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2화 〉 벌목
* * *
쿠당탕!!
먼 옛날, 페르시아 지방에서 마신이라는 이름으로 숭배받던 대악마.
내심으로부터 우러나온 복종에 대응하는, 강압적인 지배.
억압과 압제의 마신이라는 이름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꼴사나운 모습이었다.
인간 형태로 모습을 드러낸 마신의 육체가 바닥을 구른다.
마신의 모든 마력을 눌러담은 그릇.
방금 전, 적당히 줄기를 놀려 형태만 잡고 있었을 때와 달리 인간 사이즈의 마신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육체.
그 육체가 단번에 핑그르 하고 하늘을 돈 것이다.
당연한 이야기였다.
직접적으로 비교할 수는 없겠지.
다만.
박우찬의 근력은 이미 현직 A+랭크 육체 강화 능력자에 필적한다.
그리고 마신은 A+랭크 몬스터.
억압의 마신이라는 이름과 같이, 육체 능력에 특화된 부류는 아니었다.
즉.
질량이나 크기 문제를 제외하면, 박우찬은 이 거대한 마신의 본체를 상대로도 힘겨루기에서 밀리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압도할 수 있다.
바로 그런 점을 깨달을 수 있었다.
네 오만을 벌하겠다거나, 방자하기 짝이 없는 태도라거나.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마신의 감각이 경종을 울린다.
그리고.
마신의 육체가 허물어졌다.
허나, 만일 누군가 이 광경을 보고 있었다면 조금 다르게 설명했겠지.
마신의 몸이 갑자기 박우찬의 배후에 나타났다고.
단순한 고속 이동, 따위는 아니다.
소위 말하는 블링크, 공간 도약은 더더욱.
단지.
마신의 힘을 눌러담은 이 그릇은, 마신의 본체로 따지자면 극히 일부.
자신의 뿌리나 줄기 등을 인간 형태로 빚은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요컨대, 주먹을 맞고 땅을 나뒹굴던 마신이 선택한 수단은 하나.
자신의 그릇을 해체하고, 박우찬의 배후에 재구성한다.
비록 박우찬에게 막혀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 한들, 현재 이 구역 대다수를 점거한 지금이기에 가능한 수단이다.
다른 뿌리와 줄기를 통해, 새로운 육체를 빚는다.
구태여 힘을 다시 모을 필요는 없다.
뿌리의 맥을 통해 전달하면 될 뿐이니.
말하자면, 자신의 육체인 뿌리 위에서 벌어지는 싸움이기에 허락되는 기예.
유사적인 순간이동이다.
나쁜 판단은 아니었다.
실제로, 방금 전 날아든 주먹은 그렇게 재빠르지 않았다.
등장과 동시에 망설임 없이 주먹을 날린 탓에 반응하지 못했을 뿐.
이런 식으로 압박한다면, 속도에 한해서는 자신이 우위에 서 있을 수 있다……!!
마신 나름대로 고안한 전법이었다.
물론 그 마음의 태반을 차지하고 있는 건 박우찬에 대한 분노겠지만.
'건방진 놈!!'
용서할 마음은 없다.
내지른 일격.
마치 드릴처럼 절묘하게 얽힌 덩쿨이, 기병창처럼 관통한다.
그리고.
그렇게 쓰러뜨리고 나면, 그 방자함에 대한 벌로 무릎을 꿇리고 머리를 바닥에 쳐박으리라……!!
……허면.
지금 이 시점, 억압의 마신이 선택한 전법은 점수로 매길 시 과연 몇 점이라고 할 수 있을까.
박우찬에게 그리 묻는다면, 망설임 없이 합격점을 주었겠지.
나쁘지 않다.
박우찬 또한 어렴풋이 짐작했듯, 억압의 마신이 지닌 권능은 타인에 대한 억압.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압제라는 이름에 걸맞는 광역 제압 능력이다.
대상이 자신에게 품은 부정적인 감정을, 신체 내부의 환경을 바꾸는 데에 사용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지금처럼 박우찬에게 가해지는 중력을 강화시킨다거나.
박우찬조차 그 정체를 눈치채지 못한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다.
몬스터의 기척에 한없이 민감한 박우찬이라고 해도, 용의 불이 옮겨붙은 가옥을 보고 혐오감을 느끼지는 않는다.
마찬가지.
이번에 박우찬을 억누르고 있는 건 마신의 능력이 아니라, 강화된 중력 그 자체.
당연히 박우찬 또한 위화감을 느끼는 수준에서 그칠 수밖에.
거기에, 그런 식으로 발목을 잡아채고 순간이동 비슷한 기술까지.
식물이라는 형태.
저만한 거체에서 나오기 힘든 속도전.
현재 마신이 취할 수 있는 수단으로서는 최선이었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마신 본인의 센스다.
즉.
방금 전의 일격에서, 마신이 염려해야 할 건 박우찬의 주먹이 지닌 위력 따위가 아니었다.
본인의 그릇을 만들고 의식을 옮긴 바로 그 시점.
즉시 안면을 향해 날아온 펀치.
요컨대, 마신이 염두에 두어야 할 건 바로 박우찬의 감지력 쪽이었다.
그리고.
진정으로 경계해야 할 것을 소홀히 여긴 대가는 참혹했다.
다음 순간.
박우찬의 뒤에서 나타난 마신은 다시 한 번 자신을 후려갈기는 주먹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크, 헉?!"
텅, 텅!!
마치 탱탱볼이 튕기듯 벽과 복도에 부딪히며 나가떨어지는 마신.
그 모습을 보며, 박우찬은 미간을 찌푸렸다.
'염병.'
물론 장갑은 끼고 있었지만, 기분이 나빴기 때문이다.
하물며 상대는 식물.
주먹으로 때릴 때마다 진물 비슷한 게 묻어나는 느낌이 최악이었다.
게다가, 데미지도 신통치 않고.
역시 식물은 두동강을 낼 방법이 있어야 한다.
단지.
상황이 좋지 않았다.
지금 이 곳은 지하의 복도.
마신의 뿌리 깊은 곳을 노리기 위해 들어온 건물 최심부다.
대검을 휘두르기엔 여의치 않다는 소리였다.
주먹으로는 변변찮은 데미지를 줄 수 없고, 대검을 휘두르기에는 용의치 않으니.
그 상황에서 박우찬은 어떤 수단을 선택할 것인가.
주먹으로 밀어붙이기?
아니면, 억지로 대검을 휘두를 생각인가?
정답은 어느 쪽도 아니었다.
때문에.
다음 순간, 간신히 몸을 일으킨 마신의 눈에 들어온 건 그가 아닌 주변을 향해 칼을 휘두르고 있는 박우찬의 모습이었다.
아니,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역시 그를 노리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왜냐하면.
서걱!!
박우찬이 휘두른 대검이 초승달을 그릴 때마다, 복도를 뒤덮은 뿌리가 잘려나가기 시작한다.
여기서 박우찬이 선택한 수는 하나.
일종의 쇼.
마신을 유도하기 위한 수단으로 삼았던 장기전을 다시 한 번 앞세운다.
어리석은 행동이었다.
이미 용도가 다한 장기전을 박우찬이 구태여 선택할 필요는 없다.
허나.
마신의 반응은 달랐다.
박우찬의 행동을 계속 내버려두면 본체에 데미지가 쌓이기 때문인가.
아니면, 억압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오만함.
눈 앞에 있는 자신이 무시당한다는 모종의 굴욕감 때문일까?
다시 한 번 몸을 일으킨 마신은 곧바로 행동에 들어갔다.
퍼퍼펑!!
박우찬의 눈 앞을 폭발이 장식한다.
모종의 인화성 씨앗 따위를 이용한 눈속임.
그렇게 판단함과 동시에, 폭발을 가르고 솟구친 나무줄기가 박우찬을 향해 돌격했다.
투우웅!!
무거운 충격.
대검의 옆면을 통해 빗겨 흘렸음에도 불구하고, 저릿한 충격이 달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멍청한 새끼."
마신의 일격을 향해, 박우찬은 그렇게 품평했다.
그리고.
퍼적!!
마신의 우반신이 터져나갔다.
"크, 오오오……?!"
마신의 공격과 교차한 반격.
마신의 일격을 받아넘기며 내던진 손잡이 부분의 추가 마신의 육체에 작렬했기 때문이다.
박우찬이 마신을 힐난한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평범한 사람의 손으로도 음속을 능가할 수 있는 무기가 바로 채찍이다.
거기에 마신의 힘을 담아 휘두른다면 훨씬 더 치명적인 위력을 발휘할 수 있을 터.
그런데도 덩쿨을 뻗는 수준이 고작이라니.
물론 너무한 평가라고 말할 수 있겠지.
애시당초 억압의 마신에게 있어 백병전은 주 분야가 아니다.
하물며 저토록 장대한 거체를 자랑하는 마신이, 인간의 무기술 따위를 습득하고 있을 리도 없으니.
당연한 이야기지만, 박우찬은 그런 데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마신의 말을 무시했을 때와 마찬가지.
부족한 건 눈 앞의 마신이다.
때문에.
너무나도 망설임 없이, 박우찬은 다음 걸음을 딛었다.
축지.
흘리듯 받아낸 마신의 나무줄기에 대패를 대고, 앞으로.
우드득!!
마력을 타고 회오리치는 박우찬의 움직임에 따라, 나무줄기가 섬뜩한 소리와 함께 벗겨지고 만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단순한 피해는 얼마 되지 않는다.
마신의 거구를 생각하면 손톱 하나 벗겨지는 수준의 타격밖에 되지 않겠지.
몇 번이나 말했듯, 박우찬의 지금 이 행동은 단순한 깎아내기.
회복에 필요한 마력을. 요격에 필요한 마력을.
천천히 깎아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박우찬은 그런 깎아내기에 일가견이 있었다.
그러므로.
망설임은 없다.
대검을 움켜쥐고, 박우찬의 움직임이 소리를 넘었다.
나무의 뿌리를 베는 칼날.
나무의 줄기를 깎는 톱날.
나무의 가지를 꿰뚫는 대못.
나무의 잎사귀를 벗겨내는 끌.
순식간에 이어지는 연격이 마신의 육체를 난도질한다.
서걱서걱서걱서걱서걱!!
쉼없는 연속 공격.
무호흡 상태에서 베여나간 마신의 육체가 재생을 시작한다.
그리고.
재생이 완료되기도 전부터, 박우찬의 연격이 다시 한 번 들이닥친다.
서걱서걱서걱서걱서걱!!
……다루기도 버거울 대검을, 무호흡 상태에서 연격.
냉정하게 생각하면, 헌터인 박우찬이라 해도 손쉬운 일이 아니다.
아니, 오히려 헌터이기에 더더욱.
상대는 몬스터.
같은 헌터가 아닌, 피부부터 골격까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괴물들이다.
당연히 박우찬이라 해도 지칠 수밖에 없다.
다만.
눈 앞의 마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못했다.
정말로 이 공격이 끝없이 이어지는 건 아닐까?
자신의 마력이 바닥날 때까지 끊임없이 주륙당하는 건 아닐까?
한 순간, 그런 의혹이 뇌리를 파고든다.
그리고.
한 순간 주저했다면, 그걸로 충분했다.
"으, 오오오오옷!!"
마신의 노성과 함께, 나무뿌리가 격동한다.
마신의 본체에 마력을 옮기고, 그 육체를 구동한다.
어중간한 줄기로는 안 된다.
적어도 저 우악스러운 대검으로도 한 순간에 베어낼 수 없을, 그런 튼튼한 물건이 필요하다……!!
"병신."
미리 말해두자면, 마신의 판단은 정확했다.
어중간한 나무줄기 따위, 박우찬에겐 더더욱 깎아낼 대상에 지나지 않았겠지.
합리적인 판단이다.
문제는, 너무나도 합리적인 판단이었던 만큼 예상하기도 쉬웠다는 점에 있다.
지금 이 장소는 마신의 나무뿌리 중에서도 한없이 중심에 가까운 장소.
뿌리를 베며 전진하던 박우찬을, 마신조차 마침내 저지하기 위해 그 모습을 드러낸 장소다.
때문에.
이 장소에서 한층 두터운 뿌리를 움직인다는 건, 뿌리의 중심지가 훤히 드러난다는 소리였다.
물론 박우찬에게 마신을 넘어 단번에 뿌리 덩어리를 참수할 기술은 없다.
시그니처는 불완전하고, 나머지 기술로는 여력이 안 된다.
말이 뿌리의 중심이지, 마신의 크기를 고려하면 방금 전까지 깔짝거리던 나무줄기 한두 개 수준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수준이었으니까.
당연한 이야기지만, 구태여 박우찬이 준비를 할 필요도 없었다.
조준은 이미 끝났다.
박우찬과는 다른 경로로, 마력을 뻗어 지금 이 장소를 관측하고 있던 이가 있으니까.
그리고.
티아마트는 눈을 떴다.
박우찬이 마신의 주의를 끄는 사이, 작업은 완료되었다.
박우찬과는 별도로 마신의 핵을 찾아냈고, 지금 이 순간 빈틈을 드러낼 때까지.
티아마트는 줄곧 준비하고 있었으니까.
때문에.
마신의 입장에서 보자면, 정말로 찰나에 지나지 않았다.
뿌리를 움직였다고 생각한 다음 한 순간.
섬광이 작렬했다.
그리 설명할 수밖에 없었다.
과격하기 짝이 없는 공격이었다.
티아마트가 이 분신에 담아두었던 회복과 은총.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가호를 내리는 데에 사용할 마력 그 자체를 밀집해 발사한다.
말이 마력을 발사한다 운운하는 거지, 실제로는 단순무식하기 짝이 없는 활용법이다.
어떠한 술리나 연구도 없이, 단순히 마력을 밖으로 퍼부을 뿐인 공격.
말하자면, 총을 쏘는 대신 바위를 폭파시켜 그 파편으로 적을 공격하는 듯한 공격이었다.
다만.
지금은 그 정도로 충분하다.
이 마신을 쓰러뜨리기 위해 필요한 건 상대의 뇌나 심장을 노리는, 정밀한 사격이 아니니까.
필요한 건 바위를 깨부수고도 남을 위력의 화약.
즉, 화력이다.
"썩 마음에 드는 방식은 아니다만……."
확실히, 여신이라는 이름이나 실력에 어울리는 기술은 아니다.
마력만 있다면 열 살 배기 꼬맹이도 가능할 공격이었으니.
그렇기에.
어처구니없음을 느끼면서도, 티아마트는 마력을 조준한다.
자신이 마신의 핵을 드러낼 테니, 그 틈을 타서 날려버려라.
박우찬이 부탁한 건 그게 전부였다.
그리고.
기회가 찾아온 지금.
티아마트는 눈 앞에서 기회를 놓칠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았다.
"사냥꾼으로서의 실력은 인정해야겠구나……!!"
쩌어엉!!
다음 순간.
지하를 꿰뚫는 거대한 마력광이 솟구쳤다.
티아마트의 분신, A+랭크 헌터나 몬스터에 준하는 마력의 총량.
분신의 유지조차 아슬아슬할 정도로 끌어모은 마력을 남김없이 퍼부은 일격이었다.
당연히, 권능을 제외하면 A+랭크.
고작해야 그 정도에 지나지 않는 마신의 핵이 견딜 수 있는 위력이 아니다.
그러므로.
지하를 꿰뚫고, 지상으로.
아름드리 솟구친 거목조차 꿰뚫고, 밤하늘을 가르는 섬광.
그 모습과 함께, 마신의 토벌도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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