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1화 〉 사제 관계에도 끝이 있다
* * *
백마 탄 왕자님의 꿈을 꾸기 힘든 시대였다.
아직 사회의 험난함을 몰랐던 어린 시절의 신서아도 그 정도는 알고 있었다.
때문에.
어렸을 적, 신서아는 으레 그리 상상하고는 했다.
'미래에 내 남편이 될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백마 탄 왕자님 대신 현실을 보았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그 상황에서도 당연하다는 듯 행복한 가정을 상상하는 모습이 퍽 아이답다고 해야 하는 걸까.
어느 쪽이든, 어린 신서아가 상상하던 건 비교적 현실적인 삶이었다.
동화 속 공주님과 같은 인생이 아닌, 현실적인 행복.
그런 상상조차 단순한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건 바로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날이었다.
으적, 으적.
사람의 생살을 씹는 소리와 함께 그녀를 바라보던 몬스터의 눈동자가 그녀의 상식에 끝을 고하던 날.
박우찬과 신서아가 만나게 된 건 바로 그 때였다.
임프린팅.
신서아는 자신이 박우찬에게 느끼는 감정을 그렇게 정의했다.
자신의 상식이 산산조각 나던 날.
돌연히 눈 앞에 나타나 어렸을 적 상상한 왕자님보다도 더 동화 같은 모습으로 그녀를 구해준 박우찬.
상식이 멸망한 세계에서, 그 모습은 지독할 정도로 인상적이었다.
아마도 평생토록 기억에 남겠지.
박우찬과 거짓말로 점철된 관계를 이어갈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죄책감이 새겨진 박우찬의 얼굴을 바라보면서도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서아는 알고 있었다.
박우찬에게 있어, 그 날의 만남은 정말로 특별하지 않은 일이리라는 사실을.
어디까지나 지나가듯 해결한 일이었겠지.
오히려 그 실패 쪽이 더 마음에 남았으리라.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박우찬이 그 날 신서아를 돕기 위해 나타난 이유는 단 하나.
마침 가까이에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 때는 제자조차 아니었으니,정말로 지나가던 행인 한 명 구하듯 손을 내밀었을 뿐.
……그 사실에 기쁨이 아닌 불쾌함을 느낀 건 과연 언제부터였을까.
자신에게 있어선 특별하기 그지없던 시간이, 박우찬에게는 단순히 일상의 한 장면에 지나지 않는다.
신서아는 그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애가 탔다. 무언가 짜증도 났다.
물론 적반하장에도 정도가 있겠지만, 공교롭게도 마음이란 합리적으로 움직이지 않는 법이었다.
한 가지 안타까운 점이 있다면, 박우찬의 그런 태도는 단순한 둔감함과는 거리가 있었다는 점이었다.
그 날.
도심 한복판에 초대형 게이트가 발생하고, 그 뒷수습을 위해 열린 파티에서 마신과 마주친 바로 그 날.
신서아는 박우찬에게 자신의 마음을 고백했다.
그리고.
머잖아 대답을 주겠다던 말과 같이, 박우찬은 그녀의 마음에 답했다.
명확한 거절이었다.
현실적인 이유. 감정적인 이유.
어느 쪽이든 납득할 수는 있었지만, 이해하고 싶지는 않았다.
스스로도 믿기 힘들 정도였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자신은 이런 문제에서 냉정하게 대처할 줄 알았기 때문일까.
쿵쿵 하고 뛰는 심장. 울고 싶다는 듯 벅차오르는 눈꼬리.
내달리는 감정의 홍수에 도저히 진정할 수가 없었다.
문제는 박우찬의 태도였다.
그 이후로도 박우찬은 그녀를 마치 평범한 제자처럼 대했기 때문이다.
아니, 그야 어느 정도 자리를 피하긴 했지만.
그조차도 신서아의 반응을 의식했을 뿐.
정작 본인은 별달리 개의치도 않는 듯했다.
당장 이번 일만 해도 마찬가지였다.
제자니까.
박우찬은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신서아는 알고 있었다.
만약 자신이 제자가 아니었더라도.
아니, 설령 상대가 자신이 아닌 비슷한 상황에 처한 일반인이었다 해도 마찬가지였으리라.
박우찬 본인은 얄팍하다 표현하는 선의.
말하자면, 박우찬에게 있어 이번 사건은 딱 그 정도였다.
제자의 목숨이 걸려있는 건 사실이지만, 대응 하나 달라질 거 없는 일.
그런 의미로 생각하면 얄팍하다는 표현이 틀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당장 신서아만 해도 만약 다른 사람이 자신을 그런 식으로 대했다면 노골적인 불쾌함을 토했을 테니까.
허나, 상대는 박우찬이었다.
어쩌면 그 때문일까?
신서아는 이번 일을 두고 단순히 불쾌하다 잘라 말할 수 없었다.
물론 기쁘기도 했지만, 그 이상으로 비참하다 토로했던 마음은 거짓이 아니다.
단지.
반대 또한 마찬가지였다.
비참했지만, 그 이상으로 기쁘다.
동시에, 화가 났다.
알고 있다.
박우찬에게 있어, 그녀는 어디까지나 제자들 중 한 명.
첫 번째 제자에 지나지 않는다.
이번 일만 해도 그렇고.
아니, 어쩌면 더 심할지도 모르지.
애초에 제자인 건 상관 없을 정도니까.
제자는커녕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다른 사람이 상대였다 해도 마찬가지였으리라.
그러나.
'어떡하라고.'
내가 누군가를 받아들이기엔 준비가 부족하다, 애시당초 가정을 꾸릴 수 있을 만한 사람도 아니다…….
그렇게 말한 주제에.
'너무하잖아.'
아직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다.
위기를 앞둔 상황에서 갑자기 나타난 박우찬.
그 시선을 통해 새삼스레 자각한 수치심과 부끄러움, 그리고 그 이상의 안도감.
역시 이 사람은 내가 위험에 처할 때마다 구해주러 오는구나.
신서아는 무심코 그런 생각을 했다.
……그래.
얄팍한 선의.
스스로를 그렇게 폄하한 박우찬의 말을 부정할 생각은 없다.
애시당초 틀린 말이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뒤에 둔 채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는 그 등을 보면서, 신서아는 선망과 동시에 기쁨을 느꼈다.
때문에.
박우찬의 그런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저 모습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보여줘야 한다는 점이.
오로지 내게만 저런 모습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똑같이 대할 거라는 사실이.
그리고.
박우찬은 평소와 다를 바 하나 없는데도 자신만 두근거리고 있다는 게, 무언가 불공평하게 느껴졌다.
하물며.
자신은 이미 그 마음에 응할 수 없다는 뜻을 밝혔다며 뻔뻔스레 다가오는 얼굴엔 더더욱 열이 뻗쳤다.
물론 진심이겠지.
애시당초 그렇게 재주 좋은 사람이 아니니까.
그렇지만.
박우찬이 한 가지 간과한 사실이 있다면, 바로 그 점이겠지.
본인에겐 얄팍한 선의에 지나지 않는 그 행동을 보고 영향을 받는 사람 또한 있기 마련이다.
일찍이 이준구가 그러했고, 다른 학생들이 그러하듯이.
신서아 또한 마찬가지였다.
박우찬이 자신을 위해 그런 행동을 할 때마다 가슴이 뛴다.
말마따나 얄팍한 선의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알고 있는데도, 새삼스레 반해버린다.
그런데도 네 마음은 받아줄 수 없다니.
자신이 그에게 반한 이유는 무엇 하나 변하지 않았건만, 그리 쉽게 납득할 수 있겠는가.
박우찬이 좋다.
함께 보내는 시간이 좋다. 그럴 때마다 은근슬쩍 내비치는 소심함이 좋다.
아주 가끔씩 멋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점도 좋다.
자신의 거짓말에 괴로워하면서도 성실하게 접해주던 모습엔 미안함을 느낀다.
그리고.
속에서 휘몰아치는 이 모든 감정을, 신서아는 구구절절 자신의 입으로 설명하진 않았다.
대신.
마치 열매처럼 영글어 맺힌 수많은 말을 혀끝에 담아, 신서아는 박우찬의 입 너머로 조심스레 밀어 넣었다.
찰나를 잡아당겨 영원이 된 듯한 시간이 이어졌다.
동시에.
'약품 냄새.'
혹시 눈 앞의 사내가 침대에 맴도는 이 냄새를 거슬린다고 생각하지는 않을까.
신서아는 자신도 모르게 조금 소심한 불안감을 품었다.
이윽고, 입술이 떨어진다.
객관적으로는 짧았고, 주관적으로는 달리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농밀했던 시간.
신서아는 무심코 입술을 향해 손을 뻗으려는 자신의 행동을 억누르며, 마치 홀린 듯 그렇게 말했다.
"사부 입장에선, 나는 고작해야 제자들 중 한 명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대답은 없었다.
푹 고개를 숙인 탓에 신서아 또한박우찬의 반응을 짐작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지금 이 말은 반드시 스스로의 입으로 건네고 싶었다.
"나도 마찬가지야."
박우찬에게 있어, 신서아는어디까지나 제자들 중 한 명.
설령 마음을 고백했다 한들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신서아 또한 마찬가지였다.
……내가 누군가를 받아들이기엔 준비가 부족하다, 애시당초 가정을 꾸릴 수 있을 만한 사람도 아니다.
신서아가 박우찬에게 품은 감정은 고작해야 그런 말로 버릴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때문에.
이 시점, 신서아도 마음을 정했다.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다.
박우찬이 자신에게 가르쳐주었듯, 계속해서 기다리리라.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을 때까지.
함정을 쓰고, 상황을 뒤흔들어서라도.
지금 이 입맞춤 또한 마찬가지였다.
설령 박우찬이 자신을 미워하더라도 상관 없다.
아니, 정말로 그런 말을 들으면 울고 싶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감수할 수 있다.
단순한 호의.
혹은, 별다른 감흥 하나 없는 관계보다야 차라리 미움이라도 받는 쪽이 더 가망 있는 법이니까.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성취하기 위해, 신서아는 박우찬에게 미움을 받아도 좋다는 각오를다졌다.
그리고.
마침내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린 신서아는, 무심코 웃음이 나올 뻔했던 걸 간신히 억눌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마치 달관한 듯, 너희의 마음은 받아줄 수 없다고.
일찍이 그렇게 말했던박우찬의 얼굴이, 속절없을 정도로 달아오른 상태였기 때문이다.
단순한 부끄러움 탓이 아니었다.
신서아는 알 수 있었다.
박우찬의 눈이 격렬하게 요동치며 신서아를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헌터라는 직업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가녀린 어깨.
스웨터 너머로 곧게 뻗은 흰 목.
곱게 땋아내린 녹색 머리카락.
우아하게 뻗은 다리.
평소에는 정장 너머로 단단히 감추어져 있던 여성미.
덕분에 박우찬 또한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방금 전, 신서아가 취한 행동은 그토록 폭력적으로 박우찬에게 이해를 때려 박았다.
그러므로, 박우찬은 자신이 여태까지 외면했던 사실을 새삼스레 직시하고 말았다.
오랜만에 만난 그의 제자는, 그가 보기에도 놀라울 만큼 아름다운 모습으로 성장한 상태였다는 걸.
단순한 제자의 일탈.
다른 그 누구도 아닌 자신부터 그렇게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그렇게.
신서아의 선언과 같이, 박우찬과 신서아 사이에 있던 사제 관계에도 모종의 끝이 찾아왔다.
허나.
사실대로 말하자면, 신서아에게 있어선 처음부터 이 관계는 단순한 사제 관계가 아니었으니.
굳이 따지자면, 단순한 사제 관계라고 주장하던 박우찬 또한 그 주장을 물릴 수밖에 없었다는 표현이 정확하리라.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