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0화 〉 여왕의 유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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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지 예상 밖인 부분이 있다면, 몽마의 힘이 예상보다 쓸만한 능력이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이 기억 속 세계의 구성만 봐도 그렇다.
류지희가 이 세계로 들어오고 나서 거의 1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물론 이 기억 속 시간을 기준으로 한 얘기다.
실제로는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았겠지.
그리고 류지희가 감탄하고 있는 이유 또한 바로 거기에 있었다.
이 기억 속 세계는 실로 정교했다.
해가 있다.
달이 있다.
낮이 있고 밤이 있으며, 시간이 지나면 거기에 맞추어 하늘의 색이 변하기도 했다.
사람들이 주고받는 말이나 어조 또한 고작해야 개인의 기억에 의존했다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정교하기 짝이 없었다.
여기에 있는 건 바야흐로 하나의 세계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물론 몽마들 특유의 마력 덕에 퍽 그럴듯한 모양새를 갖출 수 있었던 점도 없잖아 있겠지.
류지희도 그렇게 순진하지는 않았다.
이번에 그녀가 사용한 마력 결정과 비슷한 수준의 물건이 아니라면 이만한 세계를 만드는 건 지극히 어려운 일이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몽마의 힘이라 한들 헤픈 능력에 불과하다 생각하던 그녀의 편견을 고치는 건 그 정도로 충분했다.
이 세계 속에서, 류지희는 마치 유령처럼 움직일 수 있었다.
온갖 법칙에 구애받지 않는 건 기본이요, 심지어 생각하기에 따라 기억이 비추고 있는 시간을 바꿀 수도 있었으니.
실제 시간으로는 한 시간. 기억 속 세계의 시간으로는 1년.
하지만 체감 시간으로는 고작해야 반나절 남짓한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다.
그리고 류지희는 그 반나절을 자신의 생물학적 모친을 관찰하는 데에 보냈다.
만약 박우찬이 알았다면 퍽 모범생다운 행동이라 칭찬했을 일이었지만, 사실대로 말하자면 꼭 그런 속내인 건 아니었다.
어차피 지금 이 세계가 기억 속 일이라면 자신이 개인적인 원한을 풀어도 무어라 책망할 사람은 없을 테지.
즉, 류지희는 자신의 생물학적 어머니를 두들겨 팰 생각이었다.
문제는 정작 그런 마음으로 몽마의 여왕을 찾아가니 하필 야합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는 점일까.
자신도 모르게 새빨개진 얼굴로 남녀 정사의 현장에서 호다닥 도망친 이래, 류지희는 더 이상 그런 마음을 품지 않았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런 마음 품을 겨를도 없었다 해야 하리라.
무언가 진이 쭉 빠지는 기분이었다.
덕분에 류지희는 정말 객관적인 기준으로 여왕의 행동을 바라볼 수 있었다.
그리고.
예상 이상으로 다양한 몽마의 마력 활용법을 목격하게 되었다.
일찍이 그녀가 들었던 바에 따르면, 여왕은 남상원의 캠프를 무너뜨릴 때까지 별다른 두각을 드러내지 않았다고 한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몸을 일으켰을 때는 캠프에 속한 남성진 대다수가 여왕 밑에 있었다고 한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류지희는 이번 기회를 통해 그 날의 진상을 확인할 수 있었다.
거두절미하고 말하자면, 여왕이 두각을 드러내지 않았다는 표현에 거짓은 없었다.
단지, 물밑 싸움에서 이미 반은 지고 들어가는 셈이니 이래서야 이길 수 있는 길도 퍽 요원하겠지 싶었다.
여왕이 무언가 자신만 할 수 있는 신묘한 수를 구사하는 건 아니었다.
그저 지나갈 때마다 사람들에게 인사를 올리며 마력 한 줌 얹어 돌려주었을 뿐.
마치 태산을 옮기는 듯한 우행이다.
저래서야 도대체 언제 성과를 볼 수 있다는 말인가?
류지희는 자신도 모르게 그리 혀를 차고 말았다.
고작해야 1년 사이 남상원의 캠프가 맞이한 결말을 잊어버린 발언이었다.
숫제 태산을 옮기는 듯하다 평했던 한 줌의 마력도, 거듭 쌓이니 오히려 태산이 되었더라.
몽마의 마력 때문인지, 아니면 여왕의 느슨한 태도 덕분인지.
사람들이 그녀에게 품은 호의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강렬한 감정이 되어 싹을 틔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류지희가 불현듯 정신을 다잡은 시점에선 이미 캠프의 절반 가까운 인원이 장악당한 상태였다.
실로 순식간이었다.
그 외에도 여러 노하우를 익힐 수 있었다.
매료 능력을 사용한 심문.
본인이 첩자라는 사실조차 자각하지 못한 정보원.
자신이 속한 파벌을 통째로 팔아넘기고도 완전히 망각한 배신자까지.
여왕이 사람을 다루는 방식은 틀림없이 보고 배울 바가 있었다.
물론 류지희가 여태까지 색안경을 쓰고 있었다면 이를 악물고 자신이 느낀 소감을 극구 부정하려 했겠지.
누군가를 싫어하기에 당사자의 장점마저 부정하는 건 생각보다 자주 볼 수 있는 이야기니까.
그러나.
졸지에 원치 않는 객관적 시점으로 이번 사건을 바라보게 된 류지희는 도저히 평소처럼 말할 수 없었다.
아니, 오히려 저런 능력 또한 활용할 방법이 있음을 부정하기 힘들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헌터나 민간인을 꼬드길 생각은 아니었다.
단지.
예를 들어, 자신이 척후 역할을 맡게 되었을 때.
저런 기술이 있다면 설령 몬스터에게 발견당했다 하더라도 무사히 퇴각할 수 있으리라.
게다가, 몬스터에게 암시를 걸어 평소처럼 행동하게 할 수 있다면?
전투를 앞둔 상황에선 암시를 걸기도 힘들겠지만, 만약 성공하기만 하면 상당한 이득을 얻을 수 있다.
활동 반경이나 행동 양식을 알 수 있을 테고, 둥지의 위치도 쉽사리 찾아낼 수 있을 테니까.
풍부한 지식을 바탕으로 파티 내에서 사령탑 역할을 맡는 건 보통 후열의 신서아.
혹은 보조 사령탑 역할로 윤하를 들 수 있겠지.
어쩌면 나중엔 윤하가 중심이 될지도 모르고.
다만.
설령 그렇다 해도 실질적인 척후 역할을 맡아야 하는 건 자신이다.
예은이는 그런 일에 재주가 없고, 하연이는 나쁘진 않지만 딱 거기까지.
자유롭게 하늘을 날 수 있으며, 그림자를 다룰 수 있는 그녀 이상으로 척후 역할에 적합한 사람은 없다.
그런 의미에서 말하자면, 이 기억 속 세상에서 배운 기술들은 틀림없이 쓸모가 있으리라.
무엇보다, 몽마로서의 능력을 다듬기는커녕 피어싱 한 번 시도한 적 없던 류지희.
그녀조차 이토록 다채로운 사용법을 상상할 수 있을 정도였으니.
만에 하나 몽마의 마력을 보다 수월하게 다룰 수 있는 날이 온다면?
단순한 전투력 따위와 별개로, 류지희는 헌터로서의 실력을 다지게 된 셈이었다.
어쩌면 박우찬은 이런 점도 계산한 걸까?
류지희로서는 알 수 없었다.
그렇지만, 이번엔 몽마들의 기술을 습득하는 데에 전력을 다하라 말하기도 했던 바.
자연스레 그녀는 이번 일 또한 박우찬의 안배라 생각할 뿐이었다.
흔히 있는 과대평가였다.
……마치 메마른 스펀지가 물을 흡수하듯, 여왕급 몽마의 기술을 흡수한다.
그 과정 속에서, 어느덧 최후의 날이 찾아왔다.
마침내 여기까지 왔다는 안도감과 지긋지긋함, 거기에 묘한 섭섭함이 뒤섞인 감정이 류지희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내키지 않는 건 여전히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그래도 남상원의 캠프가 붕괴하는 모습을 눈 앞에서 직접 보고싶지는 않았다.
하물며, 그 범인이 자신의 생물학적 어머니라니.
류지희는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그 뿐이었더라면, 류지희는 마지막으로 여왕의 따귀를 날리고 자신의 감정을 정리했으리라.
이후 캠프 붕괴 사건에서 필요한 부분만 챙기고 쫓기듯 이 세계를 떠났겠지.
반대로 말하자면, 지금은 그렇게 하기 힘들다는 뜻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이 기억 속 세상에서 관찰한 여왕의 행보가 그야말로 예상 밖이었기 때문이다.
남상원을 비롯한 혼인회 사람들은 말했다.
지희 앞에서 입을 열지는 않았지만, 당시 남상원의 캠프를 무너뜨린 그녀는 정말로 개 같은 년이었다고.
여하간, 여왕벌이라는 멸칭까지 등장할 정도였으니.
때문에, 류지희 또한 그리 짐작하고 있었다.
남상원의 캠프에 몸을 담은 몽마의 여왕은, 치밀한 계획과 의도 하에 캠프의 붕괴를 주도했으리라고.
오로지 인간들을 희롱하기 위해, 자그마치 1년이라는 시간을 투자했으리라고.
자신이라는 핏덩이를 낳은 건 오로지 그 때문이었노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기억 속 세상에서 목격한 여왕의 행동은, 수많은 캠프를 와해시킨 탕녀라고 칭하기엔 어색한 점이 많았다.
물론 여왕이 끊임없이 캠프 내에 분열을 획책한 건 사실이다.
다만.
류지희는 알 수 있었다.
여왕이 그런 식으로 행동한 이유는 단 하나.
몽마로서의 본능 때문이라는 사실을.
무언가 사악한 의도가 있는 게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희롱하는 생물로 태어난 탓에 내재된 본능.
여왕은 그런 욕구를 해소하고 싶었고, 종래엔 한계에 봉착했다.
그 결과.
남상원의 캠프는 끝을 맞이했다.
류지희는 그리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물론 알고 있었다.
지금 그녀가 보고 있는 건 여왕의 기억.
다시 말해, 여왕의 행동이 미화되었을 가능성은 충분했다.
아니, 설령 미화 여부를 의심하지 않는다 해도 마찬가지.
여왕이 저지른 행동은 용서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야.'
류지희는 확신할 수 있었다.
여왕의 행동과 그 당위성.
시시비비를 제외하더라도, 이 기억에 조작이 가해진 건 아니라는 사실을.
몽마로서의 능력 덕분일까?
아니면, 혈육이기 때문일까.
알 수 없었다.
그저 한 가지 말할 수 있는 점이 있다면, 자신이 그렇게 장담할 수 있는 건 나름의 근거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왜냐하면 자신이 여기에 있었으니까.
즉, 류지희의 존재 자체가 증거나 다름없었다.
애초에 자신이 감화되었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구태여 임신할 필요는 없다.
그야 아이를 대동하고 있으면 다소 느슨한 태도를 앞세우는 사람들이 많은 건 분명한 사실이다.
단지.
이런 '이득'을 볼 수 있는 건 어디까지나 아이를 양육하고 있을 때 이야기.
아이를 버리고 도망친 어미에게 누가 동정심을 품을까.
당연한 이야기였다.
하물며 아이를 낳자마자 유기한 몽마라면 더더욱 말할 필요가 없겠지.
즉.
몽마의 여왕은 저런 이유로 아이를 품은 게 아니다.
허면?
'반대야.'
한 가지 사실을 전제하면, 너무나도 간단하게 해답을 구할 수 있다.
만약 몽마에게도 모성애라는 게 있다면?
그래서 자신의 뱃속에 있는 아이를 위해 스스로의 본능마저 억제하고 있었다면?
……아이를 낳고 곧바로 내버린 게 아니다.
아이를 낳자 더 이상 절제할 여력도 남지 않은 거겠지.
한계까지 늘어난 고무줄이 마침내 파국을 맞이하듯이.
때문에.
"궁상이다, 진짜."
캠프 근처.
어느 누구도 발견할 수 없는 세상의 그림자 속에서, 류지희는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날벼락인지.
방금 전, 스스로가 도출한 결론을 되새긴다.
아니, 것보다.
"조금만 더 참으라고……."
"어머, 충분히 참았다고 생각했는데."
도저히 억누를 수 없는 억울함을 담아 그렇게 중얼거린다.
그러자, 마치 되받아치듯 그런 말이 뒤따랐다.
익숙한 목소리.
슬쩍 시선을 들어 살피자, 과연 그 자리에는 그녀를 닮은 묘령의 여인이 있었다.
몽마의 여왕.
다시 말해, 그녀의 생물학적 모친.
어쩌면 정말로 그녀의 가족이 될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 여자였다.
'하필이면.'
내심 꺼림칙한 기분을 살핀다.
아무래도 이 근처에서 작당모의라도 할 예정이었던 모양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류지희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반쯤 습관적인 행동이었다.
"응?"
다만, 이번에는 그 습관적인 행동 덕을 보게 되었다.
왜냐하면 이 주변엔 그녀들을 제외한 누구 한 명 없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흠칫, 자신도 모르게 어깨를 떨었다.
무심코 되돌린 시선 너머.
여왕의 시선이 그녀를 마주보고 있었다.
즉.
방금 전, 몽마의 여왕은 그녀의 푸념에 대답한 셈이었다.
"안 그러면 이런 안배를 했을 리가 있나요."
그렇게 말하는 여왕의 입가는 퍽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마치 악마처럼 그 속내를 짐작할 수 없고, 몽마처럼 매력적인 웃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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