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1화 〉 여왕의 유희
* * *
소설이나 만화 속 등장인물이 갑자기 자신에게 말을 건다면 이러할까 싶었다.
여태까지 이 기억 속 세상 사람들은 류지희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했다.
말하자면, 그녀의 역할은 어디까지나 관객이었으니까.
몽마들의 여왕이 남긴 기억.
마치 영화를 관람하듯, 그 기억 속에서 춤추는 구경꾼이자 이방인.
류지희는 바로 그런 입장 속에서 체감 시간 반나절, 기억 속 시간으로 1년을 보냈다.
그리고.
무대 위의 배우들이 관중석을 인식하지 못하듯, 여왕의 기억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물론 그녀가 여왕을 두들길 생각이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 절대적인 법칙이라고는 말할 수 없겠지.
예를 들어, 같은 연극이라 해도 관객들을 향해 대사를 던지는 각본 또한 있는 법이니.
허나.
설령 그렇다 한들 거리 밖의 시민들을 상대로 대사를 읊을 수도 없는 법이니.
이러한 관계 속에서 주도권을 쥐고 있는 건 언제나 류지희 쪽이었다.
당연한 일이다.
애시당초 이 세상을 만들어낸 주체는 바로 류지희였으니까.
비록 몽마들의 도움을 받았다 한들 그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원할 때마다 이 기억 속 세계의 시간을 고무줄 잡아당기듯 희롱할 수 있는 이유 또한 마찬가지였다.
즉, 류지희가 원하면 이 세상에 개입할 수 있지만 그 반대는 성립하지 않는다.
결정권을 쥔 건 어디까지나 류지희 쪽.
몽마들의 마력으로 이루어진 이 세상이 그 주인 된 류지희에게 먼저 개입할 수는 없었다.
심지어 그 개입조차 불완전한 게 현실이고.
이 세계를 구성하는 근간이 여왕의 기억인 이상, 그녀가 행동에 나선다 한들 다른 장면까지 영향을 끼치지는 못한다.
요컨대, 여왕의 돌발적인 행동은 류지희로서도 완전히 예상 밖의 일이었다.
단지.
한 가지, 추측할 수는 있었다.
하필이면 그녀에게 말을 건 사람이 다른 누군가가 아닌 몽마의 여왕이었기 때문이다.
막말로,이 세상에 문제가 생긴 결과 우연히 여왕 쪽에서 자신을 먼저 발견할 가능성이 얼마나 되겠는가?
현실적으로 생각했을 때, 몽마의 여왕이 무언가 안배했다는 게 훨씬 더 가능성 높은 이야기였다.
스스로도 그렇게 말했듯이.
거기에, 몽마의 여왕에게는 충분히 그럴 만한 수단도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명치로 손을 옮기는 류지희.
물론 박우찬은 그렇게 말했다.
몽마들의 행동에 함정은 없다고.
그렇지만.
만약 함정이 설치된 게 몽마들 쪽이 아니었다면?
처음부터 몽마의 여왕이 남긴 힘 속에 문제가 있었다면?
설령 박우찬이라 해도 눈치채지 못했을 가능성 또한 있었다.
그리고.
이 경우, 마지막 날에 모습을 드러낸 몽마의 여왕이 바라는 건 무엇인가.
불현듯 뇌리를 찌르는 불길함 속에서, 류지희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단 하나 뿐이었다.
"뭐야, 내 몸이라도 빼앗을 생각이야?"
"응? 왜?"
"……어라?"
한껏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내던진 조소가, 무안한 대답과 함께 되돌아왔다.
응? 이게 아닌가?
자신도 모르게 그리 생각할 정도로.
"아아, 응. 무슨 생각을 한 건진 알겠네."
후후, 짐짓 귀엽다는 듯 조용히 미소를 흘리는 여왕.
그 모습을 보며 지희는 자신의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잘못 넘겨짚은 듯한 느낌이 장난 아니었다.
"공교롭지만, 그런 건 아니에요?"
물론 불가능한 일은 아니리라.
애시당초 몽마는 사람의 정신과 마음에 간섭하는 종족이니까.
원한다면 이 힘을 사용해 여왕의 자아를 되살리는 일 또한 가능하겠지.
막말로, 지금 이 세상 또한 바로 그런 식으로 만들어낸 결과물이 아니던가.
허면, 그녀의 몸 속에서 여왕의 자아를 되살린다면?
여왕으로서는 딸의 몸을 빌어 부활할 수 있다.
'십중팔구 그런 계획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단지.
새삼스럽지만, 류지희가 생각하기에도 그렇게 현명한 수단은 아니었다.
여하간, 지금 이 몸은 류지희 본인의 육체였으니까.
비슷한 힘을 가진 헌터를 상대로 능력을 사용해 효과를보는 건 어려운 법이다.
능력에 맞춰 변화한 마력이 일종의 내성을 겸하기 마련이니까.
발화 능력을 연마한 결과 불꽃에 대한 면역을 지니게 된 경우 등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겠지.
그리고.
지금 이 시점, 능력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류지희 본인.
여왕은 그녀의 몸에 기생하고 있는 쪽이다.
정신의 주도권을 다투는 싸움이라면 당연히 지희 쪽이 유리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절대로 불가능한 일은 아니겠지.
마치 기생충이 전신을 장악하듯 수많은 시간과 노고를 기울이면 나름 괜찮은 결과를 손에 넣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즉, 시간과 노력.
어느 쪽도 부족한 지금은 결과 또한 불을 보듯 뻔할 수밖에.
허면, 한 가지 의문이 남는다.
몽마의 여왕은 어째서 이런 상황을 준비한 걸까?
물론 어려운 일은 아니었으리라.
자신이 남긴 힘과 기억 한구석에 자아의 일부를 복사해 담는다.
일종의 마법적인 AI라고 할 수 있을까?
뭐, 어느 쪽이든.
정신을 다루는 데에 특화된 몽마.
개중에서도 여왕급 몽마의 힘이 있다면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으리라.
다만.
반대로, 자신의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그렇게 행동할 이유가 있을까?
"네, 물론이죠."
류지희로서는 도저히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을 앞두고도, 그녀는 별다른 망설임 하나 없이 그렇게 단언했다.
틀린 말도 아니었다.
당장 제시할 수 있는 이유만 해도 족히 몇 가지는 됐으니까.
예를 들어, 그녀가 자신의 힘을 제대로 다룰 수 있을지 불안했다던가.
애시당초 몽마로서의 교육을 받지 못한 아이였으니.
무리 전체에 악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
헌데, 만약 자신이 바로 옆에서 그녀를 가르칠 수 있다면?
당연히 무리에게도 좋은 결과가 되리라…….
"걱정됐거든요."
그렇게 말하는 대신, 몽마의 여왕은 조용히 대답을 흘렸다.
사람의 마음을 파고들기 위한 몽마들 특유의 간계일까?
아니면, 정말로 본심?
뭐, 어느 쪽이든.
"어?"
류지희는 코웃음을 칠 생각이었다.
헛소리는 청산유수네.
애초에 죽기 직전까지 단 한 번도 얼굴 보러 온 적 없으면서, 이제 와서 애미 행세하려는 거 실화냐?
언제나 그랬듯, 매섭고 단호하게.
자신의 본심을 숨기듯 그렇게 말하려던 류지희는, 그러나 다음 순간 자신의 얼굴을 적시는 눈물을 깨달았다.
"어, 어라?"
"후후."
당황스러운 태도로 허겁지겁 눈가를 훔치는 류지희.
본인으로서도 예상 밖의 상황인 듯 허둥지둥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여왕은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방금 전과 마찬가지로, 퍽 자애로운 웃음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묘한 부끄러움을 느끼던 류지희는 곧 자신도 모르게 꾹 입을 다물고 말았다.
지금 이 상황 속에서 무어라 반박해도 어차피 공허한 말이 될 뿐이라 깨달은 덕도 있겠지.
그렇지만.
이 세계를 바라보면서 은연중에 눈치채고 있던 사실.
일찍이 자신을 몽마로 만들기 위해 눈 앞에 모습을 드러낸 여왕.
지희의 생물학적 어머니는, 정말로 그녀를 사랑하고 있는 게 아닐까.
어쩌면 그녀를 몽마로 만들려 했던 이유 또한 몽마로서의 애정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런 사실을 불현듯 실감한 탓이다.
방금 전의 눈물 또한 마찬가지였다.
누군가에게 우는 모습을 보인다는 건 곧 자신의 약한 모습을 드러낸다는 뜻.
그러므로, 류지희는 가급적 자신의약한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려 했다.
박우찬이 평하길, 어디까지나 평범한 여고생에 가까운 감성.
이를 숨기기 위해 힘껏 허세를 부렸다.
단지.
류지희는 알지 못했다.
아이가 부모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건 구태여 참거나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
한바탕 울음을 터트린 이후, 류지희는 코를 훌쩍이고 있었다.
방금 전엔 그런 식으로 말하기는 했지만, 역시 이 나이를 먹고 눈물을 보이는 건 부끄러운 일이었다.
물론 실제로는 어른이 되었다 해도 눈물 흘릴 때가 있는 법이지만, 이 나이라면 으레 그리 생각하기 마련이었다.
몽마의 여왕 또한 익히 알고 있는 바였고, 때문에 별다른 재촉 한 마디 없이 그녀가 진정할 수 있도록 기다리고 있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거기에는 현실적인 이유 또한 있었다.
즉.
"본래 저는 우리 딸에게 몽마로서의 기술을 가르쳐주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어요."
"으, 으응."
"그래도, 괜한 걱정이었던 모양이네요."
"응?"
그 말에 류지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눈을 끔뻑거리고 말았다.
사람의 마음이란 이토록 간사한 법이었다.
족히 10년 이상 누적된 불평과 불만.
나아가서는, 설령 사정이 있었다 하더라도 남상원 아저씨의 캠프를 붕괴시킨 일은 곱게 넘어갈 수 없으리라.
그렇게 생각했음에도 불구하고, 눈 앞에 당사자가 있으면 크게 목소리를 내기 힘든 법이라.
어쩌면 그녀에게 직접 기술을 배울 기회가 아닐까.
아니, 애시당초 그 때문에 마련한 자리가 아닐까 생각하고 있던 지희로서는 바야흐로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었다.
"애초에, 우리 딸은 이 기억 속에서 무얼 배울 수 있었나요?"
"그, 글쎄?"
류지희는 자신도 모르게 대답을 피하고 말았다.
이런 말은 조금 그렇지만, 이 세상에서 그녀가 배운 건 오로지 몽마들의 기술 뿐.
즉, 사람 꼬시는 테크닉이 전부였기 때문이다.
그런 사실을 당당하게 자랑하기엔 류지희는 지나칠 정도로 평범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몽마 특유의 습성을 활용한 전투 기술 따위는 눈 앞의 그녀에게 배울 수 있는 게 아닐까 기대했던 건데.
"네, 섹──."
"아악!! 아아악!!"
"아이, 참."
정작 몽마들의 여왕은 썩 불만스러운 어조로 지희의 발작을 타박할 뿐이었다.
물론 류지희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감히 상상할 수조차 없는 단어를 입에 올린 그녀의 모친을 향해 삐약거릴 뿐이었다.
결국 이번에는 여왕 쪽에서 한 수 접고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좋아요. 그런 쪽의 기술을 배웠겠죠?"
"뭐, 틀린 말은 아니네."
"즉, 몽마로선 이미 대성하기 직전이라는 소리에요."
"응?"
"여기서 문제. 과연 몽마의 힘은 어디에서 나올까요?"
그야 다른 사람을 유혹하는 데에서 나올 테지.
난데없는 질문에 고개를 기울이는 류지희.
딸의 그런 모습을 향해, 몽마의 여왕은 다시 한 번 여유로운 웃음을 흘렸다.
"당신은 여태까지 우리들 몽마의 힘을 사용하길 꺼리고 있었죠."
"그, 그런가?"
"그렇지만, 지금은 달라요."
"응?"
실로 갑작스러운 발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왕의 목소리에는 두터운 확신이 담겨 있었다.
"애시당초 이 세상을 이루고 있는 건 제 기억과 당신의 욕망."
"어? 잠깐, 뭐라고?"
"즉, 지금 이 공간은 당신에게 필요한 기술을 가르치기 위해 준비된 장소입니다."
"잠깐, 잠깐만!"
불길하기 짝이 없는 오한이 그녀의 목덜미를 어루만진다.
아니, 잠깐.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요컨대, 이 세상 속에서 당신이 몽마로서의 기술을 배웠다는 건 무슨 뜻일까요?"
"기, 기다려!!"
"네. 당신에게도 꼬시고 싶은 사람이 생겼다는 뜻이랍니다!!"
"꺄아아아악!!"
동시에, 류지희는 깨달았다.
부모의 입으로 자신의 연애 사정을 듣는 건 몽마에게도 부끄러운 일이라는 걸.
"후후. 그러니, 내가 더 가르칠 건 없어요."
"으, 으아아……."
"물론 보고 배운 기술만으로는 불안한 점이 없잖아 있지만, 그런 건 실전에서 만회해야 할 일."
실전?
시일전?
퍽 불길한 단어가 아닐 수 없었다.
단지.
본인의 감상과 별개로, 류지희는 확신할 수 있었다.
이 몸에 흐르고 있는 몽마의 피 때문일까?
단순한 마력의 활용법이나 교언, 나아가서는 그 날 목격했던 온갖 기술까지.
실전에서 활용하는 건 그렇게 어렵지 않으리라.
지나가듯 슬쩍 본 게 전부였음에도 불구하고, 류지희는 내심 그런 확신을 얻을 수 있었다.
여왕급 몽마의 기술과 현역 여고생이 조합되어 탄생한 반인반마.
바야흐로 처녀 서큐버스의 등장이었다.
"대신, 한 가지만 가르쳐주세요."
"어?"
"우리 딸아이의 마음을 받아간 사내는 도대체 누구일까요?"
짐짓 짓궂은 얼굴로 그렇게 되묻는 몽마의 여왕.
그런 그녀의 얼굴을 보며, 류지희는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붉히고 말았다.
아니, 짐작 가는 사람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응?"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는 류지희.
그 모습을 보며, 몽마의 여왕은 때 아닌 불안감에 사로잡혔다.
허면, 여기서 한 가지 사실을 공표하도록 하자.
요컨대, 이 모녀 사이에 있는 사소한 인식 차이를 바로잡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다.
즉.
류지희는 여왕이 어떤 식으로 죽음을 맞이했는지 모른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일찍이 그 사건에 얽혔던 박우찬이 그녀의 죽음을 적당히 가공해 전달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류지희가 그녀에게 상상 이상으로 쉽게 마음을 놓은 이유 또한 바로 그 탓일지도 모른다.
박우찬의 설명에 따르면, 몽마의 여왕은 자신의 딸을 위해 신세계 질서를 등지고 죽음을 맞이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니까.
그러므로.
"바, 박우찬 그 사람인데."
"뭐?"
다음 순간.
방금 전까지만 해도 헤실거리고 있던 몽마의 여왕이 정색하는 모습에, 류지희는 무심코 딸국질을 토하고 말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