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0화 〉 억압의 마신
* * *
밤하늘을 찢어가르고 아름드리 솟구친 나무.
아지트의 지하를 뿌리로, 지상의 건물을 줄기로.
너무나도 유명한 동화의 한 장면처럼 자라난 나무의 모습은 멀리서도 한 눈에 담기 힘들었다.
"애미, 존나 크네."
그러므로.
박우찬의 투덜거림은 사냥꾼으로서 내뱉은 고견이 아니라 단순한 불평에 가까웠다.
물론 빈말은 아니었다.
박우찬의 마력 감응 능력은 대지를 꿰뚫듯 곤두선 마신의 모습을 온전히 포착하고 있었으니까.
문제는 바로 거기에 있었다.
박우찬은 사냥꾼이다.
이 나라에서 제일 우수한 사냥꾼.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뛰어나다는 표현도 과언이 아닐 수 있겠지.
때문에.
박우찬의 수법엔 낭비가 없다.
최소한의 힘으로 최대한의 성과를.
화려한 기술 따위는 필요 없다.
몬스터와 정면으로 힘을 겨루는 건 단순히 어리석을 뿐이니까.
배후에서 기습해 목을 베고 심장을 꿰뚫으면 대다수 상대는 쓰러뜨릴 수 있는 법이다.
설령 자신보다 강력한 적이라 해도 마찬가지.
상대를 쓰러뜨리기 위해 그 이상의 힘을 추구하는 건 무술가의 역할.
사냥꾼의 일이 아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이 업계엔 기습 한 번으로 쓰러뜨릴 수 없는 몬스터 또한 수두룩했다.
모종의 방어 능력을 갖춘 몬스터.
죽음조차 극복하는 불사신.
나아가서는, 단순히 심장 등 눈에 띄는 급소가 존재하지 않는 부류까지.
눈 앞에 있는 마신 또한 마찬가지였다.
식물을 상대로 뇌를 흔들고 심장을 부수는 기술이 무슨 효과가 있겠나.
당연히 박우찬도 그런 점은 숙지하고 있었다.
그런 만큼, 박우찬의 기술은 자연스레 저런 몬스터들도 공략할 수 있는 방향으로 발전을 거듭했다.
해체법을 기반으로 한 사냥 기술.
어지간한 대형 몬스터와 정면으로 합을 겨루기 위한 축지.
마지막으로 시그니처까지.
설령 어떤 몬스터라 해도 상대할 수 있도록 갖추어진 기술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경이나 조건 등에 따라 상황이 변하는 경우는 없잖아 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좆됐네.'
눈 앞에 있는 거대한 나무.
티아마트의 설명에 따르면 억압의 마신일 괴물을 상대할 방법은 작금의 박우찬에겐 마땅치 않았다.
적어도 통상적인 수단으로는 상대할 수 없을 만한 거체.
방금 전 확인했다시피, 기습 따위는 효과가 미비하다.
허면?
시그니처는 어떨까.
벨 수 있다.
죽일 수 있다.
박우찬은 그렇게 확신했다.
물론 식물에게는 별다른 급소가 없다.
하지만.
전신이 두동강나면 급소 운운하기 이전에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 법.
때문에, 박우찬이 그런 판단을 내린 이유는 크게 두 가지.
"거 참, 화려하기 그지없구나."
하나는 바로 옆에 있는 티아마트의 존재다.
시그니처, 예쁘게 베기.
대상의 마력과 동조해, 공기를 베는 수준의 노력으로 적을 양단하는 절기.
거기에는 아무리 박우찬이라 해도 쉬이 사용할 수 없을 만한 집중력이 요구된다.
말 그대로, 몬스터를 상대로 하기 위한 기술.
때문에.
지금은 사용할 수 없다.
왜냐하면 지금 사용했다간 티아마트 채로 양단해버릴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물론 분신인 이상 티아마트 본체까지 피해가 가지는 않겠지.
이론상으로는.
다만.
박우찬의 시그니처는 특수하다.
솔직히 말하자면, 분신 너머에 있는 본체까지 그대로 베어버리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었다.
그렇다고 분신을 해제하게 할 수도 없고.
여하간, 신세계 질서 측에는 S랭크 헌터가 있다.
태시영.
요 최근 비교적 조용하긴 했지만, 놈이 신세계 질서 내의 세력전 따위에 신경을 쓸 타입도 아니고.
무엇보다, 저렇게 자라난 마신 때문에 놈들 측에서도 어느 정도는 상황을 파악했을 터.
다시 말해, 시그니처를 사용한 이후 컨디션으로 태시영을 비롯한 전투원들을 상대해야 한다는 건데…….
'현명한 생각은 아니군.'
만약 그 방법 뿐이라면 그야 어쩔 수 없겠지만, 당장엔 보류하는 게 낫겠지.
무엇보다.
슬쩍, 박우찬은 자신의 손아귀를 쥐락펴락했다.
그리고 눈치챘다.
두 번째 이유.
묘한 위화감.
방금 전부터 자신의 전신에 감도는 이상한 느낌.
평소에 비해 아주 약간이지만 손맛이 둔해진 느낌은 틀림없이 있었다.
방금 전, 마신의 육체를 참수할 때에도.
억압의 마신이 지닌 권능일까?
틀린 말은 아니겠지.
다만, 직접적으로 육체에 관여하고 있는 건 아니리라.
만약 그랬다면 자신의 감각이 눈치채지 못할 리 없다.
뭐, 어느 쪽이든.
당장엔 추론한다 해도 별다른 근거 하나 없는 판국.
중요한 건 감각 쪽에 미세한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박우찬의 시그니처는 절묘한 컨트롤이 필요한 기술.
이런 상황에서 티아마트를 대상에서 제외하고 마신만 정확하게 베는 묘기 따위, 단순한 도박에 지나지 않는다.
가능성은 있겠지만, 섣불리 시도할 만한 물건도 아니다.
허면?
조력은 없음.
아무래도 최승준은 당장 싸울 만한 상태가 아닌 모양이고.
비서 양반 또한 마찬가지.
이준구는 여유가 있겠지만, 지금 이 상황에선 내가 싸우는 편이 낫다는 건 여전히 마찬가지다.
박우찬은 그렇게 생각했다.
자료도 챙겨야 하고, 후속으로 들이닥칠 녀석들도 고려하면 더더욱.
뒤에는 이준구가 부른 회복역이 있으니 어느 정도 부담을 감수할 수는 있다.
다만, 전투 중 회복을 기대하기는 어렵겠지.
다름이 아니라, 박우찬 자신의 체질 때문이다.
티아마트의 가호나 회복 중 어느 쪽도 방해가 될 뿐이니.
실질적으로, 티아마트의 이번 분신이 보조에 특화되었다는 점을 제외하면 전력에 어드밴티지는 없다고 볼 수 있겠지.
상황은 최악.
헌터 협회나 뒤처리 등은 최승준 쪽에서 알아서 처리하겠지만, 길게 끌어서 좋을 이유도 없다.
즉, 당연히 단기 결전을 노려야 한다는 뜻이다.
"빡세네."
쯧, 하고 혀를 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우찬의 두뇌가 회전하기 시작한다.
사냥꾼으로서의 감각이 상황을 조망한다.
불리한 상황. 유쾌하지 않은 전황.
그렇지만.
'상황 좀 나쁘다고 꽁무니를 뺄 수가 있나.'
헌터에게 있어, 전장이나 상황은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어느 날 갑자기 도시 한복판에 게이트가 열리면?
산맥 한가운데에 생긴 던전이 스탬피드를 일으키기 시작하면?
설령 불리한 상황이라 해도 민간인들을 지키기 위해선 나서야 할 때가 있다.
지금도 마찬가지.
불리하다고 징징거리는 건 학생들이나 하면 될 일.
사냥꾼인 그가 해야 할 일은 단 하나.
그래서 그 불리한 조건을 어떻게 활용해야 눈 앞의 몬스터를 토벌할 수 있을까 하는 점 뿐.
그런 의미에서 말하자면, 한 가지 다행인 점이 있었다.
눈 앞의 마신이 식물형 몬스터라는 점이다.
아니, 저걸 식물이라 해야 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적어도 이 이상 주변으로 피해가 확장될 염려는 없다.
설령 뿌리를 뻗는다 해도, 맹수나 드래곤 따위에 비하면 훨씬 느릴 수밖에 없겠지.
즉, 그 부분에는 손속을 두어도 된다는 뜻이니.
차곡차곡 전법을 조립한다.
상황. 두말할 필요도 없이 불리하다.
조건 또한 마찬가지.
여력은 있지만, 100% 발휘할 수도 없는 상황.
누가 보아도 불리한 싸움이었지만, 박우찬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생각은 끝났느냐?"
"엉?"
티아마트 또한 마찬가지였다.
적어도 그녀는 알고 있었다.
눈 앞의 사내가 사냥꾼으로서 얼마나 출중한 인간인지.
때문에.
이런 상황에서도 그녀는 박우찬의 승리를 믿고 있었다.
이토록 불리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마신이라는 적을 토벌할 수 있는 방법을.
박우찬이라면 궁리할 수 있다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틀린 예감 또한 아니었다.
박우찬의 머리가 작금의 상황에 맞추어 최적의 전법을 고려한다.
동시에.
자문한다.
……한 가지.
지금 자신은 저 거대한 나무와 싸울 수 있는가?
여력을 발휘할 수 없는 상황. 단순한 크기 차이.
거기에 질량까지.
어느 쪽이든, 유리하다고는 농담으로도 말 못 할 상황이지만…….
'할 수 있다.'
계산이 끝났다.
박우찬은 슬쩍 손목을 풀었다.
"그래."
견적은 나왔다.
남은 건 거기까지 상황을 만들 수 있느냐 하는 점 뿐.
흘끔, 박우찬의 시선이 티아마트를 향한다.
어쩌면 그 덕분일까?
티아마트는 짐짓 콧대 높은 얼굴로 허리춤에 손을 얹었다.
여신이라기엔 지나칠 정도로 경박한 태도였지만, 어쩔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여하간, 여태까지 티아마트가 박우찬에게 부탁을 받은 적은 많았어도 이런 적은 별로 없었으니까.
당연한 일이었다.
티아마트는 여신.
사냥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요컨대, 박우찬과 공동 사냥을 나설 만한 상황은 그녀에게도 드물었다.
그런 상황에서 박우찬에게 부탁을 받는 상황이니.
이런저런 헛바람이 들어갈 법도 했다.
적어도 다른 제자들은 꿈도 못 꿀 일이겠지.
티아마트는 그렇게 자평했다.
여하간, 티아마트의 눈도 옹이구멍은 아니다.
그 앙큼한 계집애들이 박우찬을 그런 눈으로 보고 있다는 건 익히 알고 있는 일.
귀여운 면은 없잖아 있어 그대로 두고 있긴 했지만, 그 꼬마들이 다른 무엇보다 박우찬에게 제자가 아닌 대등한 관계를 맺고 싶어한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우찬과 제자들 사이에 있는 실력 차이는 하루아침에 좁힐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자연스레 학생들의 목표는 영 아득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자신처럼 박우찬과 같은 전장에 설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면!
"아니,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
"에엥?"
때문에.
박우찬의 대답을 들은 티아마트는 자신도 모르게 떨떠름한 어조를 내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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