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8화 〉 사룡들의 어머니
* * *
사실대로 말하자면, 내가 이번 일을 두고 가장 먼저 고민한 건 바로 지희가 몽마라는 사실이었다.
아니,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혼혈이라 해야 하겠지만.
어쨌든 이제 와서 몬스터 비스므리한 마력에 몸을 맡기고 싶지는 않았다.
때문에.
내게 주어진 선택지는 총 두 가지.
하나는 안정제를 과다 투여하는 방안이요, 다른 하나는 정신 간섭 능력이 담긴 마력 결정을 사용하는 방안이라.
당연히 보다 용이한 건 전자 쪽이었다.
안정제는 당사자를 잠재우기도 하니까.
몽마의 힘을 빌려야 한다는 점까지 고려하면 썩 나쁘지 않은 선택이리라.
무엇보다, 마력 결정은 제어하기도 힘들고.
마력 결정은 결국단순한 힘 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다.
최승준 쪽을 예시로 들어 설명하자면, 일종의 냉기 뭉치라고 할 수 있겠지.
냉기를 터트리는 건 가능해도, 세세한 조정은 힘들다.
그나마 마력 조작이 가능한 나니까 이 정도지, 다른 헌터들이 사용하면 정말로 단순한 액체질소 수준이겠지.
정신 간섭 능력 또한 마찬가지다.
십중팔구 환상을 보여주는 정도가 전부겠지.
나도 제어하기 힘들 정도고.
하물며 이번 일처럼 적잖은 위험 부담이 존재하는 판국에 마력 결정을 의존할 수는 없었다.
"미쳤냐?"
"뭐?"
"헛소리 말고, 마력 결정이나 준비하도록. 안정제라니, 자살 행위도 유분수지……."
뭐, 어디까지나 처음엔 그럴 생각이었다는 뜻이고.
최승준의 격렬한 반대에 따라 결국 마력 결정을 사용하게 되었다.
그리고.
'니미.'
나도 모르게 욕설을 내뱉고 말았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마력 결정을 사용해 하연이의 마음에 잠입하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지희의 안내를 받아도 마찬가지였다.
말하자면 해저 동굴에 가까운 감각.
개중에서도, 사전에 길을 뚫고 이를 지탱하고 있는 지희의 마력은 곧 터널의 내벽이나 다름없으니.
해저 터널 안을 사고 한 번 없이 경비행기로 주파하는 느낌일까.
바야흐로 곡예에 가까운 움직임이었다.
때문에.
"흠."
발이 바닥에 닿는 감각과 함께 눈을 떴을 때, 나는 의아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성공한 건가?
당연한 이야기지만, 대답은 없었다.
단지.
"……흐, 하핫! 흐하하하핫!!"
뜬금없는 웃음소리가 나를 반겼을 뿐.
무심코 시선을 돌리자, 거기엔 홍소를 터트리고 있는 연구자가 보였다.
뭐, 근거는 없지만.
백의 입고 있으니 십중팔구 연구자겠지.
동시에, 슬쩍 주변을 살핀다.
어두컴컴한 실내.
짐작하자면 연구소일까?
개중에서도 이 답답한 느낌으로 미루어 말하자면 지하일 테고.
다소 과감하게 추측하자면 비밀 연구소라고 답할 수 있으리라.
퍽 전형적인 화면이라 도리어 무어라 말하기 힘든 점은 있었지만.
단지.
"신기한데."
구태여 입 밖으로 감상을 토했지만, 눈 앞의 사내가 반응하는 일은 없었다.
지희가 설명했던 그대로, 마치 유령이라도 된 듯한 감각이었다.
물론 나로서는 눈 감았다 뜨니 난데없이 이상한 연구소에 홀로 동떨어진 꼴이라 퍽 당황스러웠지만.
기억 속 세상.
눈 앞의 이 현상을 지희는 그렇게 칭했다.
허면, 지금 이 광경도 하연이의 기억 중 일부라는 걸까?
솔직히 말하자면, 퍽 회의적이었다.
아니, 이런 말은 조금 그렇지만…….
"너무 수상하다, 아무리 그래도 이런 기억이 있다면 따로 설명하지 않았겠는가. 그런 생각이 눈에 선하네."
그런 나를 향해 불현듯 이죽거리는 목소리가 있었다.
여기서 나도 모르게 몸을 돌린 이유는 크게 두 가지.
첫째는 이 기억 속 세상이라는 문물에 도통 익숙해지기 힘들었던 탓이다.
즉, 누군가 내 말에 대답했다지레짐작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뭐?'
둘째.
방금 전 들린 목소리는 지나치게 귀에 익었다.
그리고.
"안녕, 오빠."
마찬가지로, 비밀 연구소라는 풍경엔 지나칠 정도로 어울리지 않는 모습.
동시에, 실로 낯익으면서도 낯설기 그지없는 태도.
배경 위로 붕 뜬 입체 영상과 같이, 자하연은 거기에 있었다.
*
……아니, 하연이는 아니다.
박우찬은 뒤늦게 그리 생각했다.
실제로, 박우찬 앞에 선 그녀는 자하연이되 자하연이 아니었다.
허나, 자하연이 박우찬과 동년배라면 이러할까 싶은 외모인 건 사실이었다.
마치 폭포처럼 구불구불 물결치는 쪽빛 머리칼.
부드럽게 휘어진 선홍색 눈동자.
키는 비슷하지만, 완연하게 학생 티가 사라진 얼굴.
그러나.
넋을 빼앗기고도 남을 그 모습에도 불구하고, 박우찬의 시선이 향한 건 그녀의 얼굴이 아니었다.
등 뒤.
혹은, 관자놀이.
머리 양 옆으로 우악스레 돋은 뿔.
느긋하게 늘어뜨린 박쥐의 날개.
숫제 악어를 닮은 꼬리까지.
말하자면, 눈 앞에 있는 자하연 비슷한 누군가는 그녀 위에 추가로 몬스터 비슷한 무언가를 뒤섞은 듯했다.
옷차림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런 말은 조금 그렇지만, 하연이보다는 지희에게 어울리는 차림새였다.
차라리 몽마 비슷한 느낌이었다는 뜻이다.
아니, 어울리지 않는다고는 말할 수 없겠지만.
묘하게 위화감 가득한 만남이었다.
틀림없이 눈 앞에 있는 건 하연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묘하게 위화감이 느껴지는 행동거지.
단순히 어색할 뿐이라면 또 모르겠지만, 이상할 정도로 눈에 밟히는 점이 수두룩했다.
어쩌면 그 때문일까?
다음 순간, 박우찬은 자신도 모르게 감탄을 토하고 말았다.
'닮았군.'
누구랑?
그렇게 물으면 달리 할 말이 없으리라.
하지만.
눈 앞의 여자는 틀림없이 그녀들을 닮았다.
예를 들어, 머리에 돋은 뿔과 꼬리는 티아마트의 모습을.
짐짓 고혹적인 의상은 지희를.
나긋나긋한 손동작은 예은이를.
자신만만한 미소는 윤하를.
애태우듯 아슬아슬한 태도는 서아를.
말하자면, 그녀는 하연이를 중심으로 박우찬 주변의 여자들을 뒤섞은 듯한 모습이었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
마치 질문을 혓바닥 위로 굴리듯, 여자는 부드럽게 말했다.
그리고 박우찬은 뒤늦게 깨달았다.
지희는 그렇게 말했다.
여왕의 기억으로 이루어진 세상에서, 자신은 홀로 움직이던 누군가를 만났다고.
대상의 기억.
거기에 섞인 자신의 기억.
여기에 온갖 감상이 뒤섞인 무언가.
말하자면, 기억 속 세계를 주관하는 핵심 인물.
신세계 질서가 함정을 팠다면 그 부분이리라고, 류지희는 말했다.
때문에.
박우찬은 확신했다.
눈 앞에 있는 여자가 바로 그 함정이리라고.
그럴 수밖에 없었다.
너무나도 노골적인 모습이었으니까.
실제로, 여자 또한 그 점은 부정하지 않았다.
단지.
"지금 내가 취하고 있는 모습이 정말로 혼재된 기억 때문이라고 생각해?"
"뭐?"
퍽 묘한 질문이었다.
자신의 무고함을 주장하지도 않는다.
신세계 질서의 함정이라는 사실을부정하지도 않는다.
도리어 자신의 외모에 대한 질문을 던지다니.
상당히 뜬금없는 전개에 박우찬도 내심 의문을 품고 말았다.
동시에, 짐짓 자랑스레 가슴 위로 손을 뻗는 그 모습에 무심코 시선을 돌리고 만다.
한층 완숙해진 하연이의 몸으로 취하는 동작은 지나칠 정도로 고혹적이었다.
'제, 제기랄.'
아니, 하연아.
저게 여고생이라니, 무리지.
박우찬은 그렇게 생각했다.
진심이었다.
그런 그의 반응을 보고 즐기듯, 묘한 외견의 누군가는 쿡쿡 짧게 웃음을 터트렸다.
"아무래도 효과가 없지는 않았던 듯하네."
"……효과?"
그 말에 박우찬은 자신의 몸 상태를 점검했다.
혹시 자신의 이 반응 또한 모종의 능력 때문이 아닐까 싶었기 때문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별 반응은 없었다.
애시당초 자하연의 능력은 저주.
매료 따위가 아니다.
실제로도 마찬가지였다.
즉, 눈 앞의 여자가 말하는 건…….
"지금 이 모습은 자하연 이 계집애가 너를 위해 상상한 그림이야."
"뭐?"
이번엔 박우찬의 말문이 막힐 차례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아니, 뭐라고?
물론 정말로 말 뜻을 이해할 수 없었던 건 아니다.
단지, 그의 뇌가 순간적으로 이해를 거부했다.
"티아라는 여교사의 연령대에 대한 질투. 신서아와 네 사이의 거리감에 대한 막연한 동경."
어쩌면 친구들에 대한 불안감도 있을까?
자칭 자하연의 분신은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박우찬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는 척 할 수 있을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다.
"어때? 이 모습은. 자하연이 생각했듯, 네게도 꽤 구미가 당기는 모습일까?"
솔직히 말하자면, 부정하기는 힘들었다.
제, 젠장.
'나, 너무 쉽지 않나……?!'
박우찬은 오늘처럼 그 사실에 한탄한 적이 없었다.
이런 말은 조금 그렇지만, 지금 이 나이까지 오로지 헌터 삼매경으로 내달린 삶.
까놓고 얼굴만 적당히 괜찮은 수준에 자신을 좋아하기만 하면 누구라도 좋을 사람이 바로 박우찬이다.
거기에 자신의 취향을 따라 이런 고민을 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그야 내심 마음이 흔들릴 수밖에.
때문에.
억지로 정신을 되잡는다.
취향 문제야 어쨌든, 덕분에 짐작할 수 있는 점도 있었다.
"나 참."
처음부터 차근차근 흔적을 되짚을 생각이었건만, 설마 곧바로 정답을 찾아버릴 줄이야.
그렇게 생각하며 어깨를 늘어뜨리는 그 모습에, 눈 앞의 여자는 재미가 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물론 눈 앞의 여자가 말하는 게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건 아니다.
단지.
이 기억 속 세상에서, 하연이의 그런 알 듯 모를 듯한 욕구를 받아 모습을 변모시킬 수 있는 존재.
나아가서는, 자신에게 말을 걸고 유혹을 던질 수 있는 누군가.
"그건?"
그건 누굴까.
마치 질문이라도 하듯, 여자는 그렇게 말을 던졌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대답은 어느 정도 정해져 있었다.
여하간, 이번에 박우찬이 찾으려던 건 일종의 증거.
신세계 질서가 자하연의 몸으로 제 3차 대침공 따위를 획책했다는 증거다.
허면?
반대로, 제 3차 대침공의 주역.
신세계 질서의 신.
일곱 마신들의 위에 군림하는 마왕을 소환할 수 있는 촉매는, 과연 무엇일까.
설마 지나가던 몽마 따위를 붙잡아 적당히 촉매로 삼으면 마왕을 소환할 수 있을 리도 없겠지.
즉, 마왕의 소환에는 그 이름값에 어울리는 무언가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 무언가는 성좌와 통하며 몽마에 가까운, 조로아스터 교의 대탕녀에 가까운 존재이리라.
박우찬은 그렇게 추론했다.
거기에서 시작된 고민은, 놀랍게도 얼마 지나지 않아 대답을 찾을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조로아스터 교에서 마왕 아지 다하카.
나아가서는, 그 인간형 모습이라 일컬어지는 자하크의 왕비들 중 한 명은 곧 그의 어머니라고 한다.
죄 지은 자.
페르시아 신화에 있어, 최초로 근친상간을 저지른 여자.
온갖 죄와 잘못이 그녀로부터 시작했다 일컬어지는 존재.
그렇지만.
타국의 신화에 등장하는 자하크의 왕비는, 그의 어머니가 아니다.
마왕과 함께 수많은 죄를 저지르고 불의를 행하는 용.
사악한 용들의 어머니이며, 그 뿌리가 되는 여신.
세상의 모든 용과 악마를 낳았다는 사룡들의 어머니.
아르메니아 신화에선 마왕 아지 다하카에 필적하는 그 존재를 또 한 마리의 악룡이라 지칭한다.
즉.
"어머."
재미없긴.
마치 그렇게 말하는 듯한 태도로, 방금 전까지만 해도 여고생 행세를 하던 악룡.
혹은, 지금으로부터 1년 전 신세계 질서에 의해 각성한 자하연의 단면은 짐짓 너스레를 떨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