 기본적인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던 건 사실이니까.
하연이에게 신세계 질서 측에서 준비한 함정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나로서는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을 뿐.
최승준이나 이준구에게 들려줄 대답은 마련됐다.
허면?
문제는 이 이후의 이야기.
즉, 어떻게 해야 할까?
하연이의 정신 속에 무언가 수상쩍은 녀석이 기생하고 있다.
이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전원이 매일 모여 기약 없는 일에 투신할 수도 없으니.'
물론 이번 일도 가벼운 사태는 아니다.
단지, 우리들의 상대가 신세계 질서라는 점이 문제다.
만약 이번 일로 시간을 낭비하다 녀석들에게 선수를 빼앗기면?
곧바로 제 3차 대침공이다.
……그래.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바로 거기에 있었다.
단순히 시간만 날릴 가능성이 있다는 점.
그리고.
당장 나부터 그 녀석이 정말로 사악한 존재인지 확신할 수 없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속내를 드러낸다는 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니까.
일단 나는 싫다.
아니, 기분 나쁘고.
때문에.
방치하기도 힘들지만, 이 이상 같은 일을 반복하기도 멋쩍은 상황.
잠시 고민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순식간에 대책을 마련할 수는 없었다.
결국 나로서도두 손 두 발 다 들 수밖에.
"자, 오늘은 이렇게 시간들 내줘서 고맙다."
"에이, 말로만?"
"다음에 선생님도 시간 한 번 내요!"
"저도 기대하고 있을 테니까요."
"시끄러, 이 자식들아. 그럼, 슬슬 해산하자. 오늘 일은 나중에 따로 정리해서 들려줄 테니까."
방금 전까지 감돌고 있던 묘한 분위기가 자리를 비우며, 다시 한 번 시끌벅적한 소리가 흐르기 시작한다.
덕분에 나 또한 별다른 고민 없이 해산을 선언할 수 있었다.
방정맞은 인사를 건네며 차례차례 교실을 비우는 꼬마들.
말마따나 다음에 조금 고생하긴 하겠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싸게 먹힌 편이 아닐까.
피식 하는 웃음과 함께 지희가 부산스레 쳐두었던 커튼을 거둔다.
그러자 창가 너머로 노을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어느덧 창 밖으로는 저녁이 한창이었다.
"아이고, 고생이다."
"괜찮으세요?"
"뭐, 말이야 이렇게 해도 몸이 고생한 건 아니니까."
그렇게.
동아리 부실에는 나와 하연이만 남게 되었다.
평소라면 내가 먼저 나서거나 하연이를 먼저 보냈겠지만, 다른 학생들도 이미 귀가한 모양이고.
오늘은 그럴 필요 없겠지.
무엇보다, 익숙하지 않은 일을 겪게 된 하연이가 걱정되기도 했고.
마지막으로 동아리 내부를 한 번 살피고, 하연이와 함께 복도로 나왔다.
텅 빈 학교는, 허나 노을의 빛깔 덕분인지 아니면 여름 특유의 더위 때문인지 을씨년스럽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오빠?"
"하연아,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뭐 어때요."
과연 저 말은 주변에 사람도 없으니 괜찮지 않겠느냐는 뜻일까, 아니면 정말 아무래도 좋다는 소리일까.
방금 전 나누었던 이야기 탓인지, 나도 모르게 그런 의문이 생겼다.
'주책이네, 진짜.'
뒤이어 그런 생각도 들었지만.
아니, 그거야 어쨌든.
"왜?"
"이번 일, 정말로 끝난 거 맞나요?"
나도 모르게 침음성이 흘렀다.
역시 당사자였던 탓일까?
하연이는 조심스레 그런 의문을 내비쳤다.
딱히 티를 내진 않았을 텐데.
이런 쪽엔 전문일 지희도 별다른 말 없었고.
게다가, 저 목소리는 가벼운 의혹 따위가 아니었다.
모종의 확신.
숫제 이미 답을 알고 있다는 듯한 어조였다.
"함정 같은 건 없더라."
"다른 게 있었던 모양이네요."
뭐, 거기까지 짐작하고 있다면 더 이상 숨기기도 힘들겠지.
쓴웃음을 지으며 어깨를 좁힌다.
실질적인 항복 신호였다.
"일단 별로 위험한 기색은 아니었는데……."
실없는 감상을 흘리다가 무심코 말꼬리를 감춘다.
물론 그 여자가 나름 친근한 태도를 취했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내게 한정된 이야기.
만약 그 여자가 정말로 하연이의 몸을 빼앗으려 하고 있다면?
단순히 내가 눈치채지 못했을 뿐이라면?
그런 가능성이 남아있는 시점에서, 위험하지 않다 단언하기엔 다소 부족하지 않을까 싶었기 때문이다.
"말씀해주시기 어려운 일인가요?"
"어, 으응."
사실대로 말하자면, 말해주는 건 어렵지 않다.
하연아, 네 무의식 속에 너 비슷한 애가 살고 있더라.
왜인지 다른 애들 흉내까지 내고 있던데?
솔직히 조금 남사스러운 차림새라 오빠 깜짝 놀랐지 뭐니…….
'씨, 씨발.'
이런 말을 여고생 앞에서 하라고?
막말로, 이번 일만 해도 속으로는 퍽 내키지 않았을 터.
거기서 네 속내가 사실 이러이러하더라 하는 식으로 설명하는 건 기껏 허락한 하연이에게도 미안할 일이었다.
하물며 네가 속으로는 그렇게 야한 생각을 많이 한다던데 운운하는 말은 더더욱.
"음, 그럼 한 번 더 할까요?"
"뭐?"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그렇게 고민한 내가 무색할 정도로, 하연이는 담담하게 그리 말했다.
아니, 말이야 틀린 이야기는 아니지만.
무언가 문제가 있다.
그래도 외부에 알리기는 어렵다.
허면, 이번 일을 맡은 내가다시 한 번 하연이의 속내를 살필 수밖에.
다만.
다른 사람한테 속내를 드러내는 일을 저토록 망설임 없이 권유할 줄이야.
하연이가 이렇게 대담한 성격이었던가?
나로서는 그리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말씀드렸지만, 저도 아무한테나 이런 식으로 말하는 건 아니에요."
"그, 그러니?"
"상대가 오빠니까 그러는 거죠."
퍽 위험한 말이었다.
덕분에 나 또한 대답을 애매하게 흐릴 따름이었다.
그런 내 모습을 보며, 하연이는 살풋 웃었다.
노을색으로 젖은 미소가 퍽 인상적이었다.
그렇지만.
'으음.'
한 번 더, 인가.
그야 겉으로 보기엔 틀린 말도 아니지만.
허면, 실제로는 어떨까?
스스로에게 그리 자문한다.
일단 가능성을 점치자면,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은 아니리라.
하연이 안에 신세계 질서가 설치한 함정 따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건, 달리 경계할 필요도 없다는 뜻.
즉, 하연이가 갑자기 몬스터 비슷한 존재로 변이할 리도 없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내가 무심코 하연이를 죽여버릴 가능성도 사라진 셈이니.
이번처럼 굳이 다른 학생들을 대동할 필요도 없겠지.
물론 정신 간섭 자체는 꽤나 어려운 게 사실이지만…….
불가능하진 않으리라.
여하간, 이번 경험도 있고.
무엇보다, 하연이도 충분히 강해졌으니까.
마력 결정을 동원한 어설픈 정신 간섭으로 문제가 생기지는 않으리라.
설령 내가 실수를 저지르더라도 하연이의 몸 쪽에서 멋대로 내 조악한 실수를 무마하려 들겠지.
즉, 리스크가 줄어들었다는 뜻이다.
요컨대, 조건 자체는 문제가 없다.
그렇다면.
다시 한 번 하연이의 마음 속에 발을 들여야 할 필요가 있을까?
아니, 애시당초 그 여자를 어떻게 해야 안심할 수 있을까?
결국 이번 문제의 쟁점은 거기에 있었다.
"저기, 하연아?"
"왜 그러세요, 오빠?"
"너, 혹시 다른 애들이 부럽다고 생각한 적 있니?"
"……네?"
"아니, 갑자기 궁금해서. 예를 들면, 윤하의 태도라거나?"
"아, 아닌데요?!"
예은이의 기품. 지희의 분위기.
그런 이야기를 꺼내려던 내 말문은 순식간에 대답을 토하는 하연이 앞에서 턱 가로막히고 말았다.
짐짓 태연한 척 잡아떼는 대답 너머로도 눈치챌 수 있을 만큼 선명하게 떨리는 목소리.
노을 밑에 있어도 유달리 눈에 밟힐 정도로 달아오른 귓가.
거기에.
"아, 오늘 저녁은 뭘까요?!"
"그, 글쎄?"
"뭐, 뭐든 괜찮겠죠! 가요, 오빠!"
"하연아, 발 꼬인다."
"으악?!"
마치 어색한 병정 로봇처럼 같은 쪽 손과 발을 동시에 내밀던 하연이가,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닫고 휘청거린다.
나도 모르게 피식 헛웃음이 새어나오기도 잠시.
손을 뻗어 붙잡은 하연이의 팔 너머로, 모깃소리 같은 목소리가 감사를 표한다.
'나 참.'
아무래도 그 여자가 했던 말은 단순한 거짓말 따위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아니, 본인도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이렇게 보면 의심스럽다 말하기는 조금 어렵긴 한데…….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런 고민을 삼키며, 나와 하연이는 귀갓길에 올랐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