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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몬스터만 죽이고 싶음-294화 (294/371)

〈 294화 〉 분기점

* * *

류지희가 눈을 떴을 때, 주변은 어느덧 지켜보는 사람 하나 없었다.

아니,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단 한 사람 뿐이었다.

"아, 일어났니?"

"선생님?"

방금 전까지 밖에서 육체 노동이라도 하고 온 듯한 느낌이었다.

외투 쪽은 자신이 담요 대신으로 쓰고 있으니 그렇다 치더라도, 소매까지 걷어붙인 꼴이라니.

'나름 위험한 상황이라고 생각했는데.'

몽마들이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알 수 없다는 건 그녀와 담임 양자가 모두 동의한 점이었다.

그런데도 자리를 비운 그 모습에 무심코 심통이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어땠어?"

그런 그녀의 기분을 깨달은 건지, 박우찬은 순식간에 화제를 전환했다.

허나, 별다른 일 없었다고 넘어가기엔 지나칠 정도로 색다른 경험이었던 게 사실.

류지희 또한 뻔뻔하게 시치미를 떼지는 못했다.

무엇보다, 당황스러운 건 그녀 또한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마지막까지 그녀를 힐문하던 끝에 결국 단념한 듯 고개를 젓던 여왕.

이윽고 기억의 흐름 속에서 시작된 마지막 날 속에서, 모녀는 작별 아닌 작별을 마쳤다.

그리고.

다시금 당도한 현실 속에서, 류지희는 다소 황망한 기분을 느꼈다.

마치 오랜 꿈을 꾼 듯한 기분이었다.

예상 밖의 만남.

예상 밖의 태도.

예상 밖의 결말.

무엇 하나 자신의 예상과 같았던 점이 없었다.

동시에, 의혹이 닥쳤다.

기억 속 세상에서 보았던 애정은 진짜였던 걸까?

아니면 달리 속내가 있었던 걸까.

아니, 그 이전에.

설령 진심이었다 한들 달라지는 건 있을까.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녀가 남상원의 캠프를 붕괴 직전까지 몰아붙였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애시당초 류지희 자신의 원한은 그토록 가벼운 물건이었나?

온갖 고민이 회오리친다.

그러나.

류지희는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당연한 이야기였다.

애초에 이런 고민을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죽었으니까.

지금으로부터 1년 전, 몽마의 여왕은 신세계 질서 손에 죽음을 맞이했다.

즉, 구태여 그녀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머리 싸매고 고민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억지로 친근하게 대할 필요는 없다. 그녀가 저지른 악행은 거짓이 아니니까.

억지로 밀어내려 할 필요도 없다. 그녀에게 받았던 애정도 거짓이 아니니까.

그러므로.

"그럭저럭?"

짐짓 유쾌한 얼굴로, 류지희는 그렇게 말할 수 있었다.

박우찬의 반응 또한 별로 다르지 않았다.

짧은 소리와 함께 고개를 끄덕이는 박우찬.

"그런 모양이네."

동시에, 그 능력으로 류지희의 전신을 훑는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실컷 암매장한 놈들 덕분일까.

다행스럽게도 살의가 샘솟지는 않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슬쩍 살핀 결과 또한 마찬가지.

아무래도 지희의 몸을 빌어 여왕급 몽마가 부활하는 일은 없었던 모양이다.

몽마들 앞에선 자신만만하게 이야기했지만, 사람 일은 모르는 법이니까.

만에 하나 그런 상황이 닥쳤다면 박우찬 자신의 손으로 지희의 목을 베어야 했겠지.

일찍이 옥상 위에서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린다.

뭐, 아무래도 불필요한 걱정이었던 모양이지만.

지희의 마력에 변화는 없었다.

아니, 오히려 정 반대.

쓰러지기 전에 비하면 현격히 상승한 마력량 쪽이 눈에 밟혔다.

물론 그 이유도 명백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지희 내에 자리잡고 있던 여왕급 몽마의 힘이 어느덧 자취를 감췄기 때문이다.

설마 정말로 단순히 소멸했을 리는 없고.

여왕의 기억 속 세상에서 배운 가르침을 바탕으로 온전히 흡수한 거겠지.

덕분에, 지금 지희에게서 느껴지는 마력은 소위 말하는 서큐버스 퀸 클래스.

일개 혼혈이면서도 최고위 몽마와 가까운 힘을 동원할 수 있게 된 셈이었다.

이래서야 혼혈보다는 차라리 상위 호환이라 칭하는 게 보다 정확한 표현 아닐까.

"그래. 많이 배웠고?"

피식 웃으며 어깨를 좁히는 박우찬.

거기에 비해, 류지희는 확 하고 얼굴을 붉혔다.

'이런.'

그제서야 박우찬은 스스로의 실수를 깨달았다.

하긴, 몽마의 기술이라 하면 그런 쪽이 대부분이겠지.

자칫 잘못하면 성희롱이라는 소리를 듣지 않을까.

"뭐, 어련히 알아서 했겠지."

결국 박우찬 또한 적당히 화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멋쩍은 건 그녀 또한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별다른 불만 없이 대화가 마무리되고, 어색한적막이 자리한다.

평소라면 그렇게 끝났겠지.

만약 그녀가 마음을 털어놓기 전이었다면, 지금 이 침묵도 즐길 수 있었을 테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묘한 거리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으리라.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선생님."

"응?"

"저, 선생님을 좋아해요."

……정적이 가라앉은 컨테이너 속으로, 때 아닌 춘풍이 감도는 듯했다.

말을 잃은 박우찬을 향해 빼꼼 하고 분홍빛 혓바닥을 내미는 류지희.

"생각해 보니까 이상하더라구요. 저, 선생님한테 차인 적은 있어도 고백한 적은 없잖아요?"

그 날.

지금과 달리 새하얗게 질린 거리의 모습을 떠올린다.

아득하기 짝이 없던 눈송이 너머로, 냉혹한 대답이 시리게 스며들던 그 날의 추억을 상기한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실제로는 단순한 말장난이었다.

만약 박우찬이 선수를 치지 않았다면?

틀림없이 그녀는 자신의 마음을 고백했으리라.

물론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겠지만.

"그래서 어색하지 않게 해드리려구요."

"지희야."

"알고 있어요. 내 대답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런 이야기시죠?"

"잘 알고 있네."

"네. 제 대답도 마찬가지거든요."

무어라 말하기 힘든 고요가 그저 감미롭다.

그 속에서, 류지희는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선생님은 어때요?"

"뭐?"

"제 마음을 거절하는 이유도 그대로인가요? 아니면, 제가 혼혈이라서 그런 건가요?"

짐짓 담담하게 흘러나온 질문이었지만, 듣는 박우찬 입장에선 도저히 그렇게 생각할 수 없었다.

자신도 모르게 헛숨을 들이킨다.

다만, 예상하지 못했다고는 농담으로도 말할 수 없었다.

이런 말은 조금 그렇지만,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지나치리만큼 노골적인 태도였던 게 사실이었으니까.

"부정은 할 수 없겠구나."

그렇기에, 박우찬 또한 여기까지 와서 잡아뗄 수는 없었다.

단지.

"그게 전부는 아니란다."

진심이었다.

다만, 스스로도 자신 없는 발언인 건 부정하기 힘든 사실이니.

박우찬은 자연스레 지희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그래요?"

놀라고 말았다.

왜냐하면, 그렇게 말하는 지희는 만면에 퍽 자신만만한 미소를 띄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긴,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 그러니?"

"네. 다른 애들 마음도 거절하셨잖아요?"

"뭐, 그렇지."

"그러니까, 안심했어요."

"안심?"

지금 상황엔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심인 건 류지희 또한 마찬가지였다.

"저도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잖아요?"

……만약 박우찬이 혼혈이라는 이유로 거부감을 표했다면, 상당히 어려운 길이 되었을 테지.

물론 포기하지는 않았겠지만, 불리한 입장에 처할 수밖에 없다는 건 명백한 사실이다.

그렇지만, 혼혈이라 내키지 않는 정도일 뿐이라면.

"저, 자신 있거든요."

"자신?"

"선생님이 저한테 반하게 할 자신."

몬스터에 대한 혐오감.

거기에서 유래된, 혼혈에 대한 거부감.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우찬은 류지희를 바란다고 말하게 할 자신.

물론, 실제로는 단순한 허세다.

솔직히 말하자면, 어떻게 해야 할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다.

필시 박우찬 또한 그 정도는 눈치채고 있겠지.

그런데도 힘껏 허세를 부리는 게 자신이다.

짐짓 괜찮다는 듯, 내심 느껴지는 불안감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게 삼키는 모습.

자신이 몽마의 딸이라는 점으로부터 눈을 돌리지 않은 채, 처음 만났을 때처럼 자신만만한 미소를 그리는 얼굴.

그게 바로 류지희다.

동시에, 박우찬은 일찍이 그녀를 보고서 품었던 감상을 다시 한 번 되새겼다.

시시각각 무너지는 표정을 감추기 위해 노력하던 소녀.

살면서 처음으로 교단에 섰던 그 당시 박우찬은, 묘한 위화감 속에 있던 그녀의 모습을 보고서 무슨 생각을 했었던가.

'나 참.'

지금 와서 생각하면 어설프기 짝이 없는 이야기다.

여하간, 박우찬도 이제는 알고 있었다.

자신의 감상과 별개로, 이 빌어먹을 시대는 아이들을 가만히 두지 않는다.

학생처럼 시간을 보내길 바라도, 누군가는 악의 어린 손을 휘두르는 법.

하물며 지금처럼 대한민국 시민들 중 3할 가까운 인원이 가족을 잃은 경험 속에서 살고 있다면 더더욱.

섣불리 건드려선 안 될 사정이라는 게 있다.

그 정도는 알고 있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박우찬은 분명히 그렇게 생각했다.

고작해야 고등학생 나이인 계집애 한 명이, 세상 모든 고뇌를 짊어진 듯한 얼굴을 하고 있어서.

수상쩍기 짝이 없는 학생. 정체를 숨긴 혼혈.

그런데도 무심코 말을 걸어버렸다고.

자신도 모르게 이마 위로 손을 짚는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어느 정도는 짐작하고 있었다.

다른 학생들도 마찬가지였으니까.

물론 여기서 다른 학생들 이야기를 꺼내면 이 분위기도 엉망이 되겠지만…….

나름 이유를 대고 거절했는데도 이렇게 나오는 거다.

여기까지 와서 도망치는 건 조금 그렇겠지.

결국 박우찬 또한 내심 각오를 다질 수밖에 없었다.

하물며, 눈 앞의 소녀가 하고 있는 말은 결국 자신을 예쁘게 봐 달라는 뜻이다.

여기에 어떤 말을 덧붙일 수 있으리오.

거절할 수도 없겠지.

"그래."

"네?"

"알겠다고. 선생님이 졌다."

지나치게 시원스러운 대답.

류지희의 얼굴이 자신도 모르게 당황한 듯 얼빵한 표정을 짓고 만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박우찬은 피식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솔직히 말하자면, 별로 기대는 되지 않는다.

다른 학생들도 마찬가지지만, 지희는 더더욱.

애시당초 자신이 혼혈 계집애를 좋아하게 될 거라는 상상만 해도 역겨울 지경이었으니까.

그렇지만.

'나쁘지 않아.'

만약 그녀의 말이 단순한 허세로 끝나지 않는다면?

정말로 박우찬이 몬스터의 피가 섞인 계집애를 상대로 사랑을 속삭일 수 있게 된다면?

박우찬으로서는 오히려 쌍수를 들고 반길 일이었다.

게다가, 외모 쪽도 그럭저럭 취향이고.

"기대하지 않고 기다리마."

"기대하실 수 있게 해드릴게요."

짐짓 퉁명스러운 표정으로 되받아치는 류지희.

그 모습을 보며, 박우찬은 다시 한 번 피식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도대체 이런 아저씨가 좋다고 달려드는 까닭이 무엇인지, 본인으로서는 조금도 짐작이 가지 않았던 탓이다.

'아이돌 했어도 됐겠네.'

별다른 근거 하나 없는 자신감을 주워섬기며, 박우찬은 짧게 고개를 저었다.

동시에, 류지희 또한 마음을 다잡았다.

물론 그녀가 혼혈이라는 사실엔 변함이 없다.

그렇지만.

슬쩍, 류지희는 다시 한 번 눈 앞의 거대한 마력 결정을 쓸어내렸다.

여왕의 기억 속 세계를 구현하느라 여유가 없었던 탓일까.

어느덧 텅 빈 마력 결정이 그녀의 손길을 반겼다.

……지금 이 순간이 오기까지, 그녀는 수도 없이 망설이고 있었다.

난생 처음 겪는 연심. 난생 처음 맞닥뜨린 거절. 난생 처음 맞이하게 된 실연.

어느 쪽이든, 몽마라는 이름엔 어울리지 않는 감정들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억 속 세상에서 마주친 몽마의 여왕은 말했다.

이 세상은 네가 원하는 걸 이루어주기 위해 있다고.

그제서야 류지희는 자신의 마음을 깨달았다.

때문에.

더 이상은 망설이지 않으리라.

몬스터에 대한 증오심.

혹은, 혼혈에 대한 거부감.

박우찬이 고작해야 그런 이유로 망설이지 않도록.

동시에, 만약 정말로 박우찬이 그녀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면…….

아직도 류지희는 기억하고 있었다.

박우찬이 자신을 거절할 때 했었던 말을.

그러므로.

어쩌면 박우찬이 몬스터에 대해 품은 미움도, 자신의 옆에선 잊을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 하고.

류지희는 진심으로 그렇게 바랐다.

그렇게, 박우찬이 내세웠던 거부 정책은 오늘 이 날을 기점으로 완전히 끝을 맞이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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