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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몬스터만 죽이고 싶음-275화 (275/371)

〈 275화 〉 게이트 답사 시험

* * *

한 가지 다행인 건, 조직들 사이의 싸움은 필연적으로 시간을 요구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최승준이 이끌고 있는 기업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단순한 견적서부터 주주 총회까지.

나라면 칼질 한 번에 해결할 수 있는 문제를 앞두고 온갖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게 바로 조직이다.

누군가는 수많은 이들의 이권이 얽힌 대형 조직 특유의 아둔함이라고 말할 테지.

누군가는 대형 조직 특유의 안정성이라고 반론할 테고.

허나, 어느 쪽이든 내게 있어 중요한 점은 협회나 신세계 질서가 움직일 때까지 시간이 생겼다는 점이다.

덕분에, 나는 평소와 마찬가지로 교사 노릇에 전념할 수 있었다.

한 쪽에는 내게 고백한 동료 교사 겸 제자, 한 쪽에는 나를 남편이라 생각하고 있는 몬스터를 끼고서.

씨발.

"자, 다들 알고 있겠지만 곧 기말고사다."

다행스럽게도, 내게는 그 사이에서 고민하는 대신 근엄한 교사로서의 얼굴을 유지해야 할 이유가 있었다.

기말고사.

학생들 대다수가 바로 저번 주말에 꽃을 피웠던 거목으로 입방아를 찧고 있는 지금.

어느덧 이 아카데미에도 다시 한 번 기말고사 기간이 다가왔기 때문이다.

물론 대다수 학생들은 그런 내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오히려 떨떠름한 시선이 나를 향해 날아와 꽂히는 게 느껴질 정도였으니.

"어, 저희 기말 봐요?"

심지어 이런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저게 당연한 반응이었다.

왜냐하면 내가 생각하기에도 이번 학기는 대대적으로 조졌기 때문이다.

여하간, 협회 상층부에서 내려온 지령부터 문제였다.

초대형 게이트 발생 직후.

거의 경직되다시피 한 상층부에 의해, 이번 1학기 중간고사는 체육대회로 대체되고 말았다.

아니, 거기까진 어떻게든 핑계를 댈 수 있겠지.

대인전 경험을 쌓는 데엔 도움이 된다던가.

실제로, 완전히 쓸모 없는 시간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다만.

1학기의 절반을 체육대회에 할애한 지금.

당연히 제대로 된 면학 분위기 따위가 잡혔을 리도 없고, 두루뭉술한 느낌으로 간신히 여기까지 온 게 현실이다.

무엇보다, 스케줄엔 문제가 없었다 한들 딱 거기까지.

말하자면 스케줄을 수습하는 게 고작이었을 뿐이다.

……한 학기의 절반을 대인전으로, 남은 절반을 애매모호한 분위기 속에서 보낸 헌터 양성 아카데미.

이런 상황에서 대뜸 기말고사를 보자고 말해도 곤란할 따름이다.

막말로, 도대체 뭘 평가해야 한단 말인가?

이제 와서 허겁지겁 중간고사와 전혀 연동되지 않는 수업 따위를 진행할 수도 없는 노릇.

당연히 기말고사 시험도 난항을 겪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 문제를 해결해야 할 건 지레 겁을 집어먹고 체육대회 따위를 하달한 상층부가 아니라 우리들.

즉, 현장에 있는 교사들 쪽이었다.

씨발.

그러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우리 2학년 교사들에겐 사용할 수 있는 카드가 있었다.

"그래. 유감스럽게도."

"아, 말이 돼요?"

"자, 조용. 걱정하지 말고, 이번 중간고사에서 종합적인 전투 능력 평가를 했었지?"

내가 한 말이지만, 참으로 뻔뻔하다 싶었다.

미친, 종합 전투 능력 평가 이 지랄.

허세도 이 정도면 제주도 감귤포장학과 전액 장학생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렇지만.

나로서도 할 말이 없는 건 아니었다.

작년 수업을 통해, 아카데미는 학생들의 기초적인 전투 능력을 다졌다.

어떤 반은 능력을 중심으로, 어떤 반은 신체 능력을 중심으로.

그리고 우리 반은 전반적인 능력을 향상시키는 쪽에 주안점을 두었지.

말하자면, 아카데미가 1학년들에게 요구한 건 자신이 각성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활용하는 방법.

일종의 자각이라 할 수 있다.

반대로, 2학년들에게 요구하는 건 최소한의 능력.

즉, 헌터로서 자립할 수 있느냐 하는 시험에 해당한다.

"이번에 평가할 건 단 하나. 저번 전투 능력 평가에 이어, 작년 내내 배웠던 모든 사항들의 종합 평가."

종합 평가라는 말에 학생들의 얼굴이 굳는다.

말이 종합 평가지, 시험 범위가 늘어난다는 소리나 다름없었으니까.

때문에.

한 호흡 텀을 두고,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게이트 공략이다."

잠깐 정적.

이윽고, 폭발적인 반응이 튀어나왔다.

"게이트?! 게이트요?!"

"아니, 진짜로?!"

"학교 지하에 있는 거기요?!"

"야, 설마 거기겠냐?!"

왁자지껄한 어조였다.

숫제 소풍이라도 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요란스러운 분위기.

물론 그런 분위기를 구성하고 있는 게 단순한 흥미가 아닌 모종의 호승심…….

헌터로서 앞으로 몇 번이나 마주해야 할 게이트라는 원적에 대한 흥미임을 생각하면, 쉽사리 웃을 수도 없었지만.

'나 참.'

내 나이 때에는 저러지 않았는데.

짐짓 그렇게 말해보고 싶었지만, 사실 내게는 그렇게 말할 자격이 없었다.

아니, 나 중졸이니까.

얘들 나이 때엔 몬스터 시체 지분거리고 있었고.

뭐, 어쨌든.

이게 바로 우리 학년 교사들이 사용할 수 있는 비장의 카드였다.

본디 작년 내내 체험 훈련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되었어야 할 게이트 답사.

아카데미 지하에 있는 게이트를 활용한 훈련이 작년 내내 중지되었기 때문이다.

아니, 그야 어쩔 수 없었겠지만.

설마 아카데미에 딸린 E랭크 게이트 따위에서 S랭크 악마종이 튀어나올 줄 누가 알았겠는가.

일찍이 예은이와 내가 얽혔던 그 사건 이후.

현 2학년생들은 게이트를 체험할 기회가 없었고, 때문에 우리 학년 교사들에겐 언젠가 이 일을 만회할 필요가 있었다.

때문에.

마침 이번 기회를 살려 기말고사를 게이트 답사로 정하게 되었다.

수업 설명서 따위엔 여태까지 배운 수업을 활용할 기회를 얻기 위해 운운하는 이야기를 적으면 그만이고.

다행스럽게도, 반응은 나쁘지 않다.

바로 저번 겨울 방학에 눈 앞에서 게이트가 열리는 꼴을 보았기 때문일까.

학생들 사이에서도 게이트 탐사에 대한 필요성이 주제로 나돌고 있었던 모양이다.

아니, 단순히 놀러 가는 기분인 녀석들도 있겠지만.

"방금 전 이야기도 나왔는데, 학교 지하에 있는 게이트는 아니고. 다른 데에 있는 게이트를 빌려서 시험을 볼 거다."

다행스럽게도, 게이트를 확보하는 데엔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왜냐하면 이 근처에 있던 게이트를 관리하던 모 초대형 길드가 작년에 어떤 일로 무너져버렸기 때문이다.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다.

뭐, 어쨌든.

덕분에 그 길드가 관리하고 있던 게이트까지 단번에 헌터 협회 쪽으로 되돌아온 상황.

협회로서는 당연히 일손이 부족해 낑낑대고 있던 상황이다.

그런 와중에 우리 아카데미 측에서 게이트 내부 소탕이라는 명분으로 참가서를 제출한 셈이니.

당연히 눈이 돌아갈 만큼 반가울 수밖에 없겠지.

물론 위험한 건 사실이다.

게이트에 대한 사전 정보, 적절한 조 추첨.

나아가서는, 몬스터에 대한 정보나 일정 수준 이상의 피해를 대신 받아줄 부적까지.

준비해야 할 물건은 어떻게든 마련하고 있지만, 이런 물건들을 바리바리 챙긴다고 해서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할 수 없는 게 바로 게이트다.

그렇지만.

애초에 이 업계라는 게 그런 법.

정말로 상처 하나 없이 B랭크 헌터를 양성할 수 있는 커리큘럼 따위가 있을 리 없지 않은가.

우리들이 할 수 있는 건 딱 하나.

최대한 주의를 기울이며 사상자까지는 나오지 않도록 염두에 두는 것이다.

무엇보다, 더 이상 바리바리 싸고 돌 수도 없는 노릇이고.

신세계 질서가 도시 한 가운데에 열어젖힌 초대형 게이트는 이런 부분에서도 의식 개혁을 일으켰다.

이걸 좋다고 해야 할지, 나쁘다고 해야 할지.

내심 고개를 저으며, 나는 슬쩍 반 안의 분위기를 살폈다.

"이번에는 2학년 전원을 합쳐서 팀을 만들고 난 다음 시작할 거다."

"선생님, 팀은 저희들끼리 짜도 돼요?!"

"하하, 안 돼."

노골적으로 몇몇이 주눅 드는 게 퍽 인상적이었다.

그렇지만, 당장 작년 게이트 체험만 해도 예은이의 쇠고집에 점수가 나가리될 뻔했던 게 현실.

아무리 그래도 여기서 학생들의 자율성 존중 운운하면서 팀을 짜게 내버려둘 생각은 없다.

모르는 사람과 팀을 짜 평범하게 역할을 다하는 것.

난생 처음 보는 사람과 의견을 조율하는 것.

어느 쪽이든, 현장을 구르다 보면 필요하기 마련인 능력이니까.

게다가, 학생들이 서로의 능력 상성 따위를 보고 친해졌을 리도 없잖은가.

막말로, 아직은 어린 애들이다.

팀을 짠다고 하면 능력의 상성이나 호흡 따위를 고려해 짜는 녀석들이 어디 있겠는가.

보나 마나 아는 녀석들끼리 뭉치는 게 대부분이겠지.

그 경우, 팀 사이에 지나칠 정도로 실력적 격차가 발생할 수 있다.

아니, 그 정도면 귀여운 수준이겠지.

후열 공격수 네 명의 환장할 조합이 일으킬 불협화음에 비하면 말이다.

만에 하나 이번 성적 탓에 사이가 나빠졌다던가 하는 이야기를 듣고 싶지도 않고.

다음에 입학할 신입생들이 능력 상성 따져서 친구를 사귀기 시작했다는 말도 마찬가지다.

즉, 이번에 팀을 나누는 건 지엄한 랜덤의 법칙.

혹은, 그런 이름 하에 선생들끼리 머리통을 맞대고 나름 괜찮은 조합을 궁리할 수밖에 없겠지.

'일단 우리 꼬맹이들은 전원 찢어둬야지.'

다른 게 아니라, 신세계 질서와 얽혔던 게 문제다.

다른 학생들에 비하면 한 수나 두 수 이상 앞서고 있는 게 현실이니.

적어도 균형을 위해선 두 명 이상이 같은 조가 되지 않도록 하는 게 중요하겠지.

아니,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정필연 이 친구는 도대체 뭐지?

어느덧 A랭크 턱걸이라고 해도 좋을 실력을 선보였던 정필연의 모습을 떠올리며, 나는 머릿속으로 천천히 팀 구성을 짜맞추기 시작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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