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0화 〉 첩자
* * *
그렇게.
체육대회는 성황리에 마무리되었다.
주지승이 부린 잔수작은 하연이가 결승전에 오른 시점에서 무용지물이었고.
거기에 추가로 우승까지 했으니 더더욱 손도 못 쓸 지경이었다.
당연히 나에 대한 유언비어도 점차 잦아들기 시작했다.
이걸로 아카데미 쪽은 당분간 잠잠하겠지.
적어도 헛소문을 퍼트려 제 잇속이나 챙기려는 부류들은 몸을 낮출 수밖에 없으리라.
때문에.
"본명을 거론하는 건 서로에게 좋지 않은 일이 될 테니, 교주라고 불러주시길."
체육대회 뒷처리라는 명목으로 갑자기 말도 안 되는 상황에 직면하고 만 지금.
나로서는 욕지거리를 참는 게 고작이었다.
아니, 진짜로.
뭐가 어떻게 되서 이런 상황이 나온 거야, 지금?
나도 모르게 최승준을 향하여 시선을 던지니, 놈 또한 고개를 가로저을 따름이었다.
'야, 설명해.'
'나도 모른다.'
방금 전, 우리 둘 사이에 오간 시선을 해석하자면 대충 이런 뜻이 되겠지.
어느 쪽이든, 실로 갑작스러운 사태였다.
물론 듣기야 했다.
정말로 대략적인 설명 뿐이었지만.
신세계 질서 측에서 망명자가 찾아왔다.
최승준은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사실대로 말하자면, 그 정도 사건은 비교적 흔한 편이었다.
당장 문영석만 해도 그런 부류였으니.
전후가 바뀌긴 했지만, 평소운 박사 또한 마찬가지다.
애초에 우리가 붙잡은 신세계 질서 측 인원만 해도 몇 명이던가.
단지.
'아무리 그래도 이만한 거물이 찾아올 줄은 몰랐는데…….'
……교주.
눈 앞의 남자는 그렇게 자칭했다.
말마따나, 그는 일개 조직의 총수였다.
몬스터 숭배 교단.
일찍이 티아마트를 스토킹했던 김 뭐시기가 몸담았던사상범들의 집단.
사내는 바로 그런 위험 분자들의 우두머리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꽤나 놀랐다.
설마 교단이 신세계 질서 측과 손을 잡고 있었을 줄이야.
물론 신세계 질서의 목적을 고려하면 있을 수 없는 조합은 아니다.
오히려 지나치게 합당한 편이라고 할 수 있겠지.
그러나, 당시 김 뭐시기의 행동에선 신세계 질서 특유의 우악스러움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김 뭐시기가 신세계 질서 소속이었다면 하연이를 납치한 시점에서 도망쳤을 테고.
허면?
신세계 질서가 교단을 포섭한 건 그 이후.
혹은, 교단 중에서도 일부만 신세계 질서와 연줄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 되겠지.
어느 쪽이든, 눈 앞의 사내가 괴물 같은 정치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건 틀림없는 사실이리라.
당장 김 뭐시기만 해도 S랭크에 필적하는 힘을 가지고 있던 와중에, 신세계 질서의 존재도 모르는 듯했고.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까운 이 시대상을 고려하면 실로 희유한 자질이라 할 법했다.
무엇보다, 신세계 질서에 소속된 면면들만 봐도 마찬가지.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 수 있을 유명 정치가.
추가로, 재계에서 명성을 날리고 있는 재벌들.
그런 양반들조차 목숨줄을 붙잡혀 신세계 질서 측에 협력하고 있는 지금 이 상황.
허나, 눈 앞의 남자는 퍽 담담하기 짝이 없는 태도였다.
울분도 없다. 비애도 없다.
하다못해 스스로의 선택이나 배신을 정당화하지도 않는다.
진심으로 몬스터를 숭배하는 미치광이들의 수장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냉정한 모습.
아니, 그야 그렇겠지만.
당장 이준구나 최승준 또한 그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체육대회 당시 외부에 대대적으로 문호를 개방한 건 어느 정도 리스크를 감수한 행동이었다고.
이 쪽의 지반을 다지기 위해 억지로 강행할 필요가 있었을 뿐.
헌데, 그 틈을 타 교단의 교주가 접촉할 줄이야.
……신세계 질서 측과 지나칠 정도로 합치된 목적을 지닌 교단.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단은 여태까지 별다른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았다.
다시 말해, 그만큼 이 남자가 자신의 조직을 확실하게 제어하고 있다는 뜻이다.
하필이면 지금 이 시점 교주를 자칭하는 남자가 나타난 이유 또한 마찬가지였다.
신세계 질서는 점조직.
당연히 내분 또한 있겠지.
것보다, 있다는 걸 확인했으니까 체육대회를 열었던 거고.
허면.
신세계 질서에 속한 다른 조직 입장에서 볼 때, 교단은 어떤 집단일까.
모르긴 몰라도, 유용하다 생각하는 부류 또한 더러 있으리라.
몬스터 숭배.
신세계 질서의 목적을 고려하면 악용하기 딱 좋은 명분이요 목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 앞의 이 남자는 보무도 가볍게 아카데미를 방문했다.
다시 말해, 교단은 신세계 질서가 내분을 거듭하고 있는 지금까지 확실하게 지반을 다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저토록 이간질하기 딱 좋은 입장을 고수하고 있건만.
여기까지만 해도 말이 안 되는 정치력인데…….
'항복이라고?'
아니, 왜?
이런 말은 조금 그렇지만, 신세계 질서의 목적은 교단의 본질과 상당 부분 일치한다.
마신의 존재를 생각하면 교단이 역으로 신세계 질서를 장악하는 일 또한 불가능한 건 아니겠지.
적어도 마왕 측은 그러기를 바랄 테고.
헌데, 항복이라니?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
물론 그런 사례 또한 드문 건 아니다.
다만.
보통 이런 상황에서 조직을 이끌고 있는 건 냉정한 참모 부류.
지나치게 과열된 조직을 제어하기 위해 잇속 빠른 부류가 머리에 올랐을 경우 발생하는 사례다.
하지만.
눈 앞의 남자는 사상가이며, 교단을 창설한 당사자였다.
이런 부류는 마지막까지 자신의 사상에 대한 열정을 버리지 못하는 법.
그런데도 지금 이 시점 항복 운운하는 이야기를 꺼냈다는 건…….
까놓고 말해, 엄청 수상했다.
"어, 솔직히 말하자면 굉장히 당황스러운 게 사실입니다."
"유감스러운 일이로군요."
퍽 의뭉스러운 말투였다.
어쨌든, 내가 할 일은 간단했다.
세세한 교섭 쪽은 최승준이 맡겠지.
나는 사냥꾼으로서이 양반이 가져왔다는 정보만 분석하면 그만이다.
물론 정보의 신빙성에 의문은 붙겠지만,적어도 맨바닥에서 시작하는 쪽보다야 낫겠지.
다만.
"일단 확인차 몇 가지 질문해도 괜찮겠습니까?"
"네, 얼마든지."
"예전에 나랑 따로 차질 빚은 적 있지 않습니까?"
"아, 불행한 사고였지요."
매끄러운 말투였다.
말이야 그렇게 하긴 했지만, 오히려 유감스러운 기색은 일체 느껴지지 않았다.
자신의 손아귀 안에 있었던 무력.
S랭크 헌터라는 초법적인 힘이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개의치 않는 어조.
마치 정말로 안타까운 사고였다고 말하는 듯한 그 어투에, 나 또한 더 이상 추궁할 수 없었다.
"……뭐, 그거야 어쨌든. 항복이라니, 꽤나 의외인데요."
"그렇습니까?"
"예. 미안하지만, 의심스러운 건 사실이라서."
"이해합니다."
"이유를 들을 수 있겠습니까?"
"매국노가 되기는 싫었거든요."
매국노 이 지랄.
퍽 뻔뻔하게 그리 말하는 모습을 보며, 나는 무심코 웃음을 터트리고야 말았다.
다른 건 몰라도, 매국노 이전에 인류를 배신한 것이나 다름없는 사상범 따위가 할 말은 아니었다.
그 이후로도 마찬가지였다.
이리저리 돌면서 찔러도 계속해서 비슷한 대답만 나올 따름이었으니.
뭐, 그래.
쉽게 입을 열 생각은 없다, 그 뜻이겠지.
만약 정말로 교주가 배신을 염두에 두고 있다면, 지금 그가 쥐고 있는 정보는 일종의 목숨줄이라고 할 수 있다.
반대로, 신세계 질서 측의 공작이라 한들 마찬가지.
당장 의심받지는 않을 정도로 연기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정도는 양 쪽 모두 인지하고 있으리라.
이 쪽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쉽사리 거절할 수 없을 뿐이고.
여하간, 단순한 거짓부렁이라 해도신세계 질서의 의도를 추론할 수는 있을 테니까.
허면?
저 쪽이 우리를 위해 준비한 정보, 떡밥은 무엇일까.
어느 쪽이든, 최소한의 신빙성은 있어야 할 터.
그렇다면 못해도 일부는 진실이 담겼을 가능성이 높다.
때문에.
나는 껄렁껄렁한 태도로화두를 재촉했고,곧 교주 또한 가벼운 어투로 입을 열었다.
"얼마 전, 그 쪽과 교전한 마신이 있을 겁니다."
"흠. 틀린 말은 아니긴 한데. 그래서?"
"더 이상 그 마신을 염려할 필요는 없습니다."
"예?"
"죽었으니까요."
그리고.
눈 앞의 사내가 언급한 사실은, 만약 사실이라면 우리에게도 충분히 가치가 있는 정보였다.
마왕의 일곱 권속.
조로아스터 교의 일곱 대악마라 불리는 마신들.
현재 신세계 질서의 새로운 전력을 담당하고 있는 몬스터들이다.
헌데, 그런 놈들이 갑자기 누구 하나 모르는 사이에 뒈져버렸다고?
씨발, 뭐라는 거야?
나도 모르게 어처구니없는 감정을 담아 쳐다보자, 교주는 여전히 태연헌 얼굴로 어깨를 으쓱일 따름이었다.
"이해하고 계실 테지만, 당연히 따로 제시할 수 있는 증거들은 없습니다."
"뭐, 그거야……."
오히려 증거가 있었으면 깜짝 놀랐겠지.
다만, 증거 하나 없이 무작정 믿을 수 있는 이야기도 아니다.
말하자면 저 쪽으로서는 단순한 블러핑 산아 던져볼 수 있는 내용이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에 하나 방금 저 발언이 일개 블러핑에 지나지 않았다면, 충분히 성공적이었노라 평할 수밖에 없으리라.
당장 나로서는 판이 뒤집힌 기분이었으니.
실제로, 눈 앞의 교주 또한 만족스럽다는 듯 슬쩍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거야 원.
초장부터 갑자기 큰 수를 던진다 싶더니만.
아무래도 꽤나 심도 있는 대화가 필요할 듯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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