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7화 〉 관문
* * *
물론 별다른 일은 없었다.
그녀가 알고 있는 박우찬은 그럴 만한 인물이 아니었고, 황윤하 또한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때문에, 그 날 있었던 일은 다소 어색하면서도 전형적으로 흘러갔다.
정말로 그녀에게 전위들이 사용하는 기술을 가르쳐주기 위해 땀을 뻘뻘 흘리며 노력하는 박우찬.
그런 그의 모습을 바라보며 내심 헛웃음을 터트리는 황윤하.
평범한 사제관계라기엔 다소 어색한 모습이었다.
여태까지도 그랬듯이.
사실대로 말하자면, 당연한 일이었다.
애초에 학생과 교사 사이에 이런 분위기가 오가는 일부터 평범한 상황은 아니었으니까.
설령 황윤하라 해도 그 정도는 알고 있었다.
다만.
'그게 이상한 일인가?'
스스로에게 그리 자문하면, 아무리 황윤하라 해도 확답할 수 없었다.
아니, 그야 보통 일은 아니겠지만.
허면, 황윤하가 이상한 사람인 걸까?
그럴 수도 있겠지.
어쩌면.
문제는 그 뒤에 있었다.
즉, 이상한 일이라면?
황윤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언젠가 박우찬이 말했듯이, 학생일 때의 열병.
때 아닌 분위기에 떠밀려 행동한 것에 불과한 걸까.
황윤하는 확신할 수가 없었다.
어쩌면 그 때문일지도 몰랐다.
이렇게 애매모호한 태도를 계속해서 유지하고 있는 건.
언젠가, 황윤하는 자신이 느끼고 있는 감정을 박우찬에게 털어놓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 날 그 때 무슨 생각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단지.
무언가 이상한 느낌.
구름 위로 둥실둥실 떠다니는 듯한 착시에 휘말려, 등을 떠밀리듯 그렇게 털어놓았던 건 기억하고 있다.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일단 내심 꽁꽁 싸매고 있던 감정을 토로한다는 건 그 자체만으로도 즐거운 일이었다.
속에 얹힌 걸 토해내는 느낌?
다만, 황윤하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 이후를 기대했다고 해야 할 테지.
무의식적이든, 의식적이든.
때문에.
박우찬에게서 돌아온 대답이 영 신통치 않았을 때, 황윤하는 구름 위에서 추락하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쿵쿵 하고 뛰던 심장이 차갑게 가라앉아, 그 온기를 잃는 듯한 느낌.
도저히 상상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무거운 적막감 끝에, 간신히 자리에서 돌아온 황윤하는 그 날을 눈물로 지새웠다.
그 뒤로는 계속해서 이런 꼴이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아니면, 마음을 털어놓는 일만으로도 내심 가벼워졌다는 건 단순한 착각일 뿐.
어디까지나 그녀가 속으로 그려두었던 장밋빛 미래 덕분에 짐짓 김칫국을 마시고 있었을 뿐인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
물론, 어느 정도 그런 마음이 있기는 했었으리라.
황윤하 또한 이제 와서 그런 속내를 부정할 정도로 뻔뻔하지는 않았다.
황윤하는 꽤나 털털한 성격이었고, 거기에 여고생이었다.
그 위에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외모를 한 숟갈 얹으면 그녀를 구성하고 있는 요소들은 일종의 매력이 되어 다가가기 마련이었다.
친구들은 지나치게 털털하다거나, 아저씨같다거나 하는 식으로 평하는 점도 누군가에게는 친숙함과 솔직함이 되는 법이다.
때문에, 황윤하는 그런 문제로 고민을 앓은 적이 없었다.
연애 경험이 없는 건 매한가지였지만, 황윤하는 다른 이들의 고백을 듣는 쪽이었지 쩔쩔매는 쪽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그런 건 스스로도 내키지 않는 성격이기도 했으니까.
말하자면, 황윤하에게 있어 연애란 어설프게 쉬운 대상처럼 보였다.
자신이 다른 남학생들의 마음을 거절하는 건 어디까지나 현실적인 문제로 바쁘기 때문.
그런 문제로 시선을 돌릴 만한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만에 하나 내게 그런 여유가 있었다면?
'씨발, 아주 그냥…….'
무엇보다 생동감 넘치는 제스처로, 황윤하는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을 표출할 수 있었다.
딱히 황윤하가 나쁘다는 건 아니다.
실제로, 틀린 말도 아니었으니까.
황윤하에게 있어, 주변 학생들은 어설픈 꼬마들 뿐.
현실적인 문제로 고민하고 있는 자신에게 있어, 학교 내부의 일로 골머리를 앓는 학생들은 단순한 어린애처럼 보이기도 했다.
어쩌면 그건 황윤하의 내심에 자리잡은 일종의 보상 심리였을지도 모른다.
자신의 힘겨움으로부터 눈을 돌리고 싶었던 끝에 마련된 보호 기재.
주변 학생들의 모습을 깔보는 것으로 스스로의 속내를 보호하고 싶었을 뿐일지도 모르지.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건, 그런 상황이었던 만큼 황윤하에게 이런 상황은 난생 처음 겪는 일이었다는 점이다.
상대가 교사, 다시 말해 황윤하에게 있어선 어린애로밖에 보이지 않는 동급생들이 아니라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내심 자존심이 강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단순히 스스로도 알고 있듯 이런 연애 사업을 경험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일까.
황윤하는 지금 자신의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아니, 애초에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모르겠다.
담임인 박우찬은 자신의 고백을 거절했다.
부드러운 어조였고, 이유도 있었다.
허면?
자신은 그 말을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박우찬이 말했듯, 자신의 마음을 접고 다른 데로 시선을 돌리는 식으로?
어쩌면 그녀의 친구들도 내심 품고 있을지도 모르는 고민.
그러나.
안타깝게도, 황윤하는 자존심이 강한 성격이었다.
스스로의 내심이나 버거움을 드러내지 않으려 허세를 부렸던 게 그대로 고착이 된 건지.
아니면 단순히 처음부터 그랬던 건지는 알 수 없다.
이제 와서 그 둘을 구분하려 하는 시도 또한 현실적이지 않았다.
여하간, 황윤하는 거의 인생 대부분 시간을 이런 성격으로 보냈으니까.
때문에.
황윤하는 주변 학생들에게 그리 묻지 못했다.
보나 마나 자신과 같은 길을 걸었을 이예은에게, 어떻게 그리 해맑게 행동할 수 있느냐고 묻지 못했다.
마찬가지로 자신과 같은 처지일 류지희에게, 너는 무슨 기분이냐고 속내를 털어놓을 수도 없었다.
반대로, 언제나 뻔뻔스레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는 자하연에게 너는 도대체 무슨 생각이냐 힐난할 수도 없었다.
단지.
불편한 듯, 애매한 듯.
그런 시간을 보낸 끝에, 황윤하는 계속해서 스스로도 알지 못하는 시간을 보냈다.
그 결과.
"돌았네, 돌았어."
황윤하는 스스로에게 그리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주변에 있는 팀원들 또한 그녀의 모습을 보고 의아하다는 듯한 얼굴을 했지만, 거기에 대해선 답해줄 수 없었다.
대신, 황윤하는 손에 쥔 장비를 꽉 하고 움켜쥐었다.
아직 손에 익지 않은 장창과 방패의 감촉이 양 손으로 스며들었다.
기말고사였다.
*
2주라는 시간은 그렇게 길지 않다.
고작해야 이십대밖에 되지 않는 시간 속에서도 충분히 깨달을 수 있었던 사실을, 박우찬은 요 며칠 새삼 다시 깨달을 수 있었다.
요 근래 계속해서 윤하와 시간을 보낸 탓이었다.
그 날 이후.
퍽 의미심장한 말을 꺼낸 주제에, 윤하는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박우찬으로서는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때문에.
기말고사 당일까지 줄곧 윤하가 자신에게 강습을 요구하는 상황에서도, 박우찬의 마음은 퍽 느슨해지고 말았다.
그래. 윤하는 언제나 진지한 성격이었지.
비록 어색한 감은 조금 없잖아 있었지만, 윤하의 그런 행동은 박우찬으로 하여금 모종의 안도감을 느끼게 하기 충분했다.
단 한 번도 한눈을 팔지 않고, 그 날 이후 이상한 희롱을 던지지 않는다.
다소의 서러움이 남아서 무심코 그런 말을 내뱉었을 뿐, 윤하가 모종의 목적을 가지고 일부러 자신에게 접근한 건 아니다…….
그런 확신을 얻자, 박우찬 또한 마음을 넉넉하게 먹을 수 있었던 탓이다.
그리고.
역으로 그 덕분에 시야가 넓어진 박우찬은 알 수 있었다.
'좆됐는데.'
사실대로 말하자면, 박우찬은 처음 윤하가 자신에게 말을 걸었을 땐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여하간, 작년에 던전 공략을 해낸 경험도 있지 않던가.
비록 그 때와는 다른 멤버고, 던전 공략 또한 게이트 탐사와 동일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때와 지금.
어느 쪽이 더 윤하에게 불리하냐 묻는다면 박우찬은 망설임 없이 전자를 택했으리라.
당연한 이야기였다.
윤하의 성장도 성장이지만, 그 때 공략했던 던전은 실질 A+랭크.
이번 기말고사 용도로 아카데미에서 대출한 게이트는 C랭크였기 때문이다.
어딜 어떻게 봐도 윤하의 실력을 걱정할 수준은 아니었다.
오히려 윤하가 다른 학생들을 나서서 보호해야 하는 역할이라 긴장했을 뿐, 잘 해낼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을 정도로.
여하간, 윤하는 현직 A+랭크 헌터와 S랭크 몬스터의 분신을 상대로도 사령탑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떨리는 가슴을 붙잡고 걱정하라는 쪽이 오히려 비현실적이다.
다만.
박우찬은 깨달았다.
윤하의 행동이 무언가 이상하다.
힘이 빠졌다거나, 기량이 감퇴했다는 건 아니다.
허나, 누가 보아도 윤하는 명백하게 딴눈을 팔고 있었다.
방금 전 언급했던 랭크 차이.
혹은, 거기에 따른 방심…….
그런 문제였다면 따끔하게 혼을 내면 괜찮았겠지.
윤하는 학생들 중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이 업계 문제에 진지한 편이다.
자신의 마음이 느슨해졌다는 걸 깨달으면 스스로 마음을 다잡을 수 있으리라.
하지만.
윤하의 태도는 그런 게 아니었다.
가끔씩 멍해지는 사고.
훌륭한 솜씨와 별개로, 마음이 담기지 않은 동작들.
기술 자체는 현재 수준에선 흠잡을 수 있는 게 없었지만, 일전에 던전을 공략할 당시와 같은 패기는 온데간데 없었다.
역으로 평소의 향상심도 사라진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어색한 동작.
그 원인을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마음이 완전히 다른 데에 가 있다.
그리고 그 이유는…….
말할 필요도 없겠지.
평소 궂은 일을 자원했던 박우찬은, 그러나 이번 시험에 한해서는 감독 요청을 사서 거부할 예정이었다.
왜냐하면 자신의 눈 앞에 죽일 수 없는 몬스터가 돌아다닌다는 상상만 해도 숨이 막혔기 때문이다.
말이 시험 감독이지, 이번 기말고사 내용을 고려하면 실질적으로 감독들이 맡을 역할은 단 하나.
게이트 내부를 티나지 않게 들락날락거리며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는 일이리라.
그리고 박우찬은 그런 고문을 당하고 싶지는 않았다.
씨발, 몬스터를 죽이면 안 되는 상황이라니.
물론 정찰 정도를 한 적은 없잖아 있었지만, 지금은 그런 상황도 아니다.
말하자면 눈 앞의 고기를 먹을 수 있다는 확신도 없는데 냄새만 맡고 사라져야 하는 상황인 셈이다.
때문에 박우찬은 이번 일에 별로 내키지 않았고, 달리 딴지를 걸 사람도 없었다.
왜냐하면 박우찬이 평소 말단이라는 핑계를 대며 아카데미 게이트 내부 소탕 따위를 전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에 하나 박우찬이 대놓고 휴가를 내겠다 해도 감히 딴죽을 걸 수 있는 사람은 없으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하의 사태를 파악한 순간, 박우찬은 이전의 모든 계획을 폐기했다.
어째서인가?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가 찬 사람은 윤하 한 명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박우찬은 울며 겨자먹기로 이번 감독 역할에 자원했다.
당연히 그런 그를 향해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나왔음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그리고.
그렇게 마련한 감독관 역할을 앞두고, 박우찬은 푸욱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다른 애들은 슬쩍슬쩍 확인한 적 있지만, 다들 얼이 빠진 상황은 아니었다.
다만, 윤하는 달랐다.
설마 오늘 이 순간까지 마음을 못 다잡고 있을 줄이야.
아직도 멍하니 게이트를 바라보는 윤하의 모습을 눈에 새긴다.
'위험한데.'
이거, 잘못하면 사고 터진다.
물론 실력으로 보면 그럴 리는 없겠지만, 애초에 게이트라는 건 그런 물건 아니던가.
한 순간의 방심이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오는 법.
허나, 학생 중 한 명의 컨디션이 나쁘니까 시험을 중지시키라고는 말할 수도 없는 법.
때문에, 박우찬은 묘한 불안감을 담고서 그 앞에 있는 게이트를 노려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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