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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몬스터만 죽이고 싶음-267화 (267/371)

〈 267화 〉 분업

* * *

그리고.

나는 별다른 문제 하나 없이 건물 최심부에 발을 들였다.

아니, 진짜로.

내부에서 요격을 위해 움직이는 기척도 눈에 띄었지만, 정작 내 쪽이 아닌 다른 방향으로 나섰기 때문이다.

뭐, 아무리 그래도 나 하나 좋자고 방향을 바꿀 수도 없는 노릇.

덕분에 나는 무탈하게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진입 전, 우리들이 내던졌던 최승준의 마력 결정은 제 역할을 다한 듯했다.

건물 안.

이 최심부까지 한기가 침범한 듯, 대다수 사람들이 꽁꽁 얼어붙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조심스레 걸음을 옮긴다.

만에 하나 잘못 건드렸다가 깨지기라도 하면 설령 최승준이라 해도 되돌릴 수 없을 테니까.

아니, 사실대로 말하자면 어차피 신세계 질서 출신일 테니 죽어도 상관 없지 않나 싶긴 한데.

'내 인생에 빨간 줄 생기니까.'

짧게 고개를 젓는다.

어느 쪽이든, 기습을 노렸던 우리들의 계책은 시의적절하게 맞아떨어졌던 모양이다.

마치 파티라도 벌이고 있던 듯 화려한 회장 내부.

혹시 정신을 차린 이들이 있을까 싶어 조금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딱히 그런 기미는 느껴지지 않았다.

'효과 한 번 확실하고.'

그런데, 도대체 뭘 하고 있었던 거야?

마신이 파티 따위를 열기라도 했다는 건가?

그런 생각에 슬쩍 주변을 둘러보자, 과연 플래카드 따위가 눈에 들어왔다.

……아무래도 여기에서 벌어지고 있었던 건 마신들의 장례식이었던 모양이다.

"파티가 아니라 장례식입니다."

나 참.

나도 모르게 고개를 젓는다.

악마라는 이름 때문인지,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하지 못할 감성이었다.

뭐, 어쨌든.

지금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지.

다시 한 번 주변을 훑던 나는 곧 척 보기만 해도 수상쩍은 문서 보관소 따위를 발견했다.

아무래도 여기에 기거하고 있던 마신들은 꽤나 꼼꼼한 성격이었던 모양이다.

아니면 신세계 질서 측이 그래도 상전이랍시고 꼬박꼬박 문서 보고 따위를 올렸을지도.

어느 쪽이든, 내겐 아무래도 좋을 일이었다.

"어?"

"아, 왔어?"

그렇게 그 안으로 발을 들이니, 선객이 있었다.

이준구.

인류 최강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영웅 나으리다.

아무래도 나보다 빨리 이 주변에 도착해 살피고 있던 모양이다.

"대진운 실화냐?"

"어쩔 수 없잖아.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여하간, 이번엔 우리 쪽에서 선제 기습을 감행한 거니까.

저 쪽으로서는 오히려 요격하는 측.

즉, 어느 쪽을 먼저 요격할진 전적으로 놈들에게 선택권이 있었다.

다만, 아무리 그래도 불평이 나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하필이면 나랑 이준구가 문서 조사에, 최승준과 티아마트 쪽이 요격 담당이라니.

신세계 질서 측으로서는 최선의 수를 뽑은 셈이겠지만, 반대로 말하자면 우리로서는 최악의 패를 뽑은 게 된다.

무엇보다.

"그래서? 무슨 뜻인지 알겠냐?"

"아니, 전혀 모르겠는데……."

공교롭게도, 이 세상에는 학력 편차라는 게 있다.

그리고.

이번에 진입한 제압반 네 명의 평균 지적 수준을 고려할 때, 밑에서 3위와 4위를 차지하고 있는 건 나와 이 녀석이었다.

물론 내가 3위고 이준구가 4위지만.

"아니, 내가 3위지. 난 이제 영어도 할 줄 알아."

"씨발, 진짜?"

그리고.

당연한 이야기지만, 영어 좀 할 줄 아는 수준으로 신세계 질서의 원대한 계획을 이해할 수는 없었다.

아니, 대충 무슨 의도를 가지고 이런 작전을 입안했다던가 하는 건 알겠지만.

상세한 사정을 파악하거나, 이런 정보를 활용할 만한 방안을 생각하는 건 역시 힘들다.

이런 일에 어울리는 건 역시 최승준 쪽인데 말이야.

쯧, 하고 혀를 차며 감각을 확장시킨다.

설마 길을 잃은 건 아닐 테고.

내심 그렇게 툴툴거렸지만, 설마 정말로 길을 잃었을 리도 없다.

때문에.

다음 순간, 상황을 파악한 나는 다시 한 번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일단 최승준 쪽은 별다른 문제가 없는 모양이다.

마치 쥐죽은 듯 가만히 있는 게 심상찮긴 했지만, 적어도 생명의 위협은 없는 듯 호흡도 안정적이었다.

무엇보다, 지금 이 건물 내부의 냉기를 제어하고 있는 건 최승준의 비서 양반.

까놓고 말해, 다른 쪽보다는 최승준을 우선할 게 뻔한 아가씨다.

최승준 주변에 달리 적이 있는 듯 보이지도 않았지만, 설령 있었다 한들 가장 먼저 그 쪽에서 지원을 보낼 테지.

즉, 내가 염려할 필요는 거의 없다.

허면, 문제는 티아마트 쪽이라는 건데…….

잠깐 멈칫한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꽤나 긴 인연이 됐지만, 공교롭게도 녀석을 죽이고 싶다는 듯 날뛰는 내 감각은 전혀 호전되지 않았다.

오히려 더더욱 심해지면 심해졌지.

최근엔 자연스레 방독면을 지참해야 할 정도니.

요컨대, 지금 이 상황은 나로서도 나쁘지 않았다.

막말로, 내 탓도 아닌데 티아마트가 죽으면 그건 나로서는 반길 일이지 꺼려할 일은 아니니까.

게다가.

지금 이 자리에서 티아마트 쪽의 상황을 알게 된다 해도 마찬가지.

막말로, 이런 생각이나 하고 있는 지금 내가 달리 티아마트 쪽을 도울 수나 있을지도 모르겠고.

역으로 티아마트의 기척을 느끼고 죽이려 달려들지나 않을까 하는 게 문제일 수도 있다.

……냉정하게 생각하면 분명 그렇지만.

'으음.'

조금 앓는 소리가 샜다.

상기하는 건 일찍이 녀석이 이 도시를 떠나려 했을 때의 이야기.

그 날, 나는 상실을 두려워하는 녀석에게 그리 약속했다.

만약 그런 이유 때문에 떠나려 드는 거라면 내가 한 손 거들어줄 수도 있다고.

적어도 녀석이 나나 우리 꼬마들에게 베푼 만큼은, 나도 녀석의 친지들을 배려해줄 수도 있다고.

뭐, 못 먹는 감 찔러나 보는 심정이었지만.

어째서인지 녀석은 그런 내 말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고, 덕분에 지금까지도 이 쪽의 협력 관계는 지속되고 있다.

어쩌면 그 때문일까?

지금 내가 티아마트 쪽을 감지하려 해도, 별다른 도움이 될 수 있을지는 모른다.

오히려 티아마트를 죽이려 달려들지도 모르지.

하물며, 티아마트가 멋대로 죽는다면 내게도 좋을 일이다.

그런 생각이 솟아나는 건 사실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 한 구석에 무언가 걸리는 듯한 느낌이 드는 건 부정할 수 없었다.

누군가는 양심이라고도 말할 그 감각은, 언제나 그렇지만 상상 이상으로 거슬리는 법이었다.

"야. 잠깐 다녀온다."

"어딜?"

"다른 놈들 지원."

"굳이?"

"만약이란 게 있잖아."

그런 내 변명 비슷한 말에도, 이준구는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하긴,나 스스로도 납득하지 못할 이유 뿐이었으니.

한 쪽은 최승준이요, 다른 한 쪽은 티아마트.

게다가 티아마트가 지닌 분신 능력을 생각하면 오히려 티아마트 쪽은 방치하는 게 정답일지도 모른다.

방치하고, 만에 하나 녀석의 분신을 쓰러뜨리는 놈이 있다면 그 정보를 분석해 요격한다.

현명한 수단을 따지자면 이 쪽이겠지.

때문에, 나로서도 쉬이 무어라 말하기 힘든 분위기 속.

머리를 긁적이고 있던 나를 보며, 이준구는 푸욱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예은이도 힘들겠네."

"엉?"

"못 들은 척 하지 말고. 어쨌든, 알겠어. 네가 지원, 내가 만약을 위한 후방 대기. 맞지?"

"어? 어어, 그래."

도대체 뭐라고 지껄이는 건지.

잠시 내 말에 구시렁거리던 이준구는, 곧 나조차 생각하지 못한 변명을 툭 하니 내놓았다.

하긴, 냉정히 생각하면 이번에 우리들이 상대할 가상의 적은 어디까지나 마신.

설령 최승준이나 티아마트라 해도 쉬이 안심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다.

무엇보다.

일전, 자경단 활동 당시 본 적 있던 그 그림자 인간.

놈에 대해서는 무엇 하나 파악하지 못했으니.

그러니, 어차피 언제든지 챙길 수 있는 후방 문서고 따위는 대충 쓸어담고 다른 쪽을 지원하러 가는 게 보다 건설적이겠지.

까놓고 이준구나 나나 어차피 이런 문서 따위는 봐도 이해할 수 없으니까.

허면, 만에 하나 여태까지 숨어있던 녀석이나 새로운 신세계 질서 조직원이 나타나 문서고를 파기하는 상황을 피하려면 한 명은 대기.

남은 한 명이 지원으로 도는 게 합리적이다.

나조차 설득당할 정도로 완벽한 이론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내 행동도 퍽 합리적인 것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상대가 새로운 마신일지도 모른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준구보단 내 쪽이 낫고.

이런 말은 조금 그렇지만, 이준구는 단순 전투력이야 어쨌든 사냥꾼으로서의 실력은 솔직히 애매한 게 현실.

허면, 처음 보는 마신을 상대하고 공략법을 알아내는 데에는 내 쪽이 오히려 더 제격이리라.

"그래서, 누구 쪽을 도우러 갈 건데?"

"일단 티아마트 쪽."

"……다행이라 해야 할지, 아니면 뭐라고 해야 할지. 아니, 여기서 남정네를 구하러 가겠다는 쪽보단 낫나."

망연히 중얼거리는 이준구의 목소리에 묘한 울적함이 배어든다.

도대체 그건 또 무슨 개소리냐고 묻고 싶었지만, 어쩐지 대답을 들었다간 돌이킬 수 없을 듯한 느낌이 들어 관두기로 했다.

어쨌든.

오싹한 느낌.

혹은, 나를 바라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이준구의 행동을 뒤로하고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다행스럽게도, 내 쪽에서 길을 헤멜 여지는 없었다.

왜냐하면, 마침 시의적절했다고 해야 할지.

저 멀리 벽 너머.

티아마트를 향해 서서히 접근하고 있는 몬스터의 기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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