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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몬스터만 죽이고 싶음-271화 (271/371)

〈 271화 〉 벌목

* * *

물론 박우찬이 말하고자 했던 건 정말로 방해밖에 안 되니 조용히 찌그러져 있으라는 뜻이 아니었다.

때문에.

티아마트의 모습을 뒤로하고, 박우찬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동시에, 생각을 갈무리한다.

몬스터를 토벌하는 데에 가장 중요한 요소는 무엇일까?

실력. 기술. 상황. 준비.

수많은 대답이 있을 수 있겠지.

다만.

현실적으로 보았을 때, 대다수 헌터들은 가장 먼저 환경을 고려할 수밖에 없다.

민간인들에게 닥치는 피해. 도심지 내 건물 파손…….

어느 쪽이든, 단순한 싸움꾼이 아닌 이상 이기면 그만이라고 잡아뗄 수 있는 입장도 아니다.

때문에, 여타 헌터들이 다른 무엇보다 주변 환경을 염려하는 건 실로 자연스러운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런 점을 고려할 때, 가장 문제가 되는 건 역시 몬스터의 덩치다.

질량. 크기.

즉, 대형 몬스터일수록 원하는 전장으로 흐름을 유도하기 어렵다.

단순히 밀어붙이기도 힘들기 때문이다.

허나.

그런 흐름이 확 하고 뒤집히는 순간이 있다.

지나칠 정도로 비대화한 몬스터가, 차라리 지형이나 환경에 가까운 수준까지 성장했을 때.

전장을 선택할 우선권이 있는 건 오히려 헌터 쪽이 된다.

마치 지금처럼.

서걱!!

섬뜩한 소리와 함께, 박우찬의 칼날이 다시 한 번 날뛰었다.

건물 지하.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들이 서 있었던 곳에서 한층 더 깊은 장소까지 걸음을 옮긴 박우찬.

그 목표는 실로 간단했다.

지금 이 건물 지하를 뒤덮고 있는 마신의 뿌리.

개중에서도 핵심적인 부분들을 절단한다.

식물형 몬스터에게 뇌나 심장과 같은 평범한 급소가 없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식물형 몬스터에게 급소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

아름드리 나무는 잎사귀나 나뭇가지가 꺾인다고 해서 단번에 죽음을 맞이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뿌리에 생긴 자그마한 흠.

그 사이로 스며드는 소금물 따위가 나무를 썩어 문드러지게 하는 원동력이다.

마찬가지였다.

박우찬의 능력은 평범한 상황에서도 도시 하나 정도는 아우를 수 있다.

거기에 이만한 거물이 있는 장소라면, 건물 전체를 조망하는 일도 어렵지 않다.

한 마디로 말해, 박우찬이 선택한 전법은 히트 앤 런이었다.

지하 전체를 뒤덮은 뿌리 중에서도 핵심에 가까운 위치를 선정해 타격한다.

말로 하면 간단하겠지.

누군가는 그렇게 말했겠지만, 박우찬에겐 정말로 간단한 일이었다.

나무의 전체적인 구조를 파악할 수 있는 감각과 능력.

축지를 기반으로 한 기동력.

거기에 손에 든 무기까지.

축지를 밟고, 톱날을 꽂아 당긴다.

고작해야 두 동작.

한 호흡에 마신의 요점이 잘려나간다.

박우찬으로서는 그런 행동을 반복하면 그만이었다.

물론 지루한 작업인 건 사실이지만, 언젠가 확실한 결과를 볼 수 있는 일이기도 했으니.

확실한 일격이 없다면, 장기전을 유도해도 나쁘지 않다.

박우찬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이,"

"자식!!"

"내가,"

"누구인지는,"

"알고 있는 거냐?!"

물론 방해가 없지는 않았다.

박우찬이 뿌리를 베려 할 때마다 모습을 드러내는 마신의 육체.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본체의 일부인 잎사귀나 나무열매 따위가 변형된 모습이라고 해야 할까.

마치 방금 전 복도에 서 있던 마신의 육체처럼, 그런 단말들이 멋대로 솟아나 박우찬을 방해하려 들기도 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정말로 방해가 되지는 못했다.

틀림없이 마신이란 강력한 존재다.

단순한 체급만 따져도 A+랭크 몬스터.

거기에 추가로 마신들 특유의 권능까지.

평범한 A+랭크 몬스터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

통상적인 S랭크 헌터조차 고역을 거듭할 수밖에 없는 상대.

그게 바로 마신이다.

그렇지만.

반대로 말하자면, 딱 거기까지.

마신에게도 한계는 있다.

예를 들면, 눈 앞의 마신이 그렇듯이.

억압의 마신.

티아마트가 그렇게 추측한 마신의 정체는 이토록 거대한 식물 덩어리였다.

그래.

이 식물 덩어리 전체를 합쳐 마신이다.

즉, 마신의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 뿌리나 나뭇가지 따위가 박우찬의 앞을 가로막을 수는 없었다.

애초에 단순한 전력으로 따져도 박우찬의 힘은 억압의 마신을 상회하고 있다.

지극히 특수한 권능이라는 힘 때문에 승부를 장담할 수 없을 뿐.

허면?

박우찬에게 공격의 우선권이 있고, 눈 앞을 가로막는 건 고작해야 마신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 지금.

박우찬이 손속을 머뭇거릴 이유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뿌리에 톱날을 걸고, 잡아당긴다.

그리고 뒤늦게 나타난 마신의 분신 따위를 향해 일격.

마신의 발악은 고작해야 한 동작, 시간으로 따지면 1초도 되지 않는 시간을 버는 게 고작이었다.

때문에.

자연스레 마신 또한 박우찬의 속셈을 이해할 수 있었다.

깎아내기.

가급적 단기전을 노려야 하는 상황에서, 박우찬은 오히려 장기전을 시도하고 있었다.

뿌리를 끊고 나무를 깎으며, 억압의 마신을 확실하게 쓰러뜨릴 수 있도록.

일종의 치킨 레이스다.

박우찬은 단기 결전을 내는 편이 좋다.

마신은 장기전으로 끌고가는 게 좋다.

그렇지만.

박우찬이 장기전을 선택하면, 마신은 확실하게 한 걸음 한걸음 죽음으로 다가설 수밖에 없다.

허면?

마신은 어떻게 할까.

자신의 확실한 죽음을 기다리면서, 조직을 위해 그 목숨을 아낌없이 헌신할까?

'설마.'

마신 운운하기 이전의 문제다.

그럴 수 있는 생물은 세상 천지에 존재하지 않는 법.

때문에, 이 승부는 처음부터 박우찬이 유리할 수밖에 없었다.

애시당초 박우찬이 단기 결전을 지향해야 하는 이유라고 해도 얼마 되지 않는다.

신세계 질서가 추가적으로 간섭할지도 모르니까.

도시 사람들이나 길드 협회의 눈치가 보이니까.

그리고.

그 정도 문제는, 감수하려 들면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는 문제다.

막말로, 적진의 핵심 전력 중 한 명인 마신의 목숨과 사람들의 눈치.

양 쪽을 저울에 올리면, 후자는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는 문제였으니까.

그러므로.

"오."

스무 번.

족히 스무 번 넘게 마신의 단말을 베어넘겼을 때였을까.

마침내 자신의 눈 앞에 모습을 드러낸 마력 덩어리.

바야흐로 마신이라 하기에 부족함 없는 분신의 모습을 보면서도, 박우찬은 마침내 올 게 왔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

굴욕이었다.

억압의 마신은 그렇게 생각했다.

마신에게 있어, 지금 이 상황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다.

애시당초 지금 이 상황 자체가 굴욕적이었다.

인간과 시야가 다른 몬스터 중에서도, 한층 더 이질적인 악마종.

그 중에서 보자면, 억압의 마신은 다소 전형적인 성격이었다.

오만하고, 그 이상으로 자기중심적이다.

마치 용과 같이 인간을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반대로 인간이란 곧 자신에게 충성을 바칠 존재에 불과하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억압, 압제라는 이름에 걸맞는 성품.

바야흐로 폭군이라 칭할 수 있겠지.

그렇기에.

자신과 대등하다 말할 수 있는 여신을 상대로 한 대화에서 마신은 즐거움을 느꼈고, 그 이상으로 대화에 훼방을 놓은 박우찬에게 분노했다.

마신이 본체를 드러낸 건 자신의 육체로 삼았던 분신이 박우찬에게 당한 탓에 어쩔 수 없었던 점도 있었지만, 불쾌함 또한 적잖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게 사실이었다.

문제는 박우찬이 평범한 사냥꾼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나무 뿌리를 뻗어 건물 안에 존재하는 모든 이들을 흡수하려던 마신의 계획은, 공교롭게도 처음부터 차질을 빚었다.

뿌리를 자르며 마신의 확장을 방해하던 박우찬 때문이다.

심지어 저 사냥꾼은 눈 앞에 나타난 마신의 분신을 보고도 별다른 감흥 없이 칼을 휘둘러 베어낼 뿐이었다.

억압의 마신으로서는 참을 수 없는 굴욕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신의 육체라는, 마력으로 넘쳐흐르는 길을 밟아 축지를 딛는 박우찬.

마신이 뿌리를 뻗는 속도보다 오히려 매 순간 상실하는 뿌리의 가치가 더 클 정도가 되자, 마신 또한 더 이상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마치 마신의 육체를 낱낱이 파악하고 있는 듯했다.

단순한 속도라면 당연히 마신의 육체가 뿌리를 뻗는 게 더 빠르겠지만, 그 이상으로 중요한 핵심 부위를 베어내고 있으니 당할 도리가 없었다.

그러므로.

억압의 마신 또한 결국 박우찬의 뜻에 응할 수밖에 없었다.

계속해서 뿌리를 깎아내는 박우찬을 상대로 장기전에 돌입해 봤자, 결과는 뻔하디 뻔한 일.

비록 저 쪽이 원하는 결말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방법은 없었다.

나무 전역에 고루 분배되어 있던 마력을 한데 밀집시킨다.

단기 결전.

조금이라도 더 힘이 깎이기 전에, 남은 힘 전부를 끌어모아 사냥꾼을 요격한다.

마신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오로지 그 뿐이었다.

물론 리스크는 크다.

남은 마력 전부를 끌어모았다는 건, 다시 말해 이 마력을 담고 있는 그릇이 부서질 경우…….

즉, 마신이 패배할 경우 더 이상 그 뒤가 없다는 걸 뜻했다.

전신의 마력이 남김없이 증발해, 마신은 죽음을 맞이하고 말겠지.

알고 있다.

그러나.

그는 억압의 마신.

오만하기 짝이 없는 폭군이며, 그렇기에 인간 사냥꾼 따위에게 패배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망설임은 없었다.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다는 판단이 서자 마자, 마신은 전신의 마력을 그러모아 방금 전 잘린 뿌리 옆으로 자신의 의식을 투과했다.

그러자 그 근처에 있던 나무줄기와 열매가 얽히며 새로운 그릇을 형성했다.

바야흐로 마신의 총력에 걸맞는 마력이 결집한다.

그리고.

"이런 건방진──."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고 한다면, 상대가 박우찬이었다는 점이다.

방금 전부터 경고를 흘리던 마신의 육체를 별다른 내색 하나 없이 베어넘기던 때와 마찬가지.

마신 본인보다도 빠르게 결집하는 마력을 깨달은 박우찬은, 곧바로 행동에 들어섰다.

때문에.

억압의 마신으로서 건방진 인간을 훈계하고자 입 비슷한 부분을 열어 소리를 내던 마신.

정확히는 그 의식이 목격한 건, 자신의 안면을 향해 주먹을 후려갈기는 박우찬의 모습이었다.

뚜둑!

섬뜩한 소리와 함께, 목을 지탱하고 있던 줄기가 부러진다.

그리고.

의식을 투과하고 나서 한 호흡.

마신의 육체가 박우찬의 주먹에 맞아 다시 한 번 지면을 나뒹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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