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0화 〉 마왕의 반려
* * *
이윽고 둘의 의식이 다시금 바닥에 발을 붙였다.
슬쩍 주변을 훑자 어둑어둑한 풍경이 눈에 밟힌다.
방금 전과 마찬가지였다.
혹시나 신세계 질서 상층부의 얼굴이라도 확인할 수 있을까 싶었던 박우찬으로서는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뭐, 어쩔 수 없겠지.
말하자면 지금 그들이 관람하고 있는 풍경은 일종의 무의식.
자하연의 흐릿한 기억을 중심으로 재구성한 모습에 지나지 않는다.
당시 상황 정도야 어쨌든, 인물의 얼굴 따위를 정확히 구현하긴 어려울 수밖에.
덕분에 박우찬 또한 재빨리 포기하고 상황을 관망할 수 있었다.
문제는 그 상황 자체가 영 무료하다는 점이었지만.
박우찬에게도 익숙한 보육원 앞 풍경이 보인다.
갑작스레 찾아온 그림자를 보고 연신 고개를 숙이는 원장.
그 옆에서 어리둥절한 기색으로 선 하연이가, 몇 번이나 원장과 그림자를 번갈아 지켜보기 시작한다.
허나.
이윽고 진행된 이야기 속, 하연이의 표정이 점차 변하기 시작한다.
어안이 벙벙한 표정에서 밝은 얼굴로.
동시에, 슬쩍 뻗은 손이 조심스레 그림자로 이루어진 옷소매를 잡는다.
"……끄응."
"어머, 불편한 표정이네."
"아니, 당연한 거 아니냐?"
물론 기억일 뿐이라고 하면 그야 그렇겠지.
하지만.
이 뒤의 일을 알고 있는 박우찬으로선 아무래도 내키지 않는 기분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럼 조금만 빨리 되감을까?"
후후, 짧은 웃음을 머금은 채 손짓하는 자하연의 분신.
거기에 따라, 세상의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다.
박우찬으로선 다행인 일이었다.
그에겐 저런 기술이 없었으니까.
아무래도 지희는 재주 좋게 기억 속 세상의 시간을 만지작거릴 수 있었던 모양이지만…….
마력 결정을 이용해 간신히 발을 들여놓은 수준인 그에게 그토록 고등한 정신 조작은 불가능했다.
스르륵, 시간이 흐른다.
보육원을 떠나는 하연이.
그녀를 데려가는 그림자.
이윽고 멀어지는 의식까지.
다시금 시간의 흐름이 정상적인 수준으로 돌아왔을 때, 박우찬은 처음과 비슷한 연구소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단지.
무언가 수상쩍은 연구소 한 가운데에서 홍소를 터트리던 연구자와 달리, 이번엔 보다 명료한 상황이었지만.
연구자 대신 붉은 염료로 그려진 마법진 위, 의식을 잃고 쓰러진 하연이가 보였다.
여하간, 능력 하나 각성한 적 없는 계집애가 상대라면 납치하는 건 어렵지도 않았겠지.
심지어 명목상 보호자들 또한 신세계 질서의 끄나풀에 지나지 않으니.
덕분에 신세계 질서는 별다른 문제 없이 의식을 진행할 수 있었다.
그리고.
"문제가 있었다면 여기겠지."
다시 한 번 적당히 시간을 감으며, 여자는 그렇게 말했다.
뭐, 하루 종일 의식을 보고 있을 생각이야 없었으니 박우찬으로서도 좋을 따름이었지만.
무엇보다.
'느려.'
박우찬 또한 무엇이 문제라 말하는 건지 쉬이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다.
고작해야 의식 한 번 치르는 데에 몇 번이나 시간을 감은 건지.
즉, 신세계 질서가 자하연을 상대로 진행하려던 의식은 상당히 느긋한 물건이었다.
아니, 그야 당연한 이야기겠지.
애시당초 신세계 질서의 목적은 자하연의 신병 확보가 아니다.
그건 어디까지나 대목적으로 이어지는 중간 목적, 징검다리일 뿐.
실제로 그들이 자하연에게 기대하는 건 제 3차 대침공의 촉매.
마왕이라 일컬어지는 규격 외 등급 몬스터를 소환하기 위한 마중물에 지나지 않는다.
당연히 그만한 거물을 부르기 위한 밑준비인 만큼, 시간이 걸릴 수밖에.
적어도 티아마트와 김민철의 사례처럼 순식간에 처리할 수 있는 일은 아니리라.
문제는 바로 거기에 있었다.
족히 며칠은 두고 보았어야 할 의식.
그 사이, 자하연이 정신을 차린 것이다.
물론 신세계 질서는 바보가 아니다.
당연히 그럴 경우를 대비해 자하연 주변에 감시 인원을 붙여두었던 건 당연지사.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문제를 지적하자면, 결국 이 의식의 주체가 몬스터들이었다는 점이리라.
즉.
"비켜……!!"
간신히 의식을 되찾은 자하연이 비틀비틀 몸을 일으킨다.
거기에 대해, 그녀를 다시 본래 자리로 돌려놓고자 다가온 몬스터들.
다시 말해, 마왕의 부하들을 향해 그녀는 그렇게 일갈했다.
그리고.
신세계 질서에서 호위라는 이름의 감시를 위해 붙여두었던 인원들은, 그녀의 말 한 마디에 그녀를 풀어주고 말았다.
이번 계획 일정표를 짠 게 신세계 질서 측 샌님들이었기 때문에 발생한 실수였다.
몇 번이나 말했듯이, 몬스터는 일종의 짐승이다.
동일한 계통수에 속한 자신 이상의 상위 개체를 보면 판단 이전에 몸이 복종하게 되어 있으니.
요컨대, 지금 신세계 질서 중에서 하연이의 말을 거부할 수 있는 몬스터는 존재하지 않았다.
용. 악마.
어느 쪽이든, 마왕과 비등하다 일컬어지는 존재에게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괴물은 없었으니까.
……진행된 의식은 전체로 따지면 극히 일부.
허나, 고작해야 한 마디 명령을 던지는 데엔 그 정도면 충분했다.
그렇게 하연이는 도망쳤다.
도망칠 수 있었다.
그리고.
딱 거기까지였다.
애시당초 중간에 중단된 의식이다.
마법진과의 연결 따위, 탈출하고 채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끊기고 말았으니.
하연이의 몸에 임했던 거대한 마력이 그 몸을 떠난다.
당연히 더 이상 명령의 영향을 받지 않는 용을 상대로, 하연이가 도망치긴 어려웠다.
그렇게 마침내 궁지에 몰린 순간.
"당신과 만나게 된 거지."
짝, 하고 박수를 치며 그렇게 말하는 그녀.
그 소리에 맞추어, 흐르고 있던 시간이 뚝 하고 멈추기라도 한 듯 정지한다.
물론 박우찬으로서는 상관 없는 이야기였다.
이미 볼 건 다 봤으니까.
이 정도라면 충분히 알아낼 만한 건 전부 알아냈다 할 수 있으리라.
단지.
"어머, 정렬적인 시선."
"잡아떼지 마라."
동시에, 이번 일 때문에 샘솟은 의문도 있었다.
예를 들면, 눈 앞의 존재다.
하연이에게서 몬스터의 흔적이 느껴지지 않았던 건 대충 알겠다.
말하자면, 하연이가 도망쳐나올 땐 아직 몬스터의 영혼을 깃들인 빙의 수준.
육체가 변할 레벨은 아니었다는 게 되겠지.
첫 만남 당시, 어렴풋이 그 근처에서 느껴지던 몬스터의 기척은 말하자면 빙의의 잔재라고 할 수 있으리라.
허면?
"너, 무슨 생각이냐?"
문제는 하연이가 지금 이 광경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만약 어렴풋이 정신을 차린 하연이가 마음을 다잡고 신세계 질서에게서 도망쳤다면.
그러다가 나를 만나게 된 거라면, 당연히 하연이도 이 광경을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
물론 의식이 몽롱했던 탓에 기억이 흐릿할 수는 있겠지.
그렇지만.
아무리 그래도 무엇 하나 기억나지 않을 정도는 아니었으리라.
만약 그 뿐이었더라면 박우찬도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겠지.
뭐, 조금 이상하긴 하지만 딱 그 정도.
있을 수 없는 이야기는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그 날.
빙의의 여파라고 해야 할까?
혹은 마법적 의식의 잔재라고 해야 할까.
눈 앞에 있는 자하연의 무의식은 바로 그런 존재였다.
그리고.
지금 이 장면은 자하연의 의식이 아닌 무의식 속에 파묻혀 있던 기억이다.
허면?
저 당시, 간신히 눈을 떠 그 몸을 이끌고 도망친 건 과연 누구인가.
자하연 본인인가?
아니면 자하연의 무의식, 다시 말해 눈 앞에 있는 이 여자인가.
박우찬은 후자라고 생각했다.
만약 눈 앞의 그녀가 없었다면 또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눈 앞의 여자는 박우찬을 방해하려 들지는 않는 듯했다.
오히려 이 기억을 탐사하는 데에 도움을 주었을 정도였으니까.
아니, 이 기억만 해도 마찬가지다.
만일 자하연의 몸을 이끌고 도망치려 했던 게 눈 앞의 무의식 덩어리라면?
적어도 그녀는 신세계 질서 측에 협력할 생각이 없다는 뜻이리라.
즉, 신세계 질서가 설치한 함정 따위는 아니다.
물론 처음에 생각한 건 조작의 가능성이었지만, 고작해야 무의식 덩어리.
아무리 그래도 이런 기억을 멋대로 만지작거리며 조작할 만한 힘은 없으리라.
때문에.
박우찬으로서는 더더욱 그 의도를 알 수 없어 경계할 수밖에.
"아니, 진짜 너무하네."
그리고.
여태까지 그랬듯, 눈 앞의 여자는 자하연의 얼굴로 다시 한 번 투덜거릴 뿐이었다.
그렇지만 이번엔 박우찬 또한 쉽게 넘어갈 생각은 없었다.
끊임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
결국 여자 또한 어깨를 좁히고 만다.
"그게 그렇게 중요한 일이야?"
"그래."
"왜?"
"뭐?"
"내가 몸이라도 빼앗을까봐?"
살짝 뜨끔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런 생각이 없었다고는 말할 수 없을 테니까.
그런 모습을 보며, 그녀는 파하핫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 애초에 빼앗고 뭐고 이전에, 나도 자하연이라고 했잖아?"
"거짓말이군."
"흐응? 왜 거짓말이라고 생각하는데?"
그 말에 박우찬은 꾹 입을 다물고 시선을 돌렸다.
뒤이어 다시 한 번 간드러지는 웃음소리.
그 모습을 보며, 무엇이 그리도 즐거운지 그녀는 팔락팔락 고혹적인 몸짓으로 푸른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마치 붓칠하듯 쥔 머리카락이 하늘 위를 덧칠하는 모습이 퍽 인상적이었다.
"무슨 생각 하는지 알겠네."
"뭐, 뭐가?"
"미안한데, 그런 건 다 환상이에요 오빠. 이 애도 무의식 속에선 이런저런 생각 다 한다구."
이런저런 생각?
그런 말이 박우찬의 목구멍 근처까지 올라왔다.
다만, 머리털 난 이래 이토록 노력한 적이 있었던가 싶은 박우찬의 노력 끝에 그 말들은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하고 다시 가라앉고 말았다.
만약 여기서 자신이 섣불리 그런 말을 꺼냈다간 앞으로 하연이 얼굴 보고 살기는 힘들겠단 생각이 머리를 스친 탓이었다.
"정말인데. 예를 들면, 혹시 오빠는 고자인가 하는──."
"아, 안들려. 안들려!!"
"싱겁긴."
피식, 다시 한 번 작렬하는 코웃음.
도저히 말싸움에선 이기기 힘들겠다 싶은 생각에, 박우찬은 고개를 좌우로 젓고 말았다.
그런 그를 보며, 분홍색 눈동자가 샐쭉 하고 휘었다.
"그래도, 거짓말은 아니야."
"응?"
"만약 의심이 가면 밖에 나가서 내가 일러주는 대로 행동해보는 건 어때? 분명히 좋아 죽을 걸."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꺄르륵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마치 부채질치듯 느긋하게 흔들리는 날개.
결국 당장에 대답을 듣기는 퍽 요원하다 싶은 마음에, 박우찬은 곧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면 그 마음까지 들킨 탓일까.
"그럼, 다음에 또 봐?"
이미 볼 장 다 봤다 생각하는 박우찬의 말과 달리, 그런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그리고.
박우찬의 의식이 수면을 향해 솟구치기 시작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